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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무적 1-1

2015.04.09 조회 2,836 추천 19


 상계무적 1권
 
 차례
 
 서장
 1장 독백
 2장 복수를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다
 3장 마구간을 얻다
 4장 꽃을 꺾어 취하다
 5장 황혼에서 새벽까지
 6장 난 정인군자가 아니다
 
 
 
 서장
 
 
 
 “축하드립니다, 장 국주.”
 “표국연합의 총국주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경성표국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오늘은 표국연합의 총국주를 선출하는 날이었다.
 표국연합은 한마디로 표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당연히 표국연합을 이끌어갈 총국주가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일곱 명의 후보자들 중에서 장천은 압도적인 표차로 총국주가 될 수 있었다.
 이십 년 만에 경성표국이 낙양에서 최고의 표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장천의 노력 덕분이었다. 가진 것 없이 오로지 신용과 신뢰만을 가지고 시작한 표국이다.
 그런데 이제 총국주가 되었으니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사방에서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고, 경성표국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창 주연이 베풀어지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헐레벌떡 대전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총관 사진이었다.
 “국주님! 표물이… 광동으로 가던 표물이 비적들에게 털리고 표사들 모두 죽었습니다.”
 “뭐, 뭐요?!”
 장천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채 그 놀람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대전으로 뛰어왔다.
 부총표두 염구였다.
 “국주님. 우문세가의 화물이……. 화물이 모두 강탈당하고 표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뭐, 뭐야? 크윽!”
 장천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하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중풍에 걸려 다시는 움직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두 개의 표행이 실패한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성표국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장건의 회고록 제1장 멸문편에서 발췌
 
 
 
 1장 독백
 
 
 
 ‘강호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인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강호에서 두세 사람만 모이면 자연스레 화제가 되어버린 말이다. 이를 논할 때에는 늘 논쟁이 벌어지기 일쑤였고,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대자로 매도하고 얼굴을 붉히며 싸우곤 했다.
 하지만 뚜렷하게 결론을 맺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것은 저마다의 주장이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천무자(天武子)’를 단연 첫째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천무자는 비록 삼백 년 전의 기인이지만, 그의 무공 ‘천무십이수(天武十二獸)’는 고금제일로 손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논리에서다.
 그들은 천무자의 적대자들과 다툼을 할 때면 천무자의 전설을 인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적대자들은 천무자의 전설은 그저 소문일 뿐이라며 크게 반발을 하면서도, 또한 가장 곤혹스러워한다. 이 전설은 삼백 년간 천무자를 신으로 미화하고 천무십이수를 고금 제일로 찬양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생긴 속담이 바로 ‘죽은 천무자가 살아있는 무적십천자(無敵十天子)보다 낫다’는 그것이었다.
 이제 강호에서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천무십이수를 손에 넣으면 천하제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적대자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혹자는 ‘무적십천자’로 불리는 십대고수를 꼽는다. 십대고수의 찬양자들은 적대자들을 향해 아주 현실적인 이유를 근거로 논지를 펴나간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처럼 삼백 년 전에 죽은 천무자가 그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논리는 무척이나 현실적이어서 매번 적대자들을 궁지에 몰아넣곤 한다.
 무적십천자의 무공은 이미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두 발로 바다를 건너고 한번 몸짓에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천무자의 찬양자들의 반대는 극에 달한다. 어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날 수 있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공력이 극에 달하면 등평도수와 답설무흔과도 같은 경공을 펼칠 수 있는 것이 무림의 세계인 것이다. 천무자의 찬양자들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 같은 사실을 간과했다고, 무적십천자의 찬양자들은 입을 모으곤 한다.
 무적십천자의 찬양자들에 따르면 그들의 무공은 천하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어, 그들의 한마디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과 권위가 실리기 때문에 강호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오십 년 전에 있었던 변황과의 일전이었다. 무적십천자가 없었다면 이미 중원은 변황의 손에 들어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해서는 천무자의 찬양자들도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닫고 만다.
 이는 너무도 많은 증인과 물증이 있기에 딱히 뭐라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가만있을 소냐? 그들은 당시 변황이 힘도 되지 않으면서 중원을 침공했으며 역시 무모함이 들어났기 때문에 다시금 변황으로 도망쳤다며 악평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그들조차도 당시 변황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구대문파가 박살이 나고 오대세가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으니 사실상 중원은 백기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중원의 문파가 서로 힘을 합하고 무림맹을 만든 것은 변황을 감시하고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천무자의 찬양자들의 말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진정으로 강호를 움직이는 것은 천무자의 무공도 무적십천자도 아닌 ‘선외비처상단(仙外秘處商團)’이라 불리는 ‘우문세가’인 것이다.
 우문세가는 만금전장(萬金錢莊)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왕군가를 도와 강남지역의 해상권을 틀어쥐었으며 창룡백가를 도와 강북의 패자로 만들어 주었다.
 원래 그들은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세가에 지나지 않았다. 혹자는 이들 세가를 시정잡배도 조롱하고 다녔다고 악평을 했으니 그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로 빈약했는지 익히 알 만한 것이다.
 하지만 우문세가의 도움을 받고 채 십 년도 되지 않아 중원에서 가장 큰 세가로 변모하게 되었고, 사파제일의 세력인 마도천(魔道天)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우문세가가 자신의 상단에 방해가 되는 마도천을 제거하기 위해 해왕군가와 창룡백가를 도운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마도천이 버티고 있는 한 강북지역과의 교역은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마도천이 사라지자 우문세가는 중원의 해상권과 내륙권을 얻어 낼 수 있었고, 더욱 큰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천하제일의 부를 얻음은 물론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중원의 7할 정도의 돈과 황금을 가지게 되었고, 중원 절반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황실조차도 감히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고, 구대문파를 비롯해서 강호의 그 어떤 문파에서도 건드릴 수도 없는 천외천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우문세가의 위대함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얻었지만, 천하에 드러내지 않았고 은밀하게 감추었으며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들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제거하거나 또 다른 세력을 키워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오십 년 전에 변황으로 인해 황폐화 된 무림을 위해 기꺼이 십만 냥(참고로 황금 1냥은 현재 시가로 5십만 원. 앞으로도 이와 같은 단위로 사용할 것을 미리 밝혀 둠)의 황금을 내놓고 무림맹을 만드는 데 앞장을 섰다.
 그러나 무림맹의 힘이 크게 될 때쯤 해서 또 다른 세력을 키워 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해왕군가와 창룡백가를 도운 진정한 이유인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은 우문세가를 선외비처라며 칭송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이제 강호의 주인은 우문상단이 되어버렸다. 아니, 적어도 내가 생각할 때에는 그렇다. 그것이 내 마음을 더욱 어둡고 무겁게 만든다.
 그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해 우리 표국을 송두리째 가로챘고,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내몰았다.
 송 씨 아저씨는 물증이 없으니 함부로 단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그들의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고 만류했지만, 그분은 이제는 우문세가의 표국에서 일하는 만큼 나의 편이 되어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적어도 그들이 우리 표국을 가로챘다는 데 확신을 줄 세 가지 근거가 있다.
 
 우문세가는 따로 표국을 운행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무림세가와 합병을 해서 새로운 상단을 창조해 냈던 것이다. 때문에 굳이 물건을 호송할 때 표국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뿐더러, 오히려 그들에게 표국은 사업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여기에 그들을 의심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낙양에는 모두 일곱 개의 표국이 있었다. 그들 모두 치열한 생존 경쟁을 통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최고의 표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경성표국을 필두로 나머지 표국이 차례로 무너지고 말았다.
 표국이 무너진 이유는 거의 비슷했다. 괴한들이 나타나서 표행을 가로챘고 결국 막대한 손실을 입은 표국은 더 이상 유지할 힘이 없어서 스스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낙양에는 더 이상 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우문세가의 업무를 담당하는 낙양분타 일곱 개만 존재할 뿐이었다. 매물로 나온 표국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문세가가 헐값에 사들인 결과였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내가 우문세가를 의심하는 첫 번째 이유다.
 표행을 공격한 괴한들은 칠 년이 지난 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했다. 아니, 그들의 얼굴조차 모른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혹자는 그들의 신출귀몰한 행적에 의적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옛말에 열 명의 장사꾼 중에 아홉 명은 사기꾼이고 나머지 한 명은 미친놈이라는 말이 있다. 사기꾼의 표물을 강탈한 것이니 당연히 의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설 속에 나오는 송강이나 양산박의 도적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의적이라는 자신들의 이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끌어와서 논리를 펴야 했던 것이다.
 논리는 제법 그럴 듯했지만, 이 역시도 적대자들의 반발에 의해 허무맹랑한 소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황실에 득실거리는 사기꾼과 도둑놈은 뭐고, 글깨나 읽고 골방에서 탁상공론이나 하는 미친놈들은 왜 가만 두냐는 것이었다.
 설령 그들은 차치하더라도 양산박의 도적들은 탐관오리들을 상대했다. 탐관오리를 상대하지 않는 도적은 도적일 뿐, 결코 의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적대자들의 말은 한마디로 돈 없는 자들이 하는 시기와 질투일 뿐이라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둘 다 미친놈들이었다. 그들은 사건의 중심을 보지 못하고 겉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오히려 사건의 본질을 고의적으로 흐려놓고 있었다.
 혹자들은 분명 우문세가를 시기하는 무리들일 테고, 적대자들은 우문세가에서 돈을 받고 암암리에 여론을 조작하는 무리들일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말은 듣지 않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다. 혹자들의 말처럼 그들을 의적으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먼저 전국 각지에서 표행이 털린 점이 그랬고, 표행을 나간 표사들을 모조리 죽인 점도 그랬다. 또한 그 누구도 의적에게 물질적인 원조를 받았다거나 의적을 칭송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그랬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원래 산적들은 이렇게 용의주도하지도 않거니와 은밀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표물이지 표사가 아니었다.
 어차피 표물이 털리면 그 지역 산적들이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은 수사의 기본이다. 굳이 모두를 죽여 증거를 인멸하지 않아도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표사를 죽여 입을 봉했다는 것은 결코 그 지역 산적이 아니라는 방증이며 정체가 탄로 나면 안 되는 중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산적 떼들이 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곳의 산채에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적질을 할리도 없었다. 또한 모든 산적들이 의적일 리 없다.
 산적들은 누구보다 경제적이고 편한 것을 추구한다. 먼 곳을 돌아가서 한 번 털 것을, 가까운 곳에서 두세 번 털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로간의 구역이 뚜렷하게 정해진 마당에 구태여 남의 구역을 침입해서 원한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림에서는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토벌대까지 보내봤지만, 결국은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워낙 은밀했던 탓이 더 크다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곱 번 나타났지만,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산적 떼들이 이렇게 은밀하고 치밀하다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내가 우문세가를 의심하는 두 번째 이유다.
 내가 대식국의 노예로 팔려간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웠다. 나는 막 우문세가에 초점을 맞추고 표국이 무너진 것을 조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송 씨 아저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기이한 향기를 맡은 것을 끝으로 나는 낙양이 아닌 서역이라는 이역만리의 땅에 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납치해서 대식국 상단에 팔아먹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를 납치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는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니까.
 처음에는 노예상인들의 짓인 줄 알았다. 예쁘장한 계집아이나 어린 소년들을 납치해서 팔아먹는 일은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예상인의 대부분은 머나먼 대식국과는 별다른 교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노예를 팔아서 나오는 비용보다는 대식국까지 가는 비용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중원에도 노예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은데, 구태여 대식국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간혹 대식국과 교역을 하는 노예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흑야대(黑夜隊)로 불리는 자들로 사람을 죽이기는 싫고, 그렇다고 가만히 두는 것은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와 청부를 맡기는 자들이었다.
 대식국은 한 번 팔려 가면 다시는 중원으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이었다.
 또한 대부분이 사막으로 되어 있어서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기후를 견뎌야 했기에 탈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흑야대의 용의주도하면서도 깔끔한 일처리로 인해 점점 그들의 소문은 높아졌고, 그들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제는 은밀하게 제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살수단체를 찾는 것이 아니라 흑야대를 찾는 경우가 더 많았다.
 흑야대를 찾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면 무림명가의 사람이거나 지체 높은 유문의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결코 힘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흑야대의 청부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하나였다. 그가 누군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애송이 한 명이 겁도 없이 자신들의 치부를 들추어내려 하자 은폐하기 위해 흑야대에 청부한 것이리라.
 그래도 그들은 양심은 있었던지 어린 나를 죽이기는 뭣 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니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 것 같아 불안해서 흑야대에 청부한 것 같았다.
 그들은 나란 놈을 저 멀리 대식국으로 보내면 끝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양심에 감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가 갈릴 정도로 증오한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줄 것이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느꼈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2장 복수를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다
 
