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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투드래곤 1+1=1 [E](종료231129)

투드래곤 1-1

2015.05.12 조회 540 추천 3


 서문 ― 인간에게 바치다!
 
 
 
 어린 인간의 동공 속에서 대륙을 보고, 한 송이 데이지 꽃에서 신의 섭리를 본다.
 천지를 흔드는 웅대한 힘이 내게 있거니와 그 힘보다 더욱 값진 것이 있는 세상.
 미션을 위해 온 대륙이었으나
 나는 보았다.
 한 올의 바람에서도 진리를 깨닫고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고귀한 목숨조차 아낌없이 던지는 생명체.
 어떤 폭압과 힘에도 굴하지 않거니와
 순간에서 영원을 길어 올리는 그들의 무한한 삶에 경배하노라.
 이는 지상의 수많은 생명체 중 오직 그대들 인간에게만 허용된 일이니
 만 년을 사는 드래곤의 삶보다 더 위대하다 칭송되는 이유를 알았도다.
 인간들이여.
 내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티끌 같은 존재들이여.
 나약한 육신으로도 눈부신 성취와 진보를 이루는 존귀함이여.
 나의 명예와 바람을 그대들을 위해 기꺼이 벗어두고 가나니
 대륙에 영원하라. 인간만의 오롯한 영광!!
 
 
 
 프롤로그
 
 
 퍼덕이던 바람 소리가 잦아드는 영광의 수련장 퀴네베얀. 그 육중한 일곱 개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는 수련장의 첫인상은 역시 거대한 황금 드래곤 상(像). 그레이트 노스토스를 이룬 위대한 드래곤들의 미소는 시간을 건너와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스타디움 안으로 기괴한 바람이 쓸려갔다. 그 아련한 중심에서 불현듯 스슥 모습을 드러내는 은빛 불꽃이 안드레시아를 맞이했다. 사방에 가득한 교교함. 육중한 분위기는 드래곤에게조차 마른침을 삼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 덩어리의 불꽃이 날아와 안드레시아를 휘감았다. 그것은 하나의 신호와 같았으니 두 개의 맑은 광선을 타고 심사관들이 내려왔다. 안드레시아는 뜨거운 호흡을 후욱 들이마셨다. 칼날 같은 긴장감은 모든 비늘을 삐죽 곤두서게 만들었다.
 필 합격!
 ‘후웁!’
 그 말을 곱씹으며 안드레시아는 은빛 비늘이 한껏 도드라질 때까지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프리즈매틱 스피어(Prismatic Sphere)!
 
 마지막 과제는 그것이었다. 클래스 나인에 속하는 절대 방어법. 미성년 드래곤들에게는 위험천만한 시도. 텅 빈 공간에 선 실버 드래곤 안드레시아. 사방은 비어 있다. 그를 지켜보는 것은 차례를 기다리며 오만한 미소를 짓는 카이플로와 심사관으로 참석한 파이로칼과 하산드라의 시선뿐.
 하지만 마침내 집행관을 맡은 두 에인션트 드래곤이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한순간에 묵직해졌다. 천지가 흔들리며 광포한 카오스의 진동이 인 것이다. 숨 막히는 긴장감.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클래스 나인을 넘나드는 에인션트 드래곤들.
 꿀꺽!
 안드레아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같은 드래곤이지만 바라만 보아도 절망감이 밀려드는 절정 공격 마법을 마스터한 집행관들. 마음만 먹는다면 대륙의 한 면을 뭉텅 들어낼 수도 있는 그들이 아닌가?
 그들 중 블랙 드래곤이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저만치 떨어진 곳의 단단한 바윗덩이 하나가 모래가 되어 흘러내렸다. 가볍게 몸을 푼 것이다.
 짧은 정적을 두고 심사관 파이로칼의 음성이 울렸다.
 “진행하라!”
 그 한마디. 카오스의 혼란도 숨을 죽였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고요가 소리없이 일어섰다.
 ‘시작이다.’
 안드레시아는 즉시 사력을 다해 빛의 무리를 촘촘히 피워 올렸다. 한 치의 오차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만큼 위험한 관문.
 ―발생.
 ―형성.
 ―완성.
 ―확인.
 겨우 실드 서클의 형태가 완성되고 무지갯빛이 감돈다 싶을 때 집행관을 맡은 두 에인션트 드래곤의 득달같은 공격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막막하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은 드래곤 피어. 드래곤이 느낄 수 있는 공포라면 인간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정도로 창대한 것.
 “메테오 스웜!”
 “헬 버스터!”
 싹쓸이 마법으로 통하는 최강의 클래스 나인 공격 마법. 안드레시아는 이를 물고 모든 마나를 빛에 실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계통의 마법이 있다. 드래곤의 마법과 기타 종족의 마법. 그것은 같은 원리에서 시전되지만 위력은 달랐다. 특히나 이런 특별한 관문에서는 진정한 드래곤의 마법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1+1=1의 마법이 발현되는 것이다.
 1+1=1의 마법!
 그것은 드래곤만의 유일한 마법 발현. 다른 종족이라면 마나의 세기가 약해 절대 동시 발현이 될 수 없다. 더구나 클래스 7 이상의 강력한 마법이라면.
 이는 하나의 마법 효과가 하늘과 땅속에서 동시에 작렬하는 것이니, 메테오 스웜의 예를 들면 하늘에서도, 땅속에서도 절망의 화염구들이 강타한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위아래, 전후의 강도 조절까지 가능하다. 마법 능력이 뛰어난 드래곤이라면 말이다.
 여기에다 에인션트 급의 드래곤이라면 무형의 발현도 추가된다. 보이지 않다가 별안간 눈앞에서 콰앙. 그러니 완벽한 방어가 아니라면 잿더미가 되는 건 명명백백한 일.
 “백화(白化:White Mode).”
 후웅!
 집행관들의 외침과 함께 몸에서 한 번 더 폭발적인 섬광을 이룬 오러가 후끈 밀려 나왔다. 이내 세상은 흰색으로 뒤덮이고 오직 안드레시아의 머리 위에서만 푸른 섬광이 빠지직거리며 뇌전의 바다를 이룬다. 완벽한 1+1=1의 마법이라는 징후.
 ‘제발!’
 천지를 흔드는 폭음 속에서 안드레시아의 가느다란 비원이 떨림으로 배어 나왔다.
 콰아아앙!
 “……!”
 콰아아앙!
 두 번의 장쾌한 폭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터져 오르는 완벽한 악몽의 시간. 청각의 한계를 넘어가는 폭발과 함께 태산 같은 연기가 앞을 가렸다. 클래스 나인의 강력한 공격 마법들. 무방비 상태로 맞는다면 에인션트 드래곤이라고 해도 박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청명!”
 모습을 드러낸 파이로칼이 가볍게 소리치자 연기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분화구처럼 한없이 넓게 패인 구덩이를 바라보던 블루 드래곤 파이로칼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끄응!”
 흙더미를 헤치고 안드레시아가 겨우 몸을 꿈틀거렸다. 온통 그을린 몸통. 먼지와 흙을 뒤집어쓴 사나운 몰골이었지만 어쨌든 해냈다. 그는 이제 종족 체험의 유희를 떠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대단하구나. 완충 실드의 원리라니. 이건 네가 정확하게 구사하기에는 어려운 마법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멋지게 맥을 짚었다. 절대 마법에 절대 방어는 자칫하면 실패하지. 만일 네가 풀 메탈 실드나 스톰 실드의 원리를 이용한 프리즈매틱 스피어로 맞섰다면 지금쯤 바비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응급 구조를 하긴 했겠지만.”
 파이로칼이 다가와 안드레시아를 부축해 주었다.
 ‘치잇! 이것 때문에 떨어지면 카이플로 녀석에게 쪽팔리잖아요. 자그마치 166일 동안이나 오직 이 마법만 연습했다고요. 그래도 죽을 뻔했네. 젠장! 실전도 아니면서 그렇게 강력하게 공격하다니. 진짜 고소한 냄새 폴폴 풍기는 바비큐가 될 뻔했잖아?’
 안드레시아는 온몸에 쌓인 먼지와 파편을 털어냈다. 바닥 쪽에 약간의 약점이 있어 위험했지만 완충 실드의 선택은 잘한 일이었다. 처음 안드레시아는 메탈 실드를 연습했었다. 하지만 힌트를 받았다. 강력한 마법에 강력한 실드로 맞서는 것은 최소한 시전자보다 더 강한 클래스를 성취했을 때에나 가능하다는 것. 하위 클래스의 경우에는 힘으로 받아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사실에서 유추해 낸 것이 바로 완충 실드였다.
 다음은 레드 족의 신성(新星) 카이플로의 차례였지만 보지 않았다. 자칭 마법 천재라고 떠벌이는 녀석이니 보지 않아도 결과는 알 수 있다.
 ‘재수없는 놈. 잘해보라지.’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공포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다.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그 처음에서 갈래를 쳐 뻗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마찬가지다. 작은 물 한 방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바다다. 처음부터 바다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는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첫 성취는 순결하다. 그 다음부터의 성취가 비록 더 높다 해도 첫 성취만큼 강렬하거나 순수하지는 못하다. 마음이란 모든 생명체에 한결같이 간사한 면이 있어 첫 경험을 넘어서면 오만해지는 경향이 뚜렷하다.
 처음을 가장 순수하고 높게 즐겨라. 그 처음이 너의 마지막을 결정할 것이다.
 돌아올 때는 돌아와야 한다는 의식을 버려라. 미션은 중요하지만 무엇이든 너무 간절한 소망은 살짝 비껴가기 마련이다. 오히려 가장 담담해졌을 때 소망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드래곤의 ‘그레이트 노스토스’는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드래곤만의 대륙 페루메시아.
 막 성년을 앞둔 드래곤 로드의 아들, 실버 드래곤 안드레시아가 타 종족 체험의 미션을 앞두고 스승 파이로칼에게 받은 마지막 강론―안드레시아는 잔소리라 말한다―은 이것이었다.
 
 
 
 1. 하필이면 인간?
 
 
 
 “안드레시아!”
 드래곤 로드 슈엘룬은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 금단된 대륙 ‘페루메시아’의 제황인 그지만 오늘만큼은 조금의 위엄도 갖추지 않았다. 그저 정다운 아버지의 모습이다.
 “잘할 수 있겠지?”
 “그럼요.”
 안드레시아는 주저없이 답했다. 내심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안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다른 무엇으로 변한다는 것. 그것은 안드레시아 또래에게는 어쨌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따분한 페루메시아 대륙보다는 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기이한 공간도 많지만 이젠 신물나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고매한 원로들의 은유에 가득 찬 강론이나 느리고 무료한 선배들의 일상은 혀를 찰 정도다. 제아무리 중요한 마법을 배우는 시간도 그런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지긋지긋해!’
 클래스 8을 넘나들 때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된 마법 학습. 절정 클래스 나인의 마법도, 서툴지만 한 번씩은 실습해 보았다.
 절대 면역을 실습할 때 헬 버스터를 막다가 옆구리를 뭉청 데었고, 타임 스톱 때는 잘못되어 상반신만 마비되었고, 초대형 이오나드를 시전할 때는 온몸의 비늘을 홀랑 그을려 먹었다.
 아아, 그때 만나는 드래곤마다 놀려대는 통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어디선가 비늘을 대여해 준다고만 하면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빌려오고픈 심정이었다.
 그럼 정확히 몇 클래스를 이루었냐고? 음음… 조금 뻥을 치면 8.5이고 겸손하게 말하면 7.5는 될 것 같다. 즉 자신이 볼 때는 클래스 8은 사뿐히 넘는 것 같지만 스승 파이로칼은 후하게 줘도 7이라고 폄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로 중급 마스터 계열인 4∼6 클래스의 마법을 즐겨 사용한다. 왜냐고? 그냥 그게 편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열받으면 클래스 나인도 가능하긴 하다. 열받았는데 뭐는 못할까?
 마법 수련이 재미있지 않냐고? 만에 만에 천만에! 실습의 반복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렇다고 드래곤끼리 죽자 사자 싸울 것도 아니고 실습 대상 몬스터도 실물이 아니라 마법 창조물이다. 한마디로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드래곤 얼굴의 비늘 숫자까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제한적인 숫자의 드래곤들. 그게 안드레시아를 더욱 질리게 했다.
 ‘얼마나 이 순간을 손꼽았던가?’
 안드레시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희의 미션!
 성년이 되기 직전, 용기있는 드래곤만이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과정. 그 과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완벽하게 단절된, 모든 것이 호기심 자체인 다른 세상으로 가는 일이었다.
 드래곤들은!
 그들만의 대륙 페루메시아를 구축하면서 다른 종족들의 접근은 금지되었다. 마찬가지로 드래곤도 어떤 이유로든 기타 종족의 대륙에 갈 수 없었다. 오직 하나의 예외만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성년이 되기 이전의 드래곤 중에서 희망자에 한해 타 종족 체험 미션을 떠나는 일뿐이었다.
 지금 페루메시아의 드래곤들은 가볍게 술렁거렸다. 드물게도 약간의 시차를 두고 두 드래곤이 기타 종족으로의 대체 유희를 떠날 시간이었다. 대개 종족 체험의 미션을 달가워하지 않는 드래곤도 많아―선천적 게으름이 원인이다―연이어 떠나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안드레시아.>
 드래곤 로드의 아들로 낙천적이지만 진지함이 3% 부족한 실버 드래곤.
 <카이플로.>
 오만에 휩싸여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 일상이 온통 안드레시아에 대한 질시로 가득 차 자기 대(代)에는 레드 일족의 명예 회복을 하겠다며 공공연히 떠벌이는 레드 드래곤.
 이들에게 드래곤들의 관심이 쏠린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안드레시아는 드래곤 로드의 아들이고 카이플로 역시 최근 2만 년 이내에 가장 마법 진보가 빠르며, 중흥을 외치는 레드 드래곤 일족인 까닭. 에인션트 드래곤들과 나이 차이가 많아 둘 중 하나는 차기 드래곤 로드의 물망에 오른 상황.
 그러다 보니 성장 과정과 마법 수련에서부터 묘하게도 사사건건 비교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 마침내 웬만한 드래곤들조차 꺼리는 종족 체험까지 함께 신청한 것이다.
 먼저 출발하는 것은 안드레시아다. 카이플로는 달이 세 번 지고 차는 89일의 간격을 두고 출발하게 되어 있다.
 “어이! 대 로드님의 귀하신 아드님. 엘프가 되면 공연히 인간의 세계에 얼쩡거리지 마. 내가 몰라보고 작살내면 곤란하잖아.”
 레드 일족의 특별 학습으로 비교적 마법이 강한 카이플로의 빈정거림은 억양까지도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너의 선택은 옳았다. 먼 과거에는 유희야말로 드래곤의 생을 살찌우는 멋진 체험이었지. 비록 위험과 고난의 시간이 된다고 해도 너를 믿는다. 너는 누구보다 지혜로운데다 드래곤 로드의 아들이니까.”
 슈엘룬이 안드레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
 “하지만 지혜도 용기로 충만할 때 강한 것이다. 힘없는 지혜는 나약함에 지나지 않아.”
 “…….”
 “고난은 삶의 가장 진실한 벗이니 성년이 되기 위한 마지막 축복으로 알거라.”
 “…….”
 “이것은 드래곤 일족이라면 누구나 영광스러운 일. 게다가 너는 내 뒤를 이어야 할 실버 족의 희망이다. 기왕 선택한 것이니 반드시 그레이트 노스토스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물론 설령 위험이 생긴다 해도 아무도 너를 도울 수 없다. 심지어는 로드인 나조차 말이다.”
 안드레시아는 눈을 한 번 깜박거렸다. 깊이 모를 눈이 더욱 반짝였다.
 “어떤 종족으로 미션을 겪게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의 염원을 따라 체험을 시작하게 될 거다. 그동안 기타 종족들의 역사와 생태에 대해서는 충분히 준비를 했겠지?”
 “네.”
 짧고 자신있는 대답.
 “아무리 비천한 종족으로 변하더라도 네가 장차 드래곤 로드가 될 신분이라는 자부심만은 잊지 말거라.”
 “네.”
 슈엘룬이 마지막으로 안드레시아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없는 순간이었다. 요란한 행사 따위는 없었다. 그저 빛이 갈라지며 안드레시아를 가르치던 스승 둘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하나는 블루 드래곤 파이로칼로 안드레시아에게 마법을 전수해 주던 마법 스승이었고, 또 하나는 드래곤 종족 체험의 의식을 담당하는 레드 일족의 원로 드래곤 하산드라.
 파이로칼은 잔잔한 눈빛이지만 하산드라는 따갑다. 늘 안드레시아에게 차갑던 하산드라이니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실버 족을 못마땅히 생각한다. 최강의 일족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이지만 당대의 드래곤 로드 자리를 실버 드래곤 슈엘룬에게 넘겨줬기 때문.
 오늘 그의 눈빛은 유난히 얄쌍해 보인다. 아마 같은 레드 일족인 카이플로를 보낼 때는 미소를 짓겠지. 무엇보다 이제 곧 하산드라와 레드 일족을 보지 않을 것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다.
 두 드래곤은 이내 다른 대륙으로 통하는 금지된 워프의 제단으로 아련히 옮겨갔다. 워프도 아니고 텔레포트도 아닌 잔상 이동법. 수백의 잔상이 꼬리를 잇지만 실체는 목표점에 가 있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그들에겐 하나의 보법(步法)에 불과하다.
 매직 게이트(Magic Gate).
 그것은 공간을 연결하는 신의 굴레라고도 불린다.
 하산드라에게서 백색수 한 잔이 주어졌다.
 “……!”
 이 물 안에 미션이 담겨 있다. 기왕이면 좀 쉬운 것이면 좋겠어. 안드레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단숨에 물을 마셨다.
 ‘엘프!’
 안드레시아는 오직 그 한 단어만을 뇌었다. 워프를 통과하는 순간에 강한 염원을 발하면 그 종족의 삶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해츨링도 알고 있는 공공연한 소문.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조금 불안한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두 드래곤에 의해 저절로 워프의 중심 앞으로 옮겨진 안드레시아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많은 드래곤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머지않아 같은 의식을 겪을 카이플로도 보였다. 다른 드래곤들도 각자 편한 곳에서 이 의식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해츨링이 아니라면 가능한 일이다.
 “시작하라!”
 로드 슈엘룬의 음성이 허공을 진동시켰다.
 “이제 곧 너의 과제가 보일 것이다.”
 레드 드래곤이 금속성의 울림으로 말했다. 동시에 안드레시아의 시야가 오색으로 흔들렸다.
 
