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무림 다운로더.

1화. 서버가 터졌다.

2022.06.07 조회 81,541 추천 1,239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아···. 시부레.”
 
 밤새워 서버실 지키는데 카톡 창 지랄 난 거 보니 분명 또 서버 문제가 터졌나 보다.
 아주 잠깐 조는 것도 그냥 놔두질 않지.
 
 “아, 클라이언트.”
 
 업데이트 끝낸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들은 다 퇴근하고 서버실 처박혀 있는 나는 밤샘 근무다.
 욕이 안 나올 수가 있나?
 
 항상 사고 치는 건 클라이언트 쪽 개발자들이고, 똥 치우는 건 왜 매번 나여야만 할까?
 
 ‘이래서 좆소는 안돼.’
 
 그저 컴퓨터와 게임이 좋았다.
 그렇게 살고 공부하다 보니 나는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한창 공부에 열중할 때만 해도 대단한 개발자나 기획자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희망 섞인 공상과는 다르다.
 
 서버실에서 백업이나 하고 온습도나 체크하고 언제 이상이 생길까 전전긍긍하는 임원진 눈치에 퇴근도 못 하는 신세.
 다른 직원들은 뽀송뽀송한 얼굴로 출근할 때 나는 매번 떡지고 커피 얼룩진 옷을 입고 꼬질꼬질한 채로 다녀야 한다.
 
 “그 소설은 왜 봐서.”
 
 그때 그 소설만 안 봤어도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접했던 무협 소설.
 온갖 고생과 시련을 겪는 주인공에 몰입해 끝까지 감동적으로 완독했던 그놈의 소설이 게임화된다고 들었을 때 가슴이 뛰었다.
 
 몇 번이고 정주행했던 최애 소설의 게임화.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았던 소설이었기에 게임화는 상상도 못 했었다.
 하필 그 시기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시기였다.
 
 개발 회사를 검색해 보니 크지 않은 작은 게임 회사였고, 나는 운명을 느끼며 이 회사에 면접을 봤다.
 
 “운명은 지랄.”
 
 그저 서버실에 처박혀 생기를 다 빨리는 것이 업무 전부일 뿐이다.
 
 -까똑! 까똑!
 
 “본다고. 봐.”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자 역시나 톡창이 곱창나 있다.
 
 -염병 어디 쪽 문제냐고?!
 -야! 어디 쪽이냐고?!
 -자냐? 미친놈아!!
 
 이후로도 이어진 발광의 흔적들.
 
 “재수 없는 새끼. 어디 쪽 문제인지 뭐 까 봐야 아냐? 오늘 업데이트했고, 서버 내려갔으면 업데이트한 클라이언트 문제지.”
 
 날아온 오류 캡처들을 살펴보니 역시나다.
 톡으로 해당 캡쳐 메시지들을 보내주자.
 
 -아···. 업데이트에서 뭐가 잘못 된 거지? 일단 되는대로 막고 있어 봐.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팀원들이랑 살필 테니까.
 
 “참 아름다운 놈일세.”
 
 정말 아름다운 새끼가 아닌가.
 제대로 소통도 안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밀어붙여 업데이트했는데 오류 난 걸 나한테 막으란다.
  한두 개여야 막지. 오류 캡처만 몇 갠데 막으라는 건지.
 안 그래도 아픈 눈깔이 빠지도록 방대한 명령어들을 다 살펴보란 말을 참 간단하게도 한다.
 아름다운 십새.
 
 시간을 보니 새벽 1시를 좀 넘기고 있다.
 이 시간까지 안 자는 걸 보면 보나 마나 어디서 여직원들 꼬셔서 한잔 빨고 있는 걸 테지.
 
 “참, 빌어먹을 세상이야.”
 
 대표 혈연으로 낙하산 타고 내려와서 경력도 변변찮은 놈이 월급 빵빵하게 타가고, 팀장 직함 박아 넣고.
 일은 나 같은 박봉을 쥐어 짜서 다 시키고.
 아름답다 못해 찬란한 세상 아닌가?
 
 “벼락이나 떨어져서 서버실 다 박살이나 났으면 좋겠네.”
 
