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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공자 1권

2015.06.19 조회 10,594 추천 147


 서장
 “공자님! 공자니임!”
 곽우진은 멀리서 들려오는 막철의 외침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이 또 무슨 건수를 가져오느라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지…… 쯧.”
 “공자님! 허억! 허억!”
 막철은 한동안 숨을 헐떡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막철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지인짜 예쁜 여자라고요! 공자님 평생에 볼 일 없을 것 같은 그런 여자라니까요! 얼른 안 가시고 뭐 하십니까! 서두르세요! 얼른요! 얼른!”
 곽우진이 어이없는 눈으로 막철을 쳐다봤다.
 “네놈이 날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아주 똑똑히 알겠구나. 내가 이래봬도…….”
 “아, 진짜! 알았다니까요! 얼른 오기나 하세요!”
 막철은 곽우진의 팔을 잡아끌다시피 했다. 곽우진도 못 이기는 척 막철을 따라 서둘러 걸었다.
 ‘예쁜 여자라…….’
 절로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여자랑은 정말 인연이 없다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드디어 인생에 꽃이 피려나 보다.
 막철을 따라 접객실로 들어가니 정말 장님이 눈을 번쩍 뜰 정도로 예쁜 여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어떻습니까? 공자님. 제 말이 맞죠? 공자님이 백 년을 살아봐야 저런 여자랑 말 한 번 붙여보겠습니까? 얼른, 얼른 가서 확 자빠뜨려 버리십쇼.”
 막철이 조용히 말한답시고 곽우진의 귓가에 대고 말했지만, 접객실이 워낙 조용했고, 또 앉아있던 여인, 하예설의 무공이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는지라 아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저런 사람들을 믿어도 되는 걸까?’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결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인지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예설이라고 합니다.”
 “크흠, 큼. 에…… 곽우진이오.”
 두 사람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리고 막철이 곽우진 옆에 서서 히죽히죽 웃으며 곽우진과 하예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막철이었다. 막철은 곽우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아, 공자님. 뭐 하고 계십니까. 대화를 시도하셔야지요, 대화. 아 이거 대신 해드릴 수도 없고 답답하네.”
 곽우진이 막철의 코앞에 주먹을 슥 들어올렸다.
 “네놈을 보고 있으니 왜 이렇게 주먹이 근질근질한지 모르겠구나.”
 “에헤헤헤. 긁어드릴까요?”
 막철은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리고 곽우진이 눈을 한 번 더 부라리자, 불퉁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예설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척 보기에도 주인과 몸종의 관계 같은데 어찌 저렇게 예의가 없단 말인가. 정말 이대로 그 얘기를 꺼내도 될지 또 한 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이제 우리 얘기에 집중합시다. 난 소저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날 찾아온 이유가 뭐요?”
 하예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곽우진은 의아한 눈으로 그 서찰을 받아 찬찬히 읽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저, 정혼? 그러니까 소저와 내가 정혼한 사이라 이겁니까?”
 하예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저도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그걸 가지고 왔을 뿐이니까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크게 내키지 않고요.”
 곽우진은 서찰을 모두 읽은 다음 그것을 품에 잘 챙겨 넣었다. 그 서찰의 필체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여간…… 고마우셔라.’
 하예설의 얼굴을 다시 확인한 곽우진이 히죽 웃었다. 자신이 대체 어디 가서 저런 미녀를 만나볼 수나 있겠는가.
 “그…… 뭐, 아, 아버지의 유언이니 그래도 아예 무시할 순 없지 않겠소?”
 하예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리 그래도 본인도 모르는 약속을 강요할 순 없죠. 어쩌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를 일인데…….”
 “위험? 소저와 정혼을 하는 일이 왜 위험하다는 거요?”
 “제가 위험한 상황이니까요.”
 곽우진이 손뼉을 짝 쳤다.
 “아하! 그러니까…… 도와 달라는 거군!”
 곽우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합시다.”
 “예?”
 “합시다. 정혼. 뭐, 혼례는 좀 더 서로를 알아간 다음에 하는 걸로 하면 되지 않겠소?”
 하예설의 표정이 굳어졌다.
 “위험할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을 매정하게 돌려보낼 순 없지 않겠소? 부탁할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온 것 아니오?”
 “그건…….”
 곽우진이 손사래를 쳤다.
 “아아, 됐소. 자잘한 얘기야 들으나 마나니까.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으신 분이니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니리라 믿소.”
 하예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뭐…… 정혼자인 척 해주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대충 어려운 일 해결되면 알아서 물러나 주겠소.”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고 한 번 더 씨익 웃었다.
 “나 아주 깔끔한 놈이오. 나중에 질척하게 달라붙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렇게 혼자 앞으로 쭉쭉 달려 나가는 곽우진을 보며 하예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대체 왜 위험하다는 거요?”
 곽우진의 물음에 하예설이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북천하가의 후계자가 되었거든요.”
 “북천하가? 잠깐…… 그 북천하가가 혹시 내가 요즘 자주 듣던 그 북천하가는 아니겠지?”
 “아마…… 맞을 걸요?”
 “에이, 설마 천하제일가문이라는 그 북천하가는 아닐 것 같은데?”
 “아마…… 그것도 맞을 걸요?”
 “내가 알기로 거기 후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아마…… 다섯 명이 있다고 했던가?”
 “제가 그 중 다섯 번째일 걸요?”
 “에이, 다섯 번째는 기반도 거의 없고 완전 개털이라고…….”
 하예설의 표정이 살짝 서글퍼졌다.
 “아마…… 그럴 거예요.”
 그 표정을 본 곽우진이 뒷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뭐, 별 것도 아닌 걸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
 어느새 자연스럽게 말을 놓은 곽우진이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 잘 해보자고.”
 하예설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자신이 한 얘기를 다 듣고도 이렇게 허락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천천히 곽우진의 손을 잡았다.
 곽우진은 그녀의 손을 꽉 쥐고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 손을 잡은 이상, 북천하가의 차기 가주는 너로 결정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마음의 준비나 단단히 하고 계셔.”
 하예설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정말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잠시 멍하니 그 미소를 바라보던 곽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손, 절대 놓지 마. 네가 먼저 놓지 않으면 내가 놓을 일은 없을 테니까.”
 곽우진의 말에 하예설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야야야야! 놔! 놔!”
 하예설이 깜짝 놀라 손을 놨다. 곽우진이 자신의 손을 후후 불었다.
 “아오, 손뼈 다 나가는 줄 알았네. 무슨 여자가 그렇게 힘이 세?”
 하예설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무공…….”
 “어허! 무슨 소리! 익혔어! 익혔다고! 십대고수든 우내삼성이든 다 오라고 해!”
 곽우진은 갑자기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내가 천하제일인이다!”
 하예설은 순간 저 사람을 과연 진짜 믿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감돌았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북천하가
 
