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철권 마종의

1화

2015.04.07 조회 21,895 추천 676


 서장
 
 
 쌀 열 섬.
 비단 다섯 필.
 그리고 은자 스무 냥.
 그게 열다섯 살이 된 나의 몸값이었다.
 
 
 
 
 
 
 
 
 제일권
 
 
 
 1
 
 
 마종의(馬宗毅)가 산에서 캔 약초를 들고 집으로 들어섰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여동생만이 아니었다. 수상쩍게 생긴 거구의 노인 하나가 앞마당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무심을 가장한 냉정함으로 노인을 지나쳐서 낡은 툇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아홉 살 막내 수아(水芽)가 방에서 쪼르르 나와 그의 곁에 오도카니 앉았다. 평소라면 씻을 물을 떠오고 수건을 준비하는 등 부산을 떨 아이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으며 방안을 살펴보았다.
 어머니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그랬던 것처럼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로 가냘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두 동생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아버지는 그간의 모습과 달리 어머니 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채 지난겨울 낙상으로 인해 나뭇가지처럼 시들어버린 두 다리를 허탈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네 살인 둘째 민아도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웃는 낯으로 그를 맞이하던 아이가 오늘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문가에 앉아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마종의는 이제야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애써 미소를 머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회의적인 시선으로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장신이었다. 얼핏 봐도 팔 척에 육박하는 신장이었는데, 대신 바람만 조금 불어도 크게 휘청거릴 것처럼 대나무처럼 바싹 마른데다가 그리 높지 않은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얼굴에 살집이 없어서 전체적인 인상이 강퍅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적잖게 떨어져 있음에도 코를 찌르는 술 냄새와 제대로 단속하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에서 풍기는 강압적인 느낌이 가뜩이나 빈약한 호감을 더욱 추락시켰다.
 마종의는 애써 내색을 삼가며 물었다.
 
 “혹시 이문당포(里門當鋪)에서 오셨습니까?”
 
 거구의 노인이 대답했다. 생긴 것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런 셈이지. 마노이(麻老二)가 바로 나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마종의는 최대한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거구의 노인, 마노이의 눈빛이 문득 강렬하게 변했다. 마주보는 사람의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마종의는 본의 아니게 움츠러들었다. 진한 호기심 속에 거미줄처럼 휘감겨오는 기세를 마노이의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마노이가 예의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올해로 열일곱 살이라지?”
 “네 그렇습니다.”
 “어린 녀석이 꽤나 의연하게 구는구나. 설마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닐 테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문당포 정(頂) 노야께 연락받은 이후 줄곧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 노야께서 데리러 오실 줄 알았는데, 직접 오셨군요.”
 “일이 성사되면 거간꾼은 빠지는 것이 낫지.”
 “허면...?”
 “거두절미하고 말하마. 네가 요구한 그대로다. 이문당포에 빚진 은자 다섯 냥은 이미 갚았고, 나머지 열다섯 냥은 여기에 있다.”
 
 마노이는 작은 전대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마종의가 전대를 받아들고 속에 든 은자 열다섯 냥을 확인하자, 마노이가 다시 말했다.
 
 “쌀 열 섬과 비단 다섯 필은 저기 저 광에 넣어 두었으니 어서 확인해 보거라.”
 
 마종의는 주저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서 단칸방과 붙은 부엌 곁의 광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두 평 남짓한 광에는 쌀 열 섬과 비단 다섯 필이 차곡하게 쌓여 있었다.
 그는 광문을 닫고 만족한 얼굴로 방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둘째 민아에게 다가갔다.
 
 “그래 잘 참고 있구나.”
 
 그는 수중의 전대를 민아에게 건네주며 가만히 속삭였다.
 
 “내가 없어도 지금처럼 절대 울면 안 되는 거 잘 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또 참아. 이제 네가 이집의 가장이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를 돌보며 수아를 보살펴야하니까. 수아가 오빠에 대해서 묻거든 곧 돌아올 것이라고 하고.”
 “언제?”
 수아가 물었다.
 “언제 돌아오는데?”
 “우리 민아가 멋진 낭군을 만나기 전에.”
 