 어차피 별 볼일 없는 가차용 무협 게임.
 원작에 대한 고증도, 대단한 게임성도 없다.
 그냥 뽑기나 실컷 하고 돈이나 물처럼 쏟아붓다가 자동 돌아가는 캐릭터들 보면 썰어버리는 게 전부인 뭣도 없는 게임일 뿐.
 
 천재지변으로 인한 서버 다운.
 그럼 나도 좀 더 잘 수 있을 텐데.
 
 “하아.”
 
 헛된 망상은 이제 접고 진짜 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이 이상 미적거리면 분명 아름다운 팀장님께서 또 갈구실 테니까.
 
 -파지지짓!
 
 “응?”
 
 순간 눈앞에 푸른 스파크가 뱀처럼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스파크가 왜?’
 
 -퍼퍼퍼퍼펑!
 -파지지지지지직!!
 
 순간적으로 눈앞에 불꽃이 튄다 싶은 순간 전신이 바짝 타는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저릿저릿하면서도 뜨거운 통증.
 짧은 순간 느껴진 그 통증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세상이 깜깜해진 이후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정말 벼락이라도 떨어진 거야? 그게 가능은 한 일인가?’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심약한 놈. 살독에 참가 할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었는데 혼절을 하다니.”
 
 -촤아아아악.
 
 “흐어어어!”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지기 무섭게 정신이 들었다.
 
 “응?”
 
 한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서버실에서 감전을 당했다.
 그런데 물에 홀딱 젖어 눈을 떴더니 웬 이상한 코스프레를 한 사내들이 경멸의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이 클리셰는···. 설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못난 놈. 네놈이 참가하는 살독은 우리 집안을 대표해 참가하는 것이니, 못난 꼴은 보이지 않도록 해라. 죽더라도 장렬하게. 구양가의 긍지를 보여야 한다.”
 
 딱 무협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차림을 한 젊은 놈이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주, 죽어?”
 
 -퍽!
 
 “컥!”
 
 다짜고짜 턱을 후려 차는 싹수 없는 자식에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어디서 반말이냐? 하여튼 미천한 것들은. 쯧쯧. 혹시 도망칠지 모르니 잘 감시 하거라. 열흘 후 살독에 참가할 때까지는 적당히 네가 붙어서 기본공 정도는 입문 시켜 놓고. 적어도 구양가의 무늬는 그려 놔야겠지. 자칫 교에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예. 소가주님.”
 
 그 말을 끝으로 시선 한번 안 주고 발길을 돌리는 싹수 없는 놈.
 옆에 서 있던 무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소가주라 부른 걸 보면 내 우려가 맞는 것 같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새로운 세상에서의 사건.
 이 익숙한 클리셰는 이제는 진부할 정도로 흔한 이야기 아닌가?
 
 ‘꿈이다. 이 모든 건 꿈이야.’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다.
 그래서 이런 개꿈을 꾸는 거야.
 
 “으으으···.”
 
 하지만 꿈이라기엔 후려 맞은 턱이 부서질 듯 아팠다.
 머리도 어질어질한 것이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게 진짜 꿈일까?
 
 “일어나시지요. 살독에 참가하기 전까지 익혀 두셔야 할 것이 많습니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칼을 찬 무사는 정중한 말투와는 다르게 우악스러운 손길로 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풀린 다리가 휘청였지만, 무사는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날 내려볼 뿐이었다.
 
 “앞으로 열흘 동안 제가 공자께 구양가의 기본공을 가르치겠습니다.”
 
 무공을 가르쳐 준다 했지만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대체 어쩌다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빌어먹을 곳에 오게 되었는지, 또 살독이란 게 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나 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목숨이 위험한 것 같은데?’
 
 턱밑이 서늘한 것이 목이 간질간질 한 이 느낌.
 뭔가 심하게 좆됐을 때 자주 느껴지는 감각이다.
 
 “...”
 
 지금 여기가 어떤 세상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이라면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그 무엇 하나 확실치 않다.
 
 ‘그런데 죽을지도 모를 위험한 곳에 보내진다고?’
 
 이게 벌이라면 과해도 너무 과한 벌이다.
 평생 딱히 죄를 지은 적도 없고, 사회에 나와서는 아름다운 놈들을 만나 꿈을 대가로 노동력을 빨려온 것이 전부다.
 
