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황녀 테스란

1 서막

2015.06.01 조회 698 추천 19


 <기나긴 장고의 결심 끝에 이 글을 남기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해 다오. 이 나라에 대한 충신들의 노력과 처음 제국을 완성한 조상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는 아비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구나. 제국의 위상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너이기에 아버지는 너를 믿고 마지막 말을 남기는구나.
 사랑한단다, 내 딸아.
 불카누스 제국의 황제. 스카이 데미안이.>
 
 짧은 유서와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식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편지를 쥐어 잡은 채 신음을 삼키며 떨고 있는 한 가녀린 여자도 같은 심경일 것이다.
 여자의 감수성은 남자보다 더 강하며 심지어는 날카로운 검처럼 예리하기까지 법이니까.
 그런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 느끼는 부정(父情)은 어떠할까.
 올해로 열다섯인 스카이 테스란은 자신의 붉고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드디어 입을 열어 심경을 표로 하였다.
 “그러니까 이 XX한 아버지가 이 글 쪼가리를 써놓고 가출하셨다고? 모든 전권을 나에게 넘기고 말이야. 응? 이런 이야기지 지금?”
 테스란의 거친 말에 편지를 전해준 재무대신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로 말을 대신 하였다.
 “하…….”
 짧은 한숨과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는 표정.
 불카누스 제국의 3대 황제로 추대되는 스카이 테스란의 똥 씹은 표정이었다.
 