 Failure comes in two ways. Those who do it without giving a thought. Those who thought about it but do nothing.
 실패는 두 가지 방식으로 찾아온다. 아무런 생각 없이 행하는 자에게. 생각을 하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과연 물결치는 경구의 무리 사이에서 한 단어가 황금빛으로 돌출되었다.
 ‘관용(The Generosity)!’
 안드레시아는 그 단어를 또렷이 인식했다. 이 미션은 오직 자기 자신과 매직 게이트만이 알 수 있다.
 “카이플로를 의식할 필요는 없다. 너는 너고 카이플로는 카이플로니까.”
 “…….”
 “다시 돌아왔을 때는 로드의 위엄에 버금가는 모습이기를 기대한다.”
 전음으로 들려오는 스승 파이로칼의 인자한 목소리.
 ‘치잇! 누가 의식한대? 마지막까지 잔소리라니까. 어쨌든 폴리모프든 대체 체험이든 엘프로만 보내주시라. 복잡다단하다는 인간은, 거기서 영웅 놀이를 하고 싶다는 카이플로 녀석에게나 걸리게 하고.’
 안드레시아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워프는 마나의 소용돌이를 이루며 거대한 파도처럼 휘돌았다. 기이한 기하를 이루는 원을 그리며 어지럽게 몰려가는 별무리들. 별들의 끝은 순식간에 어둠 속에 길을 내며 찬란하게 명멸해 갔다. 어둠을 따라 몇 가닥의 전류가 출렁이다 두 개의 대지를 끌어안는 순간 안드레시아의 비명이 각을 이루며 잘려 나갔다.
 “우아아악!”
 수직의 절벽!
 수평의 아뜩함!
 직각과 굴곡을 반복하는 날카로운 의식 사이로 드나드는 하강과 상승의 느낌. 그런 다음에 이어지는 폭발적인 부상(浮上). 태초의 섬광과 블랙홀의 굴레가 거기 있었다. 순식간에 수천만 개의 별무리가 섬광으로 터지며 허공에 환상처럼 흩어졌다. 영혼의 가닥이 실낱보다 가늘어지고서야 그 느낌은 그쳤다.
 해체 완료―빛의 알갱이로 생명이 나뉘었다가,
 결합 완료―알갱이는 다시 형체를 이루며 순식간에 합쳐졌다.
 그 시간 인간의 대륙 서단에 위치한 요충지 카드리엔. 활의 영지로 불리는 그 창공에 불벼락이 일었다. 저희끼리 요란하게 허공을 메우는 벽력의 기세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하늘을 날려 버릴 듯 쩌적거리던 뇌전과 천둥은 한순간 섬광인지 벼락인지 모를 절망감으로 단숨에 지상의 한 지점을 직격했다.
 오오오! 하늘이시여. 카드리엔의 모든 생명체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 눈을 뜨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신음은 천지의 미물들이 인간을 대신하여 냈다. 인간들은 폭발적인 섬광으로 인해 잠시 순간을 망각해 버린 것이다.
 후우웅!
 안드레시아는 전율과 함께 빛의 문을 빠져나오며 맹렬하게 눈을 떴다. 끝났다. 마침내 무료함의 대명사이던 페루메시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어디냐! 엘프의 숲 속?’
 안드레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광원이 낯설어 시야에 섬광의 잔상이 강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군.”
 귓전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드레시아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정신이 드느냐?”
 ‘보인다.’
 묻는 사람은 기품은 있지만 초라한 행색의 남자였다. 너저분한 튜닉을 두른 몸매. 어깨를 가지런히 덮은 갈색 머리의 기품은 어쩐지 행색과는 부조화를 이룬다. 직관이 또렷해지자 남자의 주변으로 추레한 옷차림의 사람들과 여자가 빠르게 시선을 차고 들어왔다.
 ‘허억!’
 안드레시아는 비명도 없이 소스라쳤다. 인간?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대답도 없이 눈동자를 움직였다. 촉감. 낯선 촉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만히 자신의 육체를 더듬었다. 손이 허벅지를 거쳐 가슴에 닿았다.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다.’
 벼락처럼 현실이 느껴지자 안드레시아는 벌떡 일어섰다. 헐떡이는 호흡을 감추려고 애를 써보지만 소용없었다. 인간이 되었다. 수많은 종족 중의 하나인 인간. 텅스 마법을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인간의 언어.
 맙소사!
 ‘젠장할. 하필이면. 그렇게 인간 체험을 원하던 카이플로에게나 걸리게 할 것이지.’
 안드레시아는 살덩이가 바르르 떨리도록 몸서리를 쳤다.
 “충격이 크기도 했겠지. 하지만 너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말거라. 네가 연회에서 토하며 쓰러지는 바람에 루에땅 백작이 단단히 노했으니.”
 바람 소리처럼 텅 빈 남자의 목소리, 게다가 표정은 안드레시아의 그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가자! 레이킨, 오늘도 연회가 있다. 정히 힘들다면 미리 속을 게워내고 가는 것도 좋아.”
 남자가 말을 마치자 곁에 서 있던 여자가 다가와 꼬옥 안아줬다.
 ‘이힉!’
 안드레시아는 잠시 몸서리를 쳤다. 스킨십이란 드래곤의 일상이 아니다. 여자도 놀라 가느다란 음성을 토해냈다.
 “열은 내렸는데 여전히 불덩이야. 마치 네 안에 용암이라도 안고 있는 것 같구나. 가엾은 레이킨.”
 ‘레이킨? 그게 내 이름인가?’
 “미안하구나. 이틀 동안 의식을 잃고 생사를 오간 너지만 오늘도 미라센들의 승리의 연회가 있구나. 또다시 우리를 조롱 거리 삼아 승자의 오만을 즐기려는 거겠지.”
 여자의 손길이 안드레시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분위기 때문일까? 공연히 심장이 울컥거리며 슬퍼졌다.
 “참을 수 있겠지?”
 “…….”
 “아버지를 봐서라도 참으렴. 너는 우리 글로드웰 가문의 장자야. 이 엄마의 부탁이다.”
 ‘엄마? 아버지?’
 멍하니 서 있는 안드레시아를 남자가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그러자 밖으로부터 사나운 불호령이 들려왔다.
 “당장 나오지 못해? 꾸물거리면 묶어서 끌고 가겠다.”
 고조된 억양과 억센 발음이 안드레시아의 청각을 자극했다. 듣기만 해도 호전적인 음성. 남자는 고갯짓을 하며 안드레시아를 재촉했다. 빨리 나오렴. 그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엘프가 되고 싶었는데… 이게 뭐람.’
 안드레시아는 짧게 생각했다.
 드래곤들만의 영토 ‘페루메시아’. 그곳에 사는 드래곤들의 용기의 상징으로 불리는 타 종족 체험 미션. 희망자는 누구나 성년이 되기 전에 타 종족 미션을 거칠 수 있다. 그것을 일러 성년 드래곤들은 환상의 유희라고 하지만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일단 타 종족의 몸을 빌리면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드래곤으로 존재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더러는 타 종족의 몸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드래곤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진정한 용기의 상징으로 인정받으려면 어떤 개체의 몸이든 빌려 각자의 미션을 이루는 과정이 필요했다.
 물론 정해진 기간은 없다. 정답도 없다. 확실한 것 하나는 드래곤이 자신의 과제를 이루면 페루메시아로 통하는 매직 게이트가 저절로 열린다는 것과 도무지 이룰 자신이 없으면 매직 게이트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것. 매직 게이트는 스스로 찾기도 어렵지만 그렇게 귀환하게 되면 마법 능력이 반 이상 고갈되어 바보 취급을 받는다.
 반면 미션도 이루지 못하고 매직 게이트도 찾지 못한 채 죽으면 시체로써 페루메시아로 돌아간다. 가장 비참한 결론인 셈이다. 물론 미션을 이루면 드래곤 일족에게 명예롭게 환영을 받지만 실패하여 귀환한다면 평생 음침한 레어 안에서 놀림거리가 될 뿐이다.
 그레이트 노스토스(Great Nostos)!
 드래곤들은 과제를 완성하고 무사히 돌아오는 영광을 그렇게 불렀다. 그레이트 노스토스야말로 명예로운 드래곤에게 허용되는 단어였다. 지금까지 그레이트 노스토스의 영예를 안은 것은 드래곤 역사에 있어 그리 많지 않다. 그들 중에 생존하고 있는 드래곤은 로드 슈엘룬이 유일무이했다.
 블랭크 노스토스(Blank Nostos)!
 반면 실패한 드래곤에겐 이런 접두사를 붙여 드래곤 사에 치욕으로 기록했다. 간단히 줄여서 멍청이라고 하면 된다.
 더구나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두 드래곤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타 종족 체험에 들어간다. 대륙이 폭삭 가라앉을망정 잘난 척의 대명사 카이플로에게 뒤진다는 것은 꿈에서도 있어서는 안 될 일.
 ‘관용(The Generosity)!’
 안드레시아에게 주어진 미션.
 ‘쳇! 엘프만은 못하지만 돼지나 고블린 같은 것보다는 낫겠지. 카이플로 녀석은 눈알이 튀어나올 때까지 울기 같은 과제가 주어져 평생 질질 짜다가 왔으면 좋겠다.’
 안드레시아는 미련을 떨쳐 버렸다. 어차피 통과해 버린 매직 게이트였다. 투덜댄다고 해서 다시 선택할 수는 없는 운명인 것이다.
 ‘엇!’
 인간으로서 첫발을 내딛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어지럼증. 대체 육체에 대해 익숙지 않은 반증이었다.
 “레이킨!”
 여자가 걱정스레 소리쳤다. 안드레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다고 표시했다.
 ‘저 여자가 내 엄마로군. 밖으로 나간 남자가 아빠고. 어쨌든 갓난아이로 태어난 것보다는 백배 낫다. 그나저나 밖은 어디람? 멋진 마법사의 궁전이거나 고귀한 기사의 성이면 좋으련만.’
 안드레시아는 균형을 유지하며 반대편 발을 내디뎠다. 이내 중심이 잡히며 걸을 만했다. 마법을 배울 때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적이 있었다. 인간들의 역사나 생태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거의 장난이었다. 누구나 그렇다. 같은 또래의 드래곤들치고 그런 교육에 진지하게 임한 녀석은 없었다. 대충 시간을 때우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현실은 강의와는 확실히… 달랐다. 어지럼증이 사라지면서 겨우 인간의 몸에 적응이 되는가 했지만 낡은 문을 여는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다.
 ‘웃!’
 안드레시아는 움츠렸다. 햇살이 너무 밝다. 그 반면 시야를 차고 들어오는 풍경은 무겁다.
 ‘살벌하네.’
 여기저기서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울한 풍경들.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의 표정에 공포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그들 사이사이로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보인다. 위압적인 함성과 발자국이 따갑다. 여기저기서 들려 나가는 시체들.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기분 나쁜 연기. 병사들이 고집스레 부여잡은 창검에서는 피비린내가 맹렬하게 끼쳐 왔다. 뭔가 난폭한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것이 분명했다.
 ‘전쟁?’
 “아아악!”
 짐작은 맞았다. 성벽의 모서리에서 처형이 집행되었다. 수도사 차림의 남자들과 창녀들 몇 명이 병사들의 창검에 찔려 비명횡사하고 있었다. 히익! 인간들, 생각보다 살벌한 종족들이네. 안드레시아는 퀭한 눈을 떼지 못했다.
 “레이킨.”
 짧은 묵념을 올린 남자가 근엄한 시선으로 안드레시아를 바라본다. 정신 차려. 제발, 하는 감정이 저절로 느껴진다.
 “역시 무리예요. 저 애는 지난 이틀간 죽을 뻔했다고요.”
 여자가 달려와 허덕이는 안드레시아의 어깨를 부축해 줬다.
 ‘뭐야? 이 여자의 몸이 닿으면 마음이 뿌듯해지네.’
 잠시 화평한 마음에 사나운 채찍이 떨어졌다.
 “서둘러!”
 기사 하나가 말 위에서 채찍을 휘둘러 남자를 직격했다. 역시 귀에 거슬리는 억양과 함께 쉬이이 쉬이이 하는 소리가 마치 뱀의 그것처럼 청각을 자극했다.
 “카리온!”
 “괜찮아. 어서 레이킨을…….”
 남자는 여자의 비명을 막으며 의연하게 일어섰다.
 “빨리빨리 움직여.”
 기사의 주변에 포진한 병사들 중의 하나가 남자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소리친다. 분위기 한번 죽여준다. 인간 세상에 온 걸 환영은 못할망정 너무하잖아. 레이킨은 기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혼자 생각했다.
 “어서 가자. 저들의 머리에는 살육과 오만이 가득 차 있어.”
 “하지만 카리온.”
 “쉿! 보면서도 몰라? 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자칫하면 레이킨을 죽일지도 몰라.”
 남자는 심각하게 말하며 여자와 안드레시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죽여? 아직 인간 생활에 적응도 못했는데 그럼 안 되지.’
 안드레시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내,
 ‘아니야. 인간이 나를 감히?’
 하고 번복했다. 인간 따위가 드래곤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일.
 ‘그런데 여긴 인간의 땅이잖아? 일단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안드레시아는 다소 혼란스러운 생각을 거두고 남자를 뒤따랐다.
 꾸어억!
 순간 거대한 몬스터 십여 마리가 묶인 쇠줄을 출렁이며 레이킨을 삼킬 듯이 발광을 했다.
 ‘라이호그?’
 안드레시아는 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라이호그!
 그것은 산돼지와 말을 섞은 듯한 몸체에 사자처럼 무시무시한 머리를 가진 몬스터로 초원의 드래곤으로 불린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민첩성, 맹포함을 자랑하는데 종족백서에서 보던 것보다 귀엽게 보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드래곤 안드레시아의 시각이다. 인간의 기준이라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 분명했다.
 “레이킨, 위험해. 단숨에 사람의 목을 부러뜨려서 삼키는 몬스터들이야.”
 여자는 멍하니 서 있는 안드레시아에게 다가와 황급히 잡아끌었다.
 ‘윽! 그러고 보니 이게 무슨 냄새야?’
 안드레시아는 맞닿은 여자의 옷에서 풍기는 악취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온통 쿠리쿠리한 냄새투성이였다. 남자의 몸에서도, 자신의 옷에서도.
 ‘지독하군. 토할 지경이야.’
 겨우 구토를 참으며 안드레시아는 여자에게 물었다.
 “지금 뭘 하러 가는 거죠?”
 “조금만 더 의연하렴. 사람들이 보고 있잖니.”
 “사람들?”
 “우리는 그들의 희망이다. 비록 더러운 옷으로 감싸였다고 해도 비굴하게 보이면 안 돼.”
 ‘무슨 선문답이람? 어딜 가는 거냐니까.’
 “곧 황궁의 구원군들이 웨이즐링 강을 넘어오던지, 아니면 최소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보상금이라도 보낼 거야. 그러니…….”
 여자는 다시 안드레시아를 품으로 당겼다. 금세라도 울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으로.
 ‘후아! 미치겠다. 이렇게 세게 안으면 냄새에 질려 죽을지도…….’
 안드레시아는 겨우 얼굴을 들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랫배가 묵직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요의(尿意)가 걷잡을 수 없이 느껴졌다. 방광에 강물이라도 들어찬 것 같았다.
 “왜? 또 아프냐?”
 “그게 아니라…….”
 여자의 물음에 안드레시아는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이봐요. 잠깐 소변 좀 보고 가게 해줘요.”
 여자가 기사에게 애원하자 기사는 코웃음을 치며 허락했다.
 “백작님의 연회에 지린내를 풍기게 할 수는 없지. 빨리 다녀와.”
 기사가 휘두른 채찍이 안드레시아의 발 옆에 떨어졌다.
 ‘나참! 한 브레스 거리도 안 되는 게.’
 안드레시아는 분을 삼키고 소변 볼 만한 곳을 찾았다.
 소변 보기.
 드래곤도 소변을 본다. 그들도 생물이니까. 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흔적도 없다. 배출과 동시에 향기가 되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건 해츨링 때부터 완벽하게 터득한다. 마치 인간의 아이가 변이 마려우면 하의를 내리는 것과 같이.
 인간은 어떻게 하더라? 기억을 더듬어도 잘 생각나질 않았다. 인간학 강의 때 불행하게도 흘려들은 것이다. 온몸을 위축시키며 고민하는데 허물어진 벽 너머로 한 인간이 소변을 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옳다구나 싶어 안드레시아는 똑같이 따라 했다.
 “크하하! 이놈이 정말 맛탱이가 갔구나. 사내 녀석이 앉아서 쉬를 보다니?”
 곁에 서서 물줄기를 뿜는 병사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제야 강의 내용이 머리를 스쳐 갔다. 인간들은 남자는 서서 보고, 여자는 앉아서 본다. 으윽! 개망신이군. 줄기차게 나오던 소변이 멈춰 버렸다.
 ‘젠장! 젠장! 제엔장!’
 “뭘 봐? 큰 게 좋은 건 알아가지고.”
 병사는 과시라도 하듯 소변줄기를 멀리 뿜었다.
 어쨌든 시원하다. 인간의 것은 이렇게 생겼군. 이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고 했지. 안드레시아는 다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원천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뭘 꾸물거려? 빨리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안드레시아가 돌아오자 기사는 또다시 채찍으로 위협하며 소리를 질렀다.
 ‘성질 한번 더럽네. 인간들이 이렇게 짹짹거리는 종족이었던가?’
 안드레시아는 여자를 따라 다시 걸었다.
 “바람이 두려우랴? 개미만도 못한 미라센들아! 대륙에 죽음의 폭풍이 몰려올 것이다. 키케켈!”
 별안간 광기 어린 백발의 노파가 길을 막은 것은 그때였다. 앙상한 뼈와 기묘한 미소 속에 번득이는 웃음. 쉬다 못해 걸쭉한 목소리. 오직 눈동자만이 불꽃을 튕기는 노파. 한마디로 ‘재수없어’라고 표현하면 딱일 것 같았다.
 “이 미친 노파를 아직도 목을 비틀지 않았단 말이냐?”
 기사가 발로 노파의 가슴팍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노파는 제 키만큼이나 긴 백발을 풀썩이며 나뒹군다.
 “오오! 그 발에 저주를!”
 노파는 쿨럭 기침을 토하면서도 중얼거림을 잊지 않았다.
 “백작님께서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저런 노파의 피를 창검에 묻히면 재수가 없다고…….”
 병사 하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온몸을 비틀며 일어서던 노파의 시선이 레이킨과 마주쳤다.
 “케엑!”
 그러자 노파는 마치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 신음을 토하며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끌어다 처박아. 내 눈에 띄지 않게.”
 “예!”
 기사의 명에 따라 노파는 두 병사에 의해 저만치 내동댕이쳐졌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레이킨을 향한 시선을 차마 떼지 못했다.
 “거기, 깨끗이 정리하라. 조금이라도 불손한 자들은 모두 베어버려. 미라센의 법으로!”
 기사가 몰려가는 한 무리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들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끌고 가던 사람들을 더욱 거칠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구나. 하루아침에 평화롭던 카드리엔이 이렇게 되다니……. 영주님의 목은 처참하게 잘려 성루에 걸려 있다.”
 거칠게 어깨를 밀어대는 병사의 완력 속에서 여자의 시선이 성루에 닿았다.
 ‘히익!’
 당장 미간을 찡그리는 레이킨. 성루에는 영주의 잘린 목이 처참하게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하렌느와 하이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와 다르지 않아. 오늘도 스핏 보이(Spit Boy)가 되어 있겠지.”
 “악독한 미라센 놈들. 천벌을 받을 거예요.”
 남자와 나지막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여자는 진저리를 쳤다.
 “지금 어딜 가는 거냐고요?”
 안드레시아는 다시 물었다.
 “치욕스럽지만 오늘도 퓨크 콜렉터(Puke Collector)가 되어야 한다.”
 남자가 건조하게 대답하자 기사는 그 말을 들었는지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퓨크 콜렉터? 그게 뭔데요?”
 “너를 사경에 빠뜨린 그 일!”
 
