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빽빽하게 거리를 메운 빌딩 숲이 보인다.
그 너머로 느릿하게 넘어가는 붉은 해의 모습이 아련하다.
“피곤하다 피곤해...”
한 손에 믹스커피.
다른 한 손엔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 한 개비.
부스스한 머리 위로 잦아드는 노을을 바라보며 회사 옥상 난간에 멍하니 기대어 있는 사내.
김정현.
올해 나이 서른여덟이 된 나는, 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 게임 업계에서 가장 ‘핫한’ 개발사로 불리고 있는 ‘이터널스 스튜디오(Eternals Studio)’의 베테랑 게임 개발자였다.
“... 아니, 뭔 놈의 도로가 벌써 이렇게 막히냐.”
힐끗 난간 너머로 내려다본 건물 아래엔 붉고 샛노란 불빛들이 가득했다.
널찍하니 잘 닦인 회사 건물 앞 6차선 왕복 도로를 순식간에 메워나가는 자동차들의 행렬.
세상 제일 부러운 그 이름, ‘퇴근’을 맞이한 이들의 모습이다.
“퇴근이라...”
후우우-
가슴 깊숙이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 대한민국에 아직도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
영화 속 유명한 명대사를 능숙하게 읊는 내 표정엔 씁쓸함만이 가득했다.
이쪽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 나 역시 ‘칼 퇴근’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고 있었다.
심지어 요 몇 주간 동안은 칼 퇴근은 고사하고 그냥 ‘퇴근’조차 하기 힘든 극악의 일정을 소화 중이었으니...
현재 내가 총괄 디렉터(Project Director)의 포지션으로 개발 중인 신작 게임, <로스트 킹덤, Lost Kingdom>이 막바지 작업에 돌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흐으읍! 어이고!”
근육이 뭉치다 못해 아예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앓는 소리를 내본다.
이미 몇 주 전부터 내가 이끄는 <로스트 킹덤> 프로젝트 팀 전원은 회사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Crunch, 게임 출시 기한을 맞추기 위해 야근 및 주말 출근, 철야를 비롯한 강도 높은 근무 체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업계 은어)’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놈의 크런치는 십 년 넘게 하는데도 할 때마다 죽을 것 같네.”
소속 팀원 모두가 힘들 테지만, 총괄 디렉터인 내가 체력적, 정신적 부담을 가장 많이 짊어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팀 구성원 중 나의 나이가 제일 많기도 했고.
“이번 일 마치면 안식년 신청해야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다. 후우...”
내 입에서 길게 뿜어진 담배 연기가 검푸르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른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젠장, 나이가 웬수지.”
대체 무슨 놈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건지.
“이러다 금세 마흔 살 되고 오십 살 되겠네. 에휴, 이 나이 먹도록 결혼도 못 하고... 아이고, 내 팔자야.”
주중, 주말 구분도 없이 주야장천 일에만 매달려 사는 회사 지박령(?) 신세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팔자가 너무 안타깝고 기구해서, 한껏 얼굴을 구긴 채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그 순간,
“컥! 크읍!”
왼쪽 가슴에 찾아온 격렬한 통증!
“끄으으으!!!”
달칵! 촤악-!
심장에 총을 맞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실로 눈이 뒤집히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었다.
손에서 놓쳐버린 종이컵이 바닥에 떨어지며 사방으로 커피를 뿌려댄다.
“아흑! 아으아... 흐읍!”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아픔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아 꺽꺽거리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왜... 어, 잠깐? 이거 혹시?!’
언젠가, 회사에서 나이 35세 이상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했었던 건강 교육 시간에 얼핏 들었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쳤다.
‘... 누가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어서 심장을 쥐어짜고 있는 듯한 통증을 느끼신다면, 그 즉시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병원 응급실로 가셔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상태를 알리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1분, 1초가 목숨과 직결되는 골든타임입니다. 절대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과로가 일상이 된 현대 사회 직장인들에게 갑자기 찾아와 목숨을 앗아간다는 무시무시한 질환.
심근경색(心筋梗塞).
그때는 나와 별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건성건성 흘려들었는데...
“누...! 누구 없... 살려... 크흑! 꺽! 꺼흐윽!”
철퍼덕!
빠르게 흐려지는 시야.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려고 그랬던 것인지, 하필 이 순간에 옥상에 올라와 있는 회사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이, 이렇게 죽는다고? 회사 옥상에서 담배 피다가 쓰러져서?’
밀려드는 두려움과 억울함, 참기 힘든 격통에 두 눈이 급격히 충혈되던 그 순간,
덜컹!
정면으로 보이는 옥상 출입구의 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아니, 그래서 내가 아트 팀 민경 씨한테 그렇게 얘기를... 어? 으어어?!!!”
옥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 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 내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 달려온다.
“11... 119 좀 불러주...!”
털썩-!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낯익은 부하 직원의 모습을 확인한 후 나는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인내의 끈을 놓아버렸다.
“PD님! PD니임-! 정신 차리세요!!!”
“119 불러! 빨리! 여기 사람 쓰러졌어!!! 빨리요!!! 지금 사람 죽는다니까?!”
정신없이 소리치는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나의 의식은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
“... 여기가 어디지?”
처음 눈을 떴을 때, 내 머릿속을 채운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꿉꿉한 냄새가 가득한 어두운 창고의 내부.
어지간히 오래된 물건인 듯, 부서지고 삭아버린 나무 상자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게 보였다.
그 옆으로, 어디 중세 코스프레 페스티벌 같은 곳에서나 볼 법한 녹슨 도끼와 칼, 방패, 썩은 내가 풍기는 가죽 갑옷들이 잔뜩 쌓여있다.
말 그대로 낯선 것들만이 가득한 생경한 공간.
그런 장소에, 걸레짝 같은 담요를 덮은 채로 내가 누워 있었다.
“이게 뭔... 놀이공원 창고 같은 데 갇힌 건가?”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 짜내어 기껏 떠올린 생각이 고작 그런 거였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대체 여기는 뭐 하는 데야... 으윽!
순간, 머릿속으로 해일처럼 밀려 들어오는 누군가의 기억.
타인의 인생을, 그가 보낸 시간과 느낀 경험들을 강제로 내 뇌 속에 때려 박는 듯한 충격에 나는 한동안 몸을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격렬했던 몸의 떨림이 멎었을 때.
“... 이런 미친!”
이제는 내 것이 되어버린 새로운 육신의 기억이 답을 알려주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하, 시발... 넘어질 때 머리를 다쳐서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고밖에 생각이 안 되는 지금의 상황.
놀랍게도,
나는 지금 내가 만들던 게임, <로스트 킹덤>의 세계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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