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 이름은 알렉스(Alex), 킬러다.
외국인이냐고?
아니다. 이름만 이국적이다. 알렉스는 본명을 감추기 위한 닉네임이며 암호명이다.
암호명 알렉스의 알파벳 ‘A’는 에이스(Ace)를 뜻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B’로 시작하는 암호명은 B급, ‘C’로 시작하면 그야말로 C급 킬러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난 A급 킬러로서 많은 일들을 해 왔다.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그리고 일반인들 할 것 없이 수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다. 전쟁터나 다를 바 없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그렇다. 나 역시 생존을 위해서 사람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조직은 심지어 내게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이라고 명령했다.
변명 따위 하지 않겠다. 사실은 사실이었으니까.
죄 있는 자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이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들기 시작할 무렵, 난 서른다섯 살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짓을 만 15년째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또 하나의 미션이 주어졌다.
또 한 명의 사람을 죽이라는 것.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임무를 마친 그다음 날, 각 신문의 1면을 장식한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았다.
‘매스컴과 검찰의 압박에 못 이겨 끝내 자취를 감추고 만 기업인 H씨의 실종!’
‘H씨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의 유서만이 남겨지다!’
‘실종인가, 자살인가, 타살인가? 기업인 H씨의 수상한 행적!’
그로부터 1주일 정도가 지난 후, 국장의 뜻깊은 배려 덕분에 나는 조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은퇴라고 봐야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지난 15년간 해 왔던 그 일을 접고 이제부터라도 평범하게 살아 보기 위해서였다.
부활한 킬러가 악인을 때려잡음 001화
약 3년 후.
전직 킬러였던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어업이다. 은퇴 자금을 가지고 그 어떤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작은 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다음 집 한 채와 어선 한 척을 샀다. 그리고 남은 은퇴 자금을 거의 올인하다시피 해서 가두리 양식장을 차렸다.
그사이 내 삶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결혼을 해 아내가 있었고, 아들과 딸이 생겼다.
그렇게 난 평범하게 살아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 왔다. 그리고 단란한 가족을 꾸린 현재의 내 모습을 보며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에 본 적 없던 역대급 태풍이 이 섬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가두리 양식장은 박살이 났으며, 나의 소중한 우럭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 보기 위해 노력한 결과, 나는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다.
“명색이 A급 킬러였던 내가 꼴이 말이 아니군. 이렇게 태풍한테 지게 되다니 말이야. 역시 인간은 이 대자연 앞에선 항상 겸손해져야 할 필요가 있어.”
이는 은퇴 후 평온하기만 했던 내 삶에 처음으로 시련이 닥친 것과 마찬가지였다.
* * *
오늘도 난 새로 차린 가두리 양식장에서 나의 소중한 우럭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중이었다. 내게는 이것이 바로 평범한 일상이자 일터였다.
문득 저쪽에서 작은 배 한 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섬이 좁기 때문에 누구의 배인지는 한눈에 봐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알렉스, 오랜만이야?”
“뭐여, 이 양반. 이 친구 이름은 김만철인디. 아까는 분명히 김만철이라고 했자녀?”
그렇다. 지금의 내 이름은 김만철이다. 원래 이름은 최석이었지만, 은퇴할 때 새로운 이름으로 신분 세탁을 했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알렉스는 그냥 저희들끼리 부르는 일종의 애칭 같은 겁니다. 이따가 전화 드릴 테니 이제 그만 가 보셔도 됩니다, 선장님.”
무언가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선장에게 내가 시선을 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따가 전화 드리면 그때 다시 데리러 와주세요.”
“알겠구먼. 그럼 난 이만 가 볼랑께 수고들 하셔잉.”
배가 저만치 멀어지고 나서야 국장이 다시금 입술을 뗐다.
“알렉스 자네 찾느라 내가 고생 좀 했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까지 다 찾아오시고. 국장님과의 인연은 3년 전에 이미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 * *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가두리 양식장. 한쪽엔 그늘을 피할 수 있는 창고 겸 작은 쉼터 하나가 있다.
