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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천 1화

2015.06.02 조회 3,339 추천 49


 제1장 대하산의 소년
 
 
 백발의 긴 수염을 만지고 있는 노인.
 신선이 있다면 저러한 모습일 게 분명할 것 같은 노인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키 작은 노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 건데?”
 “오십 냥!”
 자신 있게 대답하는 키 작은 노인이 안타까운 듯 다시 한 번 물었다.
 “너무 많은 것 아냐?”
 “오 년은 족히 걸릴 일인데 오십 냥은 걸어야지.”
 “좋아. 딱 오 년 후다.”
 “그래, 오 년 후 대하산 정상에서 만나도록 하자구.”
 “알았어. 그때 보자!”
 “벌써부터 오 년 후의 네 얼굴이 궁금하구나.”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나가는 키 작은 노인은 무언가 새로운 일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
 
 덩치가 작지 않은 늑대 한 마리가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고 그 뒤를 쫓아가는 소년은 손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지금 달려가고 있는 늑대는 이곳 대하산에서는 겁날 것이 없다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지만, 그건 이제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거리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저놈!
 삼 년 전, 저 빌어먹을 놈이 나타나고부터는 대하산에 살고 있는 늑대를 비롯해 대하산 서쪽 기슭의 제왕이라 불리던 불곰과 그 이외 지역의 패자인 백호까지 모두 다 저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저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불곰과의 한판 승부를 본 대하산의 모든 동물들은 알고 있었다.
 제 덩치의 삼분의 일, 아니 오분의 일도 되지 않는 저놈과 승부를 가지게 된 불곰은 상대의 꼬락서니에 너무나 어이없어 했지만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소년의 손에 들린 몽둥이에 일차 눈을 가격당한 곰이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비비고 있을 때, 소년의 몽둥이는 다시 그 손을 때렸다.
 불곰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치우자 다시 한 번 눈을 때리는 소년의 몽둥이질은 잔인함 그 자체였고, 그 모습을 보는 동물들의 등에 땀줄기를 팍팍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양 눈이 밤탱이가 된 불곰은 모르는 이가 보면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양눈분칠곰으로 착각할 모습이었고, 그런 불곰의 시야가 흐릿한 시점에 정확히 불곰의 이마를 때리는 소년의 몽둥이질을 보고 늑대는 자신이 벌릴 수 있는 최대의 크기로 입을 벌렸었다.
 단 네 방의 몽둥이질에 쓰러진 불곰은 그 후 소년에게 온갖 협박을 다 당했다.
 한 번만 더 까불면 쓸개를 떼어 장에 내다 팔겠다는 공갈부터 발바닥을 다 잘라 가겠다는 둥, 이런 공갈 협박에 못 이긴 불곰은 대하산을 떠나려 했지만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불곰이 깨졌다는 소문을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소년의 또 다른 활약에 의해 대하산의 짐승들은 소년의 무서움을 처절히 느꼈다.
 여산에서 불곰과 쌍벽을 이루는 대하산의 패자 백호와 소년이 붙은 그날, 대하산의 모든 짐승들은 소년을 우러러 보아야 했다.
 그나마 불곰은 오래 버틴 것이었다.
 백호 또한 자신도 이기기 어려운 불곰이 소년에게 깨졌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지라 처음부터 자신의 주특기인 앞발 내려찍기를 시도했다.
 이제껏 백호의 앞발에 걸려 살아남은 동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강맹하고 빠른 백호의 앞발 공격은 진정 무서웠지만 소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허공을 날아올라 앞발을 아래로 내려찍는 백호의 복부를 정확히 몽둥이로 찌르는 소년이었고, 백호는 호랑이의 자존심으로서는 도저히 뱉어 낼 수 없는 비명을 마구 질러 대며 그 자리에 무너졌으며, 더 이상의 대결은 무의미했다.
 그날 백호는 소년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눈에 보이면 껍질을 벗겨 동굴 바닥에 깔아 버린다는 무지막지한 협박을 들은 후 대하산에서 백호를 본 동물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한 소식통에 의하면 백호는 온몸의 뼈가 성한 게 하나도 없어 그 뼈가 다 붙는 시간만 두 달이 걸렸고 뼈가 다 아물자 대하산을 떠났다고 했다.
 