 민아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속이 깊었다. 몸이 떨릴 정도로 격정을 앓으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렁거리다가 떨어지는 눈물을 서둘러 소매로 훔치고 있었다. 아픔을 삼키고 있었다.
 마종의는 더 없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민아를 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오빠가 너무 못나서 그래.”
 “나도, 나도.”
 
 수아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왔다. 굶주림에 지쳐 누렇게 뜬 얼굴과 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몸을 무작정 그에게 던져왔다.
 마종의는 가볍게 민아를 떨쳐내고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낯으로 수아를 부둥켜안고서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오빠 일 갔다 오는 동안 언니 말 잘 듣고 있어야해. 알았지?”
 “알았어. 근데, 언제 오는데?”
 “수아가 한 뼘만 더 자라면.”
 “이만큼?”
 
 수아가 자신의 머리 위로 앙증맞은 한 뼘을 올려보였다.
 
 “그래 그만큼.”
 
 마종의는 배시시 웃는 수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큰 절을 올렸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종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한 번 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여동생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서 조용히 돌아섰다.
 
 “이제 다 됐습니다. 그만 가시지요.”
 
 마노이가 말없이 앞서 걸었다.
 마종의는 조용히 마노이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가 왔을 때처럼 그가 떠나가는 순간에도 굳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당신이 이기지 못한 아내의 병구완을 대신하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고, 끝내 자기 스스로 몸까지 팔아버린 아들의 모습을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불구가 되어버린 당신의 두 다리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 녀석 나이가 정말 열다섯이냐?”
 
 마노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쑥 물었다.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와서 손을 흔들던 두 여동생의 모습이 손톱처럼 작아졌을 때였다.
 
 “네 그렇습니다.”
 
 마종의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노이의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이 한결 더 짙어졌다.
 
 “그럼 혹시 나를 따라나서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느냐?”
 “아니요. 알고 있습니다만, 왜 그걸 물으시는 거지요?”
 “너무 냉정해서, 아니, 너무 태연해서 그런다. 그 나이에 그렇다니 너무 징그럽구나.”
 
 마종의는 그저 무심히 웃어넘겼다.
 마노이가 잠시 서서 그를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이내 발걸음을 재촉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더 중얼거렸다.
 
 “하긴, 그렇다기에 이런 후미진 어촌까지 찾아온 것이긴 하다만.”
 
 마종의는 대수롭지 않게 마노이의 말을 흘려버리며 묵묵히 뒤를 따랐다.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절대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아야했다. 그와 마노이를 연결해준 이문당포의 주인 정 노야가 내건 조건이 그것이었다.
 물론 진짜 조건은 따로 있었다. 그의 목숨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쌀 열 섬, 비단 다섯 필, 은자 스무 냥. 그게 오랜 가뭄과 기근 속에 어머니의 병구완으로 허덕이며 고통 받는 가족을 위해 열다섯 어린 가장이었던 그가 선택한 자신의 몸값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느냐?”
 
 마노이가 문득 물었다.
 마종의가 태어나고 자란 광동성(廣東省) 화현(樺府) 남곤산(南昆山) 외곽에 자리한 작은 마을 요양점(擾攘店)의 유일한 부둣가를 목전에 두고서였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따를 것. 그게 정 노야가 내건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여태껏 내 입으로 한 약속은 어긴 적이 없습니다.”
 
 마노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떤 의미가 담긴 웃음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으나, 절대 나쁜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사뭇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보면 볼수록 징그러운 녀석이구나. 도무지 그 나이 같지가 않아서 눈에 거슬린다. 비위가 뒤집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마종의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노인네라고 생각하며 그저 입을 다물고 외면해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마노이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에는 앞선 말과 달리 부드러운 느낌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세상이 너무 험악하긴 하지. 제 나이대로 살아가다간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정도로 말이야.”
 
