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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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굴

2022.06.03 조회 25,955 추천 566


 “빌어먹을···”
 
  손에 든 횃불에서 매캐한 연기가 올라와서 그다지 숨쉬기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끌 수도 없는지라 손에 쥐고서 이리저리 비춰보는데 도무지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다.
 
  “소리 죽여. 조금만 크게 말해도 울린다.”
 
  토벽 사이사이로 횃불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크로아의 등 뒤에서 레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사다운 지적이지만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녀도 이 상황이 너무나 짜증스러운 상태였다.
 
  “어이, 길잡이.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이쪽 인거 맞아?”
 
  “어···맞아. 이쪽 방향이야.”
 
  “확실해?”
 
  “···젠장. 모르겠어. 방향은 맞는데···”
 
  길잡이 토룸에게 원정대장이 물었다. 벨라이언은 거대한 덩치를 가진 전사였는데 얼굴 여러 곳에 핏자국이 늘러 붙어있어서 굉장히 험악해 보였다.
 
  그는 자신감 없이 말끝을 흐리는 길잡이를 향해 험악한 인상을 더욱 찌푸리며 윽박 질렀다.
 
  “이 개자식! 3위계 길잡이가 길을 못 찾아? 너 이 새끼 똑바로 찾아보지 못해?”
 
  “아 쫌! 내가 소리 죽이라고 말했니 안 했니?”
 
  벨라이언의 목소리가 슬며시 메아리치며 들리자, 레르가 긴 머리를 출렁이며 짜증 냈다. 벨라이언은 굳이 귀 기울이지 않아도 제 목소리가 메아리쳐서 다시 들려오자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크로아는 벌써 눈치챘다. 저 망할 놈의 길잡이가 우릴 속였다.
 
  3위계 길잡이면 지하에서도 길을 찾아낼 수 있어야 했다. 몇 시간째 토굴을 헤매면서 탈출구를 못 찾아낼 수가 없었다. 토굴은 마치 개미굴마냥 폭이 좁고 복잡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싸우지들 마세요.”
 
  참다 못한 크로아가 벨라이언 뒤를 쫒아 길잡이에게 쌍욕을 하기 직전, 부드럽게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제 안델라였다.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흰색 수행사제복에 흙이 잔뜩 묻어서 거뭇거뭇 해져 있었다. 그녀는 더러워진 사제복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벨라이언과 길잡이 토룸 사이로 한 발 내딛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토룸. 일단 방향은 알겠나요?”
 
  “어···”
 
  길잡이 토룸도 여사제가 나서자 자기 혼자 매우 작게 욕하던 걸 멈추고 깜짝 놀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맞아. 방향은 이쪽이 맞아. 근데 너무 어둡고 복잡해서 길을 찾을 수가 없어···”
 
  “레르. 어떻게 생각해요?”
 
  “후···멍청한 건 둘째 치더라도 정말 믿을 수가 없네. 지하에서 길을 못 찾는 3위계 길잡이라니. 하···좋아. 어찌 됐든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까 잘 들어, 이 토굴은 지하로 쭉 이어진 미로 같은 곳이야. 처음에 내가 말했지?”
 
  마법사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횃불이라 빛이 약해서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듯한 목소리였다.
 
  “벌레곰 들은 사방에 출구를 만들어 놓고 동그란 모양으로 안쪽을 향해 토굴을 파. 정말 다행이지. 여기서 더 재수 없었으면 굶어 죽었든, 벌레곰 먹이가 됐든 했을 거야. 방향 만이라도 알 수 있으면 어느 방향이든 출구에 도달할 수 있어.”
 
  “그럼 토룸이 말한 방향으로만 가면 되는 거네요.”
 
  “맞아. 단지 얼마나 가야 하는 지가 문제인 거야. 길이 마구 꼬여있어서 길을 잘못 찾으면 상당히 돌아가는 수가 있어.”
 
  레르의 말에 안델라가 차분하게 결론 내렸다.
 
  “그럼 어서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벤테르가 없어서 시간을 알 수 없어요. 밤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벤테르의 이름이 나오자 원정대의 분위기가 침잠 해졌다. 그는 궁수였는데,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뒤에서 덮쳐온 벌레곰에게 순식간에 찢겨 죽었다.
 
  “좋아. 빨리 가자구. 이 빌어먹을 곳에는 더 이상 있기가 싫구만.”
 
  벨라이언이 수통을 빼내어 물을 마시고는 입을 닦았다.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푹푹 쉬더니 한명 한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크로아와 토룸이 앞장선다. 중위에 안델라와 레르가 따라붙고, 내가 후미다.”
 
  전사와 길잡이가 선두에 서고 사제와 마법사가 중간에, 전사 한 명이 후미에 서는 배치였다. 전형적인 배치인 것은 맞았지만 선두에 서게 된 크로아는 뭔가 이상했는지 되물었다.
 
  “내가 선두에?”
 
  “그래. 좀 서라면 그냥 서라. 되묻지 말고. 빨리 나가자고.”
 
  전열에 서는 사람은 보통 튼튼한 무장을 갖춘 전사나 곧바로 강력한 선제타격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 서는 게 옳았다. 이 원정대에서 원정대장인 벨라이언이 전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손에 든 흉악한 도끼로 정면에서 머리를 찍어버리는 전사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벨라이언의 생각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토굴이라지만 정면에서 오는 것은 그리 쉽게 당하지 않았다. 다만 횃불에 의지해서 다니고 있어서 토굴의 어두운 부분에 눈에 띄지 않은 구멍이 뚫려있어서 못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잦았다. 궁수 벤테르가 그런데서 튀어나온 벌레곰에게 당한거다. 비명소리도 못 지르고 죽었으니 정말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벨라이언은 뒤에서 벌레곰들이 기습해오면 도끼로 두 조각 낼 심산 이었다.
 