국장과 나는 이 쉼터 안에 들어와 믹스커피를 나눠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몇 모금 홀짝거리던 국장이 긴 침묵 끝에 말문을 열었다.
“필리핀에 말이야······.”
“······.”
“웃긴 놈들 다섯이 거기로 도망을 쳤네.”
나는 ‘그 웃긴 놈들 다섯’에 대해 묻지 않았다. 굳이 내가 묻지 않더라도 잠시 기다리면 국장이 술술 브리핑을 해 줄 터.
해서 난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근데 말이야. 문제가 좀 생겼어.”
“······.”
“우리 쪽 차기 대권 주자 1호가 보라카이에서 납치를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네.”
국장은 종이컵에 든 믹스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러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연이어 말을 내뱉었다.
“젊은 여자들이랑 그곳에서 밀회를 즐겼다는군. 허허.”
여자 한 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국장이 ‘여자들’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말이다.
막장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르는 정치인이 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 그런 데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득실거리는 보라카이에서 밀회까지 즐기셨다?
“일이 꼬이려니 말이지. 그 젊은 여자들 중의 한 명이 필리핀으로 도망간 그 웃긴 놈들 다섯과 한패라는 거지.”
“그래서요?”
대충 내용을 파악한 나는 넌지시 한마디로 반응했다.
그러자 국장이 실소를 터뜨리며 내게 반문했다.
“허허, 그래서라니? 이 사람 그새 감을 잃은 건가? 이번 일을 해결해 줄 적임자는 알렉스 자네밖에 없다는 뜻일세. 전에도 1호 관련 일들을 줄곧 처리해 오지 않았는가?”
“······.”
“그 웃긴 놈들 다섯은 물론 그들과 얽혀 있는 그 여자를 제거해 주게.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해 준다면 내 알렉스 자네를 만나는 일 따위 두 번 다신 없을걸세. 그리고 말일세······.”
세상엔 서로 얼굴을 봐야지만 더 좋아지게 되는 사이가 있다. 반면에 서로 보지 않고 만나지 않아야 더 이로운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국장과 나의 경우가 꼭 그렇다.
국장은 그 말과 함께 아까 배에서 내릴 때부터 애지중지 여긴 007가방을 탁자 위에 떡하니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그 안의 내용물을 내게 직접 확인시켜 주었다.
5만 원 권으로 빼곡히 차 있는 돈다발이었다.
이 정도의 금액이면 빚진 것을 모두 갚아 버리고도 남는 충분한 돈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국장이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단지 착수금일 뿐이라네. 일을 마치고 나면 이것과 똑같은 사이즈의 가방 두 개가 더 자네한테로 가게 될 걸세. 어떤가? 해 볼 만하지 않은가, 알렉스?”
“······.”
국장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가두리 양식장 따위 개나 줘 버려도 상관없을 터였다. 거기다 그 돈이면 우리 가족이 평생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실컷 놀고먹으면서 지낼 수도 있다.
허나, 설령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번 떠나온 길이었다. 가두리 양식장이 태풍에 휩쓸려가지만 않았더라면, 또 그로 인해 큰 빚을 지게 되지 않았더라면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가방 안에 든 돈뭉치와 국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제야 대답했다.
“저한테 하루 이틀 정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좀 주십시오, 국장님.”
“그래, 알겠네. 이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 만큼 고민이 될 법도 하겠지.”
국장은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나를 이해한다는 투로 반응했다. 그러고는 아까 그 선장에게 데리러 오라는 전화를 걸었다.
간단히 통화를 마친 국장이 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못 하겠다면 어쩔 수 없네만, 그래도 이번이 진짜 마지막 임무인 셈이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해 주게나. 그리고 이 돈은 다시 가져가기가 귀찮기도 하니 결정 내릴 때까지만 잠시 맡아 주게.”