 “우와! 우와! 여기가 말로만 듣던 거기로군요. 우와! 우와!”
 막철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큰 소리로 떠들자, 옆에서 나란히 걷던 곽우진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컥! 공자님! 대체 이게 무슨 만행입니까! 걸어가던 사람 뒤통수를 후리다니요!”
 “후리는 게 뭐냐? 후리는 게. 너도 이제 북천하가에 들어갈 몸인데 체통이란 걸 좀 지켜보는 게 어떠하냐?”
 “체, 체통이요?”
 막철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곽우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왜요?”
 곽우진이 인상을 팍 쓰자, 막철이 즉시 말을 바꿨다.
 “암요. 지켜얍죠. 대 북천하가의 후계자와 정혼하신 분을 모시는 사람이 당연히 체통을 지켜얍죠. 암요.”
 “에휴. 내가 앓느니 죽지. 됐다. 그냥 조용히나 해라.”
 “예?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십니까? 저 이래봬도 품격 있는 하인입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제발 그 입 좀 닥치거라. 내 주먹맛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곽우진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막철은 그대로 합죽이가 되었다.
 “헙!”
 곽우진은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하예설을 쳐다봤다.
 하예설은 웃고 있었다. 곽우진과 막철의 대화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웃지 않았으리라.
 “노리는 사람 없었어?”
 “예?”
 하예설이 흠칫 놀라며 곽우진을 바라봤다. 곽우진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또 웃음이 나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만 해도 이렇게 자주 웃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예쁜데 노리는 남자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
 하예설이 쓴웃음을 지었다.
 “있죠. 제법…….”
 하지만 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었다.
 하나같이 자신의 몸을 한 번이라도 안아보고 싶어서 안달 난 놈이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북천하가에 자리를 잡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놈들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자신에게 접근한 사내 중 제대로 된 사람이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놈들 표정 한번 보고 싶군.”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하예설의 허리에 손을 척 둘렀다. 하예설은 깜짝 놀라 몸을 빼려다가 멈칫하고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정혼한 사이다. 이미 이곳 북천하가에 오기 전에 연락을 넣었고, 아마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이 손을 피하면 꼴이 우스워질 수도 있었다. 하예설과 곽우진 둘 다 말이다.
 그렇게 하예설이 잠시 머뭇거릴 때 일단의 무리가 앞으로 다가왔다.
 “하 각주, 드디어 오셨군요.”
 무리를 이끄는 위치에 선 준수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예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그는 하예설에게 인사를 한 다음 시선을 곽우진에게로 돌렸다. 그의 눈빛에 잠깐 살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이쪽이 소문의 그 정혼자이신가 보군요.”
 사내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하예설의 허리에 얹힌 곽우진의 손에 가 있었다.
 “한데…… 참으로 다정해 보이는군요.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곽우진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하예설이 곽우진의 몸에 더 가까이 밀착되었다.
 하예설은 놀랐지만 반항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일단 그저 받아들였다. 아니,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없이 머리만 굴렸다.
 “남녀가 애정을 확인하는 데에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지.”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사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자신이 몇 년을 공들여도 얻지 못한 것을 그저 정혼자라는 위치 하나로 얻은 놈이라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그럼, 여독도 푸셔야 할 텐데 이만 가보시지요. 저도 일이 바빠서…….”
 사내가 냉랭한 기운을 풍기며 하예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이끌던 무리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쏟아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곽우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사내의 뒤통수를 쳐다보고는 툭 말을 던졌다.
 “저 놈은 몸을 노리던 쪽이로군.”
 하예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빛은 금세 걱정으로 물들었다.
 “설마 일부러 이러신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하예설의 허리에 얹혔던 곽우진의 손이 사라져 있었다.
 “저 사람은 참마단(斬魔團)의 부단주예요. 북천하가의 후기지수 중에서 손꼽히는 강자라고요.”
 곽우진이 씨익 웃으며 하예설의 머리를 슬쩍 헝클어 주었다.
 “걱정해주는 거야? 이거 고마운데?”
 “농담하는 게 아니라고요!”
 “알았어, 알았어. 앞으로 조심하면 되잖아.”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싱글벙글이었다. 척 보기에도 절대 조심할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걸 보며 하예설의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 차 버렸다.
 ‘내가 과연 잘 한 걸까?’
 처음 곽우진을 찾아갈 때는 반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자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버지가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걱정스러웠다.
 ‘내가…… 이 괴물 같은 북천하가에서 저 사람을 지킬 수 있을까?’
 어쩌면 짐을 떠안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지금까지의 곽우진을 보면 분명히 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짐이 아니었다. 그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아무것도 못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전처럼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켜낼 거야. 반드시.’
 하예설의 눈이 결연함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걸 본 곽우진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또 한 번 헝클었다. 이번에는 좀 심하게.
 “아이 참, 진짜 뭐 하시는 거예요?”
 하예설이 참지 못하고 빽 소리치자, 곽우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왠지 너무 진지해 보여서. 우리 가볍게 가자고, 가볍게.”
 뭔가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마음은 좀 편해졌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힘을 가졌다. 그래서 이렇게 웃음을 되찾은 것 아니겠는가.
 하예설은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곽우진이 나직이 말했다.
 “저놈은 네 지위를 노리던 놈인가?”
 그 말에 하예설이 깜짝 놀라 앞을 바라봤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는데,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데 그의 시선은 하예설을 향하지 않았다. 그녀 옆에 있는 곽우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눈빛으로 꿰뚫어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재밌네. 재밌어. 앞으로 저런 놈들이 수두룩하게 나타나겠지?”
 “아마도요.”
 하예설은 또 새삼스럽게 곽우진을 바라봤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서도 절대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았으면 소변이라도 지렸을 것이다.
 “자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자고. 보아하니 덜떨어진 놈 같은데. 차라리 아까 그놈이 세 배는 나아보이네.”
 어느새 곽우진 일행이 차가운 표정의 사내를 스쳐지나갔다. 그는 지나가는 곽우진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네놈에 대한 조사는 끝났다. 살고 싶으면 사흘 내로 여길 나가.
 곽우진은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쳐다봤다.
 “아주 고마운 충고로군. 그런데 정말로 나에 대한 조사가 끝났어?”
 사내는 곽우진이 대놓고 하는 말에 잠깐 당황하며 하예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곽우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사내는 고개를 돌려 하예설을 바라봤다.
 “하 각주님, 오셨단 소식은 들었습니다.”
 사내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곽우진이 괜한 시비를 거는 걸로 보일 것이다.
 “아님 말고.”
 곽우진이 별로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 버리자, 순간 사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아무것도 아닌 놈에게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사내는 전음을 통해 화를 쏟아 부었다.
 -보아하니 사흘도 길게 준 것 같군. 오늘 중으로 떠나라.
 곽우진은 뚱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지나가는 개가 짖느냐는 표정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하예설도 이쯤 되니 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긴 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하예설이 곽우진 앞으로 나서며 사내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사내, 차무환은 하예설의 표정과 말투에 당황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전 아무것도…….”
 “방금 전음을 보내셨죠? 제가 모를 줄 알았나요?”
 물론 무슨 내용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전음을 보냈다는 사실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차무환은 더 당황했다. 아직 그는 하예설에 비해 한참이나 모자란다.
 하예설이 비록 북천하가의 다섯 후계자 중에 가장 뒤떨어진 상태라지만, 그래도 후계자는 후계자였다. 또한 정보조직인 은월각(隱月閣)의 각주이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 은월각의 모든 걸 휘어잡지는 못했다. 명목상의 각주에 가까웠다. 그래도 지위가 갖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차무환이 하예설보다 나은 건 딱 하나 무공뿐이었다. 그나마도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직전에 곽우진이 나섰다.
 “별 얘기 아니었으니까 그만 해.”
 곽우진은 하예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렇게 말하고는 차무환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얄미운지 차무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중에 둘이서 술이나 한 잔 하자더군. 뭐…… 굳이 전음으로 한 건 네 눈치가 좀 보여서 그런 것 같고.”
 하예설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절대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었다.
 “어? 뭐야?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정말로 내가 정혼녀 눈치나 살피는 그런 남자가 되길 원하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하예설이 한 발 물러났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차무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하예설이…… 저렇게 쉽게…….’
 차무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상황만 보자면 하예설이 진심으로 저 덜떨어진 사내에게 마음을 연 것 같지 않은가.
 ‘설마…… 정말로 좋아하는 사이가 된 거야? 고작 열흘 사이에?’
 차무환의 표정을 확인한 곽우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곽우진은 그에게 다가가 힘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럼, 힘내라고.”
 곽우진은 보란 듯이 하예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차무환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지금까지 세워왔던 모든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이내 차무환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는 독기가 스며든 눈으로 하예설과 곽우진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 순간 두 사람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막철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차무환의 가슴에 더 큰 불길이 화르르 타올랐다.
 