 
 
 철썩철썩.
 채찍이 떨어지며 살갗이 찢기며 피가 튄다.
 “똑바로 못해? 빨리 빨리 움직여라.”
 어린 장건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입술은 바싹바싹 타 들어가고 며칠 굶주린 허기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조장은 사납기 그지없다.
 조금의 인정도 없었고, 장건이 어리다고 봐 주지도 않았다.
 철썩철썩.
 다시금 채찍이 내리 꽂으며 어린 장건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이 새끼, 넌 오늘 점심 없다.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저녁도 없는 줄 알아.”
 조장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였다.
 채찍에 이어 밥을 굶기는 것은 다반사였다.
 채찍의 고통도 끔찍하지만 하루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매번 밥을 굶겼다. 어린 장건은 그로 인해 며칠째 밥을 먹지 못했던 것이다.
 갈수록 장건은 피골이 상접하게 변했고, 그에 따라 그의 마음도 메마르게 변해갔다.
 대식국.
 거대한 건물을 짓고 있는 건설현장이다.
 노예상인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대식국에 팔려온 장건.
 그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며 악착같이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날마다 떨어지는 채찍질에 그의 몸은 성할 날이 없었다.
 그날 밤 결국 장건은 또다시 저녁을 굶어야만 했다.
 벌써 사흘째다.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어 견딜 수가 없었다.
 허기도 허기지만, 내일 또 다시 중노동을 해야만 했고, 분량을 채우지 못하며 채찍에 구타에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거의 매일 이어지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시도하다 걸린 경력이 있다. 얼마나 혹독하게 형벌을 가하는지 다시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언제고… 네놈들 모두 쓸어버리겠어. 모두 죽이고 말 테다.’
 어린 장건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
 자신을 대식국에 팔아넘긴 우문세가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며, 대식국의 잔인한 조장들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환경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장건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거니와 이제는 그의 마음도 독하게 변해 악과 깡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는 체념과 포기 대신 복수심과 적개심을 가지며 악착같이 버텨냈다. 오로지 복수만이 그를 지탱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었다.
 어린 장건은 복수를 생각하며 이 지옥 같은 생활을 악착같이 견뎌냈고, 나뭇가지를 우걱우걱 씹으며 허기를 버텨냈다.
 - 장건의 회고록 3장 지옥편에서 발췌
 
 
 추담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추담상단을 이끌어 오면서 사람들의 심리는 통달했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온갖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온 추담이었다.
 제아무리 음흉하고 교활한 자라 해도 그의 안목에서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도 어수룩한 장사꾼이었고, 교활하고 언변이 좋은 사기꾼들에게 당한 적도 있었다. 강호의 그것만큼이나 상계도 무척이나 험악한 곳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코를 베어가는 곳이 상계인 것이다.
 몇 번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오늘의 추담이 있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 사천에서도 제법 큰 상단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안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천하에 그 누구도 눈빛만 보면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예외가 있다면 정신이 홱 돌아버린 정신병자나 무뇌충 같은 멍청이일 것이다.
 그렇게 오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그의 자부심에 금이 가는 일이 벌어졌다.
 차라리 우문세가의 행상으로 들어간다면 이해라도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상단에서 추담상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보수를 제의했다면 기분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 바닥이 돈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주는 상단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우문세가의 하인이란 말인가? 설마하니 추담상단이 우문세가의 하인만도 못하단 말인가? 그것도 모두가 가기를 꺼려하고 실패한 낙오자나 가는 곳으로 알려진 마구간이었다.
 기분이 더러워도 이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지난 삼 년간 장건이 보여준 능력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내쳤을 정도로 추담은 화가 났었다.
 처음 장건의 입에서 우문세가로 가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무척이나 섭섭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정이 들기도 했지만, 장건의 재능이 탐이 나기도 했던 것이다.
 냉철한 성격이나 두둑한 배짱, 멀리 내다볼 줄 아는 혜안 등 장건은 장사꾼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인재였다.
 장건이 추담상단에 있어만 준다면 십여 년 안에 지금의 몇 배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천하제일은 아닐지라도 사천제일의 상단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장건의 입에서 우문세가로 가고 싶다는 말에 섭섭한 마음은 물론 크게 실망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상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우문세가로 가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더구나 장건 정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행상에 붙고도 남을 실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문세가의 하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써 달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귀를 몇 번이나 후볐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뭐, 뭐라고? 자네 지금 행상이 아니라 하인이라고 했나?”
 소태를 씹은 표정이 어떤 것인지 추담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행상이라면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상인이라면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자리이니까. 추담상단이 체면 깎일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하인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하인은 너무 심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하인을, 그것도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마구간의 하인으로 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추담상단이 사천제일은 아니지만, 십여 개의 상단 중에 상위권에 드는 상단이었다. 평소 자신의 상단에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추담이었기에 장건의 부탁은 여간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다.
 원래 추담은 오랜 세월 동안 우문세가의 하청을 맡아 일을 해왔기 때문에 행상은 모르겠지만, 하인 정도는 충분히 천거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지난 삼 년간 추담상단은 장건으로 인해 두 배는 성장할 수 있었다. 사천제일 상단인 호경상단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던 대식국의 무역을 대부분 장건으로 인해 빼앗아 올 수 있었다.
 그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중위권에 머물던 상단의 규모가 갑자기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보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추담상단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장건의 부탁이었다. 안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온갖 사람들을 만나보고 세상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추담이었지만, 장건의 부탁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괴이함을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하인이 되려고 하는 이유를 물어 보았다.
 하지만 그 때마다 장건은 빙긋 웃기만 할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평소 말수가 적고 과묵한 성격인지라 더 이상 닦달한다고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속으로 그저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것만 추측할 뿐이었다.
 그는 객잔의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장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삼 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정확히 장건을 만난 지 삼 년이 되는 날이로군.’
 거친 사막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장건을 구한 것은 모두가 운이었다. 청해를 관통하는 사막에는 광풍단(狂風團)이라고 하는 무서운 마적들이 있었다.
 이들의 악명은 상단에게는 지옥보다 더 무서운 것이어서 대부분은 육로를 버리고 해상의 길을 통해 대식국과 무역을 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삼 년 전 그날은 공교롭게도 해상의 길이 모두 봉쇄되었다. 한 노예가 주인을 죽이고 탈출한 사건이 일어나 해상의 길을 모두 차단했던 것이다.
 청해의 사막은 끝없이 펼쳐져서 그곳으로 들어가면 십중팔구는 죽는다고 봐야 했다. 작렬하는 태양과 입이 바싹 타들어가는 갈증은 그 무엇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막으로 들어갔다가는 사흘 이상을 버티기 힘들었다. 때문에 대식국에서는 육로는 버려두고 바다만 통제했던 것이다.
 추담은 첫눈에 광풍단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보기에도 끔찍한 상처는 광풍단처럼 잔인한 자들 외에는 할 사람이 없었다.
 워낙 상처가 컸던 탓에 장건은 석 달을 꼬박 침상에 누워서 요양을 취해야만 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하고 튼튼한 모습으로 완쾌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과연 저 사람이 일어나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르신. 지난 삼 년간 저를 보살펴 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장건의 목소리가 추담의 상념을 깨뜨렸다.
 “자네 정말 꼭 이래야만 하는가?”
 추담은 정색을 하며 장건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휴, 미안할 것은 없네. 다만, 안타까울 뿐이네. 추담상단이 자네의 성에는 차지 않겠지만, 그래도 우문세가의 하인보다는 괜찮을 걸세.”
 장건의 마음은 확고부동해서 절대 돌이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추담은 잘 알고 있었지만,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보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재였다.
 추담이 소매에서 서편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것을 호 총관에게 주면 알아서 해 줄 것이네.”
 “고맙습니다, 어르신.”
 장건은 서편을 품속에 갈무리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르신.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그동안 보살펴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으음. 이제 헤어질 시간인가?”
 추담은 아쉬운 듯 장건을 쳐다보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몸조심하게. 우문세가의 하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네.”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힘이 들거든 언제든지 돌아오게. 자네가 다시 온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네.”
 “고맙습니다. 어르신.”
 “쩝, 정말 자네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군그래.”
 추담은 입맛을 다셨다.
 장건의 얼굴을 보며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추담의 마음은 더욱 착잡했다.
 
 
 “이번 행상(行商: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일) 시험자들의 최종 명단입니다.”
 우곤이 조심스럽게 몇 장의 문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행상 시험은 일주일 안으로 다가왔지만, 이미 두 번이나 퇴짜를 맞은 터라 시간이 없었다.
 또 다시 퇴짜를 맞는다면 더 이상 수정하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호 총관이 쉽게 도장을 찍어줄 리 만무했다. 고생을 하는 건 자신이지 호 총관이 아니었다.
 호 총관은 어찌나 성격이 까탈스럽고 변덕이 심한지 남의 비위를 잘 맞추기로는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우곤조차도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였다.
 호 총관은 한 번에 도장을 찍어준 적이 없었다. 매번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가며 우곤을 괴롭힌 다음에야 겨우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우곤이 처음 서기로 일을 했을 때, 문서를 잘못 작성했다고 열흘을 구박했다. 도장을 찍는 위치가 바뀌었다나, 어쨌다나.
 그 다음에는 문서가 조금 구겨졌다는 이유로 닷새를 갈구었다.
 위쪽 모서리가 약간 접힌 것을 가지고 닷새나 갈구다니. 그제야 우곤은 호 총관이 제정신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행상 응시자들의 족보를 조사하란다. 그 순간 우곤이 느낀 생각은 하다하다 안 되니 이제는 별 미친 짓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행상 응시자는 천 명이 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들의 족보를 모두 조사하느라고 우곤은 지난 몇 달 동안 집에도 들어가질 못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상황을 아랑곳 하지 않는 호 총관이었다.
 ‘제길, 이번에는 왼쪽으로 물잔을 던져라.’
 지난번에 우측 이마에 맞은 곳이 아직도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터라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같은 곳에 또 다시 맞으면 살갗이 찢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뼈가 상할 것 같았다.
 비록 몰락한 가문이지만, 유문(儒門)의 집안에다 오대독자로 귀엽게 자란 우곤이었다. 거친 상계로 들어선 것만도 억울하거늘 툭 하면 물잔 세례이요, 폭언과 욕설이니 어찌 우곤이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호 총관은 같은 곳에 또 던지는 악취미가 있었다. 한 번은 사흘 연속 정강이에 물잔을 던져 뼈가 부러졌고, 또 한 번은 닷새 연속 물잔을 가슴에 던져 갈비뼈가 금이 가고 말았다.
 이번에도 불길하게 물잔은 호 총관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물은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재수 없게도 언제나 저 자세에서 물잔이 날아왔던 것이다.
 그는 물잔을 맞는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이번만큼은 고개를 돌려서 같은 곳에 또 맞지 않으려고 했다.
 “이보게, 우서기?”
 “어이쿠, 호 총관님.”
 호 총관이 팔을 움직이자 우곤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예? 예. 그, 그것이…….”
 살며시 올렸던 팔을 내리고 실눈을 떠보니 호 총관의 손과 물잔은 탁자에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호 총관의 눈매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부드러워 보였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이 명단은 모두 정확하겠지?”
 “그렇습니다. 총관님의 말씀대로 출생지가 이상한 곳은 모두 조사해서 그 진위여부를 확실하게 파악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출생지가 거짓으로 드러난 사람이 열 명. 거짓으로 자신의 문파를 적은 사람이 이십여 명, 유생이면서 무인인 척 거짓을 적은 사람이 삼십여 명. 도합 육십여 명이 인적사항을 허위기재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어느덧 우곤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상관의 흡족한 모습을 보고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 외에는 모두 정확하다는 소린가?”
 “약간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음은 같지만, 글자가 다른 마을 출신이라든지, 부모의 이름이 한 자 틀린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부적합 명단에 포함시켰겠지?”
 “그, 그것은… 별것 아닌 것 같아서…….”
 “뭬야?”
 온화하던 호 총관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하게 변했다.
 “이 밥통 같은 자식아! 이 따위로 일하고 밥이 목구멍에 넘어 가냐? 이 돌대가리 같은 놈아, 그러고는 월급은 가장 먼저 받지. 등신 같은 놈이.”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귓구멍을 틀어막고 싶었다. 곧게 펴졌던 그의 허리도 다시금 축 처졌고, 머리는 밑으로 떨어졌다.
 “오늘 밤 안으로 모두 끝내라. 만약 끝내 놓지 않으면 네놈은 끝장이야. 끝장. 아예 이번 기회에 네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은 다음 똥통에 처박아 주마.”
 “예? 이걸 오늘 밤 안으로 끝내라고요?”
 “그럼, 안 하고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냐?”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어떤 사람은 고향이 청해인 경우도 있었다. 결코 오늘 밤 안으로 다녀올 거리가 아닌 것이다.
 우곤이 주춤거리자 호 총관이 물잔을 던졌다.
 “빨리 꺼지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 거야,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아이쿠.”
 우곤은 재빨리 이마를 우측으로 틀었다. 이미 호 총관이 욕설을 터뜨릴 때부터 언제 물잔을 던지나 생각하고 있던 우곤이었다.
 쾅 하고 물잔이 좌측 이마를 때렸다. 귀밑을 타고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지만, 우곤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맞은 곳에 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우곤을 문밖을 나섰다가 다시금 돌아섰다. 방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하고 고개만 삐죽 내밀었다.
 “저, 총관님.”
 “빨리 꺼지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새로 들어오는 하인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하는 거야. 그자의 신상명세서는 가져왔겠지.”
 “예, 총관님.”
 우곤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한 장의 문서를 내밀었다.
 
