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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해적의 일기

1화. 해적

2023.01.09 조회 14,214 추천 387


 세찬 비가 쏟아지는 선상(船上)이 부산스럽다.
 새까만 그림자가 얽히고설켜서 의미 모를 몸짓을 주고받는데, 흡사 농자(聾者)의 춤사위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빗소리, 파도소리, 고래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세상에 가득했다.
 
 벼락 한 줄기가 바다에 떨어졌다. 새하얀 칼날에 새하얀 얼굴이 비치는 순간 쫓겨난 어둠이 되돌아왔다. 가엾은 영혼의 단말마는 찢어지는 천둥에 묻혀 흔적도 없이 쓸려갔다.
 
 술 취한 선장은 비, 바다, 바람, 그리고 저주받을 선상반란을 보았다. 소리를 질렀지만 듣는 이가 없었다. 춤사위는 격해지고 갈채는 붉게 타올랐다. 또다시 벼락이 떨어졌다.
 
 -배신자!
 
 처절한 한 마디가 가슴을 후비고 영혼을 적출했다. 선장을 배신한 해적은 심해 가장 깊은 곳에서 영겁토록 고통 받으니 이날의 반란은 필연적 실패였다.
 
 선장의 날카로운 칼이 배신자의 목을 후비고 동맥을 끊었다. 악에 받친 갑판원이 몸을 던졌으나 아무 의미 없었다. 취기가 사라진 선장의 칼날은 매섭고 정확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눈알을 꿰뚫었다.
 
 -보트가...
 
 세 번째 벼락이 치자 바다가 환하게 밝아졌다. 거친 파도를 힘겹게 넘어가는 두 척의 보트가 망막 깊이 새겨졌다.
 
 -선장님?
 
 외다리 해적이 피 묻은 칼을 떨구었다. 질문이 아니라 허락이었다. 일곱 개 바다의 모든 악마를 걸고 맹세컨대 배신자는 용서할 수 없었다. 선장의 분노가 갑판을 넘어 망망대해로 울려 퍼졌다.
 
 @
 
 개척자라 하면 듣기 좋고, 이주민이라 하면 점잖은데, 실상은 살인자, 도망자, 빚쟁이, 철부지 등으로 이루어진 케팔라 해(海)의 이름 없는 주점으로 새 손님이 들어왔다.
 
 싸구려 럼에 취한 주정뱅이와 주정뱅이 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와 소매치기 손놀림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일진 좋은 도박꾼의 시선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거친 바닷바람에 다소 헤지긴 했지만 각이 살아있는 트리코른(Tricorne, 삼각모), 스카프를 억지로 쑤셔 넣은 것만 빼면 그럭저럭 품위가 엿보이는 프록코트(Frock coat), 기장에 딱 맞춘 타이즈(Tights)와 코끝이 날렵한 가죽 부츠가 전체적으로 맵시 좋은 손님이었다.
 
 “뭐야, 계집이잖아?”
 
 키가 크고 복장이 해군스럽지만, 갸름한 얼굴과 매끈한 턱이 분명 여성이었다. 주정뱅이와 주정뱅이 친구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허나 맵시 좋은 여자 손님은 이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바(bar) 의자에 앉았다.
 
 “위스키.”
 
 코트 자락이 젖혀지며 날렵하게 생긴 커틀러스(Cutlass, 외날도)와 가지런히 꽂힌 플린트락 피스톨(Flintlock pistol, 수석총) 2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작을 부리기 위해 몸을 들썩이던 손님 중 절반이 빠르게 엉덩이를 붙였다.
 
 꼭 성별이 아니어도 열대 햇살을 핑계 삼아 헐벗은 채로 다니는 말단 선원은 아니었다. 거칠고 사나운 서드 컨티넨트 주민이지만 버커니어가 아니라 몸을 사릴 줄 알았다.
 
 “위스키는 다 떨어졌고, 럼뿐이오.”
 “술집에 술이 없어?”
 
 장사 수완을 의심하는 부끄러운 질문이었다. 술집주인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툭 뱉듯이 말했다.
 
 “버커니어(Buccaneer, 해적) 때문이오.”
 
 여자 손님의 두 눈이 육분의 눈금처럼 휘어졌다. 자세히 보니 왼쪽 눈꼬리 아래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술집주인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동네에도 해적이 출몰하나 봐?”
 “뱃놈 중 절반은 해적이니 새삼스럽지도 않소.”
 “그래도 절반은 성실한 선원이니까 구분할 수 있겠지. 제이크를 찾고 있어.”
 “사람이오?”
 “하는 짓이 사람 같지 않지만, 생긴 것은 일단 그래.”
 
 술집주인은 위스키 잔에 럼을 따라서 한 잔 내주었다. 기분을 내라는 걸까?
 
 “이름을 밝히고 술 마시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과묵한 친구는 아니야. 술 취했을 때는 특히 그렇지. 잘 생각해 봐. 시 서펜트(Sea Serpent) 호 출신인데, 키가 이만하고...”
 
 ‘시 서펜트 호’란 말에 술집주인과 술에 취하지 않은 손님이 모두 움찔했다.
 
 “저주 받은 바다뱀?”
 “저주?”
 
 술집 분위기가 한여름의 메인마스트처럼 달아올랐다.
 
 “폭풍우를 일으켜서 항로를 막고 오갈 곳 없어진 상선을 하나하나 사냥한다지?”
 “젊은 남자는 노예로 쓰고, 늙은 남자는 상어밥으로 주는 끔찍한 괴물!”
 
 여자 손님이 작게 한숨 쉬었다.
 