 * * *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하예설은 오늘 벌어진 일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쉽지 않은 일이 계속될 것이다.
 계획도 필요하고 마음도 다잡아야 한다. 그녀는 문득 곽우진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곽우진은 하예설의 허리춤을 힐끗 힐끗 훔쳐보고 있었다.
 왜 이러나 싶었지만 처음에는 그냥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게 계속되니 결국 참다못한 하예설이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그게…… 혹시 그 검, 소중한 거냐?”
 곽우진이 하예설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슬쩍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써 왔던 검이니 소중하다면 소중한 검이죠. 왜요?”
 “아…… 그래. 소중한 검이었구나…….”
 곽우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막철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아오! 답답해! 그러니까 아가씨. 만일 그 검이 부러지거나 하면 눈물이라도 쏟으실 거 같습니까?”
 “예? 검이 부러졌다고 울어요? 왜요? 그냥 버리고 새 걸 구하면 되지.”
 막철이 알았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소중한 검은 아니다…… 그 말입니까?”
 “뭐…… 꼭 따지자면 그렇게 되나요?”
 하예설은 대답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왠지 막철을 대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왜 저 하인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거지?’
 그녀의 생각은 곽우진의 표정을 보며 깨끗하게 지워졌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환한 미소가 곽우진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그래도 명색이 정혼자인데 그냥 넘어가기가 그래서…… 증표랄까.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선물을 하나 마련했는데…….”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지금까지 등에 메고 있던 것을 풀어 슬그머니 내밀었다.
 길쭉한 상자였는데, 하예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검?’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설마 남자에게서 검을 선물 받을 줄이야.
 지금까지 선물을 준 사람은 많았지만 다들 귀한 보석이나 장신구 같은 자신에게 있어서 별 쓸모없는 것들만 잔뜩 주곤 했다.
 한데 검이라니.
 “정말 고마워요. 이런 선물은 난생 처음인 것 같아요.”
 하예설이 환하게 웃자, 곽우진이 크게 웃으며 상자를 내밀었다.
 “으하하하! 내가 안하면 모를까, 한번 하면 또 끝내주거든. 으하하하!”
 하예설은 상자를 받아 그것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예상했던 대로 눈부신 자태를 간직한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그녀의 눈이 처음에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가 점점 커다래졌다. 검신 아래쪽에 새겨진 글을 발견한 것이다.
 이내 그녀의 눈은 경악의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 이 검은……!”
 
 
 “크흠. 뭐…… 아낀다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들고 다니는 검이 영 부실해 보여서…… 안 그래도 위험하다고 하고…… 에잇! 아무튼 그럭저럭 쓸 만한 놈이니까 잘 써!”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휘적휘적 앞질러갔다.
 하예설은 그런 곽우진의 등과 상자 안에 든 검을 번갈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럭저럭 쓸 만?”
 “아가씨께서 이해해 주십쇼. 제대로 된 물건을 구할 시간도 없었잖습니까.”
 막철도 휘적휘적 앞질러 갔다.
 하예설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서 상자 안에 든 검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그 검을 집어 들었다. 상자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상자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분명해. 이건…… 암야(暗冶)의 검이야.’
 암야는 환상의 장인이었다. 그가 세상에 등장한 것은 불과 십 년 남짓이었다. 물론 그를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열 개의 검은 전설의 증명처럼 남아 무림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무기만으로도 절정고수를 애먹일 수 있다는 전설의 무기가 바로 암야의 작품이었다.
 한데 그 암야의 검이 지금 하예설의 손에 있었다.
 ‘게다가…… 이건 열한 번째 검이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암야의 검이었다. 이것이 암야의 검이라는 걸 증명하듯 검신 아래쪽에 암야라는 글이 유려한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찼던 검을 풀어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암야의 검을 그 자리에 찼다.
 전율 한 가닥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정수리를 통해 빠져나갔다.
 하예설은 힘차게 걸었다. 어느새 그녀는 곽우진 옆에서 나란히 발을 맞추고 있었다.
 “고마워요.”
 곽우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깟 걸로 고맙긴. 뭘.”
 “그런데…… 전 지금 드릴 게 하나도 없네요. 미안해요.”
 그 말에 곽우진이 당황해 다시 고개를 돌려 하예설을 쳐다봤다. 그의 뺨에는 살짝 홍조가 남아 있었다. 부끄러워했던 게 분명했다.
 “어? 그, 그런 의미로 준 게 아닌데. 그, 그러니까…….”
 하예설은 그런 곽우진에게 환하게 웃어 주었다.
 “고마워요.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어? 어. 그, 그래.”
 곽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뭔가 불의의 일격을 당한 느낌이었다.
 그의 눈에 사뿐사뿐 걸어가는 하예설의 뒷모습이 보였다.
 “와…… 이거 잘못하다간 홀딱 넘어가겠는데요? 안 그렇습니까? 공자님? 에헤헤헷.”
 곽우진은 말없이 막철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빠악!
 “으악! 공자님! 대체 왜 이러시냐고요!”
 곽우진은 그런 막철을 보고 빙긋 웃어준 다음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눈독 들이지 마라, 이놈아.”
 막철이 어이없는 눈으로 그런 곽우진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와! 나! 이거! 어이가 없네.”
 물론 그 뒷말은 더 잇지 못했다. 곽우진이 주먹을 들어 올렸으니까.
 “에헤헤헤. 왜요? 또 주먹 가려우세요? 긁어드려요?”
 
