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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겜블러 1권 (1)

2015.04.22 조회 1,540 추천 17


 1. 카지노
 
 퐁-
 라이터는 쇠로 만들어졌음에도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뒤를 이어 솟아난 불꽃이 사내의 담배에 불을 댕겼다.
 “뭐 재밌는 일 좀 없어?”
 지하로 내려가는 철문을 가리고 선 떡대가 픽 웃었다.
 “늘 있는 일이지. 따는 놈은 따고 잃는 놈은 잃고. 뭐 새로운 얼굴을 찾는 거라면 몇 있기는 해.”
 “호오, 호구들이 납셨다?”
 떡대는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얇은 웃음소리를 냈다.
 “모두는 아니지. 만만치 않은 놈도 있어. 벌써 두 시간째 따고 있는걸?”
 사내는 입가를 묘하게 꼬아 올렸다.
 이런 비밀 카지노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딱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아는 사람을 통해 조심스럽게 작업 된 호구들, 아니면 다른 영역에서 유입된 어설픈 도박사들.
 아무래도 떡대가 얘기하는 건 후자인 모양이었다.
 “후우.”
 사내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피식 웃었다.
 “인생 종 치고 싶은 모양이지?”
 “그러게.”
 다른 곳도 아닌 백곰이 운영하는 카지노다.
 서울 시내 웬만한 조직들이 형님으로 모시고 국회의원 몇의 뒷돈을 대주는 큰손. 일설에는 대통령 선거 때도 무시 못 할 후원금을 냈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경찰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곳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얼굴이 잘 알려진 사내도 마음 놓고 드나드는 거지만.
 이 카지노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강원랜드는 고사하고 라스베이거스와 마카오보다도 훨씬 더 진보된 첨단 장비, 능수능란한 딜러들 때문이다.
 물론 그 많은 장비와 감시를 피해 속임수를 쓸 정도로 배포가 크고 실력이 좋은 놈도 분명히 존재했다. 아마 둘 정도?
 하지만 전 세계 미디어에 얼굴이 알려질 정도의 고수들이 이런 소규모 카지노까지 올 일은 하늘이 두 쪽 나기 전에는 없을 일이다.
 “잘하면 오늘 좋은 구경하겠는데?”
 떡대가 손을 내밀자 사내는 자신에게 지급된 카드를 내밀었고 떡대는 철문에 달리 인식기에 밀어 넣었다.
 “그놈이 속임수를 쓰다가 걸려서 손목 잘리는 걸 보고 싶은 거야?”
 키득키득.
 딸깍.
 사내가 키득거리는 사이 철문의 자물쇠가 무겁게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잘 놀다 와.”
 철컹.
 사내는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 들으며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지. 그보다 더 좋은 구경이 생길지도…….”
 