 
 2. 퓨크 콜렉터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이제 레이킨이 된 안드레시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여보! 아무래도 레이킨이 이상해요. 아직 정상이 아니에요.”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는 포로요. 다른 방법이 없소. 이들에게 자비를 기대하진 맙시다, 라니바.”
 신뢰가 묻어나는 남자지만 음성은 무겁게 들렸다.
 ‘젠장! 퓨크 콜렉터가 뭐야? 기타 종족의 역사에서 듣지 못한 소리 같은데. 종족백서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콜렉터라는 건 마음에 드는데 영 불안하네.’
 레이킨은 기억을 더듬었다. 단어의 뜻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긴 인간의 소소한 직업 같은 게 실감나게 떠오를 리 없다. 그것도 주요한 왕가의 일이라면 모를까. 사실 드래곤들은 다른 종족의 따분한 역사 강의를 싫어했다. 강사는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그린 드래곤 헤이샤였지만 대개는 그녀의 우아한 비늘 숫자를 세며 시간을 때우곤 했었다.
 ‘하여간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보아 뭔가 아주 좋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데.’
 레이킨은 일단 말을 아꼈다. 가만히 상황을 짚어보자면 자신은 레이킨이라는 소년의 몸에 들어간 것이다. 열일곱이나 여덟쯤 되어 보인다. 소년은 죽었을 것이다. 종족 체험은 정해진 공식이 없었다. 어떤 드래곤은 새로운 형체로 겪었고, 또 어떤 드래곤은 레이킨처럼 막 목숨이 끊어진 육체 안에 들어가 시작하곤 했다.
 “마윈이 올까요? 이미 카드리엔이 함락된 사실을 들었을 텐데.”
 여자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오겠지. 하지만 마윈의 병력은 고작 2천 명이 안 돼. 그러니 2만여 명의 침략자들과 겨룰 수 없어. 오지 않는 것이 좋아.”
 “구원군은요? 웨이즐링 강 건너에 집결한 그들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요?”
 “구원군이라면 빨리 올수록 좋지. 하지만 위정자들은 항상 편하고 쉬운 길을 찾으니 길을 찾다가 세월을 보낼 거야. 보상금이라도 보내면 다행이겠지.”
 부부의 무거운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레이킨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다.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전흔은 아직도 곳곳에 생생하다. 눈을 돌리면 온통 임시 군(軍) 막사의 바다. 성벽을 따라 목을 매달아 죽인 기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부패되지 않은 것을 보니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패배한 성의 기사들일 것이다.
 그러다 레이킨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성 아래 아무렇게나 처박힌 부러지고 찢겨진 카드리엔의 문장. 그 그림은 분명 드래곤을 상징하는 것. 고개를 드니 성루에서는 검은 독수리의 문장이 박힌 침략자의 깃발이 오만하게 펄럭인다. 뭔지 모르게 부아가 확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는 레이킨.
 한 편은 점령군이고 또 한 편은 패배자들. 승리자는 오만에 겨워 정복자의 쾌감에 젖어 있고, 패배자들은 노예처럼 휘둘리고 있다. 동원된 일꾼들이 여기저기서 복구에 땀을 흘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땀이 채 멈출세라 정복자들은 쉴 새 없이 쉬이익쉬이익 채찍을 휘두른다. 레이킨의 위치를 가늠해 보니 성의 음지에 자리한 하인이나 하급 시종들의 집단 서식처였다. 여기저기 감시의 눈길도 따갑다.
 ‘거지가 따로 없네. 다들 전염병이라도 돌 것 같은 옷차림 하곤.’
 레이킨이 인상을 찡그릴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다. 행색은 오십보백보인데 그들이 대하는 태도는 마치 귀족을 대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공작님.”
 “소공자님.”
 “무슨 짓이냐? 다들 죽고 싶으냐? 물러서지 못해?”
 기사가 검을 빼 들고 휘두르자 겁에 질린 사람들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저들을 볼 낯이 없네요.”
 “…….”
 라니바의 목소리에도 무거운 한숨이 달려 있다. 남자는 더욱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공작? 그럼 괜찮은 직함인데 이게 뭐야? 거지꼴 하곤. 머리에 지진난다.’
 레이킨은 눈시울을 찌푸렸다.
 점령군들의 모습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러는 한 무리씩 열을 이루어 달려간다. 그들의 창검이 햇살을 튕겨내면 주변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숨을 죽였다.
 이윽고 본성에 들어섰다. 하얀 중심 탑을 가진 고풍스러운 성이었다.
 “이 성이 무슨 성이죠?”
 레이킨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물었다. 라니바의 표정이 뜨악하다.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을 물었군. 젠장. 자기가 사는 곳을 물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살 수도 없고. 레이킨의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레이킨, 루에땅 백작의 부인을 만나서라도 청을 해보겠다. 오늘만이라도 너를 연회에서 빼달라고 말이야.”
 슬픔에 겨운 라니바의 팔이 레이킨을 끌어당겼다. 으윽! 제발. 애정 표현을 자주 하지 마. 익숙하지도 않은 데다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히잖아. 레이킨은 후끈 끼쳐 오는 냄새에 진저리를 쳤다.
 “죄송해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레이킨은 생각 끝에 그렇게 말했다. 가장 적합한 말 같았다. 어차피 ‘레이킨’이라는 육체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정신이 어디에 떨어져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선을 긋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라니바가 레이킨을 당겨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옷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배어 나왔지만 숨결은 부드럽기만 했다.
 ‘괜찮은데. 드래곤끼리라면 토악질이 났을 텐데.’
 레이킨은 아무도 모르게 혀를 찼다.
 
