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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판사

2023.03.28 조회 54,715 추천 1,031


 내 이름은 황이다.
 이름이 ‘황’은 아니고, 이름(名)은 ‘이다’다, 성(姓)이 ‘황’이고.
 나도 안다.
 내 이름이 구린 거.
 
 태어났을 때는 ‘정이다’였다.
 어머니가 재혼하시면서 성(姓)이 바뀌었다.
 원래 이름도 놀려먹기 좋은 이름이었다.
 그래도 지금보다 사운드는 나았는데···
 이로울 利(이)에 많을 多(다),
 황이다,
 나는 대한민국 판사다.
 
 
 【001화 – 관종판사】
 
 
 ‘뭐지? 이 파란 거는?’
 
 그날은 좀 이상했다. 아침부터 눈앞에 이상한 게 보이고.
 아무튼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억울하면 살짝 흥분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평상시에는 잘 안 그러는데···
 그 사건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폭발해버렸다.
 
 “요새 판사들 존나 병신같애. 무슨 판결을 이따구로 내리냐.”
 “왜? 왜?”
 “고구마 다섯 개 훔쳤다고 70세 할아버지한테 징역을 때렸대.”
 “미친 거 아니야? 아, 진짜 판사들 왜 그러냐? 정말 사이코들 같아.”
 
 감히 말하건대 대한민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빡세게 일하는 공무원은 단연코 대한민국 판사다.
 대한민국 판사 1명이 연간 평균 464건의 사건을 담당한다.
 이는 우리보다 인구수가 두 배 반이나 많은 일본의 약 3.05배에 달하는 숫자이고, 인구 8,000만이 넘는 독일보다는 약 5.17배, 인구 6,000만이 넘는 프랑스보다는 약 2.36배에 달하는 수다.
 미국 연방법원 판사가 보통 연 200건의 사건을 처리한다고 하니, 소송의 천국 미국하고 비교해도 우리가 훨씬 더 빡세다.
 
 연간 464건이면 평일 기준 하루 1.86건의 사건을 처리해야지 나올 수 있는 숫자이다.
 최소 두세 번의 재판기일을 열고,
 수백 장에서 수천 장이 되는 소송기록을 읽고,
 적게는 대여섯 장에서, 많게는 수십 장에 달하는 판결문을 써야 하나의 사건이 끝이 난다.
 그렇게 매일 약 두 건씩 판결해야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이라는 말이다.
 휴가? 그건 종말이 왔을 때나 쓸 수 있는 거다.
 
 「느려도 너무 느린 법원 -한경닷컴-」
 「법은 주먹보다 느리다 –한국기자협회-」
 「‘5분 재판’ 이대로 괜찮은가요? -경향신문-」
 
 판사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재판일이고 다른 하루는 조정일이고 나머지 삼일은 판결문을 쓴다.
 사실, 요새는 기일을 이틀씩 잡아야 하는 주도 있다.
 즉, 일주일에 하루 있는 재판일에 심리를 들어야 하는 사건이 9~10건씩 된다는 뜻이다.
 
 연간 464건은 판사 전체를 두고 평균을 낸 숫자이다.
 수도권 1심 법원 판사의 경우 연 500~600건이 넘어간다.
 지난주에 2시간짜리 증인신문이 있어서 이번 주에 사건이 몰리면, 심리해야 하는 수가 20~30건일 때도 있다.
 
 우리도 더 빨리하고 싶다.
 우리도 시간을 더 드리고 싶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뭐? 판사 정원 수 늘려달라고?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거냐고?
 아니다. (아, 물론 그래 주면 진짜 고맙겠지만,) 그 얘기를 하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그날의 일을 해명하려다 보니까 나온 말이다.
 
 “이러니까 판사들더러 또라이라고 하는 거야. 살해하고 암매장까지 했는데 3년 때리고, 술 먹고 한 일이라서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정말 내가 판결을 내려도 이것보다는 잘하겠다. 뉴스도 안 보나? 국민들이 열받아 하는 걸 몰라. 존나 병신들이야.”
 “원래 공부만 한 애들이 다른 사람하고 잘 공감 못하고 그러잖아. 고집만 존나 세고, 제 잘난 맛에 살고. AI가 나오면 판사부터 갈아야할 것 같지 않아, 오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70세 먹은 할아버지가 배고파서 고구마 몇 개 훔쳤다고서니 징역을 때리냐. 지는 애비, 애미도 없냐? 씨발.”
 
 요새 하도 이곳저곳에서 판사 욕들을 해서 제법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커플이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신 우리 홀어머니까지 들먹이며 욕을 하니 순간 속에서 훅 치고 올라왔다.
 