 유진은 빠르게 테이블 위를 훑었다.
 네 명 모두 보이는 카드는 세 장. 아직 두 장이 덜 돌려진 상태였다.
 “천!”
 뿔테 안경에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잔주름이 많은 중년 사내. 손마디가 굵고 거친 데 반해 입고 있는 옷은 명가의 손을 거친 이탈리아 수제 슈트.
 저런 타입은 밑바닥부터 자수성가한 기업가다. 뭐가 아쉬워 도박판에 끼어들었는지 몰랐지만, 그걸로 인생은 끝장이다.
 평생 일만 하고 산 개미.
 당연히 놀고먹는 데는 젬병이다. 생전 처음 심장이 떨리는 기분을 느꼈을 테고 그건 마약보다도 더 사람을 옭아맨다. 거기다 피 같은 자신의 돈이 순식간에 사라진 걸 깨달을 때쯤이면 본전 생각에 잠도 못 이룰 게 분명했다.
 깔린 카드는 ♣8, ◆7, ◆10.
 스트레이트나 플러시를 바라고 달리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콜.”
 두 번째 남자는 창백하도록 하얀 얼굴의 이십 대 후반.
 필립 파텍. 이미 차고 있는 시계만도 억대가 넘는다. 마치 여자처럼 고운 피부와 손을 보면 자기 손으로 밥이나 먹을지 의심스럽다. 부동산 갑부의 외동아들 정도?
 보이는 카드는 ♠3, ♠9, ♠Q.
 ‘플러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유진을 향했다.
 펴 놓은 카드는 ♠A, ◆3, ♣6.
 덮어놓은 카드는 ♣A와 ♥3.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미 5구에 에이스 투 페어. 감히 스트레이트나 플러시가 이어질 레이스를 견딜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레이스, 천에 이천 더!”
 중년 사내와 이십 대의 얼굴이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툭.
 “삼천에 칠천 더.”
 유진의 눈살이 살짝 찡그려지며 옆의 사내를 봤다.
 슬며시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
 삼십 대인지 사십 대인지 애매하고 입은 옷도 평가하기 모호했다. 손과 얼굴도 너무 평범해 고개를 돌리면 금방 잊어버릴 것 같이 너무 평범한 사내.
 중년 사내가 다시 자신의 카드를 뒤집어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씨팔! 콜.”
 후드득.
 오만 원권 지폐 뭉치를 올리는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모두의 눈에 보였다. 스트레이트나 플러시 메이드면 저러지 않을 테고 보나 마나 마지막 한 장을 위해 자그마치 일억을 던지는 거니 안 떨리면 이상하다.
 “다이.”
 이십 대는 미련 없이 카드를 덮었다.
 액면 상으로는 돈이고 카드고 가장 꿀릴 게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단 한 순간의 미련 없이 카드를 덮는다.
 ‘있는 놈이 더 한다더니…….’
 유진 뿐 아니라 구경하던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를 생각.
 “합 삼억.”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이억 칠천을 세어 밀었다.
 “헉!”
 “우와!”
 “대박이다.”
 6구까지는 레이스가 두 번까지 허용한다. 그런데 벌써 5구째에 삼억이 날아왔다. 살아 있는 사람이 모두 콜만 해도 판돈은 순식간에 십억을 넘어서는 상황.
 구경꾼들의 환성에 다른 자리의 사람들까지 서둘러 판을 정리하고 구경에 나섰다. 잘하면 오늘 있었던 판 중 가장 큰판, 아니 이번 주 들어 가장 큰판이다.
 “콜.”
 옆자리의 사내는 의외였던지 흘낏 유진의 얼굴과 카드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망설임 없이 돈을 중앙으로 밀었다.
 사내가 펼쳐놓은 카드는 ◆A, ♣9, ♠K.
 유진과 비슷해 보이는 패다.
 ‘설마 아투가 쫑 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한 수 밀릴 확률이 높다.
 같은 에이스 투 페어면 세컨드 카드가 높은 쪽이 유리했고 유진은 연달아 두 장을 높고 같은 수의 카드를 받아야만 했다. 아니면 풀 하우스를 띄우던가.
 “선수 어디 갔소?”
 사내는 슬쩍 유진의 카드와 표정을 살피는 것으로 만족했는지 중년 사내의 심기를 건드렸다.
 부들부들.
 연 매출 몇백억의 사장이라도 개인적으로 그 큰돈을 카드 한 장을 보기 위해 던지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이제 겨우 5구.
 6구와 말구에 날아올 레이스를 생각하면 몇십억도 감수해야 할 판이다.
 “……코, 콜.”
 유진은 중년 사내가 죽기를 바랐다.
 자신은 이 시간을 즐기기 위한 투자였지만 저 남자는 인생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년 사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도 돈을 세어 부들거리는 손으로 판돈을 밀었다.
 ‘병신.’
 보나 마나 이제까지 들어간 일억이 아까운 게다.
 그의 형편에 일억 정도면 눈 딱 감고 몇 달 고생하면 될 일이다. 속이야 쓰리겠지만 좋은 경험으로 치부하고 도박에서 손 떼면 그만인 돈이란 말이다.
 하지만 십억 대가 넘어서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은행에 대출할 테고 심하면 회사 공금에도 손을 댈 것이다. 그리고 곧 사채시장을 기웃거릴 테고.
 ‘차라리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
 회사가 넘어가는 순간이 오면 다시 본전 생각이 날 터였다. 친척과 친구들에게 거짓말로 돈을 모아 다시 도박판에 뛰어오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면 거기서 그의 인생, 아니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인생까지 망가지는 거다.
 마약은 혼자 망가지면 그만이지만 도박은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리는 더티 밤(Dirty bomb)이다.
 “카드 돌려!”
 옆자리 사내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중년 사내까지 셋이나 살아가는 상황이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최후에 아무도 메이드가 되지 못하면 뻥카라도 쳐야 하는데 셋이 남으면 그 확률도 별로니 말이다.
 사사삭.
 딜러의 손이 움직이며 각자의 카드 위로 한 장씩의 카드가 더 올려졌다.
 순서는 모호한 사내, 중년 사내, 유진의 순.
 ◆A, ♣9, ♠K, ♣Q.
 ♣8, ◆7, ◆10, ◆2.
 ♠A, ◆3, ♣6, ♥8. (♣A와 ♥3)
 중년 사내의 얼굴이 묘하게 비틀렸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숫자는 관계없겠고 다이아가 떨어지면서 포 플러시. 스트레이트가 끼워 먹기나 양차라면 다음 판까지도 따라가려고 버둥대겠군.’
 중년 사내로서는 최악의 패다.
 5가 한 장도 안 빠졌으니 그가 가졌을 패는 5, 6, 7, 8, 10일 확률이 꽤나 높았다. 거기에 다이아도 겨우 두 장 빠졌으니 플러시 확률도 꽤 높다.
 차라리 스트레이트만 바라볼 상황이면 레이스에 날아가겠지만, 플러시가 눈에 아른거리면 초보들은 거기에 눈이 먼다.
 나이가 모호한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
 ‘선수란 얘기네.’
 이미 걸린 돈이 10억이 넘는다. 선수가 아니라면 누구나 흥분할 수밖에 없는 금액.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는다면 남의 돈으로 노는 사람밖에 없다. 전주의 돈을 가지고 뛰는 선수들 말이다.
 유진은 슬쩍 모호한 사내의 얼굴과 손, 앉은 자세를 훑었다.
 스윽.
 사내의 한 손이 올라가 머리를 쓰다듬고 내려온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여전히 무표정하고 곧은 자세. 이미 선을 잡았으니 배팅을 해야 하는데 그런 고민조차 느낄 수 없었다.
 “5억.”
 “헉.”
 구경꾼 중 누가 헛바람을 삼켰다.
 둘 다 콜을 받으면 25억. 레이스가 있다면 최소 10억을 부를 테니 단숨에 40억을 넘는다. 두 번까지 레이스가 가능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사설 카지노에서 그런 금액이 터지는 건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와 반대로 유진은 문득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프 레이스라니.
 상대가 선수라면 풀 배팅을 해야 맞았다. 어설픈 배팅은 중년 사내까지 따라오게 만들 테고 자신의 카드가 풀 하우스 이상의 메이드가 아니면 아무리 선수라도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프 레이스라니.
 ‘뭐야, 꼬셔서 데리고 가자는 얘긴가?’
 단 하나 가능성이라면 중년 사내까지 말구까지 끌고 가 탈탈 털어먹겠다는 것. 그러나 유진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바보 같은 짓이다.
 ‘아니면 이미 메이드?’
 유진이 에이스를 두 장 가지고 있고 사내의 오픈 카드가 각 패니 풀 하우스 메이드일 확률은 0.
 가능한 가장 높은 카드는 마운틴(A, K, Q, J, 10).
 유진이 가진 카드를 에이스 투 페어로 읽어주면 말구에 풀 하우스를 가질 가능성이 있고 중년 남자까지 플러시를 띄우면 자신만 손해다. 무리한 배팅이다.
 “코, 코올…….”
 역시나 바보 같은 중년 사내가 벌벌 떨면서도 콜을 부른다.
 “받고 20억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유진은 중년 사내까지 끌고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기서 둘 다 떨어지면 고맙고 따라오면 정말 살 떨리는 승부가 될 테니 그것도 싫지 않은 일이다.
 “헉.”
 “맙소사!”
 “이, 이게 어, 얼마짜리야…….”
 반응은 구경꾼들이 먼저였다.
 딸꾹!
 중년 사내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모호한 사내도 놀란 듯 유진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여태 한 번도 표정 변화가 없던 그였으니 약간의 감정 변화도 금방 눈에 드러났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시 표정이 원 상태로 바뀌었다.
 “잠시 물 한 잔 먹고 합시다? 이거 원 살 떨려서…….”
 사내가 능글거리며 제안했다.
 하지만 살짝 스쳐 간 초조함이 유진의 눈에 들켰다. 유진은 속으로 사내를 비웃었다.
 “그러시든지.”
 선수의 약점은 경기에 나올 때 자신의 재량으로 배팅할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 있다는 것. 사내가 당황한 건 유진의 베팅 금액이 커서가 아니라 자신의 재량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았다.
 ‘재량 범위가 30억이라는 얘기군.’
 물주가 쪼잔한 놈이거나 놈을 그리 신임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무리 사설 카지노이지만 한 판에 억대가 넘는 일은 하루에도 수십 번이다. 삼십억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테고 아마 이런 일은 전혀 예상도 못 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딜러에게 뭐라고 요청했고 딜러는 여 급사 하나를 불러 사내를 데리고 나가게 했다. 카지노 안에서는 누구도 휴대폰을 쓸 수 없다. 그러니 별도의 장소에서 카지노의 전화로 통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 딜러는 유진은 딜러에게 잔고 증명을 하고 지급보증을 부탁했다. 유진이라고 그만한 현금을 가지고 다닐 리 없다. 수수료로 5%를 떼이겠지만 그걸 아까워해서야 도박판에 낄 이유도 없었다.
 중년 사내 역시 시뻘건 얼굴로 잔고 증명을 하고 지급보증을 했다. 중간에 뭐가 잘못되었는지 역시 여 급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뭐 좀 드실거나 음료를 드릴까요?”
 또 다른 여급 사가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실 이 카지노의 서비스 질은 엔간한 카지노의 VIP룸보다도 낫다.
 드나드는 사람이 대부분 알 만한 사람들이거나 최소한 돈이라도 풍족한 사람들.
 가끔 선수들도 오지만 절대로 무리해서 그런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이 카지노의 주인인 백곰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말이다.
 좀 전의 그 사내 역시 이런 무리수를 두게 된 건 오로지 유진의 엄청난 배팅 때문이다.
 밖으로 나갔던 사내와 중년 사내가 다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세 분 모두 저희 클럽에서 지급보증을 해드렸습니다. 금액이 큰 만큼 더 이상의 지급보증은 없습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배팅에 꿀리면 사이드 배팅을 할 수밖에는 없다는 얘기다.
 “얼마씩이나 한 거요?”
 구경꾼 중 하나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딜러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오직 지배인님과 플레이어 자신만 알 뿐입니다.”
 딜러도 모른다는 얘기.
 “그럼 모자라면서 배팅하면 상대편이 알 수가 없잖소.”
 딜러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웃었다.
 질문한 구경꾼은 아마 오늘 처음 온 모양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백곰에게 목숨을 저당 잡힌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함께 온 사람이 핀잔을 주자 그 구경꾼은 머리를 긁적이며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어 갔다.
 “그럼 다시 속개하겠습니다. 플레이어는 다이아 에이스, 스페이드 킹입니다.”
 사내의 차례다.
 사내는 여태까지의 무표정을 버리고 살짝 웃었다.
 “합 50억.”
 “…….”
 “…….”
 꿀꺽.
 이제는 구경꾼들도 소릴 내지 않았다. 마치 입을 벌리면 누군가 총이라도 꺼내 쏴버릴 것 같은 광기가 장내를 지배했다.
 “손님?”
 차례는 중년 사내.
 하지만 눈이 벌겋게 된 채 자꾸 자신의 히든카드만 들었다 놨다 했다.
 “손님? 콜입니까?”
 딜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중년은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여태까지 굳건히 메고 있던 넥타이를 힘없이 풀었다.
 “코, 콜. 사이듭니다. 휴우…….”
 유진은 중년의 사내가 이미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중년이 건 돈은 모두 53억이 조금 넘는 돈.
 그것으로 중년과 그의 가족들의 인생은 끝장났다.
 “50에 100 더.”
 “엑?”
 “헐.”
 “네?”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딜러까지 놀래 되물었다.
 지금까지의 판돈은 모두 110억 정도. 풀 배팅을 한 거나 마찬가지다.
 “왜, 안 됩니까?”
 유진은 딜러에게 물어보며 슬쩍 사내를 살펴보았다. 사내의 관자놀이에 시퍼런 힘줄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딜러는 당황해하며 다시 한 번 지급보증 액수를 확인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되, 됩니다.”
 유진은 사내를 향해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쩔 건데?’
 전주(錢主)에게 추가로 받아봤자 100억 이상 내줄 리가 없다. 레이스는 고사하고 사내가 콜을 부르는 순간 그는 사이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선수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져야 한다.
 선수들이 목숨보다 싫어하는 것.
 실력이 아니라 배팅에서 무너지는 거였다.
 이번 카드를 받는다고 해도 말구에 유진이 얼마를 날릴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고민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콜!”
 “헉!”
 “어…….”
 “캬아, 죽인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소리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콜? 사이드도 아니고 콜?’
 사내를 쳐다보니 입꼬리 한쪽이 슬며시 올라가며 느긋하게 뒤로 기댄다.
 ‘설마…….’
 다시 한 번 오픈된 카드들을 살폈다.
 여전히 같은 무늬, 같은 숫자들. 상대가 메이드라면 마운틴이 최고였고 말구에 띄울 수 있는 최고는 풀 하우스.
 ‘목숨을 건다는 거야?’
 이기면 다행이지만 지면 전주의 돈 100억이 날아간다. 그 정도 돈을 잃고 어깨를 도닥여줄 전주는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고통 없이 죽는 게 가장 행복할 터였다. 그것도 장기를 적출당할 가족이나 친지가 없다는 가정하에.
 유진은 오랜만에 ‘흥분’이라는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괜찮을까요?”
 지배인인 윤가희의 얘기에 백곰은 곧 터질 것 같은 볼을 실룩거렸다.
 정면의 모니터는 유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고 그 주변의 모니터는 플레이어 각자의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백곰이 워낙 덩치가 컸기 때문에 가희는 모니터를 보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내밀어야만 했다.
 “왜? 오랜만에 재밌잖아.”
 “하지만 홍 선생이에요, 홍 선생.”
 “홍 선생이 지기라도 할까 봐?”
 “그게 아니잖아요. 엄청나게 큰판이에요. 홍 선생이 이기면 절대로 좋은 소문이 나진 않을 거라고요. 여기 오는 손님 중 태반이 이름만 대면 알 사람들이에요. 전문 타짜가 붙었는데 그 사람들이 가만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반 이상은 떨어져 나갈 거라고요.”
 사설 카지노에도 명망이라는 게 있다.
 백곰이 운영하는 곳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클럽으로 인정받을 만큼 철저히 출입을 제한했다.
 그런데 전문 타짜가 나타나 손님 돈을, 그것도 백억이 넘는 돈을 먹어치웠다면 누구든 꺼리는 게 당연한 이치다. 더구나 홍 선생이라면 이 바닥에서, 최소한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타짜다. 비록 지금은 은퇴했지만.
 그런데도 백곰은 두툼한 볼을 씰룩이면서 웃기만 했다.
 “지면?”
 윤가희는 백곰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멀뚱거렸다.
 “누가요?”
 백곰이 턱 끝으로 모니터의 홍 선생을 가리켰다.
 “누군. 홍 선생이지.”
 윤가희는 모니터와 백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딱 봐도 알지도 못하는 얼굴인데 홍 선생을 어떻게 이겨요? 말도 안 돼.”
 “그럴까?”
 “당연하죠. 어림도 없는 일이에요.”
 윤가희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곰은 실실 웃으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 윤가희를 쳐다보았다.
 “내기할까?”
 “…….”
 윤가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백곰은 도박은 고사하고 사소한 내기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내기를 거는 대상이 타짜와 일반인의 대결. 쉽게 넘길 얘기는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해외?”
 카지노에 들어오는 사람은 철저하게 조사한다. 타짜를 알고 들여보내 주는 경우는 있어도 모르고 들여보내는 경우는 없었다. 만약 카지노의 조사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나 마카오 등에서 주목할 만한 타짜들의 정보는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신인이거나 그 외의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수들 정도.
 백곰은 또다시 볼을 실룩이면서 웃었다.
 “아니, 전혀.”
 “그럼 왜…….”
 백곰은 다시 시선을 모니터 속의 유진에게 돌렸다.
 “오늘까지 12번째 들어온 거야. 승률은 24.7%. 7 포커는 한 테이블당 4명이 제한이니 평범한 승률이지. 여태 합이 1억이 넘는 판돈도 없었고. 그런데 갑자기 판을 키웠어. 그것도 선수들도 나가떨어질 정도로 큰 금액으로. 그게 무슨 소릴까?”
 잠시 머릴 굴리던 윤가희는 등에 소름이 좍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럼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을 하고…….”
 “그래. 아마도 저놈을 여기서 보는 마지막이 될 테고.”
 백곰이 이 난장판을 만든 유진을 처리할 거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설 카지노임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꽤 좋은 편이었다. 드나드는 사람들도, 첨단 시설도, 질 좋은 서비스도.
 더구나 판돈에서 뜯어내는 수수료도 3%. 다른 곳에 비하면 엄청나게 싼 편이다. 거기에 다른 곳에서는 20%를 뜯는 꽁지, 지급보증도 불과 5%였다.
 백곰은 유진이 작정하고 판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윤가희는 백곰의 판단을 믿었다.
 백곰은 도박에 대해 모른다.
 그러나 정말 힘 있는 사람들과의 넓고 깊은 관계를 맺었고 사람을 볼 줄 알았다. 이 카지노가 성공한 건 그가 손님을 골라 받았기 때문이지 절대로 꽁지나 더러운 수작을 부려 성공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백곰으로서는 그럴 이유도 없었다. 카지노의 한 달 수입이야 그에게는 하루 저녁에 유흥비로 날려도 그만인 돈이었다.
 힘 있고 각계에 퍼져 있는 너른 인간관계. 그걸 위한 클럽이 이 카지노이다.
 그 때문에 하루가 아닌 장기적으로 보면 카지노에서는 크게 잃는 사람도, 크게 따는 사람도 없었다. 백곰이 수위를 조절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하시려고…….”
 백곰이 눈을 멀뚱거렸다.
 몸무게가 자그마치 130kg이 넘는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멀뚱거리자 꼭 만화 속의 곰처럼 보였다.
 “처리? 뭐하러?”
 “그야, 카지노 평판도 그렇고, 또 홍 선생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홍 선생이라는 타짜는 그저 놀러 온 정도였다. 들어오기 전에 그걸 분명히 했고 그 정도 되는 고수가, 이미 은퇴한 선수가 백곰과 등져가며 목숨 걸고 판을 키울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100억이 넘는 돈을 잃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홍 선생은 한국 도박계의 대부다.
 말짱하게 병신도 되지 않고 돈까지 벌어서 무사히 은퇴한 유일한 타짜다. 이 땅에 얽히지 않은 조직도 없고 그를 무시할 조직도 없었다.
 100억을 잃는다면 카지노 안에서는 모르지만, 밖에서까지 백곰의 체면을 봐 줄 사람이 아니다.
 “카지노 평판이야 나쁠 게 없지. 모처럼 대박 난 사람이 나온 거잖아. 아마 손님이 더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걸?”
 “홍 선생은요?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이제는 윤가희마저 유진이 이긴다고 확정하는 투다. 유진의 능력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백곰의 판단을 믿어서였다.
 “과연 저놈이 홍 선생이 타짜라는 걸 모를까? 그리고 아예 작정하고 덤비는 놈이 100억이라는 돈이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돈이라는 걸 모를까?”
 “음…… 그럼 대책을 미리 세워놓았을 거란 말이에요?”
 짝.
 백곰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내가 궁금한 게 그거라니까? 무슨 대책을 어떻게 세워 놓았는지 궁금해서 미치겠단 말이지.”
 윤가희는 어이없어하면서 다시 유진을 조사한 파일을 불러내 들여다보았다.
 