 “그게 말이 돼? 누가 봐도 헛소문이잖아.”
 “헛소문이라니? 이건 전부 사실이야! 내 친구가 시 서펜트 호에 습격을 받았는데 벨러스트(Ballast, 선체 밑바닥 화물)에 숨어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 그가 말하길 시 서펜트 호 선장은 키가 9피트나 되는 괴물이고 선원들은 얼굴이 까맣게 탄 악마의 하수인이야.”
 “그 정도로 크진 않아. 얼굴이 까만 것은 그냥 햇볕에 그을린 거지.”
 
 여자 손님이 해명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눈치 없는 취객 하나가 내 말에 시비 거냐고 분개했는데, 그 옆의 술친구들이 점잖게 말렸다. 해적의 봉쇄를 뚫고 찾아온 손님이 악명 높은 해적 집단을 옹호하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혹시가 역시로 바뀌기 전, 술집주인이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했다.
 
 “이곳에 오는 교역선 셋 중 하나가 시 서펜트 호를 만나오. 그래서 다들 예민하다오.”
 
 여자 손님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휙휙 저었다.
 
 “그건 관심 없고, 아까 한 말을 다시 생각해봐. 키가 이만하고, 팔이 이만큼 길고, 이쪽 뺨에 칼자국이 있는데...”
 
 그때 정오 햇살을 등지고 들어오는 손님이 있었다. 역광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 마침 키가 이만하고 팔이 이만큼 길었다. 여자 손님이 의자 위에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술을 아주 좋아해서 술집에 항상 들린다니까? 정말 기억 안 나?”
 “그, 그것이...”
 
 술집주인 표정이 기괴해졌다. 거들먹거리며 가게에 들어온 이만한 손님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충분했다. 햇볕에 그을린 까만 칼자국이 거짓말처럼 하얘졌다.
 
 “여, 여기 어떻게...!”
 
 제이크가 몸을 돌려서 가게 밖으로 뛰었다. 그러나 여자 손님이 한발 빨랐다. 플린트락 피스톨을 뽑아 대뜸 쏘았다. 쾅-!
 
 술집주인이 바 아래로 몸을 숨기고, 꾸벅꾸벅 졸던 손님 하나가 테이블 아래로 굴러 떨어졌지만, 그 외에 용감한 손님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자 손님은 왼손으로 두 번째 피스톨을 뽑았다.
 
 “움직이지 마!”
 
 장전된 총알만큼 호소력 있는 부탁이 없었다. 열 명 가까운 손님이 일제히 굳었다. 여자 손님은 구멍 난 허벅지를 붙잡고 낑낑거리는 제이크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제이크가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흡사 악귀를 본 것처럼 뒤로 기어 도망쳤다. 피가 철철 흘러 작은 도랑이 생기는데 막을 생각이 없었다.
 
 “서, 선장...”
 “선장이라니? 내 배에서 내렸잖아? 우리 남남이야. 생판 모르는 사이라고.”
 
 그 말이 흡사 사형선고 같았다. 제이크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 그게 아니야! 나는, 나는...!”
 “그래. 그래. 알고 있어. 넌 시키는 대로 한 거지? 배신할 생각 없었지? 굿맨(Goodman) 어디 있어? 그것만 말하면 고이 보내줄게.”
 “지, 진짜? 진짜 살려줄 거야?”
 
 여자 손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총만 아니면 친절한 옆집 누나 같았다. 제이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희망을 가졌다.
 
 “킹스덤 섬으로 갔어. 해군에게 사면 받는 조건...”
 
 쾅-!
 
 두 번째 피스톨이 불꽃을 뿜었다. 제이크는 이마 한가운데 구멍이 나서 술집 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제대로 절명하여 미동조차 없었다.
 
 “저세상으로 보내준다고. 혹시 오해할까봐 말하는데, 살려준다는 말은 한 적 없다?”
 
 여자 손님은 두 자루 총을 가죽 홀스터에 넣고 몸을 돌렸다. 술집주인이 바 위로 머리를 내밀고 쳐다보았다.
 
 “...시 서펜트 호 선장?”
 
 시 서펜트 호 선장. 케팔라 해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여자 해적이 삼각모를 벗어 술집주인과 손님에게 인사했다. 방금 사람 하나 해치운 것치고 해맑은 표정이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거 같아. 언제 또 올지 모르지만, 그때는 꼭 위스키를 들여놓으라고.”
 
 그녀가 진짜 시 서펜트 호 선장이라면 영원히 다시 오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그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작가의 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발 많이 읽어주세요... (굽신굽신)

댓글(47)

단명할팔자    
1화 보자마자 선작 등록했음.. 진짜 오래 기다렸다.. 편곤식 여주물..
2023.01.09 23:37
김캇슨    
이럴수가 벌써 봐버렸어
2023.01.10 10:56
노보그라드    
기다렸어요. 요번 주인공은 항해일지 남주랑 비슷한건가요? 로벨이나 레너드랑은 다른거 같군요.
2023.01.10 12:34
야크트기사    
오오. 다시 시작하시는 군요. 잘 보겠습니다.
2023.01.11 20:00
엘뮤즈    
신작감싸합니다!!^^
2023.01.12 20:25
꿀개    
출항이네요~
2023.01.15 09:59
인터셔리    
오 신작!!!! 카우걸 유니버스 이어지나... 기사일기 개꿀잼이었는데 하이눈이랑
2023.01.16 01:01
개지스    
작가님 저는 별 불만이 없는데 또 읽지도 않고 주인공 여자라고 안본다는 사람들 엄청 많을텐데 또다시 여주여만 했나요?
2023.01.16 18:26
ck*****    
우효! 대항해시대!
2023.01.16 19:04
ne*******    
부지런도 하시네요 벌써신작이라니~~
2023.01.1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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