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서막(序幕)
– 별똥별이 떨어지다
서기 605년, 겨울.
백제, 사비성.
그곳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람이 귀를 베고 코를 삼켜버릴 정도로 혹독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저잣거리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한산한 성내 풍경과는 달리 변방에서는 무왕이 즉위한 후 지금껏 신라와 수 개의 성을 뺏고 빼앗기는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백제와 신라는 수년간 계속된 전투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군사들을 쉬게 하고 국가 내부를 재정비하기 위해 잠시 휴전을 하기로 양국 간에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백제의 백성들은 무척 기뻐하며 깊은 시름을 놓을 수 있었고, 도성으로 돌아온 군사들은 각자의 가족을 건사하고 생업을 돌보았다. 그렇게 모처럼 사비성에도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
한편, 달솔(*達率 백제의 2품 고위 관직) 진무한도 전투를 마치고 도성 내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때마침 집 안에서는 무한의 부인이 출산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어서 서두르게! 곧 있으면 마님께서 아기씨를 생산하실 것이야!”
백가가 초조한 마음으로 여종을 채근하고 있었고, 여종은 준비한 실과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를 가지고 급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으아···악!”
하경부인은 밀려오는 고통에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이마는 땀으로 흥건할 정도였다.
“마님!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자, 아랫배에 힘주시고요!”
하경부인은 천장에 매달린 끈을 붙잡고 온 힘을 다 써보지만, 좀처럼 아기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산파를 애태웠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더 힘을 쏟아부었지만 아랫배에 전해져 오는 고통만이 더 커질 뿐이었다. 결국 하경부인은 어지러움을 호소하였고 이내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져 갈 무렵 산파의 눈이 있는 대로 커지며 하경부인을 향해 소리쳤다.
“머리가! 아기씨 머리가 보입니다!”
“뭐라고? 그것이 참말인가?”
“예, 마님!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산파의 흥분에 하경부인은 순간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아랫배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사비궁 왕후 처소에서도 사택왕후가 진통을 느끼면서 궁 안은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왕후 전하께서 진통을 시작하셨다! 출산 준비를 서두르고 폐하께 이를 알리도록 하라!”
잠시 후, 무왕이 서둘러 왕후 처소로 들어왔고 바로 옆방에서 아기가 태어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산실에서는 한동안 진통이 계속되었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드디어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비궁 안을 물들였다.
그리고 곧바로 궁인이 들어와 무왕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기뻐하소서! 왕자 아기씨이옵니다!”
궁인의 말에 무왕은 비로소 기쁨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을 지었고, 함께 있던 신하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오늘은 과인이 왕자를 맞이한, 매우 기쁜 날이니 지금 곧 백성들에게 쌀과 음식을 나누어주어 기쁨을 함께하라!”
무왕의 명이 떨어지자 신하들은 사비성 문을 열고 황실의 쌀과 음식을 내온 뒤 차례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 무렵,
하경부인도 사내아이를 무사히 출산하여 주변 이웃들과 경사를 함께하였다.
***
깊은 밤.
진무한은 황급히 사비궁으로 입궐하여 무왕을 알현하였다.
“폐하! 왕자 아기씨의 탄신을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이는 이 나라에 더없는 광영일 것이옵니다!”
“고맙네! 내 오늘같이 기쁜 날 그대와 이 기쁨을 함께하지 못하는 줄 알고 상심이 무척이나 컸는데 이렇게 달려와 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네!”
“신이 함께하지 못한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무한이 고개를 숙여 벌을 청하자, 무왕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당치 않은 소리! 아기를 낳는데 지아비로서 아내의 곁에 있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어떠한 일도 그보다 우선할 수는 없네!”
“이해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이에 무왕은 웃으며 무한을 쳐다보았다.
“그래, 사내아이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오! 그렇다면 경과 과인은 같은 날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닌가? 이런 운명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 이 인연을 기억하고 새 생명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서로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어떠한가?”
무한은 무왕의 뜻밖의 제안에 놀라 고개를 숙여 난색을 표했다.
“폐하! 당치 않사옵니다! 어찌 소신이 감히 왕자 아기씨의 휘(*諱,왕이나 왕손의 이름)를 지을 수 있겠나이까?”
“벗으로서 부탁하는 것인데 그래도 아니 되겠는가?”
무한은 마지못해 붓을 들었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하얀 종이 위에 글자를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
그리고 무왕과 서로 종이를 바꿔 들었다.
무한의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義慈(의자)]
“의롭고 자애로운 성군이 되시라는 의미에서 그리 지어보았사옵니다!”
“의자··· 라··· 참 좋은 이름이네! 내 아이의 이름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일세!”
이번에는 무왕이 종이를 펴보았다.
[忠(충)]
“가운데 중 자와 마음 심 자가 하나로 이루어진 그 글자는 가운데 있는 마음이란 뜻으로 언제나 사심이 없이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마음 한가운데에 서기를 바라는 과인의 바람이 담긴 이름일세!”
“폐하! 반드시 폐하의 높으신 뜻을 받들 수 있는 사내대장부를 만들겠사옵니다!”
이날, 두 사람은 서로가 지어준 아이 이름에 흡족해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새벽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하늘을 가르며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고, 뒤이어 수많은 별똥별들이 무리를 지어 한꺼번에 떨어지며 새벽하늘을 수놓았다.