 유진
 33세. 미혼.
 프리랜서 증권투자가.
 신원보증인 : AMG 증권 상무이사 권상필
 지급보증 가능금액 : 500억.
 
 나이에 비해 엄청난 지급 보증액이다.
 하지만 권상필 상무가 소개했다면 충분히 그만한 재력이 있다는 소리. 여태까지 권 상무가 소개한 사람 중 지급 보증액이 100억 이하인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젊은 사람이 배경도 없이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벌었담?’
 좁은 한국 땅에서 그 나이에 혼자 힘으로 저 정도 돈을 벌었으면 진즉 방송을 탈 일이다.
 윤가희가 보기에 유진은 마치 땅속에 툭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묘한 흥미를 담고 다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카드는 마지막 히든이 돌려지고 있었다.
 ‘뭐 간만에 재밌는 건 사실이네.’
 홍 선생은 여유 있게 카드를 확인했고 꽤 알려진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박 사장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카드를 쪼았다.
 그리고 유진은,
 ‘어? 카드를 안 봐?’
 돌려진 카드는 딜러가 민 그대로.
 유진은 아예 카드를 쳐다보지도 않고 웃고 있었다.
 
 ‘웃어?’
 홍 선생은 기가 막혀 웃음이 다 나왔다.
 장난으로 시작한 게임이다. 그런데 이상한 놈을 만나 타짜 평생 네 번째로 큰 게임을 하게 되었다.
 포커는 숫자와 무늬가 다가 아니다.
 그보다는 적절한 배팅과 배우 뺨칠 정도의 연기력이 필요한 종합예술이다. 상대가 보통이 넘는다고 느낀 순간 어설픈 타짜 흉내를 냈고 마지막에 일격을 날렸다.
 이럴 경우 상대는 놀라거나,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큰 간담을 가졌어도, 미치지 않은 이상은.
 ‘미친놈?’
 질 이유도 없었다.
 에이스 투 페어를 맞들었으니 승부는 세컨드 페어.
 자신은 킹 페어니 아카 투 페어. 유진이 아무리 높게 카드를 잡아도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서로 풀 하우스를 잡을 확률은 비슷하니 승부는 배팅이다.
 6구 레이스에 100억인 판.
 7구는 두 번인 레이스 제한이 없으니 얼마나 큰 배팅이 나갈지는 본인만 알 뿐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한 판에 몇백억이 걸리면 고수인 자신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문제는 상대가 풀 하우스를 띄울 경우. 그러면 자신도 풀 하우스를 잡지 않고서는 이길 방법이 없다.
 카드는 52장.
 그중 유진이 풀 하우스를 띄우기 위해서는 3, 6, 8중의 하나를 잡아야 했고 3과 6은 각각 한 장씩 오픈 카드로 빠졌다.
 남은 카드가 29장이니 유진이 남은 카드 중 하나를 잡으려면 13.8%. 자신은 킹을 잡아야 하니 10.3%.
 약간 확률에서 밀리지만 이런 단판 승부는 확률이 좌우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홍 선생은 그 작은 확률도 확실히 마무리 짓고 싶었다.
 ‘내 참, 꼭 이런 수까지 써야 하나?’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닌 백곰의 영업장에서 기술을 쓴다는 건 거북한 일이다. 홍 선생이 알기에는 백곰의 비위를 거스르고 호적에 빨간 줄 그어지지 않은 놈은 여태 없었다.
 하지만 돈보다도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홍 선생은 한 번 질끈 눈을 감기로 작정했다.
 
 마지막 히든카드를 볼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전문가라는 건 6구 마지막 레이스에서 확인했다. 유진이 무슨 패를 띄우든 그보다 높은 카드를 들고 있을 확률이 100%에 가까웠다.
 ‘그 정도 연기력에 100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면 일반 선수는 아니라는 얘기지…….’
 상관없었다.
 상대가 정직하게 나와 준다면 깔끔하게 승부를 낼 테고 지더라도 자신에게 짜릿한 흥분을 안겨준 대가로 돈을 주는 것도 아깝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히든카드는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오픈할지가 결정되는 셈이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중년 사내의 파리했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잔뜩 흥분한 얼굴.
 뭔가를 띄우긴 띄운 모양이다.
 ‘스트레이트? 플러시? 그나마 다행이군.’
 중년은 50억에서 사이드를 걸었다. 상대나 유진이 투 페어에서 승부를 보면 거의 100억을 챙길 기회. 거기서 만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지금 당장에 망가질 일은 없을 터.
 하지만 유진은 중년이 따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봤다.
 ‘돈맛을 봐버리면 그게 더 무서운 거지…….’
 이미 땄으니 몇 판만 더 하자는 마음에 눌러앉을 테고 카지노든 다른 선수든 그의 돈을 야금야금 빼낸다. 그러다 한 방에 판을 키우면 이미 돈맛을 본 그가 빠져나갈 길은 없다.
 유진은 중년에게 관심을 끊고 다시 상대를 쳐다보았다.
 “플레이어는 다이아 에이스, 스페이드 킹입니다.”
 딜러가 차분한 목소리로 배팅을 재촉했다.
 홍 선생은 다시 무표정이 되어 돈을 밀었다.
 “250억.”
 거의 풀 배팅.
 이제 관중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그저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솟아나 유진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콜.”
 누군가 ‘억’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가렸다.
 유진이 망설임 없이 콜을 불렀기에 모두 얼떨떨한 표정. 쌓인 판돈은 자그마치 850억이었다.
 딸꾹.
 딜러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 그럼 사이드 딸꾹, 부터 오픈하, 딸꾹, 죄, 죄송합니다.”
 중년 사내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히든카드를 뒤집었다.
 한 장씩, 한 장씩.
 너무 느리게 뒤집는 바람에 보는 사람이 다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모두 카드를 뒤집은 중년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8, ◆7, ◆10, ◆2. (◆4, ♣7, ◆J)
 
 J 타이틀 플러시.
 보는 사람 대부분이 예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이아 J, 10, 7, 4, 2. 플러시입니다.”
 딜러가 사이드 카드를 확인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홍 선생을 향했다. 유진이 콜을 불렀으니 그가 카드를 오픈하는 게 에티켓이자 룰.
 홍 선생은 웃으면서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하나씩 히든을 오픈했다.
 
 ◆A, ♣9, ♠K, ♣Q. (♥A, ♣K, ♥K)
 
 “푸, 풀 하우스!”
 “결국 풀집 싸움이었나?”
 여기저기서 탄식 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되면 유진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홍 선생은 눈을 반짝이면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어쩔 거냐?’
 홍 선생은 유진이 자신이 모르는 타짜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자신을 이기려면 최소한 포 카드 이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유진의 오픈 카드 중 포 카드를 만들 수 있는 숫자는 딱 하나.
 6이다.
 유진이 기술을 쓰는 순간을 기다렸고 그걸 잡아 자신이 쓴 기술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싶은 거였다.
 촤라락.
 하지만 유진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한 손으로 자신의 카드 7장, 보지도 않은 히든까지 정리한 유진은 빙긋 웃으며 카드를 엎어 딜러 쪽으로 밀었다.
 “하아, 이거 내가 졌네요. 잘 놀았습니다.”
 꾸벅.
 관중들은 미련 없이 일어나는 유진을 신기하게 여기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홍 선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유진을 따라 고개 숙여 인사했다.
 유진은 곧장 일어서서 카지노를 나섰고 뒤쪽으로 관중들의 감탄과 찬사, 아쉬움이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나간 뒤 딱 두 사람.
 홍 선생은 수백억을 딴 사람답지 않게 인상을 잔뜩 찌푸렸고 중년은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의자에 널브러졌다.
 
