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더블하트 [E](종료231129)

더블하트 1-1

2015.05.12 조회 432 추천 3


 프롤로그-세상에 우연은 없다!
 
 남자와 여자, 그 둘이 만나 사랑을 이루듯 인체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2개씩 짝 지어져 있다.
 눈은 2개.
 귀도 2개.
 팔도 2개.
 다리도 2개.
 콧구멍도 2개.
 고환도 두 쪽이며 신장도 2개다.
 여기까지 세어 보고 시간이 남는다면 목젖을 들여다보라. 그곳에도 2개의 동굴이 보일 것이다.
 아주 드물게 어떤 생명체는 2개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각기 성년이 되는 해의 자정, 만물이 잠든 시간에 달빛을 받으며 의식을 치른다. 그날 원래의 심장을 관통시키면 그 충격으로 인해 그때까지 잠자고 있던 다른 심장이 박동을 개시한다. 하나를 죽여 2개를 얻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사건을 의미한다. 2개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난 생명체에서 두 심장이 정상적으로 박동된다는 것은…….
 더블 하트는 알펜시아 대륙의 생명사에서 단 두 번 기록되어 있다. 고대 드래곤 로드이던 전설의 레드 드래곤 ‘플라삭스매니터’가 최초였고 8백여 년 전 인간의 진정한 대마법사 ‘고든 캘피아’가 더블 하트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신성에 가까운 더블 하트의 효과는 나이트 엘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나이트 엘프는 성년이 되는 생일날에 그에게 잠재된 힘이 명백하게 발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강인한 다리라든가, 민첩한 행동, 혹은 강력한 청력이라든가 하는… 그가 더블 하트가 아니라면 특이한 특기를 얻는 것으로 그친다.
 하지만 그가 더블 하트를 가졌다면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엘프들의 모든 기록서는 그렇게 전해져 내려왔다. 더블 하트의 축복을 받은 엘프의 성취는 무엇이건 두 배 이상의 위력을 나타낸다.
 물론 단점도 있다.
 더불어 삶의 무게도 두 배로 증가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1. 더블 하트
 
 “거기 세 놈!”
 기름진 거위 다리를 입에 문 용병이 말했다. 왼손에 들려진 술병에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술이 줄줄 흘러나왔다.
 “…….”
 호명받은 셋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 놈이라고 칭하기에는 좀 복잡한 모양새였다. 셋 중 둘은 최소한 인간이 아니었다.
 “오늘은 이 몸이, 기분이 죽이는구나. 거래처의 마법사님이 싱싱한 청춘이면 된다고 했으니까 네놈들끼리 결정할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 주시마.”
 용병은 병째로 술을 빨며 오만을 떨었다.
 “우어우어!”
 셋 중에서 가장 우람한 덩치가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불협화음을 토해 냈다. 그는 벙어리 드워프였다.
 “왜 이래? 차례로 따진다면 나야. 어제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내가 졌잖아?”
 드워프를 어깨로 밀치며 나선 것은 여자 오크였다. 오크치고는 상당히 인간에 근접한 근사한 몸매였다.
 “나 참! 이것들이 술 취했나? 그렇게도 서로들 먼저 뒈지고 싶다?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으냐? 정했으면 후딱 나와.”
 용병이 입술을 닦으며 오크의 팔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하지만 오크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미안하지만 내가 간다.”
 오크의 다른 팔목을 누군가 잡아챘다. 그는 인간이었다.
 “야스콘?”
 놀란 오크가 돌아보았다. 아직 미소년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탄탄한 체구의 야스콘이 풍성한 은발을 출렁이며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불만이 있으면 뽑아!”
 야스콘은 마른 풀잎 3개를 손에 쥐고 내밀었다.
 “2개는 짧고 하나는 길어. 긴 걸 뽑으면 가는 거다.”
 “어쭈구리! 꼴에 백기사를 자처한다 이거냐? 좋다. 5분 줄 테니까 빨리 결정해서 기어 나와.”
 용병은 감옥 문을 걷어차며 나갔다.
 드워프가 제일 먼저 풀잎을 뽑았다. ‘망할!’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짧았다.
 “……!”
 오크 역시 짧은 것을 뽑고 말았다.
 “그것 봐. 역시 오늘 차례는 나다.”
 야스콘은 둘을 밀치며 나섰다.
 “안 돼, 야스콘!”
 오크가 재빨리 길을 막아섰다.
 “제물로 잡혀 온 주제이니 어차피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비켜.”
 “안 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인데?”
 “네 생일! 너와 네 어머니 펠리아가 그토록 고대하던 열일곱 번째…….”
 “…….”
 오크의 말에 야스콘의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내가 갈게. 적어도 열일곱 자정의 달은 봐야 할 거 아냐?”
 “우어우어!”
 커다란 덩치의 드워프도 오크에게 동감을 표했다.
 “고맙지만 꿈은 깨졌어. 우리들의 축제 에버 피스(Ever-Peace)의 전야에… 어머니도 영주이신 아버지도 더없이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오크 최고의 전사인 네 아버지도…….”
 “야스콘.”
 “그러니 어서 비켜!”
 야스콘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해!”
 오크는 그렇게 말하며 다짜고짜 야스콘의 품에 안겼다.
 “……?”
 “미안해. 진심이야. 네가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아 성년이 되면 인간처럼 낭만적으로 고백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어.”
 “나쁘지 않군. 마지막 가는 길에 듣는 사랑 고백이라……. 인간의 고백이 아닌 게 좀 섭섭하긴 하지만 우리들의 프록시안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지.”
 뜻밖에도 야스콘은 오크에게 몸을 맡기며 그렇게 말했다.
 “야스콘.”
 오크의 시선이 따라 올라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해 보였다.
 “어울리지 않는다. 오크에겐 눈물이 없잖아?”
 야스콘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잘못하면 마지막이잖아? 한 번만 따뜻하게 안아줘. 내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야.”
 “…….”
 “야스콘.”
 야스콘이 주저하자 오크는 필사적으로 야스콘의 품을 비비고 들어왔다. 그녀는 야스콘의 품 안에서 파르르 떨었다.
 “이것들이 장난을 하나? 5분하고도 3초 지났다. 냉큼 기어 나오지 못해?”
 용병이 문을 걷어차며 으름장을 놓았다.
 “들었지? 이제 비켜.”
 야스콘의 손이 오크를 살며시 밀어냈다.
 “아! 크로네, 너 한 가지 약속해.”
 야스콘은 새처럼 떨고 있는 오크를 향해 말을 이었다.
 “뭘?”
 “만일 말이야, 내가 살아서 돌아오면 날 사랑한다는 말 따위는 두 번 다신 하지 않겠다고.”
 “야스콘…….”
 “빨리.”
 야스콘이 재촉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약속할게. 네가 살아서만 와 준다면 뭐든지…….”
 “그 이상은 필요 없어. 우리 셋은 영원한 친구니까. 우정에 사랑이 끼어들면 사랑도 우정도 다 망가지는 거 너도 알잖아?”
 “야스콘…….”
 오크의 얼굴에 애달픔이 스쳐 갔다.
 “너답지 않다. 그렇게 슬픈 표정 하지 마. 생일날은 축복받은 날이니까 혹시 기적이 생길지도 모르지. 하르카리오 님처럼 좋은 마법사라면 사정을 봐줄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 마법사는…….”
 대답하는 크로네의 목소리가 한없이 무거웠다.
 “됐어. 거기까지.”
 야스콘은 드워프의 울분에 찬 불협화음을 들으며 돌아섰다.
 “끄으으… 우으으…….”
 “이 망할 놈아! 우리 다시 태어나서 만나자. 그래서 그때는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 말자! 그거지, 타이켄?”
 야스콘은 소리를 내지 못해 몸서리를 치는 드워프를 향해 말했다.
 “우어우어!”
 드워프가 서럽게 불협화음을 토해 냈다.
 드워프 타이켄은 열세 살 때 약초를 잘못 먹어 벙어리가 되었다. 그건 명백히 야스콘의 실수였다.
 야스콘은 자유의 영지 프록시안의 영주이자 향기와 차의 마스터인 아버지 아스캄의 일을 배우던 중이었다. 향이 좋은 식물을 발견한 야스콘은 아버지를 놀래 주기 위해 차를 만들었다.
 “맛은 내 몫이다!”
 평소 시음가라고 자처하던 타이켄이 잔을 뺏어 들었다. 하지만 맛있다고 두 잔을 마시고 나더니 목을 안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그는 영영 목소리를 잃었다. 벙어리가 되고 만 것이다.
 “끄으으…….”
 “걱정 마. 대신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내가 만든 차는 마시지 마라. 알겠지?”
 야스콘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타이켄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풀썩 그 자리에 무너졌다. 야스콘이 가는 길은 마법의 제물로 바쳐지는 길이었다.
 “이 개자식들! 다 죽일 거야!”
 크로네가 찢어질 듯 소리치자 용병 하나가 돌아와 소드의 폼멜로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야스콘은 돌아보지 않았다.
 막 열일곱이 되는 야스콘. 며칠 전에 벌어진 악몽으로 가득 찬 그의 뇌리에는 발에 채워진 족쇄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흘 전 대륙 서쪽에 위치한 하이랜드에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대륙 3강의 하나로 꼽히는 레드 글로리안 용병단이 자유의 영지 프록시안을 덮친 것이다. 그 재앙의 밤은 아직도 야스콘의 뇌리에 생생한 피비린내로 각인되어 있다.
 에버 피스 데이!
 바로 그 전야였다. 평화를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모든 구성원이 모여 즐거운 축제를 이루는 프록시안. 그들은 그 축제를 통해 서로 다른 종족을 이해하는 법을 익히고 공동체임을 확인해 왔다.
 하지만 프록시안의 모든 평화와 행복은 그 밤에 송두리째 사라졌다. 위대한 나이트 엘프 전사였던 펠리아도, 그녀를 목숨처럼 사랑하던 아스캄도, 심지어는 야스콘의 사랑스러운 3명의 어린 동생들마저도.
 감옥을 나서서 마차에 태워진 야스콘은 은빛으로 출렁이는 초승달을 보았다.
 ‘어머니, 이렇게 열일곱 살의 달빛을 만났습니다.’
 희미한 달빛 속에 나이트 엘프인 어머니가 서려 왔다. 엘프의 위대한 전사로 온몸으로 용병의 습격을 막아 내던 그녀의 기억에 화악 피가 끓어올랐다.
 
 -놀라지 마렴. 만 열일곱이 되는 날, 자정의 달빛을 받으며 심장을 찔려 죽어야 한단다. 그럼 너는 아주 새롭게 태어나는 거야.
 
 야스콘의 열 살 생일날 어머니가 은밀하게 준 생일 선물은 그것이었다. 야스콘은 의미를 묻지 않았다. 그보다 섬뜩한 말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절대 농담을 할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럴까? 비통함과 비장함이 맞물리면서 야스콘은 자꾸만 머리카락과 체모가 쭈뼛쭈뼛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죽음이 두렵나, 야스콘?’
 그는 스스로에게 물으며 부스스 일어선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럴수록 머리카락은 더 꼿꼿해지는 것만 같았다.
 “빨리 걸어. 오크하고 포옹이나 해 대는 쓰레기 같은 놈아!”
 형틀 마차에서 내리자 4명의 용병이 창으로 아무 곳이나 쿡쿡 찌르며 야스콘의 길을 재촉했다. 찔린 곳에서 피가 방울져 나왔다. 야스콘은 오크와 드워프가 갇혀 있을 용병단의 본대 쪽을 슬쩍 돌아보며 싸늘한 언어를 삼켰다.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죽으면 기회가 올지도 몰라.’
 죽으면 기회가 온다?
 야스콘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모순된 말이었다.
 
 @
 
 숲이 시작되는 마법사의 동굴 앞에 서자 육중한 바위 문이 저절로 올라갔다.
 “샘플을 데려왔느냐?”
 동굴 안에서 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예, 마법사님.”
 “액틴과의 직접 한 계약이니 허튼 놈들은 아니겠지? 나는 특별하고도 싱싱한 생명체를 원했다.”
 “대장님께서 프록시안에서 친히 추려 온 놈들입니다. 아직도 두 놈이 남았습죠.”
 “계산은 액틴과 끝냈으니 거기 두고 가거라.”
 “그럽죠. 죄송하지만 물이나 한 모금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느끼하게 생긴 용병이 말했다.
 “마차에 술을 몇 병 옮겨 놓았다. 가면서 목이나 축이고 내일도 어김없이 샘플을 운반해 오도록.”
 “아이고! 매번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요. 마법사님!”
 용병들은 원하는 것은 얻은 양 건성으로 말하고 황급히 돌아섰다.
 “자자! 술도 생겼겠다. 우린 가서 술판이나 계속 벌이자고. 다들 출정을 나갔고, 노예도 운반했으니 개운하게 즐겨야지. 프록시안을 토벌했으니 보상도 넉넉할 테고… 여자들이 온다고 그랬지?”
 “암! 저쪽 한스 장원 쪽에 새로 온 애들이라는데 가슴과 몸매가 무지막지하게 착하다더군.”
 용병들을 낄낄거리며 마차를 몰았다.
 “……!”
 동굴 쪽을 바라본 야스콘은 재빨리 입구를 향해 뛰었다. 하지만 이내 문은 닫혀 버렸다. 야스콘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문과 충돌하고 말았다.
 막 중심을 잡고 일어서자 뒤쪽에서 강력한 흡인력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허억!’
 야스콘은 단숨에 동굴의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
 화려했다. 낯선 방 안으로 떨어진 야스콘이 사방을 둘러본 첫 소감은 그랬다.
 은둔 마법사 카치스.
 사람이나 이종족을 잡아먹는 마법사라거나 미녀의 피를 빨아 먹는다거나 하는 소문이 무성한 마법사였다. 그 자신이 미를 탐하는 여자라느니, 혹은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백발의 노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 따위는 상관없다. 원치 않아도 이제 확인하게 될 일.’
 야스콘은 아예 편하게 앉았다. 기다리지 않아도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
 고개를 돌리던 야스콘이 소스라쳤다.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마법사가 등 뒤에 있었다. 움직이려 했지만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비의 마법이 걸린 모양이었다.
 거대한 덩치의 시동 하나가 야스콘의 몸을 능숙하게 실험대에 묶었다.
 마법사는 야스콘의 머릿결을 쓸어 넘기며 섬뜩하게 말했다.
 “잡종이로구나. 인간이지만 엘프의 냄새가 나. 탄탄한 몸통에 굵직한 호흡이라? 심폐기능이 최소한 다른 놈들의 두 배는 되겠군. 엘프와 인간의 혼합물이냐?”
 “……!”
 “묵비권? 아니면 자포자기냐?”
 “당신이 양식 있는 마법사라면 나를 풀어 줘요. 나는 죄 없이 잡혀 온 프록시안 영지인입니다.”
 “모든 실험체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 ‘나는 정말 억울해요.’ 하고. 어쩌면 그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지…….”
 칼칼한 음성과 함께 마법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반은 여자이고 또 반은 노인의 얼굴. 그러면서도 뒤틀린 해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온화함이나 친절 같은 것은 한 오라기도 엿보이지 않았다.
 “자비를 구할 생각은 포기해라. 넌 돌이나 나무처럼 하나의 재료일 뿐이야.”
 ‘사파의 마법사!’
 야스콘은 더 이상 비굴해지지 않기로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법사라면 정도를 걷는 자가 아니라 사리사욕에 물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구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르카리오 님 같은 멋진 마법사는 아니군. 그렇다면 조금 전의 말도 취소야.”
 야스콘은 마법사를 외면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법사가 자극을 받은 것인지, 방을 수놓던 촛불들이 일제히 꺼져 버렸다. 그러더니 환상처럼 한순간에 다시 점등되며 사방을 밝혔다.
 “다른 샘플들보다는 대담하구나. 하긴 프록시안이라면 제멋에 겨운 잡종들의 천국이니까. 하르카리오도 그래서 밥맛이란 말이지. 하지만 꼴까닥 죽었다며?”
 마법사는 불쑥 그 부담스러운 몰골을 야스콘의 코앞에 디밀었다.
 “……!”
 “놀라긴. 포기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저 꼴이 되기는 마찬가지야.”
 마법사가 커다란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 속에서 해골과 뼈다귀들이 하얗게 빛을 발했다.
 “마법사가 아니라 몬스터로군. 목적을 위해 이성도 지성도 내팽개친… 몬스터 따위에게 애걸하고 싶지는 않아.”
 “호오! 그래? 역시 독특하군. 액틴이라는 놈, 약속 하나는 사랑스럽게도 잘 지킨단 말이야. 비록 값이 좀 세긴 하지만…….”
 “그놈의 이름은 말하지도 마. 모든 프록시안의 원수다!”
 야스콘이 눈을 부릅뜨며 싸늘히 응수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둘이서 나중에 해결하라구. 먼저 죽는 네가 그 친구를 지옥에서 만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마법사가 손짓을 하자 야스콘의 턱이 저절로 들렸다.
 “어쨌든 난 네가 필요해. 아주 특별한 마법의 완성 단계거든.”
 “…….”
 “마법 재료가 될 목숨이니 알려는 줄까? 한없이 신축되면서도 강해지는 마법이지. 예를 들면 근육과 혈관에 그런 작용이 일어나면 어떨까? 마법사는 마나 운용의 한계치가 상승하고 기사나 전사들은 파워가 상승한다. 손이 쑤욱 늘어날 수도 있지. 두세 배 정도만큼 말이야. 돈 좀 될 거 같지 않나?”
 “내가 알 바 아니야.”
 야스콘은 마법사가 한 말을 그대로 모방했다.
 “화끈하군. 이 탄탄한 근육과 힘찬 호흡이라니… 정말 마음에 들어. 오늘 실험은 최고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마구 마구 드는걸.”
 마법사는 야스콘의 다리 근육을 주물러 보더니 가까이서 숨소리를 음미하며 느끼하게 웃었다.
 “이 마법 아이템이 완성되면 제일 먼저 유카리우스의 아이템과 교환을 할 거다. 그는 내 반쪽 얼굴을 마저 20대로 되돌리는 마법을 알고 있거든.”
 마법사가 흉측한 얼굴 한쪽을 야스콘에게 들이밀었다.
 “잘해 봐.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
 “뭐지?”
 “자정까지는 살려 줬으면 해. 오늘 자정의 달빛을 보는 게 내 소원이었거든.”
 “매우 독특한 취향이군. 그 정도는 접수해 드리지. 어차피 실험 준비를 하다 보면 자정이 될 테니까.”
 “심장은 깔끔하게 한 방에 찔러 줘. 그럴 수 있겠지?”
 “물론! 아주 부드럽게 찔러 주지. 내가 필요한 건 너의 싱싱한 피 그리고 혈관과 근육이니까. 그것도 실타래처럼 살며시 풀어 주마.”
 마법사의 손이 야스콘의 몸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야스콘은 소름이 쫘악 끼치는 걸 느꼈다. 자유롭기만 하다면 면상을 들이박고 싶었지만 몸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 그럼 실험실로 가 볼까?”
 마법사가 손을 내밀자 야스콘은 실험대와 함께 허공에 들렸다. 마법사가 앞서고 야스콘은 둥둥 뜬 채 그를 따라갔다. 마치 자석을 따라가는 쇠붙이 모양이었다.
 실험실 동굴의 외벽은 창으로 되어 있었다. 야스콘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많은 사람과 이종족, 짐승들의 부산물로 가득 찬 실험실은 아이러니하게도 향기가 넘실거렸다.
 “이기주의자군. 신성한 제물들의 냄새를 가리려고 라벤더와 재스민의 향으로 도배를 하다니…….”
 “호오? 향수에 정통한가? 배합을 알아채다니…….”
 마법사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부터는 라벤더만 쓰도록 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야스콘이 잘라 말했다.
 “고노! 정화수를 가져와라.”
 마법사가 소리치자 거구의 사동이 푸른 호리병을 들고 왔다.
 “왜 두렵냐? 하지만 안심해. 이건 피를 맑게 하는 정화수다. 안에서 한 번 여과하고 밖에서 한 번 여과해야 해. 그래야만 최고의 재료가 되는 것이지. 인간의 마음에는 탐욕이 가득해서 말이지.”
 마법사는 호리병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아련한 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네 몸에도 이런 별이 뜨게 되는 거야.”
 호리병의 물이 야스콘의 입에 부어졌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야스콘은 그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기분이 맑아지는 것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히죽 웃은 마법사는 커다란 화로 앞에서 흥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의 힘줄처럼 마른 조직들이 첨가되고, 풀처럼 말린 혈관들도 보태졌다. 마법의 시동어가 더해지자 화로 안에서 회색의 연기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야스콘은 창밖을 보았다. 달이 천천히 창에 걸리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열일곱의 자정이 가까워졌다.
 “네 소원대로 자정이다. 마침 다른 준비물도 완벽해. 오늘 너의 싱싱한 혈관과 조직이 첨가되면 실험의 반은 완성이 될 거야. 자! 가슴을 펴거라. 쭈욱!”
 날이 푸르게 선 숏소드를 집어 든 마법사가 턱을 세우며 강조했다. 야스콘의 곁에는 마법사가 만든 용액이 회색 연기를 뿜어내며 병 안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저놈들이 난리로군. 확실히 네가 찰떡궁합일 거라는 예감이 든단 말이야.”
 마법사는 혀를 내밀어 소드를 스윽 핥았다. 그런 다음 그 끝으로 야스콘의 가슴을 살며시 눌렀다. 무심한 달빛이 야스콘의 머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잘 가거라. 내 위대한 마법의 재료가 되는 것이니 이보다 영광된 죽음은 없을 거야.”
 쑤욱!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드가 야스콘의 심장으로 밀려 들어왔다.
 “크헉!”
 야스콘의 가슴팍이 들썩거렸지만 마법사는 간단히 요동을 잠재웠다. 야스콘은 두 눈을 또렷이 뜬 채 마법사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열일곱이 되면!’
 어머니 펠리아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전을 감돌았다.
 