 그런데 이 상황은 뭐지? 차라리 라노벨 클리셰처럼 판타지 세상 속 만능캐가 되는 전개도 아니고.
 
 ‘이런 법이 어딨냐고!’
 
 무사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면서도 속으로는 절규를 멈추지 않았다.
 제발 이게 꿈이라면 빨리 깨워 달라며 사정하고 빌었다.
 하지만···.
 
 “아시겠습니까? 소 공자님. 살독에 참가하는 이상 당신이 살아 돌아오는 길은 요원합니다.”
 
 멍해 있던 내 눈이 처음으로 생동감 있게 요동쳤다.
 
 “그, 그게 무슨···.”
 “다른 행사도 아니고 교내의 살독입니다. 자그마치 20년 만에 열리는 살독이고, 교주님께서는 모든 가문의 혈족들도 참가하라 명하셨습니다.”
 “...”
 
 당황한 내 표정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무사는 말을 이어간다.
 
 “신교 내 쟁쟁한 가문의 귀재들이 모두 참가하는 살독에서 구양가의 기본공도 수련하지 못한 얼자인 당신이 살아남을 확률은 없습니다.”
 
 그냥 가서 뒈지라는 거잖아.
 
 ‘죽기 싫다. 뭐 하나 제대로 이뤄 본 적도 없는데, 감전사에 이어 빌어먹을 살독인지 나발인지에 나가서 죽으라니.’
 
 머릿속에서는 본능적으로 도망칠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도망칠 생각 같은 걸 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 당신도 구양가의 일원으로서 그게 불가능하단 건 잘 알고 있을 테니. 괜히 근맥을 잘린 채 살독에 들게 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합니다.”
 
 ‘근맥을···. 자른다?’
 
 이제야 현실 파악이 되기 시작한다.
 사람 목숨을 길가는 개미 새끼 목숨처럼 하찮게 여기고, 미천하다느니 얼자라느니 현대 사회에서는 꺼내기 힘든 단어를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무공이 어쩌고, 교주가 어쩌고.
 
 ‘좆됐다.’
 
 서버실에서의 감전과 이 현상이 대체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지 이런 일이 어떻게 현실에서 가능한지 수많은 가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딴 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지?’
 
 진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그 앞에 모든 의문 따위는 사소한 것이 되어 버렸다.
 전신의 힘이 쭉 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털썩.
 
 주저앉는지도 모르고 바닥에 궁둥이가 닿았다.
 손에 닿은 흙바닥이 들이마시는 지금의 공기가 너무나 생생하다.
 그 감각이 날 더욱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의 기분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무사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나마 당신이 살 수 있는 한 푼의 확률. 그건 살독 입관까지 남은 열흘. 그 안에 구양가의 기본공을 익혀 최소한의 가능성을 품는 것 뿐입니다.”
 
 구양가의 기본공.
 무협 소설이라면 서장만 봐도 완결이 예상될 만큼 읽었다.
 수많은 흐름과 그 클리셰를 모두 꿰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서장과 동시에 주인공이 죽고 끝나는 허무 소설의 이야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낱 같은 동아줄이라도 움켜쥐어야 했다.
 고개를 들어 무사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어갔다.
 
 “알고 있겠지만 살독에는 단 한 명의 승자와 그에게 허락된 단 열 명의 그림자만이 삶을 허락 받습니다. 구양가의 기본공을 익히고 무슨 수를 쓰든 그림자가 되십시오. 철혈 패가, 수라 악가, 암공 사가. 이 세 가문의 참가자 중 반드시 승자가 나올 테니 어떻게든 그들 중 한 명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입니다.”
 
 무사의 말에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생존을 위협 받는 상황 속에서 패닉은 길지 않았고, 살기 위해 두뇌는 최선을 다해 굴러갔다.
 
 ‘정리해 보자.’
 
 살독이라면···. 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그 양반의 소설에서 몇 번인가 언급된 적이 있었다.
 
  분명 독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인 고독에서 따온 무식한 방법이라고.
 온갖 독충과 독물을 때려 붓고, 가둔 다음 그중 단 하나의 살아남은 놈으로 극독을 만드는 고독.
 