 * * *
 
 “후우우.”
 하예설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수십 수백 번이나 만난 사람이지만, 만날 때마다 긴장을 잠시도 놓을 수 없었다.
 그녀의 백부이자 북천하가의 가주인 하태웅의 앞에 있으면 마치 칼로 피부를 저미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혼자만 버텨도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주 앞으로 함께 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뭘 벌써부터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 저 전각 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면서?”
 곽우진의 말에 하예설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올 때마다 이러네요.”
 곽우진과 몇 마디 말을 나누다보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안정되고 긴장이 풀려 나갔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그럼 안 되는데? 이 백옥 같은 얼굴에 흠이 있으면 안 되지.”
 곽우진이 손바닥으로 얼굴 곳곳을 문질러 닦자, 하예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풋 웃었다.
 “안 묻었어요. 괜찮으니까 우리, 이제 가요. 그냥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알았죠?”
 “나하고 제일 안 어울리는 말이 뭔지 알아?”
 “예?”
 “근심, 걱정, 긴장. 내 머릿속에 없는 단어지.”
 “푸훗. 알았어요.”
 하예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각에 들어설 수 있었다.
 가주가 머무는 전각은 전체가 기관진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하더라도 쉽게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기관진식이었다.
 “이 전각은 광괴서생(狂怪書生)이 설계했다고 해요.”
 “별호만 들어도 미친놈이라는 걸 딱 알 수 있는 놈이로군.”
 “아마 광괴서생을 그냥 미친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일 거예요.”
 광괴서생은 기관진식의 천재라는 사람이다. 게다가 설계만 하고 직접 만드는 데는 참여하지 않는 걸로도 유명했다.
 당연히 그에 대해서는 그가 설계한 기관진식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었다.
 “이제 다 왔어요.”
 하예설은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말했다. 그러자 곽우진이 중얼거렸다.
 “우리 막철이가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냥 데리고 올걸 그랬나?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고치고 다니면 곤란한데…….”
 하예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곽우진을 바라봤다.
 특이한 사람이라는 건 익히 경험했으니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정말로…… 긴장이나 걱정이 없는 사람 같아.’
 하예설은 일단 이 사람에 대한 걱정을 안으로 곱게 접어 넣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문 앞으로 한 발 더 다가갔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누군가 열어주는 게 아니라 기관진식의 힘으로 열린 것이다.
 열린 문을 통해 가주인 하태웅이 집무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수천 개의 칼날이 피부를 착착착 저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분이야?”
 곽우진이 먼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걸 본 하예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여긴 이렇게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는 곳이다.
 “자, 잠깐…….”
 곽우진은 하예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안으로 살짝 당겼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가주의 집무실 안에 들어와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하예설은 놀란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가주의 집무실은 아주 특별했기에 항상 기관진식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가주의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기관이 발동할 테니까 말이다.
 한데 기관이 발동하지 않은 걸 보면 가주가 미리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한데 전혀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기관이 고장 난 모양이구나. 하긴, 슬슬 한 번쯤 손을 볼 때가 되긴 했지.”
 하태웅의 말에 하예설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주가 미리 손을 쓴 게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였다.
 ‘미리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너무 긴장했어.’
 아니, 너무 긴장이 풀어졌다. 곽우진과 얘기를 하다 보니 그런 중요한 걸 잊을 정도로 긴장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태웅은 담담한 눈으로 하예설과 곽우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눈빛이 담담하다고 해서 기세마저 그런 건 아니었다. 하예설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네게 정혼자가 있었단 얘기를 듣고 참으로 놀랐다.”
 하태웅은 그렇게 말하고는 곽우진의 모습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훑었다.
 “한데 의외로구나. 저렇게 평범한 사람을 네가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설마 포기한 것이냐?”
 하예설은 고개를 들고 하태웅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말이 어찌나 단호하고 박력 넘쳤는지 하태웅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하태웅은 잠시 하예설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곽우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곽우진은 빙긋 웃으며 하태웅의 시선을 받았다. 그 모습에 하태웅의 눈빛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정말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게 맞나?’
 의문은 떠오름과 동시에 사라졌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익혔다면 오히려 저렇게 담담할 수 없을 것이다.
 하태웅은 차가운 눈으로 곽우진을 향해 말했다.
 “잠시 설아와 얘기하고 싶으니 잠시 나가 주겠나?”
 “뭐, 그러죠.”
 곽우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하예설이 몸을 살짝 떨었다.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이 자리에 혼자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하태웅의 기세에 짓눌린 것이다.
 곽우진은 그런 하예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예설이 놀란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보자, 그는 그녀의 손을 허리춤에 있는 검에 올렸다. 암야의 검에 말이다.
 순식간에 긴장감이 사악 녹아 버렸다. 하예설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검과 곽우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곽우진이 선물한 암야의 검은 정말로 놀라웠다. 그 검을 손에 쥔 순간 하태웅의 기세에 눌려 들끓던 내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곽우진은 그런 하예설을 보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힘내라는 듯이.
 하예설은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곽우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등이 점점 더 커다란 모습으로 자신의 뇌리에 다가와 박히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거…… 암야의 검이로구나?”
 하태웅의 말에 하예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정혼 선물로 받았습니다.”
 “정혼 선물이라…… 과하구나.”
 하예설은 대꾸하지 않았다. 확실히 암야의 검은 과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가 버틸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설마…… 열한 번째 검이더냐?”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태웅의 눈이 번득였다.
 “암야의 열한 번째 검이라…… 그냥 과한 정도가 아닌 것 같구나.”
 암야의 검은 뒤로 갈수록 더 훌륭했다. 첫 번째 검과 열 번째 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데 열한 번째가 나왔다. 아마 그것은 열 번째 검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암야의 검이 그래왔듯이 말이다.
 하태웅은 북천하가의 가주다. 북천하가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천하에 흐르는 정보의 중심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나온 암야의 검은 모두 그 주인이 명확했다. 당연히 하태웅은 모든 사람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태웅은 탁자 옆에 놓인 자신의 검을 스윽 쓰다듬었다.
 그의 검이 바로 아홉 번째 암야의 검이었다. 이 검을 얻고 십 년 동안 막혀 있던 벽을 허물 수 있었다. 암야의 검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욕심이 일었다.
 하태웅은 자신의 검을 쓰다듬으며 욕심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명검에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네 정혼자를 가문에 들일 생각이냐?”
 “네.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람도 같은 생각이더냐.”
 “네.”
 하예설의 단호한 대답에 하태웅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암야의 검 때문인가?’
 기질이 달라진 것 같았다. 사람이 저 정도로 크게 변하는 건 쉽지 않다.
 하태웅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지우면서 말을 이었다.
 “무위도식하게 할 생각은 없다.”
 하예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다물고 하태웅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태웅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 달의 유예기간을 주마.”
 유예기간이라는 말에 하예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유예한다는 말인가.
 “원하는 자리를 직접 찾아보라고 해라. 스스로 능력을 증명해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태웅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예설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고작 그 정도도 안 되는 위인이더냐?”
 하예설은 하마터면 하태웅의 도발에 발끈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암야의 검에서 차가운 기운이 일었다.
 정말 놀라운 검이었다. 하예설은 정신이 번쩍 들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함부로 대꾸해선 안 된다.
 ‘가주의 결정을 번복하려면 장로원에서 나서는 수밖에 없어.’
 그건 불가능하다. 장로원이 고작 일개 후계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가주와 대립하지는 않을 테니까.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구나. 이만 나가 보거라. 아, 네 정혼자를 좀 보고 싶구나. 따로 얘기할 것도 있고.”
 하예설은 자신도 없는 곳에서 곽우진이 홀로 하태웅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부디…… 부탁드려요. 백부님.”
 가주라 하지 않고 백부라 칭한 것은 개인적인 부탁을 드린다는 뜻이었다.
 하태웅은 씨익 웃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다.
 하예설이 밖으로 나가자 하태웅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거…… 좀 재미있어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때, 집무실 문이 살짝 열리고 사람 얼굴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곽우진이었다.
 “들어가도 됩니까?”
 곽우진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뭐지? 이 불쾌한 기분은?’
 하태웅은 갑자기 복잡해진 기분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고개만 안으로 들인 곽우진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혼자서 닫힌 문을 열었어?”
 
 곽우진의 선택
 
 “이거 문이 너무 부실한데요?”
 곽우진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며 흔들었다.
 그때마다 문짝이 힘없이 팔랑거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광괴서생의 기관진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건 그냥 두고 좀 더 가까이 오게.”
 하태웅은 그렇게 말하며 문밖에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하예설을 바라봤다.
 원래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문짝이 망가지는 바람에 곽우진과 단둘이 대면하려던 계획이 무너졌다.
 곽우진은 하태웅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한데 그저 몇 발 다가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게 아닌가.
 그걸 본 하예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멈춰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가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건 기관진식의 칼날에 몸을 들이미는 거나 다름없었다.
 한데 기관진식은 이번에도 발동하지 않았다.
 곽우진은 하태웅과 서탁 하나를 놓고 마주섰다.
 “그래도 정혼녀의 집안어른을 뵈러 온 건데 맨손으로 올 수는 없잖습니까?”
 곽우진은 품에 손을 넣었다. 순간 사방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가주를 지키기 위해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암영단(暗影團)이 보내는 살기였다.
 곽우진은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우, 왜 이 중요한 순간에 소변이 마렵냐.”
 그는 얼른 품에서 작은 목갑을 꺼내 탁자에 내려놨다.
 “급해서 그러는데 이제 가도 될까요?”
 여전히 살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하태웅은 어이없는 눈으로 곽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곽우진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후다닥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하예설의 손목을 턱 잡더니 그녀를 끌고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하태웅은 곽우진과 하예설이 있던 자리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대대적인 공사를 할 때가 된 것 같군.”
 광괴서생에게 다른 설계도를 주문해서 가주전을 새로 짓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좀 더 좋은 장인들을 모아서 말이다.
 
 * * *
 
 “운이 좋았어요. 다음부터는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아셨죠?”
 하예설은 가주전에서 나오자마자 곽우진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걸로 봐서 얼마나 긴장을 했고 불안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아!”
 하예설은 폭풍 같은 잔소리를 쏟아내고는 곽우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 곽우진의 어깨에 몸을 지탱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곽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보고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은 이제 그만 하고……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예?”
 하예설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곽우진을 바라봤다. 할 말? 자신이 저 사람한테 할 말이 뭐가 있을까?
 “아! 맞다!”
 “그래. 생각났어?”
 하예설이 침울한 표정으로 곽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주님께서 당신이 직접 찾으래요.”
 “직접 찾아? 뭘?”
 그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당신이 몸담을 조직이요.”
 “오오! 조직! 단어만으로도 온몸이 찌릿찌릿해지는데? 그럼…… 오랜만에 조직 생활을 즐겨볼까?”
 곽우진은 더 설명을 듣지 않고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뭐해? 나 아직 숙소가 어딘지도 모른다고.”
 “아, 네.”
 하예설은 황급히 곽우진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걸었다. 대체 왜 이렇게 서두르게 되고 휘둘리게 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막철이 이놈은 대체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물론 그 말투 어디에도 걱정이나 근심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 * *
 