 -나이트 엘프의 전사의 피를 타고 난 혈통들은 각기 특별한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늑대보다 강한 두 다리를 얻었지. 네게도 전사의 피가 흐르니 멋진 능력이 발현될 거야.
 
 펠리아의 목소리는 더없이 달콤했다.
 ‘어머…니…….’
 야스콘은 손을 들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동공에 맺힌 마법사의 영상이 조금씩 흐려져 갔다. 심장에서 불타던 불씨가 꺼지는 느낌이 왔다. 생명은 중심에서 빠져나간다. 야스콘은 사지의 말단에서부터 모여든 목숨이 심장에서 소멸되는 것을 느꼈다.
 “……!”
 지상의 끝이었다.
 “자! 그럼 샘플이 식는 동안 마법 액체를 완성시켜 보실까?”
 마법사는 바글거리는 병에 또 다른 액체를 가미했다.
 “론 디아츠 사모 게츠야!”
 뜻 모를 시동어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는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자 후드를 벗어 버렸다. 군데군데 탈모가 일어난 머리카락 때문인지, 혐오감이 이는 흉상이었다.
 “부드러운 달빛의 호흡과 강인한 소드의 블레이드로…….”
 마법사는 푸른 달빛을 모아 병에 밀어 넣은 후에 잘 갈아둔 소드의 블레이드에서 진기를 취해 액체에 첨가했다. 그러자 부글거리던 액체가 얌전하게 변했다.
 “오늘 작업의 하이라이트만 남았군. 이제 저 샘플의 혈관과 싱싱한 근육을 뽑아서 녹여 넣으면 끝이야.”
 마법사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쳐 갔다.
 마법사가 흥에 겨워 흥얼거릴 때 달빛이 야스콘의 머리를 더듬고 얼굴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달빛은 천천히 야스콘의 왼편 심장 위에 멈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달빛이 출렁거리자 비로소 야스콘의 몸이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달빛이 한 번 심장 주변에 맴돌자, 야스콘의 몸 안에서 격렬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깨어라!’
 야스콘은 한없이 깊은 진공 속에서 그 말을 느꼈다. 다 무너진 성벽처럼 무기력한 육체. 하지만 심연의 저 깊은 곳에서 뭔가 알지 못할 힘이 자신을 떠받치고 있었다. 무너진 의식의 한쪽이 급격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힘의 근원은 찔린 심장의 반대편이었다.
 놀랍게도 야스콘은 2개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심장의 마지막 박동이 끊기기 직전, 잠자던 오른편의 심장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그 시작은 희미했다. 하지만 만 17년 만에 움직이는 오른쪽 심장에 어느 정도 힘이 모이자 그 기운은 육체를 향해 단숨에 뻗어 나갔다.
 ‘아아아!’
 무의식 속에서 야스콘은 신음을 토했다. 힘은 모든 말단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갔다.
 [파랑새]-나의 아들 야스콘!
 피가 돌기 시작하는 혈관을 타고 펠리아의 목소리가 자애롭게 녹아들었다.
 ‘어머니!’
 [파랑새]-마침내 열일곱이 되었구나. 축하한다.
 ‘어머니…….’
 [파랑새]-더블 하트가 작동되었다. 그 힘을 못 이겨 영원히 잠들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사라졌어. 너도 이제 나이트 엘프의 전사들처럼 빠르고 용맹스러운 전사가 되는 거야.
 ‘어머니… 더블 하트?’
 그렇게 중얼거리다 야스콘은 눈을 떴다.
 ‘죽지 않았다.’
 생명의 의식이 느껴졌다. 야스콘은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였다. 이번에는 찔린 심장을 더듬었다. 아직도 소드가 꽂혀 있지만 피는 멎어 있었다.
 “후우!”
 야스콘은 깊고도 긴 날숨을 밀어내 보았다. 천부적으로 폐활량이 강한 야스콘이었다. 이내 삭막하던 폐에 생기가 들이쳤다. 야스콘은 조심스럽게 심장의 소드를 뽑아냈다.
 가벼운 추임새로 돌아서던 마법사는, 눈앞의 광경에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죽은 줄 알았던 샘플의 손에는 믿어지지 않게도 소드가 들려 있고, 그것은 분명 자신의 심장을 향해 들이치고 있었다.
 “억!”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병을 놓쳐 버렸다.
 촤악!
 병속의 액체는 공교롭게도 야스콘의 머리에 쏟아졌다.
 “안 돼!”
 마법사는 손을 내밀었지만 야스콘이 그냥 있을 리 만무했다. 마법사의 심장을 빠져나온 소드는 연거푸 찌른 곳을 반복해서 들이쳤다.
 “크허억! 분명 심장을 관통했는데……? 설마 더블 하트?”
 “아마도!”
 “이럴 수가! 더블 하트라니!”
 마법사는 마법의 시동어를 영창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무너졌다.
 “이건 당신 소드니까 돌려주지.”
 야스콘은 피에 전 소드를 다시 한 번 마법사의 가슴에 박아 버렸다. 얼마나 찌른 것인지, 소드는 별 감각도 없이 밀려 들어갔다.
 “이… 이… 굴러들어온 축복을 까맣게 몰랐구나! 더블 하트라면…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는데…….”
 마법사는 기를 쓰고 손을 내밀었다. 야스콘이 다가와 그 손을 밟아 버렸다.
 “안… 돼… 내 모든 것을 다 바친 결실을… 이렇게 허무하게… 이…….”
 마법사는 이를 갈았지만 그의 심장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죽고 말았다.
 “후우, 후우!”
 그제야 야스콘은 가쁜 숨을 토하며 벽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를 앞에 두고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볼드]시동어를 영창할 기회를 주지 마라.[볼드]
 그건 소드나 보우를 다루는 전사에게는 철칙과 같은 교훈이었다.
 겨우 숨을 돌린 야스콘은 소드를 하나 움켜쥐고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마법사님!”
 비명과 함께 마법사의 사동 셋이 뛰어 들어왔다. 둘은 마법사의 죽음을 보고 자지러졌지만, 거구의 사동은 단창을 뽑아 들고 덤볐다. 야스콘은 단창을 막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휘돌며 시동의 온몸을 직격했다.
 “……!”
 거구의 사동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핏물이 되어 쓰러졌다. 남은 두 어린 사동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야스콘 또한 머리카락의 반응에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살려 주세요. 우린 마법사에게 강제로 잡혀 온 것뿐이에요.”
 “…….”
 야스콘은 두 사동을 노려보았다.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 거짓말 같지 않았다.
 “치료약이 있겠지? 리카버리 포션 같은?”
 “있어요. 바로 이거예요.”
 사동 하나가 푸른 병 2개를 내밀었다. 야스콘은 하나를 마시고 나머지는 심장의 상처에 부었다. 깜박 몸이 흔들렸지만 이내 호흡이 편해졌다.
 “가! 너희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야스콘은 겨눴던 소드를 거두고 사동들을 지나쳤다. 공포의 극한에 몰렸던 시동 둘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의식을 잃었다.
 야스콘은 마법사의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하아 하아!”
 거칠게 토하는 호흡을 따라 달빛이 스며들었다.
 열일곱. 나이트 엘프의 피를 받고 다시 태어난 야스콘의 온몸에 달빛이 내렸다.
 야스콘은 온몸에 탱탱하게 오르는 기상을 느꼈다. 나이트 엘프는 밤에 더 강해진다. 하지만 어제까지의 야스콘에게는 그런 현상이 없었다. 밤이나 낮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근육을 차고 오르는 파워는 밖으로 터질 듯 꿈틀거리고, 호흡은 상쾌하기만 했다.
 ‘내가 더블 하트?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전의 어머니도 그런 말은 없으셨고…….’
 야스콘은 신기한 듯 자신의 오른편에서 펄떡이는 또 다른 심장의 박동을 들었다. 찔린 왼편 심장에는 핏자국이 선명했지만 피는 멎어 있었다.
 ‘이게 열일곱에 받은 특별한 능력인가?’
 야스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찝찝하군. 팍 뻗쳐서 달빛과 바람에 말릴까?’
 야스콘은 마법사의 액체에 젖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머리카락이 수 미터나 쫘악 뻗쳐 나갔다.
 “……?”
 놀란 야스콘이 위축되자 머리카락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착각이었나?’
 야스콘은 다시 머리에 힘을 주었다.
 “으헉!”
 착각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분명 5미터 가까이 단숨에 뻗어 나갔다.
 ‘이게 뭐야? 게다가 머리카락이 아니라 무슨 실창이나 철심 같잖아?’
 야스콘은 머리카락으로 나뭇가지를 후려쳐 보았다.
 스강!
 ‘잘렸다.’
 마치 소드로 내려친 것처럼 우수수 잘려 나간 나뭇가지를 보며 야스콘은 경악했다.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몸에 난 체모 전부가 그와 비슷한 작용을 했다. 다만 굵기에 따라 위력이 다를 뿐이었다.
 ‘설마?’
 야스콘은 머리카락을 한없이 뻗어 보았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허공을 덮어 버렸다.
 “하앗!”
 야스콘은 굵직한 나무를 향해 머리카락을 조정했다. 분명 나무를 관통시켰지만 나무는 멀쩡했다.
 ‘그럼 그렇지. 나무가 잘릴 리는…….’
 야스콘이 다가가 멀쩡한 나무를 슬쩍 건드렸다. 그러자 나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넘어가 버렸다.
 “……?”
 야스콘은 스스로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커다란 나무를 머리카락으로 베었다! 그건 누구도 믿지 못할 대사건이었다. 오죽하면 야스콘 자신도 이빨을 따닥따닥 부딪치며 전율할 정도였다.
 ‘마법사의 액체 덕분인가? 아니면 이것이 진정 열일곱에 받은 축복인가?’
 야스콘은 의아했지만 그런 것에 골똘할 시간이 없었다. 크로네와 타이켄, 그들을 구해야 했다. 기왕이면 열일곱의 밤이 지나가기 전에.
 ‘그래야 영원히 기억에 남는 열일곱의 달밤이 되겠지.’
 찔린 심장 부위를 응급처치하고 난 야스콘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두 발은 용수철처럼 탄력 있게 튀었다. 강력한 폐활량 덕분에 뛰는 거나 물속에서 움직이는 건 원래 자신 있는 야스콘이었다. 다친 심장에서 체액이 조금씩 배어 나왔지만 견딜 만했다. 몇 마리의 늑대들이 야스콘을 발견하고는 눈빛을 반짝거렸다.
 “오늘은 너희하고 놀아 줄 시간이 없어.”
 야스콘은 앞만 보고 달렸다.
 
 @
 
 용병들의 감옥에 갇힌 크로네와 타이켄은 잠들지 못했다. 특히 크로네는 두터운 통나무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작은 달빛에 꽂힌 시선을 놓지 않았다.
 ‘야스콘!’
 크로네는 그 이름은 벌써 수백 번도 더 중얼거렸다. 눈물을 모르는 그녀의 눈동자조차 붉은 모세혈관으로 덮여 있었다.
 “꾸우우우!”
 타이켄이 다가와 크로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자.”
 크로네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타이켄이라고 잠이 올 리 없다. 야스콘이 팔려 갔으니 내일이면 둘 중 하나의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아니 설령 운이 좋아 다른 감옥의 노예가 쓰인다고 해도,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크로네가 두려운 것은 그게 아니었다. 죽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좋아하는 야스콘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작 그 따위 포옹이나 요구했다니?’
 크로네는 자신이 죽도록 싫었다. 그래도 오크 중에서는 뛰어난 전사감이었지만 막상 포로로 끌려온 지금은 한낮 차례를 기다리는 먹잇감에 다름 아니었다.
 
 -살아서 돌아오면 다신 내게 사랑한다는 고백 따위 하지 마.
 
