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가슴 두근거리며 뭐든 될 것 같은 날이.
왠지 로또를 사면 당첨될 것 같고, 내내 망설이던 고백을 하면 무조건 성공할 것 같은 자신감이 뿜뿜하는 날 말이다.
내겐 오늘이 그렇다.
아침으로 달걀 프라이를 하는데······, 세상에, 쌍알이 나왔다.
노른자가 두 개다, 두 개.
원 플러스 원보다 더 수지맞은 기분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언제 샀는지 기억에도 없는 헌책 틈에서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어이쿠, 5만 원이라니.
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집어 들고 고민했다. 로또를 살까, 아니면 즉석복권을 살까?
이런 느닷없는 행운이 오늘 하루 한정이면 즉석 복권을 사는 게 맞다. 하지만 근 이십억에 가까운 로또 1등 당첨금에 비하면 오억은 좀 손해 보는 느낌이라 한참 고심했다.
에잇. 미친놈.
무슨 복권 당첨이 예약이라도 된 것처럼 김칫국을 통째로 들이켜고 있냐. 주운 돈은 얼른 써야 한다더라. 그냥 오랜만에 소고기나 사다가 혼술이나 하자. 이대론 아쉬우니까 복권도 한 장 살짝 긁으면서.
하늘로 승천하는 들뜬 기분을 5만 원짜리 지폐랑 같이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출근길을 나섰다. 어째 새 신을 신은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
산뜻하게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설 때, 전화가 왔다. 액정에 뜬 번호는 엄마다.
“응. 엄마.”
“이봐, 아들. 살아는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셔. 당연히 살아 있지. 요즘 시험 기간이라 정신없어서 전화도 못 했네. 죄송해요.”
“그러길래 왜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갑자기 학원 강사는 하겠다고······.”
“그만둔 게 아니라 잘린 거라니까. 그리고 학원 강사가 어때서. 잘나가는 강사는 한 해에 수백억씩 번대.”
“수백억은 됐으니까, 몸이나 잘 챙겨. 아버지한테 전화도 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못마땅해하셔?”
“그럼. 당연히 못마땅해하지. 남들은 못 들어가서 안달 난 회사에서, 그것도 내로라하는 사람들만 들어간다는 전략기획실에 다닌다고 얼마나 자랑하셨었는데······. 아니다. 어쨌든 아버지한테 꼭 전화해. 알았지?”
“알았어요. 나 출근해야 해. 나중에 전화할게요.”
“반찬은 있지?”
“넵. 넉넉합니다.”
“그래. 차 조심하고.”
“엄마, 나 아홉 살이 아니라 스물아홉이야. 차는 엄마가 조심해야지. 끊습니다.”
“아들내미라 그런지 멋대가리가 없어, 멋대가리가. 끊어.”
오랜만의 통화라 그런지 목소리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다.
잠깐만.
오랜만은 아니지. 회사 다닐 땐 더 전화를 못 했던 것 같은데. 대기업 때려치우고 학원 강사 한다니 걱정이 많으신 모양이다. 이제 8개월이 넘어가니 받아들이실 만도 한데······.
뭐,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차오르는 생각들을 털어 버리고 학원으로 향했다.
***
학원 강사들에게 있어 월요일 출근보다 더 끔찍한 건 시험 기간이다. 학원은 지하철 환승역처럼 애들이 바글바글한다. 효과를 알 수 없는 보강과 특강을 해 대야 하고, 데스크는 밀려드는 상담 전화로 몸살을 앓는다. 솔직히 이때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히도 징글징글하던 1학기 중간고사도 끝물이다. 무엇보다 어제 자로 내가 맡은 아이들의 수학 시험도 끝났으니 난 바쁠 것도 없다. 오늘은 밀린 잡무나 처리하고 일찌감치 퇴근해야지.
“쌤. 쌤. 쌤! 대박이에요. 대박!”
최서진의 호들갑은 당최 적응이 안 된다. 시험지를 흔들며 당당하게 걸어오는 걸 보니 시험을 잘 봤나 보다.
“쌤. 지난번 시험 대비 특강에서 풀었던 문제가 가장 어려운 문제로 나왔어요. 우리 반에서 두 명 맞았는데 한 명이 저예요.”
가르친 애들이 받아오는 성적표가 내 성적표라더니, 맞는 말이다. 내가 다 기분이 좋다. 게다가 어려운 문제를 맞혔다니 거품 물고 설명한 보람이 느껴진다.
“그래? 그럼, 이번 수학 시험은 다 맞은 거야?”
“에이. 설마요. 그래도 가장 어려운 서술형을 맞혔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요.”
