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오후였다.
바다처럼 드넓은 파란 하늘.
유유히 떠다니는 양 떼 같은 새하얀 구름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달력의 빨간날처럼 온화한 공기와 포근하게 얼굴을 감싸는 햇살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김밥 사들고 소풍 가서 사진 한 장 찍어놓는 것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추억이 생길 것 같은 그런 날씨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농구하다가 공을 맞고 코피가 터져 벤치에 누워 바라봤던 하늘도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웠었다.
스코어도 환상적이었다.
52대 35.
나 혼자서 무려 25점이나 득점했다.
그 시절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 다시 흙바닥에 누워 있는 지금, 하늘은 여전히 눈부시지만 내가 처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지금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하아 하아······”
절망적인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숨어야 한다.
안전한 곳으로······
머릿속에선 악착같은 생존 본능이 유격장의 조교처럼 필사적으로 엉덩이를 걷어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살 수 있을까?
냉정하게 몸상태를 확인했다.
한 손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는 옆구리의 상처와 총알이 관통한 오른쪽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의 양은 이제 곧 치사량에 근접할 것이다.
폐허가 된 이 도시에는 응급처치를 해줄 사람도 수혈받을 병원도 없다.
피가 새어나간 자리로 오한이 파고들어 몸이 덜덜 떨렸다.
고통은 이미 저만치 멀어졌고 시야도 몽롱하게 흐려졌다.
으스스하게 의식이 꺼져가는 이 차갑고 섬뜩한 느낌은 분명 죽음의 감각이었다.
저벅저벅.
어디선가 사신처럼 다가오는 발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시야 속으로 마른 체구에 등산 배낭을 멘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흐려진 초점을 맞추려고 있는 힘껏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신태익······
결국 저 새끼 손에 죽는구나.
진작에 죽였어야 하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얄궂은 복선처럼 목을 조여왔다.
복선이라······
저 인간이 날 죽일 거라는 복선이 어디쯤에 있었을까.
곰곰이 되짚어보니 처음 봤던 날부터 느낌이 좋지는 않았다.
해운대 일대에서 파밍을 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신태익은 들개 같았다.
누추한 행색에 굶주린 눈으로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소리 없이 움직였다.
어디서 뭘하던 놈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샷건을 들어 겨눠봤지만 너무 멀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트럭 옆에 엄폐하고 있어서 맞추기도 애매했다.
소총이라면 어땠을까.
파출소나 군부대에서 M16이나 K2 하다못해 창고에서 썩어가는 카빈이라도 한 자루 건졌다면, 지금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신태익이었을까.
죽었다가 되살아난 좀비들이 닥치는 대로 이빨을 들이대며 세상을 완전히 무너뜨린 뒤로 길에서 마주치는 것들 대부분은 적이었다.
혹은 짐이거나.
그래도 싸우는 건 언제나 최후의 선택지였다.
내가 죽이려고 들면 상대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눈먼 칼에 찔리거나 소음을 듣고 슬그머니 다가온 좀비나 제3자에게 뒤치기라도 당하면 허망하게 골로 갈 확률이 아주 높아졌다.
신태익도 그걸 잘 알기에 트럭 옆에 몸을 숨긴 채 섬뜩한 눈으로 나를 빤히 노려보기만 할 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버려진 차들과 간판과 유리창이 부서진 건물들 속에서 숨죽인 채 기회를 탐색하며 대치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걸어다니는 시체들의 낯익은 소음이 들렸다.
놈들이 더 다가오기 전에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신태익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트럭 뒤로 사라졌다.
그 후로 해운대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부촌답게 아직도 여기저기 털어먹을 물자가 좀 남았지만, 그만큼 모여드는 생존자와 좀비들도 많았다.
해운대 쉘터도 점점 약탈자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고 신태익 같은 놈들과 마주치는 것도 성가셨다.
한 달 뒤 시커멓게 불탄 부전도서관 근처에서 신태익과 재회했다.
저번에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던 덕분에 이번엔 제법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샷건의 유효 사거리 내였지만 나와 신태익 둘 다 총구를 내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진짜 이름을 밝혔다.
윤강준.
이름을 말할 때 일말의 주저도 없는 걸 보면 신태익이란 이름은 아무래도 본명은 아닌 것 같았다.
아포칼립스의 기축통화인 담배를 한 개비 던져주자 신태익의 눈빛과 분위기가 한풀 꺾이듯 누그러들었다.
나와 신태익은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정보를 교환하며 담배를 피웠다.
서울은 좀비와 생존자들이 뒤섞여 아직도 지옥을 방불케 했지만, 부산은 고리 원전 방사능 유출 루머 때문에 인구밀도가 현저하게 낮아졌다.
군대와 정부 관계자의 선동에 겁먹은 생존자들이 우르르 창원, 마산, 경북으로 피난을 떠갔고 좀비들도 따라가는 바람에 여기는 그럭저럭 살만했다.