 다음 날부터 곽우진은 북천하가 곳곳을 돌아다녔다. 물론 내원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곳은 철저히 북천하가의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곽우진이 들어갈 만한 조직은 전부 외원에 있으니 별 상관없었다.
 물론 그렇게 찾아온 곽우진을 환영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곽우진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하인들을 슥 훑어봤다.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먼지를 닦는 중이었다. 어느새 방에서 광이 번쩍번쩍 흘렀다.
 “기침하셨습니까!”
 하인 중 하나가 곽우진이 침상에서 일어난 걸 발견하고 다급히 허리를 꺾었다.
 그러자 나머지 하인들도 황급히 인사를 했다.
 곽우진은 그런 하인들을 가만히 보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막철이가 시켰구나?”
 그러자 하인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아, 아닙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이건 그저 저희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암요! 저희들의 순수한 마음을 의심치 말아 주십시오!”
 곽우진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알아들었다. 하여간 막철이 이놈 뭘 하고 돌아다니나 했더니 기특한 구석이 있어.”
 하인들은 곽우진의 입가에 흐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세, 세숫물을 대령할까요?”
 하인 중 하나가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곽우진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또 다른 하인 하나가 허겁지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물이 찰랑거리는 커다란 통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곽우진은 어느새 앞에 놓인 물에 가볍게 세수를 하고 방 한가운데 잘 차려진 아침식사를 천천히 음미하듯 즐겼다.
 하인들은 곽우진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빈 그릇을 깨끗이 치우고는 허겁지겁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곽우진이 찻물로 입을 헹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막철이 들어왔다.
 “헤헤헤. 공자님, 어떠셨습니까? 싹싹한 애들로 신경 좀 써서 보냈는데 마음에는 드십니까?”
 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은 마음에 드는데 좀 늦은 것 같다?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 말이야.”
 그 말에 막철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어! 공자님, 여기가 어딘 줄 잊으셨습니까? 북천하가입니다. 북천하가. 여기 하인이 남자만 삼백 명이라고요!”
 “그래서?”
 “우헤헤헤. 뭐 그렇다는 거지요.”
 곽우진은 코웃음을 한 번 쳐주고는 방을 나섰다.
 그러자 막철이 종종종 따라붙었다.
 “공자님, 이번엔 또 어딜 가시게요? 괜히 가봐야 싸가지 없는 놈들만 가득한데 그냥 대충 하시죠?”
 막철은 곽우진을 쫓아가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한 번씩은 다 봐야지.”
 “제가 벌써 다 둘러봤습니다. 참마단(斬魔團)이랑 묵룡검대(墨龍劍隊)가 그나마 좀 쓸 만하던데요?”
 “은월각은?”
 “아가씨가 각주로 있던 거기 말이죠? 쓰레기 소굴입죠.”
 “쓰레기?”
 “아가씨를 허수아비로 돌리고 지들끼리 알아서 다 해쳐먹으니 그게 쓰레기 아니면 뭡니까?”
 곽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이니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나저나 쓸 만하다는 기준이 뭐냐?”
 “그럭저럭 부려먹을 만하다는 거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놈들로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헤헤헤헤.”
 “그런 인형 같은 놈들은 재미없는데…… 가만, 참마단? 어째 이름이 익숙하다?”
 “에헤헤헤헤. 그런가요? 흔히 쓰이는 이름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곽우진은 그런 막철을 보며 씨익 웃었다.
 “헤헤헤헤. 공자님이 걸려들 거라고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냥 그런 놈들도 있다고 언급만 해드린 겁니다. 헤헤헤헤.”
 참마단은 하예설의 몸을 노리던 놈이 부단주로 있는 조직이다. 곽우진이 처음 북천하가에 온 날 마주친 놈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묵룡검대에도 뭔가 있지?”
 “에헤헤헤헤헤! 그럴 리가요.”
 “아마 거기 평대원 중 하나가 첫날 만났던 그놈이겠군. 그놈 무공 실력을 감안하면…… 조장쯤 되려나?”
 “역시 공자님이십니다. 에헤헤헤헤!”
 곽우진은 막철의 헤픈 웃음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막철은 등줄기를 쿡쿡 찌르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고, 갑자기 소변이 마렵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요!”
 막철이 막 몸을 빼려는 찰나 곽우진이 그의 뒷덜미를 콱 붙잡았다.
 “내 특기로 도망가는 걸 내가 놓칠 거 같아?”
 “에헤헤헤! 아무래도 그렇죠? 에헤헤!”
 곽우진이 주먹을 꽉 쥐고 막철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또 주먹 긁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풀어놔 봐.”
 “일단 무력이 강한 조직이 세 개 있고, 정보가 뛰어난 조직이 둘 있습죠.”
 “참마단이랑 묵룡검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북천검대(北天劍隊)가 그중 최고입니다.”
 “북천검대? 어째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이름 같다?”
 “에헤헤헤. 역시 공자님이십니다. 북천하가의 피가 조금이라도 이어져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가주 직속 무력조직입죠.”
 “그래? 뭐, 별 쓸모는 없군.”
 “그리고 정보조직으로는 비연각(秘燕閣)과 은월각(隱月閣)이 있습죠.”
 “은월각? 아까 쓰레기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거야 능력이랑은 별개 아니겠습니까? 실력은 제법 쓸만합니다.”
 “그래? 그럼 은월각을 예설이 맡게 된 게 그냥 아무렇게나 이뤄진 건 아니라는 뜻인데…….”
 “셋째 후계자가 은밀히 손을 썼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뭐…… 그냥 하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긴 합죠.”
 곽우진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그 소문이 정말일 수도 있고 누군가 일부러 그런 소문을 퍼트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돌아가는 정황을 보니, 은월각은 하예설을 지척에서 감시하는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개판이군.”
 그렇게 말하는 곽우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확인한 막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자님 표정을 보니 곡소리 좀 나겠는데요? 에휴,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데.”
 “됐고, 이제 슬슬 진짜배기나 풀어라.”
 “우헤헤헤헷! 그 말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아, 어디 보자…….”
 막철은 한껏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차분하게 얘기를 풀어나갔다.
 “공자님 취향에 제법 맞는 놈들이 두엇 있습죠. 하지만 단연코 지룡검대(地龍劍隊)를 능가할 놈들은 없습니다.”
 “지룡검대라…… 뭔가 어감이 그리 좋은 곳은 아니구나?”
 “일단 지룡검대는 별칭 토룡검대라고들 부르더군요. 말 그대로 지렁이 취급을 받는 곳입니다. 실력은 고만고만하고 독기도 없고…… 뭐, 그렇습죠.”
 곽우진이 묘한 표정으로 막철을 쳐다봤다. 막철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방금 전의 그 차분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유일하게 봐줄만한 건 부대주인 문대량입죠. 그나마 열심히는 하거든요. 어떻습니까? 딱 아닙니까? 지금 북천하가 내에서 공자님의 처지를 온몸으로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한 곳 아닙니까? 우헤헤헤헤헷!”
 막철이 배를 잡고 웃었다. 물론 곽우진의 주먹을 보고는 슬그머니 웃음을 접었지만.
 “아무튼 수고했다.”
 곽우진은 품에서 금원보 하나를 꺼내 휙 던졌다. 막철은 그것을 귀신 같이 낚아채며 환하게 웃었다.
 “에헤헤헤헤! 내가 이래서 공자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우헤헤헤!”
 “그게 다 기녀 치마폭으로 들어갈 걸 뻔히 아니 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구나.”
 “에이, 저 그런 놈 아닙니다. 저 이제 기루 끊었다니까요?”
 “개가 똥을 끊지.”
 곽우진이 피식 웃으며 그 말을 던지고는 휘적휘적 앞질러 걸어갔다.
 막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씨익 웃으며 다다다 뒤쫓아 갔다.
 “공자님! 같이 가요! 어차피 길도 모르시잖습니까! 우헤헤헤!”
 
