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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23.06.01 조회 83,042 추천 1,282


 갈렌은 지구에서 살았던 전생(前生)의 기억을 가진 채 이 세계에 태어났다.
 비록 평범한 소시민의 기억일 뿐이었지만, 마법 따위를 제외하면 지구보다 문명이 확실히 덜 발전한 이 세계에서는 그 소시민의 기억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구에서는 상식 취급받는 지식도 이 세계에서는 고급 혹은 미발견 지식인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까.
 부모 얼굴도 모르는 고아여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똑똑함을 어필할 수 있었던 덕분에, 갈렌은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밥 굶을 일이 없었다.
 그러다 운 좋게 명문가에 하인으로 들어가게 됐고, 거기서 또 운 좋게 막내 도련님 눈에 들어 전속 시종까지 됐다.
 잡일 담당인 하인과 달리, 시종은 개인 비서에 가까웠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굉장히 출세한 셈이다.
 명문가 자제는 이래저래 바빠서 시중도 부지런히 들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명문가 자제였기에 누가 건드릴 일도 없어서 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잘 풀린 인생 아니겠는가.
 갈렌은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컥!”
 
 마차 창문 너머로 마부의 숨넘어가는 비명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너무 뜬금없어서 현실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던 그 짤막한 소리는 직후 제대로 현실로 닥쳤다.
 
 “어이쿠!”
 
 화살에 맞은 마부가 쓰러지면서 고삐를 어떻게 당긴 건지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갈렌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나마 잘 훈련된 말들이 알아서 멈춘 덕분에 전복되는 사태는 면한 게 다행이었다.
 
 “무, 무슨 일이냐?”
 
 갈렌의 맞은편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던 막내 도련님, 제르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갈렌이 입을 채 열기도 전에 바깥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저격이다!”
 “제르본 도련님! 습격입니다!”
 
 전자는 이번 여행길에 고용한 용병들의 목소리요, 후자는 가문에서 따라온 전속 호위의 목소리였다.
 졸음이 단박에 날아간 제르본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잘생긴 청년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뭐라고? 감히 어떤 놈들이!”
 
 벌떡 일어나려는 제르본을 갈렌이 급히 붙잡았다.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놔라, 갈렌!”
 “밖에서 알아서 처리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한데 굳이 나가실 필요 없습니다.”
 “위험하긴 무슨. 내가 하찮은 암살자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갈렌의 손을 뿌리친 제르본이 기세등등하게 마차 문을 열었다.
 
 “놈들이 뭍이라고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구나. 내 오늘 오케아니스의 힘을 똑똑히 보여 주겠노라!”
 “도련님!”
 “시끄럽다! 갈렌 너는 눈먼 화살 안 맞도록 잘 숨어나 있어라!”
 
 그렇게 말한 제르본은 밖으로 뛰쳐나가며 문을 다시 닫아 버렸다.
 눈치껏 나가서 참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갈렌은 그냥 제르본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기로 했다.
 창칼이 오가는 전장에 일반인인 그가 맨손으로 뛰어들어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일회용 고기 방패 정도나 되고 끝이겠지.
 그렇게 몸은 안전해졌지만, 마음은 불안해졌다.
 
 ‘여긴 도련님이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곳인데······.’
 
 오케아니스 가문은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으로, 물을 다루는 마법으로 유명했다. 바다나 강을 끼고 싸우면 무적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바꿔 말하면, 지금처럼 주변에 물이 없을 때는 약해졌다.
 물론 공기 중의 수분 따위를 다루거나 할 수도 있으니 무력화되는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결코 만전(萬全)의 전력은 아니었다.
 다른 마법 쓰면 안 되냐고? 이 세계의 마법사는 만능이 아니라 특화형 인재로, 오직 한길만 미친 듯이 파고드는 이들이었다.
 두 종류 이상의 마법은 습득도 어렵고 숙련은 더 어려워서, 어떻게 익힌다 한들 둘 다 어정쩡해질 뿐.
 하여 절대다수의 마법사는 단 하나의 마법에만 집중했고, 이는 오케아니스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물 마법만 익혔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이다. 마치 RPG에서 직업을 정했으면 오로지 그 직업 스킬밖에 못 쓰는 것처럼.
 자기 실력에 자신감이 충만한 제르본은 약해진 상태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듯했는데, 갈렌이 보기에는 너무 섣부른 혈기였다.
 
 ‘도시까지 반나절도 안 남았어. 산적 따위가 출몰할 장소가 아냐. 무조건 계획된 습격이라는 건데, 과연 이쪽의 전력을 몰랐을까?’
 
