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아포칼립스의 유일한 흑마법사가 되었다

1화

2022.09.15 조회 94,068 추천 1,309


 -게임 잘하는 게 인생 업적이냐?
 
 게임상에서 누군가와 싸우다 보면 한 번쯤 듣게 되는 말.
 보통은 상대방을 이길 때나 듣는 말이기에 욕설이라 해도 별 타격은 없다.
 
 무엇보다 나는 더욱 그렇다.
 그까짓 게임 잘하는 게 인생 업적이냐고?
 
 ‘그럼, 인생 업적이고 말고.’
 
 월드 리빌드. 멸망한 세상에서 하나의 캐릭터를 육성하고, 그 캐릭터로 국가를 만들어 세계를 통일하는 게임.
 
 지금이야 세월이 흘러 인기가 많이 빠졌다지만 한때 세계 동시접속자 100만을 달성했던 명작이다.
 
 특히나 새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초반의 지랄 맞은 난이도와 수읽기 싸움 때문에 랭커가 매달 바뀌는 건 유명하다.
 
 그런 게임에서 압도적인 점수로 랭킹 1위를 6년째 유지하고 있다면 인생 업적이라 할만하지 않나.
 
 ‘이젠 별다른 자랑거리도 안 되겠지만.’
 
 세계 동시접속자 수 100만이라는 건 5년 전까지의 영광.
 잦은 초반 난이도 상향 패치와 업데이트로 인해 지금은 반쯤 망한 게임이다.
 
 지금까지 플레이하는 유저의 수는 2만도 안 되겠지.
 국가를 한국으로 한정하면 1천 명이 될까 말까다.
 
 처참한 몰락이지만 달리 말하자면 고인물 중의 고인물만 남았다는 소리기도 하다.
 그런 고인물들 사이에서 랭킹 1위.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인생 업적이었다.
 딱 일주일 전까지만.
 
 “제발 좀 잡혀라. 제발...!”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한창 실행 중인 게임에는 회전하는 동그라미와 함께 작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상대를 찾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1시간 17분]
 
 시간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벌써 1시간이 넘게 기다렸는데도 매칭되는 상대가 없다.
 
 어제는 그래도 50분 만에 잡혔는데 훨씬 심해진 상황.
 이젠 저 회전하는 동그라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기가 날 지경이다.
 
 ‘설마 승점이 너무 높아서 매칭 상대가 안 잡힐 줄이야.’
 
 모든 대전 게임에는 승점 제도가 있다.
 게임을 시작할 때는 모두 같은 점수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승패에 따라 승점이 오르고 내리게 된다.
 
 그리고 대전 상대를 매칭할 때는 반드시 비슷한 승점끼리 맞붙인다.
 비슷한 실력자끼리 싸우게 만들어 초보자 학살을 막기 위한 시스템이다.
 
 문제는 내 승점이 지나치게 높다는 거였다.
 
 ‘3위는 17690점이고 2위는 17730점인데 내가 20780점이니까...’
 
 압도적인 수치. 너무 패배 없이 이기고 또 이긴 탓에 기형적으로 점수가 올라버렸다.
 일주일 전만 해도 이 승점 때문에 게임을 못 할 걱정은 없었다.
 
 일단 15분이 지나면 점수 차이가 가장 적은 상대를 바로 지정해줬으니까.
 하지만 이 제도는 내게 너무 많이 당한 랭커들의 항의로 바뀌게 되었다.
 
 -15분 지나면 무조건 상대를 강제 지정하는 시스템 좀 바꿔줘라.
 -승점 비슷한 상대가 죄다 게임 중이면 무조건 양민학살 당하잖냐.
 -한 판에 최소 2시간 걸리는 게임인데 그동안 계속 처맞는 꼴이다.
 
 이것저것 핑계를 대긴 했으나 속뜻은 나랑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리고 게임사는 랭커들의 항의를 받아들였다.
 
