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가난하다.
그냥 힘들다 어렵다 수준도 아닌. 진짜배기로 가난하다. 만약에 가난한 집에도 정석이란 게 있다면 딱 우리 집이다.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일하던 도중 사고를 당해서 일찍 돌아가심. 어머니는 어린 나만 남겨놓고 그나마 알량하게 받아낸 보상금을 들고 새 출발하러 도망쳤음. 그 뒤로 연락 두절.
일가친척이라고는 본인 한 몸 건사하시기에도 늙어버리신 할머니 한 분. 그리고 진작에 인연을 끊어버려서 어딨는지도 모르는 삼촌 하나.
나중에 초등학교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을 수 있다면 세계 상위 30퍼센트 정도 된다고 한다.
선생님의 의도는 너희는 결코 가난한 편이 아닌 거라는 나름의 교육적인 그것이었겠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우리 집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계 상위 30퍼센트조차 못 들어가는 집이구나. 왜냐면 그때만 해도 우리 집에는 냉장고가 없었으니까.
할머니는 손주의 재롱을 보는 대신에 아직 어렸었던 나를 업고 시장에서 폐지를 주워다 파셨다. 그래도 시장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잘 자랐다.
무언가를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보고 싶다는 꿈도 없던 그런 암울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대충 그 날은 연말쯤 됐던 것 같다. 그날따라 할머니는 밤늦게야 집에 도착하셨다. 손에는 웬 폐지 꾸러미를 든 채로.
"에구구. 이것 좀 받아라."
"할머니. 이게 뭐야?"
"요 앞 헌 책방 아저씨가 너 선물하라고 주셨다."
"가...감사합니다."
"감사는. 나중에 꼭 책방 아저씨네 가서 인사드려라."
할머니에게 받은 건 60권짜리 만화로 된 삼국지. 교과서나 복지센터에서 받은 책 선물 외에 처음 받아본 만화책이었다.
할머니는 만화책이 나한테 좋지 않다고 한 번도 사거나 가져오신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책방 아저씨의 성의를 봐서 고물상에 갖다 팔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신 모양이다.
내 인생 최초의 삼국지. 그리고 처음으로 만나게 된 유비라는 인물.
나만큼이나 가난한 밑바닥 인생에서 시작해서 수많은 고난을 딛고 일어나서 결국 촉 땅까지 점령해 황제까지 올라간 이야기.
다른 영웅들, 위나라의 조조나 오나라의 손권에게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어쨌거나 모든 기본적인 환경이 주어졌으니까.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결국 관우와 장비의 다소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분노한 유비는 결국 오나라를 침공하는 무리수를 뒀고. 결국 이릉에서 패망.
그 대목에서는 너무 화가 나서 한동안 그 이후 내용은 안 보려고도 했었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해서 끝까지 봤고. 남은 건 꽤 크게 허망함이었다.
결국 진이라는 이상한 나라가 마지막에 등장해서 천하통일이라는 당시 내 눈에는 이상하게만 보였던 결말. 촉도 위도 오도 아니라 진나라는 뭔 소리였는지.
어쨌든 삼국지 만화책은 돈은 없고 시간만 많은 나에게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고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좋은 친구였다.
삼국지를 읽는 동안에는 가난하다고 은근히 무시받고 따돌려지지 않아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가난해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안겨주었다.
한 컷 한 컷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죄다 달달달 외울 수 있게 되고 하도 읽어대서 책의 페이지들이 걸레로도 쓰기 망설여지도록 너덜너덜해질 무렵.
나는 스무 살 어른이 되었다.
스무 살은 별 거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걸 보지 못하시고 먼저 돌아가셨다.
그래도 중학교 올라가자마자 시장의 잡일들을 돕고 복지센터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아서 할머니가 그 후로는 더 이상 폐지를 줍지 않으시다가 편하게 돌아가셨다는 건 좋았지만.
장례식장은 그래도 시장 사람들하고 복지센터의 사람들이 와 주셔서 그럭저럭 쓸쓸하지는 않았다. 장례도 나름대로 잘 치뤘고.
할머니는 복지센터에서 알아봐주신 한 추모공원에 모셔졌다. 자주 찾아뵙기에는 다소 거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추가적으로 비용이 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공부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시장에서 일도 도와서 체력도 또래들보다 훨씬 좋았고 세상 살아가는 요령도 많이 익혔다.
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게 없다. 복지센터 선생님은 대학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계속 권하셨지만 거절했다. 그렇다고 시장에서 한 자리 받아서 장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시장 사람들은 정말 좋았지만.... 뭐. 그냥 그렇게 살기 싫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끊지 않은 건 오로지 삼국지 하나. 모은 돈으로 작은 컴퓨터도 마련해서 시간만 나면 하루종일 삼국지 관련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정사도 찾아보고 삼국지 관련 게시판에서 활동도 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하고 싸우기도 하고.
하지만 컴퓨터를 끄면 밀려들어오는 허무함. 뭘 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삼국지 세계였으면 뭐라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로부터 1800년이나 뒤고.
"뭐...뭐야...어떻게 된 거야."
그냥 평범하게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잠에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까 내가 아는 풍경과는 전혀 다른 공간.
물론 우리 집이 현대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결코 세련된 집은 아니었지만. 지금 내가 와 있는 집은 그야말로 사극 또는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옛날 집.
그리고 대한민국도 아닌 것 같다.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변한 건 환경뿐만이 아니었다. 내 몸도 누가 봐도 작아져 있다. 스무 살 청년의 모습은 없고 기껏해야 열 살이나 됐을까. 일단 볼을 꼬집어 본다. 가능한 한 세게.
"아야!!"