 교라고 하는 걸 보면 이곳은 무협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마교쯤 되겠지.
 그리고 인간으로 고독과 똑같은 짓을 벌이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떼로 몰아넣고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살육전을 벌이는 그야말로 미친 짓.
 그것이 살독의 정체다.
 
 그 미친 짓거리에 내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뭐, 그림자가 되면 평생 구양가로는 돌아올 수 없을 테고, 죽을 때까지 주인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하겠지만···. 죽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무사는 그렇게 묻더니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내 앞으로 목검을 던졌다.
 
 “제가 내 드릴 수 있는 시간은 하루 한 시진. 그 뿐입니다. 목검을 드십시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살아야 한다. 일단 무조건 살아야 한다.’
 
 “구양가의 기본공은 아시는 대로 살영극법과 살영권, 살영검법. 이렇게 셋입니다. 그중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것은 살영권과 살영검법입니다. 잘 보고 초식을 익히십시오.”
 
 그는 몇 걸음 물러서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는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체조와 비슷해 보이던 중국 무술 영상과는 다르게 일검, 일검이 마치 진검을 수련하는 무술인들의 영상과 닮아있었다.
 
 검을 휘두르고 찌를 때마다 그 기세가 절로 전해져 와 목검을 든 손이 떨릴 정도였다.
 검법은 정확하진 않았지만 크게 열여섯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 보였다.
 
 “얼마나 기억하십니까?”
 
 한 번의 시연을 끝내고 묻는 무사.
 나는 어설프게 목검을 쥐고 첫 동작을 따라 해 보였다.
 우선은 앞으로 발을 뻗으며 다짜고짜 찌르며 시작되는 동작.
 그다음은 검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 막는 시늉. 그다음은···.
 
 ‘이다음이 뭐였지?’
 
 “그대로 보면서 따라 하십시오.”
 
 무사는 내가 막힌 초식부터 차근차근 다음 식을 알려 주었다.
 마치 어려서 다니던 태권도 학원에서 품새를 익히듯 어설픈 모양새로 무사를 따라 했다.
 
 모든 초식을 다 외우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초식들을 정교하게 익히고 실전에서 사용하고 응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더럽게 오래 걸리겠지.
 
 ‘이게 끝인가?’
 
 모든 초식을 외우고 나자 무사는 자신의 검을 납검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를 보며 시간을 가늠하는 듯 보였다.
 하다못해 동네 태권도장을 가도 어설픈 품새의 자세를 교정해 주는 법인데 무사는 내 어설픈 초식을 교정해 줄 생각이 일도 없어 보였다.
 
 “그 초식을 갈고 닦으십시오. 내일부터는 목검으로 직접 대련을 하며 몸으로 가르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돌아가 버리는 무사.
 
 “빌어먹을···. 아!”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상태창!”
 
 ...
 
 이게 아닌가? 그래, 이렇게 쉬울리 없지.
 
 결국, 해가 떨어질 때까지 외운 초식을 반복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겨우 반나절 정도 연습한다고 나아질 정도로 무공이란 게 쉽다면 세상에 누가 고수가 되지 못할까?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곳곳에 막혀 있는 큰 담장과 담장 위로 보이는 지붕과 전각들.
 그리고 내 뒤로 서 있는 낡고 초라한 작은 집 한 채.
 
 아마도 이곳이 내 처소겠지.
 
 서자라 했으니 대충 이 몸뚱이가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아왔는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집으로 돌아와 먼지 투성인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초라한 침상에 앉았다.
 방 안에 있는 거라고는 작은 식탁 하나와 협탁 그리고 낡은 침상이 전부였다.
 
 잠시 앉아 멍해져 있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 정신을 놓고 있을 틈이 없다.
 무협 게임 회사 서버실, 그리고 감전.
 
 그 결과 어딘지 모를 무림의 세상에 누군지 모르는 아이의 몸에 빙의했다.
 
 ‘나라도 안 믿겠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래도 뭔가 단서를 찾아야 했다.
 
 “어쩌면···.‘
 
 살독이란 단어. 딱히 다른 무협 소설에서는 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그리고 익숙한 세 개의 가문.
 
 -철혈 패가, 수라 악가, 암공 사가.-
 
 어디서 들어봤지?
 