 《유저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상대 강제 지정 시스템을 삭제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로딩 시간이 길어질수록 매칭 승점 폭이 넓어지도록 바뀌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보다 낮은 승점과 싸우려면 그만큼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
 랭커들에겐 최고의 패치였겠지만, 내게는 최악의 패치였다.
 
 랭킹 2위랑 싸우는 것조차 한참을 기다려야 했으니까.
 여전히 로딩 중인 게임 화면을 보자 이가 갈렸다.
 
 ‘30분만 더 기다린다. 그래도 안 잡히면 끄고 딴 거 해야지.’
 
 짜증스러움에 그리 다짐하긴 했지만 사실 나도 알고 있다.
 30분이 지나도 계속 매칭 상대를 기다릴 거라는 걸.
 
 지금껏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더 기다리겠지.
 재차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상대를 찾았습니다. 월드 생성 중. 새로운 세계로 진입합니다.》
 《[공명의함정] 님의 상대는 [내가사면세일] 님입니다.》
 
 “...!”
 
 드디어! 나는 번개처럼 다시 의자에 앉았다.
 유난히 긴 로딩이 끝나고 내 캐릭터가 보였다.
 
 냉큼 캐릭터를 움직여 게임을 즐기려고 할 때, 상대방에게서 전체 채팅이 날아왔다.
 
 -내가사면세일: 공명의함정? 진짜 공함임?
 -내가사면세일: 아니 랭킹 1위가 왜 여기 있어.
 -내가사면세일: 매칭 잘못된 거 같은데.
 
 “안돼!”
 
 입에서 절규가 튀어나왔다. 어제도 간신히 세 사람과 매칭되었지만, 그때마다 내 이름값에 겁먹고 족족 게임을 꺼버렸다.
 
 덕분에 4시간을 기다렸음에도 한 번도 게임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럴 수는 없어!’
 
 나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가면 상대방도 게임을 끄려고 할 테니 그 전에 의욕에 불을 질러줘야 했다.
 
 게임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건 소용 없을 거다.
 오히려 실력만 돋보기에 하는 꼴이니.
 지금 필요한 건 도발이었다.
 
 -공명의함정: 그러게요. 매칭 시스템 이상하네.
 -공명의함정: 찾아보니 랭킹 42위인데 나랑 놀 레벨은 아니지.
 -공명의함정: 위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저 아래에서 노세요.
 
 도발을 마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제발 걸려라.
 이거 끄고 낙타위키에 내 인성 논란 항목 추가해도 좋으니까 제발.
 
 -내가사면세일: ??? 이 새.끼 말 **같이 하네.
 -내가사면세일: 개.떡 같이
 -내가사면세일: 입 털 실력 되는지나 좀 보자
 
 “...!”
 
 긍정적인 대답에 흥분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려 이틀 만에 제대로 해보는 게임.
 하지만 나는 이 판을 즐길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하다가 마지막에 져야지. 슬슬 승점을 내리지 않으면 게임도 못할 판이야.’
 
 부동의 랭킹 1위? 자랑스러운 인생 업적?
 그것도 게임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때나 자랑할 만한 거다.
 
 이대로 좋아하는 게임 한판 못하고 사느니 인생 업적을 버리고 말지.
 나는 결심과 함께 마우스를 잡았다.
 
 
 ****
 
 
 게임은 순조로웠다. 상대의 실력은 별거 없었다.
 전략도 예상대로였다. 이기는 방법은 수십 가지도 더 떠올랐다.
 
 그러나 이건 처음부터 지려고 작정한 게임.
 
 ‘적당히 하자, 적당히. 대놓고 지려 하면 눈치채고 나갈 테니까 딱 제 실력으로 이긴 것처럼 착각할 만큼만.’
 
 실력이 비슷하다고 상대를 착각하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노림수가 훤히 보이는 상대였으니까.
 
 싸움을 걸어올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지거나 이길만한 수준으로 대비하면 그만이었다.
 
 -내가사면세일: 쫌 하는데? 입 털 정도는 되네.
 -내가사면세일: 빡겜한다. 긴장해라.
 