 2. 홍 선생
 
 “그럴 리가 없는데…….”
 백곰의 거대한 머리가 갸우뚱거렸다.
 윤가희는 눈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간 채 두 손을 허리에 올렸다.
 “그럴 리가 없기는 뭐가 없어욧! 이제 어떡할 거냐고요!”
 홍 선생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타짜다. 은퇴한 이후 몇 번 방송을 탔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얘기다. 사회 각계에서 모인 손님 중 누군가는 그를 알아보았을 테고 소문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백곰의 카지노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단단한 비밀 보장과 사교성을 보장하는 카지노에 타짜가 출입하면 좋아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백곰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럴 리가 없는데.’만 중얼거렸다.
 당연히 윤가희 혼자 방방 뜨며 소릴 지르는 꼴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지금 당장 딜러에게 그 테이블 카드를 확인하라고 해. 정리하기 전에 빨리!”
 방방 뛰던 윤가희도 그 소리에는 발딱 일어나 움직였다.
 백곰의 말은 속임수를 확인하란 소리였다. 그게 누구든 간에.
 딜러는 테이블을 폐쇄하고 곧장 카드를 확인해 인터폰으로 알려왔다.
 “뭐래?”
 “클로버 킹이…… 두 장이래요.”
 홍 선생이 기술을 썼단 얘기다.
 그러나 백곰의 관심은 거기에 없었다.
 “놈의 카드는?”
 “보지도 않았는데요?”
 “상관없어. 뭐야?”
 “3, A 풀 하우스. 휴우, 홍 선생이 기술을 안 썼으면 승자네요.”
 “음…….”
 백곰의 인상은 잔뜩 찌푸려졌다.
 “홍 선생을 불러야겠죠?”
 “…….”
 홍 선생이 백곰을 무시하고 행동하지는 못한다. 이미 이쪽이 눈치챘다는 걸 알고 있을 테고 부르지 않아도 찾아와 머릴 조아릴 일이었다.
 다만 윤가희는 백곰이 열을 받아 홍 선생을 묻어버리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미리 불러 백곰의 화를 가라앉히고 싶었을 뿐이었다.
 백곰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장식장에서 위스키와 잔 두 개를 꺼내와 반쯤 채워 그중 하나를 내밀었다.
 “저두요?”
 “싫어?”
 윤가희는 성큼 손을 내밀어 잔을 받았다.
 “아뇨, 오늘은 마셔야 하겠네요.”
 “얼마나?”
 “이 끔찍한 일을 잊을 때까지요.”
 “또 온 데다 토해 놓으려고?”
 “아빠!”
 “에효,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게 불법 도박장에 술주정뱅이라니, 쯧쯧.”
 “뭐라구욧! 이 망할 카지노를 내가 차렸어요? 아빠잖아욧! 도박에 도자도 모르는 사람이 덜컥 불법 카지노 차리고 외동딸한테 맡긴 게 누군데 그래욧!”
 백곰은 눈을 껌벅거리며 뒤통수를 긁었다. 하지만 워낙 뚱뚱한 탓에 손은 귀 언저리까지만 닿을 뿐이었다.
 “내가 차린 거냐?”
 “흥, 그럼 내가 차렸을까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찌릿.
 윤가희의 눈에서 출력 10만 킬로와트 급 레이저빔이 발사되자 백곰은 코를 킁킁거리며 모른 척했다.
 “정말 이대로 놔둘 거예요? 설마 홍 선생을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겠죠?”
 아버지인 백곰이 온갖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다른 문제다. 윤가희는 자신의 아버지가 최소한 그 정도는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내가 뭐하러, 대신 처리할 놈들이 천지삐깔인데.”
 “설마, 누굴 시켜서…….”
 피식.
 백곰은 웃으며 다가와 윤가희의 머리를 그 두툼한 손으로 헝클어트렸다.
 “네 애비가 그 정도 망종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홍 선생은 그 대가를 치를 거다. 그것도 아주 빨리.”
 이번엔 윤가희가 갸우뚱거렸다.
 “누가요?”
 백곰은 모니터의 정지된 영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니터에는 홍 선생이 카드를 오픈한 순간 웃고 있는 유진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요놈.”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홍 선생은 똥 밟은 거야.”
 “왜요?”
 “봐라. 홍 선생이 카드를 오픈했어도 카드는 쳐다보지도 않았어. 오로지 홍 선생의 눈만 보며 요렇게 웃고 있었지. 이상하지 않아? 꼭 홍 선생의 패를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수백억이 걸린 판이다. 그 정도면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만수르도 한 번쯤 자신의 카드를 볼 만했다.
 “저, 정말이네…….”
 백곰은 모니터로 다가가 유진의 얼굴이 있는 곳을 툭툭 쳤다.
 “이 자식, 웃음에 살기가 돌아. 홍 선생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손가락 하나로 눌러버릴걸?”
 “에이, 설마요.”
 윤가희도 모니터로 다가가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제법 잘생긴 얼굴. 아무 무늬도 없는 새하얀 드레스 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다소 귀족적인, 그러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턱 선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내기할까?”
 오늘 밤에만 벌써 두 번째다.
 평생 내기라고는 십 원짜리도 하지 않던 자신의 아빠 입에서 내가 하자는 얘기가 나온 게.
 “뭘요?”
 “이 새끼, 사람 여러 번 잡아본 놈이야. 그것도 다발로.”
 “다발로?”
 백곰은 고개를 돌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바라보았다.
 “최소 수십이라는 얘기야. 그러니 너도 신경 꺼.”
 “…….”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모니터를 보았지만, 눈도 사악하지 않고 구슬처럼 맑았다. 그런 사람이 수십 명을 죽였다니.
 연쇄살인범들 대부분이 말짱하게 생겼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유진은 아니었다.
 꿀꺽.
 윤가희는 자신도 모르게 잔을 비워버렸다.
 목을 태울 것 같은 느낌이 식도와 위를 태워버릴 것처럼 열을 냈다.
 “설마…….”
 윤가희는 벌써 열댓 번째 ‘설마’라고 얘기한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유진은 차에 올라 카지노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두 시간째.
 한바탕 큰판이 벌어지고 나서인지 꽤 많은 손님이 평소보다 일찍 카지노를 나섰다. 몇백억이 걸린 판을 보고나니 다른 게임이 시시해져서이다.
 하지만 유진이 원하는 사람은 아직 나오질 않았다.
 다시 십여 분.
 기다리던 사람이 나오자 유진은 시동을 걸었다.
 중년 사내는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넋이 나가 있었다. 자신의 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시동을 걸면서도 전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했다.
 차는 지겨울 정도로 느린 속도로 출발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해 차를 세웠고 요란하게 경적이 울렸다. 유진이 차에서 내려 다가가자 핸들에 머릴 처박고 우는 남자가 보였다.
 덜컥.
 “흐어어, 흑흑.”
 유진이 문을 열었지만, 중년은 여전히 울기만 했다.
 사내의 머리를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자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채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다, 당신은…… 흐어어, 흐아, 흑흑.”
 알아보긴 했지만,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는 남자.
 유진은 억지로 그를 끌고 와 자신의 차에 태웠다. 그리고 곧장 차를 몰고 한강 변으로 향했다. 중년은 울음을 그쳤지만, 여전히 넋이 빠진 얼굴.
 편의점에서 소주 몇 병과 쥐포를 사 들고 왔을 때도 중년은 멍한 채 한강을, 아니 초점이 잡히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털썩.
 유진은 조수석의 문을 열고 그 앞에 주저앉았다.
 “이리 내려와.”
 반말했기 때문일까? 중년이 잠시 고개를 돌렸지만, 그뿐.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앞만 바라보았다.
 “에잇! 귀찮게스리.”
 유진은 벌떡 일어나 중년의 목을 잡아채 차에서 끌어 내렸다. 하지만 목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중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커, 컥! 소, 손을…….”
 “죽고 싶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편하게 내가 죽여줄까?”
 중년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얼굴이 퍼렇게 된 상태. 거기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주, 죽여…….”
 “좋아. 내가 오늘 얼마 잃었는지 알지?”
 끄덕끄덕.
 “그럼 나도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거 알겠네?”
 끄덕.
 “내 얘기를 들어주면 내가 죽기 전에 너부터 죽여줄게. 오케이?”
 끄덕끄덕.
 유진은 중년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케, 케엑, 하, 하악.”
 갑자기 숨을 들이켜자 중년은 기침하며 한동안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겨우 숨을 쉴 만하게 되자 유진을 한 차례 바라보고는 털썩 옆에 주저앉았다.
 유진은 소주 두 병을 따서 한 병을 내밀었다.
 “마셔.”
 중년은 군소리 없이 병을 받아들고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소주를 병째 마시는 건 아무리 술을 잘 마셔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만이 겨우 익숙할 뿐.
 유진은 자신의 짐작대로 중년이 밑바닥부터 올라왔다고 확신했다. 중년의 소주병은 한 모금에 비어버렸다.
 다시 한 병을 내밀자 이번에는 반쯤 마시다 병을 내려놓았다. 유진은 쥐포를 찢어 내밀었고 중년은 말없이 받아 입에 구겨 넣었다.
 “당신한테 살아야 된다는 둥, 가족을 생각하라는 둥 그따위 얘기는 안 해.”
 중년, 박 사장은 슬쩍 유진을 보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난 단지 앞으로 일어날 일, 정확히 오늘의 일 때문에 일어날 일에 관해 얘기해 줄 거야. 그러니 듣기 싫어도 끝까지 들어.”
 끄덕끄덕.
 뭔가 이해가 돼서 하는 고갯짓이 아니다. 그저 멍한 채, 조건반사적으로 고갤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당신이 오늘 죽든 말든, 내일이면 카지노에서 지급보증금에 대해 서류정리를 할 거야. 소장을 작성하고 법원으로 가는데 삼 일. 공증받고 집행명령을 받는데 일주일에서 열흘. 늦어도 이 주일 안에 당신 회사와 집에 압류가 들어갈 거야. 그건 알지?”
 명색이 종업원 백여 명을 거느린 사장이다. 채권 회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끄덕.
 “아마 가족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겠지. 친척에게 손을 벌리고 팔 수 있는 걸 모두 팔게 될 테지. 참, 회사 연간 매출이 얼마나 되지?”
 “사, 삼백억…….”
 회사를 생각하니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삼백억. 작지는 않네. 하지만 그 정도면 최대로 끌어낼 현금이 삼십억도 되지 않을 거야. 삼십억이 뭐야. 압류가 들어온 상태에서는 아마 십억도 힘들어. 가족들이 설치고 다니면 몇 억쯤 만들겠지. 하지만 그래도 회사와 집이 넘어가는 건 기정사실이야. 그렇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에 훤히 그려지는 상황이다.
 박 사장이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은 그의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좋아. 그 과정이 육 개월에서 일 년이 걸릴 거야. 채권 원금은 잘하면 회수되겠네.”
 번쩍.
 박 사장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무심코 듣다 보니 잘하면 50억을 갚을 방법이 나올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빚만 없다면 회사는 다시 세우면 된다.
 나이가 있어 전처럼 크게 키우지 못할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키울 자신은 있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룬 회사. 그만큼 업계에 신용도 있었다.
 “문제는 그때가 시작이라는 거지.”
 박 사장이 의아한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둘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멍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쌓인 이자는? 법정 이자도 싸진 않아. 연 20%지. 그럼 5억쯤 되겠네. 하지만 그걸로 끝일까?”
 박 사장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뭔지 찾으려 했지만 멍한 머리 상태로 생각이 날 리 없었다.
 “카지노의 지급보증 수수료도 있지. 당신이 지급보증을 건 금액이 오십억이니 5%면 2억 5천이네. 하지만 카지노의 이율은 연이 아니고 달이야. 거기에 복리. 연체이자는 100%. 계산이 돼?”
 잠시 계산을 해보던 박 사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첫 달에 갚아도 2억 5천. 둘째 달에 갚으면 바로 10억대 진입이라는 거지.”
 “그, 그럴 리가…….”
 “흥, 계산이 안 돼? 그럼 다른 경우의 수를 얘기하지. 회사와 집에 압류가 들어오면 첫 달에 갚는 건 힘들지. 그럴 경우, 그들이 이자가 불어나니 얌전히 기다려 줄까? 꿈 깨! 이미 망한 회사야. 기다려봐야 먼지 밖에 나오지 않을 게 당연한데 뭐하러 기다려?”
 박 사장은 ‘그럼?’이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가족이 몇이야?”
 “세, 셋…….”
 박 사장은 뭐에 홀린 기분으로 대답했다.
 “셋이라…… 시장에서 거래되는 신장 가격이 최하 2천. 여섯이면 1억 2천. 눈 하나에 천오백이니 그게 9천. 뭐 잘하면 그 정도로 수수료는 갚겠네.”
 “그만! 이, 이…….”
 박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유진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지. 딸이 괜찮게 생겼으면 선금 오천 정도 받고 화류계로 넘길 수 있어. 그리고 아들이라면 또 몇천을 받고 새우잡이 배에 넘겨도 되고.”
 “그만두란 말이야, 이 새끼야!”
 박 사장이 와락 달려들며 멱살을 잡아왔다.
 하지만 유진은 앉은 채로 슬쩍 상체를 비트는 거로 손을 피했다. 그리고 손 하나가 벼락같이 달려들어 박 사장의 목을 잡았다.
 “컥! 컥!”
 “병신 새끼야, 이게 네가 오늘 죽든지 살든지 간에 앞으로 일어날 일이야!”
 박 사장은 한참을 몸부림쳤다.
 그러나 어떻게 움직이든 유진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고 숨이 막혀 혀가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유진은 그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목을 놔주었다.
 남녀 한 쌍이 걸어오다 화들짝 놀라 방향을 틀었다.
 한참 후에, 박 사장은 묵묵히 소주병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유진 역시 자신의 병을 들어 반쯤 마셨다. 알싸한 느낌이 싸늘하게 가슴을 식혔다.
 “내게…… 이런 얘기를 해 주는 이유가 뭐요?”
 같잖은 동병상련을 얘기하기에는 엄청난 금액이 걸린 도박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판 부지의 남에게, 더구나 질질 끌고 와 이런 얘기를 늘어놓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보다 몇 배는 돈을 더 잃은 사람.
 유진은 피식 웃으며 다시 소주 한 모금을 마셨다.
 “좆같아서.”
 “예?”
 “내 인생도 좆같은데 다른 인생도 좆같아지는 게 싫어서라고.”
 “…….”
 박 사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흐릿하기는 했지만, 유진이 얼마나 큰 금액을 잃었는지 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400억.
 일반인들이라면 3대가 지나도 꿈도 꾸지 못할 금액.
 얼마나 부자인지는 몰랐지만, 누구에게든 적은 금액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술을 마시다 보니 그렇게 부자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어쩌길 바라는 겁니까?”
 유진이 슬쩍 돌아다보고는 이내 술병을 잡아갔다.
 꿀꺽.
 한 모금을 마시고 나더니 박 사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맑고 검은 눈동자가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번쩍 빛을 내는 것 같았다.
 “해결해주면 다시는 도박 안 할래?”
 그걸 말이라고.
 못된 친구의 꼬임에 빠져 발을 담았지만 이제 겨우 삼 개월. 지옥까지 떨어졌던 셈인데 뭔들 못할까.
 끄덕끄덕.
 “다시 하면?”
 박 사장은 절대로 자신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마누라가, 자식들의 장기가 파여 팔려 나가는 걸 상상하니 손목을 잘라내고 싶을 지경.
 “절대로 그럴 일 없습니다.”
 “그래도 다시 하면?”
 박 사장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목숨, 아니 내 가족 모두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아니면 우리 가족 모두의 장기를 팔아치워도 말입니다.”
 유진이 그의 눈을 보니 최소한 지금만은 진심이다.
 ‘그걸로 된 거지…….’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버리고 살리고는 본인이 할 몫이다. 다시 도박에 손을 대면 유진이 어떻게 하기 전에 스스로 지옥에 몸을 던질 운명이다.
 “좋아! 단 한 번의 기회는 만들어 주지. 잊지 마.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과 당신 가족의 목숨은 내 거야.”
 끄덕끄덕.
 유진은 술병을 들어 마지막 남은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박 사장 역시 남은 술을 들이켰다.
 “그런데…….”
 “뭐?”
 “왜 반말이요?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린 것 같은데…….”
 피식.
 “병신, 그걸 이제 알았냐? 형 대접받고 싶으면 그렇게 행동하던지.”
 끄응.
 박 사장은 새롭게 태어난 기분과 동시에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홍 선생은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전화를 해왔다.
 “윤가희입니다.”
 - 아! 지배인님? 저 홍 선생이올시다. -
 “알아요.”
 - 혹시 회장님 좀 바꿔 주실 수 있겠소? -
 “어제 그 난장을 쳐놓고요? 우리 카지노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돌지 생각해 본 적이나 있나요?”
 - 그, 그건 죄송하게 됐수다. 해서 이렇게 전화를 드리는 게 아니오. 윤 회장님 좀……. -
 역시 아버지의 예상은 정확했다.
 윤가희는 슬며시 웃음이 떠올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일부러 쌀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봐요, 홍 선생님! 아버지께서 당신 전화를 받으리라고 생각하셨나요? 어제 당신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어떤 행동을 하실지는…….”
 - 그래서 찾아뵙기 전에 미리 전화로 양해를 구하는 거요. 어제 제가 딴 돈은 주시지 않으셔도 좋수다. 아, 물론 지급보증 수수료는 전체 금액에서 계산하고 말이오. -
 홍 선생은 다급한 목소리로 윤가희의 말을 끊었다.
 카지노 측에서 보증 선 금액은 500억.
 홍 선생의 원금이 60억이니 전체 금액에서 지급보증 수수료를 떼면 35억 원만 돌려달라는 얘기다. 거기에 딴 금액 850억에 대한 3%를 제하면 달랑 9억 5천이 남을 뿐이다.
 게임에 이기고도 엄청난 손해였다.
 하지만 홍 선생으로서는 분명히 그게 최선일 수도 있었다.
 사실 그가 최고 소리를 듣는 타짜가 아니었으면 그 정도 금액의 보증은 어림도 없는 소리. 카지노로서는 그에 대해 예우를 할 만큼 한 셈이었다.
 윤가희는 웃으면서, 그러면서도 그런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건 분명히 전해드리죠.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홍 선생은 다 듣기도 전에 또 말을 끊었다.
 - 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요. 거기는 물론이고 이제 아예 도박판에서는 손을 끊을 생각이오. -
 “그래요. 그것참, 잘 생각하셨네요. 홍 선생님을 위해서도 말이죠.”
 -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그럼 이제 된 거요? -
 “물론이죠. 분명히 우리 카지노와의 계산은 끝났습니다.”
 - 고맙소. 윤 회장님께도 꼭 전해주시오. -
 윤가희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새삼 아버지의 그늘이 생각보다 깊다는 생각을 했다.
 홍 선생이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조직을 움직여 카지노를 한바탕 뒤집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헌데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이 평생 모은 돈 중 거의 반이나 포기한 것이다.
 “뭐래?”
 백곰이 정말 곰처럼 보이는 몸뚱이를 실룩이면서 다가왔다.
 “뭐긴 뭐래요. 전체 금액에 대한 수수료와 지급 보증 금액에 대한 수수료를 제하래요. 원금이 60억이니 수수료를 제하면 9억 5천이죠.”
 백곰이 털털 웃었다.
 “그 자식 급하긴 급했네.”
 홍 선생이 판돈을 포기함으로써 유진과 박 사장은 수수료 정도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카지노의 명성은 조금도 손해 가지 않을 터였다.
 “그럼 그 유진이라는 사람이 홍 선생에게 손댈 이유가 없어진 거죠?”
 윤가희로서는 그 대목이 가장 흡족했다.
 백곰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예 그걸 확인할 이유도 없어진 셈이니.
 백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돈 문제가 아닌걸?”
 “네?”
 ‘이건 또 뭔 소리야?’ 하는 생각이 윤가희의 머릴 뒤흔들어 놨다. 백곰이 그런 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콧잔등을 찡그렸다.
 “돈에 연연하는 놈이면 마지막 배팅에 카드를 안 볼 리가 없지. 놈의 머릿속에서 홍 선생에 대한 정리는 이미 그때 끝난 거야.”
 “돈을 돌려줘도?”
 “돈하고 상관없다니까 그러네. 놈은 분명히 홍 선생이 기술을 쓸 걸 안 거야. 마지막에 웃은 건 자신의 예측이 맞은 게 즐거워서고. 홍 선생은 자신이 건 게 돈인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
 “그럼 뭐예요?”
 윤가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백곰은 능글맞게 웃으며 딸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제 모가지.”
 “홍 선생의?”
 “그래, 홍 선생이 말구에 배팅한 건 250억이지만 놈이 받아들인 배팅은 그의 목숨이지.”
 “설마, 말도 안 돼.”
 “내기할까?”
 둘은 흠칫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둘 다.
 생전 입에 담지도 않았던 단어가 너무 자주 튀어나왔다.
 설마.
 내기.
 왠지 오싹 소름이 끼쳤다.
 
