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약관은 꼼꼼히 읽어야 한다
학교마다 정의와 범위는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국어국문학과와 사학과, 철학과를 묶어서 문과대학이라 부른다.
내가 졸업했던 곳에는 냉소적인 농담이 하나 떠돌고 있었다.
‘문과대학의 진로 통계 중 2위는 공무원이다.’
여기에는 많은 함의가 있다.
출신 학과 같은 것 안 보는 블라인드 시험 형식으로만 취업할 수 있다는 의미가 우선 첫 번째다.
사기업은 워낙 합리적이라 사외 이사의 백수 조카라든지 자기 사업의 주무 부처 과장 출신을 낙하산으로 채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질문에 연관된다.
‘그럼 1위는 뭔데?’
그건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내가 몸으로 증명할 수 있다.
불멸의 자택 경비원이라거나 이세계 용사 후보 1순위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영광된 직업인 날백수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이 농담은 복잡한 의미의 자조인 것이다. 요즘에는 문송하다는 말이 훨씬 임팩트 있게 통용되나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농담은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다.
나 역시 문과대 졸업자 최빈값에서 2위로 내려오기 위해 다년간 애를 써 왔다.
거꾸로 말하면 몇 번이나 떨어졌다는 말이다.
집에서도 이제 슬슬 뒷바라지에 지친 모양인지, 친척 어른이 한자리하고 있는 회사에 들어가 보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오는 상황이다.
요즘에는 공무원 쪽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은지라, 경쟁률이 많이 떨어진 올해까지만 해 보고 안 되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면서 불 꺼진 노량진 거리를 걸었다.
이제 얼굴이 꽤 익은 컵밥 장사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자리를 걷고 퇴근했다. 개중에는 어디다 뒀었는지 번쩍번쩍한 외제차를 타고 돌아가는 축도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무원보다 저쪽이 낫겠다고도 말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저런 차는 ‘따위’로 보일 정도의 권리금은 둘째치더라도 음양으로 들어가는 노고가 장난 아니다. 깡패와 구청 모두를 잘 달래야 하는 빛과 어둠의 균형자적 직업인 것이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는지, 수험생들도 웬만하면 나다니지 않을 이 시간대에 불을 켜 놓은 노점이 있었다.
노량진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할 만한 나도 못 보던 곳이라서 문득 호기심이 동했다.
길거리 음식이야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컵밥에도 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초보자가 생각 없이 나서면 시판 마요네즈와 데리야끼 소스 맛밖에 안 나는 느끼한 물건이 되는 것이고 그런 노점은 오래 못 간다.
마침 출출했던 참이라 나는 천막을 걷고 들어갔다.
그때는 우울한 하루에 이런 작은 기대의 충족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소박한 상상, 정말 그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안의 풍경을 눈으로 보기도 전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음식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음식이라고는 올린 적도 없어 보일 만큼 깔끔한 테이블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쪽에는 많이 쳐도 내 나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일 듯한 여자가 팔을 괸 채 앉아 있었다.
자연스레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어서 오세요.”
그래, 솔직히 말하겠다. 내가 ‘잘못 들어왔네요.’ 하고 나가지 않은 것은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라서다.
무슨 수작을 붙여 보겠다는 뜻이라기보단, 절경이나 예술적인 조각상을 보고 발이 멈추는 것과 비슷했다. 그만큼 현실적인 기대에서 벗어난 차원의 미모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끝내 무난한 질문을 만들어냈다.
“아직 영업하십니까?”
판 걷고 퇴근하느라 안이 썰렁한 것이라면 가보겠다는 겸손한 의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한국어 사전에 분명히 있고 문어체로는 자주 쓰이지만 구어체로는 잘 쓰이지 않는 호칭에 나는 다시 당황했다.
“저를요?”
“정확히는 여기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지요. 밖의 간판 못 보셨나요?”
누가 컵밥집 간판을 읽어보고 다니는가. 나는 할 말이 궁해져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밖의 입간판에는 ‘공무원이 되고 싶습니까? 오늘 당장 이뤄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군. 컵밥집이 아니라 학원 광고였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전 포장마차인 줄 알고. 저는 강좌가 다 차서······.”
