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교수님, 때가 되었군요.”
견습 연금술사의 녹색 로브를 입은 한 학생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칠판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학생이 상체를 숙여 양팔을 교탁 위에 올린 뒤, 강의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잠깐 그러고 있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정숙한 강의실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디오가 엄숙하게 말했다.
“지난여름은 위대했습니다.”
이윽고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디오의 진지하면서도 과장된 모습 때문이었다.
교수가 웃음기를 머금고 물었다.
“거창하네요. 어떤 일이 있었죠?”
“저는 던전 탐사에 나갔습니다.”
-오오
학생들의 술렁임에, 아리아 교수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던전 탐사? 위험한 일을 했군요.”
“맞습니다. 지루하고 평화로운 연금탑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크나큰 위험으로 찾아왔지요.”
디오는 아주 고된 시련이었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저었다.
“던전에 들어가려면 자격이 필요한 것으로 아는데요?”
“지난 2년간 탑 근방의 자연에 나는 약초란 약초는 모조리 채집해 모험가 길드로 납품했습니다. 모험가로서의 실적을 쌓기 위함이었습니다.”
디오가 뒷짐을 지고 칠판 앞에 걸어가더니, 한 손으로 분필을 잡았다.
또각거리는 분필 소리와 함께 고풍스러운 글씨가 적혔다.
[철 등급 모험가]
명필이었다.
“그렇게 수습 딱지를 떼고 철 등급에 올라, 던전을 탐험할 자격을 얻어낸 것입니다.”
몇몇 견습 연금술사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다시금 오오- 하는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나 몇몇 학생들은 갸웃했다.
철 등급 모험가는 가장 처음인 구리 등급의 다음 등급. 객관적으로 자랑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여름 방학 동안 제게 있었던 이야기를 발표해 보겠습니다.”
디오가 당당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모험가 길드입니다.”
***
모험가 길드는 늘 북적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 할 일로 바빴다.
용병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제각기 임무가 적힌 종이를 뒤적거리거나, 사냥감을 메고 들어와 등급을 부여받거나, 접수원과 상담하고 나갈 뿐이었다.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소년, 디오의 등장에도 마찬가지였다.
“던전에 들어가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모험가 길드의 안내원 라일라는 그가 모험가 길드에 와 유일하게 대화해본 상대였다.
그녀는 이르다거나 던전은 위험하다는 등의 군말 없이, 종이 한 장을 목제 접수대 위에 올려놓았다.
“빈칸을 채워주세요. 애매한 건 빈칸으로 둬도 돼요.”
“동료로 들일지 말지 이 신청서로 결정하는 거죠?”
“맞아요.”
소재가 명확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파티가 있고, 신원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만 들이는 파티가 있다.
디오는 신원을 확실하게 하기로 했다.
「던전 대기자 이력서」‗‗‗‗‗‗‗‗‗‗
이름 : 디오
소재 : 연금탑
계급 : 철
직업 : 연금술사
직책 : 치료사
특기 : 응급처치
비고 :
‗‗‗‗‗‗‗‗‗‗‗‗‗‗‗‗‗‗‗‗‗‗‗‗‗‗‗
가득 채운 종이를 도로 내밀자, 라일라가 확인했다.
“연금탑에서 오셨네요. 증명할 증서는-”
“여기···.”
“확인했습니다.”
디오가 내민 탑 출입증을 확인한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술사로서는 연금탑 출신을 밝히는 게 좋았다.
떠돌이 연금술사만큼 수상하게 비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치료사셔서 그간 약초 채집 위주로 임무를 진행하셨던 거네요.”
“네. 채집보단 응급처치에 더 자신 있습니다.”
디오는 아직 특화 분야랄 게 없는 견습 연금술사였지만, 실습 시간에 배운 효과 좋은 연고 제조법과 테이핑 기술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연금탑에서 질 좋은 소독약, 지혈제와 깨끗한 붕대를 챙겨왔다.
이 정도만 갖춰도 기본적인 응급처치와 상처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이 이상을 바란다면 실력 있는 사제를 찾지, 치료사를 찾지 않을 것이다.
“전투 능력은요?”
“없습니다. 애석하게도.”
하나도 애석하지 않은 표정으로 답한 디오가, 혹여 도움이 될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발은 빠릅니다.”
“도망은 자신 있다는 뜻이네요. 원하는 파티 유형이 따로 있나요?”
“평판이 좋은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인 라일라가 디오와의 간단한 문답을 통해 얻은 정보를 비고란에 적더니, 이력서를 둘둘 말아 서랍에 넣었다.
일종의 간이 면접이었다.
“접수됐습니다. 치료사를 구하는 평판 괜찮은 파티에는 모험가님의 이력서를 보여줄게요. 이력서의 내용 중 거짓은 없겠죠?”