 “카리온 공작 각하!”
 기사가 병사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사이 노인 하나가 다가와 허리를 조아렸다.
 “공작은 무슨. 그는 이제 우리의 노예이자 퓨크 콜렉터란 말이다.”
 기사가 말 위에서 노인의 목을 잘랐다. 순식간에 선혈이 무지개를 그리다 사라졌다. 노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피는 쓰러진 후에 더 많이 나왔다. 여자가 레이킨을 감싸고 있는 동안 병사들이 달려와 노인을 자루 끌 듯 질질 끌고 사라졌다.
 “백작님께서 너희가 오면 지체없이 제자리에 대령시키라고 하셨다. 따라와!”
 기사는 오만한 표정으로 남자, 즉 카리온의 옷섶을 거칠게 당겼다.
 “그냥 두시게.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으니까.”
 카리온은 당당한 말투로 기사를 뿌리쳤다. 발끈한 기사는 소드를 빼 들었다.
 “그래도 꼴에 공작이라고 자존심은 있다 이거지?”
 소드는 카리온의 목덜미를 겨눴다. 금세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뭐야? 보자 보자 하니까. 치사하게.’
 레이킨은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 뻔했다. 하지만 카리온의 손이 단단하게 레이킨을 제지했다. 카리온은 슬쩍 비낀 시선으로 레이킨을 바라보았다. 텅 빈 눈빛이지만 뜨거웠다. 레이킨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이상한 일이다. 라니바와 카리온, 두 사람과 눈빛이 마주치면 알 수 없는 설렘 같은 것이 레이킨의 심장으로 전달되어 왔다.
 ‘으음? 인간이란 참 이상한 반응이 일어나는 존재잖아? 이런 말은 인간학에서 배운 적이 없는데.’
 싫지는 않았지만 낯선 반응이 잠시 레이킨을 혼란스럽게 했다.
 “조심해, 높으신 공작 나리. 우리 미라센의 검은 언제나 적국인(敵國人)의 피를 원하니까.”
 기사는 눈을 부라리고는 검을 거뒀다.
 셋은 병사들에 의해 분주하게 연회를 준비 중인 왕궁의 뜰로 옮겨졌다. 여기저기서 하인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의복을 마련하는 사람, 고기를 굽는 사람, 과일과 야채를 나르는 사람 등 시선이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병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카리온에게 목례를 올리며 스쳐 갔다. 잠시 후, 시종 하나가 다가와 세 사람에게 옷을 거칠게 던졌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 턱짓으로 입으라는 시늉을 했다. 옷을 갈아입으니 냄새는 조금 가셨다. 레이킨은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저기 하이비가 있어요.”
 라니바가 한쪽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레이킨 또래의 여자를 발견했다.
 “카리온 공작님. 레이킨.”
 그녀도 반가이 손을 흔들었다. 꾀죄죄한 옷차림의 여자. 얼굴에는 땀이 흘러 꼬질꼬질한 얼룩이 가득했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와 은발, 도드라지는 몸매. 봉긋한 가슴이 눈길을 끌었다.
 “어머니는?”
 “병사들이 저쪽으로 데려갔어요. 아마 화장실 청소를 시키고 있을 거예요.”
 “저런! 하렌느가 몹쓸 수모를 겪고 있겠구나. 나쁜 놈들. 곱디고운 너에게 이따위 스핏 보이를 시키고 있다니. 아무리 적국이라 해도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라니바가 안타깝게 말했다.
 “그나저나 레이킨, 괜찮아? 걱정 많이 했어. 꼴이 이렇다 보니 가보지도 못하고.”
 하이비는 자신의 발을 가리켰다. 그녀의 도드라진 흰 발목에 족쇄가 보였다. 고개를 들던 레이킨의 시선이 하이비의 그것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후끈!
 알 수 없게도 이마의 중앙이 달아올랐다. 레이킨은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꼬치로 돌렸다.
 “맛있겠다. 하나 먹으면 안 될까?”
 레이킨은 하이비보다 그녀가 돌리고 있는 꼬치의 고기에 더 본능이 끌렸다. 의식을 잃고서 얼마나 굶은 것인지 꼬르륵 하는 소리가 뱃속에서 천둥을 치고 있었다.
 “레이킨!”
 군침을 삼키는 레이킨에게 카리온의 시선이 무섭게 다가왔다.
 “왜요? 난 그저 배가 고프단 말이에요.”
 쫘악!
 동시에 레이킨의 뺨에서 별이 우수수 떨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레이킨이 고개를 들자 카리온의 손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쫙, 쫘악!
 “이놈! 아무리 죽을 고비의 신열을 앓았다고 하나 하이비를 모른단 말이냐? 그녀는 바로 네 곁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영주의 딸이자 너의 정혼녀가 아니더냐!”
 카리온의 목청이 천둥처럼 울렸다.
 정혼녀?
 이 여자가 내 정혼녀? 레이킨은 고개를 돌려 하이비를 바라본다. 하이비 또한 슬픔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쓸쓸한 미소와 함께 그만 고개를 숙여 버린다.
 ‘젠장! 한꺼번에 쫘악 적어서 다 알려주던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있나? 앞으로 골머리 꽤나 썩겠군.’
 레이킨은 고개를 저었다.
 “이봐! 너희. 거기서 뭘 하는 거야? 각자 자리로 가지 못해?”
 하인들이 카리온의 주변에 몰려들어 웅성거리자 즉각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하인들을 채찍으로 후려치고는 카리온과 라니바, 레이킨을 하이비에게서 떼어놓았다.
 “전 괜찮아요. 레이킨의 건강이나 잘 돌봐주세요.”
 하이비가 촉촉하게 말했다. 레이킨은 그 말에도 심장이 철렁했다. 그것은 카리온이나 라니바에게서 느끼는 것보다 더 강렬했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장차 나와 결혼할 여자다 이거군. 이것저것 다 정해진 상태라면 재미없는데.’
 레이킨은 병사들에게 밀려나면서 하이비를 돌아보았다. 레이킨은 무심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서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뭐야? 그런 눈빛은? 부담스럽잖아.
 “철혈기사단이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레이킨이 고개를 돌리니 라이호그를 탄 30여 명의 기사가 시선을 차고 들어왔다. 사납게 포효하는 라이호그의 등에 탄 붉은 갑옷 기사단의 위용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저놈들 때문에 성이 함락되었어. 저주의 몬스터와 기사단.”
 “미라센의 개들.”
 레이킨의 뒤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오만하리만치 위엄을 떨친 기사들은 라이호그에서 내려 일제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멋지네. 철혈기사단이라고? 인간들은 작명 센스 하나는 좋단 말이야. 레이킨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백작 부인은 어디 계시죠? 꼭 뵈어야 할 일이 있어요.”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라니바가 병사를 잡고 물었다.
 “나는 여기 있어.”
 서릿발보다 차가운 말소리는 레이킨의 뒤편에서 들렸다.
 ‘아! 화려하네?’
 레이킨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졌다. 우아한 드레스로 한껏 멋을 낸 백작 부인이 거기 있었다. 요란하다. 금귀걸이에 금목걸이, 금팔찌. 입을 벌리면 이빨도 온통 금니일 것만 같았다.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니바? 감히 퓨크 콜렉터의 신분으로 말이야. 설마 아직도 자신이 공작 부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백작 부인은 기사보다 더욱 오만하게 목소리의 끝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어째 행동을 보니 속이 뒤틀린다.’
 레이킨은 감탄 어린 표정을 찡그림으로 바꾸었다.
 “퓨크 콜렉터 라니바, 백작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라니바는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그래. 무슨 일이지?”
 “아시겠지만 우리 레이킨이 이틀 동안 신열을 앓았습니다. 게다가 레이킨의 침상에 난데없는 벼락까지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진 상태입니다. 죽을 고비까지 넘긴 아이이니 정신이 혼미하여 혹시라도 연회에 방해가 될까 우려됩니다. 그러니 오늘 연회에만은 빼주셨으면 합니다.”
 “벼락 얘기는 나도 들었어. 벨룬시아를 저주하는 신의 징치였다지? 그리고 신열이라? 내가 보기에는 멀쩡한데?”
 백작 부인의 음성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오늘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대신 우리 부부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글쎄. 오늘 연회에는 특별히 카드리엔을 함락시킨 공훈자들을 모두 초청한 까닭에 곤란하겠는데.”
 “백작 부인, 이렇게 간곡히 청합니다.”
 라니바의 허리가 땅에 닿을 듯이 숙여졌다.
 “내 신발을 좀 닦아줄 수 있겠어? 그러면 고려해 보지.”
 백작 부인의 입가에 잔인함이 스쳐 갔다.
 “…….”
 “아직도 자존심이 있다 이건가? 너희는 내 말 한마디면 바로 화형에 처할 수도 있어. 다만 너희 몸무게만큼의 금을 챙기기 위해 살려두는 것뿐이야.”
 “하죠.”
 “라니바!”
 카리온이 손을 뻗었지만 라니바의 몸은 이미 백작 부인을 향해 낮아져 버렸다. 라니바는 입술을 꾸욱 다문 채 백작 부인의 신발을 치맛자락을 이용해 닦았다.
 “아니, 그렇게 말고. 그 잘난 볼로 닦으란 말이지.”
 백작 부인이 웃었다. 옆에 선 수행 하녀들도 제 주인과 함께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두시오. 이건 너무한 것 아니오?”
 보다 못한 카리온이 제동을 걸었다.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라니바는 그것조차도 감내할 수 있다는 태세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뺨을 신발로 가져갔을 때 그때까지 멍하니 바라보던 레이킨이 성큼성큼 걸음을 안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요. 그러니 그런 짓 마시고 어서 들어가요.”
 “이놈이 누구 안전이라고?”
 기사는 금세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레이킨을 노려보았다. 순간 레이킨의 눈에서도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으헉!’
 기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라이호그의 눈빛보다도, 아니,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 그 자체인 레이킨의 눈빛.
 ‘내가 잘못 봤나? 오줌도 앉아서 싼다는 멍청이를 말이야.’
 기사는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레이킨 일행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음악 소리!
 왁자지껄한 귀족들의 웃음소리.
 본래 영주의 연회장이었던 이곳은 전보다 더욱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하프와 비올의 선율이 향기처럼 실내를 채우면서 내빈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내빈들은 미라센의 귀족과 철혈기사단, 그리고 또 다른 기사들이었다. 학자거나 마법사처럼 보이는 사람도 몇 명 보였다. 일부는 전투에 공을 세운 자들이었고 또 일부는 그 공을 만끽하기 위해 본국에서 달려온 귀족들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만 쳐다보는 거지?’
 연회장의 한쪽 구석에서 레이킨은 거의 모든 귀족과 기사들의 시선을 받았다. 그들은 눈길로 카리온 일가를 훑어보면서 히죽히죽 경멸과 멸시의 시선을 보냈다.
 ‘느끼한 놈들이네. 이것들을 그냥 콱 쓸어버려?’
 레이킨은 마법을 떠올렸다. 아직 최상급 마법은 익숙하지 않지만 중급 마법까지는 마스터한 레이킨이었다. 그러니 마음만 먹는다면 무방비의 귀족들과 십여 명의 기사 정도야 간단하게 죽일 수도 있는 일.
 ‘아니야. 관용을 배우러 온 내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지.’
 레이킨은 호흡을 진정시켰다.
 “백작님이 나오십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음악이 고조되었다. 시선은 일제히 입구로 쏠린다. 구릿빛 상체의 건장한 두 시종이 붉은 카펫을 깔면서 단단한 체구의 백작과 그 부인이 등장했다.
 루에땅 백작!
 화려한 금장 예복으로 치장한 모습에서 광채가 밀려 나왔다. 윤기가 번지르르 흐르는 풍채는 어쩐지 보통 사람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다. 가만히 주시하던 레이킨의 심장이 출렁 하며 흔들렸다. 백작의 검. 허리춤에서 빛나는 황금 칼집의 검. 가지런히 꽂힌 그 검이 레이킨의 심장 박동을 부추겼다.
 ‘뭐지?’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호기심이기도 한 감정. 평범한 검이 아님에 틀림이 없었다. 백작의 최측근에 따르는 사람은 마법사처럼 보였다. 검은 로브에 장식된 금줄 띠들이 그 또한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짝짝짝!
 박수 소리와 환영의 함성이 이어졌다. 백작을 따라 스쳐 가던 마법사가 한순간 멈칫하며 레이킨을 돌아보았다. 이제 막 노년에 접어든 듯한 세월의 풍상이 느껴졌다. 레이킨이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자 그는 날카로운 안광으로 레이킨을 보고는 뭔가 미심쩍은 눈빛과 함께 백작의 뒤를 따랐다.
 ‘느끼한 눈빛이잖아?’
 레이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의 첫날. 여전히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여기서 내가 드래곤의 본체로 폴리모프를 하면?’
 레이킨은 그렇게 상상해 보지만 타 종족 체험에 있어 그것은 거의 ‘완벽하게’ 금지된 일이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인간에게는 드래곤이 지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다. 드래곤들이 결코 인간의 대륙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지난번에 소란을 피운 놈이 이놈이로군.”
 상상이 끝나기도 전에 백작이 레이킨 앞에 서서 말 가죽 끈이 달린 짧은 지휘봉으로 두 볼을 한껏 후려쳤다. 그 역시 빠르고 억센, 솔직히 기분 더러운 억양이었다.
 ‘이 망할 놈이.’
 레이킨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카리온이 슬쩍 만류했다. 레이킨은 잘 참았다. 관용이다. 관용. 노는 꼴을 두고 보자구.
 “오늘은 제대로 하란 말이다. 이번에도 내 연회를 망치면 너희 일가에 대한 관용심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백작은 레이킨과 카리온을 노려보고는 주빈의 자리에 섰다.
 ‘됐거든. 관용은 내 단어야.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구.’
 “자랑스러운 미라센 제국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카드리엔을 완전히 점령했다. 겁에 질린 벨룬시아 놈들은 강 건너에서 쑥덕공론이나 벌일 뿐, 공격의 징후마저 없다. 영주 메겔리안은 기사 루삥이 그 목을 베었고 공작 카리온 일가는 보다시피 우리의 볼모가 되어 영광된 퓨크 콜렉터의 소임을 맡게 되었다.”
 “와하하하!”
 백작의 흡족한 미소를 타고 한바탕 웃음이 울려 나왔다.
 “지금쯤 내가 보낸 사신이 벨룬시아의 소인배들에게서 영토의 확장을 요구하며 목을 조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카드리엔은 다시 우리 미라센 제국의 영토임을 선포하노라. 이번 카드리엔 회복의 선봉에서 혁혁한 공을 올린 전공자들에게는 폐하의 특별한 치하가 계셨다. 다들 마음껏 즐기라.”
 백작이 힘차게 잔을 들자 귀족들도 일제히 잔을 치켜들었다.
 “황제 폐하 만세!”
 “루에땅 백작 각하 만세!”
 만세는 꼬리를 물었다. 레이킨은 풋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인간들, 노는 꼴들이 귀엽네.’
 하프의 음이 경쾌하게 치솟으면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각종 과실들, 포도주와 스테이크, 발효된 생선으로 만든 소스와 이상한 고기 요리가 꼬리를 물었다.
 “우리는 왜 자리에 앉지 않는 거죠?”
 레이킨이 물었다.
 “…….”
 “언제까지 여기에 서 있어야 하나요?”
 “첫 코스 요리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우린 안 먹어요?”
 “레이킨!”
 카리온이 단단한 시선으로 말했다.
 “아무리 정신이 혼미하대도 적군의 연회장이다. 비록 카드리엔을 수성하지 못해 패했을지언정 벨룬시안으로서의 긍지까지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카리온의 음성에서 어쩐지 살기가 느껴졌다.
 ‘화가 났군. 하긴 날 만도 하지. 보아하니 저 백작이란 인간이 싸가지도 없는 데다가 전쟁에서 진 모양이야. 인간들의 군주는 왕이나 황제로 불리니까 백작이면 공작보다 높은가? 아니면 후작보다 높은가?’
 레이킨은 경비병들이 엉덩이를 찰 때까지만 해도 가물대는 인간의 역사를 더듬는 등 비교적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비록 뱃속은 꼬르륵꼬르륵 먹을 것을 달라고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뭘 보고 있어. 저쪽 끝의 기사님이 안 보여? 빨리 기어들어 가란 말이야.”
 그 말과 함께 레이킨은 알게 되었다. 퓨크 콜렉터라는 것이 사실은 드래곤들처럼 고상한 보석 수집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귀족들이 토해놓은 음식물을 치우는 ‘구토물 수거인’이란 사실을.
 빨리 기어들어 가라!
 사실 레이킨은 그 말의 의미도 몰랐다. 그냥 얼떨결에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솔직히 퓨크 콜렉터가 뭘 하는 줄 알았단 말인가? 비록 인간에 대해 배웠다고 해도 드래곤이 인간의 관습과 단어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는 일. 물론 썩 좋은 것은 아닐 것으로 짐작했지만 막상 그 실상을 알게 되자 바로 속이 뒤집어졌다.
 “우웩! 우웩! 우웩!”
 일단 레이킨은 세 번을 토했다. 그의 위치는 연회장의 식탁 다리 안이었다. 길게 이어진 식탁은 적당한 어둠과 함께 끝도 보이지 않았다. 후각을 자극하는 진미의 냄새와 어우러진 구토물. 아무리 멋진 요리였다고 해도 구토물은 구토물이었다.
 미라센의 귀족들은 맛있는 코스 요리를 즐겼다. 한 과정을 먹으면 또 다른 요리가 나오는데 그걸 먹기 위해 조금 전에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다. 거기다 음주가 겹치면서 자연적으로 구토를 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군데군데 놓여진 대야의 정체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먹고 게우라고 둔 것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서 식탁 밑은 고개만 돌리면 되는 편한 곳이었다.
 귀족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은 내장을 제거하고 소를 넣은 겨울잠쥐에 벌꿀을 바르고 양귀비 씨를 살짝 곁들인 것. 이들은 아주 맛나게 먹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다음 요리가 나오기 전에 먹은 것을 토해냈다. 그나마 체통을 지키는 일부 귀족들은 지정된 공간(보미토리움이라 불린다)으로 갔지만 대다수는 제자리에서 해결했다.
 퓨크 콜렉터, 즉 구토물 수거자란 바로 그때마다 깨끗하게 이를 치워야 하는 치욕적인 일이었으니 본래는 하인이나 노예에게 시키던 일을 적국의 공작 일가에게 시킴으로써 정복자의 쾌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망할! 하필이면 이런 처지의 인간이 되다니. 기왕이면 멋지고 폼나면 얼마나 좋아? 적어도 황태자 정도는 되어야 드래곤 체면에 어울리는 거 아냐? 완전히 사기야.’
 레이킨은 신 냄새와 김이 모락거리는 구토물을 눈을 질끈 감고 통에 담았다.
 ‘대 드래곤이 겨우 인간들이 토한 음식물이나 치우다니 말도 안 돼. 이것들을 죄다 콱!’
 코를 막고 테이블 보 사이로 내다보니 카리온과 라니바도 온갖 조롱을 받으며 구토물을 치우고 있다. 귀족들은 쾌감을 즐기기 위해 공연히 카리온의 머리에 물을 붓기도 했다.
 끄으.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레이킨의 코앞에서 주르륵 구토물이 쏟아졌다. 시큼한 냄새가 아직 식지 않은 열기와 함께 후각을 역겹게 치고 들어왔다.
 “우웩!”
 레이킨은 일단 한 번 더 토했다.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내장의 가장 깊은 곳조차 끌려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참아라. 참아. 이따금 테이블 보 사이로 마주치는 라니바는 언제나 그런 표정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꿈이라고. 꿈. 레이킨은 도리질을 하며 눈을 질끈 감은 채 구토물을 치웠다.
 “우웩!”
 한 사람 것을 치우고 나면 자신도 한 번.
 “우웩!”
 또 한 사람 것을 치우고 나면 한 번 더. 일곱, 여덟 번을 참아내던 레이킨은 구토물을 닦는 자신의 목덜미에 뜨끈한 것이 쏟아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테이블 속에서 튀어나왔다.
 ‘관용이고 나발이고 도저히 못 참겠다.’
 “우웩! 우에엑!!”
 레이킨은 무엇인가를 의지한 채 그만 똥물까지 게워 버리고 말았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레이킨에게 쏠렸다. 레이킨은 격노한 백작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를 칠 때까지 눈알을 뒤집으며 구토를 계속했다.
 “이 망할 놈! 그냥 두지 않겠다!”
 ‘젠장! 내가 할 말이다. 미션이고 나발이고 다 그냥 쓸어버리겠어.’
 레이킨은 분노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레이킨의 시선에 거대한 체구의 기사가 들어왔다. 그가 미라센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공을 지닌 기사로 침략군의 한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레이킨. 루삥으로 불리는 기사의 얼굴은 너무나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레이킨이 의지한 것은 불행하게도 기사의 몸통이었고 쏟아낸 구토물은 기사의 온몸을 흥건하게 적신 후였다.
 “오! 레이킨.”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본 라니바는 그만 스르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놈이 감히 나에게 두 번씩이나?”
 분기탱천한 기사는 레이킨의 멱살을 단단히 거머쥐었다. 한 손에는 서슬이 팽팽하게 맺힌 검을 빼 든 채였다. 금세라도 목을 치고도 남을 기세였다.
 “그만두시오. 그 아이는 엊그제 일로 사경을 헤매다 벼락까지 맞았습니다. 겨우 정신이 들긴 했지만 아직 정상이 아니오. 모든 것은 아비의 잘못이니 내가 대신하여 벌을 받겠소.”
 카리온이 달려와 기사에게 말했다.
 “고귀한 공작이 무엇으로?”
 기사의 빈정거림이 레이킨의 귀에 들어오자 레이킨은 다시 속이 메슥거렸다.
 “으!”
 또 한 번의 신물이 넘어왔다. 이번에는 그만 기사의 얼굴을 흥건히 적시고 말았다.
 “더는 못 참겠다. 백작 각하, 이놈을 베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기사는 거친 말투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좌정한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작에게 향했다.
 “기사에게는 명예가 있는 법. 더구나 폐하께서 신망하는 수석기사 루삥이라면 누구도 그대의 뜻을 막지 못할 것이다. 볼모는 영주의 가족들과 공작 부부만 해도 충분할 것이니.”
 백작은 기사의 명예를 지켜주었다.
 “안 되오. 레이킨은 환자요. 정히 베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면 나를 베시오.”
 카리온이 기사의 몸을 잡으며 간청했다.
 “그런다고 봐줄 줄 알면 오산이야. 더 이상 거치적거리면 둘 다 베겠다.”
 “제발!”
 카리온은 무릎을 꿇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달음에 달려온 라니바도 그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간청했다.
 “레이킨은 환자예요. 부디 은총을 베풀어주세요.”
 “모욕을 당한 기사에게 은총 따위는 없다. 이놈은 내가 직접 목을 벨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오. 받아주시오.”
 다급한 카리온이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여보!”
 놀란 라니바가 카리온을 바라보았다. 결투 신청이라니? 공작은 기사 출신이 아닌 학자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정벌군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카드리엔의 하인들과 노예들도 또렷이 들었다. 공개 석상에서의 도전이었으니 피할 수 없었다. 기사 루삥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주저없이 대답했다.
 “벨룬시아의 공작 따위가 도전한 결투를 피하면 대 미라센의 기사로서 말이 아니지. 그 도전을 받아주마.”
 루삥의 말과 함께 라니바는 또 한 번 주저앉았다. 아들을 구하려다 공작을 잃게 될 판국이었다. 백작은 손에 든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기사의 명예에 관한 일이니 아무리 백작이라도 나설 자리는 아니었다.
 “검술조차 모르는 겁쟁이 카리온 공작이 감히 기사 루삥에게 결투를 신청하다니 하늘이 놀랄 일이로구나. 내 그 결투의 흥을 높이기 위해 카리온이 이긴다면 그 일가에게 퓨크 콜렉터의 일만은 면하게 해줄 것을 약속한다.”
 백작은 오만에 겨워 소리쳤다. 그의 곁에 선 마법사는 멍하니 선 레이킨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3. 마법 불능
 
