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돈많고 잘생겼는데 연기도 잘함

1화. 재능 없는 톱스타.

2022.09.01 조회 56,971 추천 748


 탁 트인 창 너머로, 한강뷰가 보이는 반포구의 널찍한 고급 아파트.
 
 호화스러운 침실과 더불어 온갖 명품 옷과 시계들이 즐비한 드레스 룸은 물론, 게임 방과 운동 방, 거기에 게스트룸까지 갖춰진 내 보금자리였다.
 
 이제 막 30대가 된 나 같은 싱글남이 살기엔 너무나도 과분한 환경.
 
 그리고 난 내 트레이너 정명준을 집으로 불러 개인 PT를 받으며, 열심히 땀을 흘리던 중이었다.
 
 “무릎은 90도. 오케이. 유지한 상태에서 천천히 늘려주시고~ 하나. 둘! 하나. 둘!”
 
 나 같은 연예인에겐 신체 스펙도 곧 재산이었기에, 아무리 스케줄이 바빠도 최소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정명준을 불러 운동을 하는 게 내 루틴 중 하나였다.
 
 “그럼 슬슬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민우 형. 오늘 컨디션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가? 요새 복근도 좀 희미해진 것 같은데, 제대로 조져야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하루였다.
 
 “오케이. 땀 제대로 빼줄 테니까 각오하라고. 형. 준비됐어?”
 
 “어.”
 
 그런데 경쾌하게 답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가슴이 떨려오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흐읍···!”
 
 뒤이어 메쓰거움과 함께 불쾌한 현기증이 덮치고,
 
 손발이 떨리는 동시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후우···. 후우···.”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정명준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민우 형! 괜찮아?”
 
 빌어먹을 공황.
 
 예전엔 사람 많은 곳에서나 가끔 찾아왔었는데, 요샌 집구석에서도 이 지랄이다.
 
 “119 불러? 아니면 매니저 형이라도 불러줘? 와씨. 식은땀 나는 것 좀 봐.”
 
 난 그런 정명준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는 의미로 두 손을 휘휘 저은 뒤, 선반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후우···. 후우···. 그냥 약이나 갖다 줘.”
 
 그렇게 그가 가져다주는 약을 부리나케 삼킨 뒤 호흡을 진정시키기를 거의 10분째.
 
 정명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해왔다.
 
 “오늘은 이쯤 해야겠는데? 운동도 좋지만, 일단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
 
 “휴우. 몹쓸 꼴 보여서 미안하다.”
 
 뒤이어 온갖 약봉지로 가득 찬 선반을 가리키며 물어오는 정명준.
 
 “그런데, 뭔 이렇게 약을 많이 먹어?”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는 와중에도, 또 친절하게 하나씩 설명해주는 나.
 
 “길쭉한 건 항우울제, 노란 건 사회공포증약, 후우···. 그리고 동그란 건 수면제. 또 퍼런 건 가끔 증상 심해질 때만 먹는 건데···.”
 
 “와. 이 정도면 일상생활 가능해? 이렇게 약을 쏟아부으면 너무 몽롱하지 않나? 부작용도 심할 테고.”
 
 연예인들이야 정신과 약 하나씩 달고 사는 건 일상이었지만, 확실히 최근 내 상태는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병원 선생님께서도 약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볼 것을 추천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케줄 뛰려면 별수 없다. 약 없이 맨정신으론 절대 못 나가.”
 
 게다가 약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또다시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충동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정명준은 그저 안쓰럽다는 듯 조용히 끄덕이다,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형. 참 안타깝긴 한데···.”
 
 “안타깝긴 한데, 뭐?”
 
 “솔직히, 도대체 난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 형 인생. 그야말로 부러울 것 없는 삶이잖아? 돈 잘 벌어. 노후 걱정도 없어.”
 
 “...”
 
 “이 집만 해도, 대출 하나 안 끼고 샀다며? 거기에 그 많은 팬한테 넘치는 사랑도 받고. 전역도 했으니 이제 군 문제도 해결됐고.”
 
 정명준이 내뱉는 말들은 모두 객관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에 공감할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남들 눈엔 그저 화려하고 해피한 삶으로 보일 테지.’
 
 그랬기에 이렇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도 내가 더 외롭고 힘든 건지도 몰랐다.
 