 “아!”
 
 새로운 업데이트가 있기 전에 들어본 기억이 있다.
 
 -새로운 업데이트 세계관이 원작 작가님 소설의 천산편 세계관을 기반으로···.-
 
 천산편 세계관.
 
 천산에 자리 잡았다는 일월신교. 그리고 그 일월신교의 가장 큰 세 가문.
 
 “왜 몰랐지?”
 
 가장 좋아하는 무협 소설이라고 그렇게 떠들었으면서 몰랐다니.
 운명이니 어쩌니, 했으면서 잊고 있었다니.
 
 ‘아니다. 조금 다르다!’
 
 내가 알기로는 천산삼가가 아닌 천산사가다.
 패가, 악가, 사가, 그리고 구양가.
 즉 지금 내가 있는 이 가문까지 합쳐 천산 사가여야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관인 것이다.
 
 근데 이리 다르다는 건.
 
 ‘원작을 입 맛 편한 대로 마음대로 뜯어 고친 개발사 탓인가?’
 
 별 볼일 없는 게임 회사의 별 볼일 없는 모바일 게임.
 원작에 대한 존중도, 세계관도 그저 입맛대로 뜯어 고쳤을 뿐인 게임 덕분에 뭔가 꼬일대로 꼬여버린 세계관.
 즉 내가 떨어진 곳은 그런 세계관인가?
 
 이제야 감이 잡힌다. 이 세상은 내가 다니던 게임 회사의 게임 속 세계관이다.
 
 “진짜 좆됐네.”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세계관의 노른자를 다 빼 먹는 식의 주인공 킹왕짱 노릇도 못해 먹는다.
 
 ‘거기다 하필! 그 작가라니.’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빠져나갈 틈이 없다.
 흔히 다른 무협 소설 속에서는 더러운 정파인들 보다 마교인들이 더 정의로워 보일 때가 있다.
 
 직설적이고 뒤끝 없고, 의리 있고.
 그런 설정을 싫어하진 않는다.
 해서 그런 클리셰를 쓰는 소설들도 자주 읽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그 작가의 소설 속에서 만큼은 다르다.
  이 작가는 주인공 굴리는 걸 극도로 좋아하고 남들이 흔히 쓰는 설정을 비틀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주인공 드리블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주인공 굴리기의 대가인 작가였다.
 그리고 이 작가의 세계관 속 마교도 들이란···. 그냥 광신도다.
 그 말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교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지키지 않는다.
 사람의 도리 따위보다는 교리와 교주의 명령만 듣고 사는 광신도 집단.
 현대의 광신도들과 유사점이 더럽게 많아 무서울 정도의 미친놈들.
 그게 이 세계관 속 마교였다.
 
 “염병할, 하필 떨어져도 이딴 곳에···.”
 
 내가 왜 그 작가를 좋아했을까?
 뭐가 그리 재밌다고 그 글에 미쳤을까?
 이제 와 후회해도 늦었지만 그럼에도 더럽게 후회가 되었다.
 
 결국, 한탄만 쏟아 내다가 낯선 침상에서 잠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자고 일어나면 모든 꿈이 끝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잠들기 전까지도 빌고 또 빌었다.
 
 그날 발 꿈속에서 나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낀 숲 길을 걷고 있었다.
 시야가 확보되지도 않았는데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하고 내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무언가 쫓아 온다는 압박감에 공포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금방이라도 내 등을 누군가 덮쳐 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종일 쫓기는 꿈속에서는 끝내 시뻘건 눈동자를 가진 시커먼 인영에 뒤를 잡히고 말았다.
 
 “잠깐!!!”
 
 버럭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역시나 낯선 주변을 보며 잠에서 깬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빌어먹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아.”
 
 밤새 식은땀을 흘렸는지 침상이 축축했다.
 대충 땀을 닦고 밖으로 나와 목검을 쥐었다.
 
 ‘당장에는 이것밖에 매달릴 곳이 없다.’
 
 아침부터 땀을 흘리며 어제 익힌 초식을 반복했다.
 봐 주는 인간이 없으니 이 초식이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정오쯤 되자 하녀로 보이는 여자와 무사가 내 처소로 왔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 온 하녀는 내게 살짝 고개를 까딱이더니 내 처소로 들어갔다.
 