 
 
 카리온 공작과 미라센의 루삥 기사가 결투를 벌인다!
 그 소식은 이내 성을 벌집처럼 쑤셨다. 점령군인 미라센들에게는 무료함을 달래줄 기회였지만 카드리엔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소문은 성의 지하에 투옥된 레이킨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동이 트면 카리온과 루삥의 결투는 시작될 것이다.
 ‘머리가 쑤신다.’
 레이킨은 습하고 차가운 감옥의 벽에 기대 고개를 흔들었다.
 인간 세상에서의 첫 밤.
 손바닥만한 창 하나가 달랑 달린 지하 감옥. 눈앞에서는 쥐 두 마리가 낯선 방문자인 레이킨이 마음에 안 드는지 찍찍거리다 사라졌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밤을 맞아도 성이 안 찰 판국인데 대 드래곤 로드의 아들이 고작 냄새나는 감옥에서 첫 밤을 지새워야 하다니. 이 꼴을 카이플로가 본다면 얼마나 고소를 금치 못할 것인가?
 희끄무레한 횃불을 따라 감금된 카드리엔의 병사들이 드러났다. 수백여 명의 군상. 그들은 어두침침한 감옥에 희망을 묻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는 어린 소년들이 가둬져 있다. 하지만 색다른 사람도 있었다. 가장 구석의 방을 차지한 은발의 노인. 무릎까지 덮는 눈송이 같은 수염을 늘어뜨린 채 흐트러짐없는 면벽의 자세로 앉은 그는 감옥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듯이 보였다.
 ‘당장 감옥을 뚫고 나가서 확 뭉개 버려? 까짓거 적당히 윈드 캐논 한 방 날린 후에 파이어 레인 슬쩍 뿌리고 파이어 스톰이나 헬 파이어로 마무리하면 대군이든 라이호그든 작살이 날 테니까.’
 레이킨은 치기 어린 유혹을 받았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일단 카리온과 라니바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 것 같다. 그럼 하이비는? 하이비를 생각하니 속절없이 배가 고팠다. 그녀가 꼬챙이에 꿰어 돌리던 고기의 냄새가 코끝에 재현된 것이다.
 ‘아무래도 그거 한 꼬치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몇 번을 토하면서 완벽하게 빈 내장은 상상만으로도 흔들렸다. 그러다 보니,
 ‘정혼녀라면서 슬쩍 한 꼬치 주지 말이야.’
 하고 공연한 야속함까지 밀려들었다.
 ‘그래도 은발이라… 그건 썩 마음에 든다니까.’
 레이킨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머릿결에서 풍기는 은빛의 서정이 실버 드래곤인 자신에게 동류의식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머지에 대한 인상은 모두 좋지 않았다. 난폭하다. 한마디로 그것인데 원래 난폭한 종족은 오크로 알았다.
 인간은 스스로가 신쯤 되는 줄 알지만 아주 연약한 존재.
 심장에 열두 개의 마음을 품고 있어 변덕스럽고 가늠이 어려운 존재.
 드래곤들이 가지고 있는 종족백서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인간들. 물론 더 멋진 말도 기억한다.
 
 제아무리 섬뜩한 창검을 겨누어도
 심장이 뭉텅 베어져 나간다 해도
 희망은 절망에 무릎 꿇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
 티끌만 한 한 올의 가닥으로도 희망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위대하다는 증표이다.
 
 이것 또한 인간 세상에서 불멸의 마법사로 불리는 욜키네시아의 마법서에 적힌 내용이었다. 비록 모든 드래곤들이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상황을 정리해 보면 지금 이곳은 영토 분쟁을 벌이는 인간의 제국임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백작 쪽이 승리자이고 공작이 패배자다.
 승리자인 백작은 공작과 영주의 가족을 볼모로 뭔가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승리자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볼모는 풀려날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공작이라면 높은 작위임에 분명하지만 현직은 퓨크 콜렉터, 즉 구토물 수거인. 더욱 주지의 사실은 그나마 해가 뜨면 카리온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을 생각해 보니 공작은 루삥이라는 기사의 검술 상대는 못 될 것 같았다. 그저 레이킨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결투를 청한 것이다. 대충 상황은 파악이 되지만 머리가 찌근거렸다.
 ‘인간은 자식에 대한 정이 각별하다더니,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런단 말인가? 아니면 영악한 것들이 이 드래곤님이 다 해결해 줄 것을 미리 알고?’
 레이킨은 카리온과 라니바를 떠올렸다.
 ‘그래도 인품은 멋진 사람 같아. 라니바도 따뜻한 사람 같고. 뭐, 하이비도 그만하면 나쁘지 않아.’
 레이킨은 좋은 것만 생각했다. 인간들의 일을 두고 요란을 떨 필요는 없다. 마음만 먹으면 한순간에 해결이 될 테니까. 당장은 적응이 우선이다.
 ‘젠장! 뭐 좀 묻어온 게 없나?’
 레이킨은 품을 뒤졌다. 따끈한 무엇이 만져졌다.
 ‘마나링과 마나 포션이잖아?’
 레이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두 열한 개의 마나링과 한 개의 마나 포션. 마나링은 어린 드래곤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희의 하나다. 링은 적색과 청색의 두 가지. 적색을 던지면 화염탄이 터지고 청색을 던지면 뇌전이 터진다. 가끔은 장난이 지나쳐 꼬리나 날개를 그을리기도 했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파이어 볼이나 선더 볼을 차곡차곡 마나링에 우겨 넣으면 된다. 위력은 대단치 않지만 장난감으로는 최고였다.
 마나 포션은 일종의 피로 회복용 청량음료에 속한다. 기분이 좋아지고 피로가 풀리는 청정한 마나의 결정체. 언제 묻어왔는지는 몰라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미션 관용!
 관용이라? 추상적이군. 기왕이면 단순하게 보석 100만 개를 모으라거나 미녀 100명 모으기 같은 게 쉬운데. 떨떠름하지만 아직은 미션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당장은, 잠이 천근만근 눈꺼풀에 쏟아졌다.
 ‘맞아. 인간은 날마다 잠을 자야 하는 종족이지. 그래도 이건 좀 심하군. 너무 졸려…….’
 
 카드리엔의 아침은 짙은 안개로 시작되었다. 아직도 성안 이곳저곳에 남은 횃불들 사이로 안개는 자지러졌다. 한 떼의 기병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패잔병을 잡아오는 병사들도 보였다. 몇몇은 기사들이 즉결 심판을 통해 목을 베어버렸다.
 그들 틈에는 유난히 어린 소년들이 보인다. 미라센의 병사들은 몇몇 소년까지 혹독하게 처형했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죽은 자의 가족들이 숨을 죽여 눈물을 삼키는 소리였다.
 눈을 뜬 레이킨은 감옥의 벽에 바짝 기대 빠알개진 얼굴을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황당한 체험. 바로 남자의 중심이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수그러들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게 대체 뭐야? 왜 이러는 거지?’
 레이킨으로서는 아침 발기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종족백서 어느 쪽엔가 적혀 있겠지만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할 드래곤은 없다. 다만 황당한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닥 나쁜 감정은 아니다. 마치 마나가 그 중심에 다 쏠린 듯할 뿐. 하지만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이 통제되지 않았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야릇한 감정!
 한참 만에야 레이킨은 정답에 닿았다. 그때는 이미 그 중심이 스스로 고개를 숙인 후였다.
 ‘조그맣고 백 년도 못 사는 것들이 꼴에 오묘한 면도 많군.’
 레이킨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안개 사이로 햇살이 기지개를 켜면서 성의 서편에 자리한 마름모꼴의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과 더불어 한 떼의 기병이 밀려들었다. 기병들은 질서 유지를 위해 사람들을 통제했다. 백작과 귀족들의 자리를 확보한 후에 안전선을 설치했다.
 “누구든 이 선을 넘으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두 기사가 좌우의 사람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죽일 놈들. 기사도 아닌 공작님과 무슨 결투란 말인가? 아예 공작님마저 죽일 셈이군.”
 “맞아. 그 고매한 분이 무슨 검술을 한다고 결투야?”
 “황궁에서는 뭘 하는 거야? 빨리 웨이즐링 강을 넘어와 이놈들을 박살 내지 않고?”
 “구원대? 쇠락할 대로 쇠락한 제국이야. 아마 미라센 제국에서 원하는 대로 이곳 카드리엔 영지와 우리를 몽땅 넘겨주고 말걸.”
 사람들은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뚜우우!
 나팔수 20여 명이 광장의 입구에서 웅장하게 나팔을 불었다. 백작과 귀족들이 줄지어 입장했다.
 “철혈기사단이다!”
 또다시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사람들은 진저리를 쳤다. 30여 명의 철혈기사단은 검은 갑옷과 황금 검에서 배어 나오는 찬란한 살기를 뿜으며 오만하게 걸어와 백작의 뒤에 버티고 섰다. 귀족들은 하인이나 노예들이 깔아주는 주단 위에 안락하게 앉았다. 그들의 뒤로는 정예 호위병들이 인의 장막을 이루었다.
 이윽고 수석기사 루삥이 투구도 쓰지 않고 가벼운 격식의 갑옷을 입은 채 나타났다.
 “카리온은?”
 백작이 옆에 서 있는 자작에게 물었다.
 “저기 있습니다.”
 자작의 손끝은 광장의 다른 한쪽을 가리켰다. 궁색한 복장의 사람들이 한 무리 시야에 들어왔다.
 “영주의 곁에서 위태로운 호사를 누리던 자들이군요. 우리 군대의 창검에 휘둘리니 미천함이 그지없군요.”
 까미숑 자작은 한껏 오만을 떨었다.
 “벌레도 제 목숨은 아까운 것이지. 자존심도 없는 벨룬시아의 쓰레기들 같으니.”
 백작은 턱을 쓸며 흡족하게 말했다.
 카리온 공작.
 그는 쇠락해 가는 제국 벨룬시아의 왕손이다. 전임 황제의 동생이자 존경받는 대학자인 그는 황제가 숙환으로 죽자 어린 황태자와 함께 황제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제국의 관습인 신의 선택에서 어린 황태자가 선택을 받자 기울어진 제국의 운명보다 더 가파른 질곡의 삶을 가야 했다.
 제국의 관습에 따라 신의 선택을 받은 고작 여섯 살의 어린 황제. 그를 옹립한 귀족들은 섭정을 위해 명망이 높은 카리온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카리온은 권력 암투에서 밀려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왕궁에서 가장 먼 이곳 카드리엔 영지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옮겨왔다. 그게 벌써 6년여 전.
 자의는 바로 영주가 그의 벗이기 때문이었고, 타의는 카드리엔이 새로이 약진하는 제국 미라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위태로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벨룬시아와 미라센은 수백 년을 두고 카드리엔 분쟁을 겪었다. 두 제국 중의 어느 한곳의 힘이 강력해지면 제일 먼저 카드리엔을 손에 넣었다. 카드리엔이 비록 큰 영지는 아니었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충분했다.
 ‘왕족이 가 있어야 의지가 될 수 있다.’
 섭정을 누리던 백작 페킬리스는 그것을 명분으로 삼았고 이미 힘을 잃은 카리온은 피의 정치를 우려해 아내와 어린 레이킨을 데리고 황궁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카드리엔으로 내려온 카리온은 영주와 함께 강력한 수성책으로 병사를 늘리고 합리적인 정치를 펼치며 접경지를 지켰다.
 환경적인 요인으로 특이하게 강인한 근성을 지닌 카드리엔 영지. 이곳의 남자들은 자구책으로 여섯 살 때부터 활쏘기를 배웠다. 유사시에는 전원이 전장에 나서 싸우는 체제를 구축했지만 확장일로에 있는 미라센의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두 제국은 전면전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미라센이 또 다른 나라 이오카닉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벨룬시아와 전면전을 펼치기에는 여의치 않았고, 벨룬시아는 벨룬시아대로 막강한 미라센과 총력전을 펼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두 제국의 귀족들은 그런 정세를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에땅 백작도 더 이상의 진격을 미룬 채 점령지인 카드리엔을 확보하고 회담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뜻밖이군. 학자 출신의 공작이 결투를 신청할 줄이야.’
 백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결투는 무조건 기사 루삥이 이길 것이다. 루삥은 미라센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기사가 아닌가? 그러니 처음부터 카리온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만 카드리엔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 번 더 정복자의 쾌감을 만끽하는 자리로 치부할 정도였다. 그것도 공작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정복자로서 비난을 받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빠긴트.”
 백작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마법사를 불렀다.
 “예.”
 “공작의 아들 말이야, 마음에 드나? 바라보는 눈빛이 남다른 것 같던데?”
 “마음에 든다면 제게 주시겠습니까?”
 마법사는 빙긋 웃으며 백작의 말을 받았다. 그러면서 내심 백작의 섬세함에 놀랐다. 자신이 레이킨 앞에서 멈칫거린 것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마법사들 중에는 남색가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네. 물론 빠긴트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 에르껜스님에 대한 소문을 이르시는 말이군요. 하지만 스승님은 남색가가 아닙니다. 그분의 높은 성취와 궁정 수석마법사임을 시기하는 무리의 헛소문이죠.”
 마법사는 정중하게 설명했다.
 “자네도 빨리 에르껜스처럼 높은 경지에 이르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변죽만 울리지 말고. 대답해 보게. 자네의 눈빛은 분명 깊이 출렁거렸어. 혹시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견이라도 한 건가?”
 “제 점성술은 대단치 못합니다. 저는 이제 겨우 클래스 5를 넘볼 뿐입니다.”
 “자네의 진보는 나의 기쁨이다.”
 “공작의 아들을 세 번째 보았습니다. 두 번은 아무렇지도 않았죠. 그런데 어제는 느낌이 좀 막막했습니다. 마치 거대한 벽과 마주 선 기분이랄까요? 다시 보니 겨우 가라앉더군요. 하지만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공작의 아들은 검술을 배웠다고 했지?”
 백작이 자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와의 접전에서 겨우 병사 둘을 베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겉멋만 떨다가 잡힌 제 아버지보다는 낫군.”
 백작의 시선이 카리온과 한 무리를 향해 뻗어갔다. 병사들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끌려 나오는 그들 사이에 레이킨과 하이비, 그리고 영주의 아내도 보였다. 카드리엔에서 비교적 영향력이 있던 자들은 모두 끌어내 왔다. 나름대로 존경받는 적국의 공작. 그의 참담한 모습을 확인시켜 주고 싶은 것이다.
 “아하하하하하!”
 