 뚜뚜-
 홍 선생은 전화를 끊으면서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평생 모은 돈을 잃은 것도 그렇고 윤가희의 마지막 말도 그렇고.
 - 분명히 우리 카지노와의 계산은 끝났습니다. -
 ‘카지노와의? 그럼 뭐가 남았다는 얘기지?’
 타짜는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 하다못해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까지 수집한다. 하물며 입으로 내뱉은 말은 무엇보다도 좋은 실마리였다.
 기우인지는 몰라도 윤가희의 마지막 말이 계속 찜찜했다.
 평생 목숨을 내놓고 번 돈이 100억이다. 그런데 그중 절반을 이상한 놈 때문에 백곰에게 생으로 뜯기게 되었다.
 “에잇, 좆같은 새끼. 어디서 콱 목이라도 매달아라.”
 물론 대상은 백곰이 아니다.
 백곰은 충분히 경고했고 나름 그걸 따르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생판 처음 보는 애송이가, 그것도 감히 배팅으로 덤벼든 게 배알이 틀렸다.
 홍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땀을 닦기 위해 손수건을 꺼냈다. 오늘따라 빨간색의 손수건이 눈에 콱 박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그랬다.
 아니, 아마 만화책에서 본 모양이다.
 ‘허 뭐라고 하는 작가였는데…….’
 화투는 48장인데 마음속에 한 장이 더 있어 48+1이라고.
 카드도 마찬가지다.
 다만 52장이라는 게 틀릴 뿐.
 홍 선생은 그 한 장을 자신의 운발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신념에 확신이 서질 않았다.
 쓸데없이 전 재산의 반이 날아간 상황. 그렇다고 백곰과 맞서 대들 수도 없고 속만 까맣게 타올랐다.
 “아야, 가서 낮술이나 먹자.”
 “술 말입니까요, 형님?”
 “그랴.”
 “알겠습니다, 형님.”
 영등포에서 신 영등포 파를 운영하는 동생은 깊숙이 허릴 숙이며 차 문을 열었다. 뒤를 이어 네 대의 차에 건달들이 올라타 홍 선생이 탄 차를 따랐다.
 ‘찝찝할 때는 몸조심해야지.’
 좀 과한 생각도 들었지만 이럴 때 써먹으려고 키운 동생들이다.
 만사 불여튼튼.
 홍 선생의 또 다른 신조였다.
 
 윤가희가 전화해 온 건 점심시간이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미녀의 매끈한 목소리를 거절할 용기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홍 선생을 처리하다 보면 카지노 측과 어떻게 엮일지 모르는 일. 미리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초대를 승낙했다.
 사무실은 카지노와 약간 떨어진 건물에 있었다.
 [윤 인터내셔널]
 간판만 보고는 뭘 하는 회사인지 추측하기도 어려웠다. 입구부터 이어지는 인테리어는 마치 유럽의 신모더니즘 작가가 디자인한 것처럼 심플하고 세련돼 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내 데스크의 여자는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함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유진을 응대했다. 카지노를 운영하는 곳으로 보기엔 여러 가지로 분위기가 틀어졌다.
 “유진이라고 합니다.”
 “아!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사장실은 가장 안쪽에 있었다.
 안내 데스크의 여자는 예의 단정한 미소를 보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어서 오세요.”
 거의 170cm는 되어 보이는 늘씬한 곡선이 활짝 웃으며 유진을 반겼다.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미인.
 자연스러운 컬로 늘어진 머리는 가냘파서 부러질 것 같은 목을 감싸며 어깨를 간질였다. 짙은 브라운 컬러. 얇고 선명한 쌍꺼풀이 감싼 큰 눈이 던지는 상쾌한 웃음.
 늘 대하였던 라틴계의 미인들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터질 것처럼 흘러내리는 여자였다.
 “유진입니다.”
 “네, 반가워요. 권 상무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저씨가?’
 AGM의 권 상무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다. 그러니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겠지만 뭔가 언질 정도는 해 줬다는 얘기. 그 정도만으로도 이 여자의 능력과 파워는 충분히 인정해줄 만했다.
 윤가희는 소파를 가리켰다.
 보기 드문 나파 가죽으로 만든 최고급품. 엔간한 부자들도 선뜻 사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제품이었다.
 소파뿐이 아니었다.
 책상과 장식장, 하다못해 화병 하나까지 만만해 보이는 게 없었다.
 “멋진 사무실이군요.”
 하얗고 섬세한 손이 올라가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칭찬 고마워요. 윤가희라고 해요.”
 그 손이 다가와 손을 내밀자 유진은 턱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손을 잡았을 때는 식은땀이 흘렀다.
 ‘미모만으로도 위험한 여자네…….’
 윤가희는 냉장고에서 직접 커피를 꺼내와 얼음을 넣었다.
 “더치커피, 괜찮죠?”
 물론이다.
 장장 열 시간을 내려야 마실 수 있는 커피라 못 마실 뿐이지 그 쌉쌀하고 시원한 뒷말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유진이 커피를 음미하는 동안 윤가희 역시 사르르 눈을 감으며 그 진한 맛을 즐겼다. 둘 다 말이 없었지만 제대로 커피 맛을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 침묵을 즐겼다.
 탁.
 그 침묵은 몇 분 후 유진이 커피가 담겼던 크리스털 컵을 내려놓으며 깨졌다.
 “이제 일 얘기 좀 할까요?”
 “좋으실 대로.”
 “죄송스럽지만 수수료 정산을 마쳐야 할 것 같아서요. 대략의 안내는 받으셨죠?”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
 카지노에 가면서 입금했던 금액은 100억. 지급보증금액은 500억이다.
 하지만 게임에서 보증금으로 배팅했던 400억은 이미 입금했다. 5%인 25억을 제외하고 75억을 돌려받아야 하는 초등학교 산수에 불과한 계산이다.
 “그게 날 보자는 이유는 아닐 텐데요?”
 “티 나요?”
 “많이.”
 풋.
 누가 보면 제정신이 아닌 남녀로 보일 상황.
 한쪽은 400억을 껌 사 먹은 주제에 덤덤하고 한쪽은 그걸 농담처럼 얘기하니 그렇다.
 “한 잔 더?”
 윤가희가 비어버린 컵을 들어 올렸다.
 “좋죠.”
 하늘거리는 여신은 다시 컵을 채워 돌아왔다.
 “홍 선생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뭘 말이죠?”
 “그 게임에서 딴 돈을 받지 않겠다는군요.”
 재밌는 얘기다.
 유진의 돈을 받지 않으면 홍 선생은 생으로 50억이 넘는 돈을 카지노에 뜯겨야 했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얘기.
 ‘백곰에게 밉보이는 게 그만큼 두려웠다는 얘긴가?’
 그래도 50억은 너무 큰 돈이다.
 권 상무가 조사해 알려준 홍 선생 재산의 절반. 그로서는 평생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돈이니 말이다.
 “의외군요. 카지노 측에서 수수료를 면제해 주기라도 했습니까?”
 “아뇨. 우리 카지노가 문을 연 이후 수수료를 면제해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홍 선생의 수수료는 이미 받았죠.”
 “마음씨 좋은 사람이네요, 그 양반.”
 “별로 기쁘지 않으신가 봐요?”
 “천만에요. 돈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것도 400억이나 되는데요.”
 “입금은 오늘 중으로 될 거예요. 수수료를 제하고 475억이요.”
 “고맙군요. 그럼 얘기 끝난 건가요?”
 윤가희는 처음으로 정색했다. 웃을 때는 천사 같던 여자가 감정을 지우니 마치 대리석으로 만든 석상처럼 보였다. 차갑고, 냉정한, 평생 웃어보지도 못했던 여자처럼.
 “홍 선생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으쓱.
 유진은 살짝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다고 전화라도 할까요?”
 “죽일 건가요?”
 뚝.
 유진은 문을 향해 반쯤 몸을 돌리다 멈췄다. 윤가희는 유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앉은 채였다. 시간이 갑자기 멈춰버린 것처럼 둘은 서로의 눈동자만 의식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대답부터 먼저 해주세요.”
 “그쪽은 상관없지 않아요? 아, 뭐 그렇다고 내가 홍 선생을 죽인다는 얘기는 아니고. 설마 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알 수 없죠.”
 “하아, 이거 솜씨 있는 성형외과라도 가봐야겠네요. 내 얼굴이 그렇게 흉악하게 보이는 줄은 몰랐거든요.”
 “홍 선생이 배팅한 거…….”
 “네?”
 “돈이 아니라 목숨인 거죠?”
 “…….”
 유진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놀라서 말이 막혔다.
 “그러지 마세요.”
 “내가 그쪽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윤가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400억이면 꽤 큰돈이죠. 여러 사람의 목숨을 뺐을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당신이 돈 때문에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자, 말해보세요. 어떻게 해야 홍 선생이 무사한 거죠?”
 “왜 그렇게 홍 선생에게 신경을 쓰는 거죠? 친척이라도 됩니까?”
 “우리 카지노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누군가 죽는 게 싫을 뿐이에요.”
 “죽지는 않을 겁니다.”
 가희는 홍 선생을 죽인다는 소리보다 그 소리가 더 무섭게 들렸다.
 휴우.
 “어떻게 해야 당신의 마음을 돌리죠?”
 “간단하죠. 난 그 카지노에 게임을 하러 간 거지 사기를 당하러 간 게 아닙니다.”
 “역시 알고 있었군요. 그 게임, 다시 하면 마음을 돌릴 건가요?”
 유진의 마음이 살짝 움직였다.
 물론 돈이나 포커 게임, 홍 선생 때문이 아니었다. 윤가희라는 여자가 흥미로웠고 자신의 행보를 누군가 알아차리고 있다는 게 재밌었다.
 “어떻게요?”
 찌푸렸던 얼굴이 그 한마디에 활짝 피어났다. 유진은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빠른 시간에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오늘 밤, 일곱 시. 시간 괜찮으세요?”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까?”
 가희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게임이요. 홍 선생과 단둘이. 절대로 누구도 기술을 쓰진 못할 거예요.”
 “설마 홍 선생과 벌써 약속을 해둔 겁니까?”
 절레절레.
 “아뇨. 하지만 꼭 올 거예요. 믿어도 좋아요.”
 유진은 가희가 만드는 상황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면 좀처럼 흥분할 일이 없었다. 도박판에 끼어든 것도 밋밋한 생활이 지겨워 시작했던 일. 하지만 이 윤가희라는 여자는 묘한 흥분을 안겨주고 있었다.
 “오실 거죠?”
 “그러죠. 일곱 시.”
 “고마워요.”
 무슨 수로 홍 선생을 끌고 올지 모르지만 그게 궁금한 게 아니다.
 윤가희를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기대감을 갖게 하였다.
 3. 강퇴
 