정부 관계자의 말과는 달리 내가 가진 가이거 계수기의 방사선 수치는 사태 이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오래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왠지 장례식장 흡연실에서 낯선 사람과 주식이나 코인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면에서 쉘터 하나가 약탈자들에게 박살났다는 소식도 삼성전자 8층에 1억쯤 물렸다는 소리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렸다.
담배 한 대를 태운 뒤에 별말 없이 물러나 각자의 길을 갔다.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뭔가 아슬아슬하게 선 같은 게 그어진 느낌이었다.
동료가 되거나 협력을 기대할 순 없어도 넘어가거나 넘어오지 않으면 별일 없이 흘러갈 중앙선인지 평행선인지 모를······
허나 결국은 선을 넘었다.
나로서는 신태익 저 염병할 놈이 뒤통수를 쳤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만, 저 인간의 생각은 다르겠지.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주마등 같은 덧없는 상념 속에서 신태익의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손에 들린 샷건이 눈에 들어오자 맥이 탁 풀려 흙바닥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누웠다.
“후우우우”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옆구리의 상처에서 손을 뗐다.
지퍼를 내리고 피에 젖은 오른손을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한 발 남은 수류탄에 손이 닿자 쓰라린 절망감 속에서도 회심의 한 수를 쥔 것 같은 안도감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왼손으로 가슴을 눌러 수류탄을 잡고 오른손으로 주저없이 안전클립을 제거한 뒤에 안전핀 고리에 중지를 걸고 주먹을 꾸욱 움켜쥐었다.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다가온 신태익이 바로 옆에 멈춰섰다.
신태익이 일으킨 마른 먼지가 얼굴로 끼쳐 들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신태익도 파란 하늘을 등지고 선 채로 덤덤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살의나 분노보다 의문이 먼저 일었다.
“······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아침에 서울이 수복됐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신태익 이 개새끼도 라디오가 있을 테니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다음 주엔 이곳 부산에도 상륙 작전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말이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다.
안전한 쉘터 운운하며 생존자들을 함정으로 유인하는 가짜 방송도 있고, 근거없는 선동이나 허위 정보도 넘쳐났으니까.
하지만 라디오에서 이런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대 심리를 조용히 억누르며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니 사실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이제 다 끝났다.
걸어다니는 시체들은 모두 재가 되어 땅속으로 사라지고, 버려진 폐허들은 다시 되살아나 예전의 문명을 재건할 것이다.
혹독한 굶주림과 절망에도 꺾이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짐승 같은 생존에서 벗어나 저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5일만 기다리면 알 수 있다.
소식을 들은 모든 생존자들을 마약보다 더 지독한 희망으로 들뜨게 만든 라디오 속 낮고 또렷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천사와 악마 둘 중 어디일지.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구원의 미래인지 공허한 악의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5일만 지나면.
그런데 대체 왜······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내가 전혀 겁먹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신태익은 질문의 무게를 가늠하듯 눈매를 좁혔다.
잠시 뒤 그가 답했다.
“나는 여기가 좋아.”
빌어먹을 개소리였지만, 신태익이 어떤 인간인지 그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세상이 무너지면서 정부와 경찰과 군대는 사라졌고, 법률과 윤리도 생존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아무나 내키는 대로 죽이고 빼앗고 짓밟아도 감옥에 가지 않고 시체조차 숨길 필요가 없는 무법천지에서 신태익은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목줄에서 풀려난 들개들은 이 도시에도 제법 많았다.
사이코패스 살인마도 있고 아이들을 이용해 사람을 낚는 비열한 약탈자도 있었다.
신태익은 그런 들개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신태익이 손에 든 샷건의 배럴을 앞으로 젖혔다.
척!
팅!
빈 탄피 두 개가 화약 냄새를 뿌리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재장전도 안 하고 여기까지 왔다니.
죽어가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었다.
그 어설픈 방심이 신태익을 죽음으로 이끌 복선이라 생각하니 입가에 희미하게 실소가 맺혔다.
신태익이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장전하는 걸 보며 나도 망설임 없이 안전핀에 걸어놓은 중지를 잡아당겼다.
손이 품에서 벗어나자 수류탄의 안전손잡이도 제 위치를 이탈했고, 소리 없이 공이가 뇌관을 때렸다.
지연제가 타들어 가기 시작하고, 신태익이 장전을 마친 샷건으로 내 가슴을 겨눴다.
“흐흐흐흐”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내가 웃음을 흘리자, 끝내려고 방아쇠에 검지를 댄 신태익이 멈칫했다.
“······농구 좋아해?”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을 오래전 환상적인 스코어를 떠올리며 나는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짰다.
염병할 신태익의 면상을 향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의 가운뎃손가락이 조롱하듯 곧게 펴졌다.
헐거운 반지처럼 수류탄 안전핀이 걸려 있는 채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신태익이 급히 돌아서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품속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파편이 몸을 찢기도 전에 충격파가 먼저 심장을 강타했다.
한순간 고통은 모두 사라지고 정전 같은 죽음의 암흑이 나를 집어삼켰다.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분노, 억울함 따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깝다······
그저 그 생각뿐이었다.
진짜 죽기 아까운 날이었다.
댓글(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