꿈은 아니다. 혹시나 해서 몇 번씩 뺨을 때려봤지만 여전히 아프기만 할 뿐 꿈에서 깨지 않는다. 그래서 여긴 대체 어디지? 누가 날 여기다 가져다둔 거지?
"여아야!! 콜록콜록콜록!!! 여아야!!!"
갑자기 들려오는 여인의 갸냘픈 목소리.
"여아야!! 콜록콜록!!"
일단은 나가보기로 결정했다. 여아라는 호칭이 나를 부르는 것이든 아니든. 일단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가서 상황을 물어보자.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누가 봐도 이제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은 병색이 완연한 여인. 환자가 누워있기에는 딱 봐도 결코 좋은 곳이 아니다. 오랫동안 안 빨았는지 요와 이불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솔직히 우리 집도 가난했지만 이건 확실히...
여인이 나를 바라보더니 기침을 멈추고 웃어보인다.
"여아...우리 여아 왔구나... 내 아드을......"
평생 못 들어볼 말일 줄 알았는데 낯선 장소에서 낯선 여인에게 들어보다니.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이 여인은 어린 날 매몰차게 버려두고 떠난 그 돼지같은 여편네보다는 예쁘다는 사실이다.
진짜 아들은 아니지만 일단은 적당히 맞춰드리기로 했다. 굳이 아니라고 말해봐야 이제 생명이 얼마 남아보이지 않는 분한테 예의도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분인데 굳이 그 앞에다 대고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닌데요.]라고 말할 배짱은 나한테 없다. 그러다가 충격받고 더 빨리 돌아가시면 잘못하면 책임을 져야할지도 모를테니까.
"예 어머니. 아들이 왔습니다."
"여아야. 콜록콜록. 잘 듣거라. 이 어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오래 사셔야죠."
"아니야...콜록콜록..."
솔직히 내가 들어도 무언가 어색한 연기 톤인데. 이 여인은 다행스럽게도 딱히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이 어미가 못나서... 어린 널 계속 고생만 시켰구나.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얼른 회복하셔야죠."
"저기...콜록콜록...저기 저 상자...콜록콜록콜록!!!"
여인이 힘겹게 집 구석 한 쪽을 가리킨다. 상자 하나. 이 집안에서 그나마 낡아빠지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랄까.
일단은 여인이 시키는 대로 상자를 가져온다. 여인이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상자를 열어젖힌다. 상자 안에는 작은 옥으로 만든 패 하나.
엄청 오래 전 만들어진 것 같다. 박물관에서 보던 건데. 그나저나 이 연극은 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아야."
"....네 어머니."
"이제 네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줄 때가 된 것 같구나."
"........아버지요?"
"그래. 그동안 숨겨와서 미안하구나. 그 동안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들어서 많이 속상했지?"
"괜찮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거의 평생 동안 없어봐서 괜찮지만요.
아무튼 여인의 말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으므로 차분하게 여인의 다음 대사를 기다린다.
"네 아버지는....이곳 하북 유주의 패자이자 영웅인 공손백규. 공손찬님이다."
여인의 말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는 하북 유주 땅이고. 나의 어머니라고 하는 여인의 정체는 공손찬 집의 계집종이었다가 그와 정을 나누게 되고 모종의 이유로 그와 떨어져서 나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 줄로 요약하자면. 나는 일단 공손찬의 아들이라는 거다. 뭐 이런 황당한 일이.
내가 잠깐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는 것을 느꼈는지 여인이 힘겹게 공중에 손을 뻗더니 간신히 입을 뗀다.
"미안...미안하구..."
그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손이 툭 떨어진다. 몇 년 전 일이지만 확실하게 기억한다. 이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그렇게 삼국지 세계에 넘어온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어머니를 잃었다.
우선 어머니의 시신을 방에 잠시 두었다. 다행히 겨울이라서 냄새는 심하게 나지 않겠지만 얼른 장사를 지내야 한다. 문제는 이 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공손찬 하나 뿐이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대충 외출할 채비를 마치고 집을 떠났다. 물어물어 공손찬이 있는 관청까지 다다랐다. 당연하지만 문지기가 앞을 막는다. 진짜로 삼국지 세상에 들어왔구나. 하긴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봐도 이제는 받아들여졌지만.
"웬 거지놈이냐!! 동냥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거라."
"공손 장군님을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뭐야?! 장군님이 네 놈하고 맞상대할 정도로 한가하신 줄 아느냐!! 썩 꺼지거라!!"
"무슨 소란이냐!!"
쩌렁쩌렁한 울림. 그리고 엎드리는 문지기. 얼른 문지기를 따라 땅에 엎드린다.
이 자가 공손찬. 삼국지에서는, 정확하게는 연의에서는 한참 위상이 떨어지는 못난이로 폄하당하지만 사실은 현재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명실상부한 최강의 군웅. 하지만 못난이로 묘사되어도 할 말 없는 행보도 가져가지만.
어쨌든 공손찬에서 원소에게 하북의 세력이 넘어가고 다시 조조가 그 세력을 집어삼키면서 삼국 통일 경쟁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세력이 된다.
그리고 일단은 내 아버지.
"너는 누구냐. 고개를 들어라."
"제 이름은 공손여입니다. 어머니께서 이것을 장군님에게 보여드리라고..."
공손하게 두 손 내밀어서 옥패를 공손찬에게 바친다. 슬쩍 바라보는데 표정이 흔들린다. 역시 아버지가 맞긴 하구나.
이렇게 되면 나도 아버지가 두 명이 되는 셈인가. 여포에 점점 더 다가서는 건가.
엎드린 채로 생각을 하던 와중에 공손찬이 주위 사람들에게 명령한다.
"이 놈을 포박해라!!!"
"예!!!!!"
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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