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환생
만약 당신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한다면.
이번 인생에선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부와 권력을 양손에 쥔 재벌 3세?
절세미인과 결혼한 행운아?
혹은 조각 같은 미남으로 태어나 연예계를 당신의 발아래에 두고 싶은가?
그도 아니라면 베토벤, 아인슈타인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길 천재로 태어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뭐든지 원하는 바를 말해 보아라.
이곳은 명부(冥府).
하나의 삶이 끝난 중생이 전생의 업보에 따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장소.
무엇을 소망하든, 자네는 그것을 이룰 수 있을······.
“키 20cm만 키워 주십쇼.”
······?
······응?
“키 20cm만 키워 달라니까요.”
······정말로?
진심으로 그런 걸 소망한다는 건가?
자네는 이전 삶에서 작게는 수백 명의 인명을 구했고, 크게는 여러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구하는 막대한 선업을 쌓았다.
그 선업의 크기는 자네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극락정토로 향할 수 있을 정도지.
하나 자네가 그토록 현세에 남길 원하니, 명부의 왕인 내가 친히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대는 뭐든지 될 수 있다.
원한다면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도······.
“아따, 영감님.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그딴 건 됐으니까 키만 지금보다 20cm 더 키워 달라고요. 20cm, 0.2미터, 미국식으론 8인치. 오케이?”
“······.”
이 당돌한 중생을 어찌해야 할까.
염라는 건방지게도 팔짱에 짝다리를 짚고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내의 모습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감히 저승의 왕 앞에서 이리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작금의 상황은 방금 막 목숨을 잃고 저승으로 끌려온 김시온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울화통이 터지는 시추에이션이었다.
“시발.”
그는 경력 18년 차 베테랑 농구선수로, 한국의 KBL은 물론이고 스페인, 프랑스, 터키, 러시아, 세르비아 등 유럽 리그에서 혁혁한 활약을 펼친 한국 농구의 전설이었다.
평생의 염원이었던 NBA 진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충분히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다고 자평할 수 있을 정도.
은퇴를 앞둔 올해는 스페인에서 전지훈련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중이었다.
‘그때 못 본 척했어야 하는 건데.’
비행기 안에서 행색이 수상해 보이는 놈을 발견한 게 모든 것의 화근이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품속의 무언가를 만지작대길래 급똥이라도 마렵나 싶어 친절하게 말을 건넸는데.
돌아온 건 퍽! 하는 둔탁한 소리.
그 직후 복부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그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저승이었다.
‘이 할아범은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윤회라는 건 또 뭐고? 나라를 구했다는 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데?’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옛날 사극에나 나올 법한 노인이 새 인생을 살게 해 줄 테니 소원을 말해 보란다.
‘보아하니 그 선업이라는 게 날 담근 새끼랑 연관이 깊은 것 같은데······.’
정황상 비행기 납치라도 벌이려던 게 아닐까.
21세기에 한국 공해에서 겁 없이 비행기 하이재킹을 벌일 만한 세력과 여러 나라를 끔찍한 위기에서 구했다는 염라대왕의 말을 종합해 보면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지지만······.
‘알 게 뭐냐.’
그가 싸늘한 주검이 된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요약하면 제가 되살아날 방법은 없단 소리잖습니까?”
“그렇다.”
“죽기 직전의 순간으로 돌려보내 줄 수도 없고?”
“그것도 안 되지.”
“과거로 회귀하는 것도 안 되고요?”
“그것도 불가능하니라. 명계의 지엄한 법도는 시간의 역행을 허락하지 않으니.”
“아이씨. 되는 게 뭡니까 그러면?”
“이곳과 한없이 유사한 평행세계에서 다시 살아가게 해 줄 수는 있느니라. 세세한 차이점은 있을지 몰라도 이전의 삶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야.”
“······.”
김시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것저것 떠오르는 건 많았지만, 역시 자신의 소망은 언제나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럼 지금의 제 인생에서 키만 더 키워 주십쇼. 다른 건 무엇 하나 건드리지 말고요.”
염라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키가 크길 바란다면 그냥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면 될 일 아니더냐? 네 소원이 위대한 농구선수가 되는 것이라면 미국에서 태어나게 해 줄 수도 있다. 원한다면 마이클 어쩌고, 르브론 어쩌고 하는 선수들보다 훨씬 우월한 신체를 갖고 태어나게 해 줄 수도 있어.”
“그딴 건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왜?”
“그러면 도전하는 맛이 없잖습니까.”
