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다가 눈을 떠보니 드래곤이 있었다.
그것도 내 코앞에.
"......"
[그르르릉...]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드래곤이었다.
붉고 육중한 몸집.
샛노란 눈.
흔들리는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거대한 날개ㅡ
표현에 조금 생동감을 추가하자면 입맛을 다시는 혀와 뚝뚝 떨어지는 침 정도도 추가할 수 있겠다.
글쎄,
아무리 봐도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하며 명함을 내밀 것 같은 태도는 아니었다.
'후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심인가.'
이젠 아예 하다하다 배고픈 도마뱀 앞으로 보내놓는 건가ㅡ
하지만 불평을 토할 새는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드래곤은 웰던 쪽이 취향이었는지 그대로 입에 한가득 불을 머금기 시작했으니까.
'이런 망할ㅡ'
채 욕지거리를 마무리할 새도 없이 불길이 쏟아졌다.
나는 죽었다.
ㅡ뭐, 늘 그렇듯이.
#001. 때려치우다
"야, 너 진짜 연기 그만둘 거냐?"
<지호 연기학원>의 원장 홍지호가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그렇게 물어온 건 어느 금요일 저녁의 일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학원을 그만두기 위해 제출한 퇴원신청서를 받아든 직후의 일이다.
생각했던 이상으로 놀란 표정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요, 좋은 인재 한 명 나간다고 하니 괜히 아쉬워져서 그러십니까?"
"지랄도 풍년이다."
헛웃음이 돌아왔다.
농으로 한 소리에 돌아온 반응치고는 실로 차디차기 그지없었다.
"야, 강민. 나는 살다살다 너만큼 연기에 재능이 없는 놈을 본 적이 없어. 하물며 노력을 죽어라 하는데도."
"으음."
"솔직히 말할까? 나는 요즈음 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너를 곱게 말해서 내보낼지만 고민했었다. 지금도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을 정도라고."
"거 기왕 그만두는 마당에 말씀이나 좀 곱게 하시면 어디 덧납니까."
하지만 그런 매정한 반응에도 나는 볼멘소리나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이 바닥에서 7년 가까이 제대로 된 배역 한번 못 따본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내가 재능이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할 수 있게 된 게 다행일 정도로.
하지만 내가 입맛만 다시는 사이에도 홍지호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이상하네."
"뭐가요."
"원래 이렇게 연기 가지고 뭐라고 하면 너 엄청 지랄했었잖냐."
"...지랄까지는 아니죠."
"뭐라는 거야.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기 때려치느니 차라리 대본 품고 노숙자로 죽겠다고 바락바락 외치던 거 잊었냐?"
"으음."
뭐, 불행히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과거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연기가 내 인생의 전부이고, 그만두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으니까.
철이 들 무렵부터 연기 하나만 보고 살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착각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를 생각해서 조언하는 지인들에게도 쉼없이 날을 세웠고, 수없는 사람들과 수없는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불과 몇 달이 지난 지금, 나는 퇴원서를 들고 홍 원장의 앞에 서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법 놀라운 변화였다.
"너 같은 고집불통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죽을 때까지 직진만 할 거 같더니만."
불가해한 얼굴의 홍지호에게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한 삼백 번쯤 죽어보면 포기하게도 되더라고요."
"...?"
뭔 개소리냐는 표정에 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글쎄.
차라리 개소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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