 이름 : 장건.
 나이 : 스물다섯.
 고향 : 광풍단에 의해 부모를 잃고 추담상단에서 자람.
 장점 : 근면하고 성실한 성격이며 무엇을 시켜도 듬직함.
 단점 : 없는 것이 단점임.
 
 호 총관은 코웃음 쳤다.
 안 봐도 뻔했다. 분명 엄청난 사고뭉치일 것이었다.
 그는 추담이 대책이 서지 않는 장건을 자신에게 떠맡기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추담상단 같은 곳을 마다하고 마구간의 하인으로 올 턱이 없었다. 백이면 백 모두 그럴 것이었다.
 간혹 미친놈이나 하인으로 올까. 정상이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근면하고 성실해? 단점이 없어? 새빨간 거짓말을 잘도 늘어놓는군. 그럼, 네놈이 데리고 있지 왜 하인으로 보내는 것이냐? 바로 일주일 후에 행상 시험이 있는데.’
 그렇게 묻는 호 총관의 머릿속에는 이미 정답이 나와 있었다.
 행상시험은 낙방할 것이 뻔하니 응시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쯧쯧, 얼마나 한심한 놈이면 추담이 이렇게 다급하게 나왔을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한심한 놈들이라면 마구간에 있는 놈들을 실컷 보았기에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시간이나 축내고 매일 사고나 치는 놈들.
 그곳에 한 명이 더 들어간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더구나 추담은 매년 호 총관에게 은밀하게 뇌물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동안 받은 뇌물을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뇌물을 생각하면 자리 하나는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장건에 대해 조사는 해두었겠지?”
 비록 마구간 하인이라 할지라도 신상 기록을 조사하는 것은 예외일 수 없었다.
 “일단 시간이 없는 관계로 추담상단의 행상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사람들 모두 장건에 대한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칭찬은 개뿔이 칭찬. 추담이 입단속을 시킨 것이겠지.”
 호 총관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걸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만약 행상이나 다른 곳에 일할 하인이라면 조사를 더 철저히 해야겠지만, 마구간의 하인인 데다가 행상시험과 겹쳐서 자세히 조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추담의 부탁도 있는지라 이번 장건의 신상 조사는 형식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추담이 무척이나 다급했던 모양이군.’
 그렇게 칭찬이 자자한 사람을 추담이 굳이 마구간의 하인으로 보내려 하겠는가?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아직 자신을 한 번도 속인 적이 없는 추담이었다. 물론 그의 어설픈 거짓말에 속을 호 총관도 아니었지만.
 호 총관은 9개가 확실해도 1개가 수상쩍으면 결코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두들겨 보았던 돌다리도 다시 한 번 두들겨서 건너는 사람이었다.
 우문세가는 적이 많았고, 행상시험을 핑계로 첩자들을 보내는 문파도 많았다. 때문에 하인 한 명을 뽑아도 호 총관이 직접 면접을 보았고, 행상 응시자들의 족보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구간의 하인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첩자가 설마하니 쓰레기들만 모여 있는 마구간에 들어갈 리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오랫동안 추담과 관계를 맺어온 사이였다. 결코 추담이 우문세가에 해코지할 이유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지 추담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우서기가 직접 장건인지 뭔지 하는 사고뭉치를 면접하고 마구간에 데려가.”
 “예? 예, 호 총관님.”
 우곤은 다소 놀랐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마구간 하인인 데다가 추담이 소개하는 사람인 것이다.
 
 
 장건은 복도에 서성이며 긴장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지난 칠 년간 숱한 절망과 좌절을 맡 본 그였다.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각만큼은 지난 칠 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되었다.
 호불비는 여간 교활한 것이 아니었다. 칠 년의 세월만큼이나 장건의 모습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지만, 호불비의 시선을 완전히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계획한 복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마구간의 하인은 괜찮을 거라는 그의 생각이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더구나 추담의 추천이었고, 행상시험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대충 넘어갈 수도 있는 사안을 호 총관은 꼼꼼하게 면접을 보려는 것이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늑대가 치밀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장건이 아니었다. 우문세가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아버지 장천은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또한 칠 년 만에 돌아온 지금,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연약한 어머니와 열두 살 꼬마 장소희.
 그의 어머니 조소민은 여염집 여인으로 장천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무가로 시집온 여인이었다.
 하지만 천생이 나약해서 강호의 거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고스란히 닮은 장소희였다.
 4년간의 노예생활 동안 채찍으로 전신이 찢겨지고 몽둥이로 수없이 맞으면서도 어머니와 소희가 걱정이 되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대식국을 탈출해서 돌아온 낙양은 썰렁하기만 했다. 이미 그녀들은 장건이 대식국 노예로 팔려가던 비슷한 시기에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장건은 노예생활 동안에도 흘리지 않았던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를 갈았다.
 ‘호불비. 우문세가. 모두 싸그리 없애주마.’
 당장이라도 우문세가에 들어가 원수들을 도륙내고 싶었지만, 자신의 계획을 위해 당분간 유보했다.
 우문세가와 호불비는 더욱 처절하게 끝장을 내야만 했다.
 죽음보다 더한 지옥을 가르쳐 주어야만 그나마 조금은 분노가 풀릴 것 같았다.
 일거에 죽이면 너무 싱겁거니와 자신이 당한 지옥과도 같은 생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죽음인 것이다.
 그런 그가 겨우 이런 사태에 직면했다고 해서 물러설 리 만무했다.
 칠 년 만에 돌아온 낙양이었다. 사 년간의 노예생활과 삼 년간의 행상 생활을 겪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하를 일곱 바퀴 반을 돌고, 바다를 2만 리나 다니고서야 낙양에 올 수 있었다.
 뭉클한 마음보다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우문세가는 칠 년 전에 그 우문세가가 아니었다. 예전의 우문세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우문세가는 더 이상 일개 상단이 아니었다. 강호의 무력에 질질 끌려 다니는 무기력한 상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호의 모든 힘이 집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우문세가는 적이 많았다. 너무나도 갑자기 성장한 탓에 모두가 두려움과 동시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우문세가는 무엇을 하든 철저히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꼴통들만 모여 있다는 마구간의 하인까지 면접을 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새삼 우문세가의 명성이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때였다.
 “너도 어지간히 대책이 서지 않는 놈이로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우곤의 표정을 보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마지막 순간에 호불비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구간은 이미 삶을 포기한 놈들만 모여 있다. 네놈이 꼴통이라 해도 여간해서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들어온 이상 죽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 이미 네놈의 몸은 네놈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 보았던 문구였다.
 하인도 그냥 하인이 아니다. 주인집에 뼈를 묻는 종이나 다름없는 하인인 것이다. 실수로 다치거나 죽는다고 해도 원망할 수는 없었다. 마구간 하인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닌 우문세가의 것이었다.
 마구간은 이미 삶을 포기한 자들이었고, 무식한 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삶을 포기했으면서 동시에 무식한 자들이라면 보지 않아도 그들의 행동은 뻔하다.
 기강을 잡는다는 이유로 수없이 구타와 얼차려가 쏟아지고, 사람 병신 만드는 것을 예사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우문세가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꼴통들이었고,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마구간이었다. 오히려 그런 낙으로 사는 사람들이 마구간 하인들이다. 그런 특권조차 주지 않으면 더 이상 세상 살아갈 낙이 없는 자들인 것이다.
 때문에 우문세가는 그들이 어떤 짓을 벌이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또 꼴통짓이로군.’ 하며 혀를 차는 것이 다였다.
 “그곳에 가면 대장의 말을 잘 들어라. 보통 포악한 놈이 아니야. 며칠 전에도 우삼이란 젊은 놈이 객기를 부리다 칼침을 맞고 반병신이 되었다. 들어온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서였지. 언제 비명횡사할지 모르는 곳이 마구간이다. 추담상단에서 했던 꼴통짓은 모두 잊어라. 여기에서는 더 이상 네놈의 꼴통짓을 받아줄 사람도 없고 인내력도 없다. 네놈이 오래 살 수 있는 길은 대장의 말에 절대복종하고 그의 착실한 개가 되는 것뿐이다.”
 우곤은 최대한 충고했다. 장건이 그의 처음 면접 대상이었기에 약간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문세가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중원 최고의 상단인 만큼 보수 또한 최고였다. 누군 뼈 빠지게 일해서 일 년 벌 것을 우문세가에서는 한 달에 벌 수 있었다.
 상인에 대한 선입견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행상은 더 이상 천한 직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였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최고의 유망 직종이었다.
 행상이 되면 동네에서 잔치가 벌어질 정도였다. 행상에 붙는 것은 장원급제 한 것만큼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시골에서는 출세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행상이라는 직업은 단순히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다. 구주강호를 떠돌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체력과 담력이 강해야 했고, 언제 어디서 비적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무공은 필히 익혀야만 했다. 그 다음이 언변이고 임기응변인 것이다.
 학식은 많지만, 언변이 부족한 사람도 가차 없었다. 행상의 조건은 정말 까다로웠지만, 언제나 경쟁률은 일백 대 일을 넘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런 우문세가에도 음지는 있었다. 모두가 가고 싶지 않은 곳. 인생의 낙오자나 쓰레기들만 가는 곳. 마구간은 모든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곳이었다.
 말을 관리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먹이 주는 것에서부터 목욕시키고, 똥 치우고, 마구간 청소하고. 그야말로 사람이 가장 하기 싫은 일만 모여 있는 곳이 마구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문세가에 말이 엄청 많다는 것이었다. 족히 오백여 마리는 되었다. 그 많은 말들을 수용하자니 마구간의 시설도 엄청 크고 넓었다. 일반 장원보다 더 크고 넓다고 보면 정확했다.
 십여 마리를 관리하는 것도 힘든 일이거늘 오백여 마리를 매일같이 씻기고 똥치우고 한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대접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상단의 주축은 오로지 행상일 뿐이지 마구간이 아니었다.
 일은 궂은데, 대접은 시원치 않다면 누가 그곳으로 가서 일을 하겠는가? 당연히 갈 곳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언제부터인지 인간말종들만 모인 곳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보수는 괜찮은 편이었다. 때문에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종종 하인이 되어 마구간에 들어가곤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연줄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상관의 눈에 찍혀 가는 곳이었다.
 