 한편 정명준은 새삼스럽게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선,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뭣보다···. 내가 형 얼굴로 태어났었다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
 
 잠시간 안정을 취한 뒤 공황발작 증세가 어느 정도 진정된 탓에, 난 진땀을 흘리면서도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래. 내가 좀 생기긴 했지.”
 
 “와씨. 형. 방금 존나 재수 없었던 거 알어?”
 
 내 인생에 주어진 유일한 무기.
 
 그건 바로 천 명한테 물어보면 천 명이 모두 잘 생겼다고 대답할 압도적인 외모였다.
 
 조막만 한 얼굴에 자기주장이 확실한 오똑한 코. 그리고 185cm라는 신장과 떡 벌어진 어깨 덕에 적당히 남성미도 자랑하는 한편,
 
 연한 속쌍꺼풀과 기분 좋게 살짝 올라간 입꼬리 덕에 지나치게 느끼하지도 않은 얼굴.
 
 한마디로 호불호가 거의 갈리지 않는 3세대 아이돌 대표 비주얼. 그게 바로 나 강민우에게 늘 달라붙던 꼬리표였다.
 
 “솔직히 말해봐. 형. 옛날에 한창 그룹 활동 활발히 할 때, 걸그룹 애들하고도 사귄 적 있지?”
 
 “흠···. 한 세 번? 썸까지 합치면 네 번?”
 
 “그럴 줄 알았다! 와씨···. 부러우면 지는 건데.”
 
 “다 옛날얘기지 뭐. 항상 서로 바빠서 오래는 못 갔다. 사귄다고 해 봐야 한 달에 두어 번이나 봤었던가···?”
 
 “도대체 아이돌 커플들. 어디서들 눈맞는 거야?”
 
 “다양하지. 음악방송 대기실에서 인사할 때 서로 안면 트기도 하고, 명절특집 운동 예능 같은 곳에서 무한대기할 때도···.”
 
 그렇게 정명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문득 옛날 생각이 스쳤다.
 
 ‘한창 그룹 활동할 땐, 지금보다 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도 멘탈은 훨씬 괜찮았는데.’
 
 19살의 나이에 6인조 보이그룹. ‘J-DOT’의 메인 비주얼 멤버로서 처음 연예계에 입성했었던 나.
 
 음악방송 1위도 여러 번 달성해보고, 해외 투어도 성공적으로 돌았던 J-DOT은 1군 그룹으로서 충분히 거대한 성공을 거둔 팀이었다.
 
 [J-DOT. 2016 MSMF 올해의 노래 수상!]
 
 [6인 6색의 매력. J-DOT이 일본을 뒤흔든 비결은?]
 
 [이번엔 남미다! J-DOT.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 각각 성공적으로 공연 마무리!]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수많은 팬이 우릴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고, 전 세계를 누비며 돈을 쓸어 담던 나날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그룹의 폭발적인 성장에 내가 기여했던 바는 별로 없었다.
 
 난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정명준에게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난 그냥 다른 멤버들 버스 탔던 거지. 제대로 꿀 빨면서.”
 
 그런 내게 정명준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대꾸했다.
 
 “버스? 뭔 소리야? J-DOT 메인 비주얼이 누구였는데? 물론 여섯 멤버 다 각자 개성 넘치게 잘 생기긴 했지만···. 확실히 형 포스가 압도적이긴 했잖아?”
 
 물론 그룹 초창기에는 내 외모에 빠져 덕질을 시작한 팬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J-DOT이 커리어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점점 내 존재감은 희미해져 갔다.
 
 “나. 팬덤 내에서 별로 인기 없었다. 대중들 사이에서나 얼굴마담으로 유명했던 거지.”
 
 실제로 개인 굿즈 판매량을 봤을 때 J-DOT 팬덤 안에서 내 인기 서열은 만년 5위에서 6위를 왔다 갔다 하곤 했다.
 
 정명준은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신기하네. 원래 그 바닥은 잘생기면 장땡 아냐? 난 당연히 형이 J-DOT 인기 1위인 줄.”
 
 하지만 보이그룹 멤버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외모만이 아니었다.
 
 난 J-DOT의 팬들에게 차근차근 성장하는 서사를 보여주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유사연애의 대상으로서 훌륭한 팬서비스를 하는 데도 무척 서툴렀다.
 