“네 없습니다.”
“훗날 거짓임이 밝혀지면 페널티가 있을 수 있고, 신고받으면 검사 절차가 있을 거예요.”
그녀가 경고해주었다.
“그땐 검사비를 따로 청구하고, 기준 미달임이 드러나면 용병패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셨나요?”
“이해했습니다.”
“이상 안내 끝났습니다. 위층 여관에 머물죠? 기다리면 모험가님의 방으로 연락이 갈 거예요.”
라일라와 헤어진 뒤 며칠이 지나, 한 파티와 매칭됐다.
근래 활발하게 성장 중이라는 모험가 파티로, 토르라는 이름을 가진 전사가 이끄는 모험가 무리였다.
깔끔한 정산과 무리하지 않는 전략으로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리더인 토르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문 역시 들을 수 있었다.
***
이야기하던 디오가 회고했다.
“토르라는 모험가는 천재였습니다.”
“그의 파티에 들어갔나 보군요.”
디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끈끈하고 가족 같으며, 밝고 희망찬 분위기로 보아 믿을만한 자들이란 확신이 들었죠.”
이렇게 토르 파티에 대한 첫인상을 전한 뒤, 말을 이었다.
“저는 그들과 계약을 마친 뒤, 위험도 2급의 하급 던전에 들어갔습니다.”
아리아 교수가 빙긋 웃었다.
낮은 던전의 난이도를 보고 마음을 놓은 듯 보였다.
“어떤 던전이었나요?”
“널찍한 미로에 고블린과 코볼트 따위가 돌아다니는 개방형 던전이었습니다.”
“개방형 던전. 던전 입구가 늘 열려 있는 던전이죠.”
언제든지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어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안전한 사냥터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몬스터 역시 입구를 통해 던전 밖으로 걸어 나오곤 했다.
때문에, 치안을 생각해야 하는 높으신 분들에겐 골칫덩이 취급을 받곤 했다.
“집중을 잃지 않으면 다칠 일이 없는 곳이었죠.”
여기까지 말한 디오가 목소리를 깔았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개방형 던전을 완전히 해결할 비밀을 찾아버렸다는 겁니다.”
***
탐색 도중, 일행 하나가 단서를 발견했다.
“알렉스? 그 낙서는 뭐야?”
“여기 미로 벽에 있는 그림. 반복성이 느껴지거든?”
그는 돌아다니며 외딴 위치에 그려진 그림을 종이에 옮겨 그렸다.
영 어설퍼 보이자, 디오가 나서서 그림을 다시 그렸다.
“여기와 여기가 이어지고, 이건 이 부분과 맞네.”
토르는 그 그림을 이리저리 배치해 보더니, 퍼즐처럼 맞물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꽃이야. 이게 뭔지 아는 사람?”
“임파첸스네. 우리 마을에서도 곧잘 피었잖아.”
여정은 계속됐다. 그러다가 던전 깊은 곳의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막혔네. 돌아가자.”
“잠깐. 저기 그 꽃 아냐?”
파티원 한 명이 막힌 벽 구석에 피어있는 임파첸스를 발견했다.
“뭔가 이상하네. 이거 그냥 핀 건 아닌 것 같지?”
토르가 꽃에 손을 내밀었으나, 잡히지 않았다.
손이 벽을 그대로 통과했다.
“이 벽. 꽃을 기준으로 수직선이 뚫려있어. 보이진 않지만 틈이 있는 것 같아.”
“···설마 들어갈 수도 있어?”
“해보면 알겠지.”
토르가 먼저 들어가 안전함을 전하자, 모두가 따라 들어가 비밀 방을 신기한 듯 살폈다.
숫자와 화살표 버튼으로 이루어진 정체불명의 장치가 있는 방이었다.
“이 단추들이 뭘 말하는 걸까?”
“섣불리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토르는 차분히 생각하더니, 장치를 조작해보았다.
“추워지는데? 그럼 이건 온도 조절 버튼이고, 이건···.”
디오가 피부를 만지더니 말했다.
“습도. 아까보다 훨씬 습해졌어.”
“뭔가 알 것 같아. 임파첸스가 피던 우리 마을에 비해 이 던전은 너무 춥고 건조하거든.”
모두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조작해주면···.”
장치에 적힌 숫자를 조작하자, 던전이 점점 쾌적하게 변화했다.
그러다가 찍힌 숫자가 꽃의 생육 온도에 맞춰졌을 때, 유적지가 반응했다.
-쿠구구궁
방 전체가 맹렬히 진동했다.
먼지가 떨어지는 천장에 놀란 모두가 비밀방에서 뛰쳐나오자, 미로의 벽들이 바닥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야, 저거 봐. 우리가 있던 방도 가라앉는데?”
“죽을 뻔했다···.”