 
 “야야. 신입이 왔다.”
 장건이 마구간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의 입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5십여 명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장건을 쳐다보았다.
 호기심에 가득한 눈에서부터 험상궂게 인상 쓰는 녀석까지 표정이 다양했다.
 “뭐야. 왜 저렇게 부실하게 생긴 놈이 들어온 거야.”
 “에잇. 씨발. 저 새끼 가르치려면 한참 걸리겠군.”
 험상궂게 인상 쓰던 녀석들이었다.
 장건의 체격은 결코 부실하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건장하고 체격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비를 거는 것은 초장에 기를 잡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에잇. 쓰벌놈의 호 총관. 그렇게 일할 수 있는 놈으로 달라니까 또 저런 놈이네.”
 “저 새끼는 또 며칠 버틸까.”
 “난 열흘. 우삼이도 열흘은 버텼잖아.”
 “저 새끼는 우삼이보다 더 부실해. 난 닷새에 한 냥 걸 테다.”
 “난 사흘에 한 냥을 걸겠다. 어리바리하게 생긴 걸 보면 가르치기 힘깨나 들 것 같다.”
 그들은 즉석에서 돈을 꺼냈다. 정말로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얼굴이 사색이 되고 기가 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건은 기가 질리기는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그들은 장건이 개념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놈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맞아서 병신이 되든가, 아니면 무서운 나머지 마구간을 탈출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모두 동작 그만. 누가 신입에게 교육시켜 줄 테냐?”
 그가 우곤이 말한 대장인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서로 자신들이 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내가 해볼게, 대장. 난 아직 신입들 교육을 한 번도 시켜본 적이 없다구.”
 “좋다. 명철이 네가 해라.”
 대장이 지목한 사람은 삼십대 청년으로 꽤나 험상궂게 생긴 인상이었다. 그도 이번 내기에 참가한 사람 중 하나였다.
 교육시킬 사람이 정해지자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명철을 향해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살해. 저 새끼 보니까 한 주먹거리도 안 될 것 같은데. 신입이 언제 또 들어올지 모른다구.”
 “일단 말똥부터 먹여. 난 말똥이 제일 좋더라.”
 “말똥은 무슨. 신입은 그저 죽지 않을 만큼 패야 좋은 법이다.”
 그들의 모습에 장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명불허전이란 말이 있다.
 무식한 것도 명불허전이라면 명불허전인 것이다.
 “어라? 이 새끼가 눈살을 찌푸리네.”
 “이 새끼가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나 보네.”
 “이런, 씨발. 정말 얼빵한 놈이잖아.”
 “이봐 명철이. 아예 죽여 버려. 저런 병신 같은 놈은 필요 없어.”
 순식간에 마구간은 싸늘하게 변했다.
 지금까지 눈살을 찌푸린 신입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을 무시하고 마구간을 같잖게 여기고 있다는 방증.
 무식한 그들이 그것을 그냥 보고 넘길 리 만무한 일이었다. 마구간에서 반항은 곧 죽음이었다.
 하루라도 먼저 들어오면 선배고 형님이었다.
 얼마 전 우삼이 반항하다 칼침을 맞았다. 물론 그런 경우가 우삼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그리 문제된 적은 없었다.
 험하고 거친 일을 하려면 그만큼 독하게 사람을 부려야 하는 법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타와 얼차려는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우문세가에서는 사람이 죽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기 때문에 마구간은 그야말로 무법지대라 할 수 있었다.
 명철은 소리쳤다.
 “넌 오늘 죽었어.”
 
 
 마구간은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서로 간에 서열이 있었고, 서열에 따라 하는 일이 달랐다.
 막내는 무조건 말똥을 치운다. 오백여 마리가 하루에 똥을 싸는 양은 어마어마하다. 날마다 그것을 치우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막내이기 때문에 가장 험하고 더러운 일을 맡는 것이다.
 그 다음은 말을 씻기는 것. 그리고 그 다음은 마구간 청소. 그 다음은 주변 청소 등 위로 올라갈수록 하는 일은 편하고 할 일도 별로 없다. 때문에 대장 경포는 하루하루를 거의 놀다시피 하고 있었다.
 또한 막내는 자유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 말은 곧 쉬고 싶어도 고참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 쉴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무조건 고참의 허락이 떨어져야 쉴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건의 바로 위 고참은 명철.
 무엇을 하건 명철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교육은 주로 누가 고참이고 쫄따구인지 서열을 가르치는 것과 서열에 따라 하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별로 그리 외우기에 어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명철의 교육은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엄청난 얼차려와 구타가 이어졌다.
 특히나 장건이 눈살을 찌푸린 것 때문에 그 강도는 더욱 높아졌던 것이다.
 장건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뒤집어엎고 싶은 생각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난 4년간 그는 충분히 맞았다. 오히려 너무 맞아서 이가 갈릴 정도였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멍청하게 생긴 놈까지 자신을 교육시킨단다. 웃기지도 않았다.
 그는 대식국을 탈출한 이후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맞지 않을 것이며, 지지 않겠노라고 결심을 한 터였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당하고 사는 것은 절대 참을 수 없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고, 상대가 칼을 들면 그는 죽여야만 속이 풀렸다.
 하지만 그것은 우문세가에 들어오기 전 결심일 뿐이었다.
 그가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고난과 모욕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미 한차례 호 총관의 꼼꼼한 성격을 보았던 터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그는 마구간의 신입이 되었고, 고참이 무엇을 시키든-심지어 때리거나 얼차려를 주어도-성질을 꾹 눌러 참았다.
 
 
 우문세가는 행상들이 자유롭게 출입해서 무공을 연구할 수 있는 무서각이 있었고, 장부를 따로 보관하는 문서각이 있었다.
 무서각은 행상이라면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지만 상부의 허락이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다는 제한이 있었다.
 또한 1급, 2급, 3급으로 등급이 나뉘어져 있다. 3급은 제한이 별로 없지만, 2급에서 1급으로 갈수록 심하게 제한한다. 그건 곧 등급이 높아질수록 무공비급의 위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문서각은 극도로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일개 행상은 아무리 출입증을 가지고 있다 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문서각이었다.
 물론 문서각도 1급, 2급, 3급으로 나뉘어 있지만, 문서각은 3급부터 심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부의 승인이 찍힌 출입증이 있어야 하고, 당주급 이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무서각이나 문서각은 다른 곳보다 경계가 삼엄했고, 이중 삼중으로 경계병이 지키고 있었다.
 
 사경(새벽 1~3시) 무렵 문서각의 동편 담장.
 아래로는 몇 개의 초소가 보이고, 경계병들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휘익.
 한 명의 복면인이 비조처럼 그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경공은 대단히 정묘해서 옷깃 스치는 소리는 물론 풀 밟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일차 경계는 쉽게 뚫었다.
 하지만 첩첩산중.
 문서각이 가까워질수록 보초 인원은 점점 많아졌고, 경계는 더욱 삼엄해졌다.
 스르륵.
 소리 없이 복면인이 수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는 경계병들이 근무교대를 하기 위해 잠시 잠깐 자리를 비우는 시간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몸을 날리길 서너 차례.
 문서각에 다다르기까지 족히 반 시진(1시간)은 걸린 듯했다.
 하지만 경계를 생각하면 그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문서각은 삼층으로 되어 있었다. 일층은 3급의 문서가, 2층은 2급, 3층은 1급 순으로 되어 있었다.
 복도에도 삼삼오오 경계병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히 복마전이라 할 수 있었다.
 복면인은 구렁이처럼 벽을 타고 담장을 오르기 시작했다. 벽호유장공이란 것으로 사물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수법이었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경계병들이 다시 오는 시각은 채 일다경도 되지 않는다. 그 전에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때는 바야흐로 삼월 초순.
 겨우내 꽁꽁 닫아 두었던 창문을 공기가 통하도록 살짝 열어둔 것이 그나마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살며시 창문을 열고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수많은 경계병이 있었고, 이중 삼중으로 보초가 있었지만, 누구 하나 복면인의 행동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문서각은 복도를 중심으로 왼쪽은 순수하게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고, 오른쪽은 근무자들, 즉 내외각의 경계를 서는 사람들이 잠을 자는 곳이었다.
 복면인이 들어온 곳은 바로 장부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장부를 보관하는 곳은 엄청 넓었다.
 하기야, 몇 십 년 동안 걸쳐 보관된 장부가 어디 하나둘뿐이겠는가?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장부를 보관하기 위해서라도 문서각은 넓어야 만했다.
 장부는 요일별, 연도별로 일목요연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문세가가 얼마나 치밀하게 일처리를 하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복면인은 칠 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장부를 확인했다.
 한참을 뒤적이다 그의 손길이 뚝 멈춰 섰다.
 ‘찾았다.’
 
 일급 기밀.
 청부: 흑야대
 대상: 장건
 금액: 황금 오십 냥
 작성자: 호불비
 
 호불비 이름 밑에는 그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복면인, 아니 장건의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호 총관과 흑야대의 짓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을 하자 살기가 치솟았다.
 그가 칠 년 전 대식국에 팔려가 노예생활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다. 조금만 굼뜨거나 말을 듣지 않아도 가혹한 형벌과 채찍이 떨어졌다. 병이 들어도 변변한 치료 한번 받을 수 없었고, 먹는 음식 또한 돼지가 먹는 것과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그나마도 주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만약 가문을 몰락시키고 자신을 대식국에 팔아넘긴 자들에 대한 복수만 아니었다면 벌써 세상과 이별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이것만으로는 누가 경성표국을 멸망시켰는지, 그리고 자신을 대식국에 팔도록 최종 승인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호 총관 단독 범행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위에 누군가 지시를 내렸을 수도 있다.
 그것은 차근차근 알아보면 된다. 일단은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장건은 그 장을 찢어서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장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목표는 의문의 괴한들에 의해 멸망당한 표국을 조사하는 것이다.
 낙양에서 먼 곳까지 가서 표사를 죽이고, 표물을 약탈하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상단은 엽전 한 푼이 나가도 반드시 출납부에 기재하는 버릇이 있다. 더구나 이처럼 거액의 돈이 나갈 때에는 반드시 기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 돈으로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데, 과연 그 많은 돈을-수많은 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개인이 지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수많은 문서를 찾아보고서야 그가 원했던 몇 개의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구체적으로 쓰여 있지는 않았다.
 