 제르본은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된 청년이라 별로 명성을 쌓지 못했지만, 오케아니스 가문은 이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진짜배기 명문가였다.
 그런 가문의 직계를 습격하는 일을 허투루 처리할 리가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도련님이 나서야 하는 건가? 일행 중에서 도련님이 제일 강하니까, 그래야 그나마 승산이 있나?’
 
 상대가 거기까지 다 계산하고 압도적인 전력을 데리고 왔다면 답이 없을 테지만.
 갈렌으로서는 그저 제르본이 습격자들도 모르는 비장의 한 수를 숨겨 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막아! 못 들어오게!”
 “얼굴을 보일 용기조차 없는 것들이로구나! 썩 꺼져라!”
 “아아악!”
 
 무기끼리 부딪치는 쇳소리,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용병의 목소리, 팔다리가 끊어진 이들의 비명이 끔찍하게 뒤섞였다.
 그나마 중간중간 위엄찬 호통이 섞여 들려오는 걸로 봐서 적어도 제르본은 아직 무사한 모양이었다.
 얼굴도 못 내미는 작은 마차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갈렌은 초조하게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끝났나?’
 
 아주 길게 느껴졌지만 실은 그렇게 길지 않았던 시간이 지나고, 소란이 어느새 잦아들었다.
 살짝 문을 열어 볼까 하고 갈렌이 생각하던 차였다.
 
 “흡!”
 
 갑자기 마차 창문에 불쑥 나타난 그림자를 보고 갈렌이 기겁했다.
 광기와 살기로 가득해서 반쯤 맛이 간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직후.
 
 쾅!
 
 마차 문이 거칠게 열렸다.
 피로 점철된 검을 든 복면인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네놈이라도 죽여야겠―”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복면인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였다.
 박살 난 뒤통수에서 핏물과 살점이 뒤섞여 주르륵 흘렀다.
 털썩 엎어진 복면인의 십여 걸음 뒤에는 제르본이 서 있었다.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킨 채.
 
 “이걸로, 마지막.”
 
 제르본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코앞까지 닥쳤던 죽음이 물러가자 갈렌은 가빠진 호흡을 헐떡였다. 자신이 숨을 안 쉬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 깨달았다.
 
 “가, 감사―”
 
 겨우 입을 열려던 갈렌의 눈이 커졌다. 그가 반사적으로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신속하게 행동한 덕분에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제르본을 아슬아슬하게 붙잡는 데 성공했다.
 갈렌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제르본의 등이 원래 옷 색깔을 모를 만큼 피범벅이 되어 있음을.
 
 “이봐! 누구 없어? 도련님이······!”
 
 버럭 소리치던 갈렌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전장의 모습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던 탓이었다.
 전속 호위들도, 용병들도, 복면을 쓴 습격자들도.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십 구의 시체가 사방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말했, 잖느냐. 마지막, 이라고.”
 
 겨우겨우 쥐어짜는 제르본의 목소리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더 말하지 마십시오.”
 
 최대한 조심스럽게 제르본을 둘러업은 갈렌이 마차로 빠르게 달려갔다. 거추장스러운 복면인의 시체를 옆으로 걷어차고 마차 바닥에 제르본을 눕혔다.
 시종으로 발탁되고 나서 받은 다양한 교육 중에는 응급 처치법도 있었다. 짐을 뒤진 갈렌이 작은 가방을 꺼냈다.
 제르본을 옆으로 누이고 가위를 들었다. 자세히 보니 등이 아니라 허리 쪽이었다. 피로 질척한 옷을 신속하게 잘라 냈다.
 
 “조금 아프실 겁니다.”
 “소용, 없― 끄윽!”
 
 갈렌이 깨끗한 천으로 상처 주변을 닦았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아팠는지 제르본이 신음을 흘렸다.
 
 ‘틀렸어.’
 
 핏물이 어느 정도 씻겨 나간 모습을 보고 갈렌은 속으로 탄식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베인 상처 주변은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기까지 했다. 응급 처치 따위로 해결될 상처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대로 놔두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 갈렌은 상처 부위에 다른 깨끗한 천을 덧댄 뒤 붕대를 꽉 감았다.
 
 “무··· 물······.”
 “예!”
 
 꺼져 가는 목소리로 제르본이 희미하게 말했다. 갈렌이 얼른 물을 가져와 조심조심 흘려 넣었다.
 콜록거리며 말라붙은 입 안을 적신 제르본의 호흡이 아주 조금 차분해졌다.
 물론 그것은 상태가 호전되어서가 아니었다. 사그라지기 직전의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일 뿐.
 
 “빌어, 먹을. 이딴, 곳이, 내, 무덤일, 줄이야.”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아냐. 피는, 둘째 치고, 독도, 퍼졌어. 사제가, 직접 오지, 않고서야.”
 