 마지막 남긴 야스콘의 말이 귓전에서 맴돌았다.
 ‘그래. 제발 살아만 온다면…….’
 크로네는 고개를 흔들었다.
 “……?”
 헛된 희망으로 고개를 흔들던 크로네는, 순간 뭔가 섬뜩한 기척을 느끼며 흠칫했다. 그건 타이켄도 마찬가지였다. 섬세한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감옥 앞의 횃불이 소리도 없이 꺼져 버렸다.
 “뭐지?”
 크로네는 타이켄을 돌아보았다. 타이켄이 고개를 돌리는 찰나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감옥 문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
 크로네와 타이켄은 벽을 향해 몸을 웅크렸다.
 털썩!
 소란을 따라 물체 하나가 감옥 안에 떨어졌다.
 “…맙소사! 야스콘?”
 크로네는 발목에 채워진 쇳덩이를 끌며 다가갔다.
 “우워우워!”
 타이켄도 쇳덩이를 질질 끌며 달려왔다.
 “저런! 심장을 찔렸잖아? 죽은 것 같아.”
 크로네가 야스콘의 상처 난 심장을 쓸며 소리쳤다. 그때 야스콘의 손이 별안간 크로네의 손을 잡았다.
 “……?”
 “크로네.”
 “야스콘? 죽지 않은 거야?”
 “그래. 그따위 허접한 마법사에게 죽을 수야 없지. 운 좋게도 심장에서 살짝 빗나간 거야.”
 야스콘이 눈을 뜨면 찡긋 윙크를 했다.
 “야스코온!”
 크로네는 기쁨에 겨워 당장 야스콘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아아! 잠깐!”
 야스콘은 몸을 일으키며 크로네를 가볍게 제지했다.
 “……?”
 “약속은 지켜야지. 내가 살아왔으니까 이제 날 단념해. 알았어? 넌 절대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 우리 셋은 언제까지나 친구야.”
 “Pea in the same pod?”
 “그래. 한 꼬투리 속의 완두콩처럼!”
 “야스콘…….”
 크로네의 목소리가 한없이 잠겨들었다. 오크의 격한 감정표현. 야스콘은 알 수 있다. 눈물이 없는 오크들은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지금 크로네처럼.
 “약속!”
 “알았어. 약속할게. 살아와 줘서 고마워.”
 “뭐 그렇다고 아직 끝난 것은 아니야. 이제 수모를 갚고 프록시안으로 달려가 봐야지!”
 야스콘은 도끼로 크로네와 타이켄을 속박하던 쇳덩이의 줄을 잘라 냈다. 그런 다음 둘에게 각자의 주 무기를 던져 주었다. 오크 크로네의 것은 쌍날의 도끼였고, 타이켄의 것은 큼지막한 워해머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감옥 문은 누가 부쉈고?”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 주지. 하지만 감옥 문은 이렇게 부쉈어.”
 야스콘이 불끈 힘을 주자 수많은 머리카락들이 수 미터씩이나 강력하게 뻗어 나갔다. 머리카락들은 통나무를 가볍게 스쳐 갔다.
 “타이켄! 네가 그 탄탄한 덩치로 힘차게 부딪쳐 봐.”
 야스콘은 감옥의 창살을 이룬 통나무들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야? 몇 번을 시도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잖아?”
 크로네가 야스콘을 돌아보았다.
 “하여간 해 봐!”
 야스콘은 제자리로 돌아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으어어!”
 타이켄이 콧김을 뿜으며 감옥 창살에 부딪치자 통나무 창살은 거짓말처럼 박살 나 버렸다. 그는 힘에 못 이겨 통나무들과 함께 나뒹굴었다.
 “이제 알겠어? 저게 바로 내가 들어온 방법이야.”
 “그럼 그 머리카락이 열일곱에 받은 전사의 축복?”
 “아마도 그럴걸.”
 야스콘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걸로 마법사를?”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 다쳐.”
 야스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도 안 돼. 그저 평범한 머리카락인데 이게 통나무를 흔적도 없이 베다니…….”
 크로네는 야스콘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정들기 전에 손 떼시지. 털은 머리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야스콘이 한쪽 눈을 감음과 동시에 크로네는 자신을 가볍게 찌르는 따가움을 느꼈다. 놀랍게도 야스콘의 팔에서 뻗쳐 나온 털들이었다.
 “굉장해.”
 “놀랄 것 없다니까. 아직은 나도 어리둥절해.”
 “어리둥절한 건 우리가 더해. 꿈인 것만 같아.”
 크로네가 타이켄의 볼을 힘껏 잡아당겼다. 타이켄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지고서야 크로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꿈은 아니네?”
 “오크와 드워프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 짓지 말고 일단 빚부터 갚자구. 놈들의 주력은 다른 곳에 출정 가고 여기 남은 놈들은 많지 않아.”
 야스콘이 감옥을 나서며 말했다. 크로네는 바닥에 널브러진 용병의 허리춤에서 단창 4개를 뽑아 허리띠에 끼웠다. 그녀의 주특기 중의 하나는 단창 날리기였다. 비록 본래 자신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쾅!
 술에 취해 창녀들과 나뒹굴던 용병들은 문을 박차고 들어선 타이켄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뭐야? 한 시간만 기다리라니까.”
 용병 하나가 반라의 여자를 끌어안으며 웅얼거렸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대답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야스콘과 크로네였다. 그제야 정신이 든 용병이 소드를 잡으려 했지만, 크로네의 단창이 먼저 날아왔다.
 “크헉!”
 용병이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거꾸러졌다. 단창이 심장에 꽂히기도 했거니와 이미 목이 반듯하게 잘려 나간 상태였다. 야스콘의 머리카락이 먼저 날아왔던 것이다. 다른 세 용병들도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타이켄의 워해머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
 퍽퍽퍽!
 워해머를 얻어맞은 용병들은 작살이 나 버렸다.
 “쳇! 열일곱이 되었다고 위아래 안 가리면 곤란하지. 예의는 인간이나 엘프나 다 지키는 미풍양속으로 아는데?”
 크로네가 처음 날린 단창을 뽑아 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신의 사냥감을 가로챈 야스콘을 탓하는 말이었다.
 “까아악!”
 야스콘이 대답하기도 전에 울먹이던 창녀가 기어이 벼락같은 비명을 질렀다. 공포에 질린 창녀는 옷가지로 가슴을 가린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발견한 것은 술 냄새와 피 냄새로 범벅이 된 용병들의 시체뿐이었다.
 “이봐, 여자!”
 뒤따라 나온 크로네가 냉기 서린 목소리로 창녀를 불렀다.
 ‘히익!’
 창녀는 몸서리를 쳤다. 뼈가 쪼그라들 것 같은 공포였다.
 “우릴 이 꼴로 만든 용병들에게 쾌락을 선물하다니.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 뽀얀 몸뚱이를 찢어 버리고 싶지만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었을 테고. 경비대장 어디 있어?”
 “맨 끝 막사에 여자와 함께 있을 거예요.”
 “됐어. 거기서 기다려.”
 크로네는 창을 집어 힘껏 던졌다. 창은 여자의 옷과 함께 대지에 깊이 박혀 버렸다. 창녀는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 참! 인간의 여자들은 꼭 저렇게 약한 척 꼴값을 떤단 말이야.”
 크로네는 혀를 차며 야스콘을 바라보았다.
 감옥을 차고 나온 야스콘 일행은 술에 취해 게걸거리는 용병 12명을 베었다. 야스콘이 여섯이었고 타이켄과 짝을 이룬 크로네가 나머지를 박살 냈다.
 야스콘의 판단대로 용병은 많지 않았다. 만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몰래 빠져나가는 게 옳았다. 레드 글로리안 용병단을 단 3명이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스콘은 창녀가 말한 막사를 향해 다가섰다.
 “기다려, 크로네!”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는 크로네를 야스콘이 제지했다.
 “왜?”
 “술에 취해 섞인 남녀는 한 번 보는 것으로 충분해.”
 “그러는 너도 인간 나이론 미성년자 아니야?”
 “엘프의 나이로는 성년이야. 꽉 찬 열일곱이니까.”
 “아냐, 아냐! 동의 못 해. 어릴 때 야한 걸 많이 보면 문란해지는 게 인간이야. 아스캄 님도 그래서 조기교육을 강조하신 거 아냐?”
 “하는 수 없군.”
 야스콘은 타이켄에게 시선을 돌렸다.
 “타이켄!”
 야스콘이 눈짓을 하자 타이켄이 탄탄한 어깨로 막사의 벽을 밀어 버렸다. 드워프 중에서도 용력으로 손꼽히는 그의 힘은 막사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뭐야? 집이 술에 취했나? 왜 이래?”
 겨우 아랫도리를 가린 대머리 경비대장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차며 고개를 내밀었다. 순간 야스콘의 머리카락이 날아가 그를 낚아채 버렸다.
 “어어!”
 허공에 들린 용병대장은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잘도 우리 프록시안을 짓밟았겠다?”
 야스콘은 거침없이 다가섰다.
 “인간과 오크 그리고 드워프 한 마리? 마법사에게 샘플로 팔아먹으려고 잡아온 놈들 아냐?”
 경비대장은 몸을 일으키며 냉소를 뿜었다.
 “왜? 또 통나무에 묶어서 불화살과 화염창으로 꿰어 농락하고 싶은가?”
 야스콘이 물었다. 야수의 눈빛으로 변한 그의 눈에는 분노가 광풍처럼 일고 있었다.
 우우우!
 분노는 스스로 신음 소리를 냈다.
 
 @
 
 평화로운 프록시안을 짓밟고 가던 용병들의 만행! 그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주검에 무슨 짓을 벌였던가! 종족 연합 전사를 이끌고 선봉에서 항전하던 나이트 엘프 펠리아. 은빛의 머리카락을 출렁이며 사력을 다하던 그녀는 사로잡힌 야스콘의 아버지 아스캄을 구하려다 산화하고 말았다.
 바드(Bard)(음유시인)이자 차와 향기의 마스터였던 아스캄은 영주로서 인간의 전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리 중에 배신자가 있었다.
 ‘메카치!’
 야스콘은 야비한 배신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절정의 항전 중에 그가 아스캄의 등을 도끼로 찍었다. 그런 다음 소드를 아스캄의 목에 쑤셔 넣었다. 아스캄은 몸부림을 쳤지만 목을 뚫고 들어온 소드를 무위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펠리아가 이종족의 선봉에서 뛰쳐나와 달려갔다. 용병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소드와 활의 여신으로 불리던 펠리아의 날개가 꺾이는 순간이었다. 상처 난 몸으로도 펠리아는 용병들을 헤집었다. 그리고 끝내 목에 소드가 꽂힌 아스캄에게 닿았다.
 그녀는 피에 물든 소드를 뽑아 주었지만 그 자신의 등 뒤에서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클레이모어를 피하지 못했다. 펠리아는 죽을힘을 다해 손을 내밀었다. 겨우 아스캄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 용병대장 액틴의 도끼가 펠리아의 팔목을 찍어 버렸다. 잘려 나간 펠리아의 손목은 아스캄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다 멈췄다. 위대한 나이트 엘프의 여전사 펠리아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인간 전사들과 함께 항전하던 야스콘이 야수처럼 절규하며 달려왔지만 덧없었다. 길을 막는 용병 넷을 죽이며 분전한 야스콘은 투구 뒤를 강타하는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었다.
 용병들은 철저하게 프록시안을 꿰뚫고 있었다. 우선 축제 전야에 기습을 감행한 것이 그랬다. 영지의 조직이나 족보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주와 펠리아에 대한 사냥에 성공하자 바로 최고의 전사로 불리던 오크의 수장을 집중 공격하여 전사시켰다. 바로 크로네의 아버지 투르칼이었다.
 그 다음에 노린 것이 드워프의 최고 연장자였다. 그는 무기와 물건 제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인이었으나 창검술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별 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천하장사의 용력을 가진 타이켄은 유켈슨을 구하기 위해 눈물겹게 항전했지만 집요한 용병들을 당해 내지 못했다. 결국 타이켄은 쇠 그물에 걸려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드워프의 연장자는 타이켄이 보는 앞에서 난도질을 당했으니, 그가 바로 부모 없는 타이켄을 혼자 키워 온 할아버지 유켈슨이었다.
 용병들의 무자비한 참살이 계속되는 동안, 영지군은 오지 않았다. 하이랜드의 영주 또한 프록시안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차였으니 아마 내심 쾌재를 불렀을지도 몰랐다. 영주는 프록시안이 완전한 자치의 성격을 띠자 자신의 정치적 역량이 의심 받을까 봐 싫어하던 차였다.
 야스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완벽하게 결박당한 후였다. 전투는 끝나 있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용병들은 프록시안을 샅샅이 약탈했다. 피비린내와 함께 곳곳에 널린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코티, 폴카, 레모!’
 숲에 숨겨 둔 동생들의 안부가 걱정되어 고개를 돌릴 때, 용병들의 불화살이 한 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
 야스콘은 눈을 의심했다. 10여 개 나란히 세워진 거대한 통나무들. 그 꼭대기에 꽁꽁 묶인 생명체들은 영주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프록시안 10인의 지도자가 분명했다.
 “안 돼!”
 야스콘은 발악했지만 용병들은 키득거리며 불화살을 날렸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존재들이었다. 그런 생명체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그만! 그만두란 말이야!”
 퍼억!
 그물 안에서 악을 쓰던 야스콘은 뒤통수를 얻어맞고 의식을 잃었다. 용병들은 야스콘과 다른 포로들에게 오줌을 갈겼다.
 야스콘이 눈을 떴을 때는 용병대 안의 감옥이었다. 모두 6명의 젊은 프록시안 구성원들이 포로로 잡혀 왔다. 그리고 그들 중 셋은 이미 마법사의 실험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누군가 했더니 자칭 영주의 아들이었군. 아까 마법사의 샘플로 바쳐졌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경비대장이 소드를 뽑아 들며 오만을 떨었다. 레드 글로리안 용병대라면 명성이 높았다. 그 안에서도 팀장쯤 되는 위치였으니 당연했다. 눈앞에 버티고 있는 셋쯤은 상대로 여기지도 않는 눈치였다.
 “마음 널널한 마법사가 나를 위해 스스로 죽어 주더군. 너희들에게 복수를 하라고 말이야.”
 “그럴 리야 없지.”
 “젊은이도 늙은이도 아닌 해괴한 마법사. 머리카락도 듬성듬성하던데 그래도 아닐까?”
 야스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쳐 갔다.
 “……?”
 그제야 경비대장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야스콘의 묘사는 마법사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프록시안을 짓밟도록 의뢰한 자가 누구냐?”
 야스콘이 한발 더 다가서며 물었다. 전율이 흐르는 싸늘한 음성이었다.
 “건방진! 대체 마법사의 실험 동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는 안 돼!”
 촤앙!
 벼락처럼 소드가 날아왔다. 야스콘은 공세의 정면에서 막아 냈다. 경비대장은 누르는 형상이고 야스콘은 약간 아래에서 방어하는 자세였다.
 “그럼 내 머리카락을 잘 봐.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
 경비대장은 눈을 의심했다. 순식간에 철심처럼 일어선 머리카락이 자신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우선 맛보기!”
 “크헉!”
 10여 개의 머리카락이 용병대장의 오른쪽 눈을 파고들었다.
 “저런! 프록시안을 유린하던 기백은 다 어디 갔나? 진짜는 여기 있다.”
 야스콘의 시선이 심장을 향하자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그곳을 뚫고 들어갔다.
 “크아악!”
 경비대장은 몸부림쳤지만 들고 있던 소드를 떨어뜨렸을 뿐 야스콘의 품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심장을 관통하고 등을 뚫고 나온 머리카락이 그를 역으로 감싸 안아 버린 것이다.
 “용병 본단은 언제 돌아오는가? 액틴 말이야.”
 “크으으… 대장은 모르지만 이틀 후에 일부가 온다. 살고 싶으면 튀는 게 좋아.”
 경비대장은 고통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할 말이군. 혹시 죽어서 영혼이 된다면 네 부하들에게 선몽이라도 해 주는 게 좋을 거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튀라고.”
 “대체… 네놈은…?”
 “허세는 그만 부리고 의뢰자의 이름이나 말하시지.”
 말하는 야스콘의 머리 위에서 또 다른 머리카락이 실창처럼 솟아올라 경비대장을 겨누었다.
 “으헉!”
 “의뢰자!”
 “루… 루파스 상단의 체스터…….”
 “고맙다.”
 루핀이 말하자 경비대장의 심장에 박혔던 머리카락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경비대장은 지탱하던 힘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그렇다고 빚을 다 갚은 것은 아니야.”
 루핀은 그 말과 함께 무표정하게 타이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말없이 주시하던 타이켄의 워해머가 경비대장의 눈앞에서 바람을 갈랐다.
 퍼억!
 둔탁한 소음과 함께 경비대장의 머리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루파스 상단의 체스터? 그가 왜 프록시안을?”
 크로네가 치를 떨며 말했다.
 “그건 알 것 없어. 우린 빚을 갚으면 될 뿐. 일단 프록시안으로 가자.”
 야스콘이 얼굴에 튄 경비대장의 뇌수를 털어 내며 말했다.
 
 @
 
 야스콘과 크로네, 타이켄은 용병들의 말을 타고 언덕을 내려갔다. 프록시안은 3시간 거리였다. 서두른다면 아침햇살과 함께 그리운 땅을 밟을 것만 같았다.
 ‘제발…….’
 야스콘은 간절하게 되뇌었다. 세 동생을 숨겨 둔 숲이 조바심으로 다가왔다. 수십 발의 화살이 박혀 죽은 부모님도 떠올랐다. 마음은 한없이 급했다. 날개가 없는 것이 한이었다.
 “야스콘!”
 “아무 말도 하지 마.”
 야스콘은 크로네의 말을 막았다. 바람처럼 빠르지 못한 것이 서글플 뿐이었다.
 “그게 아니고 나를 따라와. 지름길이 있어.”
 크로네는 어느새 말의 기수를 돌렸다. 덩치에 비해 눈치 하나는 귀신처럼 빠른 타이켄 역시 말 머리를 돌렸다.
 “오크들의 비밀 통로야. 약간 지저분하긴 해도 지금은 그런 거 가릴 때가 아니잖아?”
 오우우!
 늑대들의 울음이 가까웠다.
 “저 망할 놈들! 야스콘과 놀려고 온 거야.”
 크로네가 소리쳤다.
 “그냥 둬. 생각보다 의리 있는 게 늑대들이라니까. 따라오다 지치면 말 거야.”
 야스콘은 말의 옆구리에 거칠게 박차를 가했다.
 크로네 역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은 타이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은 달이 기울어 가는 평화의 분지 프록시안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야!”
 질척한 동굴을 벗어나자 크로네가 벼랑 아래에 말을 세우며 말했다. 여명 속에 절망처럼 높은 벼랑이었다.
 “우우우!”
 타이켄이 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신도 안다는 몸짓이었다. 야스콘은 소드만을 옆구리에 찌르고 벼랑을 오르기 시작했다.
 “같이 가!”
 크로네와 타이켄도 벼랑을 오르기 시작했다.
 야스콘도 이 벼랑을 모르진 않았다. 바로 분지 뒤편의 벼랑이었다. 이따금 담력 시험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오크 하나가 빈 몸으로 아래를 향해 뛰어내리기도 했던 곳.
 
 -진정한 나이트 엘프의 능력을 가지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어머니 펠리아가 용맹을 논하던 곳. 열일곱이 되면, 어머니 앞에서 자랑스럽게 뛰어내리겠다고 다짐하던 야스콘이었다.
 벼랑은 크로네가 잘 탔다. 야스콘보다 늦게 출발했음에도 그녀는 야스콘을 앞서기 시작했다. 오크 특유의 강인함을 지닌 크로네는 탄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야스콘도 힘을 냈다. 전 같으면 하염없이 벌어질 간격이었지만 놀랍게도 몇 미터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확실히 열일곱이 되었네.”
 크로네가 잠시 호흡을 고르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셋은 크로네, 야스콘, 타이켄의 순서로 벼랑에 올라섰다. 땀을 씻을 여유도 없이 분지 건너편에서 찬란한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타이켄은 그 신성한 첫 햇살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야스콘과 크로네는 벌써 저만치 앞에 있었다.
 “우어우어!”
 타이켄은 터지지도 않는 목청으로 기를 쓰며 따라잡기 시작했다.
 “……!”
 마침내 도착한 프록시안은 셋을 절망의 순간으로 몰아넣었다. 4백여 가구가 도란도란 속삭이던 그림 같은 정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축제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구조물과 조각들도 한결같이 박살 나 있었다. 땀으로 일궈 낸 프록시안은 간 곳 없고 그저 시커멓게 그을린 전화의 비극만이 처참한 속살을 드러낼 뿐이었다.
 
 인간 260가구 710명
 오크 60가구 115명
 드워프 46가구 80명
 고블린 25가구 58명
 오우거 8가구 12명
 트롤 4가구 7명
 엘프 2가구 5명
 
 약 1천여 명에 달하던 화합의 영지 프록시안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따가 만나자.”
 야스콘은 엘프의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슬쩍 그를 돌아본 크로네와 타이켄도 자신의 집을 향해 달렸다. 길목과 들판의 여기저기에서 시체를 쪼아 먹던 까마귀 떼들이 긴 울림소리를 내며 솟구쳤다.
 “스코티! 폴카! 레모!”
 야스콘은 숲을 달리며 소리쳤다. 놀란 사슴 떼가 달아나는 소리가 숲을 진동시켰다.
 “스코티!”
 야스콘은 동생들을 숨겨 둔 바위 사이로 뛰어들었다.
 “……?”
 동생들은 없었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야스콘은 평소에 동생들이 다니던 숲길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렸다.
 “폴카! 레모!”
 몇 번인가를 칡덩굴에 걸려 넘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디선가 막내 레모가 형하고 울먹이며 달려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따금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한참을 헤매던 야스콘은 샘물가에서 막내 레모의 부츠를 발견했다. 지난해 생일 때 타이켄이 만들어 준 그 신발이 틀림없었다.
 “레모!”
 샘물가를 뒤지던 야스콘은 또다시 눈에 익은 물건 하나를 찾아냈다. 여동생 스코티의 머리띠였다. 마음은 한없이 조급해졌지만 정오가 되도록 더 얻은 것은 없었다. 야스콘은 결국 프록시안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크로네는 타이켄과 함께 프록시안의 대장간을 뒤지고 있었다. 타이켄은 무너진 대장간 안에서 숨을 멈췄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를 자부하던 할아버지 유켈슨은 거기에서 반쯤 타 버린 시체로 누워 있었다.
 “워워!”
 타이켄은 아직도 고기 타는 냄새가 배어나는 할아버지를 안고 침묵으로 오열했다. 크로네가 유켈슨이 쥐고 있던 작은 망치를 내밀었다.
 “꼭 쥐고 계시네. 네게 주고 싶었을 거야.”
 마법의 망치!
 프록시안의 구성원들은 그걸 그렇게 불렀다. 아무런 마법력도 깃들지 않았지만 유켈슨은 그 작은 망치 하나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다.
 