 내근직 확충 모집비
 금액: 황금 이백 냥
 작성자: 호불비
 
 비록 장건이 원했던 장부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의심만 나고 결정적 근거는 없었다.
 그가 찾아보았던 장부 중에 가장 의심이 나는 것이었다.
 내근직이라면 호 총관이 우문세가를 관리하기 위해 부리는 행정원, 요리사 경계병들을 총괄하는 말이다.
 이것은 호 총관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대륙상단과 해양선단 그리고 우문상단의 단주들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몇 명의 내근직을 확충하는지는 몰라도 황금 2백 냥이라는 금액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다른 문서는 대륙상단 보수 유지비로 황금 3백 냥이 빠져나갔고, 어떤 문서에는 분타 지원비로 황금 5백 냥이 빠져나갔다.
 이런 엉터리 같은 장부는 그 누가 상관이 되었든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들이었다. 자고로 출납부를 기록하려면 상세해야 한다. 즉, 출입처가 명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분타 지원비라면 어느 분타인지 반드시 이름을 기재해야 하고, 대륙상단 어디가 문제가 있어서 수리하며 무슨 물품을 구입했는지를 기재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런데 모든 것이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었다. 천하의 우문세가에서 이런 식으로 장부를 기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장부는 치밀하게 관리하면서 정작 기재는 허술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린가?
 ‘우문세가가 모두 짰을 것이다. 찢어 죽일 놈들.’
 장건의 두 눈이 가늘게 모아졌다. 두 눈에서는 짙은 살기가 어렸다.
 표국의 멸망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를 해야겠지만, 이미 심증이 굳은 이상 복수하는데 조금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좋다. 이놈의 우문세가. 아주 끝장을 내주마.’
 장건이 문서각에서 나와 마구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오경(새벽 3시~5시)이 넘어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우문세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숲 속.
 달빛은 구름에 가려 희미하기만 하다.
 휙휙.
 달빛을 가르며 장건의 팔이 분주히 움직인다. 나뭇가지가 하나의 선을 만들고 이내 두 개의 선을 만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호랑이가 되었다.
 거대한 호랑이가 입을 벌리며 숲 속을 집어 삼킬 듯 공기의 파동이 가파른 진동을 일으켰다.
 무아지경.
 장건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두 눈은 나뭇가지 끝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마치 눈앞에 생사대적이 있는 듯 힘차게 나뭇가지를 휘둘렀고, 검세는 기운차기 짝이 없었다.
 훈련은 실전같이.
 지난 칠 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간직한 문구다.
 무공을 연마할 때에는 무엇보다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것이 상승 무공일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똑같이 공부를 해도 모두가 똑같은 성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자질에 따라, 그리고 얼마나 집중을 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지 차이로 달라진다.
 한 시간을 했어도 하루 이상 한 것 같은 효과를, 그리고 하루를 했어도 겨우 한 시간밖에 하지 못한 효과를 내는 것은 오로지 집중력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장건은 조금도 태만할 수 없었고, 약간이라도 정신을 흐트러뜨릴 수 없었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우아하게 하지만 때로는 거칠게 나뭇가지를 움직였다. 어떻게 나뭇가지를 휘두르는가에 따라 독수리가 되고, 원숭이가 되며 뱀이 되었다가 다시 학이 되었다.
 지난 칠 년간은 그저 빠르게만 펼쳐내려 했지만, 최근에야 각 초식마다 성격이 있고, 그 성격에 따라 다르게 움직여야 위력이 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빠름이 능사는 아니고, 강한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간단한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이치는 아니다.
 이는 몇 십 년 수련한 사람도 간과하기 쉬운 이치였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수법에 사로잡혀 빠름을 추구하는 사람은 더 빠르길 원하고, 강한 것을 익힌 사람은 더 강한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일법통이면 만법통인 법.
 깨달은 것은 비록 하나지만, 얻은 것은 수십 수백 개에 달할 정도로 중차대한 이치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드럽게 펼쳤다가 동작을 바꾸어 거칠게 움직이려 하면 손발이 뒤엉키고 자세가 무너졌다.
 아직 몸이 익숙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각 초식마다 동작을 바꾸는 일 자체가 워낙 어렵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를 알고, 조금씩 성장을 해 나가는 것으로도 만족이었다.
 장건은 무엇을 하든 급하게 마음먹으면 탈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무공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측면이 강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해야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얍, 내력을 모아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으로 이끈다.”
 갑자기 동작이 빠르게 변하며 장건의 움직임도 급작스러워졌다.
 “화려함으로 눈을 빼앗는다.”
 허공으로 솟구친 순간 장건은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좌우로 흔들리던 나뭇가지는 부챗살 모양으로 퍼졌다.
 촤아아.
 “호랑이는 바람을 일으키고 용은 안개를 일으킨다.”
 장건은 벼락처럼 몸을 뒤집었다.
 휙- 휙-.
 사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나뭇가지는 앞뒤에 있던 소나무를 찍어갔다.
 쩌어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소나무가 쓰러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뒤에 있던 소나무를 먼저 찍고 나중에 앞에 소나무를 찍은 것이지만, 쓰러지는 것은 동시였다. 무섭도록 빠른 수법이었다.
 검을 사용해도 나무를 일거에 자르는 일은 힘들었다. 하지만 장건은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사용해서 동시에 두 개의 커다란 소나무를 쓰러뜨린 것이다.
 그렇다고 나뭇가지가 부러진 것도 아니었다. 기쁠 법도 하건만 장건의 눈썹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펼쳤던 것은 그 검법이 아니었다. 그 검법이라면 소나무가 꺾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아무런 흔적도 없이 꿰뚫고 지나가야 했다.
 백발의 노인은 가볍게 솟구쳐 십여 개의 나무에 구멍을 만들었다. 나무는 흔들리지도 않았고, 단 한 개의 낙엽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장건은 두 개의 나무도 감당하지 못해 쓰러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휴.”
 장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한 동작만 지난 일 년 동안 수십만 번은 더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허사였다. 미궁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어디를 보아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자세와 동작은 모두 맞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칠 년 전 노인이 펼쳤던 열두 개의 모든 동작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팔의 각도며 나뭇가지가 그리던 궤적도 모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훔쳐본 것이 전부였지만, 그날의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오히려 잊고 싶어도 머릿속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수십 년을 보고 연마한 것처럼 정말 생생하기 짝이 없었다.
 장건은 그 모두가 하늘에서 아버지가 인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 이 같은 기적은 있을 수는 없었다.
 열두 가지의 동작들은 모두가 상승의 묘리를 담고 있어서 제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일거에 습득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장건은 단 한 번을 보고 머릿속에 모두 담아 두었으니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익히기 힘든 무공이었다.
 순식간에 검 끝으로 수만 수천 개의 사선을 그려야 하고 검로를 조금도 틀려서는 안 된다. 또한 각 동작마다 동작을 달리하며 호흡도 다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쏟아지는 위력과 변화는 가히 하늘을 뒤엎고 땅을 갈아엎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장건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칠 년 동안 이것을 익혔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노인의 동작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지금 눈앞에서 노인이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동작이 틀릴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는 팔초식을 처음부터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노인이 나뭇가지를 휘둘러 소나무를 찌르는 순간까지는 분명 정확하게 일치했다.
 족태양방광경이 뚫리는 순간 신형도 더욱 날렵해졌고, 자세도 안정되었다.
 자세와 호흡이 모두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구멍은 뚫리지 않고 계속해서 나무만 꺾이고 있었다.
 장건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일 년이 넘게 생각해 왔던 것이었지만, 언제나 제자리였다.
 분명 문제는 없지만, 중간에 뭐가 잘못되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게 밖에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휴. 하나를 풀면 하나가 또 다시 막히는구나!”
 장건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각 초식마다 동작을 달리해서 펼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하늘을 뛸 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뜻밖의 암초를 만났으니 그것이 바로 팔초식이었다.
 팔초식은 지금까지 익혀왔던 칠초식까지와는 뭔가 모르게 달랐다.
 거침없이 달려왔던 지난 칠초식과는 달리 일 년간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공력도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답보상태에 빠졌다고 봐야 했다.
 더 이상 노인의 자세와 똑같이 하고 십이경맥을 뚫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중간에 그 무언가를 더 해야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몰라 고민이었다.
 ‘혹시 호흡에 문제가 있나?’
 이 검법은 수련검법인 동시에 실전검법이었다. 내공을 따로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검법을 수련하면 저절로 내공이 생기는 특이한 검법이었다.
 단순히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이 검법에 있어서만큼은 내공심법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발을 일보 내딛는 동시에 숨을 들이쉬는지, 아니면 내쉬는지에 따라 진기의 움직임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또한 어떤 자세에서 몇 번 숨을 들이쉬고, 마시는지에 따라서도 진기의 흐름이 다르다.
 즉, 이 검법은 호흡이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호흡이 약간이라도 틀려지면 곧바로 기혈이 뒤틀려 현기증이 일고, 주화입마와 같은 위험한 상태에 도달한다.
 때문에 스승이 없는 상태에서 이 검법을 연마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검법을 펼쳐낼 때마다 호흡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렇게 호흡을 해야 진기가 각 십이경맥으로 흘러가며 검법도 올바르게 펼쳐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호흡법이었다. 무의식중에 가장 위험한 단계를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흡의 문제만큼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도우심이고, 인도하심이라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의문이었다.
 노인으로부터 단 한마디의 조언이라도 들었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장건은 노인 몰래 훔쳐본 것이고,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하지 않았던가?
 ‘결국 칠초식으로 만족해야 하나?’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칠 년 전과 비교하면 그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천하의 누구도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그 만큼 자신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문세가를 상대로 복수할 실력은 아니었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장건은 혼자였다. 무모하게 덤벼들었다가 개죽음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대성하고 말겠다.’
 그의 눈에서 투지가 일었다.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진작 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난관이 생기면 넘으면 되는 것이고, 벽이 생기면 부수면 되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에 넘지 못할 벽도 없거니와 하지 못할 일도 없었다.
 
