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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피지컬로 다 해 먹는 중세생활(종료230504)

1화.

2023.02.06 조회 64,388 추천 1,250


 1화.
 
 
 
 어릴 적, 나는 채널9에서 하는 동물의 왕국을 보고 있으면 항상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가젤이 불쌍했다.
 왜 쟤는 가젤로 태어난 거지? 사자로 태어나지 않고?
 사자의 삶도 녹록진 않았다.
 늙은 수사자가 젊은 수사자에게 지고 상처 입은 몸으로 쫓겨 명을 다할 때.
 젊은 수사자가 늙은 수사자 새끼들의 숨통을 끊을 때.
 나는 사자에게도 연민이 생겼다.
 쟤네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저러지 않아도 될 텐데.
 상처 입으면 병원에 가고 아이들은 어른의 보호를 받고.
 난 사람으로 태어난 걸 너무 감사했다.
 어느 정도 머리가 굵었을 때, 사람도 개체별로 시작점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단순히 부모의 재력만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었다.
 외모와 재능, 그리고 두뇌도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사람들의 세계도 동물의 왕국과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누군간 불쌍한 가젤이 되고 누군간 젊은 수사자가 되었다. 공평하지 않았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이 웃고 떠들고 있으면 모두 비슷한 것 같지만, 사회에 나오면 본인의 위치를 자각한다.
 자신이 포식자인지, 피식자인지.
 
 나는 고아였다.
 보육원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항상 같이 놀 수 있는 형, 동생, 친구들이 있었다. 어릴 때는 또래 사이에만 있어도 즐거운 법이다.
 가끔 배고프고 추울 때도, 아플 때도 있었지만 버틸 만했다. 내 옆에는 함께 견디는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우린 모두 헤어졌다.
 나를 지탱하던 버팀목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사회에 나온 후, 나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헤어지지 않는 대가족을 만들겠다는.
 한 가지 원칙도 세웠다. 꼭 포식자와 피식자 중 하나에 속해야 한다면 포식자가 되겠다는.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대가족을 만들고 사자가 못 들어오게 튼튼한 울타리를 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으니까.
 주유소, 식당, 배달 등.
 전문하사로 군대를 전역한 후엔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주일 중 하루만 쉬었다.
 단비 같은 그 하루에 나는 맥주를 마시며 웹소설을 보거나 토X워 같은 게임을 했다. 적은 돈으로 즐겁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른 살에 나는 치킨집을 하나 열 수 있었다. 작은 평수였기에 배달에 특화된 가게였다.
 생각보다 나는 장사에 재능이 있었다.
 물건 떼는 방법이나, 식자재 관리하는 요령, 원가를 아끼면서도 양을 풍성히 보이게 만드는 방법.
 무엇보다 음식을 객관화하는 게 가능했다. 수많은 음식점 알바 경험으로 손님이 어떨 때 주문하고 어떨 때 망설이는지 봐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장사가 점점 잘되자 치킨집을 차리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분들에게 조언하다 보니 점점 더 찾아오고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새 프랜차이즈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서른셋.
 식음료계 대기업의 인수 제안도 받았다.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꿈만 같은 날들이 내게 펼쳐졌다.
 목표를 실천할 때였다. 나는 모태솔로를 탈출한다.
 탁! 치-!
 거실 창가로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맥주를 한 캔 땄다. 리클라이너 의자에 눕듯이 앉아 최근 열심히 보고 있던 웹소설을 열었다.
 “크큭, 재밌다. 그래, 다 죽여. 주인공이 시원한 맛이 있어야지.”
 행복했다.
 
