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은 무엇일까요?”
1L(로스쿨 1학년) 형법 첫 시간, 제임스 매디슨 교수가 물었다.
“전문에 있는 ‘We the People’ 아닐까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수정헌법 제1조입니다.”
“저도 수정헌법 제1조라는데 동의합니다만, 그 이유는 ‘표현의 자유’ 때문이 아니라 제8절, 18항 ‘필요적절조항’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서 공부 좀 했다는 애들, 그것도 변호사나 정치인이 꿈인 애들이 모였으니, 발표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유치원생들처럼 서로 발표하겠다고 ‘저요, 저요’ 손을 들지는 않아도, 대타로 들어온 교수가 던진 질문에 자기들끼리 토론이 시작될 정도로 열정적이다.
어쩌면 제임스 매디슨 교수가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L 형법학을 가르치는 레이철 린드버그 교수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15분 정도 늦게 되어, 그 시간 동안 잠시 학생들을 돌봐주려는 목적이었으므로 무언가를 가르칠 의도도, 시간도 없었다.
학생들끼리 토론시켜놓고 이번 신입생 중에 똘똘한 놈이 누가 있나 보고 싶었을 수도.
“거기 맨 뒤에 학생? 학생 이름이 뭐예요?”
그런데, 왜 나를 지목했었을까?
내가 하품해서? 건방지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아무튼 2회차임에도 여전히 미스터리다.
“헌입니다.”
“학생 이름이 허니라고요?”
크크큭- 하하하-
강의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이름은 제헌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캐나다로 유학 갔고,
토론토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 잠시 ‘제이’라는 영어 이름을 썼지만 아무래도 어색해 그냥 본명을 사용했다.
제헌 (Je Hon)
왜 ‘Heon’이나 ‘Hun’이 아니고 ‘Hon’이냐고? 사연이 길다.
아무튼 이름이 ‘헌’이라서 받는 농담은 이미 익숙했다.
(북미에서는 종종 연인을 허니(Honey) 혹은 줄여서 헌(Hon)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자기야’쯤이 된다.)
“좋아요, 헌. 헌은 어떤 조항이 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우물쭈물했다.
그 전날 밤까지 방을 구하러 다니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었고, 우리 집 형편에 내가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멋진 국제법 변호사가 되고 싶어 지원했지만, 모든 것이 흐릿했던 시기였다.
당시에는 다른 학생이 한 대답을 귓등으로 듣고 있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수정헌법 제1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이유를 묻는 매디슨 교수의 추가 질문에는 제대로 답도 하지 못한 채.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미국 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은 제6조, 2항이라고 생각합니다.”
2회차니까.
【001화 – 로스쿨 천재가 되었다.】
「일주일 전, 아니면 10년 뒤.
서울, 강남역.
“선생님, 선생님은 앨샛(LSAT) 점수 몇 점 나오셨어요?”
“175.”
“와, 대박.”
LSAT은 Law School Admission Test의 줄임말로, 미국의 로스쿨 입학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로스쿨 입학시험을 말한다.
미국의 로스쿨을 지원하려면 필수적으로 치러야 하는 시험이다.
시험은 독해, 논리, 추리 능력 등을 측정하는 객관식 문제들과 채점되지 않는 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험에 주어지는 시간은 총 4시간이다.
성적은 맞힌 문제 개수를 120~180 사이의 점수로 변환해서 발표하며, 중앙값이 대략 150이다.
150점 정도는 받아야 100위 안에 있는 로스쿨에 진학할 수 있고, ‘T14’이라 하여 미국 로스쿨 중에서 티어 1에 속하는 열네 개의 로스쿨에 지원하려면 적어도 165점은 받아야 한다.
“그런데 왜 하버드나 예일 못 들어가셨어요?”
‘T14’ 중에서도 탑-오브-탑인 예일, 하버드, 컬럼비아, 스탠퍼드 로스쿨은 175점은 받아야 안정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다음 급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대, 시카고대, 듀크대 등 역시 170점 이상 받아야 안심하고 지원할 수 있다.
“성적이 안 좋으셨어요?”