 
 “야, 이런 쓰벌놈아. 빨리빨리 못 움직여?”
 명철은 장건의 뒤통수를 ‘퍽’ 하고 때렸다.
 그는 장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을 지시하기 전에 미리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보다 잘생긴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욕을 하고 구타를 가해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뒤통수를 얻어맞은 장건.
 기분이 좋을 리 없지만, 그는 숨을 내뱉는 것을 화를 가라앉혔다.
 “야, 넌 사내새끼가 자존심도 없냐?”
 명철이 다시금 장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쾅.
 이번에는 제대로 맞았는지 방금 전보다 더 큰 소리가 났다.
 그래도 장건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말똥만 치울 뿐이었다.
 “멍청한 새끼.”
 명철은 장건을 꼴통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오늘은 신입행상들이 마구간을 돌아보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마구간이며 말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호 총관에게 된통 깨지게 되고, 마구간은 그날부터 일주일간은 살벌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장건은 밤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무공을 익히고 낮에는 마구간의 막내로 열심히 말똥을 치웠다. 냄새는 지독하고 일도 더럽기 짝이 없었지만, 한 달 정도 참고하다 보니 못할 것도 아니었다.
 명철이 가끔 구타를 하고 얼차려를 주는 것도 이제는 어느 정도 몸에 익어서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야, 막내. 물 좀 떠와라.”
 “물 떠올 때, 빗자루도 가져와.”
 여기저기서 심부름이 마구 쏟아졌다.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도 있는 순간.
 하지만 장건은 이미 서열을 모두 익힌 후였기 때문에 서열이 높은 사람들의 심부름부터 들어주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갔고,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야 신입행상들이 마구간에 왔다.
 모두 오십여 명으로 다음에 있을 행상대회의 성적에 따라 총단에 배치를 받던가 아니면 분타로 발령된다.
 신입행상들은 마구간의 거대한 모습에 놀랐고, 엄청나게 많은 말을 보고 또 놀랐다.
 그들을 인솔한 사람은 호 총관이었다.
 순간 장건은 온몸에서 전류가 흘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호 총관을 죽이고 싶은 욕구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이대로 호 총관만 죽일 수는 없다.
 장건은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구석진 자리로 피했다.
 ‘호 총관, 언제고 네놈이 한 그대로 되갚아 주마.’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장건은 간신히 참아 냈다.
 마구간에 살벌한 기운이 감돈 것은 잠이 들 무렵이었다. 호 총관에게 몇 차례 지적을 받고 욕을 먹은 경포가 바로 밑에 녀석들을 몇 대 후려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장건을 포함한 사십여 명의 마구간 사람들은 고참들의 구타와 얼차려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말았다.
 “이 어리버리한 새끼야, 넌 아까 신입행상들이 왔을 때, 어디 있었던 거야? 새파란 신입놈이 요령이나 피우려고 하고. 다음에 또 그러면 넌 죽는다. 알았어?”
 화를 견디다 못한 명철이 장건을 후려치며 외쳤다. 그에게 장건은 밥이고, 화를 풀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고참들에게 당한 것을 장건에게라도 풀어야 직성이 풀렸다.
 장건은 복수를 위해 꾹 참고 또 참았다. 성질 같아서는 모두 쓸어 엎고 싶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나는 것이고, 복수는 복수다. 일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모든 것을 그르칠 정도로 장건은 어리석지 않다. 그저 지금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당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날은 한바탕 깨지는 바람에 무공 수련을 새벽에 해야만 했다. 그나마도 내일 일과를 위해 사경 정도에는 모두 잠을 재워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밤을 새우고도 남았을 터였다.
 장건은 매일 수련하는 장소로 나가 일초식부터 칠초식까지 거침없이 펼쳐냈다. 이제는 동작을 바꾸는 것도 많이 익숙해졌고, 초식은 조금 더 정묘하게 다듬어졌다.
 앞으로도 계속 꾸준하게 연마를 해야 자유자재로 초식을 바꾸고 동작이 매끄럽게 변하겠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 그의 마음은 더 없이 뿌듯했다.
 그는 이마위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처음 일초식을 익혔을 때가 문득 떠올렸다.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 칠 년 간 장건은 초식은 있지만, 심법은 없는 상태에서 수련해 왔다. 머릿속에서는 초식이 맴돌았지만, 막상 그것을 펼치려 하면 조금도 펼쳐지지 않았다.
 언제나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에서 공력이 막혀 흐르지 않았고, 피를 토하고 몸이 마비된 것만도 몇 번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두려워서라도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건은 달랐다.
 어차피 그의 인생은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오히려 죽는 것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죽어도 반드시 이 검법을 연마하다 죽겠다는 각오로 달려들었다.
 여러 번을 해보고서야 비로소 이 검법이 십이경맥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첫 번째 초식은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과 연결이 되어있어서 반드시 수태음폐경이 뚫려야만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검법의 법문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첫 번째 초식의 제1관문은 진기를 수태음폐경으로 인도해서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공력은 무척이나 일천했다. 일거에 수태음폐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일 년이라는 엄청난 시간과 인내를 들여 천천히 뚫어갔다.
 복수를 해야 한다는 집념과 노예생활이라는 극한의 세월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중도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수태음폐경이 뚫리고 첫 번째 초식을 펼치게 되는 날 그는 뛸 듯이 좋아했다. 눈물을 흘리며 울음도 터뜨렸다.
 일단 수태음폐경이 뚫리자 그 다음부터는 거침없었다. 십이경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두 번째 초식부터는 가장 먼저 경맥을 뚫는 것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 ·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 ·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 ·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 ·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을 차례로 뚫고 칠초식까지 익힐 수 있었다.
 하나의 경맥을 뚫을 때마다 공력은 두 배로 불어나 그의 공력은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문제는 여덟 번째 초식부터였다. 진즉에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을 뚫었지만, 도저히 노인과 같은 위력이 펼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수태음폐경을 뚫어가던 일 년의 시간보다 지금의 일 년의 시간이 더욱 길고, 힘겹게 느껴졌다. 당시는 십 년이 걸려도 수태음폐경을 뚫고 말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힘든 것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원인만 알 수 있다면 십 년도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간다면 십 년이 아니라 평생이라도 익힐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그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
 대식국에서도 그랬다. 막히는 것이 있다면 바보처럼 행동해서 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비천한 노예 녀석이 뭘 알겠느냔 생각에 자세히 알려주었다.
 물론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지만, 자신의 무공이 고스란히 장건에게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칠단계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제 또 한 번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무공에 해박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무당파의 기명제자였다. 약간의 상승무공을 배우기는 했지만, 사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외인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아들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무공이 그리 깊지 못했던 탓에 이와 같은 상승의 요결에 대해서는 거의 전무한 편이었다.
 ‘오냐. 내 우문세가에게 무공을 배워 우문세가에 고스란히 돌려주마.’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원수의 무공으로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 기이할 정도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는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은 어떻게 되던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물며 무공쯤이야.
 
 
 흑야대가 승승장구하게 된 이유는 유명곡의 몰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원최고의 살수단체가 무림맹의 눈 밖에 나면서 청해의 오지로 내쫓기게 된 틈을 타고 흑야대는 서서히 세력을 불려나갔다.
 이제는 몇 개의 분타를 거느린 최고의 세력으로 탄생했고,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대주 정유의 공이었다. 유명곡과는 차별화해서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이 적중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무공은 상당해서 지난 이십 년간 그 누구도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흑야대는 실패 한 번 없이 모든 청부를 이행할 수 있었다.
 또한 대식국의 노예상인과 연계해서 사업을 확장한 것도 정유의 계책이었다. 정유가 없었다면 흑야대는 이처럼 크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강은 늘 그런 형을 부러워했다. 아니, 시기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유의 발꿈치 때만큼도 되지 않았으니 자괴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그의 능력이 조금이라도 뛰어났다면 벌써 부대주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강에게는 부대주가 될 능력이 없었다. 정강은 야망은 크지만 능력이 없는, 그래서 지난 십 년간 낙양분타주로 처박혀 있는 현실이 너무너무 싫었다.
 사실 정유가 형이 아니었다면 그는 분타주도 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강에게 그런 것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형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형을 증오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그의 눈은 경악으로 크게 치떠져 있었다.
 복면인이 언제 그의 침소로 들어왔는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적이 침입했다는 경적이나 싸우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낙양분타는 늘 적들의 침입을 우려해 경계가 철통같았다.
 그럼에도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는 것은 모두 비명을 지를 시간도 없이 죽었다는 소리.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복면인의 검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전신을 엄습했다.
 “너는 누구냐? 감히 겁도 없이 흑야대를 침입하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정강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큰 소리로 외쳤다.
 “네게 정강이냐?”
 복면인의 물음에 정강은 으스스 몸이 떨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강이었지만, 복면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친놈.”
 정강은 발악을 하듯 복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익.
 빠르면서도 기묘한 움직임.
 유엽도는 마치 뱀이 꿈틀거리듯 움직이며 복면인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찔렀다.’
 막 정강이 환호성을 지르려는 순간이었다.
 스윽.
 환영처럼 복면인이 사라지는 듯싶더니 어느새 정강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오늘 밤으로 흑야대의 낙양분타는 사라진다.”
 ‘헉.’
 정강은 깜짝 놀랐다.
 귀신같은 신법이었다.
 도대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등 뒤로 돌아갔는지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몸을 틀고 유엽도를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허리는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고,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정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십 년을 넘게 강호를 종횡무진 했지만, 이토록 황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푸쉬쉬쉭.
 하지만 그의 허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며 몸이 둘로 갈라졌다.
 “컥!”
 정강은 짤막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끝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다음 날 흑야대는 발칵 뒤집혔다. 낙양분타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고, 몸이 성한 사람은 이십여 명 중 단 한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몇 명 살아남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할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다.
 그중에서 정강의 죽음이 가장 처참했다. 시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데다 얼굴도 심하게 뭉개져 있었던 것이다.
 흑야대는 정강과 원수사이라는 것을 즉시 간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흑야대의 특성상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은 너무도 많았고, 그 많은 사람을 모두 용의선상에 올려놓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있다면 복면을 쓰고, 무공은 무섭도록 강하다는 것뿐이었다.
 정유는 크게 분노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동생인 것이다. 복수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강호를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범인을 색출할 수는 없었다.
 결국 흑야대는 석 달 동안 조사를 하다 그만두었고, 자체 경계만 더욱 강화시키는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이 새끼야. 똑바로 못해?”
 명철은 여지없이 장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유는 없다. 그저 때리고 싶어서 때린 것뿐이었다.
 매일 맞는 것도 이골이 날 때도 됐건만 장건은 눈에서 불통이 튀었다.
 “이제 나도 짠밥 좀 먹었으니 뒤통수 좀 그만 때리슈.”
 장건은 한 방 올려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외쳤다.
 “어라. 이제 이 새끼가 엥기네. 두 달도 짠밥이냐?”
 명철은 꼬투리를 잡은 듯 장건을 마구 두들겨 팼다.
 “넌 영원히 내 쫄따구야. 쫄따구.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네가 내 쫄따구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알았어?”
 무식의 대명사 명철이다. 그는 싸움으로는 마구간에서 경포 다음이라 할 정도로 대단했다. 원래 행상으로 있다가 상관의 눈에 찍혀 마구간에 왔기 때문에 약간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장건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더구나 마구간에서 유일한 낙이라면 장건을 괴롭히는 것.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하루 종일 장건을 괴롭혔다. 밤이 되어 잠이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장건은 그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서각은 상대적으로 문서각보다 침입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방파든 간에 무서각은 경계가 삼엄했다. 문서각도 경계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문서각은 더 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장건이 아니다. 이미 며칠을 무서각 주변을 돌며 정탐을 끝냈고, 머릿속에 계획까지 다 그려놓은 상태였다.
 그는 철저하게 근무자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맞추어서 조금씩 이동했고, 그런 식으로 결국 한 시진이 넘어서야 문서각에 숨어들어갈 수 있었다.
 1층과 2층은 볼 것도 없다. 상승무공은 오로지 3층에만 있는 것이다. 무서각도 겨우내 닫아두었던 창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공기를 환기시켜 책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장건은 고양이처럼 열려진 창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책은 많았다. 또한 하나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하나라도 없어지게 되면 곧바로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치밀해도 보통 치밀한 자들이 아니었다.
 무공비급은 오대세가의 비전무공에서부터 구파일방의 무공까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그중 강호에 나가면 크게 소동이 일어날 비급들도 있었다.
 능히 소림의 장경각과도 비견될 정도였다.
 하지만 장건은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무공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었다.
 책의 제목을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장건의 눈이 어느 한순간 딱 멈추었다.
 
 오행과 십이경맥과의 관계 고찰
 
 마치 학자의 연구과제 같은 제목이었다.
 그럼에도 눈길이 멈춘 것은 수천가지의 책 중에서 십이경맥을 언급한 유일한 책이었던 것이다.
 장건은 호기심에 책을 펴 보았다.
 
 스승님은 훌륭한 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삼단전과 오행, 그리고 십이경맥의 상관관계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비밀만 풀게 된다면 기의 흐름을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셨다.
 스승님 말씀은 곧 하늘. 나는 육십 여년의 세월을 오로지 이 연구에만 몰두했고, 마침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후인이여. 부디 이 연구가 헛되지 않도록 의술에 정로매진해서 부디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길 부탁하노라.
 천생자.
 
 
 장건은 내심 실망했다.
 무공비급인 줄 알았더니 의서였던 것이다.
 그는 책을 꽂아 두고 다른 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문득 소림의 대력금강권과 황보세가의 천왕삼권. 제갈세가의 현원전단신공 등 중원 최고의 절기들이 꽂혀 있었다.
 그 때,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크.’
 경계병들은 새벽에 두 번 무서각 안으로 들어오는데, 지금이 바로 두 번째로 들어오는 시간인 듯했다.
 장건은 무엇을 가지고 나갈까 생각을 고민했다. 하나같이 상승무공이지만, 장건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삐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장건은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오행과 십이경맥과의 관계 고찰>을 들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워낙 급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 책으로 손이 갔던 것이다.
 가지고 나왔을 때에는 크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공이지 의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무서각에서 책이 없어진 것이 드러나면 경계는 더욱 삼엄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무서각에 들어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중에 들고 나온 <오행과 십이경맥과의 관계 고찰>은 커다란 실수였던 것이다.
 