가슴까지 탕탕 두드리는 게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저번에 학원 청강하러 온 민지 기억하세요? 걔도 맞았다 좋아하던데. 그리고 저 이번에 수학 한 등급 오를 것 같아요.”
“그래. 기특하다. 수고했어. 내일 시험은 뭐야?”
최서진이 눈썹을 찡그리며 인상을 구겼다.
“영어하고 생명이요. 오늘 영어 보강 있어서 온 거예요. 근데 쌤, 영어 쌤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쉬쉬해도 소문은 막을 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이 바닥이 비밀이 없는 건지 몰라도 말 참 빨리 돈다.
“그래? 처음 듣는데?”
데스크에서 모르는 척하라는 지시가 있어 일단 시치미를 뗐다.
“에이. 소문 다 났어요. 이번에 대형 학원으로 옮겨서 인강도 찍는다고 하던데요?”
찬찬히 내 표정을 뜯어보던 최서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짜 몰랐어요?”
표정 변화가 적다는 건 의외로 쓸모가 많다. 특히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는 더.
“알았으니 어서 가서 영어 공부해. 내일 시험도 잘 보고.”
“쌤, 쌤 혹시 천성 그룹 다녔었어요?”
“아니.”
사실 맞다.
“그래요? 그럼, 재벌 3세라던데 맞아요?”
“맞아.”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재벌은 무슨. 표정 변화를 살피던 최서진이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서민 코스프레 중이야. 호구 조사 끝났으면 빨리 가지?”
“갈 거거든요. 근데요. 쌤하고 비슷한 영화 배우를 찾았어요.”
“영화 배우?”
누구지? 처음 듣는 말인데, 영화 배우라고 하니 왠지 솔깃하다.
“그 있잖아요. 그 옛날 영화 배우 있잖아요. 스티븐 시걸이라고. 수많은 감정을 하나의 표정으로 담아내는 미국 배우. 그 배우가 흑화하면 딱 쌤이에요. 애들이 그 사진에 쌤 얼굴 합성했는데 다들 빼박이래요.”
참나. 그래, 시험 보느라 스트레스도 많을 텐데 잘 가지고 놀다 제자리에만 가져다 놔라.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이 만족스러웠는지, 최서진은 씩 웃으며 영어 강의실로 뛰어갔다.
“쌤, 내가 사진 톡으로 보내 줄게요.”
처음에는 큰 키와 인상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 나를 어려워했다. 그 와중에 스스럼없이 다가온 최서진 덕에 수업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나름대로 고마운 마음도 갖고 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스티븐 시걸이라니. 로버트 패틴슨이면 모를까.
강의실로 종종거리며 걸어 들어가는 아이들이 하는 인사를 일일이 받아 주며 교무실로 들어갔다.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박태준이 다가왔다.
왜 실실거리지?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설마 나처럼 5만 원······일 리가 없지.
“하 쌤, 오늘 회식 갈 거지? 오늘 영어과에 새로 오는 유나희 쌤 환영회도 같이한대.”
박태준이 넌지시 물어왔다. 대형 인강 업체에 점차 밀린다고 생각해서인지 우리 학원도 인강을 위한 강사 보충이 한창이다. 스튜디오도 새로 꾸민다고 공사도 진행 한창이고. 유학파에 한칼 하는 미모의 영어 쌤이라고 수군대더니 결국 왔나 보다.
“오늘 제가 일이 좀 있어서 어려울 것 같은데요.”
유나희든 유난히든 관심 없다. 정신없던 시험 기간도 끝났고 학원도 일찍 끝나는 오늘은 조용히 혼술하며 복권을 긁을 계획이거든. 가뜩이나 말 많은 학원 강사들 회식 자리는 사양하고 싶다. 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기운이 입으로 쏠려 있다. 그런 양반들이 술까지 한잔 들어가면 정말 골치 아파진다. 무엇보다 저 박태준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 서글서글한 얼굴에 보기 좋은 눈웃음을 치는 박태준은 누가 봐도 호감형이다. 그러면 뭐해. 난 이상하게 께름칙한 걸. 불길한 척력 같은 게 강하게 느껴진다.
일반 직장과 달리 학원은 회식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면 눈 밖에 나는 건 당연지사다. 그런 경우만 아니라면 회식 참석은 강제되지 않는다. 실력이 깡패라고 기름처럼 동동 떠다녀도 퍼포먼스만 좋으면 멋대로 해도 알아서 모신다. 그런 면에선 연예계 판이랑 비슷한 것도 같다.
“근데 하 쌤, 혹시 유나희 쌤 얼굴 봤어? 나 아까 커피 한잔하면서 잠깐 얘기를 해 봤는데 목소리도 끝내줘. 아, 우리 수학과에는 왜 여신이 없을까?”
구석에서 초코바를 씹으며 상담일지를 쓰던 수학과 부팀장 마경희가 쏘아 댄다.