 “이곳이 토룡, 아니, 지룡검대입니다. 뭐, 보시다시피 볼 건 별로 없습니다. 저기 보이는 허름한 전각이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고, 그 앞에 펼쳐진 공터가 수련장입죠.”
 공터 곳곳에 지룡검대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앉아 있었는데, 다들 가관이었다.
 대여섯 명이 모여 노름을 하고 있었고,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자는 놈들도 있었다.
 곽우진과 막철은 공터를 가로질러 전각으로 향했다.
 이곳 지룡검대에는 대주가 공석이었다. 그렇기에 곽우진이 원하기만 한다면 대주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다.
 곽우진이 하예설의 정혼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곽우진이 이곳의 대주로 부임한다면 지룡검대원들의 반발을 살 것이다. 위에서 강제로 꽂아준 상급자를 누가 제대로 모시려고 하겠는가.
 물론 곽우진은 그런 걱정은 아예 하지 않았다.
 “자, 슬슬 얘기해 봐라. 왜 북천하가에서 토룡검대를 유지하고 있는지. 내가 보기엔 그냥 없애버리는 게 이득인데? 이건 뭐, 유지비도 안 나오겠어.”
 “별 거 있겠습니까? 그냥 잡스러운 일을 담당하는 거죠. 토룡에게 어울릴 법한 그런 일들 있잖습니까. 헤헤헤.”
 “토룡에게 어울릴 법한 일이라…….”
 그런 일이야 얼마든지 있다. 다른 조직이 해결한 일의 뒤처리라거나, 다들 꺼리는 지저분한 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너무 하찮아서 아무도 맡기 싫어하는 일도 이들이 전담한다.
 그렇기에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또한 차분히 수련할 시간은 모자랐고 말이다.
 “그밖에 내가 또 알아야 할 점은?”
 “없습니다. 그냥 즐기면 되는 곳이라니까요? 아주 그냥 공자님께 딱입니다. 딱!”
 곽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내 정혼녀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무공 수련 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지금은 업무 시간 아닌가?”
 “에이, 다 아시면서. 거기서 아가씨가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냥 이름만 각주지 실제로는 부각주가 일은 다 하고 따돌림 당하고 있는 중이잖습니까.”
 “그래…… 그렇다고 했지?”
 곽우진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두 사람은 전각 앞에 도착했다.
 전각 앞에서 멈춘 곽우진은 막철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먹자.”
 “예? 밑도 끝도 없이 뭘 먹는단 말입니까? 공자님 배고프세요? 아님…… 밥 말고 다른 거? 에헤헤헤. 저랑 같이 기루 가시게요?”
 곽우진이 인상을 팍 쓰며 막철의 뒤통수를 때렸다.
 뻑!
 “쿠엑!”
 막철은 하마터면 땅바닥과 입맞춤을 할 뻔했다. 그만큼 강렬한 일격이었다.
 “우이씨! 공자님!”
 “왜?”
 막철은 화를 내려다가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곽우진의 표정을 보고 금세 꼬랑지를 내렸다.
 “에헤헤헤. 그러니까 뭘 드시고 싶으신지 궁금하다…… 이말입죠. 에헤헤헤.”
 “은월각.”
 곽우진은 그 말만 남기고 전각으로 들어섰다.
 막철은 그런 곽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반했네, 반했어.”
 막철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전각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다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곽우진이 전각 밖으로 고개만 스윽 내민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고, 공자님?”
 “반한 거 아니다.”
 그 말을 남긴 곽우진이 다시 전각 안으로 쑥 들어갔다. 막철은 유쾌하게 웃으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우헤헤헤. 암요. 당연히 아니겠지요. 우헤헤헤! 이 부끄럼쟁이! 우헤헤헤헷!”
 빠악!
 “꾸웩!”
 물론 전각에 들어가자마자 바닥과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 * *
 
 “호오. 제법인데?”
 곽우진은 전각 뒤쪽에서 한창 검을 수련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춤 잘 추네요.”
 막철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그렇게 말했다.
 “또 뭐가 불만이냐?”
 “허어얼. 그걸 몰라서 묻는 겁니까? 제 머리가 동네북입니까? 왜 자꾸 때리십니까? 저 이래봬도 한때 잘 나가던 몸입니다. 제가 어디 가서 뒤통수나 맞고 다닌다고 하면 놀라 자빠질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겁니다!”
 “그래, 그래. 그럼 맞을 짓을 안 하면 되겠네.”
 “이익!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곽우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막철을 쳐다봤다.
 “갑자기 마웅이 보고 싶네. 어때? 한 번 부를까? 생각해보니 우리 일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마웅이라는 말에 막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예? 마, 마, 마웅이요?”
 잠시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있던 막철이 기겁을 했다.
 “공자님! 제가 마웅 몫까지 다 해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에이, 우리 마웅은 말이지, 내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재깍재깍 알아서 움직이는 착한 부하야. 누구처럼 퉁퉁거리지도 않는다고.”
 “에헤헤헤! 공자님, 이거 왜이러십니까? 저도 할 때는 하는 놈입니다. 자, 뭐가 문제입니까? 저기서 칼춤 추는 놈이요? 오오, 제법 춤 좀 추네요. 이제 됐습니까? 에헤헤헤.”
 곽우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잘해.”
 “존명!”
 막철은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물론 너무 절도 있게 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장난스러웠지만 말이다.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은 다시 전각 뒤 공터로 향했다. 어느새 검을 수련하던 사내는 호흡을 고르며 쉬고 있었다.
 사내, 문대량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전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타인의 수련을 지켜보는 건 대단한 실례였다.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대량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내렸다.
 ‘지켜봐서 얻을 게 있을 리 없지.’
 자신의 약점? 그냥 온몸이 약점투성이다. 초식의 연계를 미리 파악하는 거? 가진 초식을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어설프기 그지없다.
 차라리 고수가 수련모습을 보고 몇 마디 훈계라도 해주면 엎드려 절이라도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절박했다.
 문대량은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의 검이 날카롭게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곽우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법이란 말이야.”
 “암요. 공자님이 그렇다면 그런 겁죠. 예.”
 두 사람이 그렇게 다시 수련을 시작한 문대량을 평가하고 있을 때, 누군가 전각 뒤쪽에 나타났다.
 “음? 낯익은 놈인데요?”
 “첫날 봤던 그놈이네.”
 그는 등장하자마자 문대량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들어 전각 위쪽에 있는 곽우진과 막철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코웃음을 치고는 문대량에게 다가갔다.
 “어떤가? 아직도 마음을 못 정했나?”
 문대량은 그가 다가올 때까지 검을 휘두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납검했다.
 “이미 대답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뭐가 문제인가?”
 문대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서 더 입을 열면 마음이 더 급격히 흔들릴 것 같았다.
 “다음 달부터 지룡검대 쪽으로 편성된 예산이 더 삭감될 거라고 하더군.”
 사내, 구혁천의 말에 문대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현재 지룡검대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돈이었다. 물론 대원의 월봉은 제대로 지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직을 운영하는 데 월봉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하다못해 저 허름한 전각을 유지하는 데에도 돈이 들어간다. 한데 여기서 더 돈을 줄인다니. 이대로라면 지룡검대를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솔직히 자네의 무공에는 별로 기대하는 바가 없네.”
 구혁천의 말에 문대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쓰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무공에 대한 자신의 재능은 정말로 형편없었으니까.
 “하지만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에는 큰 기대를 하고 있네.”
 구천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참마단의 단주가 될 날도 머지않았네.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그 다음부터는 아주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 걸세. 어떤가? 이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나?”
 문대량은 복잡한 눈으로 구천혁을 바라봤다. 구천혁은 당연히 문대량이 허리를 숙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문대량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허어. 너무 신중해도 독이 되는 법일세. 아직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구천혁이 못마땅한 눈으로 문대량을 바라봤다. 그는 문대량이 왜 이러는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련을 못 버리는군. 잘 보게.”
 스릉.
 구천혁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방금 문대량이 수련하던 검식을 단숨에 펼쳤다.
 쉬쉬쉬쉬쉭!
 사방이 검광으로 뒤덮였다. 검광이 번득일 때마다 묵직한 기파가 퍼져 나갔다.
 그것을 보는 문대량의 눈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도저히 자신이 아는 것과 같은 검법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차이였다.
 “어떤가? 이래도 미련이 남나?”
 구천혁은 침중하게 가라앉은 문대량의 얼굴을 보며 돌아섰다.
 “내일 다시 오지. 아마 그게 마지막일 걸세. 자넬 얻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 말을 남긴 구천혁은 전각 위를 힐끔 쳐다보고는 떠나갔다.
 전각에서 그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곽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어설퍼.”
 “암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설마 저 어설픈 칼질에 흔들리는 건 아니겠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럼 이번엔 내 차례인가?”
 “마음 정하신 겁니까요? 설마 방금 그놈 때문에 즉흥적으로 결정하신 건 아니죠? 헤헤헤헤.”
 곽우진이 인상을 쓰며 막철을 쳐다봤다.
 “왠지 웃음소리가 거슬리는데?”
 “이젠 별 걸로 다 트집을 잡으십니다. 헤헤헤헤헤!”
 “아냐, 거슬려. 뭐냐? 그 웃음은. 그러니까 내가 아까 그 덜떨어진 놈이 예설을 노리고 있어서 그걸 방해하려고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냐? 응? 그래서 웃은 거야?”
 “에헤헤헤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헤헤헤헤!”
 “그런 거 아니다. 응?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움직일 거 같으냐? 이건 다 높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거다. 응?”
 “암요. 우리 공자님이 어디 보통 분이십니까? 당연합죠, 당연해요. 에헤헤헤헤!”
 곽우진이 주먹을 꽉 쥐고 들어올렸다.
 “우리 공자님 또 주먹 가려우신가보다. 에헤헤헤!”
 막철은 그렇게 말하며 뒷걸음질 쳐 후다닥 물러났다. 곽우진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고는 전각 밖으로 나갔다.
 전각 앞쪽에는 볼일이 없었다. 여기 모인 놈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지금 중요한 건 이놈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문대량이었다.
 전각 뒤쪽으로 돌아간 곽우진은 문대량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문대량은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참으로 복잡해 보였다. 자괴감과 상실감, 그리고 욕망과 열망이 뒤섞여 금방이라도 뭔가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뭐야? 수련은 하다 마는 건가?”
 곽우진의 말에 문대량이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을 확인한 곽우진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 좋네.’
 아직 눈빛이 살아서 번득이고 있었다. 저런 눈빛을 가진 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모조리 불살라 재가 되거나, 아니면 기어코 목표를 이뤄낸다.
 “괜히 재능 썩히지 말고 내 밑으로 오는 게 어때?”
 곽우진의 말에 문대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똑같은 놈이 왔다는 생각에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검, 버리기 싫지?”
 곽우진의 말에 문대량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룡검대
 