 “저기요.”
 “네?”
 “그거 잘 모르셔서 그러는 건데, 그 할아버지가 절도 전과 18범이에요. 이번에는 폭력 혐의도 있었고. 그전에도 자꾸 물건들을 가져가서 이웃들이 그러지 말라고 경고를 몇 번이나 줬는데도 계속 반복돼서 법원까지 오시게 된 거고요. 징역도 30일이었어요.”
 
 기자들이 쓰기 좋은 판결이었다는 거 안다. 사실관계 몇 개만 누락하면 쌍욕 박으면서 클릭하고 싶은 기삿거리가 나올 만한 건이었다.
 그렇지만, 전체 기사를 읽은 거도 아니고 인스타 용으로 누가 짜깁기한 몇 줄 달랑 읽어 놓고 남의 어머니, 아버지를 찾는 건 참기 어려웠다.
 
 “아저씨 누구세요?”
 “그 사건 판결한 사람이요.”
 “네?”
 
 여기까지였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사법부에 불신이 많으신 그 젊은 친구들은 한마디를 더 해야 했다.
 
 “뭐래.”
 “제가 그 사건 심리하고 판결 내린 사람이라고요.”
 “진짜요?”
 “네.”
 “아- 그러면 좀 똑바로 하시지···.”
 
 ‘그러면 좀 똑바로 하시지?’ 하아아-
 
 거기서 폭발했다.
 그냥 멋쩍어하면서 자리를 떠주기만 했어도 그냥 거기서 끝냈을 텐데···.
 
 “뭐라고 이 새끼야?”
 “에? 지금 나한테 새끼라고 했어요?”
 “그랬다. 왜? 야, 누가 뭘 보고 올린 지도 모르는 그런 피드나 보는 주제에 뭐? 니가 더 판결을 잘해? 그럼 공부해서 판사 되지 그랬냐?”
 “뭐야, 이 사람? 진짜, 왜 이래.”
 “소시오패스? 사이코? 야, 너나 법 지키며 살아. 짝퉁이나 입는 주제에.”
 “뭐라고요?! 이거 짝퉁 아니거든요!”
 “짝퉁 맞거든요. 내가 저번 주에 이런 짝퉁 만드는 사람 사건 해서 알거든요.”
 “아- 진짜 뭐야- 재수 없어. 아저씨 판사 맞아요?”
 “그래, 맞다! 서울중앙지법 합의64부, 황이다 판사. 확인해 봐. 전화번호 알려줘? 02-530······.”
 
 아무리 화가 났어도 거기까지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
 관등성명을 대고 전화번호를 말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카페 안에 있었던 다른 손님들이 진작에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
 
 
 며칠 뒤,
 한국대학병원, 신경외과.
 
 “사진도 괜찮고, 검사 결과 나온 것도 좋고. 아무런 문제 없는데.”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석 달 전, 머리가 깨졌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뒤에서 벽돌로 내리쳤다.
 그걸 맞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머리뼈도 아작나고 피도 많이 흘렸던 모양이었는데, 다행히 뇌는 멀쩡했다. (적어도 검사 결과상으로는.)
 
 “괜찮은 놈이 왜 그랬냐? 흥흥.”
 
 며칠 전, 법원 근처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올해는 무슨 살(煞)이라도 낀 모양이다. 석 달 만에 또 뉴스에 나고···.
 
 “한가해? 됐고, 나 눈이나 좀 봐줘.”
 “눈은 왜?”
 “파란 창 같은 게 보이는데 이게 혹시 후유증인가 해서.”
 “파란 창? 가까이 좀 와 봐. 눈 좀 크게 뜨고.”
 
 조금 전까지 장난을 치던 강찬이 형은 가운 포켓에서 펜 라이트를 꺼내 내 눈을 검진했다. 언제 바뀌었는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다.
 
 “위 좀 볼래. 이번에는 왼쪽. 아래쪽. 마지막, 오른쪽. 흠-.”
 “왜? 뭐가 있어?”
 “아니, 괜찮아 보이는데. 안과 검진 한번 받아볼래?”
 “됐어. 그 정도는 아니야.”
 “파란 창이 보인다며?”
 “보였다 말았다 해.”
 “완전히 파란 거야? 아니면 그냥 퍼렇게 뿌연 거야? 이거 무슨 색이야?”
 “빨간색.”
 “이건?”
 “녹색. 아, 그만 해. 색은 다 보여.”
 “그래도 눈 검사 한번 받아보자. 사진에서는 안 나왔어도 신경이 손상돼서 색각 이상 증상이 나오기도 하니까. 인간의 뇌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아닐 때가 있어.”
 “됐어. 더 심각해지면 그때 받을게.”
 “너 할 일도 없잖아. 그냥 받아. 목요일 시간 어때?”
 “안 돼. 내일부터 출근이야.”
 “출근? 벌써?”
 “벌써는 무슨··· 석 달을 쉬었는데.”
 “아- 그렇구나. 출근하는구나. 하긴 멀쩡한데, 가서 재판해야지. 사이코도 아닌데. 안 그러냐? 홍홍홍.”
 
