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블랙리스트 [노경찬 작가 - 판타지 소설]

블랙리스트 (1)

2022.06.08 조회 133 추천 5


 프롤로그
 
 노인은 신비롭게 소년을 보고 있었다. 아니,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자기보다 두 배는 됨 직한 흑표범들과 놀고 있는 소년. 자신의 손보다 더 큰 송곳니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니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은 궁금했다. 어떻게 소년이 저 흑표범들과 놀 수 있는지가 말이다. 그리고 노인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방법을 알아야 했고, 그래서 자신도 저런 놈들과 놀고 싶었다.
 노인이 댕댕이 덩굴(가시가 없는 덩굴풀의 일종)에서 몸을 뒤척이는 순간, 흑표범들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살기를 뿜어 댔다.
 크아아아아앙―!
 그리고 숲의 지배자다운 포효를 지르며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부우웅.
 노인은 감히 자신에게 달려드는 흑표범에게 가차 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자고로 사람 몰라보는 짐승은 패야 한다.
 캐애애애앵!
 단 한 번의 휘두름에 흑표범은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지며 고통에 찬 울음을 내었다.
 “흑아!”
 내친김에 몇 대 더 때려 주려는데, 소년이 그의 앞을 막았다.
 “제 친구들이에요. 때리지 마세요.”
 “친구?”
 노인이 두 마리 흑표범을 번갈아 보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흑표범들에게 달려갔다.
 끄으으으응.
 바닥을 뒹굴며 애처로운 신음을 흘리던 흑표범은, 소년이 다가오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인을 노려보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노인은 흑표범의 행동에 놀랐다. 웬만한 고수들도 그의 지팡이 한 대면 그대로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런 자신의 일격을 맞고도 미물 따위가 소년을 지키려 일어선 것이다.
 “표범이 친구라니! 믿기지가 않아. 내 저놈의 가죽을 벗겨서 써야겠다.”
 노인의 엄포에, 소년은 필사적으로 두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안 돼요! 이 애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아요. 그렇게 교육시켰어요.”
 “교육?”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작은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놈들이 요만할 때 내가 구해 준 애들이란 말이에요.”
 노인은 그제야 어떻게 소년이 흑표범들과 친한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사람보단 동물이 은혜를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이놈들하고 이야기도 하는 것 같던데?”
 “저도 알아듣지는 못해요. 다만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울음소리나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거예요.”
 “주의 깊게 보면 알 수 있어?”
 “당연하죠. 어떤 것이든,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게 많아요. 개미가 집을 옮기거나 작은 산새들이 이상하게 낮게 난다 싶으면 비가 오는 날이고, 매미가 울거나 거미들이 거미줄을 치면 비가 그치는 것처럼요.”
 소년의 말을 신기한 듯 듣던 노인이 물었다.
 “다른 것도 많단 말이지?”
 “네.”
 소년의 대답에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누군가 나를 클라우드 클레인이라고 하더구나. 네 이름은 뭐냐?”
 “저는 레이지에요.”
 “그래, 레이지. 내가 제안 하나 하마.”
 “무슨?”
 소년이 어리둥절해하자 노인은 손을 내밀었다.
 “거래. 너는 나에게 그 보는 법을 가르쳐 줘. 나는 나대로 좋은 걸 가르쳐 주마.”
 노인의 손을 잡으면서도, 소년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기대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짐.
 