 레이킨은 와글거리는 군중을 바라보았다. 신기했다. 이렇게 많은 인간들. 그러면서도 제각각 특징을 가진 겉모습. 인간이란 생각보다 복잡하군. 군중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레이킨은 밤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면서도 놀랐다. 드래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잠을 청한다. 그런데 인간의 눈은 달랐다. 긴장이 풀어지니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는 졸음. 눈을 감는 순간 레이킨은 그냥 다시 페루메시아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니 다시 세상은 회색으로 밝아왔다. 흐린 아침. 레이킨은 인간 세상에서 어제를 갖게 된 것이다.
 “케케켁!”
 돌연 카리온 일가의 길을 막은 것은 어제 보았던 백발의 노파였다. 그녀는 안광을 번득이며 히죽히죽 웃었다. 뭐야? 기분 나쁜 할망이 또 왔네. 레이킨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누구 하나 죽어나가겠군. 키키키!”
 노파는 독백처럼 주절거리다가 병사들에 의해 밀려났다. 미쳤다지만 제법 뭘 좀 아는 노파로군. 최소한 한 명은 죽는 게 당연해. 레이킨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씨익 웃었다.
 “카리온.”
 라니바는 우려가 가득한 눈으로 카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다. 평생 한 번도 그가 검을 잡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레이킨이 검술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도 처음에는 반대를 했었다. 더구나 미치광이 노파 리사의 예언이 불안을 재촉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그녀는 미라센이 침공하기 삼 일 전부터 ‘적군이 쳐들어온다, 성이 불바다가 된다’ 하며 새벽마다 음산한 경고를 했던 터였다.
 “잘될 거야.”
 카리온은 침착했다. 그는 라니바를 당겨 어깨를 감싸주었다. 병사의 감시 하에 서 있던 레이킨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멋지다니까. 그러니까 싸울 줄도 모르면서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다?’
 그건 정말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호감이 가는 일이었다. 좀 멍청한 일인 것 같기도 했지만.
 “갑옷을 입어라.”
 미라센의 기사가 병사를 시켜 낡은 갑옷을 던져 주었다.
 “필요없다. 내겐 거추장스럽기만 해.”
 카리온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시작하라!”
 까미숑 자작이 일어나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벨룬시아의 냄새나는 구토물 수거인이여! 나와서 미라센의 기사 루삥의 명예로운 검을 받아라.”
 루삥은 기세등등하다. 그는 카리온이 갑옷을 입지 않는 것을 보고 병사가 내미는 투구를 내동댕이쳐 버렸다.
 “신의 가호를!”
 카리온은 적국의 병사가 건네준 투박한 검을 받아 들고 기도를 올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공작님!”
 “레이킨.”
 “…….”
 “너는 이 카리온의 아들이다.”
 카리온의 단단한 시선이 레이킨에게 쏟아졌다. 쳇! 누가 뭐래? 나야 사실 슈엘룬의 아들이지만 일단 여기서는 당신의 아들인 게 분명하다구. 그것보다 진짜 이길 수나 있는 거야? 레이킨은 눈으로 물었지만 카리온은 레이킨의 뺨을 한 번 쓸어주고는 뒤돌아섰다.
 “공작님!”
 군중의 일부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과 함께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쨌든 카리온의 뒷모습만은 제법 결의에 넘친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머리도 괜찮다. 분위기는… 좋다.
 ‘하지만 사실 이건 내 일이잖아?’
 어깨에 기댄 라니바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를 때 레이킨은 그녀를 살짝 밀치며 뛰쳐나갔다.
 “레이킨!”
 놀란 라니바가 소리치자 카리온이 돌아보았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레이킨이 카리온의 검을 낚아채 기사 루삥 앞에 선 것이다. 레이킨은 당차게 검을 루삥에게 겨누며 말했다.
 “뭐 내 상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난 기사가 꽁무니를 빼지는 않겠지?”
 영광으로 알아라. 나는 드래곤 안드레시아다!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우우!”
 광장에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카리온이 미라센의 기사와 결투를 벌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는데 순식간에 결투자가 바뀐 것이다.
 황당한 루삥이 어이없다는 투로 웃음을 흘릴 때 레이킨은 백작을 향해 소리쳤다.
 “결투자는 나다! 내가 이자에게 원인을 제공했으니 내 아버지와의 결투는 무효다! 당사자인 내가 싸우는 게 타당할 것이다!”
 레이킨은 검을 힘차게 가슴에 갖다 댔다.
 “어떡하죠?”
 까미숑 자작은 백작의 명을 기다렸다.
 “공작 아들의 말이 옳다. 비록 루삥의 검에 꼬치처럼 꿰이겠지만.”
 백작은 레이킨의 만용을 비웃었지만 제지는 하지 않았다.
 “레이킨!”
 황당한 카리온이 소리쳤지만 레이킨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구경이나 하세요!”
 내가 사실은 레이킨이 아니고 안드레시아거든요. 당신이 내 아버지라니 일단 살리고 봐야죠. 레이킨은 그 말도 혼자만 즐겼다. 인간으로 바뀐 생활에서 최초이자 최대의 모멸감을 준 기사. 그러니 그가 누구든 별로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미션이 관용 아니라 용서라고 해도 마찬가지. 레이킨은 공연히 흡족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카리온.”
 라니바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쩔 줄을 모르고 카리온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어쩌면…….”
 부부의 곁으로 다가온 노인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공자님께서는 검술을 익혔으니 이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레이킨은 아직 어리고 게다가 몸도 정상이 아니야.”
 라니바의 귀에는 노인의 위로가 들리지 않았다. 소중한 아들. 그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 위에 서 있지 않은가?
 “일이 재미있게 되었군요, 백작 각하.”
 자작 까미숑도 상황을 즐기려는 눈빛을 취했다.
 “자식의 목숨이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것을 감상할 카리온의 눈빛이 기대되는군.”
 백작은 차가운 한마디와 함께 시종이 내미는 포도주 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애송이! 감히 내 얼굴에 토악질을 했겠다? 아비 대신 나서는 용기는 가상하다만 내 그 계집애처럼 뽀얀 살가죽을 겹겹이 벗겨주마.”
 마침내 루삥도 검을 빼 들었다.
 후웅후웅!
 그의 검에서 엷은 오러가 배어 나왔다. 시위를 하는 것이다. 나는 마스터 급이다 하고.
 “할 수 있으면 해봐.”
 레이킨은 검을 뽑지 않았다. 팔짱까지 낀 채 여유만만한 표정. 겨우 그따위 삼류 오러로 감히 드래곤에게? 그것도 잘나가는 나 안드레시아를? 그의 눈빛만이 그 말을 맹렬하게 대신하고 있었다.
 “하이비 아가씨.”
 하이비의 하녀 안젤리나는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적국의 연회장에서 쓰러졌다던 레이킨. 무의식 중에 거처에 벼락까지 떨어져서 소생 가능성조차 없었던 그. 천운으로 깨어났다지만 뭔가 헐겁게만 느껴지는 그.
 ‘레이킨! 다만 신의 가호를.’
 두 손을 꼬옥 맞잡은 하이비의 눈에서 맑고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
 루삥은 미간을 찡그렸다. 레이킨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드래곤 피어와 미치광이를 섞어놓은 듯한 그것이 루삥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은 것이다.
 ‘젠장! 미친놈의 광기가 분명해.’
 루삥은 직감을 무시했다.
 “하아!”
 맹렬한 정적은 루삥의 공세와 함께 깨졌다.
 ‘메탈 실드!’
 레이킨은 가볍게 시동어를 영창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으헉!’
 하지만 레이킨은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검을 내밀었다. 실드는 형성되지 않았고 루삥의 검이 벼락처럼 내리 꽂히는 것이다.
 캉!!
 루삥의 무지막지한 완력. 간신히 막았다. 이까짓 것쯤이야. 레이킨은 미소를 지었지만 어쩐지 미소 대신에 인상만 일그러졌다. 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완력에 밀려 형편없이 검이 내려앉은 것이다. 머리 위에서 방어한 검이 밀리면서 단 한 방에 이마를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뭐야? 실수했나?’
 레이킨은 스스로 놀라 뒷걸음칠쳤다. 가볍게 막아내려던 것이 의도를 빗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머리통을 두 쪽으로 내주마!”
 ‘천만에! 나도 두 번 실수는 없어.’
 카앙!
 다시 요란한 금속성이 일면서 레이킨은 휘청 밀렸다. 믿기지 않았다. 루삥이 달려들 때 간단한 3클래스의 쇼킹 마법을 뿌렸다. 원래대로라면 루삥은 레이킨의 검과 부딪치는 동시에 전기적인 충격에 못 이겨 튕겨 나가야 했다. 그런데 온몸에 가득한 마나가 조금도 발산되지 않은 것이다.
 ‘막혔다.’
 레이킨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색으로 변했다. 어쩐 일인지 마나의 운용이 막힌 것이다. 느낌은 오는데 꺼낼 수가 없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크하하핫!”
 당혹스러운 레이킨과는 달리 루삥은 코웃음을 치며 검을 빙빙 돌렸다. 오만한 여유는 이미 승자의 그것에 젖어 있었다.
 황당했다.
 마나가 움직이질 않는다. 평면과 공간, 심장에 마나는 가득한데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천지간의 힘이여! 소리없이 저자의 몸을 속박하라!’
 ‘대지여! 나의 염원을 받아 기사의 발밑을 붕괴하라!’
 ‘빛이여! 나의 손에 모여 섬광이 되어 기사를 직격하라!’
 당황한 레이킨은 닥치는 대로 마법의 주문을 영창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빈 바람만이 레이킨의 머릿결을 희롱할 뿐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인간의 땅에 가면 마법력이 사라진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혼란스러운 레이킨이었지만 루삥의 검은 개의치 않았다.
 카카캉!
 불벼락 같은 억센 검광이 레이킨을 조여들었다. 레이킨은 기를 쓰며 공세를 막았다. 마나의 힘이 아니다. 이건 레이킨이라는 아이가 익힌 반사 동작이야. 레이킨의 몸을 빌린 안드레시아는 느꼈다. 그나마 레이킨이 검술을 익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두 동강이 났을 판이었다.
 ‘날카로운 바람이여. 이 망할 놈을 갈가리 찢어라. 소닉 바이브레이션(Sonic Vibration) 백화.’
 혹시나 하고 드래곤의 정통 마법 1+1=1을 시전하는 레이킨. 하지만 묵묵부답이긴 마찬가지.
 ‘으아악! 이 망할 놈의 인간 세상. 왜 마법이 안 통하는 거야?’
 레이킨은 발악하듯 치를 떨었다.
 “……?”
 루삥은 다시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장벽과 같은 거대한 공포감. 미치광이의 광기로 치부하기엔 뇌를 파고드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염병할! 뭐지? 이 더러운 느낌은?’
 루삥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여들었다.
 “레이킨! 힘내. 포기하면 안 돼.”
 군중의 함성과 함께 하이비의 간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출렁거린다. 레이킨은 가슴이 뜨거워지며 반격을 개시했다. 좋아. 진짜 레이킨의 검술은 어느 정도인지 한번 확인해 보자구. 혹시 또 운 좋게 마스터 급일지도 모르잖아?
 “하앗!”
 캉!
 공세는 제법 날카로웠다. 거대한 덩치의 루삥은 주춤거린다. 혹시 이 미친놈이 진짜 한 방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표정. 맞았다. 그건 전혀 아니었다. 그저 평범을 살짝 넘어서는 위력. 루삥이 멈칫한 것은 예상치 못한 반격 때문이다.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그는 아주 흐뭇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야지. 너무 일방적으로 죽으면 싱겁잖아?”
 루삥은 다시 검을 붕붕 돌려 오러를 털어내며 거만을 떨었다.
 ‘젠장! 한번 해보자구. 설마 인간 따위에게 죽기야 하겠어?’
 레이킨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나마 민첩한 몸이 도움이 되었지만 기사 루삥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의 검술이 오히려 마스터에 가까웠으니 큰소리가 허풍은 아니었던 것이다.
 “애송이! 이건 어떠냐? 매드 블레이드!”
 루삥이 작정한 듯 검풍을 뿌렸다. 강력한 오러? 레이킨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날을 잔뜩 세운 거친 오러 세 조각이 동시에 레이킨에게 밀려들었다.
 “어헉!”
 마치 풍침을 맞은 듯 레이킨의 온몸에서 모세 혈관이 터졌다. 피한 것도 아니다. 단지 루삥이 레이킨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었다.
 ‘장난이 아니다.’
 레이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삼류는 아니다. 드래곤의 역사서에도 인간의 오러는 경계 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간이 검기를 이루고 검강을 성취하면 드래곤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열려라. 제발.’
 레이킨은 무심하게 웅웅거리는 심장의 마나가 절실했다. 마나를 운용하지 않고는 드래곤이라고 해도 브레스를 뿜어대는 덩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나약한, 그러면서 상황 파악도 다 끝나지 않은 낯선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후웅!
 거친 바람 소리. 그리고 맹렬한 살기. 수많은 군중이 뿜어내는 정적. 정적이 그렇게 와글거리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레이킨은 본능적으로 번쩍 하는 루삥의 검광을 방어했다.
 카―앙!
 긴 금속 소리가 오롯이 레이킨의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눈앞에서 레이킨의 검이 동강나고 있었다. 속도감있게 루삥의 뒤편에서 오열하는 하이비와 라니바의 모습이 시야를 차고 들어왔다.
 ‘레이킨! 제발…….’
 하이비의 간절함은 눈 속에 가득했다. 떨리는 심장과 두 손. 당장이라도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레이킨 공자님, 힘내요!”
 군중의 사이에서 주근깨가 꼬질꼬질한 꼬마 아이가, 어울리게도 새끼 돼지를 안은 채 갈색 머리를 출렁이며 외쳤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오들오들 떠는 아이의 분노가 레이킨의 무기력함을 모질게 찔렀다.
 츄리릿!
 불안감을 떨친 루삥의 동작은 절제되게 이어졌다. 그는 어느 틈에 겨누기에서 찌르기 동작으로 바꾸었고 벌써 레이킨의 심장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죽는다!’
 레이킨은 순간적으로 그 생각을 만났다. 이렇게 허무하게? 드래곤 로드의 아들인 내가 고작 인간의 몸을 빌린 지 하루 만에 죽음으로써 열린 매직 게이트를 통해 페루메시아로 돌아가? 개망신이군. 카이플로 놈이 박장대소를 하겠군. 수많은 얼굴들이 물결을 이루며 스쳐 갔다. 얼굴은 드래곤 로드 슈엘룬에서 멈췄다.
 ‘그렇다면 이거나 먹엇!’
 레이킨은 최후의 반격으로 적색 마나링 세 개를 모두 집어 던졌다. 하지만 마나링조차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링을 던진 레이킨의 자세만이 썰렁하게 보였을 뿐.
 “그놈. 벼락을 맞았다더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런 미친놈과 더 이상 놀아줄 수는 없지.”
 루삥은 끝장을 내려는 듯 검을 수평으로 겨누며 달려들었다.
 푸화아악!
 끝내 기적은 레이킨의 비원을 비켜갔다. 레이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정지 마법까지 뿌렸지만 그 역시 듣지 않았다. 루삥의 검은 징그러운 미소와 함께 기어이 레이킨의 심장으로 치고 들어왔다.
 “레이킨!”
 “……!”
 메아리처럼 하이비의 외침이 레이킨의 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순간 모든 군중이 일제히 일어섰다. 레이킨의 심장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터져 나온 것이다.
 “우우!”
 빛은 하늘까지 닿을 듯이 뻗다가 순식간에 끊겨졌다.
 “으아악!”
 레이킨의 심장을 노리던 루삥은 빛의 폭풍을 맞으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어찌나 강력한 섬광이었는지 루삥의 검은 반쯤 녹아 떨어졌다. 누구도 할 말을 잃었다. 벌떡 일어선 백작과 자작, 수많은 귀족들은 입만 벌린 채 놀라운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군중에게 또 하나의 경이로움이 닥쳐왔다. 루삥의 사체를 둘러싸고 세 개의 불기둥이 솟구친 것이다. 바로 레이킨이 최후의 방어를 위해 던진 마나링이었다.
 ‘……!’
 가장 강력하게 반응한 것은 백작의 마법사였다. 그는 온몸이 휘청거릴 듯이 놀랐다. 그러다 그의 입가에 비밀스러운 미소가 살짝 스쳐 갔다.
 레이킨은 아주 천천히 무너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묘한 쾌락을 느꼈다.
 “레이킨!”
 “레―이―킨!”
 제일 먼저 하이비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 뒤로 라니바가 뛰었다. 아버지 카리온도 침착한 평소와는 다르게 황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군중 틈에서 꼬마 아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섬광과 불꽃의 자취를 더듬고 있었다.
 
