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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2015.05.21 조회 4,793 추천 88


 서(序)
 
 - 천둥소리, 일 척의 묵빛 몽둥이…….
 
 
 구름 한 점 없는 눈이 부시게 화창한 봄날.
 이름 모를 산 정상의 분지.
 개나리, 진달래와 야생초들이 울긋불긋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정취를 더했다.
 만약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는 두 인물만 없다면 이보다 평화로운 광경은 찾기 힘들 것이다.
 일승일속(一僧一俗).
 주홍빛 가사를 입은 무승(武僧)이 나직하게 불호를 읊조리며 눈앞에 서있는 노인을 보았다.
 “아미타불. 도대체 시주는 누구시오?”
 이마에 선명한 계인이 찍혀 있는 승려는 참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 천하의 무림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소림사의 장문인인 혜량이었다.
 질문을 받은, 짧은 묵빛의 몽둥이를 들고 있는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혜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저 노인은 누구인가?
 세 곳의 대방파 비밀 회동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저 노인에 의해 이미 최측근 호위장들과 두 방파의 수장이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자객이나 살수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저승길로 떠났으리라.
 회담 중 갑자기 나타난 저 노인은 “한 판 붙어보자!”란 짤막한 말만 하고는 일 척 몽둥이를 다짜고짜 휘둘렀던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러는 이유를 알아야 싸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말하지 않는다면…… 소승은 죽어도 시주와 싸우지 않겠습니다.”
 혜량은 손안의 염주를 부술 듯 세차게 쥐면서 물었다.
 낡은 학창의를 입고 있는 노인은 혜량의 고집스런 표정에 결국 말문을 뗐다.
 “흠흠. 거참.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노인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약간 쑥스럽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열심히 공부만 하다 보면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이 생기는 거잖아? 그럴 때는 실전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
 “너희들의 회담을 망친 것은 미안하다. 중요한 거였냐?”
 혜량은 눈을 감았다. 굳게 다문 입술이 덜덜 떨렸다.
 기가 막혔다.
 세상에 어떤 인물이 무공수련 중에 생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세 대방파 수장들이 모인 비밀회동에 공격을 감행한단 말인가?
 그것도 혼자서 일 척 몽둥이 하나 들고 말이다.
 “이런 별 거지같은 미친 노인을 봤나?”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혜량은 간신히 에둘러 말했다.
 터질 것 같은 분기를 가까스로 참으며.
 “시주는…… 광오하시군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백미홍안의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아니, 광오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절박한 거다. 내 대에서 반드시 완성시키고 싶으니까. 내 제자 놈에겐 완벽하게 가르쳐주고 싶으니까.”
 “…….”
 “자, 이제 의문은 풀렸겠지? 그럼 어서 공격해 봐라. 네가 가진 최고의 절기로! 만약 어설픈 공격을 한다면 대가는 매우 쓸 것이란 점을 잊지 말고.”
 쫙 찢어진 눈꼬리는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비가 오면 고스란히 빗물을 받을만한 들창코에 입술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신기하게 얇은 노인.
 기이한 외모.
 가히 절대 추남이라 불릴만했다.
 어찌 보면 저주받은 외모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리라.
 혜량은 노인의 그런 모습을 뚫어지게 보다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과의 비무를 피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저 못생긴 노인이 먼저 공격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선제공격의 기회를 잡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그것을 마다했던 수장 하나는 노인의 몽둥이질 한 방에 골로 갔다.
 혜량은 비록 불가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가슴속에서 이는 무인의 혼을 결국 완전히 억누르진 못했다. 무엇보다 이대로 물러서면 대(大) 소림의 체면까지 구겨지게 된다.
 “할 수 없군요. 소승의 손이 독하다 탓하지 마시길.”
 “후후후. 그래, 그래야지. 어서 덤벼라. 내공을 하나도 남김없이 듬뿍 넣어서 전력으로 날 공격해봐라. 너는 그래도 천년 소림사의 지존이니 앞에서 맥없이 나가떨어진 놈들보다는 뭔가 낫겠지.”
 기다리다가 슬슬 짜증나는 기색을 짓던 노인이 반색하며 혜량의 결단을 환영했다.
 노인의 말에 혜량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앞에서 맥없이 나가떨어진 놈들이라.
 그 두 사람은 무림팔대세가의 가주들인 것을 저 노인은 과연 알고 있을까?
 소림 장문인 혜량은 앞으로 몸을 이동하면서 사자후를 터트렸다.
 “하아아아압!”
 부르르릉.
 산 전체가 우는 것일까?