 ‘슬슬 져줄 때구만.’
 
 나는 채팅창을 보며 캐릭터를 조작했다.
 이쯤 되면 일부러 져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다.
 
 턴을 넘길 때마다 패색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별일 없이 내 패배로 끝날 상황.
 
 -내가사면세일: 또 입 털어봐 ㅋㅋㅋㅋㅋㅋ
 -내가사면세일: 아래 가서 노세요? 개웃기네 ㅋㅋㅋㅋㅋ
 
 사소한 문제라면 상대방의 태도였다.
 아까 도발을 당한 게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계속 나를 놀려댔다.
 
 물론 의도한 패배였기에 욕을 먹어도 별 타격은 없었지만.
 
 -내가사면세일: 이거 영상 찍고 있는 거 앎?
 -내가사면세일: 내일 게시판에 불나겠네ㅋㅋㅋㅋㅋ
 -내가사면세일: 랭킹 1위 개같이 패뱈ㅋㅋㅋㅋㅋ
 
 “....”
 
 이건 좀 빡치는군.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내 실력은 랭커들 전부가 알고 있다.
 영상을 봐도 일부러 졌다는 것쯤이야 다 알겠지.
 
 괜히 도발에 어울려서 반응해주면 이쪽이 손해다.
 그렇게 결심하고 애써 채팅창을 끄려던 때였다.
 
 -내가사면세일: 야 솔직히 말해봐 너 대리했지?
 -내가사면세일: 하여간 실력도 안 되는 주제에 잘난 척은 하고 싶어서.
 -내가사면세일: 니 잘하는 줄 아는 다른 애들이 불쌍하닼ㅋㅋㅋㅋ
 
 “이 새끼가.”
 
 신경을 제대로 긁는 소리에 두 눈이 뒤집혔다.
 이미 진 거나 마찬가지인 판도. 척 보기에도 10대 1의 전력 차이.
 
 하지만 난 다시 마우스를 잡고 움직였다.
 지금 중요한 건 승점이 아니라 이놈을 참교육시켜주는 거니까.
 
 “넌 뒤졌어.”
 
 내 두 손이 모니터 앞에서 바삐 움직였다.
 
 
 ****
 
 
 게임 판도가 뒤집히는 건 한순간이었다.
 전력 차는 점차 줄어들다 어느새 역전했고, 10대 1의 비율은 1대 10으로 뒤바뀌었다.
 
 전력 차가 비등해질 때부터 채팅창은 조용해졌다.
 심지어 나중엔 반쯤 포기한 듯 캐릭터의 컨트롤마저 포기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놈의 캐릭터를 날려버렸다.
 
 《[공명의함정]님이 [내가사면세일]님께 승리했습니다.》
 《[공명의함정]님의 승점이 20790점으로 상승합니다.》
 《[내가사면세일]님이 세계에서 떠났습니다.》
 
 승패가 확정되기 무섭게 상대는 도망쳤다.
 속은 시원해졌으나 이내 원래 목적을 떠올리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게 아닌데.”
 
 안 그래도 높은 승점이 더 상승해버렸다.
 이래서야 매칭 시간이 2시간 이상 늘어날지도 모른다.
 
 나는 이내 한숨을 쉬며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도저히 안 되겠다. 내일 게임사에 항의라도 해야지.’
 
 계정을 지우고 새로 만드는 방법도 있긴 하다만, 부동의 랭킹 1위라는 전적이 너무도 아까웠다.
 
 최소한 삭제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다른 방법이 없나 찾아봐야겠지.
 나 말고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애초에 없겠지만.
 
 그리고 다음 날, 1:1 문의를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한 나는 공지를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까지 ‘월드 리빌드’를 사랑해주신 유저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월드 리빌드 서비스는 오늘부로 종료됩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사과드리며 곧 새로운 게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서비스 종료를 할 거라면 최소 한 달 전에는 말해줘야 하지 않나?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다가 대뜸 오늘 서비스 종료라니.
 
 “이것들이...!”
 