 “식사부터 하고 나오시죠. 그다음은 한 시진 간 대련입니다.”
 
 무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어제부터 한 끼도 안 먹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처소로 들어서자 하녀는 조촐한 음식을 식탁에 차려 놓았다.
 밥과 볶은 야채, 그리고 무슨 고기인지 모를 볶음 요리하나.
 
 이 큰 장원의 식사 치고는 지나치게 조촐해 보였지만 뭐라도 주니 이걸로 다행이다 싶었다.
 식탁에 앉아 묵묵히 음식을 입에 구겨 넣고 씹어 삼켰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 무사는 내 것과 비슷한 목검 한 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언제든 공격하십시오.”
 
 ‘염병할.’
 
 가르치려면 영혼을 좀 담아서 가르치라고. 빌어먹을 무사 놈아.
 이를 악 다물고 놈에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검을 쭉 뻗었다.
 
 -따악!
 
 “큭!”
 
 놈이 내 목검을 가볍게 쳐내자 손에 쩌릿쩌릿한 통증이 그대로 타고 올라왔다.
 목검을 놓치기 무섭게 놈이 고개를 저었다.
 
 “계속하겠습니다. 검을 놓치지 마십시오.”
 
 ‘시부레. 놓치지 말란다고 안 놓치면 내가 고수지.’
 
 막무가내로 양손으로 검을 잡고 휘둘러 재꼈다.
 
 -후훙! 훙!
 -딱-푹!
 
 “꺼어······.”
 
 내 검을 돌려내고 그대로 명치를 푹 찌른 빌어먹을 무사 새끼.
 숨통이 막히니 절로 허리가 굽고 무릎이 땅에 닿는다.
 얼굴을 흙바닥에 묻고, 숨을 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그런 날 내려다보며 놈이 씨부렸다.
 
 “살영검법에 두 손 파지법 따위는 없습니다. 초식에 없는 꼴사나운 짓은 안됩니다. 같은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이렇게 제재를 가하겠습니다.”
 
 ‘시부레, 그런 건···. 때리기 전에 말해야지.’
 
 겨우 숨통이 트여 숨을 몰아쉬는데 귓가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띵! 다운로더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무사 조사필에게 살영검법을 다운로드 합니다.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작은 창이 떠올랐다.
 
 [살영검법······2% 다운로드 중···]

작가의 말

잘 부탁 드립니다. 


과한 욕설을 조금 순화하여 수정했습니다. 

주인공이 빙의한 세계관이 되는 게임에 대한 언급을 조금 바꿨습니다. 

사실상 거의 바뀐건 없어 다시 읽어도 위화감은 없고 읽지 않아도 내용 파악에 무리는 없습니다. 

댓글(72)

하르르하다    
첫화라서 그런가 화가 나있어 많이͡° ͜ʖ ͡°
2022.06.08 11:48
낭만분홍    
요비님 신작이 있을까.. 싶어 간간히 검색 했었는데 드디어 올라왔네요!! 잘읽겠습니다.
2022.06.17 10:23
뇌정도    
졸자가 너 죽을 거라고 무시하며 시간 낭비하고 있네
2022.06.18 20:58
koreazombi    
내가 왜 그 작가를 좋아했을까가 아니고 왜 여기로 떨어졌을까가 먼저일텐데…
2022.06.20 14:13
메로나조음    
강제 마조행
2022.06.20 15:51
고무래    
요비님 신작네요!! 전작들 다 잼있게 읽어서 기대가 됩니다!
2022.06.20 23:07
그정돈가    
요비님, 선작 알림문자보고 찾아왔습니다. 우선 신작 축하드리고,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이 웹소설이나 각종 클리셰, 무협소설 등에 익숙한 걸로 설정하셨는데, 그런 설정이라면 초반에 일단 '상태창'부터 외치고 시작하는게 국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2.06.21 08:27
요비    
그게 맞네요. 며칠내로 수정하겠습니다.
2022.06.21 09:33
구름여우    
그런 소설을 좋아하다니 주인공 변태네
2022.06.21 10:16
요비    
그런 소설 쓰는 작가라 죄송합니다. ㅠ
2022.06.2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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