 ***
 
 랑카르트 대륙.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땅 덩어리.
 아직도 사람이나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지 않는 곳이 많기는 하지만, 현재 세 개의 제국과 네 개의 왕국, 그리고 두 개의 변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국이라 함은, 땅도 땅이지만 대륙에서 경제, 문화, 군사력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뛰어난 능력을 갖춰야 했다.
 물론, 불카누스 제국도 경제, 문화, 군사력에 대해서는 다른 제국들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다른 나라들도 그것을 인정할 만큼 제국으로서 위용을 갖추었다.
 다만 다른 제국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불카누스 제국을 제외한 두 제국은 하나의 황권이 존재하고 나머지 가문들이 그 황권을 떠받치고 있는 형태, 즉 유일황권 체제 갖추고 있는 반면, 불카누스 제국은 세 개의 가문이 모여 하나의 제국으로 탄생하였기 때문에 건국 과정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세 개의 가문이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어지려면 얼마나 많은 암투와 살육이 뒷받침되었겠는가.
 심지어 삼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암투는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현재.
 테스란은 그런 환경 속에서 스카이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모두의 기대와 앙심을 등에 업고 태어난 그녀는 출생부터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맞이해야 했던 것은 젖병과 장남감이 아닌, 수많은 암살자의 칼날이었고.
 그녀는 커가면서 제국 황실의 예법, 여자가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보다는 중독이 되었을 때 살아남는 법, 암살자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법 등을 먼저 배웠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성격은 괴팍하고 피폐해져만 갔다.
 더욱이 그녀의 아버지인 현 황제 스카이 데미안은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라는 별 시답지도 않은 교육론을 가지고 있어 테스란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심지어 고위층 자제와 황실의 자제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기관인 페이치리온에, 그녀는 달랑 호위기사 두 명에 하인 한 명만을 데리고 입학하였을 뿐이었고.
 그 이후로 불카누스 제국의 지원조차 끊겨 버렸다.
 “그때는 정말 이 망할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벌컥벌컥!
 테스란은 옛일을 회상하면서 쓰게 웃음 짓고는, 독한 술을 목에 털어 넣었다.
 “크으! 정말 그때는 수업이 끝나는 게 그렇게 무서웠었지.”
 공부를 좋아했다거나 수업 시간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여타 아이들과 같이 공부보다 노는 것이 좋았을 나이니 말이다.
 그런 테스란이 수업이 끝나는 것이 무서운 이유는 오로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암살자들의 공격이었다.
 수업 중에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받는 통에 수많은 호위기사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안심하였지만, 수업이 끝나면 혼자 있을 경우가 많았다.
 테스란을 경호하는 두 명도의 호위기사도 테스란을 호위하기보다는 자기 살기 바빴으니 말이다.
 “뭐, 그럴 만도 했지. 그 두 명이 죽어버리면 다시 호위기사를 보내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렸으니, 젠장. 그렇게 따지면 있는 놈들도 나 대신 칼침 맞지도 못 하잖아!”
 여러모로 호위기사들의 존재는 테스란의 입장에서는 짐 덩이나 다름없었다.
 자신 대신 칼을 맞고 다치거나 죽어버리면, 새로운 호위기사가 오는데 족히 십여 일 이상이 걸리고, 당장 내일도 알 수 없는 판국에 한 명이 경호를 어떻게 하겠는가?
 벌컥벌컥!
 “으아아! 열 받아!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굽신거리며 살았는데!”
 그래서 테스란이 페이치리온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조정 하였다.
 검술이나 마법을 수련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녀의 사정상 검술과 마법을 수련할 시간도 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았으니 그녀는 가장 쉬운 빌붙기를 택했다.
 그래도 황녀나 되서 자존심도 없이 빌붙기는 뭐해서 그녀는 주구장창 공부만을 팠다.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다른 아이들에게 과외를 목적으로 빌붙는 것.
 “그때 태생에도 없는 공부를 파서 머리가 부서지려고 했는데. 크으.”
 벌컥벌컥!
 그녀는 다시 독한 술을 넘기면서 욕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 그녀는 과외를 핑계로 다른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쳐 주면서, 암살을 피해왔고 결국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으아아! 오로지! 그 한 가지를 위해서 그렇게 살아남았는데!”
 열 살도 안 된 테스란이 장장 오 년간 수많은 암살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원하는 그 한 가지.
 황위를 계승하는 것도 스카이 가문과 불카누스 제국 황실의 장녀로써 인정받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황위고 나발이고,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단 하나.
 “그 미친 양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어야 하는데! 으아아아!”
 그렇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의 면상을 기필코 한 대 치고자 그렇게 긴 고생을 하면서 버텼던 것이다.
 “그런데 이깟 쪽지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져? 그리고 사랑한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
 테스란은 갖은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지만, 그래도 몸가짐은 절도 있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적당하게 미쳐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흐흠. 아가씨가 아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많이 괴로워 보이더구만. 자아, 이 한 잔은 내가 살 테니까 마시고 기운 차리게. 원래 세상살이이라는 것이 어려운 법이야. 허허허.”
 테스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본 펍의 주인은 테스란이 마시고 있던 것과 같은 술을 내어 주면서 한마디를 하였다.
 그래도 난리법석은 떨지 않아서 그런지, 펍의 주인은 자상한 미소를 지어주면서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테스란에게 덕담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히히, 고맙습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한데 상사나 다른 사람이 많이 괴롭히나 봐?”
 “어우, 아니에요. 상사는 무슨.”
 “어? 취직 안 했나?”
 “에이, 제 나이에 취직은요. 히히.”
 “음? 아가씨 아니었어? 그럼 몇 살인데?”
 테스란은 술에 취해 눈이 풀린 채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헤헤헤, 열다섯이요. 히히히.”
 “…….”
 그리고 그 순간, 펍의 문이 열리면서 마을의 경비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들이닥치며 외쳤다.
 쾅!
 “미성년자 단속 나왔습니다!”
 불카로스 제국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는 열여섯.
 테스란은 자국의 법을 입으로 넘어가는 독한 술처럼 삼켜 드셨던 것이다.
 “으헤헤헤! 마셔! 마시고 죽자! 으헤헤헤!”
 벌컥벌컥!
 한 제국의 대권을 이어받을 사람이 마을의 평범한 펍에서 싸구려 독주를 마시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더군다나 그녀는 경비병에게 끌려가면서까지 술잔을 놓지 않고 추태를 부려 대었다는 후문.
 이렇게 불카누스 제국, 고난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테스란의 기나긴 황녀로서의 삶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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