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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남. 보디가드 설이준 (1)

2015.03.30 조회 165 추천 5


 하교하는 여고생들이 짠 것처럼 걸음을 늦춘 채 교문 쪽을 흘깃댔다. 그곳엔 정장 차림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검은 커트 머리가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아래에 자리한 이목구비는 반듯하고 깔끔했다. 한눈에 팍 들어오진 않지만 볼수록 묘하게 눈길이 가는 외모였고, 중성적인 매력까지 느껴졌다. 남자라고는 40대 이상 남자밖에 없는 여고에서 저 남자의 등장은 하늘에서 떨어진 혜성과도 같았다.
 여학생 중 몇 명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척하면서 남자의 사진을 찍고는 도망쳤다. 뒤이어 여기저기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이준이 흘깃 쳐다보자 여학생들은 얼굴이 발긋해져서는 ‘꺄악’ 소리를 내지르며 교문 밖으로 내달렸다.
 “에효.”
 예전이라면 질색했을 테지만 이젠 비일비재한 일이라 이준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 한차례 여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금세 교문 앞이 텅 비었다. 그제야 이준은 다리에 힘을 풀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오랜 시간 서 있으니 다리가 아팠다.
 “오늘도 자네 인기가 여전하구만.”
 교문 앞을 쓸던 경비원 김 씨가 껄껄 웃었다. 그러자 이준이 말도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여자가 여자한테 인기 많아봐야 어디에 쓰겠어요?”
 “허허, 그러게 말이네. 여학생들이 알면 땅을 칠 일이지. 전부 다 자네가 남자인 줄 아는데 말이야. 어제는 사랑 고백까지 받았다며?”
 경비원 김 씨의 말에 이준은 불쾌한 걸 씹은 것마냥 표정을 굳혔다.
 “말도 마세요. 생각하기도 싫으니까요.”
 이준이 이 학교로 파견된 것은 석 달 전 일이었다. 날로 심각해져 가는 교내 폭력과 더불어 근처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을 차단하고자 학교 측에서 이준이 소속된 ‘강.남. 보디가드’로 의뢰를 넣었다. 작은 규모인 만큼 책정 금액도 낮았기 때문이다. 강.남. 보디가드는 이번 의뢰가 학부모 측을 안심시키려는 본보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날 가장 한가했던 이준이 학교 측으로 파견되었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교하던 여학생들이 흘깃대기 시작하더니 일주일 후부턴 사탕이나 초콜릿을 건네주는 여학생까지 생겼다. 얼떨떨하던 이준이 이유를 알아내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참 잘생기셨어요. 제 이상형이세요.”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린 여학생이 초콜릿을 건네주며 수줍게 말을 건넸다. 그제야 이준은 여학생들이 자신을 남자로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학생이 멍하게 서 있는 자신과 셀카를 찍고 도망쳐 갈 때까지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뒤늦게 텅 빈 교문 앞에 서서 억울하다며 소리치는 이준에게 경비원 김 씨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손거울을 내밀었다.
 
 “남자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얼굴과 키야. 거기다가 헤어 스타일까지 남자같이 하고 다니니까 더더욱 그렇지.”
 
 경비원 김 씨의 말에 이준은 울컥했으나 반박할 수 없었다. 173에 달하는 키에 짧은 커트 머리, 여자치고 선이 짙은 외모 탓에 아주 가끔 남자로 오해받곤 했다. 특히 지금처럼 살짝 큰 정장을 입었을 땐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후 이준은 자신이 여자임을 밝히려 했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학교 측에서 말렸다.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일차로 여자 보디가드를 학부모가 좋아할 리 없다는 것과 이차로 이준이 학교의 스타로 떠오르면서 학생들의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계약 기간까진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구했고, 업체 측은 이준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요구를 수용했다. 어쩔 수 없이 이준은 무려 석 달이 넘게 머리를 기르지 못한 채 강제로 남장을 하고 있어야 했다. 이젠 제법 이 사실에 적응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아저씨, 저는 한 바퀴 돌아보고 올게요.”
 시름에 잠겨 있던 이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이럴 땐 몸을 움직여서 잡생각을 털어내는 것이 제격이었다.