 
 4. 미라센의 야심가 루에땅 백작
 
 
 
 “레이킨!”
 레이킨은 일단 거처로 옮겨졌다. 낡고 해어진 침상 위에 올려두자 침상은 끼이끼이 신음 소리를 냈다.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은데 움직이질 않아요.”
 라니바는 레이킨의 심박동을 확인했다. 위태로웠지만 죽은 것은 아니었다.
 “에스닐에게 연락을 취했나?”
 카리온이 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연락은 했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미라센의 병사들이 어둠을 핑계 삼아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답니다.”
 “죽일 놈의 미라센들!”
 카리온의 통나무 거처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울분을 토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정벌군은 단시간에 카드리엔의 모든 것을 막고 부수고 바꾸어놓았다. 심지어 운명까지.
 “어떡해요?”
 라니바의 눈덩이는 여전히 붉었다. 눈물은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살려야지. 레이킨은 죽지 않아. 벼락을 맞고도 살아난 아이란 말이다.”
 카리온은 굽힘없이 말했다. 레이킨은 미라센의 기사 루삥을 죽였다. 멋진 솜씨로 그의 심장을 뚫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레이킨의 앞에서 통쾌하게 죽었다. 그 섬광은 지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신의 가호가 아니라면 그런 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점령군의 수장인 백작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수많은 군중 앞에서 한 약속을 뒤엎을 만큼 옹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놀랍게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까지 쳐주었다. 어쨌든 승부를 깨끗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약속대로 공작 일가의 퓨크 콜렉터는 이 순간부터 면제한다.”
 백작은 그 말과 함께 클라미스를 풀썩이며 바람처럼 돌아섰다. 다른 귀족들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돌아갔다. 광장에는 군중의 울분이 감격의 함성으로 메워졌다. 하지만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 곧 들이닥친 무장 병사들이 무지막지하게 군중을 해산시켰다. 카리온과 라니바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레이킨을 거처로 옮겼다. 하이비와 그 어머니도 동행했지만 병사들에 의해 격리되었다. 영주의 유족들은 카리온의 거처와 장소가 달랐던 것이다.
 “레이킨! 레이킨!”
 하이비의 간절한 외침을 레이킨은 들었을까? 실낱처럼 가는 숨결만 남은 레이킨의 몸은 뜨겁기만 했다. 하이비는 목이 터져라 레이킨을 불렀지만 레이킨은 숨결 하나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한 것은, 마법사 빠긴트의 맹렬한 시선이었다. 그는 귀족들이 다 퇴장한 후에도 음산한 미소와 함께 레이킨을 주시하고 있었다.
 