돈 가방은 확실한 미끼였고, 그 미끼를 내게 던져 준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가방 그리고 돈뭉치. 이것이 내 가족과 나에게 약이 되어 줄지 아니면 독이 되어 줄지 아직은 잘 모르는 일이었다.
* * *
그날 밤.
나는 여느 때처럼 침대 위에서 아내와 달콤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담배 한 대를 꼬나물었다.
문득 난 티브이 옆 선반 쪽에 눈길을 주었다.
현역 시절 해외 임무가 주어질 때마다 나 자신에게 안녕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현지의 잡상인들로부터 하나둘씩 기념품을 샀었다.
선반 위에는 여태껏 모아 온 그 해외 기념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내가 1주일 정도 육지에 좀 다녀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 없이 괜찮겠어?”
“아니 여보, 갑자기요? 근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1주일씩이나요?”
“아직 확정은 아닌데, 가두리 양식장이 지난번 태풍에 휩쓸려 날아가 버린 것도 그렇고, 이참에 다른 일도 좀 알아볼까 싶어서 말이지.”
“다른 일이요? 그럼 가두리는 누가 돌보구요?”
“그거야 뭐 사람 한두 명 쓰면 될 일이고.”
아내는 구체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또 이는 어쩌면 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언제 봐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내였다. 그런 여자를 여기 놔두고 육지가 아닌 필리핀에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참 복잡 미묘해지고 있었다.
이내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지만, 난 아직도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루만 더 생각해 볼 참이었다.
그렇게 이틀째가 되던 날, 나는 마침내 마음을 먹고야 말았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임무를 수행하기로.
‘가방 안 지폐 다발 밑에 쪽지와 핸드폰이 있다네. 결심이 서거든 그 핸드폰으로 연락 주게나.’
나는 국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즉시 난 가방 안을 살펴보았다.
쪽지를 펼쳐 보니 연락처 두 개가 적혀 있었다. 하나는 국장의 또 다른 번호인 듯했고, 다른 하나는 제시카(Jessica)라고 적혀 있었다. 숫자가 다소 긴 걸로 봐선 국제 전화번호인 것 같았다.
일단 나는 가방 안에 들어 있던 핸드폰으로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 상대 쪽 음성이 들려 왔다.
“오, 알렉스. 이제야 결정을 내린 모양이구만. 그래, 긍정적인 소식인가?”
“네, 그렇습니다. 근데 이번 임무가 끝나면 돈 가방 두 개가 더 저한테 오는 게 확실합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나? 내가 어디 허튼소리나 할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이번 일 맡겠습니다.”
“결정 잘했네. 역시 알렉스야. 이 바닥 최고의 실력자가 바로 자네 아닌가. 허허.”
국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거기 쪽지에 적혀 있는 제시카 폰 번호로 연락 한번 해 보게. 잘 설명해 줄걸세.”
“네, 국장님.”
A부터 J까지 총 열 단계로 이루어진 등급. 제시카의 J는 그중 맨 마지막 등급인 해외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요원을 뜻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국장의 목소리가 또 이어졌다.
“그리고 필리핀에 들어가거든 나한테 따로 연락 줄 필요는 없네. 제시카를 통해서 보고받을 참이니까 말일세.”
“알겠습니다.”
국장과 간단히 통화를 마친 후, 나는 곧바로 제시카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 * *
필리핀 막탄 세부 국제공항.
제시카의 슈퍼 카에 올라탄 나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차 안에서 그녀는 ‘웃긴 놈들 다섯’에 관해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내가 필리핀에 오기 전 제시카가 미리 이메일로 보내온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다섯 놈들의 현재 위치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놈들의 위치까지 세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다섯 명 중 두 명이 마침 그 호텔에 머무르고 있어요. 알렉스 씨 룸 매트릭스 밑을 보면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뒀으니까 그다음은 알아서 하시면 돼요.”
내가 곧장 보라카이로 가지 않고 세부에 먼저 들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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