 “씩씩하구만, 역시!”
 김 씨가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당연하죠! 제가 누군데요! 한 바퀴 돌고 나서 도와드릴게요!”
 이준도 뒤따라 엄지손가락을 척 내보인 후 교문을 빠져나왔다.
 동남여고 주변은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되었다가 건설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골목의 주택 절반 이상이 텅 비었다. 그 때문에 엉망진창으로 버려진 집이 많았고, 음습한 곳을 찾아 들어오는 범죄자들도 꽤 많았다. 실제로 범죄자들에게 학생 몇몇이 피해를 입는 일까지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이준이 주변을 자주 둘러보면서 그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이준은 걸음을 빨리한 채 주변을 매의 눈으로 둘러보았다.
 “그래, 나를 남자로 아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이준은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일단 여학생들에게 받는 간식거리가 쏠쏠했고, 그로 인해 학교 분위기까지 좋아졌다고 하니 자신으로선 이득이었다. 어차피 며칠 후면 계약 기간도 끝난다. 물론 학교 측에선 재계약의 의사를 보였지만.
 이준은 일단 이렇게 편한 일자리를 갖게 된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골목을 걸었다. 학교가 지정한 곳까지 두어 바퀴 둘러본 후, 교내까지 한 바퀴 둘러보면 이준의 하루 일과는 끝이었다. 이준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기분 좋게 골목 이곳저곳을 둘러볼 때였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목 귀퉁이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절대로 우리가 갈취하거나, 돈을 빼앗거나, 위협을 가하는 게 아니에요. 말 그대로 사정이 어려워서 구걸하려고 하는 거니까 오해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형님.”
 “그러니까요. 그냥 불우이웃을 도우라는 거죠. 얼마나 좋아요? 형님은 덕을 쌓아서 좋고, 우리는 가난을 구제받아서 좋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두루두루 좋은 일이지요.”
 “캬아! 이런 운명적인 만남이!”
 들리는 목소리가 꽤나 시끄러웠다. 이준이 발소리를 죽인 채 골목 안쪽을 훔쳐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 세 명이 남자 한 명을 에워싸고 있었다. 딱 봐도 무슨 상황인지 견적이 나왔다. 이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상황을 좀 더 관찰했다.
 골목 구석으로 내몰린 피해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구석에 서 있는 터라 겨우 소맷자락만 보일 정도였다. 피해자는 겁을 먹은 건지 순순히 지갑을 꺼내 남자 셋에게 던져 주었다.
 “역시 이렇게 말귀를 잘 알아듣는 형님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번성하는 겁니다.”
 지갑을 받아 든 남자가 씩 웃으며 지갑을 열더니 ‘헉’ 소리를 냈다.
 “뭔데? 얼만데 그래?”
 일행의 격한 반응에 두 명의 머리가 한곳에 모였다. 셋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더니 큰 액수에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이야, 형님. 구세주가 보내셨네! 우리의 가난을 구제해 주시려고 형님 같은 분을 보내주신 거야!”
 지갑을 든 남자 하나가 감탄하며 물개박수를 쳤다. 그러더니 ‘형님, 형님, 아휴, 우리 형님!’이라고 이죽거리며 지갑 속에 든 돈을 확 꺼냈다.
 툭. 남자 하나가 지갑을 뒤로 홱 던졌고, 동시에 이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못 봤으면 모를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잠시 짧은 머리를 세게 쓸어 넘긴 이준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 귀퉁이에서 나뒹구는 지갑을 들어 탁탁 털었다. 광택 하며 재질이 값비싸 보였다. 슬쩍 지갑에 붙은 로고를 보니 명품 문외한인 자신도 아는 명품이다. 남자 셋이 함박웃음을 지은 이유를 지갑만 봐도 알 만했다.
 “야, 넌 뭐야?”
 갑자기 들어와 빈지갑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준을 향해 짧은 머리 남자가 소리쳐 물었다.
 “뭐긴 뭐겠어.”
 이준이 건성으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남자 앞에 바짝 다가가 지갑을 쫙 벌렸다.