  “알았어. 출발한다. 토룸, 방향을 계속 알려줘.”
 
  크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장검을 고쳐 잡았다. 나무로 두껍게 만들어진 방패는 첫 번째 습격 때 어두운 토굴 어딘가에 떨어트렸고 계속 이동해가며 싸웠기에 찾을 수가 없었다.
 
  토굴은 너무 어두웠다. 이 벌레곰들은 이름 그대로 벌레인지 곰인지도 모를 괴물인데 횃불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활보하는 걸 보면 벌레에 가까운 것 같았다.
 
  오랜 시간 걸어가서 다 타버린 횃불을 교체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았는데 정확히는 아무도 몰랐다. 흘러간 시간을 대략이나마 알 수 있는 궁수가 원정대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나 달이 떠있는 지상이면 모를까 이런 지하 토굴에서는 시간을 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 도구가 있긴 있었지만 가격도 비싸고 소모품이라 돈을 아껴야 하는 작은 원정대에서는 잘 이용하지 않았다.
 
  흙이 소리를 흡수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 토굴은 이름처럼 사방천지가 흙으로 되어있는 주제에 크지는 않아도 일정 소리 이상 내면 멀리서 작게 메아리가 돌아왔다. 어두운 토굴 속에서 들리는 작은 메아리는 너무나 소름 끼쳤다.
 
  길잡이 토룸이 계속 방향을 알려줬지만 미로 같은 토굴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길이 뚫려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덕분에 한참을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기도 하고 길잡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대각선으로 걷게 되기도 했다.
 
  - 퍽! 케엑!
 
  횃불에 의지해 걷다 보면 간혹 가다가 뭐가 박히는 소리와 숨 넘어가는 소리가 진영의 후미에서 들려왔다. 원정대장 벨라이언이 습격하는 낙오자 벌레곰을 도끼로 찍어버린 것 같았다. 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려는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는 게 뒷쪽에서 들렸다.
 
  그렇게 몇 번의 도끼질이 들리던 와중에 크로아는 문득 발을 멈췄다. 정지해버린 선두 탓에 덩달아 멈춰선 후열 쪽에서 벨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멈췄어? 앞에 뭐라도 발견했나?”
 
  크로아는 높이 든 횃불을 좌우로 흔들었다.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신호다. 흔들리는 횃불을 본 원정대는 숨을 죽이고 들고 있는 무기를 곧추 잡았다.
 
  뭔가 있다. 벌레곰? 뭐지?
 
  크로아는 등줄기가 시큰거렸다. 뭐가 들리지도 않는다.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먼 곳에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몇 번씩이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직감을 크로아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있어. 뭔지 몰라도 분명 앞에 있어.
 
  크로아는 옆에 서 있는 길잡이 토룸에게 손짓했다. 토룸은 손동작을 지켜보더니 이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크로아를 바라봤다. 이 멍청한 놈!
 
  “여기.”
 
  등 뒤에서 침착하고 매우 작은 말이 들리더니 불이 붙지 않은 새 횃불 하나가 내밀어졌다. 사제 안델라였다. 그제야 크로아의 손짓이 뭔 소린지 깨달은 토룸은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슬쩍 크로아에게서 떨어졌다. 횃불 들고 있는 사람을 먼저 공격할 게 뻔하니 좀 떨어져 있으려는 속셈이다.
 
  길도 못 찾는게 싸우지도 않을 셈인가? 정말 더럽게 재수 없었지만 꾹 참고 안델라가 준 횃불에 들고 있던 횃불로 불을 붙이고 던질 준비를 했다. 던지기 직전에 뒤를 잠시 돌아보자 자신을 쳐다보는 원정대가 보였다.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고 있는 힘껏 횃불을 던졌다. 빙글빙글 도는 횃불을 따라 빛이 휘돌았다. 길 끝은 코너였는지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졌다.
 
  워낙 빠르게 던져진 횃불이었지만 원정대 중에 보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횃불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토굴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괴물이 있었고, 지금은 괴물보다 더 뒤에 떨어진 횃불에 의해서 음영이 생겨나 오히려 더 잘 보였다.

댓글(25)

우주귀선    
앞으로 기대됩니다. 재밌게 읽고 선작 추천 누르고 갑니다. ^^ 건필하세요!
2022.06.03 22:53
pa****    
ㅊㅊ. 꾹. 즐독하고가요. 즐거운 연휴되세요..
2022.06.03 23:22
th*******    
오호 느낌좋은데요?
2022.06.04 21:12
5월의마법    
와 재밌어요
2022.06.10 00:36
se****    
재밌네요 대박
2022.06.30 12:34
허밍기    
추천글 보고 선추코 했습니다 밥묵고 달립니다
2022.06.30 18:05
노아x    
인물 이름들 이해하기에 약간의 불편함이 글에 재미에 영향을 줄거같은거 조금 아쉽슴다
2022.06.30 21:53
q2***    
이름 이해하는게 빡세긴하네
2022.07.01 06:07
몽중정원    
벌레곰 들은 -> 벌레곰들은
2022.07.01 06:57
묘한인연    
개미굴마냥//개미굴처럼 쫒아//쫓아 진영의//진형 뒷쪽//뒤쪽
2022.07.0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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