차례차례 벽이 가라앉아 광장이 되자, 저 멀리 그들이 들어왔던 던전 입구가 보였다.
덩그러니 놓인 문틀 또는 세로가 긴 액자 틀처럼 보이는 저것이 던전 입구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적의가 담긴 수천 개의 시선이 있었다.
-크르륵
“저렇게 많았다고···? 이거 괜찮은 거야···?”
미로 전체에 넓게 퍼져있던 괴물 무리는 벽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일제히 달려오는 괴물들은 군단이나 다름없었다.
“모두 뛰어!”
토르의 외침에 즉각 반응해 달려 나갔으나, 탈출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땅이 뒤흔들리며, 던전 입구가 놓인 바닥이 융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끊임없이 솟아나 건설되고 있는 드높은 타워의 재료는, 방금까지 바닥으로 스며들었던 미로의 벽들이었다.
“저기 벽에! 우리가 그렸던 그림 맞지?”
벽면에는 방패 문양 안에 그려진 임파첸스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빌어먹을! 가문의 문양이었잖아! 이곳은 유적지였어!”
꽃의 이미지는 조각난 상태여도 눈에 띄어 알아챘으나, 꽃을 둘러싼 방패까지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
“그 직선도 그림의 일부였구나···.”
“봤었어?”
“몇 개 본 것 같아. 흠이나 금 간 건 줄 알았어.”
열심히 달리던 디오가 토르에게 물었다.
“위험한 거야?”
“당연하지.”
이러한 장치를 다룰 수 있는 가문이라면, 부유했으며, 마법에 능했을 것이다.
그런 가문이 거창한 장치로 숨겨둘 만한 것이 무엇일까.
“유산을 숨겨뒀을 거야. 당연하지만, 우리 같은 침입자에게 넘기지 않으려고 다양한 조치를 해놨을 거고.”
“근데도 저 건물로 가는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
출입구는 이미 불길하게 생긴 빌딩에 의해 밀려 올라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토르는 방향을 틀지 않았다.
“타워 안으로 들어가야 해. 아무리 약한 괴물이더라도 저 숫자를 모두 처리할 수는 없어. 그리고-”
토르는 진작에 고민을 끝낸 듯했다.
“괴물은 던전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나타날 거야. 이곳에 있다간 말라 죽는다.”
건물 벽은 디딜 곳이 없이 매끈했다.
그들로선 벽을 타고 오르는 것도, 비행도 불가능했다.
결국 살아남는 방법은 건물 속으로 들어가, 저들이 준비한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새 괴물의 장벽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토르가 외쳤다.
“부딪친다! 모두 돌파할 준비해! 디오! 파티 중앙으로 들어가!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안 돼!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달려!”
괴물들의 파도에 휩쓸리며 육중한 충격이 있었다.
정신없는 괴성과 함께 달려 들어오는 코볼트와 고블린 무리에 정신없이 얽혔다.
“계속 달려! 계속!”
씹히고 베이고 뜯기며 전후좌우 할 것 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을 뚫고 지나갔다.
파티는 반쯤 떠밀리다시피 던전 중앙에 생겨난 건물 속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
“···사실입니까?”
아리아 교수는 믿기 힘들단 표정이었다.
“네. 과장 없이 모두 있었던 일입니다. 쉬운 여정은 끝났고, 진짜 위험이 닥쳐왔죠.”
디오가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다.
“그곳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했습니다. 각층에는 퍼즐 하나와 벽에 붙은 시계와 연동된 함정, 승강기가 있는 간단한 구조였죠.”
디오가 칠판 앞에 서더니, 원을 그렸다.
“함정의 예로는-”
그다음엔 손에 든 디바이스를 참고하며 원 안에 룬어를 채워 마법진을 제도했다.
겉으로는 단순한 구조여서 금세 그릴 수 있었다.
“이런 마법진이 있었죠.”
교수는 흥미롭다는 듯 마법진을 바라보곤, 풀이해주었다.
“고전적인 방식의 융해 마법이네요. 근처의 생명체를 감지해 광선 형태로 쏘아졌겠어요.”
“저도 돌아온 뒤, 도서관에서 찾아보고 알았습니다. 당시 토르의 파티는 저 마법진을 해석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상황은 이해하고 있었다.
“퍼즐을 제한 시간 내에 풀어내지 못하면 저게 우릴 죽이겠구나 싶었죠.”
개방형 던전은 수수께끼 던전으로 바뀌었다.
전투력보다 지성과 순간의 판단, 운이 더 큰 영향을 주는 던전.
강인한 신체를 지닌 던전 탐험가들을 숱하게 잡아먹은 개미지옥.
그곳은 또한, 무명의 용병을 단숨에 유명인이나 부자로 만들어주기도 하는 무한한 기회의 장이었다.
댓글(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