 “아가, 어디 가냐?”
 강원도 진부로 향하던 차들은 갑자기 문막에서 내렸다. 그리고 유턴을 해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올랐다.
 찜찜한 마음에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 삼계탕이나 먹자고 가던 길. 홍 선생이 잔뜩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서울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뭐?”
 홍 선생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십여 분 전. 잠시 들렀던 휴게소에서 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던 걸 언뜻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강요를 받았다는 얘기.
 “이 새끼, 누구야?”
 종호.
 지난 십오 년간 꽤 많은 돈을 들여 키운 동생이다. 덕분에 지금은 신 영등포 파를 장악해 경찰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위치.
 배신도 배신이지만 누가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는지가 더 신경 쓰였다.
 이 나라 제일이 타짜로, 유일하게 무사히 은퇴한 자신이었다. 그만큼 원한 맺을 일도 많았지만 신 영등포 파를 회유할 정도라면 원한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종호는 얼굴에 확 나타날 정도로 미안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그러니까 누구냐고, 이 씨발 놈아!”
 “윤 회장입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윤 회장? 백곰?”
 “네, 형님.”
 “허어…….”
 홍 선생은 기가 막혀 털썩 뒤로 몸을 기댔다.
 백곰이라면 종호도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종호가 아니라 한국의 어느 조직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판돈은 물론이고 생돈 50억까지 포기했잖아. 그런데 왜?’
 분명 백곰의 딸이 카지노와의 관계는 끝났다고 했다. 백곰은 딸 바보다. 다른 건 몰라도 전면에 내세운 딸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절대 하지 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지노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네 시.
 종호는 카지노의 입구 문을 열어주며 홍 선생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
 “좆 까, 씨발 놈아!”
 종호는 홍 선생이 욕을 하건 말건 동생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어차피 이판사판.
 이런 상황까지 왔으면 최소한 손모가지는 잘린다고 봐야 했다. 홍 선생은 이제 곧 이별할 손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은퇴했으면 그만이지 뭔 재미를 보겠다고…….’
 정말 순수하게 좀 놀다 나온다는 생각이었지 그렇게 판이 커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놈이 던지는 배팅이 순식간에 피를 끓게 하였다.
 승부!
 돈이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흥분이 이 상황까지 몰고 온 것이다.
 “좆같은 새끼! 씨발 놈의 새끼! 내가 살아 나가면 넌 창자를…….”
 유진을 향해 욕설을 쏟아내던 그는 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랜만이요, 홍 선생.”
 “천 상사?”
 천 상사.
 백곰의 그림자.
 무슨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그가 나타났다는 얘기는 누군가 실종된다는 소리.
 홍 선생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제는 너무 심했습니다, 도련님.”
 권상필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앞에 놓인 스테이크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 아예 포크와 나이프에도 눈길 한 번 안 주었다.
 “다시 입금했잖아.”
 쓱싹쓱싹.
 냠냠.
 유진은 권상필을 쳐다보지도 않고 음식물을 입에 넣은 채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분명히 공금횡령이라는 말입니다.”
 우물우물.
 쓱싹쓱싹.
 냠냠 쩝쩝.
 “최종 결재권자는 나잖아.”
 “최종 결재권자라고 마음대로 돈을 꺼내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쓱싹쓱싹.
 냠냠 쩝쩝.
 “한국에 돌아오면 원하는 거 다 해준다며?”
 쓱싹쓱싹.
 냠냠 쩝쩝.
 “그, 그거야 목숨을 장난감처럼 내놓고 다니니 하는 소리였죠. 일족의 승계자가 온갖 전쟁에 다 뛰어드는데 뭔 소리를 못합니까!”
 스윽.
 유진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와인 잔을 들어 빙글빙글 잔을 돌렸다.
 “그럼 다시 남미로 가?”
 “도련님!”
 유진은 히죽 웃으며 남은 와인을 단숨에 삼켰다.
 “농담이야, 농담. 그건 그렇고, 윤가희라는 여자한테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려준 거야? 뭐 사실대로 얘기하지는 않았을 테고…….”
 후우.
 권상필은 열을 식히려 길게 한숨을 쉬었다.
 유진이 자신의 말을 들을 리도 없고 길게 얘기해봐야 자신의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그나마 전쟁터를 쫓아다니지 않게 되었으니 그 정도만 해도 다행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돌아가신 부동산 갑부 외동아들. 프리랜서로 증권투자를 하지만 취미 정도. 운동 좋아하고 매너 좋은 미혼남. 뭐, 그 정돕니다.”
 “아주 막장 드라마를 써요. 둘러댈 소재가 그것밖에 없었어?”
 “왜요, 좋잖아요. 돈 많고 매너 좋은 미혼남에 시부모도 없어. 그 정도면 최상급 신랑감 아닌가요?”
 “장가보내고 싶어?”
 “갈 때도 됐죠.”
 “예쁘긴 하더라.”
 권상필은 의자를 끌어 바짝 다가앉았다.
 “마음에 들어요?”
 유진은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를 1cm쯤 벌려 보였다.
 “요만큼?”
 “아, 진짜!”
 땅바닥에 기어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서른셋이다.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승계자라는 점에서는 한참이나 늦은 편이었다.
 “꿈 깨. 장가가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유진이 벌떡 일어서자 권상필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어디 가시게요?”
 “카지노.”
 권상필이 반색하며 함께 일어서며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윤가희 만나시게요?”
 “아니, 노름하러.”
 다시 어두워지는 안색.
 “이제 포커는 지겹다면서요?”
 “두 사람 인생 구하러 가는 거야.”
 “네?”
 “그런 게 있어.”
 유진이 휘적거리며 나가자 권상필은 머리를 긁적였다.
 “노름으로 두 사람 인생을 구한다고? 누구?”
 유진이 노름에 빠질 성격도 아니지만, 누군가를 위해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 리 없자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를 향했다.
 “가만있자…… 두 사람이라면 도련님과 윤가희? 그럼 청혼이라도 하려는 건가?”
 갸우뚱.
 계산하면서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권상필이었다. 자신이 봐도 윤가희 정도 되는 여자는 드물었으니까.
 
 눈물이 앞을 가렸다.
 벌써 돌아가신 지 십 년도 더 지난 어머니가 생각났고 그동안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이렇게 죽을 거면 뭣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식전일 텐데 설렁탕이나 먹읍시다?”
 죽이기 전에 선심이라도 쓰겠다는 건가?
 홍 선생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질질 끌지 말고 단숨에 보내주기나 하쇼. 마지막 길, 편히 좀 갑시다.”
 “무슨 소리요?”
 천 상사는 늘 웃고 다니는 사람이다. 아니, 오른쪽 입가에서 귀밑에 이르는 긴 상처 때문에 항상 누군가를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마치 만화영화 속의 악당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홍 선생의 눈에는 더욱 잔인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흥, 내가 힘이 없어 이 지경을 당하지만 언젠가 그쪽도 좋게 끝나진 않을 거요. 아무리 백곰이라도 말이지. 그 좆같은 새끼도…….”
 “잠깐!”
 천 상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안색을 굳혔다. 여전히 웃는 표정. 눈가를 실룩이며 살기를 품자 그 넓은 게임 홀에 찬 서리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런 씨팔,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야…….’
 홍 선생은 아차 싶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곱게 죽여줄지가 의문이었다. 그런데 욕까지 퍼부었다. 천 상사가 자신의 살점을 하나하나 뜯어내는 상상을 하자 그만 앞이 캄캄해졌다.
 그그극.
 천 상사는 아무 말 없이 몇 걸음 떨어진 곳의 의자를 끌어왔다. 느릿느릿한 동작.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천둥 치는 것 같았다.
 휘릭.
 의자는 빙그르르 돌아 홍 선생의 맞은편에 놓였다. 천 상사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한 다리를 꼬아 다른 다리 위에 올렸다.
 “어이, 홍 선생.”
 음의 높낮이가 없이 조용히 깔리는 음성. 뒤를 이어 날카로운 눈빛이 비수처럼 눈을 찔렀다. 홍 선생의 입이 얼어붙었다.
 “뚫린 주둥이라고 마음대로 내뱉으면 그게 하수구지 입이요? 내가 보기에 선생의 주둥이 용량이 작은 것 같은데 어떻게 좀 넓혀드릴까? 이렇게 말이야.”
 천 상사는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그러나 홍 선생은 감히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와 온몸에 닭살을 돋게 하였다.
 “살 기회를 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하수구를 벌려. 응?”
 “네?”
 홍 선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 상사의 살기 어린 목소리보다도 ‘살 기회’라는 단어에 온 신경이 꽂혔다.
 “그게 무슨 소리요?”
 톡톡.
 천 상사가 손가락 하나로 홍 선생의 뺨 한쪽을 톡톡 건드렸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십 년씩 수명이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두려움보다도 천 상사가 한 말에 더 관심이 갔다.
 “이거 이거, 제정신이 아니구먼.”
 손가락 하나가 홍 선생의 이마를 쿡 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냔 말이오!”
 자신도 모르게 낸 큰 소리.
 천 상사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낮은 목소리가 그 웃음을 따라 조용히 흘러나오자 홍 선생은 점점 더 몸을 앞으로 숙여 귀를 기울였다.
 