 -이것 하나면 제국도 건설할 수 있지.
 
 망치에서 유켈슨의 정다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어어!”
 타이켄의 오열은 천지를 흔들었다. 타이켄은 대장장이를 꿈꾸지 않았다. 그것은 할아버지라는 거대한 산맥 때문이었다. 유켈슨 이상 가는 대장장이가 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타이켄은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게 유켈슨의 가슴에 목을 박은 것처럼 느껴졌다.
 크로네마저도 그 순간은 고개를 숙였다. 때로는 함께 죽지 못한 것이 죄처럼 생각될 때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야스콘이 프록시안으로 들어왔을 때, 크로네와 타이켄은 영지의 무너진 성벽 앞에 서 있었다.
 “동생들 못 찾았어?”
 크로네가 묻자 야스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없이 어두운 얼굴이었다.
 “영지에 생존자는 없어. 다 죽었거나 사라졌어.”
 “우어어어!”
 타이켄의 목에서는 여전히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기괴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온몸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받아. 펠리아 님이 쓰시던 활과 헬소드야. 다른 시체들 사이에서 찾았어.”
 크로네가 피에 절은 활과 소드를 내밀었다.
 “…….”
 어머니의 것이 분명했다. 헬소드는 한없이 질박하여 볼품이 없다. 그래서 용병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을 것이다.
 야스콘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소드에 떡칠이 된 피를 닦았다. 한 줄기 푸른 살광이 출렁거렸다. 야스콘이 휘두르자 짧은 오러 블레이드가 어둠 속으로 명멸해 갔다.
 “야스콘!”
 크로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러 블레이드… 헬소드로 오러 블레이드를 뿌리는 건 펠리아가 유일했었다. 그런데 열일곱이 된 야스콘이 거기에 도달한 것이다. 비록 가공할 오러 블레이드를 뿌려 대는 펠리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펠리아가 있었다면 흥분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검술 실력이 발군인 야스콘이었기에 오러 블레이드의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던 터였다.
 
 -헬소드로 오러 블레이드를 성공시킨다면 그걸 네게 물려주겠다.
 
 펠리아는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헬소드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닌 명검이었다. 풀 앤드 푸시(Pull and Push)가 그것이었다. 즉 밀고 당기는 힘이 가능하다고 했었다. 대륙의 대장장이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켈슨이 폭풍 속에서 완성시킨 필생의 역작이었다.
 야스콘은 꼭 한 번 그것을 보았다. 펠리아가 산적과 마주쳤을 때였다. 억센 놈이었지만 그는 펠리아에게 농락당하고는 튀었다. 대단한 스킬은 아니지만 아주 유용한 기술임은 분명했다.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헬소드를 다루는 사람의 기량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단다.”
 소드를 거둔 펠리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었다.
 어쨌거나 비극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야스콘이 헬소드를 물려받은 꼴이었다.
 “별거 아니야. 가자! 유토피안 광장으로.”
 야스콘은 까마귀 떼가 가물거리는 먼 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프록시안의 심장부 격인 유토피안은 영지인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축제를 벌이는 장소였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춤을 추거나 다른 종족과 어울려 놀았다. 이 프록시안에서는 이종족 간의 어떤 사교도 금지되지 않았다. 야스콘의 부모가 그랬듯 인간과 엘프의 결혼뿐만 아니라 오크와 트롤의 결혼도 축하를 받는, 대륙에서 유일한 곳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황제의 질병으로 통치에 금이 가자 영주들의 탐욕이 고개를 들었다. 영주들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잦자 프록시안의 영주 아스캄은 나름대로 묘수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내부의 방비를 단단히 하는 한편, 수완가로 소문난 쿠퍼를 대마법사 쟈칼티우스에게 보냈다. 황제와 가까운 쟈칼티우스의 마음을 움직여 황제가 프록시안을 정식 자유 영지로 선포하기 위한 포석을 깔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프록시안을 버렸다. 쿠퍼가 떠난 며칠 사이에 대참상이 벌어진 것이다.
 컹컹!
 광장에 가까워지는데 두 마리의 개가 무너진 건물 뒤를 향해 짖어 대기 시작했다.
 “뭔가 있어, 야스콘!”
 크로네는 어느새 쌍날의 도끼를 뽑아 들고 몸을 날렸다. 야스콘 역시 허공으로 솟구쳐 바람처럼 도약하며 화살을 겨누었다.
 “꺄아악!”
 비명과 함께 야스콘은 활을 거두었다.
 “트롤 퀠트 아저씨의 아들 미엔트야.”
 크로네도 쌍날도끼를 거두며 말했다.
 “야스콘 형… 크로네 누나…….”
 아이는 겁에 질린 채로 조그맣게 말했다. 반응으로 보아 용병들의 도륙 현장을 죄다 지켜본 게 틀림없었다.
 “걱정 마. 저기 타이켄 형도 있어.”
 크로네가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가엾게도 아이의 한쪽 발은 잘려 나가고 없었다.
 “대체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토록 가혹하게…….”
 크로네의 눈동자가 단번에 촉촉하게 변했다.
 “무서운 용병들이… 내게 도끼를 던졌어. 다리를 맞고 벽 틈으로 기어 들어갔어. 그랬더니… 불을 질렀어.”
 아이는 몸서리를 쳤다.
 “열이 너무 심해.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아.”
 “맞아. 이미 늦었다.”
 야스콘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이는 벌써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혹시 레모나 폴카를 보지 못했니?”
 야스콘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봤어. 용병들이 잡아갔어. 스코티 누나도 함께…….”
 “용병들이?”
 “난 꼭꼭 숨어서 소리 지르지 않으려고 했어. 아빠가 그렇게 시켰거든. 그런데 용병들이 아빠의 목을 자르자 나도 모르게 아빠와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어.”
 “괜찮아. 아빠도 이해하실 거야.”
 크로네가 아이를 품어 주었다. 아이는 해사한 미소를 짓더니 그것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야스콘은 다시 광장을 향해 돌아섰다. 크로네는 죽은 아이를 안은 채 일어섰고, 타이켄이 다가와 아이를 받아 들었다.
 축제 준비가 한창이던 광장에는 또 다른 비극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화의 상징물이던 드워프들의 작품은 대부분 박살이 나 있다.
 ‘아아!’
 야스콘은 외면하지 않았다. 학살의 현장을 처절하게 각인시켰다.
 10개의 통나무에 매달려 죽은 9인의 지도자들. 영주 아스캄을 필두로 나이트 엘프 최고의 전사 펠리아, 오크의 전설 투르칼, 독보적인 트롤의 학자 미쥬 그리고 인간이면서 백마법의 경지를 이룬 하르카리오 등등… 한 자리 빈 것은 바로 타이켄의 할아버지였다.
 그날의 참상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까마귀들은 야스콘 일행이 다가서자 아쉬운 듯 시체에서 푸드득 날아올랐다.
 ‘메카치! 액틴!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희 둘만은 반드시 죽인다.’
 야스콘은 아버지와 프록시안을 배신한 메카치와 용병대장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죽인다!
 [볼드]죽-인-다.[볼드]
 증오는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심장에 조각되었다.
 덩!
 덩더덩!
 크로네는 광장의 중앙에서 형편없이 찌그러진 종을 타종했다. 그것은 프록시안인들에겐 하나의 소집령과도 같았다. 살아 있는 자가 있다면 화답할 것이다.
 덩덩!
 종소리는 아우성을 지르며 퍼져 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만 해.”
 야스콘이 무겁게 말했다. 크로네는 그래도 타종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해. 그만 하란 말이야!”
 야스콘이 목이 터져라 악을 썼다. 부질없는 짓이야. 잔인하게 확인할 필요 없잖아? 절규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
 크로네는 더 이상 타종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반쯤 넋이 나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괜…찮아.”
 크로네는 종 앞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타이켄은 천천히 흉하게 박힌 통나무에 다가섰다. 그는 나무를 뽑으려는 듯 두 손에 침을 뱉었다. 시체를 거두려는 것 같았다.
 “그만둬, 타이켄.”
 야스콘의 싸늘한 음성이 타이켄을 제지했다.
 “우우어어!”
 “아니야. 우리 이 현장을 그냥 두자.”
 야스콘의 목소리는 한없이 비장했다.
 “어째서? 죽어서라도 편하도록 묻어 줘야지.”
 크로네가 넋두리처럼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나는 내 부모님을 이 화살의 무덤에 두겠다. 적어도 이 원한을 조금이라도 갚을 때까지는…….”
 야스콘은 그렇게 말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래도 영주님 부부만이라도…….”
 “잊었어? 이곳 프록시안에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모두 평등하다. 지위는 단지 역할이었을 뿐.”
 “야스콘!”
 “내 생각은 정해졌다. 너희 부모님은 너희 신념대로 해도 좋아.”
 “그럼 나도 아버지를 묻지 않겠어.”
 크로네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어어!”
 타이켄 역시 따르겠다는 듯 돌아서더니 할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왔다. 타이켄은 그것을 야스콘 부모와 크로네 아버지 사이의 대지에 고이 누였다. 비로소 10인의 지도자가 죽음으로 다시 모인 것이다.
 다시 달이 떠올랐다. 나이트 엘프와 오크는 달을 숭배한다. 나이트 엘프는 밤에 온전한 자연의 축복을 받는다. 용력도 강해지고 사물에 대한 적응력도 배가倍加된다. 야스콘은 펠리아에게서 달빛의 축복에 관해 많은 것을 들어왔다.
 
 -나의 지혜롭고 용맹한 아들. 너는 정말 인간과 나이트 엘프의 장점으로 충만해 있어.
 
 펠리아는 늘 야스콘을 자랑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세상에 없다.
 오크 역시 달빛을 좋아한다. 하지만 오크의 경우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밤을 좋아한다는 것이 더 옳았다. 더불어 드워프 역시 환한 대낮보다는 밤에 대한 친화력이 강했다. 어쩌면 이들 셋이 두터운 교분을 쌓으며 마음을 나눈 이유 중의 하나로 꼽힐 만도 했다.
 셋은 밤을 새워 죽어 간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다른 생존자들을 기다렸다.
 야스콘은 생각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열일곱 살의 달은 어처구니없는 비극 속에서 맞이했다. 그러나 펠리아의 말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열일곱이 되면 첫 보름달이 뜨는 날에 대륙 절반의 수호자 에크레탐을 찾아가자고 했었다.
 
 -그가 너에게 축복을 줄 것이다. 나와 약속했으니 잊었을 리가 없어.
 -…….
 -기대되지 않니? 드래곤을 만나는 일. 그는 나를 잊지 않았을 거야.
 
 펠리아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수호자라기보다는 침묵의 군림자에 속하는 그린 드래곤 에크레탐이 무슨 축복을 준단 말인가? 잠시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야스콘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야스콘은 에크레탐을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멀지 않다. 말을 달려 사나흘이면 레어에 닿을 수 있다. 더구나 해마다 맑은 성정의 시종을 뽑아 바치는 행사가 바로 이번 보름날이었다.
 ‘그들을 따라가면 문제없다.’
 그 일은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용병들에게 한 번 더 복수를 하고 더불어 동생들의 행방을 물어볼 시간은 충분했다.
 숲이 출렁이면서 2명의 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록시안 인근의 오크 영지에서 참상 소식을 듣고 온 오크들이었다.
 “안됐군. 역시 인간들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오크 하나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
 야스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우우우!
 다시 늑대의 울음이 인근에서 들렸다.
 “크로네, 여긴 위험하다. 갈 곳이 없으면 오크의 영지로 가자. 드워프와 저 인간도 네 친구니까 받아 줄 수 있어.”
 오크가 크로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크로네는 슬쩍 야스콘을 바라보았다. 그는 먼 산을 보고 있었다. 크로네가 간다면 잡지 않을 눈치였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크로네는 또렷이 의사를 밝혔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하지만 그녀는 명색이 오크의 전사다. 결코 이렇게 떠날 수는 없었다.
 “가면서 늑대를 만나도 죽이지 마.”
 야스콘은 떠나는 오크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슬쩍 돌아보고는 대답도 없이 떠났다.
 오크들이 돌아가자 야스콘은 그 자리에 헬소드를 칼집째 내리꽂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타이켄이 따라 앉자 크로네도 앉았다.
 “야스콘, 헬소드의 폼멜 쪽에…….”
 문득 크로네가 야스콘의 소드를 가리켰다.
 “……?”
 야스콘은 소드를 확인했다. 폼멜의 작은 빈 구멍에서 뭔가 희끗거렸다.
 ‘편지?’
 그것은 펠리아의 편지였다. 구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깨끗한 편이었다.
 
 [편지]사랑하는 나의 아들 야스콘
 엄마는 네가 내 아들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네 아버지가 나의 남편인 것이 그렇듯이. 축제를 며칠 앞두고 연일 악몽을 꾸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을 위해 편지를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글을 쓴다.
 너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내 아들이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야. 엄마는 원래 엘프를 낳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인간인 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여 결혼한 사실은 이미 너희도 모두 알고 있지. 그런데 아스캄과 결혼하고 나니 놀랍게도 너를 잉태할 수 있었다. 엄마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더욱 놀라운 것은 네가… 바로 더블 하트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더블 하트!
 그건 한 생명체에게 있어 최대의 축복이야. 하지만 그 하트는 네가 열일곱이 되는 날 달밤이 되어야 진가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건 전설 속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엄마는 이번 축제가 더 기다려진다. 네 열일곱의 생일은 말할 것도 없고. 엄마의 기대대로라면 넌 지상 최고의 나이트 엘프 전사를 뛰어넘을 거야. 인간이면서 말이지. 아마 그런 기대감 때문인지도 몰라. 요즘 이렇게 많은 악몽을 만나는 건.
 사랑하는 나의 아들 야스콘.
 부디 이 엄마의 염려가 기우로 끝나 네 앞에서 이 편지는 찢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더블 하트의 축복을 내 설레는 가슴으로 확인하면서 말이야.
 사랑한다, 야스콘.[편지]
 
 편지는 그렇게 끝났다. 편지를 쥔 야스콘의 손이 한없이 떨렸다. 펠리아는 자신의 운명을 또 한 번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고 쓰셨어?”
 “아무것도…….”
 야스콘은 펠리아의 편지를 삼켜 버렸다. 그때만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울지 마. 그래도 너는 나보다 최소한 한 가지는 행복해.”
 “동생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거?”
 “아니! 슬플 때 울 수 있다는 거. 오크에게는 그것도 없잖아?”
 크로네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야스콘은 시선을 먼 하늘로 돌렸다. 셋은 여전히 맹렬한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침묵으로 그 밤을 지새웠다.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르자 야스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반신이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표시 내지 않았다. 크로네도 타이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어디 가?”
 숲으로 향하는 야스콘을 보며 크로네가 물었지만 야스콘은 대답하지 않았다.
 “타이켄, 느낄 수 있지? 야스콘의 얼굴에서 사랑스러운 미소가 사라졌어.”
 “우어우어!”
 드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스콘의 트레이드마크는 햇살처럼 포근한 미소였는데… 그걸 좋아하는 이종족이 많아서 내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우어…….”
 타이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생들을 찾으러 가는 건가?”
 이번에는 크로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야스콘은 잠시 후에 돌아왔다. 그의 어깨에는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걸려 있었다.
 “요리할 힘은 남아 있겠지?”
 야스콘이 크로네를 바라보았다. 크로네의 또 다른 장기라면 바로 요리였다. 남자 못지않게 대담한 그녀였지만, 인간과 이종족의 요리까지 섭렵한 터였다. 해마다 프록시안의 축제일이면 그녀의 요리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메인 요리는 늘 야스콘 가족의 몫이었다. 크로네가 다른 사람이나 이종족들은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
 “…….”
 크로네가 야스콘을 바라보았지만 야스콘은 침묵했다. 크로네도 입을 꾹 다물었다. 침묵이 깨진 것은 사슴 고기가 다 익을 무렵이었다.
 “먹어! 오늘 밤을 위해.”
 야스콘은 사슴의 뒷다리를 찢어 크로네에게 건넸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크로네와 타이켄은 잘 알았다. 오늘은 용병들이 본거지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먹어 두라잖아. 저녁에 용병들 앞에서 비실거리지 말고.”
 크로네가 고개를 가로젓는 타이켄의 뒤통수를 고깃덩어리로 장난스레 후려치며 말했다. 타이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깃덩어리를 받아 들었다. 그의 나이는 올해 22살, 제일 연장자였지만 이들 사이에 나이는 장벽이 되지 못했다.
 야스콘은 떨리는 손을 참으며 고기를 물어뜯었다. 마치 용병 하나하나를 물어뜯는 기분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서 야스콘과 크로네, 타이켄은 유토피안 광장 중앙에 선 평화의 상징물에 육각형의 별을 표시했다. 프록시안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표식으로, 그 의미는 이랬다.
 [볼드]생존자![볼드]
 누군가 또 다른 구성원이 살아 있다면 별 표식은 늘어나 있을 것이다.
 2. 로즈-그녀를 만나다
 
 저녁 무렵 출동에서 돌아온 용병들은 모두 50여 명이었다. 프록시안을 기습한 레드 글로리안 용병단은 총 4백여 명에 달했다. 조금 벅차긴 하겠지만 현재의 능력으로 보아서는 그럭저럭 해볼 만한 무리였다.
 “요새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먼저 달려간 용병 둘이 돌아오며 무리를 세웠다.
 “어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 감히!”
 용병들은 이내 말에서 내려 경계 태세를 취했다. 용병이라고 해서 모두 다 전투에 능한 것은 아니다. 용병단의 최소 전투대형은 대략 50여 명으로 이루어진다. 그중에는 관리자도 있고 하다못해 요리 담당도 있다. 그러니 한 용병단에서 전투를 맡는 용병은 대략 3백 명 안팎이었다.
 야스콘은 산자락의 나무 위에서 용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펠리아와 아스캄의 주검이 떠오르며 분노가 치밀었지만 꼭꼭 눌러두었다. 전투에서는 누구든 감정이 앞서면 필패必敗한다는 펠리아의 말은 야스콘에게도 철칙이 되었다. 그것을 어기는 바람에 펠리아가 죽은 것이다.
 또 다른 언덕 위에는 크로네가 있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그녀는 미리 준비한 홰에 불을 붙일 것이다. 일종의 유인책이었다. 길목에는 타이켄이 자리 잡고 있다. 용병들이 몰려오면 그가 바위를 굴릴 것이다. 나머지는 야스콘의 몫이었다. 더러는 야스콘을 따르는 늑대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겠지만.
 용병들이 요새로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시작한다, 크로네.’
 야스콘은 몸을 일으키며 먼발치의 용병 둘을 잡기 위해 2개의 화살을 동시에 겨누었다.
 