 “난 능력치가 딸리잖아. 은빈이처럼 기깔나는 자작곡을 만들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성현이처럼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춤을 잘 춰? 웃기기를 해? 카메라 앞에서 끼 부리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얼굴만 잘생긴 무능력한 멤버. 그게 나였다.
 
 부족한 가창력 탓에 무대 위에선 늘 가장 적은 파트를 받기 일쑤였고, 퍼포먼스에 있어서도 항상 구석 쪽에 수납되곤 했던 그룹 시절.
 
 “이렇게 능력 없는 놈이 멤버들 잘 만나서 톱스타 행세도 하고 돈도 벌었으니, 버스 제대로 탄 셈이지.”
 
 “자꾸 스스로 비하하지 말라니까! 이미 대한민국 1%. 아니, 0.1%의 인생을 사는 형이 못난 거면, 난 그냥 나가 뒤져야 되나?”
 
 “휴우. 직접 살아보면 알 거다. 재능 없는 톱스타로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본격적인 멘탈 문제는 그룹 해산 후 찾아왔다.
 
 7년에 더해 2년의 재계약 기간까지 활동을 마친 후, 30대를 맞이하며 각자의 길을 찾아가게 된 멤버들.
 
 재능 넘치는 다른 멤버들은 솔로 앨범을 내거나 예능 MC로 활약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얼굴 원툴인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로지 연기자로 전향하는 길뿐.
 
 [J-DOT 강민우. MBE 미니시리즈 <오늘만 참아줘>로 브라운관 입성!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돌 출신이란 딱지 탓에 여러 촬영현장에서 은근한 텃세를 겪는 것 따윈 큰 문제도 아니었다.
 
 “빡세게 연기 레슨도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캐릭터 연구도 해봤는데···. 휴우. 여기서도 지독하게 재능이 없더라고.”
 
 아이돌로서 무대에 섰을 때는 적당히 다른 멤버들에게 묻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기자로 전향한 이후, 이제 내 재능 부족은 온전히 대중들에게 여과 없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단 두 작품 만에, 난 발연기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ㅂㅅ같네. 저게 연기냐?]
 
 [실력도 부족한 새끼가 아이돌 출신이랍시고 바로 주조연 자리 꿰차는 거 진짜 극혐이다. 열심히 바닥부터 올라온 배우님들한테 부끄럽지도 않나?]
 
 [ㅋㅋㅋㅋ 강민우 로봇 연기 미쳤다. 평생 박제될 듯? 진짜 뭘 해도 어색함.]
 
 [와···. 감독님 작가님 너무 불쌍···. 저딴 결과물 내려고 그렇게 열심히 작업한 건 아닐 텐데. 배우 하나 잘 못 만나서···.]
 
 [복잡하게 얘기할 거 없다. 강민우는 그냥 발성이나 딕션, 시선 처리만 봐도 한참 수준 미달임. 그냥 평생 CF나 찍으며 사는 건···?]
 
 심지어 내 행보를 응원하던 오랜 팬들마저도, 차마 내 연기력을 쉴드치진 못했다.
 
 [우리가 언제 실력 보고 민우 오빠 좋아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난 얼빠임.]
 
 [오빠. 안 좋은 얘기들 너무 귀담아듣지 마세요. 마음 같아선 그냥 푹 쉬다 왔으면 좋겠다. 요새 욕먹는 거 너무 안쓰러움 ㅠㅠ]
 
 많은 대중은 날 조롱하고 있었고, 나 역시도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던 상황.
 
 마음의 병이 걸리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요샌 어딜 가든 매분 매초 평가받는 느낌이다. 누굴 만나도 속으론 날 비웃고 있지 않을까 싶고.”
 
 정명준은 그제야 조금이나마 내 심정이 이해 간다는 듯 물어왔다.
 
 “형.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은퇴하는 건?”
 
 “은퇴?”
 
 “어. 형이야 솔직히 도박이나 마약 같은 거에만 손 안 대고 적당히 아끼면, 평생 놀고먹을 정도로 벌지 않았어?”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은 선택지였다.
 
 “돈을 펑펑 쓰기만 하면서 놀고먹는다···. 글쎄. 한 일이 년 정도는 행복하겠지. 근데 그거 아냐?”
 