 카지노 영업시간은 저녁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아직 개장하기 전의 게임 홀에 다섯이 자릴 잡았다.
 유진과 홍 선생이 마주 보고 앉았고 가희가 딜러 자리에 앉았다. 젊은 사내 하나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천 상사는 저 뒷문의 입구에 꼿꼿하게 자릴 잡았다.
 ‘누구지?’
 눈에 익은 젊은 사내. 그 의문은 사내의 손목을 보자 풀렸다. 사내는 가볍게 목을 숙이며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구면이죠? 이신우입니다.”
 필립 파텍.
 어젯밤 5구 배팅에서 카드를 덮어 유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 사내다.
 “아! 제가 초대했어요. 제가 딜러를 보겠지만, 누군가는 증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우리 카지노 단골이고 블루드래곤의 한국 대표세요.”
 이신우는 가희의 소개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기분 나빠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소 장난스러운 제스처.
 블루드래곤이라면 중국계 다국적 기업이다. 한국에서는 큰 인지도가 없지만 대형 마트들에 각종 생필품을 납품했고 본토에서 자동차와 전자제품까지 손 대고 있는 제법 규모 있는 회사였다.
 창백한 피부색과 귀족적인 풍모를 제외하면 별로 튀지 않는 평범한 체격. 그러나 유진은 그가 저 뒤에 있는 천 상사보다도 더 위험스럽게 여겨졌다.
 뭐라고 할까.
 이신우의 몸에서는 약간 비린내가 난다고 해야 하나? 그것도 피비린내가.
 “유진입니다.”
 유진은 가볍게 악수를 받아들였지만, 살과 살이 닿는 순간에 얼음 같은 싸늘함이 전해졌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요?”
 가희의 부드러운 음성이 그 싸늘함을 감싸고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먼저 어제 일은 미안하게 됐수다.”
 홍 선생이 유진을 향해 멋쩍은 표정을 지며 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여주었다.
 ‘이놈은 자신이 오늘 어떤 상황을 당할 뻔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물론 알 리가 없다.
 홍 선생은 물론이고 여기 모인 모두 상상도 하지 못할 터였다.
 상관없었다.
 이제 유진의 관심은 홍 선생에게서 달아나 가희와 신우라는 사내에게 더 큰 무게를 달고 있었다.
 “게임은 텍사스 홀덤이에요. 배팅은 세 번째 카드 오픈부터. 시드머니는 100만 원이고 레이스 제한은 말구를 제외하고 두 번. 한 분이 모두 잃을 때까지고 두 분 모두 지급보증은 50억이에요. 단 제가 주최한 비공식 게임이니 지급보증 수수료는 없어요. 괜찮죠?”
 어차피 돈이 중요하지 않은 게임이다.
 유진이 이기면 어제 카지노에 뜯긴 수수료에 약간의 용돈을 얻는 셈이고 홍 선생은 전 재산으로 자신의 목숨을 사는 셈이다.
 반대라면 유진은 몇백억이 아닌 몇십억과 홍 선생의 목숨을 잃는 것이고 홍 선생은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되찾는다.
 이게 윤가희가 생각한 시나리오였다. 그녀의 생각에는 가장 합당하고 공정한 대가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기술을 쓰는 분은 없어야 할 거예요. 아니면 저분과 잠시 면회를 하셔야 할 거예요.”
 멀리서 천 상사가 고개를 돌렸다. 입가부터 올라간 흉터가 꿈틀거리면서 귀로 올라갔다.
 천 상사와 면회를 하면?
 아마 어딘가에 비닐이 깔릴 테고 조금 지저분한 광경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진이나 홍 선생이나, 양쪽 다 그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가희가 새 카드를 꺼내 양쪽에 확인시키고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조커를 골라내 버리고 능숙한 솜씨로 카드를 섞었다.
 주르륵.
 녹색의 테이블 위에 카드를 일렬로 늘어놓자 유진과 홍 선생이 각각 한 장씩 뽑았다.
 
 유진은 ◆ 9.
 홍 선생은 ♠ J.
 
 홍 선생이 선이었다.
 가희는 다시 카드를 섞었고 각각 두 장의 카드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다섯 장의 카드를 무작위로 꺼내 순서대로 깔았다. 물론 무늬와 숫자가 보이지 않게 뒤집어서.
 텍사스 홀덤은 플레이어에게 가는 카드가 두 장뿐이다. 대신 딜러 앞에 놓인 다섯 장의 카드를 공유해 점수를 만든다. 기술을 쓸 여지는 현저히 줄어드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단둘이 하는 게임이고 다섯 장의 카드를 공유하기에 확률로 계산하기는 훨씬 어려웠다. 쉽게 얘기해 어제 했던 7 포커보다 운발이 훨씬 좋다는 얘기다.
 유진은 슬쩍 자신의 카드 귀퉁이를 들어 카드를 확인했다.
 
 ♣ 8, ♣ 4.
 
 나쁘지 않은 패다.
 이렇게 둘이 하는 게임에서 가장 유리한 패는 하이 페어.
 하지만 스트레이트를 노릴 수도 있고 플러시를 노릴 수도 있으니 나쁘지도 않다. 보통은 원 페어, 높아 봐야 투 페어로 승부가 나는 게 플레이어 둘이 하는 게임이다.
 가희는 둘이 카드를 확인하는 걸 기다려 첫 번째 카드를 오픈했다.
 “◆ 6입니다.”
 유진의 카드는 족보 없이 ♣ 8 탑.
 서로 슬쩍 상대를 살폈지만, 표정이 드러날 리 없다.
 가희는 기다리지 않고 두 번째 카드를 오픈했다.
 “◆ J입니다.”
 유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 J, ◆ 6. (♣ 8, ♣ 4)
 
 남은 카드는 세 장.
 모두 다이아가 나와 플러시를 만드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패.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했다. 차라리 하이 원 페어라도 나와 배팅으로 승부를 보는 게 건강에 좋다.
 가희는 다시 세 번째 카드를 오픈했다. 배팅이 시작되니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 2입니다. 배팅은 홍 선생님부터 시작합니다.”
 
 ◆ J, ◆ 6, ♠ 2. (♣ 8, ♣ 4)
 
 이 정도면 최악의 패다.
 가장 높이 만들 수 있는 패는 ♣ 8 스트레이트.
 “1백.”
 홍 선생이 칩을 던졌다.
 “1백에 2백 더.”
 “2백에 5백 더.”
 “5백에 1천 더.”
 “콜.”
 판돈은 몇 초 사이에 3천7백이 되었다.
 각자 배팅할 기회는 두 번.
 둘 다 족보로 승부를 겨룰 만큼 초보자도 아니니 판돈을 키워야 배팅할 기회를 만드는 게 당연했다. 100억을 놓고 하는 게임의 말구에 달랑 몇 천을 배팅하는 상황은 우스울 뿐이다.
 네 번째 카드는 ◆ A.
 유진의 스트레이트도 날아갔다.
 선은 여전히 홍 선생.
 “3천.”
 “3천에 9천 더.”
 “레이스, 합 3억.”
 “레이스, 합 9억.”
 “콜.”
 첫 번째 배팅이 시작되고 불과 2, 3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 그럼에도 판돈은 20억에 육박했다. 이제 카드는 한 장만 히든이고 마지막의 배팅 제한은 없다.
 가희와 신우, 저 멀리서 천 상사까지 이 한 판으로 끝나는가 싶어 눈을 반짝였다.
 “마지막 카드 오픈합니다.”
 나온 카드는 ♣ K.
 유진의 카드는,
 
 ◆ J, ◆ 6, ♠ 2, ◆ A, ♣ K. (♣ 8, ♣ 4)
 
 탑이 ◆ A인 망골.
 “15억.”
 “다이.”
 유진은 미련 없이 카드를 덮었다.
 둘이 하는 게임이라 이길 수도 있는 카드.
 홍 선생이 거침없이 레이스를 해서 판을 키웠으니 최소 원 페어 이상이거나 아예 망골 둘 중의 하나. 하지만 첫 게임에 승부를 보는 건 게임을 즐기는 자세가 아니다.
 홍 선생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그다음 몇 판은 서로 기회를 보는 탐색전이 되었다.
 
 여섯 판이 지나자 서로가 가진 돈은 거의 비슷했다.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처음 상황으로 돌아온 것이다.
 유진이나 홍 선생, 둘 다 이제는 승부를 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전 판에 홍 선생이 이겼으니 그가 선을 잡았다.
 카드는 세 번째 오픈.
 유진의 카드는,
 
 ♠ 4, ♠ 7, ♥ 7. (♣ Q, ♠ 6)
 
 7 원 페어는 공유하니 이제 투 페어 이상의 싸움이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바닥에 페어가 깔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판보다 약간 더 긴장감이 생겼다.
 배팅은 홍 선생부터.
 “1백.”
 “1백에 2백 더.”
 “2백에 5백 더.”
 “1천 더.”
 “1천에 2천 더.”
 “콜.”
 쌓인 판돈은 7천7백.
 완전한 풀 배팅을 하지 않는 건 계산하기 귀찮아서일 뿐이었다.
 네 번째 카드가 오픈되었다.
 “◆ A입니다.”
 
 ♠ 4, ♠ 7, ♥ 7, ◆ A. (♣ Q, ♠ 6)
 
 이렇게 되면 유진의 카드는 망골이나 마찬가지다. 최대한 띄워봐야 7 트리플. 그다음은 에이스 투 페어, 퀸 투 페어, 7 투 페어의 순이다.
 유진은 다음 카드에서 자신이 7 페어로 끝나는 경우를 상상했다.
 “재미없는데…….”
 “네?”
 여태 말이 없던 유진의 중얼거림에 가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닙니다. 패가 마음에 안 들어서요.”
 말로 상대방을 떠보는 건 정말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럼에도 유진인 입을 연 건 정말 지겹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홍 선생의 재산이 얼마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저 권 상무에게 욕 한번 얻어먹으면 될 돈. 따분한 게 싫어 시작한 게임에 전혀 흥분 요소가 없다는 건 불행스런 일이었다.
 “뭐 마실 거라도 없나요?”
 유진의 따분한 음성에 가희 뒤쪽에 있던 신우가 냉장고에서 생수 네 통을 가져와 각각 한 병씩 돌렸다. 가희가 살짝 웃으며 고마움을 전하자 신우는 가볍게 윙크로 받았다.
 ‘저 자식,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지?’
 창백한 얼굴, 자신의 느낌상으로만 전해지는 비린내, 그리고 가희에게 윙크하는 수작질까지 모든 게 눈에 거슬렸다. 심지어 그가 차고 있는 억대의 시계까지 마음에 안 들었다.
 “게임 안 할 거요!”
 ‘응?’
 홍 선생이 짜증을 부렸다.
 의외의 일이다.
 홍 선생 정도의 고수가 아무리 자신의 전 재산이 걸려 있다고 해도 감정을 드러낼 일은 없다. 십중팔구는 연기라는 얘기.
 ‘이 새끼, 뭘 잡았길래 연기까지 하는 거야?’
 유진은 생수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병의 투명한 몸체를 통해 홍 선생을 보았다. 생수병은 콜라병과 비슷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어 홍 선생의 얼굴은 말처럼 길쭉하게 늘어져 보였다.
 ‘미치겠군.’
 어제 400억을 잃고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유진이다. 그러니 엔간한 배팅에 ‘어맛, 뜨거워라!’ 하고 당할 리도 없다. 그에 비해 자신은 목숨과 전 재산을 놓고 하는 도박이니 자꾸 감정이 앞섰다.
 다른 무엇보다, 유진이 이 게임에서 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하는 거다. 더구나 지기까지 하면 정말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상대를 흥분시킬 수 없는 게임은 이미 진 거나 다름없었다.
 