 혜량 주변의 공기가 미친 듯이 사방팔방으로 찢어졌다. 주변의 흙이 허공으로 치솟았고 여린 나뭇가지들이 부러질 듯이 흔들렸다.
 혜량의 엄청난 기세에 노인이 흥분한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오. 좋아. 아주 좋아. 더, 더!”
 혜량의 눈가가 거칠게 떨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가 힘껏 외쳤다.
 “발산공(拔山功)!”
 사자후에 뒤이어 나오는 고함.
 천 년 역사의 소림사가 자랑하는 소림 72절예라 불리는 무공 중, 그 힘이 산을 뽑을 정도라는 무지막지한 신공이 혜량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가 마흔 이후로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발산공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 척의 묵빛 몽둥이를 들고 있는 노인은 다가오는 혜량의 공격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과연 소림의 절예라 불릴 만하군. 좋구나! 좋아.”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동시에 그의 짤막한 묵빛 몽둥이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어느새 상단에 위치한 노인의 몽둥이.
 “파(破)!”
 다가오는 혜량의 공격에 비해 너무 느리게 움직이던 노인은 일갈을 터트리며 허공을 종(縱)으로 갈랐다.
 쇄액. 퍼어엉.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폭음.
 노인에게 향하던 혜량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해갔다.
 자신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혜량이 눈을 치켜뜨며 불신의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스르르륵.
 노인의 몸이 기이한 방위를 밟으며 허공으로 올라섰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경신술!
 노인이 허공에 뜬 채로 입을 열어 싸늘하게 말했다.
 “일단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끝이라면 나는 아주 실망할 것이다.”
 “으으으…….”
 혜량의 입에서 신음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태어나 처음 겪는 당혹감과 무력감에 치가 떨렸다. 당최 어디에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쉬운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공격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허탈하면서도 가슴 한 편으로는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비록 자신이 소림의 최고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소림을 대표하는 자리에 위치한 신분이었다. 그에 걸맞은 최고의 무공을 펼쳐 노인의 저 오만한 콧대를 꺾으리라!
 휘리리릭.
 혜량의 두 팔이 서로 교차하며 공중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노인을 향해 마중 나갔다.
 그의 손에 희미한 황금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까 노인이 말한 대로 단전에 있는 모든 내력을 끌어낸 혜량이었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그가 가진 비장의 절기가 펼쳐졌다.
 파괴력이 너무 강해서 정통으로 적중당하면 죽거나 최소 폐인이 되는 강력한 무공이다.
 그래서 소림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력금강장을 사용하지 말도록 제자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익히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대력금강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고수들은 소림 전체에 세 명에 불과했다.
 혜량은 이번만큼은 스스로의 공격에 확신을 가졌다.
 속으로는 상대가 무례하기는 하나 살인의 의도가 없는데 너무 과한 수법을 펼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도 일부 들 정도였다.
 그만큼 대력금강장은 불가의 무공이라기엔 지독하게 파괴적인 무공이었다.
 현란한 금빛 장영(掌影)이 쏟아지는 것을 마주한 노인의 입에서 불쑥 탄식이 흘러나왔다.
 “너무…… 느려.”
 그 말에 혜량은 기운이 쑥 빠지는 것 같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우르르릉.
 노인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다시 들렸다. 마치 천둥소리 같은…….
 혜량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두 장문인들도 노인의 몸에서 저 소리가 난 직후 쓰러졌었다.
 번쩍!
 순간 노인의 묵빛 몽둥이에서 빛이 일렁였다.
 가공할 쾌(快)!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정말 지독하게 빠르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
 “으윽.”
 혜량은 절망감에 휩싸이며 땅에 고꾸라졌다. 앞서 쓰러진 두 명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순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으면서도 부처께 기원했다.
 부디 저 노인이 괴짜일지언정 악인은 아니기를. 그리고 노인의 제자가 제발 선량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강호는 혈겁에 휩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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