 -화살에 독을 발라!
 
 치를 떨던 크로네의 말이 스쳐 갔다. 그녀는 아버지 투르칼에게서 독초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야스콘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건 프록시안에서는 영주의 명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게다가 나이트 엘프들의 활 솜씨는 모든 종족이 인정하는 바다. 그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야스콘이었지만 활만큼은 펠리아와 쌍벽을 이루는 명궁이었다.
 팅!
 경쾌하게 시위를 떠난 화살은 성루 위에서 망을 보던 초병 둘을 단숨에 거꾸러뜨렸다. 확실히 열일곱의 달빛을 쬐면서 달라졌다. 활의 사정거리도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적이다!”
 그렇잖아도 잔뜩 갈기를 세우고 경계를 펴던 용병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야스콘은 횃불 2개를 들고 어지럽게 뛰었다. 세 마리의 늑대도 야스콘을 따라 뛰었다. 그들은 야스콘을 잘 따르는 늑대였다.
 용병들이 뛰어왔지만 야스콘을 잡을 수는 없었다. 나이트 엘프의 피를 받은 야스콘. 더구나 심폐기능은 이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다.
 거리가 벌어지자 야스콘은 횃불을 꺼 버렸다. 늑대들이 튀어 나가면서 용병을 물고 늘어졌다. 비명이 울려 퍼지자 약속한 듯이 어둠을 따라 횃불이 하나 둘 일어났다.
 “저기다!”
 용병들이 산자락을 보며 소리쳤다. 당장 한 무리의 용병들이 추격하기 시작했다. 낮은 능선의 크로네는 횃불마다 빠짐없이 불을 붙였다. 멀리서 본다면 수십 명으로 보일 만큼 많았다.
 횃불이 늘어나자 추격대도 늘어났다. 기세등등하게 능선으로 추격하던 용병들은 맞이한 것은 타이켄의 바위 세례였다. 집채만 한 바위도 흔들어 대는 그였으니 바위 세례는 상상을 초월했다.
 “으아악!”
 오우우!
 비명은 늑대를 불렀다. 늑대들은 나뒹구는 용병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야스콘은 그들의 비명을 들으며 달렸다. 흡사 밤새가 어둠을 가르는 듯 빠르고 민첩했다.
 “저기 뭐가 움직인다!”
 요새에 남은 용병 하나가 소리쳤지만 그 목에는 이미 화살이 박혀 있었다.
 “적이 가까이 있다!”
 용병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며 튀어나왔다.
 촤라락!
 야스콘의 화살은 한 번에 2개씩, 혹은 3개씩 어둠을 갈랐다. 용병들이 몇 명 쓰러졌지만 일부는 가까이 다가왔다. 야스콘은 활을 거두고 어머니의 헬소드를 뽑아 들었다.
 카앙!
 맑은 쇳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어머니! 이제 당신의 헬소드가 내 것이 되었습니다.’
 제법 덩치가 큰 용병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는 야스콘의 소드를 가볍게 막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허전했고,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렸다.
 “으악!”
 비명은 그 곁에 있던 용병이 질렀다. 덩치의 용병에게서 머리통이 반듯하게 떨어져 나간 것이다. 머리통이 눈을 끔벅이는 사이에 몸통은 롱소드를 허공에 휘두르고는 풀썩 쓰러졌다.
 “젠장! 귀신한테 홀렸나? 아니면 마법사?”
 용병들이 침을 뱉으며 협공을 펼쳤다. 야스콘은 2개의 검을 막아 내고는 용병 무리의 원 안으로 들어갔다.
 “겨우 한 놈 아냐? 죽어랏!”
 기세등등한 용병들이 일제히 소드와 창을 내질렀지만 그보다 먼저 그들의 심장을 꿰뚫은 것은 수백 가닥씩 짝을 이룬 야스콘의 머리카락이었다.
 “으헉!”
 용병들은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온 물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저 겁 없는 놈의 머리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츄릿!
 야스콘은 단숨에 머리카락을 거두었다. 그러자 용병 일곱이 피를 토하며 무너졌다. 야스콘은 거침없이 적진을 향해 내달았다. 남은 용병 무리 10여 명이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크하핫! 내가 놈을……?”
 맨 앞의 용병은 분명 야스콘을 베었다고 생각했다. 오랜 용병의 경험에 의하면 분명 그랬다. 하지만 야스콘은 빨랐다. 소드를 휘두르는 기척도 없이 용병의 목을 관통시켰다. 직선으로 날아간 다크 블레이드였으니 워낙 빨라 용병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가뜬하다.’
 야스콘은 어머니의 헬소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열일곱의 밤에 비롯된 기적의 시작이었다. 도약은 한없이 높았고 회전력도 눈에 띄게 빨라졌다. 몸만 빨라진 것이 아니었다. 부수적으로 눈도 빨라졌다. 웬만한 적의 움직임은 그 길이 훤히 보였다.
 “개새끼!”
 우락부락한 용병 둘이 짝을 이루며 달려들었다. 야스콘은 후웁 숨을 들이마신 후에 그들의 심장을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야스콘의 헬소드가 벼락처럼 허공을 가르고 들어갔다.
 “크아악!”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다크 블레이드가 또 1명의 용병을 잠재웠다.
 카앙!
 “……?”
 순간, 강력한 금속음과 함께 야스콘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더는 못 봐 주겠구나. 마법 가발은 아닐 테고. 무슨 속임수를 쓰는 모양인데… 꼬마!”
 어둠 속에서 거대한 덩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2미터를 훌쩍 넘는 키에 단단한 근육질의 용병. 어른 키보다 큰 것 같은 클레이모어를 겨눈 그는 바로 프록시안에서 오우거 형제 둘을 간단히 베어 버린 그 거구가 틀림없었다.
 “승리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은 너희 용병들이야.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을 텐데…….”
 야스콘은 헬소드를 수평으로 겨누었다.
 “하긴 그렇긴 해.”
 덩치가 히죽 웃었다.
 “그런데 설마 네가 저 안의 동료들을 죽인 것은 아니겠지?”
 “설마가 맞아.”
 “……?”
 덩치의 입가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클레이모어의 날을 쓰윽 핥더니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으하앗!”
 캉!
 마치 강철이 쏟아지는 것 같은 공세였다. 야스콘은 재빨리 방어했지만 손목의 통증이 허리까지 전달되며 풀썩 주저앉았다.
 “아까 보니 쥐 똥만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에다 머리카락에서는 암기가 나오는 것 같던데, 또 써 보지 그래?”
 거구의 클레이모어가 다시 날아들었다.
 “어헛!”
 야스콘은 재빨리 방어했지만 충격에 밀려 몇 미터 밖으로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
 “별거 아니군. 확실히 연봉이 낮은 싸구려 용병들은 숫자만 믿고 덤비는 경향이 있어. 이런 꼬마에게 작살이 나다니 말이야.”
 거구는 클레이모어를 어깨에 걸친 채 히죽 웃었다.
 “잘 가거라. 반듯하게 반 토막을 내 주시마!”
 후웅!
 거구의 클레이모어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내리꽂혔다.
 카앙!
 야스콘은 피할 겨를도 없이 사력을 다해 막았다. 하지만 거구의 완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클레이모어는 점점 가슴을 압박해 왔다.
 “매력적이구나. 발악하는 그 모습! 내 취향이야. 주점에서 만났다면 밤새 사랑해 주었을 텐데…….”
 거구가 징그러운 혀를 날름거렸다. 생긴 것과는 딴판으로 동성애자인 것 같았다.
 ‘죽여라! 이놈을 죽여!’
 야스콘은 체모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여유가 없었다. 거구의 클레이모어에서 풍기는 싸한 살기가 콧등 앞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잘 가라!”
 누런 이빨을 드러내던 거구의 표정이 별안간 일그러지자 위태롭게 압박하던 클레이모어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야스콘은 재빨리 몸을 굴리며 위기의 상황에서 빠져나왔다.
 거구는 클레이모어를 놓은 채 사타구니를 감싸 쥐고 끙끙거렸다.
 “내키진 않았지만, 털은 머리에만 나 있는 게 아니야.”
 말하는 야스콘의 가랑이 속으로 한 줌의 털이 스며 들어갔다. 그게 바로 거구의 낭심을 찌른 주인공들이었다.
 “끄으… 이놈이 내 보물 1호를…….”
 거구가 일어서려는 찰나를 야스콘의 헬소드가 놓칠 리 없었다.
 츄릿!
 “……!”
 바람을 가른 야스콘의 헬소드는 거구의 목덜미에서 멈춰 버렸다. 탄탄한 목 근육 때문에 소드가 박혀 버린 탓이었다.
 “이… 이……!”
 바르르 떨던 거구의 손이 클레이모어로 다가갔다. 하지만 야스콘이 좀 더 빨랐다. 갈기처럼 곤두선 야스콘의 머리카락들이 거구를 향해 섬광처럼 달려들었다.
 “크아악!”
 거구는 어둠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야스콘의 머리카락은 마치 홍수처럼 일제히 그의 심장을 관통해 버렸다. 그는 마침내 클레이모어를 떨구더니 야스콘을 향해 히죽 웃음을 지으며 쓰러졌다.
 죽을 때도 폼 나게 죽는다.
 어떤 용병들은 그게 신조였다. 아마 그도 그 신조에 충실한 인간 같았다.
 ‘굉장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야스콘의 눈에서 은빛 살기가 잦아들었다. 확실히 용병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이번 상대야말로 최정상급의 용병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후우!’
 거친 날숨과 함께 야스콘은 이마의 식은땀을 쓸어내렸다.
 “위험해, 야스콘!”
 그때 뒤편에서 크로네의 목청이 찢어졌다. 빙글, 헬소드의 칼끝을 뒤쪽으로 겨눈 야스콘이 힘껏 후방을 찔렀다.
 “끄으…….”
 복부를 찔린 기습자가 신음을 내며 도끼를 떨구었다. 야스콘은 그의 두 눈을 직시했다. 뒤이어 두 뭉치의 머리카락이 뱀처럼 일어서더니 순식간에 기습자의 눈을 파고들었다.
 “크아악!”
 눈동자가 터진 기습자가 얼굴을 감싸고 발악을 했다.
 “고마워.”
 야스콘은 크로네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크로네와 타이켄은 남은 용병을 몰아붙였다. 억센 타이켄이 워해머를 휘두르면 크로네는 타이켄의 어깨를 딛고 좌우로 회전하면서 적을 찍었다.
 힘과 탄력의 결합.
 둘의 조합은 완벽했다. 그것은 프록시안의 최고 전사들도 기꺼이 인정한 실력이니까.
 “커억!”
 크로네의 쌍날도끼가 쾌속으로 내리꽂히자 용병의 어깨가 복부까지 갈라져 버렸다.
 “…살려 줘.”
 남은 용병 4명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목숨이 아까운가?”
 야스콘이 후욱 숨을 몰아쉬며 싸늘하게 물었다.
 “난 고향에 아이가 있어. 제발…….”
 그 말을 하던 용병은 신음을 내며 뒤로 넘어갔다. 야스콘의 헬소드가 그의 심장을 찌른 것이다.
 “프록시안을 짓밟은 너희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야스콘은 피가 뚝뚝 흐르는 헬소드를 용병들에게 겨누었다.
 “한 가지 묻겠다. 말을 해도 죽고 하지 않아도 죽는다. 협조하면 고통은 덜어 주겠다.”
 어디에서 그런 비장함이 배어나온 것일까? 야스콘의 얼굴에서 어린 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으으…….”
 용병들은 넋을 잃었다. 야스콘의 눈동자가 두려웠다. 푸른 살광이 감도는 그것은 이미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프록시안에서 잡아간 구성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지?”
 “우린… 몰라. 대장이 상단에 넘겼다는 것 외에는…….”
 “상단? 루파스?”
 “아마… 그럴 거야.”
 “그럼 메카치를 아나? 너희들의 앞잡이이자 우리들의 배신자.”
 “그런 건 액틴 대장만이 알아.”
 “대장은 언제 돌아오나?”
 “다른 영주의 의뢰로 원행을 떠났으니 몇 달은 걸릴 거다.”
 “몇 달?”
 “운 좋은 줄 알아.”
 “운? 좋은 건 너희 대장이야. 최소한 그 시간만큼 목숨을 벌었으니…….”
 야스콘은 옆에선 타이켄의 워해머를 가로챘다.
 “야스콘!”
 “보고 싶지 않으면 고개 돌려.”
 야스콘은 싸늘한 음성으로 크로네에게 말했다.
 퍽퍽퍼벅!
 야스콘은 전의를 상실한 용병들의 머리를 차례차례 워해머로 박살 내 버렸다.
 “그만! 미쳤어?”
 크로네가 달려들어 야스콘을 막았지만 그 힘을 당할 수 없었다.
 “그래, 미쳤다. 대체 미치지 않고 어떻게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너는 할 수 있어?”
 야스콘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절규에 압도당한 크로네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말리지 마. 누군가 말린다면 그 머리통도 이걸로 날려 버리고 싶으니까!”
 까-! 까-!
 야스콘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크로네는 단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퍼억!
 야스콘의 손에 들린 워해머는 마지막 남은 용병의 머리를 박살 내고야 타이켄의 손에 돌아왔다. 셋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놈… 남았어.”
 크로네가 눈을 까뒤집고 부들거리는 기습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스콘의 의향을 묻는 것이다.
 “내버려 둬.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죽게 될 테니까. 누군가 한 놈은 대표로 고통을 짊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야스콘은 모진 호흡을 토해 냈다. 기습자에게는 고통을 덜어 주는 자비도 베풀고 싶지 않았다.
 “심하긴 했지만 열일곱이 되니까 진짜 마음에 드네. 남자라면 그 정도는 화끈해야지.”
 “중요하지 않아.”
 “하긴. 그건 그렇고, 내친김에 용병단 놈들을 찾아가서 박살 낼까?”
 크로네가 쌍날의 도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아니! 동생들이 더 급해. 액틴이 우리가 무서워 달아날 리는 없으니.”
 “냉철한 판단이야. 당연히 그게 낫겠지.”
 크로네는 도끼를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타이켄하고 요새에서 값이 나갈 만한 물건을 좀 골라.”
 “그런 건 뭐 하려고? 거추장스럽기만 하잖아?”
 “필요한 데가 있어.”
 “술과 여자? 찌든 성인들 흉내를 내기엔 아직 이르지 않아?”
 “루파스 상단. 거래를 하려면 물건이 있어야 하잖아?”
 야스콘은 우두커니 크로네를 바라보았다.
 
 용병단의 창고는 넓었다. 주로 눈에 띄는 것은 술과 말린 고기였다. 한바탕 전투를 치루고 나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고 노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다.
 “웬 말가죽이 이렇게 많지? 공예품도 그렇고…….”
 크로네가 창고 여기저기 쌓인 말가죽을 차며 말했다. 최상품이었다.
 “우어우어!”
 타이켄은 역시 공예품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듯하지만 네 할아버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우우어어!”
 크로네가 묻자 타이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하고 이거나 부숴. 말가죽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야스콘이 벽에 고정된 견고한 상자를 가리켰다. 타이켄의 워해머가 단숨에 상자의 자물쇠를 박살 내 버렸다. 누런 유혹으로 번쩍이는 금화가 쏟아졌다.
 “넉넉히 챙겨. 상단이라면 사람의 목숨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친구들이니까.”
 “사람만?”
 야스콘의 말에 크로네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종족까지 포함해서.”
 야스콘이 자신의 발언을 수정했다. 크로네와 타이켄의 긍지를 잊었던 것이다.
 창고를 나온 야스콘은 용병대장의 방을 부수고 들어갔다. 액틴의 방은 화려했다. 야스콘은 피 묻은 장창 하나를, 벽에 자랑스럽게 걸린 트롤의 가죽에 정통으로 꽂았다.
 텅!
 장창은 야스콘의 분노처럼 벽에 박힌 채 파르르 떨었다.
 ‘죽지 말고 살아 있어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야스콘의 눈에서 불꽃이 흘러내렸다.
 
 세 마리의 말을 끌고 승자의 모습으로 용병 본부를 걸어 나왔지만 기분은 더러웠다. 무엇을 한들 프록시안의 참상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 프록시안을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용병단을 휩쓸어도 가실 것 같지 않은 갈증이 서러웠다.
 야스콘과 크로네, 타이켄은 푸른 달빛이 내리는 언덕 위에서 하늘을 보았다. 알 수 없는 전율이 몸 안에서 폭풍우처럼 파닥거렸다.
 “으아아아!”
 아아-!
 꼬리를 문 절규가 어둠을 타고 맹렬하게 뻗어 나갔다.
 “워어어어!”
 “어어어!”
 크로네와 타이켄도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세상이여! 이 마른 통곡을 들으라! 위로할 생각일랑 말고 그저 들으라! 누구든 타인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
 숨을 돌린 야스콘의 시선이 처절하게 뻗어 갔다. 하이랜드의 도심이 잠든 먼 곳, 루파스 상단이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우오오오!
 멀리서 늑대의 슬픈 화답이 야스콘의 귓전을 타고 들어왔다.
 