 “뭐 하는 거야?”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험악하게 물었다.
 “다시 넣어.”
 이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 뭐?”
 “손에 들고 있는 그 돈, 다시 여기 넣으라고.”
 “넌 뭐야?”
 “알 거 없고 넣어. 입 아프게 몇 번을 말하게 만들어?”
 딱 봐도 돈을 갈취하는 현장에 겁 없이 뛰어든 이준을, 남자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뒤를 흘깃 살피며 일행이 있는가를 살핀 남자는 이준이 혼자라는 걸 확인하고는 픽 웃었다. 아주 가끔 정의를 구현하려는 어쭙잖은 녀석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지금 이게 어디서 수작질이야? 형님 도우러 왔냐? 근데 어쩌냐? 저 형님이 이미 우리한테 돈을 다 주셨는데? 우리가 한 번 받은 돈은 뱉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혼나기 싫으면 꺼져라, 확 그냥 발라 버리기 전에.”
 남자의 험악한 기세에도 이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너, 고딩이지?”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남자가 버럭 소리 질렀으나, 움찔하며 당황하는 기색을 이준은 이미 파악했다. 이준은 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성큼 걸었다.
 “외투 안에 동성고 체육복 아냐?”
 이준이 남자의 소매를 가리켰다. 남자가 자신의 소매를 흘깃 보더니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무슨 소리야! 미쳤냐? 비슷한 옷이 한두 개냐?”
 “한두 개는 아니지만 그 옷은 동성고 체육복이 확실해.”
 “졸업생은 체육복도 못 입냐?”
 남자의 말에 이준이 픽 웃었다.
 이게 누구 눈을 속이려고.
 “동성고 체육복은 작년에 바뀌었어. 고로, 그 체육복 소지자는 재학생이라는 말이지. 그래, 뭐, 동생의 것일 수도 있고 사촌 동생 걸 수도 있지. 그런데 양쪽 어깨의 옷이 꽤 많이 눌렸네?”
 이준이 남자의 양쪽 어깨를 가리켰다. 흠칫하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준이 말을 이었다.
 “백팩을 메고 다녀서겠지? 거기다가 짧은 머리, 신발에 묻은 모래 자국. 학교를 오가느라 묻은 모래겠지.”
 “장난치냐? 학생이 이 시각에…….”
 남자는 자신이 이준의 말에 휘말려 간다는 것도 잊은 채 꼬박꼬박 대답했다. 자신이 한시라도 빨리 고등학생이라는 확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듯이.
 “동성고 오늘 오전 수업 있는 날이야. 불행히도 내 동생이 동성고라서 알거든.”
 이준이 싱긋 웃으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아악!”
 동시에 남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에 못 이긴 남자가 점점 무릎을 굽혔다. 그 와중에도 자신이 체격 작은 남자에게 당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일행들이 위협적인 표정으로 성큼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비리비리하게 생긴 새끼가!”
 “확 그냥!”
 두 놈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친구들 멈추게 해, 더 아프기 전에. 재수 없으면 손가락 골절로 안 끝나. 이 손, 쓰기 싫어? 영원히 바이바이하게 해줘?”
 이준이 남자의 일행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전보다 더욱 기이하게 팔이 꺾인 남자가 소리 질렀다.
 “저, 저리 꺼져, 이 새끼들아!”
 “야! 그래도!”
 “꺼지라고, 이 새끼들아!”
 남자의 비명에 친구 둘이 주춤하며 멈춰 섰다. 이준은 남자가 자신의 눈높이까지 무릎을 굽히고서야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동성고에 다니는 미친개 아니?”
 “으, 으.”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다 말고 미친개라는 말에 흠칫 반응했다.
 “난 좀 잘 알아.”
 “으, 윽!”
 “미친개한테 일러바치기 전에 그냥 가는 게 좋을 거야.”
 이준이 손을 놓자 남자가 휘청거리다 꼴사납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준은 손을 뻗어 남자가 근근이 쥐고 있는 지폐를 낚아챘다. 이준은 현금을 지갑에 밀어 넣다가 멈칫했다.
 무슨 현금이 이렇게 많아?