 레이킨의 통나무 거처 주변에는 근심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주변에 거처가 배정된 사람들은 저마다 레이킨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는 평소에도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공작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적국의 수석기사를 죽인 것이다.
 “공자님은 살아날 거야.”
 “암! 신의 가호가 틀림없어. 그런 빛은 난생처음이었다구.”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타고 횃불의 행렬이 다가왔다. 백작의 마법사였다.
 “무슨 일이오?”
 카리온이 나와 막아섰다. 보조 마법사를 대동하고 온 마법사 빠긴트가 말에서 내렸다. 그는 뜻밖에도 카리온에게 가볍게나마 예를 갖추었다.
 “백작님께서 레이킨을 돌보라는 명을 내리셨소.”
 그 말과 함께 마법사는 벌써 카리온을 지나치고 있었다. 뭐야? 백작의 마법사잖아?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보조 마법사의 손에 불덩이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1클래스의 마법 버닝 핸드였다. 보조 마법사는 작심한 듯 부채꼴 모양의 화염을 뿜었다.
 ‘어헉!’
 불길에 놀란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다 우르르 넘어졌다.
 “다들 거처로 돌아가. 계속 이곳에 서성이면 모두 뜨거운 불로 익혀 버리겠다.”
 보조 마법사는 풋기가 가시지 않은 여자. 로브 사이로 희끗희끗 드러나는 피부는 뽀얗기만 했지만 눈매는 한없이 날카로웠다.
 “제법 늘었구나. 그 정도라면 이제 클래스 2로 들어설 준비를 해야겠다.”
 마법사는 어느새 카리온의 거처로 들어와 있었다. 그가 남긴 언어만이 한발 늦게 보조 마법사의 귀에 들려왔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죠.”
 보조 마법사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어쩐지 싸늘해 보였다.
 “공작과 부인께서도 나가주면 고맙겠소. 아이를 살피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오.”
 빠긴트는 가볍게 말했다. 카리온과 라니바는 주저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의 몸은 벌써 문밖에 있었다. 마법사가 슬쩍 이동 마법을 쓴 것이다.
 “아르헨, 장막을 한번 쳐보겠느냐?”
 빠긴트는 침상의 레이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보조 마법사에게 말했다. 아르헨은 이내 두 손을 모으고 제법 심각하게 마법어를 시동했다.
 “공기의 흐름이여! 이곳에 겹쳐라. 지상의 눈을 막을지니 장막으로 서라.”
 아르헨은 두 손을 활짝 펴며 눈을 부릅떴다. 출입문은 이내 불투명한 장막으로 막혔다.
 “잘했다. 하지만 시동어가 길구나. 간결하게 해야 할 것이다.”
 “알겠어요.”
 아르헨은 명랑하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맑아 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듯 청명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군.”
 빠긴트는 레이킨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제일 먼저 두 손바닥으로 레이킨의 몸을 감지했다.
 ‘으헉!’
 손바닥이 레이킨의 심장 위에 원을 그릴 때 빠긴트는 그 자리에서 무섭게 밀려났다. 거대한 힘이 자신을 밀어낸 것이다.
 ‘틀림없는 마나다!’
 빠긴트는 안으로 소리쳤다. 이마와 등줄기를 흠뻑 적신 땀을 훔치며 다시 한 번 두 손을 집중했다. 빠긴트는 차마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확실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미라센의 대마법사이자 궁정의 수석마법사로 불리는 에르껜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무념무상의 막막함이었다.
 ‘이 아이가 전설 속으로 사라진 마나홀이라도 품고 있단 말인가?’
 빠긴트는 레이킨의 품을 더듬었다. 만져지는 것은 탱탱한 젊은 몸뿐이다. 의식조차 희미한 몸이지만 레이킨의 몸은 만질 때마다 강직하듯 바르르 진저리를 쳤다.
 ‘어쨌든 어마어마하다. 뭔가 근원이 있을 터인데…….’
 빠긴트는 집요하게 레이킨의 몸을 탐색했다. 어디에선가 마나홀의 실체가 느껴질 것만 같았다. 그것만 있다면.
 ‘대마법사 에르껜스님도 부럽지 않지.’
 빠긴트는 맹렬한 기대감으로 휩싸였다. 모진 수련을 감수했지만 클래스는 어린아이가 대한 철옹성의 성벽과도 같았다. 고개를 들면 끝이 보일 것만 같은데 도무지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4클래스를 마스터했으니 스승 에르껜스를 생전에 넘보기는 애당초 틀린 일. 에르껜스의 문하에는 클래스 5 이상을 이룬 마법사도 꽤 많기 때문이다. 한때는 에르껜스를 뛰어넘을 거라는 기대를 받던 빠긴트였기에 더욱 그랬다.
 성취가 막히면 인간은 ‘비법’을 갈구한다. 세상에는 밝은 길만이 있는 건 아니다. 마법사든 기사든 마스터의 길은 험했다. 하지만 역사 속의 인물들을 보면 운 좋게 모든 클래스를 섭렵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마나홀을 두 개나 품었던 진정한 대마법사 야밀론이 그랬고, 드래곤이 존재하던 시절의 하이라돈이 그랬다. 하이라돈 역시 운 좋게도 드래곤 하트를 얻었던 것이다.
 대륙의 마법사에서 두 대마법사가 차지하는 족적은 너무도 컸다. 그 이후로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을 몇몇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들처럼 10클래스의 마법에 근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후 7∼8클래스를 이룬 마법사들은 한결같이 마나홀을 얻기를 원했지만 야밀론 이후로 마나홀 또한 드래곤들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혹자는 마나홀이 죽음의 황무지에 존재한다거나 혹은 그 너머 전설의 섬 켄다디아에 있을 거라고 했지만 죽음의 황무지는 인간의 접근을 거부했다. 켄다디아 또한 그랬다. 제아무리 바다에 익숙한 어부라고 해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마법사들은 드래곤과 마나홀을 연관시켜 두 가지를 다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러한 갈망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마나홀에 버금가는 창창한 마나의 힘을 만난 것이다.
 ‘마나홀은 아닌 것인가? 만일 마나홀이라고 해도 이 아이가 이미 삼켜 버린 것이 틀림없어.’
 빠긴트는 결론을 내렸다. 조용히 돌아봤다. 자신의 등 뒤에는 이제 겨우 1클래스를 이룬 영악한 보조 마법사가 있었다. 그녀를 붙여준 것은 바로 스승 에르껜스다. 대륙에서는 누구든 3클래스를 이루면 보조 마법사를 둘 수 있다. 그만치 한 클래스를 넘어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엄청난 진보이기도 했다.
 ‘제발 마나홀이기를.’
 빠긴트는 보조 마법사 몰래 그녀를 가수면 상태로 만들기로 했다. 그녀는 아직 이 거대한 마나의 정체를 잘 모른다. 그러니 그녀에게조차도 영원한 비밀을 요했다. 혹시라도 스승에게 고하면 입장이 곤란해지는 것이다. 스승 또한 이런 마나 덩어리를 보면 기필코 그가 취할 것은 명명백백하므로.
 ‘잠들라. 너의 호흡은 나의 기침으로 다시 시작될 것이다.’
 빠긴트는 교묘하게 마법어를 시동했다. 아르헨 정도야 손쉽게 속일 수 있다. 그녀는 선 채로 잠이 들었다. 빠긴트는 한 번 더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뻔한 일이지만 어쩐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됐어. 백작이 나에게 행운을 주는군.’
 빠긴트는 흡족했다. 레이킨을 처음 보았을 때 뭔가 막막했던 느낌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때는 잘 가늠되지 않았지만 기사 루삥과의 결투를 지켜본 빠긴트는 확신했다. 그 엄청난 섬광의 정체는 마나가 틀림없었던 것이다.
 일단 마나를 흡수해야 했다. 레이킨 따위가 죽든 말든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빠긴트는 온몸의 흥분을 가라앉힌 후에 자신의 마나 공간을 비웠다. 공간이 느껴졌다. 그는 그 공간을 한없이 비워냈다. 집채만 한 공간이 광장의 크기로 바뀌었고 이내 거대한 산맥처럼 커졌다.
 ‘이것을 다 채울 수만 있다면?’
 빠긴트의 손끝을 타고 흥분이 느껴졌다.
 ‘어쩌면 단숨에 스승의 성취를 뛰어넘을지도 몰라.’
 빠긴트는 온 힘을 기울여 레이킨의 마나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막상 두 마나의 세계를 풀어놓으니 조금 전에 가늠되던 것보다 레이킨의 마나는 넓고 깊었다. 이것 봐라. 엄청나군. 빠긴트는 무리를 해서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포기할 줄 알고? 빠긴트는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무질서한 공간의 붕괴가 먼저 일어났다. 빠긴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지만 지옥의 아수라와 천상의 감미로움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지독한 불협화음이면서 또 때로는 평화로운 어우러짐이었다.
 ‘그래. 합치는 거다. 그리하여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것이 되어라. 마나여!’
 빠긴트는 자신의 모든 힘을 투입하며 레이킨의 마나를 당겼다.
 들썩!
 꼭 한 번의 반응이 일어나자 빠긴트는 뭔가 잘못되는 것을 알았다. 온몸의 혈관을 일제히 당겼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이킨의 마나가 너무나 강력했다.
 ‘너는 내 것이야!’
 빠긴트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소울 에너지까지 합세시켰다.
 후우웅!
 비로소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동이 공간을 흔들며 밀려들었다. 이제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정한 마스터의 길. 빠긴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순간 기사 루삥에게 발산되던 섬광보다 더욱 위력적인 섬광이 그의 시선을 차고 들었다.
 ‘이건?’
 그제야 빠긴트는 알았다. 일이 잘못되었다. 파동을 이룬 마나는 자신의 능력 안에 담기에는 너무나 컸던 것이다.
 “으으으…….”
 빠긴트의 입에서 짐승의 신음 같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으아악!”
 빠긴트는 보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완벽한 붕괴를. 빠긴트가 끌어안으려던 레이킨의 어마어마한 마나는 빠긴트의 마나의 한계를 넘어 수없는 겹침으로 밀려들어 갔다.
 화아악!!
 레이킨의 방 안에 마치 빛의 폭사 같은 섬광이 솟구쳤다. 그것은 찰나의 일이었으니 사람들은 북극성이라도 쏟아져 내린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으아악!”
 문밖에 있던 카리온과 라니바도 섬광의 폭풍 같은 진동에 튕겨났다.
 “카리온.”
 “나도 보았어. 레이킨!”
 먼저 일어선 카리온이 안으로 달려들었다.
 “맙소사!”
 카리온은 황망했다. 집 안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법사와 보조 마법사가 쓰러져 있고 레이킨의 몸이 섬광에 묻혀 있는 것 외에는.
 “여보!”
 뒤따라 들어온 라니바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마법사가 온몸이 폭사당한 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여자는 살았어요!”
 라니바가 쓰러진 아르헨을 살펴보며 소리쳤다.
 “이런!”
 카리온과 라니바는 두 눈을 의심했다. 레이킨의 몸에서 광채가 피었다 스러졌다 하며 명멸해 가고 있었다.
 “레이킨!”
 카리온이 소리치자 놀랍게도 레이킨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한 말은 카리온 부부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배가 고파요.”
 “레이킨!”
 라니바는 레이킨을 끌어안았다. 당장에 눈물이 터지며 가슴이 미어져 왔다.
 “정말… 괜찮은 거니? 레이킨?”
 라니바의 몸에서 경련이 일었다.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묘한 목소리였다.
 “괜찮죠. 내가 누군데요?”
 다소 멍한 시선의 레이킨은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죽지는 않았다. 기사의 검이 심장을 뚫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세상이 멈췄다. 꿈속에서 맹렬히 만난 것은 하이비의 기억이었다. 특히 그녀의 눈물이 떨어진 볼이 생생했다. 뺨을 만져 보지만 눈물의 흔적은 없다.
 “하이비.”
 레이킨의 입술에서 그 단어가 떨어졌다. 카리온과 라니바의 시선이 당장 따라왔다. 좋아졌다.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레이킨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던 것이다.
 ‘아!’
 레이킨은 처음으로 안도감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드래곤으로서는 체험할 필요가 없던 느낌 중의 하나.
 숨결을 고르니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심장을 타고 도는 탄탄한 느낌. 요지부동이던 마나의 길이 열린 것이다. 레이킨은 심장의 마나를 후끈 밀어냈다. 묵직하게 밀려 나온 마나가 레이킨의 손을 타고 온몸을 따라 힘차게 흘러갔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레이킨은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기사는 어떻게 되었죠?”
 레이킨이 라니바의 품에서 고개를 겨우 꺼내 들며 물었다.
 “죽었어.”
 카리온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바로 이런 모습으로.”
 카리온은 몇 발치 뒤에 나뒹구는 빠긴트를 가리켰다. 그의 몸에서 배어 나온 혈흔이 흥건하게 바닥에 고여 있었다.
 “기사가 아니잖아요?”
 레이킨도 무덤덤한 시선.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까닭이었다.
 “기사 루삥은 네 가슴을 찌르다가 그곳에서 터져 나온 섬광에 죽었다. 그런 다음, 의식이 없는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지. 그런데 이 마법사가 찾아왔어. 우린 밖에 있었는데 그 결투 때보다 강력한 섬광이 피어났고, 들어와 보니 이들 둘이 이 꼴이 되었어.”
 “여자도 있잖아요.”
 “마법사의 보조 마법사다. 우린 레이킨 네가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한다만.”
 “설명을요?”
 레이킨은 이내 눈빛을 돌렸다. 내가 원래 드래곤이거든요. 내 마나는 거대한 힘의 원천이니 그럴 수밖에요. 재수없는 놈들. 감히 누굴 넘봐?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믿지도 않을 테고.
 “그나저나 먹을 게 필요해요. 허기가 모든 의식을 가로막고 있어요.”
 인간은 참 불편한 동물이군요. 어떻게 허기 따위가 정신을 윽박지를 수 있죠? 레이킨은 그것도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지금 필요한 건 아무래도 피하는 일인 것 같다.”
 “어디로요? 여기서부터 나루터까지 사방이 적군이에요. 이틀 전에도 달아나던 사람들이 모두 라이호그의 먹이가 되었어요.”
 라니바의 안타까운 시선이 카리온을 향한다.
 “알아. 하지만 마법사까지 죽였으니 백작이 그냥 있진 않을 거야. 그렇다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소. 눈물의 호수까지만 가면 방법이 생길 거야.”
 “알았어요. 레이킨, 우선 이거라도 먹어라. 식긴 했지만 널 주려고 끓여둔 수프다. 우린 대충 좀 챙기고 있을게.”
 라니바는 서둘러 수프를 가져왔다. 혹시 몰라 조악한 빵도 가져왔다. 빵을 싫어하는 레이킨이었으니 라니바도 상당히 당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이킨은 수프를 바라보더니 손으로 그것을 우겨 넣기 시작했다.
 “…….”
 카리온이 중요한 서적을 챙기는 동안 레이킨은 힐긋 그를 바라보았다. 위태로운 순간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 그것은 존경하는 블루 드래곤 파이로칼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괜찮니?”
 어느새 짐을 꾸린 라니바는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수프와 빵을 벌써 다 해치웠다. 게다가 레이킨에게 준 빵은 하층민들이 즐기는 흙을 잔뜩 넣고 버무린 저급한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레이킨은 빵을 좋아하지 않았다. 라니바는 여전히 눈을 의심했지만 레이킨은 태연하게 입술을 훔치며 이렇게 말했다.
 “더 없어요?”
 며칠을 굶은 레이킨의 몸이었다. 게다가 인간 세상에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음식. 뭐든 처음이 중요하다. 파이로칼의 말이 공명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귀족들의 연회 같지는 않았지만 드래곤의 식사보다는 나았다. 드래곤들은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주변에 충만한 마나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먹어도 그만, 먹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저 식도락이라는 게 향이 그윽한 차에 불과하다. 대신 차의 마지막 숨결까지도 맡을 수 있는 능력의 드래곤들이다.
 “그 정도면 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섬광이었으니 비록 미라센의 병사들이 보지 못했다고 해도 마법사가 돌아가지 않는 한 병사들이 찾아올 거야. 그러니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야 한다.”
 카리온은 준비가 끝났다. 그는 꼭 필요한 서적과 기록만을 골라 어깨에 걸쳐 멨다.
 “하이비는 어떡하지요?”
 레이킨의 소매를 당기던 라니바가 카리온을 바라보았다.
 “일단 그냥 가지. 우리도 빠져나가는 걸 장담할 수 없어.”
 “괜찮을까요?”
 “당분간은. 황궁에서 이 영지와 인질 보상금을 두고 협상을 벌이고 있어. 어차피 미라센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니까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고.”
 “레이킨!”
 “네?”
 “오늘밤 우리가 살아난다면, 아니, 네가 죽지 않는 한 하이비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죠 뭐.”
 레이킨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라니바의 눈빛이 너무나 숙연했던 탓도 있지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레이킨이 아니라 안드레시아의 능력이라면 말이다.
 카리온은 작은 통 속에 든 기름을 바닥에 부었다. 촛불을 옮기자 기름은 소리도 없이 후우욱 불길을 키워 나갔다.
 “가자!”
 뭐라고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카리온은 통나무집을 나섰다. 그의 허리춤에는 어느 틈에 단도까지 채워져 있었다.
 “공작님! 떠나는 것이라면 저희도 데려가 주세요.”
 문을 나서자마자 몇 명의 남자들이 길을 막아섰다. 공작이 부리던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안 돼.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 결코 카드리엔을 버리지 않아. 황궁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아다오.”
 “공작님!”
 남자들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흐느꼈다.
 “미라센들이 온다.”
 그때 누군가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레이킨은 고개를 들었다. 성벽을 타고 수십 개의 횃불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리판! 마지막 부탁이다. 저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여기저기 불을 붙여 눈길을 끌어라. 모두 우리의 짓이라고 둘러대면 될 것이다.”
 “공작님! 부디 무사하십시오.”
 사람들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카리온 일가는 어둠을 향해 내달렸다. 적병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스쳐 갔다.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다시 정면에서 한 무리의 기병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건초 더미에 몸을 숨겨 기병을 지나쳤다. 통나무집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 불길을 따라 여기저기서 불길이 타올랐다. 누리판과 그 친구들이 공작의 탈출을 위해 불을 놓은 것이다. 모두 20여 호의 집에 불길이 번지자 미라센의 병사들은 라이호그를 앞세워 떼를 지어 몰려왔다.
 “불을 꺼라, 불을 꺼!”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불길을 잡기에 바빴다. 경비가 삼엄한 성벽에 닿은 카리온 일가는 무너진 성벽을 향해 달렸다. 막 성벽의 구멍을 찾기 직전 그들의 머리 위가 환하게 밝아왔다.
 “웬 놈들이냐?”
 성루를 수비하던 미라센의 병사들. 그들 십수 명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이런!’
 카리온은 치를 떨었다. 모든 것이 끝장이다. 화살이 머리 위에서 날아오면 꼬치처럼 꿰일 판국이었다.
 “텔레포트!”
 다급한 레이킨은 본능처럼 마법을 외쳤다. 두 번, 세 번. 마법의 시동어는 허무한 주문이 되어 성벽에 묻혔다. 텔레포트는커녕 바람 한 점 없는 것이다.
 “발사!”
 미라센 병사들의 외침과 함께 화살은 한 점의 자비도 없이 날아왔다.
 ‘젠장! 이건 사기야. 아무 데라도 옮겨가야 하는 것 아니야? 하다못해 거름통에라도.’
 펑!
 원망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세 사람은 정말 농장에 뿌리려고 모아둔 오물통에 처박혔다.
 “으악! 냄새.”
 레이킨은 진저리를 쳤다. 카리온 부부도 오물을 뒤집어쓴 채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텔레포트! 이번에는 좀 제대로 가자.”
 오물을 털어내며 다시 마법을 외는 레이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찌릿한 냄새만 코를 찔렀다. 이 망할 놈의 마법.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레이킨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다 문득 몸이 기울면서 이번에는 그대로 해자에 처박혔다. 겨우 성벽 너머의 물속으로 옮겨온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하여간 다행이다. 빨리 빠져나가자.”
 카리온이 레이킨의 손을 끌며 말했다. 물을 줄줄 흘리며 평원으로 뛰었다. 그제야 병사들의 횃불이 부산스럽게 움직였지만 일단 위기는 모면한 것이다. 어쨌든 냄새도 가셨고.
 “이제 저 평원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면 된다.”
 해자를 빠져나온 카리온이 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어둠은 깊었다. 마치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이. 성내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카리온 일가는 낮은 구릉을 따라 달렸다. 하지만 행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작은 둔덕을 넘어설 때 외곽 경비를 맡은 기병대와 마주친 것이다.
 ‘헉!’
 적의 기병은 모두 열 명이 넘었다. 모두 완전무장을 갖춘 위압적인 모습. 한 명은 라이호그를 타고 있었다.
 쿠워워!
 라이호그는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한 괴성을 토했다.
 “성이 왜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이런 쥐새끼들이 있었군.”
 기병 중의 하나가 횃불을 가져다 댔다.
 “호오! 벨룬시아의 공작 나리 아니신가?”
 “…….”
 “벨룬시아의 귀족들은 비루하기로 유명하다더니 정말 그렇군. 제국의 공작이라는 작자가 꼬락서니 하고는.”
 “와하하하!”
 기병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해자를 건너느라 흠씬 젖은 카리온 일가의 몰골 때문이었다.
 기병들은 원을 그리며 카리온 일가를 둘러쌌다.
 “여보. 레이킨!”
 “걱정 마. 살아 있는 한 인간이 만나는 것은 언제나 희망이야.”
 카리온은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 들었다.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열두 명의 기병. 그중 좌측의 세 명이 가장 허술해 보였다. 게다가 어둠이 있다. 일단 횃불의 시야에서 벗어나 숲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살아날 확률이 있었다.
 “레이킨! 내가 길을 뚫으면 즉시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 뒤돌아보면 안 돼. 무조건 뛰어.”
 “여보!”
 “사방이 적군일 테니 숨어 있다가 날이 밝으면 마윈을 찾아가시오.”
 “여보!”
 “사랑하오. 내 아들 레이킨, 너도.”
 아주 낮은 음성.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크게 레이킨을 흔들었다. 인간들은 말이 마법이다. 말 몇 마디로도 이렇게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흔들 수 있다니. 레이킨의 정적을 깬 것은 카리온의 함성이었다. 카리온의 야수 같은 울부짖음이 창공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
 단숨에 내달은 카리온은 좌측에서 여유를 떨던 두 기병의 말을 공략했다. 앞가슴과 배를 나란히 찔린 두 말은 요동을 치며 기병을 떨어뜨렸다.
 “어서 가!”
 카리온은 떨어진 기병의 갑옷 틈으로 단검을 밀어 넣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레이킨은 달아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난감해했다. 나, 드래곤이에요.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이.
 카리온은 반대편에 떨어진 기병이 검을 꺼내려는 찰나 이번에도 그의 목덜미에 단검을 불쑥 밀어 넣었다. 기병의 눈동자에 굵은 핏발이 서며 입으로 피가 울컥 솟았다.
 “레이킨! 어서 가라니까!”
 죽은 기병의 검을 집어 든 카리온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요지부동인 모자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 망할!”
 그사이에 라이호그를 탄 기병이 카리온을 들이쳤다.
 크워워!
 벼락같은 날렵함에 피에 굶주린 라이호그는 껑충껑충 솟구치며 카리온을 덮쳤다. 카리온은 자신을 삼키려는 라이호그의 입 안에 필사적으로 검을 밀어 넣었다.
 꾸엑!
 라이호그가 고통에 못 이겨 발악하자 기병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카앙!
 뒤이어 어둠 속에서 두어 번 불꽃이 튀었다. 기병들의 협공. 간신히 막았지만 조금 긴 금속성이 울려 퍼지면서 카리온은 검을 놓쳤다. 그는 학자였으니 아무리 가족을 위해 필사의 힘을 기울인대도 한계가 있었다.
 “공작이고 뭐고 아주 껍데기를 벗겨야겠어. 아니면 네 여자를 발가벗겨 성문에 매달아두던지.”
 기병의 검이 카리온의 목을 겨누었다. 동료의 죽음에 대해 분풀이를 하려는 듯 다른 기병 하나가 레이킨의 곁에 서 있던 라니바의 목덜미를 채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속옷까지 다 벗겨 통나무에 묶어라. 고귀한 공작의 부인이니 제법 볼거리가 될 거야.”
 한 기병이 말하자 세 명이 우르르 라니바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이놈들! 당장 이 손을 놓지 못해!”
 “이년이.”
 기병 하나가 날이 잔뜩 선 검을 빼 들어 가슴을 겨누었다. 물컹한 부분이 움푹 밀려들어 가며 당장 피가 옷 위로 배어 나왔다.
 “그만!”
 처음에 레이킨은 조그맣게 말했다. 기병들이 물끄러미 레이킨을 바라보았다. 저놈이 돌았나? 분명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레이킨의 눈에서 광오한 공포가 튕겨져 나오고 있었다.
 “그만 하란 말이야!!”
 태산을 흔들 것 같은 레이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카리온과 라니바에게도 아주 생소한 음성이었다.
 “이놈이 아주 맛탱이가 간 거 아니야?”
 기병 하나가 버럭 화를 내며 레이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관용이고 나발이고 너희는 끝장이다.’
 레이킨은 태연하게 서서 마법의 시동어를 영창했다. 이제 마나의 흐름을 회복했다. 성년 드래곤이거나 인간의 역사에 회자되는 대마법사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도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공기의 주름이여. 이자를 묶어 그 가닥대로 잘라 죽여라.”
 츄리릿!
 무엇인가 날카롭게 공기를 잘랐다. 아아, 얼마 만에 써보는 마법인가? 레이킨은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카리온과 라니바는 좀 놀라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저 놀라는 모습 좀 보라지. 레이킨은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 라니바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잘린 공기는 레이킨의 마법이 아니라 기병이 뿌린 검풍에 의한 것이었다. 피할 생각이 없던 레이킨은 선 자리에서 고스란히 직격당하며 넘어갔다.
 “레이킨!”
 이번에는 라니바의 비명이 어둠을 흔들었다.
 ‘이, 이건 또 뭐야? 분명 마나는 감지되는데.’
 잘린 어깨에서 솟구치는 혈흔보다도 현실이 더 황당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놈이 운 좋게도 루삥 기사님을 죽였다는 그놈이군. 기적이 몇 번씩이나 일어나는 것인 줄 아느냐?”
 다가온 기병이 발로 레이킨의 가슴을 밟으며 오만하게 히죽거렸다. 레이킨은 그때서야 보았다. 때늦은 마법이 엉뚱하게도 기병의 말을 휘감고 수백 갈래로 말의 목숨을 찢어버리는 것을.
 히이이잉!
 말은 가쁜 비명과 함께 작은 살덩이와 핏덩어리로 사라졌다. 그것을 바라본 기병들은 일제히 공포를 느끼며 주춤거렸다.
 “파이어 스톰!”
 레이킨은 용기를 얻어 좀 더 강한 마법을 시전했다. 반응은 없다. 키득키득 비웃는 적병들의 웃음소리만 들릴 뿐. 황당하면서도 악이 받쳤다. 마법 입문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잘나가던 드래곤이 아니었던가? 후끈 열이 받치는데 별안간 눈앞으로 불덩이가 달려들었다.
 콰아앙!
 파이어 스톰. 그것은 작렬했다. 정확히 레이킨을 향해.
 ‘이 망할 놈의 마법이 환장했나? 제 주인을 죽이려 하다니?’
 간신히 중심을 피해 새까맣게 그을린 레이킨은 이가 부러지도록 빠드득빠드득 치를 떨었다.
 “대지여, 붕괴하라. 적병의 발밑으로만.”
 레이킨은 겨우 몸을 추스르며 배를 잡고 비웃는 적병을 향해 다시 마법을 뿌렸다. 드래곤의 오기가 있지. 포기할 내가 아니야. 약간 혼선이 오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마법이 통하는 것만은 틀림없지 않은가?
 “저놈이 아주 놀고 있네.”
 ‘제발! 성공해라. 이렇게 빈다. 마법아!’
 레이킨은 오만 가지 인상을 긁으며 조바심을 냈다.
 “아악!”
 순간 적병들의 비웃음이 그치면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레이킨은 눈을 의심했다. 마법은 시간이 경과한 후에 엉뚱하게 나타났으니, 이번에는 카리온과 라니바의 발밑이 움푹 꺼져 버린 것이다.
 ‘엉망이다. 이래 가지고는 마법을 펼칠 수 없어.’
 레이킨은 새까맣게 그을린 고통보다 관자놀이 부근의 혈관이 터질 듯이 아팠다.
 “이제 보니 이놈이 견습 마법사쯤 되기는 되는 모양이군. 당장 해치우자구.”
 불안을 느낀 기병들이 모두 레이킨에게 다가섰다.
 “죽여랏!”
 레이킨의 뒤에 서 있던 기병의 검이 허공에서 번쩍였다. 레이킨의 목덜미. 찔리면 즉사할 곳을 그는 노리고 있었다.
 “으헉!”
 피할 곳이 없던 레이킨이 돌아보았을 때 기병은 목에서 피를 울컥 뿜으며 검을 놓았다. 천천히 무너지는 그의 뒤편에서 어두운 물체가 스스슥 다가서 기병의 목에 꽂힌 도끼를 뽑아 들었다.
 “어억!”
 “으아악!”
 꼬리를 물고 나타난 물체들은 순식간에 미라센의 기병들을 모두 제압했다. 남은 것은 레이킨뿐이었다.
 “너희는 또 뭐지?”
 레이킨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소공자님!”
 누군가가 레이킨 앞에서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마윈 기사님의 체로키와 검은 이리들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죠?”
 ‘마윈 기사? 그게 누군데?’
 레이킨은 그렇게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레이킨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공작님이 여기 계십니다.”
 인근을 살피던 병사 하나가 무너진 대지의 바닥에서 카리온과 라니바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어서 꺼내 드려라. 일부는 경계 태세를 확립하고. 개자식들이 설사 터지듯 밀려올지 모른다.”
 레이킨에게 말을 걸던 기사가 마법으로 무너진 곳을 향해 뛰며 거칠게 외쳤다.
 “공작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퉤에! 미라센의 똥갈보 자식들!”
 기사가 면갑을 들어올리며 거칠게 침을 뱉었다.
 “체로키로군. 그렇다면 부근에 마윈이 있다는 말인가?”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카리온이 물었다.
 체로키!
 텁수룩한 수염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투박한 용모에 걸쭉한 입담. 날이 다른 검의 서너 배쯤 되어 보이는 검으로도 모자라 허리춤 양쪽에 두 개씩의 도끼를 꿰어 찬 모습. 한눈에 보아도 품위보다 용력이 돋보이는 기사였다.
 “그렇습죠. 눈물의 호수에 진을 치고 갈보의 똥구멍 같은 미라센 놈들을 쓸어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요.”
 “오오! 마윈께서 오셨구나.”
 라니바도 두 손을 모은 채 감격에 겨웠다. 그러다,
 “아! 레이킨.”
 하고는 황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하! 괜찮아요. 이까짓 것쯤.”
 레이킨은 이미 피에 젖었다. 병사들이 카리온 부부를 구하는 동안 회복 마법을 걸었지만 아직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아까처럼 마법이 엉뚱하게 나타난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자칫하면 회복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어서 누워라.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어서.”
 라니바는 자신의 옷을 부욱 찢으며 말했다. 조금 늦은 면이 있지만 이제라도 지혈을 해야 했다.
 “괜찮다니까… 요.”
 말은 묘하게 레이킨의 목을 타고 넘어오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왜 마법이 제대로 발현되질 않지? 레이킨은 핏기 하나 없는 하얀 미소를 지으며 라니바의 가슴으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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