 @
 
 “난감하네.”
 마치 수도자처럼 변장한 크로네와 타이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크와 드워프인 것을 감추기 위해 로브를 걸치고 깊은 후드를 쓴 모습이었다.
 “별수 없잖아. 프록시안을 제외한 다른 곳의 사람들은 이종족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강해. 전에도 장원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인 거 생각 안 나?”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니까 확인 사살할 필요는 없어.”
 크로네는 후드를 신경질적으로 눌러썼다.
 타이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인간들 중에는 좋은 인간과 나쁜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물론 모든 존재가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루파스 상단이라면 대륙 상단이잖아? 규모가 엄청날 텐데 우릴 만나 줄까?”
 크로네가 물었다.
 “상단은 이익을 따라 움직인다고 했어.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야스콘은 말고삐를 당겼다. 눈부신 은발이 그의 어깨에서 우수수 피어올랐다.
 “쳇! 오래 살다 보니 오크가 로브를 입는 날도 있고. 나 출세했네. 어때, 제법 한 가닥 하는 마법사처럼 보이지 않냐?”
 “우어우어!”
 말에 오른 타이켄이 목청껏 동의했다.
 두두두!
 세 필의 말은 산자락을 끼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꽤 멀었다. 그렇지만 목적지에 닿는 동안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이랜드 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성은 화가 날 정도로 평온했다. 프록시안과 용병대의 비극은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먼 세계의 이야기라는 듯이…….
 그들 셋이 시장 통에 접어들었을 때에야 광장의 끝이 소란스러웠다.
 “뭐지?”
 “그냥 지나쳐.”
 야스콘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성에 들어서면서부터 체스터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야스콘! 노예시장이야.”
 그러나 크로네는 관심을 끊지 못했다. 시장 한편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노예를 구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자! 돈을 걸어요.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심심풀이 종족 대결 드워프와 오크의 대결입니다.”
 청중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야스콘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시작합니다. 지상 최강의 오크와 대륙 최고의 전사 드워프으!”
 멘트가 끝나면서 오크 하나와 드워프 하나가 울타리 안으로 밀쳐졌다.
 “류시켄트 아저씨와 모이트라 아저씨야.”
 후드 안에서 크로네의 눈빛이 반짝였다.
 “야스콘!”
 “흥분하지 마. 우린 체스터를 만나러 왔다.”
 야스콘은 차갑게 반응했다.
 “뭐야? 넌 저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야?”
 “응!”
 “기가 막히군. 오크와 드워프라서? 저들이 만일 인간이나 엘프라도 그렇게 말할 거야?”
 “그래.”
 “……!”
 크로네는 말문이 막혔다. 며칠 사이에 야스콘의 행동은 돌변했다. 최고의 전사감이자 허브와 차의 향기를 사랑하던, 게다가 해맑은 미소까지 겸비했던 순수함은 어디에서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벽이 버티고 서 있는 듯한 느낌뿐.
 “가자!”
 “안 돼. 난 못 가.”
 크로네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어쩌려구?”
 “어쩌긴? 구해야지. 어쩌면 저들이 네 동생들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
 그 말이 야스콘의 이성을 흔들었다. 노예의 몸이 되었으니 다른 노예들의 행방도 알고 있을 것이다. 크로네의 생각이 옳은 것 같았다. 야스콘은 노예들의 대결로 시선을 옮겼다.
 촤앙!
 오크와 드워프는 둘 다 숏소드를 들었다. 둘은 전사가 아니었으니 롱소드나 바스타드보다는 손에 적합할 것이다. 또한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죽여라! 죽여!”
 오크의 검풍으로 드워프의 팔뚝에서 피가 솟구치자 관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둘의 실력은 대등했다. 오크는 만드라고라 약재를 캐러 다녔고 드워프는 연장용 손잡이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그러니 기술보다는 완력에 의존한 대결이었다.
 카앙!
 짜릿한 금속성과 함께 드워프의 숏소드가 날아갔다. 승부가 갈린 것이다.
 “와아아!”
 “죽여! 죽여!”
 관중들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익명을 즐기는 인간의 본성은 끝내 피를 원했다.
 난감한 오크는 주인으로 불리는 털보를 돌아보았다.
 그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엄지를 내린다면 동료인 드워프를 찔러야 하는 것이다.
 “잠깐!”
 털보가 상황을 즐기는 사이에 나선 것은 야스콘이었다.
 “뭐요?”
 “당신, 노예를 팔 것이 아니었나? 죽이면 손해잖아?”
 야스콘은 굵직한 저음으로 말했다.
 상대를 제압하려면 거칠게 나가라. 목은 부드럽게 끌어당기고 가슴은 내밀어라. 목소리에 쇳소리를 첨가하면 효과적일 것이다.
 야스콘은 그 정석에 따랐다. 마음은 여전히 전시체제였으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그렇긴 하지.”
 털보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야스콘을 훑어보았다.
 “둘 다 사겠다.”
 “그건 곤란한데. 오크는 이미 임자가 정해져 있거든.”
 “아쉽군. 마침 마차를 돌볼 드워프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죽여 버리느니 싼 값에라도 파는 게 낫겠지.”
 야스콘이 작은 주머니를 던졌다.
 “히익!”
 주머니를 열어 본 털보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금화가 자그마치 2개나 들어 있었다.
 “나이는 어린 양반이 화끈하군. 거래하겠소. 야! 거기 너희들, 드워프에게 족쇄를 채워서 이 화끈한 공자님께 인계해라.”
 “예, 주인님!”
 하인 2명이 창을 들고 엉성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취향이 독특하시군. 대개는 승리한 노예를 사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단조로운 것은 질색이다. 색다른 맛이 있어야지.”
 “호오! 하여간 요즘 젊은이들이란…….”
 털보는 금화 하나를 꺼내 어금니로 깨물며 말했다.
 “야스…….”
 끌려 나온 드워프는 단번에 야스콘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름을 다 말하기도 전에 야스콘의 손이 뺨을 향해 날아갔다.
 쫘악! 쫘악! 쫘악!
 야스콘은 몇 번이고 드워프의 뺨을 쳤다. 그런 다음 소드를 목에 겨누고 힘주어 말했다.
 “이 순간부터 내가 너의 주인이다. 복종하지 않으면 그 목을 잘라 돼지 먹이로 줄 것이다.”
 “…….”
 야스콘의 돌연한 태도에, 눈치 빠른 드워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키햐! 노예를 다룰 줄 아시는군. 다른 노예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만 하십쇼.”
 “그런가? 이렇게 다 큰 노예들 말고 어린 노예들은 없나? 기왕이면 투자는 조금만 해도 좋을 만큼 적당한 애들…….”
 “아깝군. 프록시안에서 잡아 온 물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모양인데 이미 다 팔려 나갔어. 어린 노예들은 워낙 인기가 좋아서 말이야.”
 “다시 살 수 없겠어? 계산은 후하게 쳐줄 테니…….”
 야스콘은 보석 하나를 슬쩍 내비쳤다. 이런 것은 거래의 귀재로 불리던 쿠프에게 배운 것이다. 그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이런 식으로 조달하곤 했다.
 “아무래도 알아봐야겠군요. 어떻게 연락을 드리죠?”
 “거처를 알려 주면 이따가 찾아가지.”
 “밤을 새워서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하이 브릿지 건너편, 지붕이 붉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알았어. 이따가 보자구.”
 야스콘은 손과 발에 족쇄가 채워진 드워프를 끌고 돌아섰다.
 “어이! 거기, 너희들!”
 야스콘이 멀어지자 털보가 두 하인을 불렀다.
 “예.”
 “저놈을 쫓아가서 어디에 살고 뭐 하는 친구인지 알아 와. 물건 값을 치르는 꼴을 보니 돈은 많고 세상 물정은 모르는 것 같단 말이야. 게다가 이 근방의 귀족 자제는 분명 아니고…….”
 털보는 히죽 징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스콘은 일단 구출한 드워프를 산자락으로 데려갔다. 상처가 있긴 했지만 깊지는 않았다.
 “혹시 내 동생들을 보지 못했어요?”
 야스콘이 상처를 돌보며 물었다.
 “봤어. 하지만 노예상에게 끌려오면서 헤어졌어. 놈들이 아이들과 성인을 격리시켰거든.”
 “다른 사람들은요?”
 “인간 성인은 노예에 없어. 두어 명 끼긴 했었지만 용병들이 가려내서 모조리 죽였어.”
 ‘지독한!’
 야스콘은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내 동생들은 어땠어요? 다친 곳은?”
 “스코티와 레모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폴카는 다친 것 같았어. 피를 흘리고 있었거든.”
 카앙!
 말하는 사이에 타이켄이 드워프의 족쇄를 박살 내 버렸다.
 “동생을 찾으러 왔나? 용병들의 요새에 제물로 잡혀간 것으로 알았는데 용케도 탈출했군.”
 “운이 좋았습니다.”
 야스콘은 간단히 대답했다.
 “이제 어쩔 거야? 프록시안은 폐허가 되어 버렸으니…….”
 “복구할 겁니다.”
 “…….”
 야스콘이 말했지만 드워프는 대꾸하지 않았다. 쑥밭이 된 곳을 갓 청년이 된 셋이서 어쩐단 말인가?
 “노예상의 집에 프록시안의 구성원들이 남아 있나요?”
 “몇 명 있을 거야. 그나마 내일 아침이면 대륙 여기저기로 팔려 나가겠지만.”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려고? 여기 인간들은 프록시안 토벌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야. 소문을 들으니 우리가 언젠가는 인간을 공격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 더 비극적인 것은 영주가 뭔가 음모를 꾸미는 모양이야. 이종족에게 최악의…….”
 “인간들 대부분은 그래요. 얼마나 이기적인데요. 다른 영지에서도 우리를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은 드물죠. 프록시안에 살던 인간을 제외하고는…….”
 크로네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혹시 메카치의 행방에 대해 들었나요?”
 “아니! 그놈은 돈을 챙겨서 멀리 튄 것이 틀림없어.”
 “…….”
 “프록시안이 이 꼴이 될 줄도 모르고 쿠프는 대마법사 쟈칼티우스를 찾아갔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젠 대마법사가 국왕을 만나 프록시안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해 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됐어.”
 야스콘과 크로네는 침묵했다.
 야스콘이 열일곱의 달빛을 기대했다면 프록시안의 구성원들은 자유와 희망의 도시를 공인받으려는 수완가 쿠프의 행보를 기대하고 있었다. 혼란기의 대륙이라 다른 영주들은 믿을 수 없었지만 동쪽의 대마법사 쟈칼티우스는 비교적 정치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국왕과의 교분도 깊어, 프록시안의 자유 영지 선포를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영주 아스캄이 보낸 특사가 바로 쿠프였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그 덕분에 쿠프 아저씨는 죽지 않았잖아요.”
 야스콘이 말했다.
 “그럼 뭐 해? 정작 프록시안이 작살났는데…….”
 드워프는 치를 떨었다.
 “쉬세요.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노예상 털보에게 가려고?”
 “그건 나중 얘기예요. 우선은 루파스 상단으로 갑니다. 체스터를 만나려고요.”
 “체스터? 너희도 그걸 알아?”
 “뭘 말이죠?”
 야스콘이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프록시안을 공격한 용병을 움직인 것이 바로 그놈이야. 포로가 되면서 그 말을 들었어.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잊으셨어요? 내 몸에 엘프의 피가 흐르는 거. 엘프의 귀는 쫑긋해서 더 많은 말을 듣잖아요.”
 야스콘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위험해. 루파스 상단이라면 호위 전사만 해도 백 명이 넘는 곳이야.”
 “그게 겁나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그냥 프록시안의 참상 위에서 통곡이나 하고 있었어야 했겠죠.”
 ‘변했다! 이 아이 야스콘…….’
 드워프 모이트라는 야스콘에게 압도되었다. 그것은 생소한 느낌이자 전율이었다. 비범한 인물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단단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과연 아스캄과 펠리아의 핏줄이다.’
 모이트라는 야스콘의 카리스마에 전율을 느꼈다.
 