 
 
 3장 마구간을 얻다
 
 
 
 세월여류.
 흑야대의 낙양분타가 멸망한 지 한 달이 지났고, 신입행상이 뽑힌 지도 이제 달포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요즘 마구간은 무척이나 바빠졌다.
 며칠 후면 물건을 팔기 위해 행상들이 대대적으로 떠난다.
 원래 신입행상이 뽑히면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고, 석 달 동안 물건을 팔기 위해 천하 각지로 떠난다. 우문세가에서는 이것을 행상대회라 칭했고, 신입행상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행사였다.
 행상대회는 일종의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만 총단에 남을 수 있고, 더 좋은 곳으로 배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물건이 움직이면 필히 말과 수레가 따라가야 하는 법.
 지금처럼 대규모의 인원이 움직일 때에는 마구간의 업무는 살인적으로 불어난다고 볼 수 있다.
 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말발굽을 새로 갈아 끼워야 했고, 안장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했다. 거기에 수레까지 준비해 물건을 실을 수 있도록 채비를 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무엇을 하든 언제나 밑에 있는 사람만 죽어날 뿐이다. 경포와 고참들은 거의 놀다시피 하고 있었고, 가장 막내인 장건을 비롯해서 그 다음 고참인 명철 등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다녀야만 했다.
 “오늘 안으로 다 끝내. 못 끝내면 알지? 넌 죽음이야. 죽음.”
 몇 명이 달라붙어도 오늘 안으로 절대 끝낼 수 없는 과제를 명철은 내렸다.
 물론 이것은 명철에게 떨어진 일이었지만, 그는 장건에게 미루었던 것이다.
 장건을 골탕 먹이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는 요즘 장건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고 있었다.
 쫄따구 괴롭히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밥도 장건이 먹여주어야 했고, 그의 옷도 장건이 빨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런 것은 재미가 없어졌다. 대신 거의 불가능한 과제를 내려서 못하면 얼차려를 주며 괴롭히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장건을 괴롭히며 말도 안 되는 과제를 내려 골탕 먹이는 중이었다.
 장건은 원래 자신의 일에 명철의 일까지 떠안게 되자 해야 할 일은 살인적으로 불어났다.
 그 때, 마구간으로 우곤이 두 명의 남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경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두 남녀를 쳐다보았다.
 “저들은 누구요?”
 “앞으로 마구간에서 일할 남매다.”
 “그것이 정말이오?”
 경포는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여자가 마구간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순간 마구간은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만세를 부르는 녀석도 있었다. 마구간은 한마디로 축제 분위기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가 들어온 적이 없었다. 정말 삭막하기 그지없던 마구간이었다. 언제나 여자를 품으려면 객잔으로 가서 돈을 주고 품어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일반 기녀보다 미색도 뛰어났고, 순진한 처녀라는 것이 더욱 그들의 성욕을 자극했다. 오늘 밤은 정말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여자는 남루한 옷차림에 머리를 양 옆으로 땋은 모습이 시녀 같았다. 하지만 열아홉 정도의 나이에 눈이 크고, 얼굴이 갸름하게 생겨 꽤나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인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글이글 불타는 사내들의 눈빛을 느꼈던 것이다.
 ‘아, 이를 어째…….’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흉악한 모습들은 처음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달려 듯 것만 같았다. 마치 늑대의 무리 속에 뛰어든 한 마리 양처럼 그녀의 모습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녀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열여섯 정도의 소년으로 나이답지 않게 다부진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여인을 가리고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혹시라도 사내들이 흑심을 품고 달려들면 금방이라도 덤벼들 태세였다.
 소년은 아직 어렸지만, 마구간의 사내들이 어떻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누나가 못생겼어도 결코 가만 둘 위인들이 아니었다. 하물며 누나 정도의 미색이라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 것이 뻔했다.
 ‘쓸모없는 것들. 그저 여자라면…….’
 우곤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혀를 찼다. 아무리 막나가는 녀석들이라고는 해도 저렇게 표를 내며 좋아할까 싶었다.
 “흠. 흠. 여기 있는 설수란은 우문 아가씨의 시녀였다. 하지만 대륙상단의 장부를 훔친 죄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생 설수호는 자청해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고. 그러니 너희들이 잘 이끌어 주길 바란다.”
 이끌어 주긴 개뿔이.
 말을 했던 우곤조차도 설수란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누구도 탓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대륙상단의 장부를 훔친 이상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이다.
 “아니에요. 저는 절대 장부를 훔치지 않았단 말이에요. 분명 아가씨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란 말이에요.”
 “이것아. 조용히 못해? 네 방에서 장부가 나왔다. 증거가 있는데, 아직도 오리발이야?”
 설수란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구간으로 오고 말았다. 결백을 증명하기 전에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었다.
 
 
 석양빛 노을을 등에 지고 한 사내가 융중산을 오르고 있었다.
 기암괴석이 불쑥 솟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보기만 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하지만 사내의 발걸음은 민첩했다. 산을 깎고 암석을 부수어 만든 마차 전용 대로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위한 등산로가 따로 있었지만, 사내는 이 대로를 따라 걷는 것을 무척이나 즐겼다. 아름다운 경치와 대자연의 장관에 넋을 잃어서는 아니었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봉우리만큼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다는 우월감과 자부심이 그의 마음을 한껏 드높여 주었다.
 융중산은 과거에는 제갈량이 은거한 곳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무림맹이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한 곳이었다.
 오십 년 전 변황과의 전쟁 이후 무림맹이 창설되었고, 지난 오십 년간 융중산은 권력의 상징이요, 강호의 중심이 되었다.
 모두가 가고 싶은 곳이지만, 아무나 갈수 없는 곳. 꿈이 있는 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극히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곳.
 융중산에 오른다는 것은 곧 부와 명예를 움켜쥐었다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때문에 융중산의 험난함만큼이나 대로를 걷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노력과 험난한 경쟁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시간만큼은 그런 마음을 즐길 수가 없었다. 급히 보고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무림맹의 위상 때문이었다.
 이맘때쯤이면 각 문파나 방파에서 안부 인사를 하기 위해 무림맹이 시끌벅적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조용했다.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더 이상 예전의 영화를 생각한다면 헛된 것이리라.
 사내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몇 개의 등성을 넘어 한참을 가자 눈앞에 한 채의 웅장한 성이 나타났다.
 웅장한 건물만큼이나 철문도 거대하기 짝이 없었고, 철문 위에 달려 있는 현판도 거대했다.
 
 무림맹
 
 용이 날고 봉이 춤을 추는 듯한 유려하기 짝이 없는 필체가 한껏 위엄을 돋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적 압박감이 들게 하는 일장에 달하는 담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근 십 리에 이를 정도의 광대한 성과 기암괴석보다도 더 높아만 보이는 층층 누각들은 절로 경탄이 나올법하다.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사내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한 달 만에 오는 곳이다.
 변한 것은 없었다. 곳곳에 펼쳐진 연무장(練武場)과 작은 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드넓은 정원도 그대로였다.
 다만, 연무장을 가득 메웠어야 할 마차와 손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연무장에서 기합을 내지르며 훈련하고 있는 사람도 구파일방의 제자가 전부였다.
 예전 같았으면 수많은 방파의 젊은이들이 제자가 되기 위해 줄을 서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내는 내원으로 향했다. 거대한 누각과 전각이 품자형으로 마주보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화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천무단(天武團)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한 중년인이 등을 지고 창문 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림맹에 돌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창문 밖을 보고 있구나!’
 그가 처음 천무단주 유천기를 만났던 십 년 전에도 저랬고, 그의 지령을 받고 무림맹을 떠나기 한 달 전에도 저랬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서서히 적응이 되어 이제는 고독한 향기가 물씬 풍겨나오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멋있어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사내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무림맹으로 오면서 무수히 많은 말들을 생각해보았지만, 이것처럼 적당한 말은 찾을 수가 없었다.
 “철비 왔는가?”
 조용한 어조는 늘 보던 사람을 대하는 듯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창문 밖을 향하고 있었지만, 철비라 불린 사내는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모습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자네가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네.”
 유천기는 먼 밖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철비는 유천기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철비는 느낄 수 있었다. 오늘만큼은 유천기가 습관처럼 창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고의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철비는 충분히 유천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림맹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지난 오십 년을 한결같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을 죽이고, 강호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해 유명곡(幽明谷)과 해적선단에 살인을 청부하고 오는 길이었다.
 철비 자신만 하더라도 한 달 전에 얼마나 망설이고 주저했던 일이던가? 망설이고 또 망설여 보았지만, 이상하게 변해가는 무림을 그냥 바라보기에는 그의 젊은 피가 너무도 뜨거웠다.
 “유명곡과 해적선단도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지. 그들은 흑야대에 밀린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청부를 받아들여야만 했을 걸세.”
 유천기의 말에 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였으면 살수집단에 청부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살수보다는 흑야대에 청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도 이번 청부가 목숨을 내걸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떤 극단적인 조치가 없다면 스스로 자멸하고 말 상황이었다.
 유천기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어느새 그의 귀밑에 흰 머리가 희끗희끗 나있었다. 이마에 주름이 두세 가닥 나있어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십 년 전에 처음 봤을 때의 호탕한 모습은 어딜 가고 세상의 온갖 풍상에 찌든 노인을 보는 듯했다.
 “대의를 위한 일이네. 이번 일이 잘 되면 어긋났던 것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될 게야.”
 유천기는 철비의 어깨를 몇 번 토닥여 주는 것으로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따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철비는 느낄 수 있었다. 유천기 스스로 이번 일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라는 것을.
 사실 철비도 지난 한 달간 끝임 없이 되뇌었던 말이 바로 ‘대의를 위한’이라는 말이었다. 만약 대의가 아니었다면 화산파 제자란 자부심을 내던지고, 살인을 청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번 한번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면 무림맹이 이와 같은 초강수를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철비도 유천기의 말마따나 이번 한번으로 모든 강호의 질서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다.
 고금이래로 강호라 하면 구파일방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방회와 세가가 톱니바퀴 돌아가듯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곳이다. 강호만큼 힘이 진리인 곳이 없었고, 강자존(强者存)의 세계도 없었다.
 또한 강호처럼 철저히 서로의 이해가 맞물려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는 곳도 없을 것이었다.
 어떨 때는 정파와 사파로 나뉘어져 피를 흘리며 상잔을 벌이기도 했고, 어떨 때는 변방의 무림이 침입해서 정사가 하나가 되어 손을 잡고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십 년 전 우문비양의 사후부터 시작된 창룡백가와 해왕군가, 이 두 상단의 암투로 인해 강호는 서서히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창룡백가와 해왕군가는 우문세가를 차지하기 위해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그 와중에 서로 경쟁을 하듯 명문세가와 합병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치 솜이 먹물을 빨아들이고, 회오리바람이 사물을 휩쓸고 지나가듯 이들의 합병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합병을 해서 세력을 키워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고,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 합병에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합병은 문제도 아니었다. 창룡백가나 해왕군가에게는 막대한 자본이 있었고,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황금이 있었다.
 오히려 오십 년 동안 이어져오던 구파일방 중심의 무림맹이라는 체계에 염증을 느끼던 신진 세력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먼저 합병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렇게 그들은 점점 세력을 불려나갔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창룡백가는 대륙의 세가와 손을 잡고, 해왕군가는 해양의 선단과 손을 잡았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합병은 뜻하지 않게 대륙과 해양으로 무림이 나뉘게 되는 초석이 되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정강남 사강북(正江南 邪江北)으로 해서 무림을 나누는 기준을 정파와 사파의 개념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사의 개념은 애매모호하게 변해버렸다.
 대신 대륙에 위치한 군소방파라면 정사를 막론하고 창룡백가에, 해양의 크고 작은 선단(船團)과 섬들은 해왕군가에 소속되어야만 했다.
 언젠가 한번은 대륙방파가 해왕군가에 소속되는 일이 벌어졌다가 하룻밤 만에 잿더미로 변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울분을 참지 못한 대륙방파 청년들의 소행이었는데, 그 누구도 그들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는 나라를 팔아먹은 진회를 위시한 자자손손 욕을 먹는 간신배들의 파렴치한 행동과도 같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형적인 사태에 가장 반발한 사람들은 구파일방을 위시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강호의 맹주를 자처하며 아무런 근심도 없이 지내왔다.
 또한 오십 년 전 변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결맹된 무림맹은 그들의 권력을 더욱 곤고히 다지는 역할을 했다.
 강호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해마다 강호의 모든 문파가 보내온 막대한 양의 돈은 그들의 배를 채우고, 생활을 안락하게 영위하는데 쓰여졌다.
 그러던 것이 우문세가로 인해 강호무림이 대륙과 해양으로 나뉘고 정사의 개념이 모호해진 이 때, 무림맹의 존재자체가 희미해지게 된 것이다.
 물이 없는데, 물을 담을 그릇이 있어서 무슨 소용이겠는가?
 제아무리 값비싼 그릇이라 해도 소용이 없다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당연히 기득권 세력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고 싶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그들의 생존과도 직결된 것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선 그들이기에 더욱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우문세가를 해체하던가 아니면 강호는 여전히 정과 사가 상충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래. 방법은 나쁘지만, 이것은 강호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앞으로 3차 정사대전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 그 때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무림맹은 존재해야 해.’
 철비는 굳게 믿고 있었다. 언제가 되었든 여전히 변황무림은 존재하고 있었고, 강호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마도천의 잔당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십 년 전의 정사대전은 1차 변황과의 전쟁만큼이나 격렬했고,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화산의 대전을 끝으로 정파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정작 마도천의 천주와 장로들은 처단하지 못했다. 워낙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싸움이 격렬하고 대규모의 전쟁이었던지라 그들이 언제 몸을 내뺐는지 몰랐던 것이다.
 무림맹은 조직을 만들어서 지난 십여 년간에 걸쳐 강호 전역을 이 잡듯 수색해 보았지만, 단 한 명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아무도 마도천을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생각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도천을 조심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이 두 번의 전쟁으로 인해 무림맹만 큰 타격을 입었고, 구파일방의 정기만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우문세가는 강호의 질서를 교묘하게 바꿔버린 것이다. 문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규모가 큰 문파일수록 돈이 들어가는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상단과 무림문파와의 합병은 급물살을 탈 수밖에 없었고, 강호의 질서가 무림맹 체제에서 상단과 문림문파 체제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림맹에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강호의 정기를 지키다 이렇게 되지 않았던가? 그동안 누구를 위한 무림맹이요, 구파일방이었던가?
 구파일방의 제자들은 크게 분노했고, 무림맹은 저주의 외침을 토해냈다. 토사구팽이란 말도, 죽 써서 개 주었다는 말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칭찬으로 들렸다.
 강호라는 곳은 결코 자본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이다. 자본의 위력은 강력하고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는 있지만, 결국 힘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철비는 막상 일이 잘 풀려 유명곡(幽明谷)과 해적선단이 청부를 받아 주었지만, 뒤끝이 개운치 못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자네는 그만 돌아가 쉬도록 하게. 나는 맹주님과 원로들께 보고를 해야겠네.”
 “예, 단주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철비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의란 무엇입니까? 과연 이런 식으로 하는 길만이 대의를 지키는 것일까요?’
 지난 한 달 동안 수없이 되뇌어보았지만, 그저 미지의 세계를 보는 듯 희미하기만 할 뿐이었다.
 
