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나는 특별하다.
기억이란 것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내 주변에는 하얀 장갑을 낀 반투명한 오른손이 두둥실 떠다녔다.
편의상 유령손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유령손 외에도 기묘한······ 음, 그걸 뭐라고 해야 하지? 하여튼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내가 이상한 걸 본다는 사실을 처음 안 사람은 유모였다.
-에반 왕자님! 그런 행동은 두 번 다시 하시면 안 됩니다!
아마도 나풀거리는 나비를 쫓아다니는 고양이처럼, 허공에 떠 있는 유령손을 잡기 위해 몰두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를 주의시키던 유모의 무서운 얼굴과 그 너머에서 검지를 살살 흔들던 유령손이 내 기억의 시작점이다.
-절대로 남들에게 이상한 게 보인다는 걸 들켜선 안 되어요. 꼭꼭 숨기셔야 해요.
유모는 잊을만하면 내게 당부했었다.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먹는 나이였음에도 그녀의 말을 지키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착한 아이였던 나는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고, 덕분에 지금까지 아무도 나의 특별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올리비아 아인베르크. 너를 왕족 독살 미수 혐의로 체포한다.
유모가 처형당한 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두 사라졌다.
“······.”
유모의 기일이라 그런지 싱숭생숭한 밤.
그녀의 영혼을 기리며 달빛이 새어드는 창가의 커튼을 닫았다. 울고 있던 달이 모습을 감추고, 침실에 어둠이 깃든다. 하지만 나의 비밀들은 이 암흑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한다.
“······ 거슬려.”
침대로 돌아와 등을 돌리고 누웠다. 유령손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다른 하나는 슬며시 나를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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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손과 마찬가지로 반투명한 네모난 창.
대체 저기에 적혀있는 건 뭘까?
‘문자’ 같기는 한데······.
<001>
“······ 님! 에반······ 님!”
눈가를 간지럽히는 햇살, 귓가를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동시에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 어릴 적부터 보였던 것들 때문은 아니었다.
방금, 나는 전생을 떠올렸다.
-부아아아아앙!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초등학교 앞을 걷던 중 들렸던 굉음. 고개를 들어보니 승용차가 바로 한 발짝 앞 초등학생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급발진이었는지, 대낮의 음주운전이었는지까지는 모르겠다. 생각이란 걸 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고 아이를 밀쳐내는 데 성공했었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가 생면부지의 타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 인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쨌든 아이는 살았지만.
-콰앙!
나는 그렇지 못했다.
-꺄아아아악! 사람이!
-어떡해! 어떡해!
-빨리 119! 119에 전화해!
-아이는? 아이는 괜찮아?
그래도 착한 일을 하고 죽어서인지 다시 인간으로, 지구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에 환생했다.
에반 리오넬.
풀네임, 에반 솔 필리프 데 리오넬.
리오넬 가문 필리프의 아들 에반이라는 뜻.
리오넬 왕국의 다섯 번째 왕자.
그게 내게 주어진 새로운 삶이었다. 천애 고아였던 전생에 비하면 정말 괄목할만한 신분 상승.
다만.
“왕자님! 왕자님! 에반 왕자님! 정신이 드세요?”
내가 구했던 아이가 후에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도 되었는지,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바라봤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소년? 소녀?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울거나 놀란 표정이었어야 정상 아닌가?
“왕자님! 이거 몇 개인지 보이세요?”
깜빡깜빡.
눈꺼풀을 움직이며 흐릿한 초점을 바로잡았다. 낯익은 얼굴이 눈앞에서 손가락 세 개를 흔들고 있었다.
소년? 청년? 그 사이쯤의 앳된 얼굴.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실눈 탓인지 묘하게 의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이름이······.’
전생과 현생이 뒤엉키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름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왕자님! 말씀 좀 해보세요!”
아! 기억났다.
나의 전속 시종, 알폰소 하임델.
“알폰소, 정신 사나우니까 손 저리 치워.”
나는 녀석의 손을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지끈.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눈살을 구겼다. 조심스럽게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붕대?’
깨질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깨진 통증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금방 정신을 잃었던 원인이 떠올랐다. 이복형, 4왕자의 대련을 빙자한 구타 때문. 머릿속에서 의식을 잃기 전의 장면이 생생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퍽! 퍽! 딱!
허수아비처럼 두들겨 맞다 우연히 놈의 공격을 한 번 막았었다.
-막아? 막아아아?
많이 열받았는지 입가를 부들대던 놈의 기세가 달라졌었다.
-이것도 막아 봐라! 태산 가르기!
내 머리통을 쪼갤 듯이 덮쳐왔던 놈의 공격.