 “뭐?”
 
 “내가 무가치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그런 기분에 제대로 빠지면 그냥 죽고 싶을 지경이라고.”
 
 실제로 한 번은 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수면제를 통으로 들이켠 일도 있었다.
 
 ‘매니저 형 덕분에 목숨 건졌지.’
 
 그렇게 어려운 시간들을 겪으며, 사람은 오직 돈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나였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어떻게든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해내야만 편하게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가진 건 이놈의 얼굴하고 이름값뿐인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몇 작품은 더 해봐야지 않겠냐?”
 
 그리고 줄곧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던 정명준은, 이내 듬직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그래 형. 열심히 하다 보면, 연기도 조금이나마 늘지 않겠어?”
 
 “그래···. 휴우. 오늘, 여러모로 고맙다. 나 약 먹는 건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고.”
 
 “뭔 당연한 말씀을! 걸그룹하고 사귀었다는 것도 소문 안 낼게.”
 
 난 그렇게 트레이너 정명준을 보낸 뒤,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
 
 
 
 그로부터 자정이 넘던 시각까지, 난 다음 주부터 촬영에 들어갈 드라마 <불꽃이 터지듯>의 대본을 연구하던 중이었다.
 
 내가 맡은 배역은 서브 남주인공. 재벌 3세 ‘고민준’ 역할이었다.
 
 [고민준 : (책상을 치며 큰 소리로) 제가 분명히 말했지 않습니까! 작은아버지 움직임 잘 지켜보라고!]
 
 [박 팀장 : 죄송합니다. 상무님. 그래도 금양물산 지분은···.]
 
 [고민준 : (박 팀장의 말을 자르며) 어째 요즘. 빈틈이 많이 보이십니다? 긴장 좀 합시다. (그제야 변명을 멈추고, 90도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박 팀장.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승아 : (목소리) 저, 상무님? 말씀 중이신가요?]
 
 [고민준 : (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아···! 들어오세요. 승아 씨.]
 
 매사에 맺고 끊음이 확실한 워커홀릭이면서도,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나름 순정남의 면모를 보여주는 재벌 3세 캐릭터.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그렇게 연기하기 어려운 배역은 아니었다.
 
 난 사전미팅 당시 작가님과 PD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여러 조언을 되새겨 보았다.
 
 ‘민우 씨.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평소엔 재수 없게 틱틱거리다가도, 그저 승아 앞에만 서면 발톱 빠진 호랑이가 되면 되는 거야. 뭔 말인지 알지?’
 
 ‘시청자들이 흔하게 떠올리는 재벌 3세들의 모습을 생각해봐. 민우 씨는 마스크부터 부티가 철철 넘쳐 흐르니까, 충분히 잘 소화할 수 있을 거야. 그저 부담 없이 해 봐!’
 
 게다가 그렇게 분량이 많은 배역도 아니었다.
 
 내 이름값 덕분에 주연 취급을 받으며 계약은 했지만, ‘고민준’은 극 전체를 주도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하긴, 작가님께서 나한테 많은 분량을 맡기실 리도 없지.’
 
 어차피 업계에서 내 처참한 연기력은 유명한 상황.
 
 그런데도 PD님과 작가님께서 날 선택하신 이유는 단순했다.
 
 아직 아이돌로서의 후광이 남아 있는 만큼, 내가 출연자 목록에 끼어있으면 작품의 화제성을 끌어올리는 한편 해외 세일즈도 원활하기 때문일 터.
 
 PD님과 작가님. 심지어 동료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내 연기에 기대를 거는 이들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난 이번엔 평타라도 쳐보기 위해 열심히 대본을 분석해야만 했다.
 
 ‘일단 대사 연습부터 해보자.’
 
 그로부터 난 녹음 앱을 켜둔 채로 대본 속 내게 주어진 대사들을 읊기 시작했다.
 
 남주와 여주가 이어지는 걸 곁에서 지켜보며, 짝사랑에 아파하는 서브 남주 재벌 3세 캐릭터.
 
 하지만, 이 간단한 배역이 내겐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한 번 들어보자.’
 
 잠시 후 녹음 앱을 통해 셀프 점검해 본 내 대사처리는,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분.명.히. 말.했.지. 않.습.니.까. 작.은.아.버.지. 움.직.임. 잘. 지.켜.보.라.고.]
 