 “예? 지룡검대라고요?”
 하예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곽우진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지룡검대가 어떤 곳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녀는 일단 말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 제법 괜찮은 놈이 하나 있더라고.”
 “정말로 거기에 가실 건가요?”
 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내가 대주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하예설은 잠시 고민했다.
 ‘삼류에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을 거라고 했지?’
 가주가 지나가듯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직접 곽우진에게 무공에 대해 들은 말은 없었다.
 문득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곽우진은 두 손 번쩍 들며 천하제일인이라고 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제야 기분이 좀 좋아졌다.
 “웃으니 좋네.”
 “예?”
 “너무 심각하기만 하면 매력 떨어지거든. 그렇게 가끔 웃어주는 게 좋지.”
 곽우진은 자신의 말에 심취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또 웃음이 났다. 그리고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
 ‘저런 사람이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면 과연 괜찮을까?’
 하예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질 것이다.
 그리고 삼류에 발을 걸친 무공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조직은 몇 개 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정보 쪽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잠시 떠올렸다가 또 고개를 저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당장 은월각에 들어오더라도 지켜줄 수가 없다.
 ‘난…… 그저 직위만 각주일 뿐이니까.’
 하예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식으로 어설프게 들어가 부대끼며 고생할 바에야 차라리 바닥을 구르는 조직이라도 제일 위에 있는 편이 낫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하예설도 아마 은월각의 각주니까 그나마 버티고 있지, 만일 일개 요원이었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그래. 그럼 부탁 좀 하자고. 나도 이참에 든든한 배경 좀 써먹어 봐야지.”
 그 말에 하예설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배경이 되어드릴 수가 없어요. 허수아비 같은 소품에 불과하니까요.’
 아직은 그렇다. 아직은. 하예설은 결연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주먹을 꼬옥 쥐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배경이 되어 주리라.
 곽우진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예설을 보며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 * *
 
 곽우진이 지룡검대주로 취임한다는 소식이 쫙 퍼져나갔다.
 물론 북천하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걸 아는 게 아니라 특정한 위치에 속한 자들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적어도 웬만한 조직의 부장쯤 되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소식을 들은 사람 중 가장 분개한 자는 바로 참마단의 부단주인 구천혁이었다.
 “내가 찍었다는 걸 알고서 이런 건가?”
 구천혁은 살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당시 문대량을 포섭하러 갔을 때, 근처에 곽우진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자신이 찍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데 보란 듯이 이렇게 지룡검대의 대주 자리에 앉아 버렸다는 건 한 번 해보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주제도 모르는 것이 하 각주만 믿고 날뛰는군. 자기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있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현재 북천하가에서 가장 불안한 상황에 처한 자가 바로 다섯 번째 후계자인 하예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데 그걸 마치 대단한 배경이라도 얻은 듯 날뛰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이놈을 어떻게 처리하지?”
 대놓고 핍박하거나 죽일 수는 없다. 아무리 유명무실하다지만 그래도 하예설은 후계자 중 하나다. 그녀의 정혼자가 이유 없이 죽는다면 그 여파가 정말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걸 알고서 더 나대는 건지도 모르지.’
 만일 그렇다면 쉽게 접근해선 안 된다. 겉으로는 철부지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빠른 계산으로 실속을 다 챙기는 놈일 수도 있다.
 “물론 처리 방법이 꼭 그런 것만 있지는 않지.”
 괴롭힐 방법이야 많다. 다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문대량…… 대체 언제 넘어올 생각이지?”
 사실 문대량만 포섭해도 곽우진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지룡검대는 문대량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즉, 누가 대주 자리에 앉건 실제로 지룡검대를 움직이는 건 문대량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구천혁에게는 문대량이 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미래의 구천혁에게는 그가 반드시 필요했다.
 구천혁은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점검했다.
 그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손톱 밑에 가시가 하나 박힌 것 같군.”
 지금의 기분이 딱 그랬다. 따끔거리고 거슬렸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는 단숨에 뽑아야 한다. 어설프게 했다간 가시가 부러져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 테니까.
 
 * * *
 
 하태웅은 손에 든 서류를 읽으며 피식 웃었다.
 “제법이구나.”
 북천하가에는 다섯 개의 정보조직이 있다. 하지만 그건 대외적으로 알려진 조직이고, 실제로는 하나의 정보조직이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조직의 존재는 오직 가주만이 알고 있었다. 또한 가주만이 부릴 수 있었고, 그들이 얻은 정보는 가주만이 쓸 수 있었다.
 지금 하태웅이 읽는 서류가 바로 그들이 전해준 보고서였다.
 서류에는 최근 하예설과 그녀의 정혼자인 곽우진의 움직임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사실 하태웅은 하예설이 정혼자를 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다.
 하예설에 대해서는 북천하가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혼자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반항이나 체념이라고 여겼다. 주어진 상황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막 굴려 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되도 않는 정혼자를 데려와 한바탕 못난 꼴을 보여줄 줄 알았다.
 한데 그 뒤로 하예설이 확 달라졌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정혼자라는 곽우진도 처음 봤던 것과 달리 아예 맹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 일을 보니 말이다.
 곽우진이 지룡검대를 선택한 건 정말 탁월했다. 그것이 운이든 실력이든 말이다.
 문제는 그걸 선택했다고 해서 대주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부분을 하예설이 해결해 버렸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말이다.
 “소문을 통해 날 압박하다니, 아주 맹랑한 생각을 했어.”
 하태웅은 피식 웃으며 서탁 위에 놓인 서류를 슬쩍 내려다봤다. 그것은 곽우진을 지룡검대주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만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를 썼으니 상을 줘야지.”
 그는 서류 옆에 놓인 가주 직인을 집었다.
 쾅!
 이로써 곽우진은 공식적으로 지룡검대의 대주가 되었다.
 이제 남은 건 공식적인 게 아니라 실질적인 대주가 되는 일이었다. 아마 그건 이번 일처럼 쉽게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하태웅의 입가에 기대감 어린 미소가 맺혔다.
 그는 서탁 위에 놓인 목갑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곽우진이 선물이랍시고 전해준 목갑이었다.
 아주 투박하고 서툰 솜씨로 만든 목갑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만든 것처럼 말이다.
 목갑을 쓰다듬던 하태웅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놓인 단약을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며 눈을 빛냈다.
 “참으로…… 묘하단 말이야.”
 단약 역시 어린아이가 진흙을 뭉친 것처럼 생겼다. 물론 색깔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향도 없었고, 특별한 기(氣)를 품지도 않은 단약이었다. 그래서 더 묘하고 이상했다.
 한참동안이나 단약을 살피며 목갑을 쓰다듬던 하태웅은 단약을 다시 목갑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잠깐의 휴식을 빙자한 유희는 끝났다. 이제는 다시 일에 매달려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목갑을 한 차례 쓰다듬은 하태웅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 미소는 언제 나타났냐는 듯 사라지고 다시 냉정한 표정이 자리했다.
 이내 가주의 집무실에는 서류 넘기는 소리만 남았다.
 