 다시 시내로 들어온 야스콘은 값비싼 복장을 구했다. 돈은 문제가 없었다. 크로네의 로브도 황금 장식이 달린 화려한 것으로 마련했다. 상단의 단주인 체스터를 만나기 위한 포석이었다.
 “우어우어!”
 “왜 네 건 없냐고?”
 “우어!”
 “넌 밖에서 기다려.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공연히 경계심만 부추길 거야. 말도 지켜야 하고… 알겠지?”
 “우…어!”
 드워프는 섭섭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루파스 상단은 특급 상단답게 밤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그나마 밤이라 한적한 편이라는 게 주변 상인들의 귀띔이었다.
 “루파스 님을 만나고 싶다.”
 야스콘은 거만하게 말했다. 수완가 쿠프가 알려 준 세상의 처세가 그랬다.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돈이 있다, 네게 도움이 된다, 그런 분위기를 팍팍 풍겨야 미끼를 무는 것이다.
 “단주님과 선약이 있습니까?”
 눈매가 매서운 집사가 물었다.
 “이 정도면 선약이 될까?”
 야스콘은 상자 하나를 열어 보였다. 용병대에서 집어 온 작은 보석함이었다.
 “……!”
 집사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반응 한번 빠르군.”
 크로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건물이나 잘 숙지해 둬. 여차하면 튀어야 할 테니까.”
 “쳇! 뒷모습은 보이기 싫은데 말이야…….”
 크로네가 투덜거릴 때 집사가 다가왔다.
 “지금 중요한 손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곧 나오신다고, 일단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야스콘과 크로네는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싸구려 라벤더로군.”
 야스콘은 향기만을 음미하고는 찻잔을 놓았다. 아스캄이 만들어 주던 차와 비교하자면 쓰레기 같은 차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런거리는 소리가 그치면서 집사가 들어왔다.
 “공자님만 들어오시죠.”
 야스콘은 크로네에게 눈짓을 하며 일어섰다.
 “죄송하지만 무기가 있다면 맡기고 가셔야 합니다.”
 문 앞에서 집사가 말했다.
 “이미 친구들에게 맡겼어. 무기는 이것으로 충분하니까.”
 야스콘은 보석 상자를 들어 보였다. 말귀를 알아들은 집사가 빙긋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시오, 공자!”
 체스터는 안광이 한없이 깊은 노인이었다. 완전히 샌 백발에 쭈글쭈글한 피부. 이미 80을 넘긴 듯한 인상이었다. 그의 뒤에는 새하얀 피부의 젊은 여자 둘이 석상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장식용 여자가 아니라 호위 전사다.’
 야스콘은 그녀들의 풍모에서 단번에 정체를 짐작했다.
 “우리 상단과 거래를 원하시나? 구면은 아닌 것 같은데?”
 체스터는 수염을 쓸며 여유를 부렸다.
 ‘어떻게 할까?’
 야스콘은 잠시 대응책을 생각했다.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감쪽같이 체스터를 속이는 것과 힘으로 제압하여 실토하게 하는 것. 체스터를 보는 순간 전자는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본래 상인은 혀로 먹고 사는 교활한 사람이 많은 데다 노안의 그는 속내가 엿보이질 않았다.
 ‘여차하면 내 스타일대로 간다.’
 결론을 내린 야스콘은 보석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정보 하나를 원한다.”
 목소리에 잔뜩 힘을 준 야스콘은 체스터의 노안을 쏘아보다 하마터면 눈빛을 거둘 뻔했다. 막막한 대해 같은 표정은, 아직 미숙한 야스콘이 요리하기에는 벅차 보였다.
 “으음! 값비싼 정보를 원하시는 모양이군. 보석함의 크기가 꽤 큰 것을 보니…….”
 체스터는 부드럽게, 그러나 능숙하게 대답했다.
 “비싸지. 당신의 목숨으로도 변제할 수 없는 거니까.”
 “……!”
 그제야 체스터의 눈에 긴장이 스쳐 갔다.
 “어쨌든 내 방에 들어왔으니 거래는 시작된 거외다. 말해 보시지요.”
 “프록시안 토벌!”
 “……?”
 체스터의 미간이 한없이 좁혀졌다. 야스콘은 체스터의 어떤 반응도 놓치지 않고 체크했다.
 “누구의 작품인가? 사실대로 말하면 거래로 인정하고 보석을 두고 가겠다. 하지만 나를 속이려 든다면 오늘이 당신에겐 마지막 날이 될 거야.”
 야스콘의 눈에서 살기가 뚝뚝 흘렀다. 체스터는 모르고 있지만 야스콘의 체모 안은 분노와 억제력이 뒤섞여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린 친구가 당돌하군.”
 체스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프록시안 출신이군?”
 “그렇다.”
 “그럼 주제넘게 복수를 하러 온 모양이야.”
 “맞아.”
 체스터는 웃고 야스콘은 잔뜩 굳어 있다. 둘의 관록은 그렇게 표시가 났다.
 야스콘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체스터의 목소리가 조금씩 교활해짐에 따라 야스콘의 체모도 조용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보석을 들고 왔으니 어쨌든 고객인 것은 틀림없어. 한마디만 해 주지. 세상에는 질서와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프록시안은 그걸 위배했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우리의 재물을 노린 게 아니고?”
 “긴말할 가치도 없다. 썩은 것은 그저 쓸어버리는 게 합당하지.”
 “썩은 것?”
 “프록시안은 잡종의 땅이었다. 언젠가는 사고를 칠 줄 알았어.”
 체스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쳐 갔다.
 “당신이 용병을 고용한 것인가?”
 “어리석은 친구로군. 고작 그걸 알기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것이냐?”
 “내겐 더없이 중요한 일이니까.”
 “안됐군. 네가 좀 더 나이를 먹었다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았을 것이다. 그럼 아주 쉽게 답이 나올 일이었는데…….”
 “무슨 뜻이지?”
 “접견 시간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네 목숨의 끝이기도 하지.”
 체스터가 천천히 일어섰다. 왼편의 여자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젊은 날의 만용은 더러 죽음을 부르지. 교훈으로 삼기에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체스터가 기둥 옆의 작은 줄을 잡아당김과 거의 동시에 대기실 쪽에서 교전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여자가 얇고 긴 소드를 겨누며 직선으로 날아왔다.
 캉!
 금속성과 함께 두 여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들의 소드를 쳐서 떨군 것은 야스콘의 머리카락 다발이었다. 놀랄 사이도 없이 목을 휘감은 머리카락은 여자들을 벽에다 내동댕이쳐 버렸다.
 “……?”
 그제야 체스터의 눈빛에 긴장감이 서려 갔다. 그는 태연히 나가려 했지만 야스콘의 머리카락이 발목을 잡아챘다. 재빨리 단창을 뽑아 든 그가 머리카락을 베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단창이 튕겨 난 것이다.
 쾅!
 분노한 야스콘은 체스터를 사정없이 패대기쳤다.
 “끄으…….”
 오만한 눈빛에 비해 체력이 노쇠한 그는 당장 피를 토하며 꿈틀거렸다.
 “내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야스콘은 여자들이 떨군 소드로 체스터의 목을 겨누었다.
 “으으…….”
 “죽이기 전에 한마디는 들어야겠다. 썩은 것들이라는 표현. 취소하고 가라.”
 “이놈이…….”
 체스터의 손이 올라와 야스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비명을 울리며 손을 놓았다. 수백 가닥의 머리카락이 관통한 손은 토마토만 한 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너… 너… 인간이냐? 몬스터냐?”
 “인간! 좀 개성적이긴 하지만.”
 야스콘은 소드로 체스터의 목젖을 살짝 밀었다.
 “끄으…….”
 “어서 취소해.”
 “못 한다. 프록시안은 추잡한 잡종들의 땅이야. 언젠가는 폭도나 도적으로 변할… 네놈의 무도한 행실을 보니 명명백백하구나.”
 “뭐라고?”
 격노한 야스콘의 손이 올라갔을 때 뒤에서 다부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드 버려!”
 “로즈!”
 체스터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혈육이 분명했다.
 “할아버지를 놔 드려. 어서!”
 로즈는 다부지게 말했다. 흑발에 새벽이슬처럼 청초한 여자였다. 그녀의 곁에서는 깡마른 남자가, 어울리지도 않는 투박한 바스타드를 겨누고 있었다.
 “경고를 묵살하는구나. 해치워, 케인!”
 아름다운 여자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케인은 물결처럼 스르륵 다가왔다.
 캉!
 재빨리 방어했지만 손목이 알큰했다.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직감이 전율로 다가왔다.
 “흐아앗!”
 스앙 스앙!
 바람처럼 자유로운 몸짓 안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일었다. 긴 궤적을 일으킨 블레이드는 3개의 형상을 이루며 야스콘을 직격했다.
 “으헛!”
 하나를 막아 내며 하나를 피했다. 그러나 남은 한 블레이드가 목을 향해 치달았다. 야스콘의 머리카락이 방어막을 형성했지만 일부가 우수수 잘려 나갔다. 덕분에 치명상은 피했다.
 숨을 돌린 야스콘은 반격을 시도했다. 날카로운 오러 블레이드가 직선으로 날아갔다. 상대도 오직 하나의 오러를 뿜었다.
 촤좡!
 2개의 오러가 허공에서 충돌하면서 야스콘을 향해 날아왔다. 케인의 오러가 더 강력했던 것이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헬소드가 아쉽지만 용병들보다는 무서운 놈이야.’
 야스콘은 비스듬히 서서 상대와 대치했다. 기선을 제압했다고 느낀 케인은 강력한 회전을 실어 다시 돌진했다.
 카앙카앙!
 소용돌이 안에서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오는 바스타드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체모의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정지된 근접.’
 야스콘의 머리에 하나의 명제가 스쳐 갔다. 날렵하게 공세를 피한 야스콘은 늑대처럼 도약하며 허공에서 케인을 통타했다.
 캉!
 케인이 회전을 멈추고 공세를 막아 냈다. 그는 몸을 기울이며 반격을 꿈꾸었지만 찰나의 정지를 노리던 야스콘은 그걸 놓칠 수 없었다.
 파라락!
 분노처럼 꼿꼿하게 갈기를 세운 머리카락이 케인의 상체를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놀란 케인이 검광을 뿌렸지만 온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크아악!”
 케인은 야수의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목과 어깨, 가슴팍에 선혈이 낭자했다. 야스콘의 승리였다.
 “움직이지 마!”
 겨우 숨을 돌리는 야스콘에게 로즈가 화살을 겨누었다. 제법 틀이 잡힌 자세로 보아 단순한 위협은 아니었다.
 “조금 뒤틀렸다. 왼쪽으로 각도를 낮춰. 그렇게 쏘면 속도가 떨어져.”
 야스콘은 여유 있게 여자의 자세를 지적했다. 활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야스콘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누군지 모르지만 이 일에 나서지 마라. 끼어들면 너까지 해쳐야 할 테니까.”
 야스콘은 싸늘하게 선언했다.
 “허튼소리! 할아버지와 케인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넌 내 화살에 죽어.”
 로즈의 시위가 좀 더 팽팽해졌다.
 “할아버지? 이자는 사랑하는 내 부모와 이웃 그리고 친구들… 아니 프록시안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죽인다고 해도 그 죄가 없어지지는 않아.”
 야스콘은 잘라 말했다.
 “할아버지가? 뭔가 잘못 알았겠지. 만일 그랬다면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여자! 말장난할 시간이 없다.”
 야스콘의 시선이 비틀거리는 체스터에게 향했다.
 “아가씨! 몸을 숙이세요!”
 순간, 4명의 호위 전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화살을 날렸다.
 “안 돼!”
 로즈의 찢어지는 외침과 함께 화살은 야스콘을 노렸다.
 “으헉!”
 비명은 야스콘의 뒤편에 있던 체스터의 입에서 나왔다. 야스콘이 피함으로써 그 뒤에 있던 체스터가 화살받이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크아악!”
 소드를 뽑아 들고 달려들던 전사들은 야스콘을 포위했지만 그게 실책이었다. 협공하는 사이 머리카락이 회전을 그리며 4명을 죽인 것이다.
 “할아버지!”
 로즈는 헐떡이는 체스터를 안았다. 핏발이 곤두선 체스터는 손을 바르르 떨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잇!”
 로즈의 손에서 화살이 날아갔다. 야스콘은 머리카락으로 방패를 형성하며 간단하게 막아 냈다. 다시 화살을 재는 사이, 야스콘은 롱소드를 던졌다.
 터엉!
 “……!”
 로즈는 기겁하며 재던 화살을 떨구었다. 소드는 그녀의 가슴팍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벽에 박혔다. 목숨을 노리지는 않았다는 표시였다.
 “아가씨!”
 피투성이가 된 케인이 기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야스콘은 둘 다 죽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중상을 입은 케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주인을 향한 충성심이 마음에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예상대로 크로네가 상단의 호위 전사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소란을 듣고 뛰어드는 타이켄의 모습도 보였다.
 “일은?”
 “끝났다. 체스터는 죽었어.”
 후미에서 전사들을 헤집고 합류한 야스콘이 말했다.
 “그럼 가야지? 보석함은?”
 “두고 간다.”
 “왜?”
 “그건 거래의 대가였어. 사악한 놈들과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좋아.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크로네는 의외로 순순히 동의하며 야스콘의 헬소드를 던져 주었다.
 “비켜라! 체스터는 죽었다. 길을 내주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크로네의 앞으로 나선 야스콘이 헬소드를 겨누며 말했다.
 “으억! 용서해 주세요.”
 전사 중의 하나가 겁먹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비웃음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우리가 그렇게 겁먹고 오줌이라도 지릴 줄 알았냐? 아직 어린놈의 새끼가!”
 전사들이 콧방귀를 뀌며 달려들었다.
 “어따 대고 욕질이야?”
 발끈한 크로네가 타이켄의 어깨를 딛고 도약했다. 둘은 위아래에서 전사들을 휘저었다. 옆으로 물러서는 전사들은 야스콘의 몫이었다.
 “어린놈의 맛을 보여 주마!”
 야스콘의 머리에서 전사 숫자만큼의 머리카락이 날아갔다.
 “으헉!”
 전사들은 이마에서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어느새 머리카락은 실창이 되어 그들의 이마를 관통한 후였다.
 “그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야스콘은 크로네의 손을 끌며 상단을 빠져나갔다.
 전사들의 이마에 박힌 실창은 잠시 후에 평범한 머리카락으로 변했다. 그들은 귀신에 홀린 듯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한 방 먹이면 우리가 필요한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야.”
 안전거리를 확보한 야스콘이 활을 뽑아 들었다.
 “좀 먼데 가능하겠어?”
 “그건 화살이 말해 주겠지. 불이나 붙여 줘.”
 야스콘이 말하자 타이켄이 다가와 화살에 불을 댕겼다.
 츄릿!
 세 발의 화살이 제멋대로 날아갔다.
 “하나”
 “둘.”
 “우우.”
 셋이 나름대로 셋을 세자 상단의 뒤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전사들과 하인들이 불길을 잡기 위해 우르르 몰려갔다. 야스콘 일행은 앞을 막아서는 전사 10여 명을 헤집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볼일이 하나 남았지?”
 야스콘이 크로네와 타이켄을 바라보았다.
 “우어우어!”
 타이켄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이 브릿지 건너편 지붕이 붉은 집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노예상이란 웬만한 담력이나 재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잡고 물어보아도 다 아는 일이었다.
 “이여, 공자님! 어서 오시오!”
 털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낮에 말한 거래를 하러 왔다.”
 “물론이죠. 좋은 장사꾼은 한 번 들은 말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들어가시죠. 그런데 저 둘은 늘 저렇게 어울리지 않는 로브에 후드를 쓰고 다니는군요.”
 털보가 크로네와 타이켄을 보며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어.”
 야스콘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자! 아무튼 들어가시죠. 아무리 삭막한 노예상이라지만 모든 상거래에는 상도의가 있는 법. 내 집에 오셨으니 차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털보는 야스콘의 등을 막무가내로 떠밀었다.
 “두 분은 거기서 기다리시고… 공자님은 이쪽에서 저와 본론을 얘기해 볼까요?”
 털보는 야스콘을 데리고 접견실로 들어갔다.
 “차 드세요.”
 크로네와 타이켄에게도 차가 나왔다. 가슴이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은 하녀들이 차를 따라 주었다.
 “이 차는 피로를 덜어 주는 좋은 차입니다. 여자들의 피부미용에도 그만이라죠.”
 “오옷! 이거 그 귀하다는 식용금 아니야?”
 크로네가 찻잔을 보며 흥분했다. 눈부신 식용금이 둥실둥실 유혹의 빛을 반짝이는 차였다.
 “두고 갈 테니 편하게, 천천히 드세요.”
 하녀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접견실로 들어온 야스콘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물건들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차부터 한 잔 드시죠.”
 “생각 없어.”
 야스콘은 찻잔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나저나 제 눈치로는 공자께서 프록시안의 아이들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 같던데…….”
 “……?”
 야스콘의 근육이 꿈틀하며 반응을 했다.
 “뭐 놀라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이 일을 하려면 눈치의 달인이 되어야 합죠. 맞습니까? 맞다면 화끈하게 거래할 수 있을 텐데…….”
 털보가 야스콘의 반응을 기다렸다.
 “맞다.”
 야스콘은 비켜 가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도 동생들의 행방을 아는 것이었으니까.
 턱!
 빙긋 웃으며 일어선 털보가 노예 장부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프록시안에서 잡아 온 어린 노예는 모두 17명이었습니다. 물론 이종족을 다 합친 숫자죠.”
 털보의 입가에 탐욕이 스쳐 갔다.
 “인간이라면… 어디 보자, 모두 6명이었군요. 여자 둘에 남자 넷.”
 “이름도 알 수 있나?”
 “원하는 이름을 말해 보시죠.”
 “폴카와 레모 그리고 스코티.”
 “빙고! 당첨입니다. 정말 행운이로군요. 그 셋이 모두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털보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잘됐군. 그럼 그걸 내게 넘겨라.”
 야스콘의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호오! 귀여운 공자의 눈초리가 변하네? 그럼 곤란한데?”
 털보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웃었다.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그거 명언이군. 그럼 나도 말해 볼까? 살고 싶으면 가진 것부터 다 꺼내 놔라. 이놈의 자식아!”
 “……?”
 “네놈들, 프록시안에 살던 놈들이지? 동생이라도 찾으러 온 건가?”
 털보는 빙긋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험상궂은 남자들이 들어섰다. 모두 무장한 모습이었다.
 “어린놈들이 돈을 펑펑 쓰기에 뒷조사를 좀 했지. 겁대가리 없이 루파스 상단을 헤집기까지 하다니! 어쨌든 내겐 꿩 먹고 알 먹고야. 땡잡은 거지.”
 “꿩 먹고 알 먹고?”
 야스콘은 앉은 채로 두 다리를 꼬았다. 위협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였다.
 “네놈들을 죽이고 가진 것을 뺏은 다음에 시체를 상단에 넘기면 그쪽에서도 보상금을 줄 것이다. 그러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래 봤자 네가 죽은 다음에는 보석도 소용없을 텐데.”
 야스콘의 입가에 냉소가 번져 갔다.
 “뭐라고? 네놈이 밖의 난쟁이를 믿고 큰소리치는 모양인데 그 둘은 일찌감치 뻗어 버렸다. 아까 그 차는 수면차였거든. 재수 없게도 네놈은 마시지 않았다만…….”
 “재수 없다고?”
 “그렇지. 그걸 마셨으면 편하게 죽었을 텐데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 테니까.”
 “사악한 놈.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그렇잖아도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박살 내고 싶은 차에.”
 “돌았군. 해치워라.”
 털보는 날카로운 스크래어색스를 꺼내 손톱 밑의 때를 파며 말했다.
 “크아앗!”
 털보의 부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야스콘은 빙글 몸을 날리며 도약했다. 부하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야스콘은 이미 그들의 뒤에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카락을 이용해 소드를 탈취한 야스콘은 셋을 베어 버렸다. 허우대만 멀쩡했지 검술은 그저 그런 자들이었다.
 “이놈이!”
 발끈한 다른 무리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민첩한 야스콘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부하들은 체모를 쓸 필요도 없이 하나 둘 쓰러졌다.
 그제야 놀란 털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부 이리 내놓으시지.”
 야스콘이 손을 내밀자 털보의 손에서 스크래어색스가 날아왔다. 재빨리 피하고 반격하려는 찰나 문밖에서 협박음이 들려왔다.
 “헤이! 이래도냐?”
 한 남자가 비틀거리는 크로네의 목에 소드를 겨누었다. 타이켄은 그 옆에 얌전하게 늘어져 있었다.
 “잘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구나. 소드를 버려라.”
 위기를 벗어난 털보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야스콘은 그들의 지시대로 헬소드를 내려놓았다. 머리를 흔들며 일어선 털보의 부하들이 야스콘의 목에 소드를 겨누었다.
 “그놈 과연 제법 빠르구나. 하지만 여긴 내 집이야. 일단 50%는 먹고 들어간다고. 알아?”
 퍽!
 털보가 다가와 야스콘의 배를 내질렀다. 비틀거리면서도 야스콘은 크로네를 위협하는 남자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금만 더…….’
 야스콘은 머리카락의 사정거리를 계산했다. 아직은 조금 거리가 멀었다.
 “겁대가리 없는 놈. 그놈 품을 뒤져서 값나갈 만한 물건을 모두 꺼내라.”
 “예.”
 털보의 부하들은 야스콘의 몸을 뒤져 금화 주머니를 찾아냈다. 야스콘은 반항하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크로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놈 귀가 이상한데요? 양쪽에 똑같은 흉터가 있습니다.”
 부하 하나가 야스콘의 귀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정확히 휴먼 엘프 계열이로군. 부모 중의 하나가 엘프야. 어쩐지 좀 이종족의 느낌이 난다 했어. 야! 그년도 후드를 벗겨봐. 생긴 꼬락서니라도 보고 죽여야지.”
 털보가 빈정거리자 크로네를 위협하던 부하가 후드를 부여잡았다. 바로 그때 의식이 돌아온 크로네가 남자의 얼굴에 박치기를 꽂아 넣었다.
 “끄아악!”
 “어딜 만져! 얼굴도 막 생긴 게…….”
 크로네는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던 남자의 손을 잡아 메쳤다.
 “오크였구나. 너희는 이놈을 잘 감시… 헉!”
 야스콘을 돌아보던 털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스콘 주변에 포진했던 다섯 부하들의 심장을 빗살같은 무엇이 관통한 것이다.
 “그… 그건…….”
 털보는 혼비백산하며 뒷걸음질 쳤다.
 “제대로 본 거야. 내 머리카락이 맞다.”
 야스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길게 늘어났던 머리카락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법사?”
 “아니! 나는 그냥 인간이야.”
 야스콘이 손을 내밀었다. 털보는 장부를 줄 생각도 잊은 채 이빨을 부딪치며 공포에 떨었다.
 “보기보다 깡이 약하군. 그럼 처음부터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이… 이놈… 차만 마셨어도…….”
 “그럴까? 이 차를 마셨으면 네 운명이 변했을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그건 마법사도 골로 보내는 차니까…….”
 “그렇게 아쉽다면!”
 야스콘은 찻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크로네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후에 타이켄을 깨웠다.
 “이젠 억울하지 않겠군.”
 “대체… 어떻게?”
 “미안하지만 내 아버지는 차의 마스터시다. 물론 나도 그 절반쯤은 되지. 그러니 웬만한 독성의 차는 향기만으로도 알지만 설령 모르고 마셨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면역되어 있단 말씀이지.”
 야스콘은 덜덜 떠는 털보의 손에서 장부를 살며시 빼냈다.
 “혹시 메카치라고 들어봤나? 인간이다.”
 “전혀…….”
 털보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타이켄의 정신이 돌아왔어?”
 야스콘이 털보를 바라보며 크로네에게 물었다.
 “아직! 식용금이 신기하다고 세 잔이나 마셨거든.”
 “그럼 남은 물을 얼굴에 부어. 그게 제일 빨라.”
 “아직 뜨거운데.”
 “그럼 더 식기 전에!”
 야스콘은 장부를 든 채 돌아섰다. 야스콘의 눈치를 살피던 털보는 조심스럽게 바닥의 소드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던지지 못했다. 시커먼 실창이 악몽처럼 시야를 덮었기 때문이었다.
 “으아…….”
 털보는 채 비명을 끝마치지 못했다. 수천 가닥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강타해 버린 것이다.
 “볼 때마다 섬뜩하네, 그 머리카락…….”
 크로네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야스콘은 그녀의 손에 든 찻주전자를 빼앗아 망설임 없이 타이켄의 얼굴에 부었다.
 “우어어어!”
 놀란 타이켄이 벌떡 일어나자 크로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뜨거워 죽겠다고?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 야스콘이 부었으니까.”
 