 아랫사람에게 격렬하게 화를 내야 할 장면에선, 별다른 감정의 고조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아. 들.어.오.세.요. 승.아. 씨.]
 
 여주인공을 향한 묘한 설렘과 부끄러움을 드러내야 할 장면에선, 그저 감정 없는 로봇처럼 한 글자 한 글자를 읊어대는 내 음성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일말의 몰입감도 느껴지지 않아.’
 
 재능이 없다면,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난 그 뒤로도 감정을 잡아보려 노력하며, <불꽃이 터지듯>의 1회차 대본에 담긴 고민준의 대사들을 열심히 읊어댔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결과물들이 이어졌다.
 
 ‘이것도 아냐.’
 
 ‘대체 재벌 3세에게 어울릴 감정선이라는 거.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거야?’
 
 그리고 부족한 재능에 대한 화가 점점 차오르는 한편, 그 와중에도 작품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 차라리 지금이라면 그 장면만큼은 가능하지 않을까?’
 
 난 지금의 감정 상태에 걸맞게, 부하 직원에게 화내는 장면을 골라 다시 한번 연기해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녹음 앱을 통해 들어보았다.
 
 [제가! 분명히! 말했지! 않습니까아! 작은아버지! 움직이임! 잘 지켜보라고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이건 그냥 목소리만 큰 거지. 또 감정이 없잖아.’
 
 속에선 그야말로 열불이 터지는 데, 정작 내 화내는 연기는 왜 또 어색하기 짝이 없고, 발음마저 뭉개지는 건지.
 
 상황이 거기에 이르자, 난 늘 안정을 유지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점점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는 건가.’
 
 난 잠시 대본에서 시선을 돌려, 넓은 집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최고급 스피커, 유럽의 유명 브랜드로 맞춰놓은 가구들. 돈 주고 구할 수도 없는 한정판 콜라보 신발 등등.
 
 ‘이딴 게 다 뭔 소용이야.’
 
 그 어떤 값비싼 물건을 사도, 아무리 좋은 곳을 쏘다녀도 이 공허감을 채우는 건 불가능했다.
 
 차라리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잃어버리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정말 연기만큼은 잘 해보고 싶었는데.’
 
 ‘그놈의 재능. 얼굴 말고, 단 하나의 재능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렇게 감정이 격할 때로 격해진 그 순간.
 
 “흐읍···!”
 
 너무 흥분해서였는지, 또 한 번 매쓰거움과 함께 현기증이 덮쳤다.
 
 하루 만에 두 번째 공황발작이라니.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배우님. 과몰입이 시작됩니다.]
 
 [이번에 과몰입하실 배역은. 고민준. 고민준 역입니다.]
 
 온갖 우울감과 약 부작용에 시달리던 나로서도, 이런 환청 증상을 겪는 건 처음이었다.
 
 ‘뭔 지하철 정차 소리도 아니고···. 나, 진짜 갈 데까지 갔나 보네.’
 
 그런데 잠시 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내 영혼에는 정말로 재벌 3세 고민준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그 날부터, 재능 없던 내 배우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작가의 말

9월의 시작과 함께 신작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부디 독자님들께 재밌게 읽히는 글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댓글(41)

호박이둥글    
역시 재밌네요 기대되요
2022.09.01 22:40
호랑이다    
이번 작품도 기대합니다ㅋㅋ
2022.09.05 14:15
sublimatio    
그놈의 시스템.
2022.09.12 23:56
어쩌다어른    
작가님 전작들 재밌게 읽었어요 신작도 잘따라가겠습니다
2022.09.13 14:16
AINILL    
벌써 신작이.. 재밌게 읽겠습니다.
2022.09.16 13:29
bpolt    
'브라운관' 입성 이라니 작중 시점이 몇년도죠?ㄷㄷ
2022.09.17 06:32
그냥냅둼마    
배부른 투정이긴한데 기대는 됩니다 한번 정주행갑니다
2022.09.19 07:36
좋아좋아요    
배가 불렀군
2022.09.19 09:04
파아아아    
이거 로봇연기 아재가 모티브간여?
2022.09.19 12:43
풍뢰전사    
건필하세요
2022.09.19 17:40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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