“박 쌤, 여신이 온다고 해도 감당할 수나 있겠어? 나희 쌤 잘 나가는 재력가 집안의 따님이래. ”
“커피 마시면서 몇 마디 나눠봤는데 살짝 느낌 있었어요.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이에, 호감이라고 해도 좋을 기류 같은 게 오갔다고요.”
마경희는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박태준을 바라봤다.
“이봐, 박 쌤. 지난번 사탐 연희 쌤 왔을 때도 그 말 하지 않았어? 또 그 전에······.”
“부팀장님! 그건 그냥 인사였다고요, 인사!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제가 아무한테나 껄떡대는 줄 알겠네요.”
“말은 정확히 해. 아무한테는 아니지. 꼭 못 올라갈 나무만 골라 쳐다봐서 문제지. 그리고 나희 쌤 한 성깔 한다고 하던데? 부원장 쌤이 스카우트하는데 얼마나 애먹였는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다더라.”
한마디 더 하려던 박태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내가 봐도 박태준은 부팀장의 상대가 아니다.
체급이 다르다, 체급이.
마경희는 혀를 차며 상담 일지를 들고 교무실을 나서며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수학 쌤이잖아.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박태준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한숨처럼 작게 말을 뱉었다.
“아, 하 쌤. 어떡하지? 아무래도 내 인생에 ‘마’가 낀 것 같아. 마경희라는 ‘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박태준도 교무실을 나섰다. 확실히 인간관계에도 먹이사슬이 존재한다. 세상 능글맞은 박태준이 마경희 부팀장 앞에서는 옴짝달싹도 못 하는 것만 봐도 확실하다.
이런저런 잡무를 부지런히 마무리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꼬박 세 시간이나 걸렸다. 교무 일지나 출석부 같은 것들을 챙겨 들고 마경희에게 건네줬다. 필요한 사항들을 전달한 후 마경희에게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래? 어지간하면 같이 가는 게 어때? 오늘 전체 회식이라 원장님도 오신다던데?”
그럼 더 빠져야지. 학원 강사의 가장 큰 메리트가 윗사람 눈치 안 보는 건데, 그런 이점을 포기할 수야 없잖아.
같이 한 잔 못 해 아쉽다, 수학과 회식에는 꼭 참석한다고 다짐하라는 등의 협박 아닌 협박에 굴복하고 나서야 교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마경희가 간이 두 개라는 소문이 있던데 괜히 약속했나 싶다.
엘리베이터 옆 휴게실에서는 박태준이 처음 보는 여자를 앞에 두고 있었다. 함박웃음까지 지으며 연신 떠들기 바쁘다. 상대해주고 있는 여자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어째 박태준은 오늘도 남의 다리 긁고 있는 것 같다.
저 여자가 유나흰가 보네. 그나저나 예쁘긴 예쁘다. 블랙진과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나 싶을 정도다.
어, 근데 어째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다. 괜히 말 섞으면 길어진다.
날 향해있는 박태준과 여자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엘리베이터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이쪽으로 온다. 왜지?
성큼성큼 걸어온 여자가 대뜸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하정운 선생님.”
뭐지? 날 아나? 처음 보는 사람인데. 괜히 아는 척했다가 망신당할까 봐 솔직히 물었다.
“미안합니다. 어디서 뵌 적이 있던가요?”
작고 하얀 얼굴에 가늘게 뻗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찡그린 얼굴도 예쁘다.
인강을 찍는다더니 카메라발은 죽이겠다. 한 발 더 다가오며 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본다.
“흐음. 정말 기억 못 하나 보네요. 난 가끔 꿈도 꾸는데.”
뒤따라온 박태준의 낯빛이 곱지 않은 게 유나희가 하는 말을 들었나 보다.
“하 쌤, 유나희 쌤하고 아는 사이야?”
필사적으로 기억을 쥐어짜 봤지만, 말짱 헛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자존심 상하네요. 내 딴에는 흔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인상이나 겉모습이 쉽게 장난을 칠 수 있는 편은 아니다. 저리 진지하게 얘기하는 걸 보니 어디서 보긴 봤나 본데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저 정도 미모면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미안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어서요.”
잠시 잠깐 어마무시한 의느님의 도움을 받아 못 알아보나 고민했는데, 그것도 아닌 듯했다.
“괜히 손해 보는 것 같네. 빨리 기억해 봐요.”
이상한 여자다. 혹시 강사가 아니라 ‘도믿걸’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고마울 줄은 몰랐다. 얼른 올라타려고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카메라나 마이크 그리고 보이스 레코더를 든 사람들인 걸 보니 기자다.
“유나희다!”
그 말을 시작으로 기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댓글(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