 늑대는 진정 몰랐었다.
 산에 쓰러져 있는 토끼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가?
 저 토끼 놈이 왜 쓰러져 있는지는 알 필요도 없었고 먼저 보는 짐승이 임자인 건 당연한 대하산의 법칙이었으니, 늑대의 입장에서는 그 먹음직스러운 토끼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자연스럽게 토끼로 배를 채운 늑대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이었다.
 길가에 쓰러져 있던 그 토끼의 주인은 존재했고, 그 주인이 하필이면 늑대의 입장에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그 대하산의 패자인 소년이었던 것이다.
 마주치는 순간 모든 상황을 파악한 늑대는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만일 지금 저 소년에게 걸린다면 뼈도 추리지 못하는 고문을 받을 게 자명한 일이었기에 이 길로 대하산을 떠나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뒤를 쫓던 소년이 포기를 한 듯, 늑대의 귀에 소년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너 빨간 털! 내 눈에 띄면 죽을 줄 알아!”
 늑대는 소년의 고함 소리에 자신의 털 사이로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더욱 속도를 냈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늑대를 바라보는 소년의 입에서 짜증이 잔뜩 담긴 소리가 나왔다.
 “뭘 먹지? 배고파 죽겠는데, 씨…….”
 그렇게 투덜거리며 돌아서는 소년의 헝클어진 머리칼이 엉덩이에 닿을 듯했고, 머리칼 밖으로 드러난 소년의 어깨와 몸이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물고기라도 잡아먹어야겠다.”
 소년이 대하산의 깊은 계곡인 절혼계곡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 자리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얼마 전 백발의 노인과 오십 냥의 내기를 하던 그 노인이 아니던가?
 ‘저놈이다. 저놈이라면 백가 놈의 자존심을 확 무너뜨리고도 남을 것이다. 백가 이놈! 오 년 후 네놈의 똥 씹은 얼굴이 내 눈에 선하다. 흐흐.’
 그렇게 소년의 뒤를 따르는 노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제2장 검성 백무경
 
 “공가야!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네놈은 내 손안에 있다.”
 자신의 유일한 적수이자 친우인 사도련의 초대 련주였던 공사혁을 떠나보내는 정파무림 원로 백무경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놈아! 이미 삼 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난 이미 제자로 점찍어 둔 놈이 있단 말이야. 어디 자질 좋은 제자 놈이 하루아침에 구해진다냐? 승리는 당연히 나의 것! 크하하하하!’
 ‘검성 백무경.’
 무림맹에서 그에게 맹주의 자리를 권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정파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고수인 그가 사도련과의 정사대전이 일어날 무렵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자 정파무림맹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도련은 사도련주 사황 공사혁을 구심점으로 강하게 뭉쳐져 있었기에 무림맹에서도 무림맹을 단합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그가 사라져 버렸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구대문파와 무림세가들의 갈등으로 인해 무림맹주 또한 허울뿐인 시기였기에 그의 부재는 정사대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림맹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사도련 또한 별다를 바가 없었다.
 사도련의 하늘이신 사황께서 또한 자취를 감추었으니 검성 백무경이 버티고 있는 정파무림맹을 어찌 이겨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무림맹과 사도련은 자신들의 중심이 사라진 걸 서로 감추면서 정사대전을 피할 궁리를 했으니 정사대전이 일어날 일은 만무했다.
 당시 사황 공사혁과 검성 백무경은 대하산 자락에서 비무를 하기로 약속했고, 그 비무를 통해 자신들의 모든 행보를 결정하기로 했다.
 사황 공사혁은 정파무림맹을 쓰러뜨리려면 검성을 먼저 제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로서는 검성의 벽을 넘지 못한다면 정사대전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정파니 사파니 하며 무림을 분열시킨 건 정파무림이라고 생각하는 공사혁은 사실 자신들의 사도련이 어두운 세계를 장악하거나 민초들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련에 몸을 담은 자가 가끔 과거에 나쁜 일을 행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사마의 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천하제일의 자존심을 가진 공사혁이 그걸 두고 보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에게 있어서 무림 일통이니 중원 장악이니 이런 말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며 단지 사도련의 힘이 너희 정파보다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을 뿐이었다.
 ‘힘이 있음에도 참고 있으니 쓸데없이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
 단순하게 본다면 이런 뜻이었던 것이다.
 검성을 제압한다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효과를 만들어 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검성이 자신의 손 아래 무너지면 무림맹 또한 더욱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공사혁의 생각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둘의 비무는 천 초를 넘어섰지만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검성의 검이 사황을 벨 듯하면 사황은 사라졌고, 또한 사황의 장력이 검성을 덮을 듯하면 검성은 막아 내었다.
 결국 그들은 정사대전에 관여치 않기로 약조했고, 혼자서 은거하면 외롭다는 이유로 둘이서 함께 은거하기로 마음을 먹고 대하산 계곡에서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다른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검성 백무경은 늘 검만이 진정한 무공이라며 주장했고, 사황 공사혁은 사나이가 병기를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조잡스럽다며 그 말을 받아쳤으니, 둘은 늘 티격태격하며 그렇게 사십 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다.
 중원무림에서는 사라진 그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자 두 사람이 천하제일을 논하다 양패구상(兩敗俱傷)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지만 한편에서는 아직 살아 계실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사십 년이란 세월의 흐름 속에 여러 번의 비무를 가져 봤지만 끝내 승부를 가릴 수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 바로 제자들의 비무였다.
 자신들의 무공에만 전념하던 그들에게 있어서 제자를 두어 겨룬다는 것은 자신들의 무공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새로운 구상이었고 또한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오십 냥이라는 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금액이었지만 자신들의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제자가 진다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어차피 사황이나 검성의 무공이 어느 누구가 우위라고는 말하기는 어렵기에 이번 대결을 승리는 제자의 자질에 따라 승부가 가름이 난다고 보는 게 정확했다.
 사황의 얼굴을 생각하며 승리를 확신하는 백무경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놈을 눈여겨보기를 정말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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