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하북팽가 망나니는 즐겁다

000. 무덤 위의 호랑이

2023.04.05 조회 25,076 추천 384


 다기 위로 따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그거, 용정 아니야? 얼마 안 남았다고 신줏단지처럼 아끼더니.”
 
 세상이 망하기 전에도 상등품은 같은 무게의 금과 거래되던 귀한 차가 용정이다.
 
 하물며 당금의 시국에서는 금은이 있어도 물건이 없으니 그 가치를 말해 무엇 할까.
 
 “이걸 남기고 죽으면 너무 아까우니까요.”
 
 “그건 그렇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술이나 좀 꿍쳐둘걸.”
 
 입맛을 다시는 팽무혁에게 제갈서아가 차를 쪼르륵 따라서 건네주었다.
 
 “오, 나도 주는 거야?”
 
 “마지막으로 목을 축이기에는 차도 나쁘지 않죠.”
 
 “잘 마실게.”
 
 팽무혁은 호의를 마다하지 않고 찻잔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건네주는 것이라면 의심부터 하고보았겠지만 제갈서아만큼은 예외였다.
 
 단심맹의 제2군사인 그가 제1군사인 제갈서아를 의심한다면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 테니.
 
 제갈서아는 뜨끈한 차를 단숨에 들이키는 팽무혁을 흘깃 보고 만족스러움이 드러나는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소름끼치게 웃고 그래?”
 
 “생각을 많이 했어요.”
 
 “너 생각 많은 건 나도 잘 알지. 그런데 이제 시간이 얼마 없거든? 빨리 본론부터 말해.”
 
 “제가 아니라, 당신이 돌아가는 편이 더 좋을 거란 말이죠.”
 
 “뭐? 그게 무슨...”
 
 순간 팽무혁은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는 감각에 몸을 휘청거렸다.
 
 독인가? 하지만 그 제갈서아가, 이제 와서 배신을?
 
 “돌아가도 저는 제갈세가의 쥐새끼에 불과하겠죠. 무엇보다 중원 각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에 개입하기에는 조건이 너무 안 좋아요. 저뿐만 아니라, 당신을 제외한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에요.”
 
 “도대체 무슨 말을...!”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서, 많은 동지들이 아쉬워했죠. 당신이 황실 연회에서 단전을 다치지만 않았어도... 그래요. 우리에게 제일 절실한 절대 고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당신뿐이죠. 단전만 멀쩡하다면요.”
 
 제갈서아는 자신의 찻잔에 무언가를 넣고 차를 쪼르륵 따른 후 입술을 축이며 담담한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팽가의 게으름뱅이, 나태한 천재. 그렇지만 하면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이에요. 그리고 우리 중에 입지도 당신이 제일 괜찮았잖아요?”
 
 비길 바 없는 재능을 가진 천재, 팽가의 소가주 후보, 혼맥으로 얽힌 고귀한 혈맥의 자손. 그래서 팽무혁 당신이라고 제갈서아는 산뜻하게 말했다.
 
 “그때의 당신은 저랑 다르게... 손을 뻗기만 하면 도움을 줄 사람도 많으니까요.”
 
 찻잔을 비운 제갈서아의 눈빛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동시에 그녀의 입가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 설마 그거...!”
 
 “걱정마세요. 이건 제 선택이니. 잡혀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하지만 미안하긴 하네요. 당신은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하니... 부디, 고생해주세요.”
 
 말을 마친 제갈서아는 몇 번 울컥거리며 시커먼 사혈을 토해내더니 하얀 머리카락을 출렁이며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무혁은 쓰러진 그녀에게 팔을 뻗으려다가, 균형을 잃고 제갈서아 위로 마치 이불처럼 포개어졌다.
 
 신체의 감각은 이미 아득히 멀어져 다시 일어서기는커녕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뜻...’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팽무혁은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의식을 잃었다.
 
 전각 안의 제갈서아와 팽무혁의 숨결이 멎어가는 동안, 전각 밖으로는 마인들이 속속히 도착하여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긴가! 와룡과 총호가 있는 곳이!”
 
 “전각 안의 인기척 둘, 확인 마쳤습니다.”
 
 “지청술로 지하 30장까지 확인했습니다. 비밀통로도 없습니다.”
 
 보고를 모두 들은 추살대의 조장은 섬뜩한 눈빛을 번뜩이며 휘하의 마인들에게 명령했다.
 
 “좋다. 불을 붙이고, 아무도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해라! 오늘이 그 둘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단전을 잃은 쭉정이와 하반신 불수의 계집일 뿐입니다. 그냥 들어가서 죽이는 것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퍼억!!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수하의 뺨을 후려갈긴 추살대 조장은 이를 빠득 갈며 소리쳤다.
 
 “저 놈년들의 계략으로 죽은 얼간이들이 몇인데, 아직도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새끼가 있냔 말이다! 방심하지 말고, 빨리 불 붙여!”
 
 우두머리의 분노에 마인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전각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각을 잡아먹으며 검은 연기를 피어 올렸다.
 
 그때 전각 안에서, 마지막 숨결을 내뱉은 무혁의 몸뚱이가 은은히 빛나더니-
 
 세상이 멈췄다.
 
 그리고 마치 시간이 감기는 것처럼,
 모든 것이 거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역천(逆天)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괴사가 끝났을 때.
 
 하북팽가의 별채에서 팽무혁이 다시 눈을 떴다.
 
 ***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댓글(15)

학교    
잘 보겠습니다.
2023.05.01 13:00
[탈퇴계정]    
다음 화로 가겠습니다. 좋네요.
2023.05.02 12:06
의영    
지하30장이면 90미터..
2023.05.04 02:14
musado0105    
잘 보고 갑니다. 건 필 하세요^^*
2023.05.09 14:18
ck*****    
지하 30장이라니 술법 같은걸 쓴건가?
2023.05.10 10:39
난하임    
수스
2023.05.12 12:20
대구호랑이    
잘보고 갑니다~^^
2023.05.13 17:12
반민초장    
정실은 제갈이다.
2023.05.13 21:10
도수부    
건필입니다
2023.05.20 16:30
정리왕    
괜찮은데요..
2023.05.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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