‘T14’ 중 하나에 들어가고 싶다면 성적 또한 GPA 4.0 만점에 3.8 이상은 돼야 하고, 그중에서 예일, 하버드, 스탠퍼드를 노린다면 3.9 이상이 되어야 한다.
“3.92.”
“네? 선생님 성적이 3.92이셨다고요? 헐-”
“그런데 왜 하버드에 못 들어가셨어요?”
매년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오면 받는 질문.
그들은 늘 내가 LSAT 175점에 GPA 3.92를 가지고도 왜 하버드나 예일, 스탠퍼드에 가지 못했는지가 제일 궁금하다.
“그러게요. 이렇게나 질문을 많이 받을 줄 알았으면 갈 걸 그랬네요.”
이런 질문들은 그나마 귀엽다.
더 곤란한 질문은 따로 있다.
“선생님, 그런데 왜 변호사 자격은 없으신 거예요?”
***
치르르르-
삼겹살 구워지는 소리가 칠팔월 소나기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야, 그냥 다 얘기해주지 그랬어.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고.”
“뭘 구차하게 그걸 다 말해. 어차피 길어야 6개월에서 1년 볼 사람들인데.”
“그래도.”
말한 적도 있다.
이 일을 막 시작했을 때는 질문한 학생들에게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대부분은 핑계로 여겼고, 그나마 공감해준 사람들도 금세 잊어버렸다.
쌍팔년도 아니고 집안 사정 때문에 더 좋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니,
변호사가 되지 못했다니.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을 인정한다.
그래도 사실이다.
여느 지원자들처럼 나 역시 T14에 속한 여러 학교에 지원했었다.
예일과 스탠퍼드에서는 합격 통지를 받지 못했지만, 하버드에서는 합격 통지를 받았었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내게 장학금을 준 곳은 뉴욕대와 코넬대뿐이었기에 그중에서 뉴욕대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정수정.
“그 소식 들었어? 수정이 결혼한다더라.”
“응. 들었어.”
“어디서?”
“민수. 청첩장 받았어.”
“민수, 그 새끼는 왜 너한테 청첩장을 주고 지랄이야?”
“그러는 너는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건데?”
“나야 이야기할 수 있지. 베프니까. 근데 그 새끼는 수정이 신랑 될 새끼가 너랑 수정이 히스토리도 다 알면서. 웃기는 새끼네.”
“히스토리는 무슨.”
히스토리가 있다.
그녀가 뉴욕에 있었기에 가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갈 거야?”
“어딜?”
“결혼식.”
“뉴욕에서 한다며?”
“응.”
“못 가.”
‘왜?’라고 물으려던 창제는 그만두었다.
“그래. 뭘 가냐. 그 먼 데까지.”
“너는?”
“나? 나는···가지.”
“뭐냐? 넌 안 머냐?”
“나은이 베프잖아. 아, 근데, 니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게.”
창제는 정수정과 제일 친한 나은이와 사귀고 있었다.
“가. 뭘 나 때문에 안 가.”
“아니, 진짜루. 니가 가지 말라고 하면 진짜 안 간다니까. 진짜루.”
“너 방금 진짜라는 말 세 번 한 거 아냐?”
“진짜니까.”
“범죄심리학에서 진짜임을 여러 번 강조하는 사람의 말은 허위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
“아이- 진짜라니까! 진짜루.”
“너 그거 습관이야. 넌 영어 할 때도 툭하면 ‘really’, ‘really’ 했어. 11학년 때 미세스 매킨타이어가 너 ‘really’ 한번 할 때마다 1불씩 걷겠다고 했잖아.”
“크크큭. 미세스 매킨타이어. 지금은 뭐 하고 계시려나···. 아무튼, 진심이라니까. 안 가. I am serious, man. Really.”
거 봐, 또 했잖아.
“상관없어. 다녀 와. 가서 나 대신 축하한다고 전해줘라. 어차피 축의금은 안 받는 것 같으니까.”
“진짜루?”
진심이다. 이제는 정말 상관없다.
99.99%.
어차피 나랑은 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뭐 다 지난 일이지. 자 마시자.”
짠-
“아, 근데 요새 아버님은 좀 어떠셔?”
“괜찮으셔. 야, 근데 넌 왜 사이다냐?”
“베프가 못 마시는데, 나만 마실 순 없지.”