“강좌는 합격하기 위해 듣는 것 아닌가요? 합격만 한다면 강좌는 필요 없죠.”
오, 멘트가 좀 공격적인데.
하긴 컵밥집이나 공시생과 마찬가지로 이 업계도 살아남기 힘들긴 하다. 모든 사람이 살기 힘들다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이 나라는 항상 그랬다.
수능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며 수능 강사가 대거 공시 쪽으로 이전한 지도 꽤 되었다.
그러나 가뭄 때문에 옮긴 호수마저 말라붙듯, 지금은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낮아지면서 고객이 많이 줄었다. 그 사람들도 피 터지는 경쟁을 하고 있는 신세다.
‘그래도 어디 광고에서 봤으면 잊어버리진 않았을 것 같은데. 신참인가?’
내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그 여자는 다시 직설적으로 말했다.
“국가 공무에 입직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제가 당신의 소원을 즉시 이뤄 드리겠습니다.”
저 정도로 자신감이 있다면 한번 들어 봐도 되겠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한다고, 나 역시 샘플 강의만 들어 봐도 대강 질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럼 한번 들어가 보게 톡이라도 하나 넣어 주시면······. 아 참, 체험은 돈 안 내도 되죠?”
그래, 다시 한번 솔직해지자면 속셈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큰 회사의 홍보장으로는 보이지 않고, 이 업계는 강사가 자체적으로 자기 홍보를 하는 경우도 많으니 회사 차원의 톡방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 여자는 선뜻 휴대폰을 꺼내 놓았다.
“예. 여기 약관에 동의 눌러주시면 돼요.”
그 앱에는 고풍스러운 조선식 관복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었다. 뭐라고 한문도 많이 적힌 것이 꽤나 본격적이었다.
식상함을 넘어 한물간 비유다. 그래도 상투적인 요소는 항상 효과적인 법. 여전히 ‘사무관 이상이면 묘비에 현고학생(顯考學生) 대신 직책명을 쓴다.’는 불문율이 통용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약관을 전부 세세히 읽는다면 그건 한국인 실격이다. 나는 비필수 항목만 – 보나마나 광고 이용 수신 동의일 것이다 – 빼는 세심함을 발휘한 자신에 대해 뿌듯해했다.
이름과 휴대폰 인증, 회원 가입도 일사천리. 현대인이라면 눈 감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서 할인 포인트 하나 받으려고 해도 개인정보를 팔아야 하는 세상이라 거부감은 없었다. 어차피 내 개인정보는 저기 하얼빈의 장 모 씨도 한국 밀입국에 절찬리 이용 중일 거다.
익숙한 환경에 안심마저 느낀 나는 안 해도 되는 말을 일부러 붙여 보았다.
“여기 들어가면 되는 겁니까?”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바로 들어가 보시려고요?”
“지금은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요. 그럼 말씀드린 대로, 당신은 지금부터 공무원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의 말이 좀 강경한 광고 멘트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부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거나 다름없는 명강의를 전수해 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나는 곧 그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이번에도 눈의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보이는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자의 목소리가 명백히 다르게 들렸다.
[승경도(陞卿圖) 회원 가입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지금 관리가 되었습니다.]
‘뭐지?’
이 위화감을 가장 가깝게 묘사해 보자면, 눈앞에서 말하는 목소리와 전화를 통해 말하는 목소리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실과는 터무니없이 멀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게 내 한계다.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계약 기간은 약관 2조에 따른 회원의 의무 이행과 수강료 지불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수강 중의 부상, 사망, 기억 상실, 육체 및 정신적 질환 등에 대해 본사는 책임지지 않으며, 약관 2조의 이행이 미완료된 상태에서 사망이나 완전 무력화 등으로 더 이상의 지불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약관 8조에 따른 강제집행이 불가피한 점 다시 공지드립니다.]
상대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 분명히 설명했다고 말해야 하는 전화 상담원 특유의 억양 없고 빠른 목소리였다.
따라서 내용은 하나도 접수되지 않았다.