 또다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저렇게 최수종처럼 웃을 때는 한 대 쥐어박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동생이었으면 이미 때렸다.
 
 “한가하구나. 나 간다.”
 “야, 사인 한 장 해 주고 가. 우리 병원 간호사 중에 너 팬도 있더라. 팔로우하면 맞팔 좀 해줘. 알았지?”
 “뭔 소리야. 나 인스타 안 하는데.”
 “진짜? 그럼 그건 뭐야?”
 “뭐가 뭐야?”
 “‘관종판사’ 네 계정 아니야? 유튜브도 있다고 하던데. 윤 간호사가 보여줬어. 네 사진이던데. 너 아니야?”
 “아니거든요. 나 SNS 안 하거든요.”
 
 라고 말하고 나가려는데, 강찬이 형이 자신의 휴대폰에서 ‘관종판사’ 인스타 계정을 띄워 보여준다.
 
 “어? 뭐지?”
 “맞지, 너?”
 
 나다. 분명 내 사진이다.
 근데 나는 계정을 만든 적이 없다. 마취 상태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면.
 
 “이거, 뭐야. 이거 내가 한 거 아니야.”
 “그래? 그럼 누가 도용했나 본데. 야, 근데, 장난 아니다. 너 벌써 팔로워가 천 명이야. 내가 아는 누나는 십 년째, 백 명을 못 채우고 있는데.”
 “내 거 아니라니까.”
 “아니, 그니까. 누가 만들었든 간에 너의 이 멋진 동영상이 올라간 이 계정에 팔로워가 벌써 천 명이라고. 홍홍홍-”
 
 ‘누가 날 사칭하지?’
 이상했다. 고작 이런 동영상 하나 올라왔다고 사칭 계정까지 만들 것 같지는 않은데···.
 더 이상한 거는 프로필 사진이었다. 최근에 찍은 사진이다, 어디에도 올린 적이 없는.
 
 병원을 나온 나는 벤치에 앉아 폭풍 검색을 했다.
 
 「관종판사」
 
 강찬이 형의 말대로 인스타뿐만이 아니라 유튜브, 틱톡 등 모든 곳에 똑같은 계정이 만들어져있었고, 그날의 그 동영상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pan.sa_ida
 관종판사
 서울중앙지법 판사
 협찬, 리뷰, 광고 사절.」
 
 인스타: 1k 팔로워
 틱톡: 831 팔로워
 유튜브: 구독자 1천
 ···
 
 그 영상 이외에는 없다.
 
 “뭐지? 진짜 사칭인가?”
 
 ‘판사를?’
 
 사칭은 그렇다 쳐도 프사가 진짜 이상하다.
 며칠 전 찍은 셀카를 어떻게 올린 걸까?
 
 ‘해킹?’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다.
 이쪽으로 잘 아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마음먹고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좋아요’ 1K를 달성하였습니다. <진실의 눈>을 개안합니다.」
 
 “뭐야, 이건 또?”
 
 반투명 파란색 창에 첫 메시지가 떴다.
 
 그렇게 상태창이 구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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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소설은 허구입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에 언급된 혹은 묘사된 인물, 기관, 단체, 지명, 제품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입니다. 또한, 작품에서 명시된 법률 조항이나 원칙 역시 실제와 다를 수 있으므로, 법률 자문이 필요하신 분들은 변호사를 찾으시길 권장합니다.」

댓글(85)

말군하눌    
전세계는 아닐걸요. 예를 들어 인도 델리고등법원은 계류중 사건 처리 하는데 4백년은 지나야 할 꺼라는 코트라 보고서도 있을 정도로 배당사건이 많다죠.
2023.03.28 14:27
두드링    
재밌어요. 이번에도 기대할게요.
2023.03.31 14:41
number8540    
아왜이래요?뭔뜬금없이 상태창?그냥 정상적인법정물도 잘쓰시면서 갑자기뭔상태장입니까?소설이. 만화가되잖아요.두세편에한번씩 꼭 이상한걸쓰시네
2023.03.31 17:45
iwish06    
흥미진진!!! 기대됩니다~~~
2023.03.31 18:07
아몰라랑    
변호사라면 몰라도 판사가 관종이면 매우 곤란할 텐데...
2023.03.31 22:03
퍼플헤이즈    
시작이 좋네요 이번 작품도 달려봅니다~
2023.04.01 16:39
huks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2023.04.01 22:49
묘한인연    
띄어//띄워
2023.04.11 08:38
올펜    
판사 밑에서 일하는 법원 직원들 많습니다. 웬만한 건 다 그 사람들이 하죠
2023.04.11 18:03
헤카푸    
울나라 판사는 수레기가 맞다
2023.04.12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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