 서글프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띄엄띄엄 말한 제르본이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직였다.
 힘겹게 품속으로 들어갔던 그의 오른손이 이윽고 작은 책 하나를 천천히 밖으로 끌고 나왔다.
 
 “갈렌.”
 “예, 도련님.”
 “우리 가문의, 비전서(祕傳書)다.”
 “···예?”
 “가문에, 전해 다오. 여의치, 않으면, 불태우고······.”
 
 힘이 빠진 손이 책을 놓쳤다. 비전서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점점 더 느려지는 호흡을 필사적으로 이어 가며, 제르본은 다시 손을 움직여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니, 꺼내려고 했다.
 
 “그리고··· 이것도··· 꼭··· 전해······.”
 
 목소리는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숨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손은 품을 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고작 스무 해를 살았을 뿐인 젊은 생명은 그렇게 덧없이 스러졌다.
 
 “······.”
 
 갈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주인과 시종의 관계이긴 했어도, 어쨌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람이 눈앞에서 숨을 거뒀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괜찮아야 했다. 갈렌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시큰한 고통이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을 되돌렸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냐.’
 
 습격자들은 다 죽었지만, 후발대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다.
 추격이 따라붙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도시로 가야지.
 그리 멀지도 않고, 사람 많은 곳에서 습격자들이 함부로 날뛰기도 어려울 것이며, 무엇보다 도와줄 사람도 거기 있었으니까.
 
 ‘비전서는··· 못 들은 셈 치고.’
 
 소문만 듣고 실물을 본 적은 처음이지만, 아마도 저 책 안에는 오케아니스 가문 대대로 전해져 오는 마법의 정수 따위가 적혀 있으리라.
 만약 습격자들의 목적이 비전서였다면? 가져가든 불태우든, 제르본에게 비전서가 없음을 알게 되면 그놈들이 누구를 쫓아오겠는가? 유일한 생존자를 쫓아오겠지.
 차라리 비전서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척하고 남겨 두고 가는 게 낫다. 제르본에게는 미안하지만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착잡한 표정을 지은 갈렌이 자기 가방을 챙겼다.
 온갖 일을 도맡는 시종이었기에 돈을 포함한 어지간한 물건은 가방에 다 들어 있었다.
 당장 필요한 짐은 이 가방 하나면 충분했고.
 
 ‘그래, 도련님의 반지.’
 
 혼자 달랑 가면 누가 그를 알아봐 주겠는가. 오케아니스 가문의 직계임을 증명하는 반지가 있어야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갈렌은 품 안에 들어가 있는 제르본의 오른손을 조심스레 꺼냈다.
 작은 상자가 딸려 나왔다. 제르본이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쥐었던 물건이었다.
 갈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저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물건을 고를 때 함께 있었고 조언까지 했었으니까.
 제르본이 누이에게 주기 위해 골랐던 귀걸이.
 미처 끝맺지 못했던 청년의 마지막 유언은, 가족에게 꼭 선물을 전달해 달라는 소박한 것이었다.
 
 “······.”
 
 한참을 얼어붙은 듯 멈춰 있던 갈렌이 제르본의 손에서 상자를 빼내 품에 넣었다.
 반지도 까먹지 않고 챙긴 뒤.
 
 “···씨발, 내가 미쳤지.”
 
 평소에 잘 쓰지도 않던 욕설을 내뱉으며 갈렌은 손을 뻗었다.
 어리석은 충동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될 대로 되라지. 유언을 절반만 들어주는 것도 웃기잖아. 의리를 지키기로 했으면 다 지켜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갈렌이 비전서를 줍는 순간이었다.
 
 [ 수류조작(水流操作) ]
 [ 최초 습득까지 진행도 1% ]
 
 이상한 글자들이 갈렌의 눈앞에 떠올랐다.

작가의 말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댓글(46)

묘한인연    
단말마는 말마를 자를 때의 고통이라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들쳐 업은//둘러업은
2023.06.25 20:58
해무극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2023.06.25 22:56
06***    
난 잼게보는중
2023.06.28 13:07
트수    
그래도 잘해주는 좋은 귀족가문인가보네
2023.06.29 12:21
고추냉이    
근데 책임 물어서 죽이지않나 밑에 분 말처럼 잘해주는 가문인가
2023.06.29 20:51
김영한    
엔터 좀 치시는 걸 추천
2023.06.30 13:28
le*****    
주인공이 호위기사도 아니고 무력도 없는데 책임을 물어서 죽일수는 없죠 뭐 소설마다 다를수도 있지만
2023.07.05 12:39
애들은가라    
건투를 !
2023.07.09 11:54
아이디인    
오 드디어 신작을 내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작 너무 재밌게 봤어요. 이번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
2023.07.09 15:45
정주연    
재밌어!!!!재밌다고!!!
2023.07.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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