 노예상의 지하 감옥을 박살 낸 야스콘과 크로네, 타이켄은 3명의 프록시안 구성원을 더 구해 냈다. 아쉽게도 낮에 보았던 오크는 구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귀족에게 팔려 간 후였다.
 “기왕 좋은 일 하는 김에…….”
 크로네는 타이켄의 등을 떠밀었다. 그의 워해머가 신들린 듯 감옥 자물쇠를 박살 내 버렸다. 이날 야스콘과 그 일행이 해방시켜 준 노예는 모두 40여 명이었다.
 야스콘은 노예상 털보에게서 빼앗은 장부를 넘겼다. 제일 먼저 스코티부터 찾아보았다. 이제 열다섯이 되는 스코티. 하지만 성숙한 외모 덕분에 처녀티가 물씬 풍기는 아이였다.
 ‘로열 파라다이스?’
 휘갈긴 필체를 확인한 야스콘은 현기증을 느꼈다.
 ‘하필이면!’
 당장 신음이 새어 나왔다. 로열 파라다이스라면 바다 저만치에 위치한 섬이었다. 이름과는 달리 해적과 도망자, 반역을 저지른 기사와 사이비 마법사 등이 들끓는 곳으로, 저주의 섬으로 불리는 무법천지의 공간… 그곳으로 팔려 갔다면 필시 좋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폴카는 황궁, 레모는 아스니알 영지…….’
 나머지 둘은 스코티보다는 나았다.
 “다 끝났어.”
 크로네가 먼저 지하에서 올라왔다. 야스콘은 장부를 품에 넣었다.
 “어디로 팔려 갔어?”
 “좋지 않은 곳.”
 대답하는 야스콘의 표정은 어두웠다.
 “설마 로열 파라다이스 같은 곳은 아니겠지?”
 “…….”
 “맙소사! 거기야?”
 “…….”
 “셋 다?”
 “스코티만.”
 “젠장! 그렇다면 빤하군. 어떡하지? 거긴 우리 아버지나 펠리아 님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인데…….”
 크로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악마성이 판을 치는 저주의 공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 영지군이 몰려올지도 몰라.”
 “오면 한바탕 붙지 뭐. 수면차를 먹어서 그런지 피가 끓네. 이게 정상이야?”
 크로네는 분노를 그렇게 둘러댔다.
 “부작용이겠지.”
 야스콘은 무겁게 대답했다.
 야스콘 일행이 밖으로 나왔을 때 한 무리의 전사들이 말을 타고 스쳐 갔다.
 “저건 루파스 상단의 호위대들인데?”
 크로네가 몸을 숨긴 채 나지막이 말했다. 야스콘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선두에서 스쳐 가는 로즈를 본 까닭이었다.
 “잡아!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로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밤공기를 갈랐다.
 ‘지독한 여자군.’
 야스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이제 어쩌지?”
 숲으로 접어들고서야 드워프 모이트라가 입을 열었다. 그의 곁에는 다른 두 오크와 한 트롤이 눈을 말똥거렸다. 다행히 영지군은 출동하지 않았다. 조금은 의아한 일이었지만 야스콘 일행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당분간은 프록시안을 잊으세요. 용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결국 단념하게 될 겁니다.”
 야스콘이 의견을 개진했다. 모두가 야스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야스콘은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 있었다.
 “그럼 함께 드워프 부족을 찾아가자. 우리를 받아 줄 거야.”
 “아니야! 우리 오크의 영지가 더 가까워. 우린 그곳에 가 있으면서 동향을 살피겠다.”
 모이트라가 말하자 오크가 반대 의견을 냈다.
 “나는 가지 않습니다.”
 야스콘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왜? 인간과 함께 살려고? 그들의 만행을 보고서도?”
 모이트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뇨. 프록시안을 떠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할 일이 있어요.”
 “동생들 때문이야? 그렇다면 잊는 게 좋아. 대륙은 넓어. 안됐지만 동생들을 찾는 건 불가능해, 야스콘.”
 “고맙습니다, 아저씨. 하지만 내 결심은 이미 섰어요.”
 “…….”
 “다들 안전한 곳에 피해 계세요. 언젠가는 다시 프록시안에서 평화를 구가할 시간이 올 겁니다.”
 “…….”
 “어서들 가세요. 이렇게 몰려다니면 위험해요. 그리고 용병들을 조심하세요. 우리가 요새를 습격했었거든요.”
 “그놈의 레드 글로리안 용병단! 돈 되는 일이면 똥도 처먹을 놈들……!”
 “그럼 먼저 간다.”
 모이트라가 제일 먼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두 오크와 트롤도 사라졌다. 이종족들의 거처는 도처에 있었다. 다만 인간의 영지에서 은밀한 곳에 자리했을 뿐.
 오우우우!
 멀리서 늑대의 울음이 들렸다.
 “너희도 갈 곳을 찾아가.”
 야스콘은 크로네와 타이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달은 조금씩 둥글어져 가고 있었다.
 “우린 절반의 수호자 에크레탐 님을 찾아갈 생각이야.”
 크로네의 대답에 놀란 야스콘이 고개를 들었다.
 “왜? 불만 있냐?”
 “크로네,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야. 그렇지, 타이켄?”
 “우어우어!”
 타이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희들, 대체?”
 “뭐, 에크레탐 님이 너만 독점하는 드래곤은 아니잖아? 나도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다구. 타이켄은 또 알아? 덜컥 말이라도 하게 해 줄지…….”
 “…….”
 야스콘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래도 크로네가 타이켄에게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난 놀러 가는 게 아니야.”
 “지금 데려가 달라고 사정하는 거 아니다. 분명히 우리가 먼저 간다고 말했거든.”
 “크로네! 어째서 그럴 때만 머리가 좋아지냐?”
 “왜 이래? 오크도 잔머리 굴릴 줄 알아.”
 “…….”
 “타이켄, 가자. 야스콘이야 어디로 가든 말든.”
 크로네가 먼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선수를 쳤다. 그러자 타이켄도 휘적휘적 크로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제기랄! 알았어! 같이 갈 테니까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너 그 말 책임져야 한다!”
 크로네와 타이켄이 활짝 웃는 얼굴로 동시에 돌아보았다.
 “하여간 잔머리는 인간 뺨친다니까.”
 야스콘이 눈을 흘겼다.
 “미안! 요즘 들어 너한테 말도 못 붙이는 우리잖아. 전하고는 다르게 네가 눈썹에 힘만 줘도 우린 다리가 풀려. 그러니 미리 선수를 치는 수밖에.”
 “내가 정말 그래?”
 “응! 열일곱이 된 후로.”
 “…….”
 야스콘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열일곱이 되면서 일어난 변화. 그것은 육신과 정신의 깊은 곳에서 용트림치는 힘과 체모의 위력이었다. 모든 면에서 적어도 두 배는 강해진 것 같았다.
 증오로 인해 살육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죽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증오에 가려 버렸다. 섬뜩한 살기와 손에서 사라지지 않는 피 냄새. 이건 프록시안의 길이 아니었다.
 ‘정말 그렇군.’
 야스콘은 아무도 몰래 무거운 날숨을 쉬었다.
 “그래서? 나빠?”
 야스콘이 물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정이 뚝뚝 떨어지지. 물론 적을 상대할 때는 멋지지만.”
 “…….”
 “그런데 야스콘.”
 “왜? 설마 또 은근히 사랑을 고백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거 왜 이래? 나 잘 나가는 오크 크로네야. 절대 한입으로 두말은 안 한다고. 물론 네가 마음이 변해 주면 고맙게 받겠지만.”
 “그런 일은 없어. 우리는…….”
 “Pea in the same pod! 한 꼬투리 안의 완두콩 같은 우정. 또 그 얘기지?”
 “맞아.”
 “귀에 딱지 앉았다. 그나저나 드래곤 말이야.”
 “말해.”
 “그것도 네 어머니 펠리아 님의 말 때문이지? 네 성질에 동생들을 포기하지도 않을 테고. 그래서 드래곤에게 뭔가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하는…….”
 “최소한 절반은 맞아.”
 야스콘은 부정하지 않았다. 스코티가 로열 파라다이스로 팔려 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드래곤에 대한 생각이 더 절실해졌다. 물론 야스콘은 지금도 어느 정도 강하다. 펠리아는 야스콘에게 쉴 새 없이 기초를 다져 주었다. 나이트 엘프의 검술과 인간의 검술, 심지어는 오크의 검술까지 기본을 착실하게 다진 야스콘이었다.
 하지만 진짜 강자는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펠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드래곤을 찾아가서 손해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절반은 틀려. 어머니의 유언이니까 아들로서 도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니까.”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까? 미안하지만 드래곤이 펠리아 님과 약속을 했다는 건 정말 믿어지지 않아. 아니, 설령 했다고 해도 다 잊어버렸을 것 같고… 위대하다는 말에도 만족하지 않는 드래곤이 할 일이 없어서 엘프와의 약속을 기억하겠어?”
 “…….”
 “그러니까 일단 동생들을 찾으면서 실력을 쌓은 다음에…….”
 “크로네.”
 야스콘은 진지하게 크로네를 바라보았다.
 “왜?”
 “나는 내 어머니를 믿어. 그러니까 내키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야스콘은 훌쩍 솟아 말에 올랐다.
 “이랴!”
 이히히히잉!
 박차를 받은 말은 쏜살처럼 도약했다. 숲과 친밀감이 강한 나이트 엘프의 피를 받은 야스콘은 어두운 밤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제약도 없이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쳇! 누가 나이트 엘프의 피가 흐르지 않는달까 봐. 같이 가, 야스콘!”
 “우우어어!”
 크로네가 치고 나가자 타이켄도 서둘러 말고삐를 당겼다.
 
 @
 
 새벽에 잠깐 눈을 붙인 야스콘은 해가 뜨자 서둘러 일어났다. 맑은 샘물에서 물을 마시던 야스콘은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로 드러나는 두 귀를 보았다. 귀의 상부는 흉터가 살짝 남아 있었다. 어머니 펠리아는 네 아이를 낳았지만, 이상하게도 첫째인 야스콘의 귀만 엘프를 닮아 쫑긋했다.
 
 “귀를 잘라 내야겠다.”
 둘째 스코티를 낳은 펠리아가 어린 야스콘에게 말했다. 스코티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그 이후의 두 동생도 그랬다. 오직 야스콘만이 나이트 엘프의 기상을 강하게 타고 태어났다.
 “왜요?”
 어린 야스콘이 물었다.
 “귀만 자르면 네가 엘프의 피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어. 엄마는 엘프인 것이 자랑스럽지만 너는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해하겠니?”
 “엘프처럼 보여도 상관없어요. 엄마는 나의 자랑이니까요.”
 “알아. 하지만 잘 들으렴. 엄마는 인간과 결혼했단다. 인간이 되기로 한 거야. 그러니 네가 완전한 인간이길 원한단다. 엄마의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네.”
 어린 야스콘은 다부지게 대답했다.
 이윽고 아스캄의 동의하에 야스콘 귀의 쫑긋한 부분을 잘라 내기로 했다. 잘 벼린 스크래어색스를 불에 달군 펠리아는 단숨에 쫑긋한 부위를 도려냈다.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야스콘은 울지 않았다. 겁먹은 표정도 아니었다.
 “아프지 않았니?”
 소독을 끝낸 펠리아가 묻자 야스콘은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를 믿으니까요.”
 
 야스콘은 추억을 흘려보내며 귀를 머리카락으로 덮어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라면 가벼운 화상이라고 둘러대도 괜찮을 정도였다. 하지만 프록시안의 구성원들은 모두 그 내력을 알고 있었다.
 이슬을 피한 바위 굴로 돌아오니 크로네가 어린 오크 남매를 치료하고 있었다. 둘은 피투성이였다. 산책을 나간 크로네에게 뭔가 일이 벌어졌던 것이 틀림없었다.
 “인간의 사냥꾼들이 그랬어. 아이들의 엄마를 죽이고 아이들까지 죽이려는 걸 내가 구했어. 그 망할 놈들. 세 놈 다 머리통을 깨 버렸어야 했는데…….”
 크로네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
 “언제나 인간이 가장 이기적이야. 자신들보다 약한 종족에게 너무 잔인하고. 재미를 위해 생명을 죽이는 것은 인간뿐이야.”
 야스콘은 계속 침묵했다. 타이켄 역시 말없이 크로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들만 목적이지. 다른 이종족들은 수단일 뿐이야. 그렇지, 야스콘?”
 “……?”
 “더러는 인간이 너무 싫어. 이런 날은 너도…….”
 크로네는 치료가 끝난 아이들은 안고 나섰다.
 “어딜 가려고?”
 “마을에 데려다 줘야지. 그냥 보냈다가 잘못해서 사냥꾼들에게 잡히면 심심풀이로 아이들의 몸을 찢어 버릴 텐데.”
 “…….”
 야스콘은 크로네의 질책을 그대로 수용했다.
 프록시안!
 그곳의 이상향이 바로 그랬다. 모든 종족이 차별 없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영지. 그 안에서는 최소한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다. 사소한 다툼이야 있다지만 다른 생명을 수단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타이켄!”
 “우어?”
 “좀 나갔다 올게.”
 “우어어?”
 “어딜 가냐고? 상처받은 크로네의 마음을 달래 줘야지.”
 야스콘은 그 길로 산을 뛰었다. 사냥꾼들이 산에 있다면 그들을 추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연 친화력이 강한 야스콘은 나무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사냥꾼들을 쫓았다.
 능선을 넘기 전에 그들을 만났다. 크로네의 말처럼 3명이었다.
 “뭐야? 난 또 엘프라도 나타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야스콘의 등장에 사냥꾼들이 인상을 부라렸다.
 “놀라도 괜찮아. 원래 사냥감들은 사냥꾼이 나타나면 놀라기 마련이니까.”
 “……?”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낀 사냥꾼들이 활을 집어 들었지만 야스콘이 더 빨랐다. 도약한 자세로 2명의 목을 쳐 버린 야스콘은 정면에서 스크래어색스를 꺼내 드는 사냥꾼의 가슴팍에 헬소드를 박아 넣었다.
 “이… 이놈…….”
 사냥꾼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자 야스콘은 머리카락을 휘둘렀다. 볼 가치도 없었다.
 떨꺽!
 사냥꾼의 목은 반 이상 베어지며 뒤로 넘어갔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지 못했으니 무덤에 잠들 생각일랑 마라.”
 야스콘은 바람처럼 돌아섰다.
 피 냄새.
 야스콘은 냇가에서 사냥꾼들의 피를 씻어 냈다.
 “해치웠어?”
 언제 나타났는지 크로네가 높은 바위위에서 굳은 얼굴로 물었다.
 “…….”
 “미안해.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했어.”
 “아니. 네가 옳아. 인간 중에는 탈만 쓴 인간이 많으니까. 약자에게만 한없이 강한…….”
 “야스콘…….”
 “그런데 기분이 이상해. 그 사냥꾼들 입장에서는 내가 가해자가 아닐까?”
 이번에는 크로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야스콘의 무거운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세상의 일이란 단순하다. 가해자일 때와 피해자일 때가 한없이 다른 것이다.
 “야스콘, 그러고 보니 내가 정말 잘못했네.”
 “탓하자는 게 아니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 얼굴 펴. 너답지 않잖아? 넌 천방지축일 때가 제일 보기 좋아.”
 “좋아! 우리 둘 다 잊어버리자, 오늘 아침의 일은.”
 “그게 좋겠어.”
 “가. 내가 오면서 사슴 한 마리 꼬셔 왔어. 우리가 널 짭짭 먹어 주실게 하고 말이야.”
 “그 사슴은 재수도 없지. 하필 우리 크로네에게 걸리다니.”
 “뭐야? 그럼 굶어도 좋아?”
 “하핫! 아니야. 가자.”
 바위 굴로 돌아오니 타이켄은 혼자 뭔가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뭔가 만들든지 아니면 뭔가 읽든지, 타이켄의 손은 쉬는 날이 드물었다.
 “우어어?”
 “사냥꾼들? 크로네 얼굴 보면 모르겠냐?”
 “우어우어!”
 타이켄은 뺨을 긁으며 피식 웃었다.
 “이번엔 또 뭐냐?”
 야스콘이 아직 익지 않은 사슴 앞다리를 잘라 숲으로 던지며 물었다. 늑대들을 위한 몫이었다.
 “우어어어!”
 타이켄은 크로네의 단창을 들어 보이며 열심히 입을 끔벅거렸다. 단창에 가는 줄을 다는 것을 보니 던진 후에 회수하기 쉬운 장치를 하는 것 같았다. 대장장이가 싫다더니 피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또 언제 잡았어?”
 야스콘은 기름 떨어지는 사슴 고기를 뒤집는 크로네를 돌아보았다.
 “선물 받았어.”
 “선물?”
 “뭉크 영지에 사는 오크가 잡아가는 거였는데, 윙크 한 번 했더니 주고 가던데.”
 “인기 좋네.”
 “그걸 이제 알았냐? 나 이래 봬도 오크 중에서는 최고의 미인이야.”
 크로네가 목에 힘을 주며 야스콘을 바라보았다. 오크답지 않은 갸름한 얼굴상에 탄탄한 엘프의 몸매. 멀리서 본다면 사람이라고 해도 믿어질 형상이었다.
 “네 조상 중의 누군가가 분명 사람과 결혼했을 거야.”
 “옛날 일은 관심 없어. 먹어!”
 크로네가 사슴 가슴살에 양념을 바른 후에 야스콘에게 주었다.
 “크악! 너무 짜고 맵잖아?”
 “그래? 난 좋아하는 사람에겐 뭐든 듬뿍 발라 주는 게 단점이라니까.”
 크로네가 밉지 않게 웃었다.
 “어쨌든 수고했다. 너도 먹어.”
 이번에는 야스콘이 뒷다리를 찢어 내밀었다.
 “복수전? 혹시 독한 찻잎 가루라도 슬쩍?”
 “그럴지도 모르지.”
 야스콘이 피식 웃었다.
 “크흠! 맛있군. 역시 매너는 죽인다니까.”
 “실력도 죽여주면 좋겠어. 그냥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해 버리게…….”
 “네가 어른이 되면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아스캄 영주님보다도 더 멋지게.”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 최고의 성인이 되는 거야. 기다림이 얼마나 지겨운 건지 알잖아?”
 “방법이 있어.”
 별안간 크로네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무슨?”
 “타이켄! 너 좀 나가 줄래? 내가 야스콘을 어른으로 만들어 버리게.”
 “우어우어!”
 고기를 뜯던 타이켄이 배꼽을 잡고 키득거렸다.
 “둘이 무슨 짓이야?”
 그 표정은 분명 그런 언어였다.
 “쳇!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으면 오늘 밤이라도 내게 말해. 남자는 여자를 안고 잠자면 어른이 된다구. 특히 인간의 남자는…….”
 “뭐야? 그럼 아까 그 말이?”
 야스콘이 손에 든 고기를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푸하하! 농담이라구! 농담!”
 크로네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간단하게 어른이 되고 강해질 수 있는 거라면…….”
 뒤쫓아 가던 야스콘이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백번이라도 너하고 자 줄게.”
 “쳇! 뭔 말을 못해요.”
 크로네가 송곳니를 번쩍거리며 구시렁거렸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