 ♠ 4, ♠ 7, ♥ 7, ◆ A. (♥ Q, ♠ 3)
 
 바닥에 7페어가 깔렸어도 망골패.
 눈치를 봐서 분명히 이번 판이 마지막일 텐데 유진이 자신보다 더 낮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오로지 내세울 거라고는 퀸 한 장인데 그다음 카드가 겨우 4라는 게 덜컥 가슴에 걸린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배팅으로 밀고 나가 볼 만한 카드.
 하지만 50억으로 한정된 판에서 수백억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버리는 놈에게 통할 리 없었다.
 ‘어쩌지? 그냥 이렇게 싱겁게 카드를 까야 하는 건가?’
 이겨도 찜찜하고 지면 전 재산을 홀랑 날리는 상황이 문제가 아니다. 어디선가 소문이 날 테고 한국 제일의 타짜라는 자존심은 그 소문에 만신창이가 될 게 분명했다.
 돈도 명예도, 자신의 인생 전부가 걸린 판. 흥분은 오히려 자신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무슨 수를 내야 해…….’
 기술을 쓸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저 천 상사의 손에 깔끔하게 부위 별로 손질되어 어느 정육점에 걸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규칙을 바꾸면 좀 재밌으려나?”
 지루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꽂혔다.
 “네?”
 “지겹잖아요. 안 그래요?”
 판돈 100억이 걸린 게임을 지겹다고 생각하는 건 유진만의 생각인 것 같았다. 가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신우는 작게 미소 지었다. 심지어 저 멀리 천 상사도 스르르 몸을 돌려 이쪽을 향했다.
 순간 유진과 홍 선생이 눈이 맞부딪혔다.
 화라락.
 홍 선생은 눈에서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유진의 말은 달갑기도 하고 치욕스럽기도 했다.
 ‘지겨워? 감히 날 가지고 놀아보자는 얘기냐!’
 좀 전까지 전전긍긍하던 자존심에 또 다른 상처, 마치 칼로 벤 것 같은 통증이 심장을 할퀴었다.
 “무슨 소리요?”
 홍 선생은 손안에서 칩 하나를 돌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눈가의 잔주름은 더욱 깊어졌고 눈동자는 그 안에서 차갑게 빛났다. 그게 살기라는 건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거기까지 올라오며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지는 자명한 일. 만약 그가 다른 마음을 먹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한칼은 있단 얘기다.
 “이렇게 평범한 게임 말고 좀 재미를 더해보자는 얘기지.”
 탁.
 홍 선생은 칩을 테이블 위로 던지며 웃었다.
 ‘개새끼, 어디 무슨 수작이든 꺼내봐라.’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오픈된 다섯 장 중 각각 한 장씩 선택해 바꿉시다. 새 카드로. 그게 지금보다는 훨씬 재밌지 않을까?”
 “…….”
 홍 선생의 눈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오픈된 카드는,
 
 ♠ 4, ♠ 7, ♥ 7, ◆ A.
 
 7 두 장은 의미 없으니 놔두고 눈에 거슬리는 4를 바꾸어 퀸 페어라도 만들면 상당히 승산이 올라간다. 유진 역시 7을 바꿀 리는 없고 자신이 4를 바꾸면 바꿀 카드는 에이스.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거 재밌겠네. 기왕 바꾸는 거 히든도 한 장씩 바꾸는 건 어떻소?”
 유진이 빙긋 웃었다.
 “뭐 좋으실 대로.”
 이렇게 되면 카드를 처음부터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베팅한 돈이 상당하니 스릴은 더 가중되고 결과는 예측하기 더 어려워지다.
 현재 둘의 카드는,
 
 유진 : ♠ 4, ♠ 7, ♥ 7, ◆ A. (♣ Q, ♠ 6)
 
 홍 선생 : ♠ 4, ♠ 7, ♥ 7, ◆ A. (♥ Q, ♠ 3)
 
 서로 비슷하지만, 마지막 카드가 오픈되지 않은 상태.
 “그럼 마지막 카드는 그냥 까고 각각 두 장의 카드를 바꾸면서 배팅하는 건가?”
 “오케이!”
 플레이어들이 모두 찬성하니 딜러인 가희나 참관자인 신우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가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지막 카드를 오픈했다.
 나온 카드는 ♠ Q.
 홍 선생은 서로 퀸 투 페어를 맞잡은 줄도 모르고 속으로 환호성을 올렸다.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졌다.
 혹시 유진이 에이스를 히든으로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홍 선생은 무조건 에이스를 바꿔야 승률이 올라가는 것이다.
 “선은 홍 선생입니다.”
 가희의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홍 선생은 기쁜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섯 장의 오프 카드 위로 손을 가져갔다.
 선택은 당연히 ◆ A.
 가희는 선택한 카드를 회수하고 다른 카드를 꺼내 그 자리에 오픈했다.
 카드는 ♥ 3.
 
 유진 : ♠ 4, ♠ 7, ♥ 7, ♠ Q, ♥ 3. (♣ Q, ♠ 6)
 
 홍 선생 : ♠ 4, ♠ 7, ♥ 7, ♠ Q, ♥ 3. (♥ Q, ♠ 3)
 
 홍 선생은 홍콩 풀(페어가 세 개인 상황, 투 페어와 같은 점수임)을 만들어 풀 하우스를 만들 확률을 높였다.
 유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꿀 카드를 선택했다.
 ♥ 7.
 이렇게 되면 공용인 페어가 없어지니 홍 선생은 투 페어, 유진은 원 페어가 되어버렸다.
 서로 상대의 카드를 몰랐지만 홍 선생으로서는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선택. 오히려 자신의 투 페어가 견고해진 것 같아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가희가 ♥ 7을 회수하고 그 자리에 다른 카드를 올렸다.
 ♣ 3.
 카드가 확인되는 순간 홍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유진 : ♠ 4, ♠ 7, ♣ 3, ♠ Q, ♥ 3. (♣ Q, ♠ 6)
 
 홍 선생 : ♠ 4, ♠ 7, ♣ 3, ♠ Q, ♥ 3. (♥ Q, ♠ 3)
 
 자신의 카드가 3, Q 풀 하우스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아직 서로의 히든 한 장을 교환해야 하니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도 승률이 자신에게 훨씬 유리하게 바뀐 건 사실이었다.
 “5천.”
 “5천에 1억 더.”
 “레이스, 2억.”
 “4억 더.”
 “레이스, 8억.”
 “까짓것 다 넣죠?”
 유진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묻자 홍 선생은 피식 웃었다.
 이번 판이 마지막이라는 건 서로가 안다. 다음 배팅까지 끌고 갈 수도 있지만, 의미 없는 얘기.
 “콜!”
 둘은 시원하게 자기 앞의 칩을 밀어 넣었다. 둘이 가지고 있던 금액이 몇 천 차이가 날 수 있었지만 둘 다 거기 연연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럼 내 차례인가?”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홍 선생은 유진의 히든카드 한 장을 선택해 끌어오며 자신의 카드를 밀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내놓은 카드도 퀸, 가져간 카드도 퀸이었다. 단지 무늬만 바꾼 셈이었다.
 
 유진 : ♠ 4, ♠ 7, ♣ 3, ♠ Q, ♥ 3. (♥ Q, ♠ 6)
 
 홍 선생 : ♠ 4, ♠ 7, ♣ 3, ♠ Q, ♥ 3. (♣ Q, ♠ 3)
 
 이렇게 되면 유진이 뭘 선택하는지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유진이 퀸을 내놓고 퀸을 가져갈 경우,
 홍 선생이 3, Q 풀 하우스로 승, 3을 가져가도 홍 선생이 Q, 3 풀 하우스로 승.
 반대로 6을 내놓고 퀸을 가져가면 유진이 Q, 3 풀 하우스로 승, 3을 가져가면 유진이 3 트리플로 이긴다.
 이미 홍 선생이 자신의 퀸을 가지고 갔고 다시 가져온 카드가 퀸. 선택은 당연히 6이다.
 “오픈하시죠?”
 순서는 선인 홍 선생.
 
 ♠ 4, ♠ 7, ♣ 3, ♠ Q, ♥ 3. (♣ Q, ♠ 6)
 
 “퀸 투 페어입니다.”
 가희가 카드를 확인하고 선언하고 유진을 돌아다보았다.
 
 ♠ 4, ♠ 7, ♣ 3, ♠ Q, ♥ 3. (♥ Q, ♣ 6)
 
 “가, 같은 투 페어…….”
 “아…….”
 똑같은 Q, 3 투 페어.
 하지만 차 순위 카드는 홍 선생이 스페이드 6, 유진이 클로버 6. 이럴 경우 스페이드-다이아-하트-클로버의 순으로 승부를 정한다.
 결론은 똑같은 카드여도 유진이 졌다는 것.
 홍 선생이 내놓은 스페이드 3은 어느새 클로버 6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아는 건 홍 선생 자신뿐이었다.
 “이 게임은 홍 선생께서 이기셨습니다.”
 가희가 홍 선생의 승리를 선언했다.
 “왜 그랬지?”
 뜬금없는 유진의 질문에 홍 선생이 흠칫했다.
 “왜 그랬냐고.”
 “무슨 소리지?”
 홍 선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분위기기 이상해지자 저 멀리서 천 상사가 다가왔다.
 “어차피 승률은 반반이었어. 굳이 카드를 바꿀 필요가 있었나?”
 “무슨 개수작이야!”
 홍 선생이 자릴 박차고 일어나며 소릴 질렀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자신이 마지막에 바꾼 카드, 클로버 6을 톡톡 손가락으로 쳤다.
 “그럼 이건 어디서 나왔을까…….”
 “내가 카드를 바꾸기라도 했다는 얘기야?”
 홍 선생이 관자놀이에 불끈 핏대가 선 채 바싹 유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만약, 확인해서 카드가 맞는다면 넌 내 손에 죽어. 알았어?”
 가희가 천 상사에게 눈짓했다.
 유일하게 테이블에서 멀리 있었던 그에게 카드 확인을 부탁하는 것이다. 천 상사는 카드 모두를 정리해 무늬와 숫자를 맞춰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맞습니다, 52장 모두.”
 더구나 스페이드 3까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이번엔 사람들의 시선이 유진에게 몰렸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테이블 한쪽을 가리키며 가희에게 물었다.
 “저거 카메라 맞죠?”
 육각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은 카드와 칩이 떨어지지 않도록 테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한구석에 직경 2mm 정도의 렌즈를 발견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마, 맞아요.”
 홍 선생 같은 기술자들의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중 하나. 타짜들의 손놀림이 워낙 빠르기에 천장과 벽에 있는 카메라만으로는 잡아내기 힘들어 설치한 카메라였다.
 “녹화하고 있는 거죠?”
 “물론이에요.”
 가희가 대답과 동시에 몸을 돌려 달려가자 유진은 그 뒤에 대고 소리쳤다.
 “네 번째 카드 오픈 직후 내가 물 마실 때만 보면 돼요!”
 뚝.
 가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보았다. 정확히 시간까지 짚어냈다면 정말 봤다는 얘기. 홍 선생을 돌아다보자,
 털썩.
 무너지듯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천 상사가 그 뒤로 스윽 돌아가 버티고 섰다.
 “어떻게……?”
 들키지 않기 위해 테이블 위의 카드만으로 바꿔치기했다. 자신의 손놀림은 카메라를 속일 정도였고 무엇보다 그 무서운 천 상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이 스스로 부추겼다.
 하지만 프로도 아닌 세 사람, 유진, 가희, 신우 정도는 도저히 알아챌 수 없는 속도와 은밀함이었다.
 유진이 천 상사가 모아놓은 카드 위로 손을 가져갔다.
 정확히 무늬와 숫자 순서대로 늘어놓은 카드.
 그런데 유진이 좀 떨어진 위를 스윽 지나가자 카드 몇 장이 사라졌다.
 ♠ 4, ♠ 7, ♣ 3, ♠ Q, ♥ 3.
 좀 전 게임의 오픈 카드들.
 유진은 손을 움직여 아무것도 없는 쪽에 그 카드를 떨어뜨렸다. 카드가 어떻게 없어진 걸 본 사람은 홍 선생이 유일했다. 마치 자석처럼 카드가 손바닥에 붙은 것이다.
 “타짜가 아니라고 눈과 손까지 느린 건 아니지.”
 “어, 어떻게…….”
 한국 최고의 타짜라는 홍 선생이다. 그런데도 유진의 손에 카드가 딸려 올라간 건 도저히 어떤 방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궁금한 건…….”
 홍 선생이 힘없는 눈으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무리수를 둔 거지? 아무리 전 재산이 걸렸다고 해도 목숨까지 걸 필요가 있었나?”
 유진은 말을 하며 천 상사 쪽을 흘낏 보았다.
 “…….”
 홍 선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국 최고 타짜의 자존심.
 그걸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더 겜블러』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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