단지 그 음색이, 시각과 청각이 일치되지 않는 그 부조화가 나에게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
아예 모른다면 그냥 당황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이었다.
근성이 독한 녀석들은 공시 공부 중에 휴대폰을 아예 없애버린다고도 들었지만 사람이 어디 그러기가 쉬운가.
이 노량진에도 골목마다 넘쳐 나는 게 PC방이며 모텔, 노래방과 당구장인 이유가 있다. 공시는 그 유혹을 이겨내는가 여부의 싸움이지 무슨 학문을 어떻게 익히느냐의 경쟁이 아니다.
나도 공부하는 틈틈이 ‘재충전’ 명목으로 소박한 휴식을 취했다. 물론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거나 여자친구를 만난 건 아니고 진짜 소박하게 웹툰이나 웹소설 보는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이 사태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어설픈 지식은 공포를 몇 배로 키웠다.
인터넷에 수없이 존재하는 금지된 문서의 파편에 따르면, 이 우주에는 사악한 의지가 횡행하고 있다.
전생트럭, 나노머신, 저승사자 등등 명칭은 다양하지만 그 행태는 같다.
무슨 할당량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람을 마구 납치해서 이세계에 뿌려 가혹한 운명을 – 현대인과 이세계인 둘 모두에게 - 지우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잠깐, 나는 이세계 가고 싶다는 생각 따윈 한 적도 없는데? 차에 치인 것도 아니고 소원을 빈 것도 아닌데?’
하지만 약관에 동의했다.
나는 옥장판이나 정수기 사기 당한 사람들을 더 이상 비웃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제 시야까지 본격적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예전 수술할 때 전신 마취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세상과의 괴리감. 죽음이 아마 이와 비슷할 것이다.
회귀? 환생? 순간 이동?
‘가장 리스크가 낮은 건 회귀인가!’
나는 필사적으로 로또 번호를 떠올리려 애썼지만 당연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회귀를 대비해 로또 번호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실제로 몇몇 있다고 들었을 때 현생 괜찮으냐고 손가락질하지 말고 동참했어야 했다.
‘침착하자. 몇 년 전일지 모르지만 일단 비트코인하고······ 어, 또 어디 주식이 올랐더라. IMF 전이면 좋을 텐데. 아니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전이라도······. 아냐. 5년 전만 되어도 된다. 딸라 빚이라도 끌어다가 야구 우승팀에만 베팅하자! 절대 내가 읽은 소설 주인공들처럼 초반에 어리버리하면 안 된다!’
나는 필사적인 결의를 다지며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지만, 그렇게 정리해 놓자 왠지 긍정적인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현실에서 별 볼 일 없던 인생, 잘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순식간에 재벌이 된 내 모습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나는 세상을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한눈에 알 수 있다.
여기는 로또도, 주식도, 코인도, 프로 야구도 없다.
횃불을 따라 일렁이는 일여덟 명의 도포짜리들과 그 너머로 건너다보이는 기와집이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것은 횃불이나 등불뿐, 순간적으로 꽤 멀리까지 건너다보았지만 눈에 걸리는 곳 모두에서 전기 조명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사극이나 영화에서 보던 광경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밤이라는 느낌을 주는 촬영’과 ‘진짜 밤’의 차이였다. 반사판이나 보정 처리가 없어서 그런가?
아무튼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집이 있고 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 시야 안에 전깃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적어도 21세기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본능적 위기감을 느낀 내 심정을 대변하듯, 내 눈앞에 방패처럼 보이는 흰 사각형이 나타났다.
21세기 사람의 지식 덕분에 나는 그 빌어먹을 물건이 뭔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부모의 원수를 부르듯이 그 이름을 외쳤다.
“상태창!”
내가 이름을 부르자, 상태창은 나에게로 와서 절망이 되었다.
[성명 : 김운행(金雲行)
연령 : 18세, 1731년생
본관 : 안동(安東)
종족 특성 : ‘경화사족(京華士族)’
노량진 패키지 이벤트 : 패시브 스킬 ‘언어 동조’ ‘질병 면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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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료 적립 : 0회/12회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
튜토리얼 필수 목표 : 집으로 이동하십시오(부가 목표 :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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