 고작 백여 가구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 공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소년 하나가 밝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라면 가능할 것이다.”
 “아무렴. 레이지는 천재라고.”
 “꼭 성공해라. 우리 마을에서 기사가 탄생하면, 그보다 경사가 어디 있을까?”
 “우리 마을이 항시 이 모양인 이유는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지 않아서지.”
 마을 사람들은 레이지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열 살 때부터 스스로 공부하여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셈에도 밝아 촌장의 보좌 노릇도 했다. 또 기골이 장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힘이 좋아, 열세 살 때부터 이미 건장한 청년의 몫을 해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마을 사람들이 돌보아 키워서인지 예의도 매우 바른 아이였다. 한창 바쁜 시기에는 누가 말하기도 전에 다른 집의 농사일을 도왔고, 천성이 쾌활하여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또 어디서 검을 배웠는지는 몰라도 매일 목검을 가지고 수련을 했는데, 곁에서 보면 그 휘두르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그의 나이 열다섯.
 마을 사람들은 회의 끝에 레이지를 왕국의 수도 베네스로 보내기로 했다.
 베네스에는 기사 아카데미로 유명한 폴 란데 에베네우스가 있다. 평민이 기사가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폴 란데 에베네우스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것.
 레이지가 기사가 된다면 마을의 형편이 나아지기에, 사람들은 갹출해서 유학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드디어 레이지를 떠나보내는 날이 된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레이지는 다짐하듯이 외쳤다.
 “당연한 소리지. 꼭 성공해서 돌아오라고.”
 “기사가 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흐뭇한 미소로 배웅하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레이지는 두 손을 흔들며 마을을 나왔다.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야 레이지는 억지로 짓던 미소를 풀 수 있었다. 앞에서는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기대는 어린 레이지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 부담이 자신에게 큰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었다. 고아인 그를 공동으로 키워 준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열심히 해야지. 그 수밖에는 없잖아.”
 레이지는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아카데미에서 레이지는 매일같이 전신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수련했고, 습관적으로 코피를 흘릴 정도로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1등을 해 보지 못했다.
 크로노아 왕국의 자랑이라는 폴 란데 에베네우스는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아카데미 고위층 인사들이 보기에, 레이지는 돈도 없고 줄도 없는 그저 그런 시골 촌뜨기일 뿐이었다. 그의 실력이 다른 귀족 수련생들에 비교해서 압도적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5등 안에 드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힘든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많은 귀족 자제들의 눈치와 멸시가 레이지를 향해 쏟아졌다.
 아카데미 상위 열 명은 대부분 귀족들의 자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서 개인 교습을 받은 데다 생계에 걱정도 없고 조금이라도 다치면 즉각적으로 치료받으며 살아온 이들. 일반적으로 평민 수련생들이 그들을 따라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레이지는 당당하게 상위 다섯 명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귀족 자제들의 눈에는 그것이 거슬렸다.
 상위 열 명 내에 들면 웬만한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고, 상위 다섯 명 내라면 왕국 내의 유명한 라이언 기사단과 레인보우 기사단에서 견습 기사로 스카우트를 해 간다.
 대부분의 귀족 자제들은 가문의 기사단이 따로 있어도, 그런 기사단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출세가 보장된 자리를 마다할 사람이 없었다.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자리는 다섯뿐. 그중 하나를 평민이 차지하고 있으니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레이지는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심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각오는 하고 온 터였다. 마을 사람들 수백 명의 기대를 고작 이따위 것 때문에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후웁!”
 레이지는 검을 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 한 방울이 눈 위를 덮었지만, 레이지는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온 정신을 검 끝에 모았다.
 ―하면 할수록 힘들어. 하지만 그 힘겨움이 네 실력의 잣대가 돼. 그러니 열심히 해야 해.
 단 보름 동안 같이 지냈던 노인의 말이 생각났다.
 처음 배울 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노인이 가르쳐 주는 대로 굵은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나면, 전신이 말할 수 없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때부터 하루도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
 ―검을 들든 도끼를 들든,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문제는 그걸 어떻게 휘두르느냐 하는 거지.
 아카데미에서는 기본적으로 검을 배우기 때문에 목검으로 수련했지만, 마을에서는 나뭇가지며 도끼며 가리지 않았었다.
 레이지는 아카데미에 와서야 그때 그 노인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의 선생들은 그에 비하면 솔개 앞의 병아리일 뿐이다. 덕분에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것은 레이지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기본기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수련을 하면 할수록 역시 자신의 진정한 스승은 그때 그 노인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레이지였다.
 “얍!”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내리 휘두르자,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아니야.’
 레이지는 파공음을 들으며 검을 거두었다. 그에게 배움을 주던 노인의 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검의 속도가 빠르다거나 느리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레이지, 잘 들어라. 무기를 휘두를 때 소리가 나면, 그건 제대로 휘두른 게 아니야. 사람들은 빨리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소리가 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때 노인이 보여 줬던 검은 절대 느리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빠른 검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 휘둘렀던 9년 전보다 검의 속도도 빨라지고 소리도 많이 죽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다른 사람이 휘두르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것인가?’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
 레이지는 다시 한 번 열을 내며 검을 고쳐 잡았다.
 “레이지.”
 한참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어플리가 수련장에 들어오며 그를 불렀다.
 어플리 린 덱스트린.
 덱스트린 공작가의 차남으로, 장남인 형을 제치고 후계자로 언급될 정도로 출중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형제간의 우애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권력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가문의 후계자 다툼에는 상관하지 않고 스스로를 갈고닦는 데에만 전념하는 성격이었다.
 아카데미에 있는 그 누구보다 신분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았기에, 레이지가 인정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왔구나.”
 어플리는 레이지의 손에 든 검을 힐끔 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독하군. 잠을 자기는 하는 거냐?”
 “네 시간은.”
 “많이 자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그렇게 묻는 넌?”
 “너와 똑같다.”
 둘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둘 모두 노력하는 인간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신분뿐.
 “데레티 자식이 또 시비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플리의 말에 레이지는 인상을 찡그렸다.
 데레티는 아텐 백작가의 장남으로, 가히 아카데미 최고의 망나니라 할 만했다. 가진 바 실력도 형편없으면서,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이가 자신보다 뛰어나면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레이지를 비롯하여 상위 열 명에 드는 다른 두 명의 평민 수련생을 가장 악독하게 괴롭히는 놈이었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정식으로 견습 기사가 되면 지금처럼은 못 하겠지.”
 “레이지, 가끔씩 네가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난 그렇게 말하는 네가 더 무섭다. 네 신분으로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플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데레티 같은 놈들 때문에 나까지 이상한 놈이 되는군. 사실 아카데미에서는 신분의 차이는 따지지 않는다는 학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빛 좋은 개살구지.”
 레이지의 대답에서 불만이 느껴졌다. 선생들부터 차별하고 있으니 불만이 없을 리가 없었다. 어플리도 그것을 느꼈는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너의 불만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너와 진짜로 붙어 본 적은 없지. 그래서 네가 우리 중에서 최강이라는 건 인정하지 못하겠군.”
 아카데미 4년 동안 레이지와 어플리는 단 한 번도 대련을 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 어플리가 레이지에게 패하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1등인 어플리가 패해 버린다면, 아무리 낯이 두꺼운 선생들이라도 더 이상 레이지의 성적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번 고의적으로 어플리가 레이지와 만나지 못하게 손을 써 왔다.
 “언젠가는 붙을 수 있겠지.”
 “이번에 있을 마지막 시험에서는 어떻게든 너와 대련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 그때를 위해 열심히 연습하도록.”
 할 말을 모두 한 어플리는, 레이지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휙! 몸을 돌렸다.
 “훗!”
 레이지는 어플리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쁜 뜻은 아니었다.
 그와의 관계가 친구인지 아니면 단순히 라이벌인지 정확하지 않아서일 뿐.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