 *
 
 꿈을 꾸는 중이다.
 이상한 꿈이었다.
 아무래도 웹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아니면 게임을 너무 했다든지.
 일주일 동안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고민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인기 없는 웹소설을 1,000화 이상 따라간 적도 없었고 서비스 종료하는 게임을 최고 고인물 수준으로 하지도 않았다.
 그냥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안 적당히 보고 즐겼던 것뿐이었는데.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이곳이다.
 중세.
 전기도 없고, 통신도 없으며, 인터넷도 없는 곳.
 처음엔 잠들면 다시 현대의 문명으로 돌아갈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할 수 있는 별의별 짓을 다 해 보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 명상을 해서 단전에 내공이 있는지, 심장에 써클이 있는지도 살펴봤고 내 뺨을 한 시간 내내 쳐 보기도 했다.
 게임 속, 소설 속의 키워드를 끊임없이 허공에 내뱉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는데 그건 차마 시도하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난 아침, 내 방 향초 냄새가 아니라 침대에 썩어 가는 밀짚 더미 냄새에 깨어나자 나는 결국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꿈이 아니었다.
 “하.”
 마주친 현실을 인정하자 곧바로 첫 번째 분노가 찾아왔다.
 왜 하필 난가.
 보육원 출신으로 부모 없이 자라 갖은 고생 끝에 자리 잡았다. 이제 계획대로 현명한 여자를 만나 행복을 누리려 하는데.
 십여 년간 노력하여 이룩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내 아파트, 내가 만들고 내가 키운 내 회사, 내가 고생하여 어렵게 쌓은 나만의 울타리.
 지금까지 난 뭘 해 왔던 거지? 엄청난 탈력감은 다시 엄청난 무력감으로 다가왔다.
 첫 번째 분노는 근본적인 질문에 의한 것이라면 두 번째 분노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가까웠다.
 웹소설의 다른 주인공들은 회귀하거나, 전생하거나, 빙의하거나 모두 굉장한 능력이 부여된다.
 스탯창이 있거나, 나만 레벨업을 할 수 있거나, 하다못해 보던 웹소설 안으로 들어가 미래를 알 수 있거나 등등.
 ···그런데 나는 없다.
 이곳은 내가 보던 웹소설 속도 아니고, 내가 하던 게임 속도 아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다른 주인공들은 왕족, 귀족, 기사 등 좋은 신분으로 출발하는데.
 “빌어먹을.”
 난 여기서도 고아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다.
 내 신분은 농노다. 이 세계의 감각으론 노예와 다름없는, 신에게 죄를 지어 벌을 받는 족속.
 일주일 동안 저 세상의 나, 한유찬과 이 세상 한스의 기억이 연동되어 파악한 결과다.
 저 세상이든, 이 세상이든 내 출발은 가젤이다.
 나는 이곳에 왜 오게 되었을까?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쉼 없이 고민했지만, 여전히 답은 알 수 없었다.
 끼익.
 “한스, 아직도 아픈 거냐? 오늘도 안 나오면 채찍을 맞을 거다.”
 누군가 들어와 차디차게 말했다.
 한스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다.
 영주의 밀밭 관리인 아들 지미.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을 부릅뜨고 지미를 바라봤다.
 내 상태창은 없지만, 상대방의 상태창이라도 보이나 했기 때문이었는데 역시나 그런 건 없었다.
 ‘젠장.’
 내가 일어났다.
 190센티는 됨직한 키, 살짝 말랐지만 탄탄한 체격. 날 보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압감을 느낄 거 같았다.
 지미 역시 위압감에 순간 움찔했지만, 뻣뻣하게 선 채 오른손을 채찍 쪽으로 옮겼다.
 나는 잠시 그런 지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뭐, 뭐?”
 “가자고요, 일하러.”
 피할 수 없다면 부딪혀야 한다. 언제까지 고민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쇠스랑 하나를 쥐고 먼저 집을 나섰다.
 이곳 영주의 말은 모두 오십여 필이었다. 전마도 있고 짐말도 있었다. 말똥은 밀짚과 잘 버무려 두면 좋은 퇴비가 될 수 있다.
 한스가 요새 하던 일은 바로 그 퇴비를 만드는 일이었다.
 작업장에 이르자 산더미 같은 말똥과 밀짚이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머리까지 아려 온다.
 “네가 일주일이나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쌓여 있는 거다. 오늘 안에 다 하지 못하면 저녁은 없는 줄 알아라.”
 지미는 아까 잠시 쫄았다는 느낌을 부정하듯 우쭐거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신분 차이만 믿고 까부는 걸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원래 저 세상의 나라면 이런 생각이 안 떠올랐을 텐데 지금은 쇠스랑을 휘둘러 인생의 교훈을 주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하지만.
 ‘참자.’
 이곳은 내가 살던 현대와 다르다.
 법과 질서와 상식보다 신분이 우위인 곳.
 새로운 농노의 삶을 받아들이긴 정말 어려웠지만, 앞날은 차차 바꿔 가면 된다.
 늘 해 왔던 것 아닌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웹소설 주인공의 특별한 능력이 없다 해도 내 머릿속에는 현대의 기억이 있으니 정말 맨땅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적응할 때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까지 조아리며 말하자 지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사라졌다.
 근데 정말 일이 많았다.
 거짓말 보태 동산이 두 개나 있는 것 같았다.
 말똥 동산 하나. 밀짚 동산 하나.’
 이런 노동은 군대에서 많이 겪어 봤다. 이 작업은 분대원 열 명이 달려들어도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일단 해보자.”
 난 바로 일을 시작했다.
 착.
 쇠스랑을 들고 한 삽 크게 퍼 중간 공터에 옮겼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한 후, 이번엔 밀짚을 한 아름 들고 옮겼다. 그리고 섞었다.
 아침부터 정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해가 점차 기울어져 내 그림자가 늘어질 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곤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우뚝 섰다.
 거대한 동산 두 개는 하나로 뭉쳐 완벽한 퇴비 동산이 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에게도 있었다.
 주인공의 능력.

댓글(64)

[탈퇴계정]    
재미있어요.
2023.02.11 11:46
등골휜다    
오 상태창 없는 중세물 기대됩니다
2023.02.18 23:56
김영한    
오오옷
2023.02.20 16:55
    
피지컬 ^_^? 본거 같기도 하고
2023.02.20 17:01
빨공    
중간에 고아인데 군대를 전역했다는 내용이 있네요? 프롤로그 흥미진진해서 기대 됩니다
2023.02.21 17:08
만초    
제 친구도 고아인데 군대 갔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알려주지를 않던데 보니까 일부러 군대가는 고아들이 없진 않습니다
2023.02.22 10:46
용천마    
농노 한스로 시작하는 소설 본것 같은데 리메이크죠?
2023.02.23 01:21
리번선생    
아닙니다.
2023.02.23 09:22
브라이언    
자원입대가 아니라면 왜 고아가 입대를 하죠? 돈을 번다는 내용을 보면 군대안가고 돈을 버는게 낫지 않나요? 아니면 부사관으로 입대를 했다는건지...
2023.02.25 20:40
브라이언    
나무로 만든 쇠스랑? 쇠로 만들어서 쇠스랑 아닌가요? 자루만 나무고.
2023.02.2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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