 
 경포는 기분이 좋았다.
 하루하루가 오늘 같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작업 진행이 느리다는 우곤의 잔소리도 오늘만큼은 애교로 들렸다.
 잔뜩 겁을 먹은 얼굴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설수란이란 계집 때문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절로 욕정이 동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얼핏 보아도 처녀였다. 더구나 우문하의 시녀였다면 당연히 처녀여야 했다.
 그는 처녀와 언제 관계를 맺었는지 생각했다.
 빌어먹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맺어온 여자들은 모두가 기녀였다. 기녀에게 처녀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말로만 듣던 처녀를 접하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경포의 사십 평생에 이런 횡재는 단연코 없었다.
 순결한 처녀에 스무살은 더 어린 영계였고, 더구나 공짜였다. 전임 대장 순태를 물리치고 마구간의 대장이 된 날도, 소교에게 첫 총각 딱지를 떼던 날도 지금처럼 감격스럽지는 못했다.
 아들 딸 낳고 착하게 살라던 어머님의 유언이 떠올랐다. 살모사 같던 경포도 어머님만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했다. 죽은 지 십 년은 훌쩍 넘어 기억도 가물거렸지만, 이제야 그 유언을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길, 오늘 같은 날을 보고나 죽을 것이지…….’
 잠시 울적해지려던 마음이 설수란의 얼굴로 인해 다시금 흥분으로 바뀌었다.
 “오늘부터 저 계집은 내가 관리한다. 알겠나?”
 경포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홱 일그러졌다.
 “대장.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니오? 좋은 것은 나눠먹어야지 어찌…….”
 “뭐야, 이 새끼들아? 여자가 음식이냐, 나눠먹게. 그리고 네놈들이 나와 동급으로 놀겠다는 거야, 뭐야?”
 경포가 예의 그 살모사 눈을 치켜떴다.
 ‘이런, 쓰벌. 늙은놈이 어린계집을 보더니 눈이 홱 돌아갔군.’
 사람들은 심중에 불만으로 가득했지만, 감히 경포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번만 더 말대꾸를 한다면 바로 칼침이었다.
 설수란은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경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도 이제 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나이였다. 그녀 또래의 누구는 벌써 누구와 눈 맞았다느니,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던 터였다.
 그녀도 최근에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에 우문세가의 남자들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렸다. 꿈 많은 소녀가 늘 그렇듯이 그녀도 잘생긴 백마 탄 왕자와 강호를 주유하는 것을 생각하며 행복해하곤 했다.
 그런데 경포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흉악하게 생겼고, 나이도 아버지라고 해야 정상일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경포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람 죽이기는 여반장이고, 기생과 뒹굴며 밤을 낮 삼아, 낮을 밤 삼아 무절제한 삶을 지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경포의 노리갯감으로 며칠 지내다 싫증나면 버려질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닥쳐온 불행에 설수란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린 동생만 아니었다면 벌써 혀를 깨물고 자결했을 것이었다.
 “나으리. 제발…….”
 그녀의 눈물은 연민을 자극할 법도 하건만 경포는 짜증만 일었다.
 “이런, 썅. 눈물 그치지 못해? 이 나으리가 너를 황녀로 만들어 주겠다는데 뭔 놈의 눈물이야, 눈물이.”
 그가 솥뚜껑만 한 손을 뻗어 설수란을 잡아채려는 순간 설수호가 막아섰다.
 “누나를 건드리는 놈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도끼눈이었다. 설수호의 눈빛에서 진한 살기가 느껴졌다.
 경포는 잠시 흠칫했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려도 한참 어린 녀석에게 잠깐이나마 겁을 먹었다는 생각에 살기마저 돌았다.
 “이 새끼. 저리 꺼지지 못해?”
 경포의 주먹이 설수호의 얼굴에 작렬했다.
 컥.
 설수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결코 열여섯 소년이 견딜 주먹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를 건들면 언제고 네놈을 죽여 버릴 테다.”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예의 도끼눈은 여전했다.
 경포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복부를 찍었다.
 퍽.
 설수호는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에는 충격이 대단했던지 쉽게 일어설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악착같이 정신을 차리고는 경포의 다리를 붙잡았다.
 “누나를 건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경포가 발로 설수호의 얼굴을 밟고 뭉갰다.
 “이 새끼야. 이래도 까불 테냐?”
 “퉤. 누나를 건들면 넌 죽어.”
 핏물이 경포의 바지를 적셨다.
 “독종 새끼.”
 독종도 이런 독종이 없었다.
 살려두면 언제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놈이었다.
 그가 지난 몇 년간 마구간의 대장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자리를 위협할 만한 놈들은 애초에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 새끼, 단단히 교육시켜.”
 그도 양심이 있었던지라 누나를 첩으로 삼으려는 마당에 그 동생을 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경포의 마음을 이내 눈치 챘다.
 ‘제길, 더러운 일은 꼭 우릴 시켜.’
 사람들은 마음과는 다르게 무자비하게 설수호를 때리기 시작했다. 어린 녀석이라고 인정을 봐준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마구간에서 그런 것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죽지 않을 만큼 혼을 내서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대충 혼을 냈다가는 언제나 뒤탈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더구나 모두들 설수호가 얼마나 독종인지 충분히 지켜보았다. 확실히 기를 죽여 놓을 필요가 있는 녀석이었다.
 “수호야. 나으리, 시키는 일은 다 할 테니 수호를 한 번만 봐 주세요.”
 설수란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조용히 하고 넌 따라와.”
 경포는 설수란의 손을 잡아끌었다.
 장건은 정말 남의 일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남의 일에 신경 쓸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도 않거니와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설수란이 짓밟히든 말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눈 한번 딱 감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사내들이 어린 설수호를 마구 때리는 모습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옆집 개새끼를 패도 저렇게 무자비하게 패지는 않을 것 같았다.
 노예시절에 그도 저렇게 얻어터졌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맞지 않겠다고 각오한 것도 모두가 지독한 구타 때문이었다.
 장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모두 쓸어버리고 깨끗이 청소하고 싶었다. 저 인간말종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얻어터지면서도 두 눈으로는 여전히 자신의 누나를 쳐다보는 설수호의 모습은 몇 년 전의 자신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그것이 더욱 장건의 마음을 갈등되게 만들었다.
 ‘으으.’
 장건은 터져나오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켜버렸다.
 우문세가에 복수하려면 절대 남의 일에 신경 써서는 안 된다.
 누가 죽던 말든, 설수란의 순결이 깨지건 말건 그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이런, 제기랄.’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설수호의 모습은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잊을 수가 없었다.
 노예로 있을 때의 그의 모습과 설수호의 지금 모습은 너무도 닮았다. 도끼눈 하며 이를 악물고 구타를 참아내는 모습 모두가 노예로 있을 때의 바로 장건이었다.
 그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노예시절과 너무도 닮은 설수호.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참을 수가 없었다.
 ‘썅. 너희들 모두 오늘 죽었어.’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바보나 남의 일에 신경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분노는 저 인간말종들을 때려 부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하지 않으면 마음에 병이 생길 것 같았다. 마침내 그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모두 동작 그만.”
 장건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설수호를 때리던 손길이 뚝 멈춰졌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은 외침이 장건에게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신입이 미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뭐야 이 새끼야. 너 죽고 싶어?”
 “건방진 신입놈이 어디서 까불어? 까불기는.”
 사람들은 장건을 한번 노려보고는 다시금 설수호를 때리려고 했다.
 명철은 눈을 부라렸다.
 “너 오늘 할 일은 모두 하고 설쳐대는 거……. 퍽!”
 물론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핑계로 뜨거운 맛을 보여줄 참이었다.
 하지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엇이 번쩍하더니 입가에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와 동시에 명철은 배를 움켜잡고 허리를 꺾었다.
 어느새 장건이 주먹으로 명철의 복부를 찍었던 것이다.
 명철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장건의 주먹이 어찌나 매운지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오늘 이후로 마구간은 내가 접수한다.”
 장건은 큰 소리로 외치며 사람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그 누구도 장건의 손에서 일초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픽픽 나가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신음을 흘리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
 단 한 방이었지만, 숨을 쉬기도 곤란할 정도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 와중에 명철은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경악했다.
 그도 무공을 익혀서 알지만, 장건은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가벼운 몸놀림 하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주먹. 차라리 독수리요, 호랑이였다.
 그의 머릿속으로 장건을 때리고 얼차려를 주며 괴롭혔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난 이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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