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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23.05.03 조회 2,150 추천 17


 “그 녀석은 잘 도착했으려나 모르겠네.”
 “잘 도착하셨을 겁니다.”
 “빌어먹을 놈, 친구 하나 있는 게 도움이 안 돼요. 떠나려면 그냥 떠나든가 왜 검을 놓고 가서는······ 쯧.”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그분의 마음일 겁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폐하를 위해서라 사료됩니다.”
 
 이제 대륙의 패자가 된 타일러스의 황제, 아드리안 타일러스가 따분한 표정으로 와인을 홀짝였다.
 지독하던 전쟁.
 광신도처럼 팔다리가 잘려도 기를 쓰고 달려들던 적들이 생각났다.
 
 “영악한 늙은이. 신만 찾는 다른 멍청한 자들과는 다르게 그 인간은 여전히 똑똑하다니까.”
 “교황의 자리에 오른 건, 단순히 운이 아니라는 증거일 겁니다. 비록 전쟁은 끝났으나, 아직 안심하긴 이릅니다.”
 
 황제의 옆에 선 이가 씁쓸한 표정을 드러냈다.
 루 신성 황국을 다스리는 교황은 지독하리만큼 영악했다.
 쉰이 넘는 나이에도 그는 절대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왜?
 그가 물러나는 순간, 루 신성 황국은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질 테니까.
 
 “신성 황국 측에도 참 인재가 없지 않나? 늙은이가 어떻게든 쓰러져가는 나라를 지키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시원하네.”
 
 루테인 협곡에서 일어난 마지막 전쟁.
 그 승자는 타일러스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타일러스 측에서도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 전쟁이다.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검, 이안 카일러스가 실종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제국 최고의 집단 특무대 역시 먼지처럼 사라졌다.
 
 “라이카 대공을 실각시켜야 합니다, 폐하.”
 “팔다리를 모조리 잘라내야지. 비록 이안은 떠났지만, 그가 남겨 두고 간 유산은 남아 있으니까.”
 “폐하라면 잘 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드리안이 마지막으로 본 이안 카일러스와 대화를 회상했다.
 
 ***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난 떠날 생각이다, 아드리안.”
 
 루테인 협곡으로 출전하기 전 찾아온 이안 카일러스가 담담하게 통보를 전했다.
 떠나겠다는 말에 아드리안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네가 떠나면 특무대는 살아남기 힘들 텐데?”
 “안다. 네 녀석의 성격상 굳이 내가 없는 특무대를 지키려 하지 않겠지.”
 “날 너무 잘 아는 거 아닌가?”
 “라이카 대공이 내가 사라지자마자 기를 쓰고 제거하려 하겠지. 세로스는 걱정하진 않지만, 다른 녀석들은 견뎌낼 수 없을 테니까.”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의 가장 높은 곳.
 그의 집무실 창가를 바라보던 이안 카일러스가 한숨을 드러냈다.
 그의 정적이자, 황제의 숙부인 라이카 대공은 야망이 있는 자였다.
 만약 이안 카일러스가 아드리안을 황제로 옹립하지 못했다면, 직접 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터.
 다행히 제국의 기사들은 이안 카일러스를 전폭적으로 따랐다.
 제국의 모든 기사들의 스승.
 그의 말 한마디로 움직일 수 있는 기사들의 숫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제국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그만큼이나 엄청났다.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
 
 “그냥 남으면 안 되겠냐?”
 “내가 남게 된다면, 네 권위가 떨어지게 될 텐데?”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지. 검의 인도자를 잡기 위해서라면 말이야.”
 “이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특무대 애들이 마음에 걸려 이곳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사이 가문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고.”
 
 그가 북쪽을 바라보며 걱정이 가득 담긴 시선을 드러냈다.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던 감정.
 그는 신성 황국에선 하얀 악마라 불리었지만, 제국 기사들에겐 검의 인도자 말고 다른 별명으로도 불렸다.
 
 “냉혈한 녀석.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키운 특무대들이 죽어 나갈 때도 단 한 번도 넌 슬퍼하지 않았지.”
 
 이곳은 이안 카일러스의 고향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조국도 아니었다.
 지난 14년 동안 자리를 지켜 온 이유는 전대 황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라이카 대공을 누르고 아드리안을 황제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국에 남아 달라는 그 부탁을 저버리기 힘들었다.
 
 “기사로서 전장에서 죽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내가 슬퍼하면 그들의 명예가 떨어지게 되겠지.”
 “특무대 녀석들은 알까? 진즉에 떠나려 했던 놈이 자신들 때문에 남았다는 걸.”
 
 4년 전 그에게 전해진 소문 하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사실이라 밝혀지는 순간, 그는 모든 지위를 버리고 떠나고자 했다.
 
 “모르겠지. 알아서 좋을 것도 없다.”
 “그래, 말하지 않으마. 그건 그렇고, 내게 부탁하는 건 좋은데 말이야. 내가 검의 인도자가 다른 나라로 떠나는 걸 보고만 있을 것 같아?”
 “보고만 있진 않겠지. 조건을 말해.”
 
 아드리안 황제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애초에 이 같은 통보를 하는 것도 그와의 거래를 위해서다.
 
 “아무튼 친구에게도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어요.”
 “아드리안.”
 
 중후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안다.
 더는 그를 잡지 못한다는 것.
 
 “내 조건은 타일러스 제국의 부름에 응할 것. 한 번 정도면 되겠지.”
 “······이 전투가 끝나면, 나와 특무대는 공식적으로 실종되었다고 발표해야 할 텐데?”
 “상관없어. 어차피 당장 자네가 필요할 정도로 타일러스 제국의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니까.”
 
 14년 동안 수 없는 인재들을 잃었다.
 하지만 또 14년 동안 걸출한 인재들이 남았다.
 이는 모두 이안 카일러스 덕분이다.
 그가 키워 낸 제자들은 이제 제국의 중추가 되어 활동하는 중이니까.
 제국 8검이라 불리는 기사 중, 그에게 검을 배운 자들이 무려 세 명이었다.
 특무대 부단장인 세로스가 그를 따라 떠나면 두 명만 남게 되겠지만, 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라이카 대공에게 줄을 선 8검은 단 두 명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모두 황제인 아드리안을 따랐다.
 
 “받아들이마.”
 “고민 좀 하고 승낙하면 안 되나?”
 “네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은 황제라는 걸 아는데 굳이?”
 “황제에게 멍청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니. 쯧······.”
 “황제 모독죄로 내 목이라도 원하나?”
 “애초에 그런 꿈은 꾸지도 못하네요, 이 친구야.”
 
 애초에 그런 어리석은 상상을 하지도 않는다.
 이안 카일러스를 잡기 위해선 꽤나 큰 전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나려는 마당에 굳이 국력을 소모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러니 실상 아드리안 황제가 이안 카일러스를 고이 놔주는 건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이안 카일러스를 잡으려고 한다면, 지금껏 쌓아온 모든 유대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잘못하다간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종종 연락이나 해라. 황제의 이름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요청하고. 그리고 살아남는다면 아론을 보내 생사 여부나 알려줘.”
 “그러지.”
 
 짧게 답한 이안 카일러스를 보며 웃던 황제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다른 나라인 것만 알지 네 고향이 어디인지, 본명이 뭔지도 모르는군. 떠날 때 떠나더라도 그 정도는 알려 주지 그래.”
 “내가 떠나는 데 필요한 조건 중 하나인가?”
 “······진짜 정 없기는.”
 
 황제가 고개를 젓자 이안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게 감시받기는 싫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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