어떻게 목검을 들어 올려 머리를 보호했지만.
따악-! 우지끈.
충격을 견디지 못한 목검이 부서지며 그대로 내 정수리도 빠각!
지끈, 지끈.
그때의 충격이 기억나서인지, 두통이 더 심해졌다.
“왕자님! 갑자기 말도 또박또박하시고! 역시 머리가 이상해지신 게 틀림없어요! 제가 다시 치료사를 데려오겠······.”
“그만!”
알폰소의 촐싹거림에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더 아파졌다. 단호한 내 말에 그제야 녀석이 입을 합 다물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머리를 들쑤시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와, 왕자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알폰소가 아직 미련을 못 버렸는지 손가락을 계속 꼼지락거렸다.
“그거 세 개. 그러니까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나가 있어.”
“네? 그, 그래도.”
“빨리.”
우물쭈물하던 녀석이 주춤주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 있으시면 언제든 부르세요.”
“그래.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를게.”
나는 알폰소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는 걸 지켜본 후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욱씬.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 탓에 크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근육통이 몰려왔다.
휘청,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풀려버렸다. 다급히 침대에 손을 짚은 탓에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망할 자식.’
심심하면 나를 찾아와 괴롭히는 4왕자 자식의 투실투실한 얼굴이 떠올라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뚜벅뚜벅.
온몸의 근육이 질러대는 아찔한 비명을 견디며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흑안을 지닌 소년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붕대 사이로 삐져나온 흑발은 그 와중에도 비단같이 윤기가 흘렀다.
겉모습만으로도 리오넬 왕가의 혈통임을 광고하고 있었다.
모계의 피를 강하게 받아 타오를 것 같은 적발을 지닌 4왕자 자식이 다시금 떠올랐다. 형제 중 유일하게 흑발이 아닌 것이 놈이 나를 더 악랄하게 괴롭히는 이유 중 하나일 거다.
재수 없는 자식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반투명한 손이 나를 반겼다.
남들은 전혀 볼 수 없는데, 내 눈에는 거울로도 보인다.
어릴 때는 그저 주변에서 떠다니며 가끔 제멋대로 손가락 운동이나 하던 유령손. 어느 순간부터 주먹 쥐기, 딱밤 날리기, 중지 세우기 등등 내 의지대로 조종하는 게 가능해졌다.
휙, 휙 이리저리 움직이던 유령손을 탁자 위로 이동시켜 물이 반쯤 차 있는 컵을 움켜쥐었다.
스르륵, 컵을 통과해버리는 유령손.
역시나 물리력은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유령손과 함께한 약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아낸 바에 의하면 저것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건 오직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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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홀로그램처럼 떠다니는 반투명한 창.
‘한국어, 영어.’
기가 막힌 일이다.
그토록 수많은 책을 뒤져가며 찾았던 문자의 정체가 전생의 것이라니, 알아내지 못했던 게 정상이었다.
“로스트 사가······.”
헛웃음이 나왔다.
전생에 승용차가 덮치는 아이에게 몸을 날리기 직전, 내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던 게임의 타이틀 창이었다.
실제로 플레이해본 적은 없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그런가? 어떤 경로로 설치하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회원가입을 끝내고 로그인하기 직전이었다는 사실.
유령손의 검지와 엄지를 모아 로그인 창에 가져다 댄 후 위아래로 벌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창이 노트북 정도의 크기로 확대되었다.
이어서 ID 옆 칸을 톡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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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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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핑 위치를 알려주는 막대기, 커서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떠오른 가상 키보드.
전생을 자각한 지금에야 알게 된 거지만, 한 손으로도 입력하기 편하게 만든 스마트폰의 그것과 거의 똑같았다.
언제나 여기서 막혀 더 이상의 진행은 할 수 없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기억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었다. 전생의 나는 회원가입을 할 때면 언제나 같은 걸 사용했으니까.
유령손을 이용해 정확하게 타이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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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 Kicker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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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패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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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word : sdd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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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유령손을 [Login] 앞으로 가져갔다.
될까?
된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흥분, 기대, 불안.
여러 가지가 뒤엉킨 심정으로 로그인을 눌렀다.
「아르카나 시스템 접속 중.」
.
.
.
「접속 완료.」
지잉─!
광활한 우주가 나를 덮쳤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을 감았다 뜨니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반짝이는 곳 중심에 내가 있었다.
인지할 수 없는 존재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문자를 확인합니다.」
「에반 솔 필리프 데 리오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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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육성 시뮬레이션 《Lost Saga》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내 운명을 뒤흔들 일이 그렇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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