때마침 하늘을 살피고 있던 일관(*日官, 별자리나 하늘의 기운을 살펴보아 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치던 관리)이 이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저것은···!”
일관이 당황하여 다급히 부좌평(*父左平, 백제 1품 고위 관직) 사택적덕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어르신! 계십니까, 어르신!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자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좀 전에 하늘의 기운을 보았는데, 그것이 좀 이상하여 어르신께 말씀 올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급히 왔습니다.”
사택적덕이 이상하게 여기며 일관을 쳐다보았다.
“말해보게! 대체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인가?”
“달이 기울고 해가 솟는데 이 와중에 수많은 별똥별들이 산 아래로 떨어지더이다!”
“그래? 거참 희한한 일이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외람되오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길한 것이겠으나,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흉한 것이옵니다. 무언가의 기운이 쇠하였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지요. 또한, 낮은 가장 높은 자를 뜻하고, 밤은 가장 위대한 자를 뜻하는데 이것이 서로 교차하는 시간대에 별이 떨어진 것이니··· 이는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자와 가장 위대한 자가 모두 스러지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사택적덕이 놀라서 그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나라가 스러져 갈 징조입니다!”
순간, 사택적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관을 노려보았다.
“뭐라? 이자가 실성을 한 것이 아닌가? 어디서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인가?”
사택적덕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자, 일관이 따라 일어나 그를 만류하였다.
“부좌평 어르신! 저는 하늘이 알려 주는 것을 보고 그대로 알려드릴 뿐, 결코 거짓을 아뢰거나 어르신을 욕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택적덕이 분노를 잠시 가라앉히고 그에게 다시 물었다.
“자네 방금 전 그 말에 목숨을 걸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어르신께 제 목을 맡기겠습니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나,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결국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지금 나더러 나라가 스러지는 것을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자네는 일관이 아닌가? 하늘의 기운을 읽기도 하지만, 그 기운을 비껴가는 방법도 알고 있지 않는가?”
사택적덕의 다그침에 잠시 주저하던 일관이 결국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제 이 나라의 명운을 쥔 두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한 분은 왕실에서, 또 한 분은 사비성 안에서···!”
“그래서?”
“죽이십시오!”
“뭐라?”
“두 분은 모두 크게 되실 분들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두 분이 크게 되시면 되실수록 나라의 기운을 빼앗아 버릴 것입니다. 파멸로 향하는 국운을 비껴가게 할 유일한 방법은 두 생명을 끊어놓는 것뿐입니다!”
“이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사택적덕이 분노하여 칼을 뽑아 그의 목에 겨누고는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것이야?”
“왕후 전하의 아버님이자 폐하의 장인이 아닙니까?”
일관은 사택적덕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의 눈을 쳐다보며 답을 하였고, 사택적덕은 더욱 노하여 일관을 몰아세웠다.
“허면 내 손으로 내 외손자의 목숨을 끊어버리라는 말인가? 더구나 가장 절친한 벗의 아들인 진무한의 아기까지?”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만일 내가 그리하지 못하겠다면, 어찌할 것인가?”
“폐하께 고할 것입니다!”
일관의 답에 당황한 사택적덕은 결국 칼을 거두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다.
“알았으니, 자네는 일단 돌아가 있게!”
“하오면, 결심하신 것입니까?”
“알았다 하지 않는가! 그만하고 물러가게!”
이에 일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서며 한 가지 말을 남겼다.
“제가 폐하께 보고를 드리는 시간은 매일 저녁달이 뜨는 그 시간입니다!”
일관이 물러가자 사택적덕은 심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젠장! 분명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다! 다른 방도가!”
무척이나 괴로워하던 사택적덕은 이내 밖에 있던 하인을 급히 불러들였다.
***
그날 오전.
사택적덕은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하인의 안내를 받아 산속으로 향하였다.
“그곳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냐?”
“예! 그렇습니다! 저 산속 깊은 곳에 홀로 은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이번엔 험한 바위를 건너야 했고, 그렇게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한참을 올라가자 작은 동굴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하인이 그 앞에 멈춰 섰다.
“여기냐?”
“예! 틀림없습니다! 옛날에 궁에서 일관 일을 보던 노파가 이 안에 살고 있다 했습니다요!”
“알았다! 넌 여기 있거라!”
사택적덕은 하인을 두고 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쪽에는 빛 한 줌도 들어서지 않는 완전한 어둠뿐이었고, 사택적덕은 발을 한 발 내딛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벽을 짚어가며 겨우 몇 걸음을 들어가니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그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말을 걸었다.
“자네가 혜증이란 사람인가?”
“이름을 버리고 산 지 오래요!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니 그만 돌아가시오!”
노파의 단호한 목소리에 당황한 사택적덕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부탁했다.
“돌아가신 법왕께서 무척 총애하던 일관이었다 들었네! 내 긴한 일로 자네에게 하늘의 이치와 방도를 듣고자 하니 뿌리치지 말아주게!”
순간, 노파가 호롱에 불을 피우자 은은한 불빛이 사택적덕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앞이 좀 보이는군! 진작 좀 불을 켜고 살 것이지. 왜 그리···!”
순간! 사택적덕은 노파의 모습에 너무 놀라 뒤로 쓰러질 뻔하였다.
노파는 눈이 없었고, 온몸은 흉측하게 뭉그러져 있었으며, 심하게 말라서 뼈만 앙상한 채 앉아 흡사 괴물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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