 마종의는 슬며시 마노이을 보았다.
 정말이지 괴팍한 노인네였다. 저렇게 괴팍한 노인네에게 팔렸으니 앞으로 그에게 닥치는 일도 그만큼 괴팍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로 심사가 편치 않았다.
 마노이가 새삼 그를 보고 웃다가 또 다시 감정이 변했는지 문득 예리한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사냥을 나갈 때 남들과 달리 칼 대신 검을 쓴다고 들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
 
 마종의는 되물었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마노이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비싼 물건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사는 사람도 있다더냐?”
 
 마종의는 새삼스런 눈길로 마노이를 보았다. 괴팍한 노인네라고만 생각했더니 의외로 섬세한 구석도 있었다. 그가 사냥 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검을 가지고 나선다는 것은 동네사람들 중에서도 그의 행동을 눈여겨 본 사람만 아는 내용이었다. 그는 내심 마노이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격상시키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칼보다 검이 더 가벼워서입니다. 어차피 제대로 쓰지도 못할 거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가벼운 것이 훨씬 편하니까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왠지 그냥 칼보다는 검이 더 마음에 들기도 하고요. 한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마노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원래 나이가 들면 제아무리 사소한 것도 궁금해지는 법이니라.”
 
 마종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반대가 아니고요? 저는 나이가 들면 만사에 무신경해진다고 들었는데.”
 “발칙한 놈!”
 
 마노이가 대뜸 쌍심지를 곧추세웠다.
 
 “어른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마종의는 괜한 말대꾸를 했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마노이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상냥하게 물었다.
 
 “약속을 잘 지킨다고 했지?”
 
 마종의는 노인네가 변덕을 부릴까봐 서둘러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약속 같은 건 잘 안 합니다. 지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요.”
 
 마노이가 그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쓰며 다그쳤다.
 
 “어린 녀석이 늙은이 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구나. 어쨌든 그 말인 즉, 앞서 네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약속을 하면 지키기는 한다는 뜻이렷다?”
 
 마종의는 얼른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마노이가 문득 그를 향해 돌아서며 매서운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시선이 그의 전신을 그물처럼 옭아맸다.
 
 “그럼 나랑 약속 하나 하자.”
 
 마종의는 기가 죽어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어떤 약속을...?”
 
 마노이가 대뜸 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독해져라. 그리고 나를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남아라.”
 
 마종의는 당최 마노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머뭇거렸다.
 마노이가 사납게 다그쳤다.
 
 “약속하겠느냐?”
 “알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마종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약속이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여태껏 충분히 독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마노이의 말은 너무 당연하서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마노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기대하마.”
 
 마종의는 마노이의 미소가 왠지 너무 의미심장하게 느껴져서 무언가 한마디 더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어깨를 잡은 마노이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그 다음은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혼절이었다.

댓글(25)

anflsghk    
건필요~~
2015.04.09 19:20
몬스트    
오예 시작이 좋은데요
2015.04.29 18:54
통금시간    
열일곱인가요? 열다섯인가요? 그리고 수아가 물어봤는데 우리 민아 어쩌구하는건 오타인건가요? 잘봤습니다.
2015.05.04 21:08
쁘띠아빠    
한수오 작가님~ 반갑습니다! 선작하고 기대 하겠습니다!! 유려한 필체로 시작을 하셔선지, 왠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협을 기대케 하는군요!!!
2015.05.18 18:40
따뜻한바람    
잘 보고 갑니다,
2015.05.18 19:40
안빈낙도1    
저 시대에 자기를 파는 사람이 참 많았던가 보네요.
2015.05.19 00:25
프렌지B    
비밀글입니다.
2015.05.26 08:39
경천    
용두사미의 대가 한수오 작가님이군요!
2015.05.27 11:57
꼬마윤하    
수아가 물었다 → 민아가, 칼대신 검이라고 하셨는데 도대신 검으로 바꾸셔야할듯 칼은 도와 검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2015.05.30 13:51
코로롱    
오오 재밌겠다. 달릴게요
2015.06.04 00:31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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