“전엔 마셨잖아?”
“응, 나 철들었어. 이제부터 안 마시려고.”
“뭐래- 그냥 하던 대로 해.”
로스쿨 1학년 초,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뺑소니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꽤 큰 사고여서 후유증이 컸고 간이식을 받아야 할 정도로 몸이 망가지셨다.
부모님은 내게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경미한 사고를 당했다고만 하셨다.
중요한 시기, 내 인생을 망칠까 봐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1학년이 끝나고 여름 인턴십 하는 도중에 알았다, 아버지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나는 모든 것을 미뤄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상황이 좋아지면 나중에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 간이식 수술이었다.
그리고는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다. 돈이 급했다. 아버지 수술비부터 이곳저곳 빌려놓은 집안 빚까지 돈 들어갈 곳이 많았다.
처음 들어간 곳은 강남의 한 영어 학원이었다.
그러다 월급이 좀 더 좋은 LSAT 강사로 이직했다.
가르치는 데에 재능이 있었는지, 벌이는 점점 더 좋아졌다.
아버지 병원비 및 집안 생활비, 동생 학비를 대면서도 5년 만에 집안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동창 중 한 명이 물은 적이 있다.
‘동생 유학비를 네가 왜 대냐’고.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첫째라는 이유로 먼저 받은 지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징징- 징징-
“네, 아버지.”
-그래, 어디냐, 헌아?
“아,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저녁 먹고 들어가는 길이에요.”
-그래.
“아버지는요? 집이세요?”
-응, 집이지.
“다음 주 월요일이 오프예요. 월요일에 내려갈게요.”
-아니야. 집에는 무슨. 나 괜찮아. 쉬는 날에는 그냥 너도 쉬어. 데이트도 하고.
“아니에요. 내려갈게요.”
-······.
“아버지?”
-헌아.
“네.”
-아버지가 미안하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이 못난 아버지를 용서해다오.
“아이, 또 왜 그러세요. 그런 생각하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아버지도 저한테 미안함 같은 것 갖지 마세요.”
-그래, 고맙다. 고맙다, 큰아들. 너 때문에 내가 살았어.
“그런 말씀은 어머니한테 하세요.”
-그래, 그래, 흑흑.
때마침,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누구랑 통화하세요? 헌이? 일하느라 바쁜 애한테 이 밤에 왜 전화를 해요. 쉬게 좀 두지.
-그러라고 전화한 거야. 이번 주에는 내려오지 말라고.
이제 엄마가 전화기를 빼앗은 모양이다.
-별일 없지?
“네.”
-술 먹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아니면, 됐어. 그럼 들어가 쉬어.
“네.”
-아, 월요일이 오프지? 오지 마. 아빠랑 엄마랑 외삼촌 댁에 갈 거야. 그러니까 오지 말고 그냥 서울에서 쉬어. 알았지?
“나 오지 말라고 두 분이 아주 시위를 하시네요.”
-젊은 애가 여기 촌에 와서 할 일이 뭐가 있어?
“물 좋고 공기 좋은 데 가서 쉬는 거죠. 간 김에 어머니, 아버지도 보고.”
-여기도 미세먼지 때문에 안 좋다. 물도 정수기 물이 더 깨끗하고. 에어컨 틀어놓고 집에서 쉬어.
“하하. 알았어요.”
-혹시 만나는 아가씨는 있고?
“결국 그게 궁금하신 거죠? 없어요.”
-궁금은 무슨. 그래, 알았어. 쉬어라.
“네.”
딸깍.
우리 집은 어머니가 여장부이시다.
원래도 그런 면이 조금은 있었으나, 아버지 사고 이후로 더 그렇게 됐다.
피식-
종종 있는 신파극, 나한테는 시트콤 같다.
후회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지금대로 좋으니까.
물론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 것이 있긴 하지만···.」
***
삐삐삐삐-
“Hey, Hon, wake up. Didn’t you say there was a law school orientation or something today?”
(헌, 일어나. 오늘 로스쿨 오리엔테이션인가 뭔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평범하게,
마치 다음 날처럼,
나는 돌아왔다.
2012년, 뉴욕.
나의 꿈과 젊음, 그리고 스타일이 있었던 그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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