 다시 보니 전부 오만 원짜리였다. 대체 이 많은 현금을 왜 소지하고 다니는 거지? 일단 다른 사람의 재정에 관심을 오래 둘 필요는 없었다. 현금을 밀어 넣자 지갑이 빵빵해서 터질 지경이었다.
 “진짜 이 새끼가!”
 남자 일행 중 하나가 손을 치켜들며 성큼 걸어왔다. 그러나 이준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히 지갑을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미친개.”
 그 한마디를 뱉자 다가오던 남자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이준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너희 학교 미친개랑 나랑 아는 사이라니까?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 너희도 알지? 미친개가 생각 외로 의협심 강한 거. 산 채로 지옥 보기 싫으면 가. 믿기 싫으면 나 한 대 때리고 차후의 상황을 봐도 좋고. 아마 미친개가 너희를 산 채로 물어뜯을걸?”
 남자 셋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음울한 얼굴로 수군대기 시작했다. 미친개가 누구던가. 성격은 불같고, 그 불같은 성격에 싸움까지 잘해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 대체로 멀쩡한 인간인 척하지만 한 번 미치면 막을 자가 없다는 설이태. 그 손에 걸렸다간 반죽음이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셋 중 한 명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며 속삭였다.
 “가자.”
 “저 새끼 말을 어떻게 믿어? 그냥 미친개랑 아는 사이라고 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
 짧은 머리 남자가 이준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래도, 일단 가. 미친개라잖아. 그리고 미친개는 우리만 쓰는 은어야. 그걸 저 새끼가 알고 있다는 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아 씨, 지갑은?”
 “일단 포기해. 다른 새끼 찾아보면 되지.”
 “에이 씨.”
 짧은 머리 남자는 이준의 손에 들린 지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게 다 얼마던가. 아쉬웠으나, 목숨보다 아깝진 않았다.
 “에이 씨, 퉤!”
 욕을 하던 남자 셋은 주위를 살피다가 얼른 사라졌다. 바람 부는 소리가 크게 들릴 만큼 골목이 고요해졌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골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다 얼마야.”
 이준은 한숨을 훅 내쉬었다. 오만 원짜리 지폐가 두둑하게 든 명품 지갑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지폐는 얼추 봐도 자신의 한 달 월급이 훌쩍 넘는다. 이 월급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이준은 지갑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둑한 골목의 끄트머리에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지갑조차 찾으러 오지 않다니. 굉장한 부자이거나, 굉장히 겁에 질려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괜찮아요?”
 이준은 남자를 자세히 보려고 한 발자국 다가갔다. 남자는 키가 생각보다 컸다. 키가 170이 넘어가는 자신이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할 정도다. 거기다가 가까이서 본 인물은 보기 드물게 수려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준은 그의 초연한 태도를 보고 그가 겁에 질리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그럼 대체 왜 가만히 서 있었을까. 이준은 그가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지갑을 내줬던 상황을 떠올렸다. 뭐, 이유야 어쨌든 이렇게 덩치가 큰데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 가만히 있다니. 덩치가 아깝다.
 이준은 지갑을 마저 탁탁 털었다.
 “지갑에 기스가 몇 군데 났어요. 뭐, 그래도 현금 안 빼앗긴 게 어디예요. 자! 받아가요.”
 이준이 지갑을 내밀자, 남자가 그 지갑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갑을 바라보는 눈길이 다른 사람의 것을 바라보는 듯했다.
 “팔 아파요. 받아가요.”
 이준이 한 번 더 재촉하고 나서야 남자가 손을 뻗어 받아갔다. 마치 더러운 것을 집는 것처럼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만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더 만지기 싫다는 듯 자신의 뒷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준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흠 잡을 데 없는 헤어스타일, 깔끔한 옷차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신발까지 다 확인한 이준은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보아하니 이 동네 사람 같지는 않은데 웬만하면 앞으로 여기 오지 마요. 위험한 곳이에요. 보다시피 사람 없는 폐가가 많다 보니 곳곳에서 범죄자가 많이 찾아오거든요. 돈 빼앗기기 싫으면 오지 마세요.”