김시온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제 선수 시절 신조가 아무리 후달려도 절대 약물엔 손대지 말자는 거였습니다. 혼자 무적 치트키 치고서 게임하면 뭐 합니까? 재미가 없는데요.”
“······.”
“키를 키워 달라는 건 그게 제 평생의 한이었으니까 부탁드린 거고, 그 외엔 뭐 하나 바꿀 생각 없습니다. 전생 특전은 그거 하나면 충분해요.”
만 20세의 나이.
KBL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지명이 확정적인 상황에서.
현실에 안주하기보단 도전을 선택하겠다며 야심차게 미국으로 향한 김시온의 NBA 도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아시아의 농구 변방국에서 온, 아직 무엇 하나 증명한 게 없는 183cm의 단신 포인트 가드를 흔쾌히 지명할 팀은 NBA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G리그에서 2년간 눈물에 젖은 빵을 먹고.
유럽 리그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결국 NBA는 끝까지 문턱조차 밟아 보지 못했다.
“그놈의 NBA가 뭐라고.”
리그마다 수준 차이가 나는 건 어느 스포츠 종목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농구는 특히나 그 격차가 심한 종목이다.
한번 NBA 무대를 밟는 데 실패한 선수는 두 번 다시 2류 선수 딱지를 벗지 못할 정도로.
실패자.
김시온이 평생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노력이 모자라서 실패한 거라면 납득할 수 있습니다. 재능이 부족한 것도 괜찮아요. 뭐, 농구에선 키가 곧 최고의 재능이기는 한데······.”
김시온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난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고 싶은 겁니다. 그놈의 빌어먹을 키만 좀 더 컸더라면요. 뭐, 평생 제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신 부모님을 놔두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 자식 노릇을 하기도 싫고요.”
“그것참 지극한 효성이로구나.”
“효자는 무슨 효잡니까. 손주 얼굴도 못 보여드리고 먼저 가 버린 불효자식 새끼지.”
“······.”
“마누라는 웬수도 없어지고 사망보험금까지 받아서 아주 입이 찢어지겠군요. 그만 갑시다. 더 있다가는 없던 미련도 생길 판이니.”
이전의 삶을 뒤로하고, 김시온은 칠흑처럼 어두컴컴한 강물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련도, 후회도.
이제는 모두 흘러간 과거의 일이었다.
***
1998년. 11월 11일.
서울 용산구의 모 아파트.
아파트 거실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아기 하나를 두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자, 그러면 오늘 돌잔치에 와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오늘의 주인공인 시온이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박수!”
짝짝짝짝!
“시온아! 생일 축하해!”
“아이고! 우리 막내가 언제 저렇게 컸냐!”
사회를 맡은 아기 아빠, 김지환의 신호에 일제히 물개박수를 치는 일가친척들.
오늘은 서흥 김씨 집안의 막냇손자인 김시온의 돌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
“꺄르르!”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리자 어른들의 입가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애가 너무 귀엽네요. 제수씨.”
“그러게. 나중에 커서 연예인 시켜도 되겠어.”
“감사해요. 아주버님, 형님.”
아기 엄마, 신미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잠시 후 이어진 행사는 돌잔치의 영원한 메인 이벤트.
돌잡이었다.
“자자. 과연 시온이는 뭘 잡을 것인가?”
“시온아! 연필! 연필!”
“청진기!”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아빠 따라 축구공을 잡아야지!”
“난 야구공에 한 표!”
“꼭 샅바를 골라야 한데이. 시온아!”
“어휴, 다들 애가 알아서 고르게 좀 놔둬요!”
신미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서흥 김씨는 3대째 이어지는 운동선수 집안이었다.
집안의 큰 어른인 할아버지는 소싯적 씨름 대회에서 무려 ‘살아 있는’ 황소를 우승 상품으로 받아 온 경상도 장사 출신이셨고.
그 피를 물려받은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스포츠맨의 길을 걸었다.
장남은 야구. 차남은 유도. 김지환은 축구.
‘어쩜 이리도 일관성이 없는지.’
가풍이 이렇다 보니, 김시온이 운동선수의 길을 걷길 바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꺄우?”
하지만 아기는 밥상에 놓인 물건에는 관심이 없는지 방석을 기어 내려가더니.
덥썩!
“······응?”
바닥에 굴러다니던 TV 리모컨을 붙잡고는 제멋대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그리고 TV 화면에 떠오르는.
90년대 초반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모 스포츠 애니메이션.
[안 선생님······!]
[저, 농구가 하고 싶어요······.]
“꺄르륵! 꺄륵!”
어리벙벙한 얼굴이 된 어른들.
그러나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TV를 가리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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