 솟구치는 혈압에 나는 바로 로그인을 했다.
 욕을 갈기기 위해 커뮤니티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이미 게시판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사전 통보도 아니고 사후 통보? 미치셨습니까?】
 【진짜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유저를 호구로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ㅋㅋㅋㅋ】
 
 백번 천번 고개를 끄덕일만한 제목들이었다.
 나 역시 그들의 분노에 동참하기 위해 글쓰기를 누르려고 했다.
 
 그때, 이상한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들 지금 당장 쪽지함 확인해봐라】
 -지금 쪽지함 확인했더니 운영진 메시지 와 있었음. 신작 베타테스터 당첨되었다면서 참여하려면 ‘차원문 개방’ 외치라고 하더라. 처음엔 놀리는 줄 알았는데 진짜 눈앞에 차원문 열렸음. 농담 아님. 속는 셈 치고 해봐.
 
 ┗ 미친놈아, 지금 장난칠 때냐?
 ┗ 어그로 먹이 금지
 ┗ 게임 망하니까 별별 새끼들 다 튀어나오네.
 ┗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이건 또 뭔 헛소리야?”
 
 기만질 당하고도 장난칠 정신머리는 있는 건가?
 눈이 확 찌푸려졌으나 댓글을 보다 보니 무언가가 이상했다.
 
 ┗ ??? 뭐야 시발 왜 진짜에요.
 ┗ 미친ㅋㅋㅋㅋㅋ 이거뭐얔ㅋㅋㅋㅋㅋㅋ
 ┗ 증거 제시하려고 했는데 사진이 안 찍혀!
 ┗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는데 갔다 온 사람 있음?
 
 동조자가 생각보다 많은 데다 글의 추천비도 무려 7대 3이었다.
 비추가 7이긴 하지만, 보통 이런 글은 추천 없이 비추만 먹지 않던가?
 
 혹시나 하는 심정에 쪽지함을 확인하자 정말 운영진 메시지가 와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베타테스터로 선정되셨습니다.】
 -지금까지 ‘월드 리빌드’를 즐겨주신 [공명의함정]님께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는 사흘 후 종말의 날에 시작될 ‘월드 리빌드’의 베타테스터로 선정되셨습니다. 미리 게임에 참여하시려면 ‘차원문 개방’을 외쳐주세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월드 리빌드가 오늘 서비스 종료인데 사흘 후 월드 리빌드를 또 시작한다고?
 
 심지어 베타테스터로 참여하려면 현실에서 키워드를 외치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방금 봤던 글이 마음에 걸렸다.
 
 “...차원문 개방.”
 
 속는 셈 치고 조용히 중얼거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득 자신의 꼴이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차원문은 개뿔이...”
 -촤아아악
 “...!?”
 
 투덜거리던 내 눈이 부릅떠졌다.
 한 박자 늦게 종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 푸르스름한 타원이 나타났다.
 
 그 형태는 월드 리빌드에서 보던 차원문과 완전히 똑같았다.

댓글(46)

g7***********    
건필하세요!작가님
2022.09.15 17:16
c01as    
오~ 신작시작하셨네요. 건필하세요
2022.09.15 19:51
냥이젤리    
잘 보고 갑니다
2022.09.19 14:24
보고파아    
꽤 인간적인 주인공이네요. 시스템을 믿고 시스템이 준 퀘스트만 해서 성장하는.... ㅋㅋㅋ
2022.09.27 03:08
fo*******    
전작에 비해 입문이 너무 어렵다
2022.10.03 01:18
뮤블롱    
필력 좋으셔서 입문할만 한대?
2022.10.03 06:07
EHoles    
질려고 겜할꺼면 그냥 탈주해도되지않나
2022.10.04 00:25
OLDBOY    
잘 봤어요.
2022.10.05 23:36
잘먹을게    
닷지할까봐 도발하는거 오지노 ㅋㅋㅋㅋㅋ
2022.10.09 03:05
가우딍    
트위치 해버렸네요.
2022.10.1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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