 이준은 좀처럼 부리지 않는 오지랖까지 부렸다. 다행히 남자를 위협하고 있던 게 고등학생이라서 일이 빨리 끝났지, 진짜 깡패였다면 피곤한 일이 생길 뻔했다. 아무리 날고 긴다는 자신이지만 깡패 세 명을 이 좁은 곳에서 상대하기란 벅찬 일이었다.
 “자, 지갑은 돌려줬겠다, 빨리 말해요.”
 “무슨 말?”
 남자의 목소리가 깊고 낮았다. 그러나 이준은 귀를 감싸는 남자의 목소리보다 다른 것에 신경이 쏠렸다.
 “반말?”
 이준은 잠시 기가 막혀서 허, 하고 웃었다. 구해줬더니 봇짐 찾아내라는 속담은 들어봤어도, 구해놨더니 반말한다는 건 처음 들어봤다.
 “그쪽이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닐 텐데?”
 이준이 팔짱을 낀 채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가 뭘 바라냐는 듯 쳐다보았다. 잠시 기가 막힌 이준은 눈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고맙다고 해야 할 거 아냐. 구해주고, 수수료 한 푼 받지도 않고 지갑까지 돌려줬는데 입을 싹 닦아?”
 “어차피 돈만 주면 끝날 일이었는데, 굳이 끼어든 건 너야.”
 남자가 귀찮다는 말투로 말했다.
 “뭐?”
 이준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이준을 흘깃 쳐다보더니 냉담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네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고.”
 다시 한 번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귀를 감쌌다. 이준의 눈썹이 뾰쪽해졌다.
 “아, 그러니까 쓸데없이 끼어들었다는 거야?”
 “어.”
 남자의 냉랭한 말을 들은 이준은 픽 웃었다. 남자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게.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네. 하, 진짜 살다 보니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이준은 주머니에서 낡은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명함 한 장을 뽑아 남자에게 내밀었다.
 “받아.”
 남자가 이게 뭐냐는 듯 쳐다보았다.
 “내 명함이야.”
 “이걸 내가 왜?”
 더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이준은 그런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성격 결함이 있어서 여기저기서 노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받아놔. 돈은 넘치도록 많아 보이는데, 목숨 귀한 줄 알면 보디가드 고용해. 이 일대에 나만큼 보디가드 잘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남자의 시선이 이준이 내민 명함으로 향했다.
 
 ―강.남. 보디가드 설이준.
 
 “보디가드?”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묻더니, 다시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필요 없어.”
 “내가 보기엔 그쪽은 꼭 보디가드 데리고 다녀야 해. 안 그러면 길에서 칼 맞는 건 일도 아니겠어.”
 이준의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짐작대로 명함을 받지 않았다. 이준은 성큼 다가가서 남자의 손을 잡았다. 동시에 남자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더러운 거라도 밟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이준은 이 남자에게 결벽증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남자의 사정이었다. 얼른 손을 뒤로 빼려는 남자의 손바닥 위에 재빠르게 자신의 명함을 올렸다.
 “목숨은 귀한 겁니다.”
 이준이 그 말을 한 후 손을 떼어냈다. 동시에 남자가 손을 뒤집었다. 명함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기분이 상할 만도 하건만, 이준은 마치 남의 일처럼 혀를 끌끌 차더니 명함을 다시 주웠다.
 “떨어뜨리면 주우면 되고, 버릴 것 같으면 넣어주면 되고.”
 이준이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며 보란 듯이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 명함을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남자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읽듯이 이준이 말했다.
 “결벽증 있지?”
 “…….”
 “대인 관계도 별로고.”
 “…….”
 “거기에다가 길치.”
 “…….”
 이준이 말을 이을수록 남자의 얼굴이 점점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너, 누구야?”
 남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고 묻는 게 아니라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야지. 궁금하면 찾아오세요. 다시 또 뵙겠습니다, 돈 많은 고객님.”
 이준이 웃으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을 모두 빠져나온 이준은 힐긋 뒤를 보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 이준의 얼굴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남자는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
 “싸가지 없는 새끼.”
 이준은 골목을 노려보며 혀를 끌끌 찬 후에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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