 * * *
 
 지룡검대의 전각 주변에는 항상 낮잠을 자는 사내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일상에 훈련 시간은 존재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실전이 곧 훈련이다. 물론 그 실전이라는 것이 뒷골목 파락호들과 싸우는 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지룡검대가 지금 발칵 뒤집혔다. 임무가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임무가 떨어지기만 했다면 이들이 이렇게 당황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대체 우리 대주님 어디 가신 거야?”
 “조장님은 뭐 들으신 거 없습니까?”
 “나도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참, 그리고 함부로 대주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나중에 경을 친다. 아무리 우리가 대주처럼 모셔도 엄연히 부대주님이야. 알겠나?”
 “아, 우리끼리 뭐 그런 걸 따집니까.”
 “당연히 따져야지. 이번에 새 대주가 임명되었으니까. 당분간은 조심하라는 뜻이다.”
 삼조장의 말에 다들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부임한 지룡검대주 앞에서 그랬다가 괜히 문대량만 곤란하게 만들었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미안해서 문대량과 눈도 못 마주칠 것이다.
 “그나저나 조장님 정말 뭐 아는 거 없습니까? 우리 토룡검대 소식통이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토룡검대라고 하지 마라. 말에는 힘이 있다. 진짜 지렁이처럼 살기 싫으면 제대로 불러라.”
 “아이고, 정말 잔소리…….”
 삼조장은 실질적으로 지룡검대의 운영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문대량에게 조직을 아우르는 재능이 있긴 했지만, 실질적인 운영 능력은 삼조장인 천중원이 훨씬 뛰어났다.
 즉, 문대량을 영입하러 왔던 참마단의 부단주 구천혁은 애초에 헛다리를 짚었다는 뜻이다.
 천중원은 조직 운영도 잘했지만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도 상당했다. 물론 전문적인 정보원에 비하면 모자랐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 대주님이 자리에 없으면 우리끼리라도 알아서 임무를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러다가 우리 대주님 처벌이라도 받으면 어쩝니까?”
 그 말에 여기저기 동조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맞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대주님 부대주 자리에서 잘려나가기라도 하면 큰일 아닙니까.”
 “대주님 잘리면 나도 나갈 겁니다. 지금까지 더러운 꼴 보면서도 여기 붙어있는 게 다 우리 대주님 때문인데.”
 천중원은 대원들의 반응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들 문대량을 대주라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대주가 부대주 자리에서 잘린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그래, 그럼 우리끼리 하자.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항상 하던 일인데.”
 이번 임무도 사실 별 것 없었다. 묵룡검대가 박살 낸 사도문파의 뒷정리를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 때, 지룡검대가 모인 공터에 누군가 들어섰다.
 천중원은 나타난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하 각주님!”
 그는 다급히 포권을 취하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의 반응에 뒤늦게 하예설을 발견한 대원들이 서둘러 인사했다.
 “천중원 조장님이죠?”
 하예설은 삼조장을 보며 물었다. 천중원은 하예설이 설마 자신을 알고 있을 줄 몰랐기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놀라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명색이 은월각주랍니다.”
 물론 은월각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문대량이 알려준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임시로 조장님이 지룡검대를 맡아주셔야겠어요.”
 “예? 그럼 저희 부대주님은…….”
 “외부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답니다.”
 곽우진은 자신의 자리를 찾는 데 한 달의 유예 기간을 받았다. 그 기간을 알뜰히 써먹기로 한 것이다. 문대량은 그냥 강제로 끌고 갔다.
 짝!
 하예설은 손뼉을 쳤다.
 상황파악을 못해 멍하니 서 있는 지룡검대원들이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문 부대주는 지룡검대와 함께 있는 거예요.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요. 적어도 보름은 그렇게 될 거예요. 제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하예설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여기 없는 게 분명한데 그게 자리를 비운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이내 그 의미를 알아차린 천중원이 뜨악한 얼굴로 하예설을 바라봤다.
 “보름 동안 땡땡이입니까?”
 하예설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대량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창밖과 곽우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똥마려운 강아지도 아니고 좀 가만있으쇼! 사람이 진중한 맛이 있어야지.”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막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곽우진은 그런 막철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너나 잘하라는 표정으로.
 “무단으로 세가를 빠져나왔는데 마음이 편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오? 우리 지룡검대는 수시로 임무가 내려오는 곳인데…….”
 막철이 어이없는 눈으로 문대량을 쳐다봤다.
 “그래서 그 임무 중에 당신이 꼭 필요한 임무가 한 달에 몇 번이나 있는데?”
 “그건…….”
 문대량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꼭 필요한 임무? 그딴 게 있을 리 없다.
 ‘무공은 칠조장이 괜찮지. 조직 운영은 삼조장이 알아서 하고…….’
 그뿐 아니었다. 작전은 오조장이 잘 짜고, 인원을 시기적절하게 배분하는 건 육조장 몫이다.
 그동안 문대량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되도 않는 무공수련뿐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은 지룡검대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라는 확신만 강해졌다.
 문대량의 표정이 침울해지자, 막철이 그것보라는 듯 입에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그것 보쇼. 우리 공자님이 겉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한량으로 보여도 막상 겪어보면 아주 집요하고 지독한 분이야. 그러니 턱 믿고 맡겨보쇼. 아마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
 막철의 말에 곽우진이 고개를 삐딱하게 꼬며 쳐다봤다.
 “너 뭔가 말에 씨가 담겨 있다?”
 “씨가 아니라 뼈 아닙니까? 우헤헤헤!”
 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씨 맞아. 폭력의 씨.”
 빠바박!
 순식간에 뒤통수 세 방을 얻어맞은 막철이 버럭 화를 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우이씨! 정말 이러깁니까!”
 곽우진은 그 말에 조용히 주먹을 들어 올리는 걸로 답했다.
 막철은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문대량을 보며 말했다.
 “봤지? 저렇게 집요한 양반이라니까? 내 뒤통수가 아주 그냥 남아나질 않아요. 쳇!”
 문대량의 눈에 혼란이 깃들었다.
 과연 이들을 믿고 따라가도 되는 걸까? 정말 저 곽우진이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긴 한 걸까?
 혹시 구천혁의 끄나풀인 건 아닐까? 세가를 무단이탈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자신을 꼬드긴 건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문대량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검을 뽑았어. 그러니 최소한 헛손질이라도 해보는 수밖에.’
 이미 저지른 일이다. 만일 문대량이 끝까지 거절하고 저항했다면 이 마차에 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선택은 자신이 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책임도 자신이 지는 게 맞다. 설사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문대량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더 이상 막철과 곽우진이 장난스럽게 투닥거리는 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빠르게 뒤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던 그의 뇌리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원래는 제일 먼저 떠올렸어야 할 의문이 생각났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그가 오늘 겪은 일이라고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곽우진과 막철의 손아귀에 질질 끌려 마차에 탄 것 밖에 없었다.
 문대량이 그 의문을 가진 순간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한 건가?’
 속도를 줄인 마차는 제법 커다란 도시로 들어섰다. 그리고 대로를 따라 이동했다.
 문대량은 창을 통해 보이는 광경으로 최대한 이곳이 어딘지 유추해 봤다.
 북천하가가 있는 곳은 항주였다. 그리고 이곳은 아마 소흥(紹興)인 듯싶었다.
 곳곳에 수로가 얽혀 있었다. 마차는 수로를 피해 난 대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다가 어느 거대한 장원 앞에서 멈춰 섰다.
 “다 왔으니 내리슈.”
 막철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치 곽우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건 전부 너 때문이라고 항변하는 듯한 표정과 눈빛과 말투였다.
 문대량은 막철을 겪은 시간이 아주 짧았지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 무시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문대량의 표정이 혼란으로 뒤엉켰다.
 ‘대체 여길 왜 온 거지?’
 마차 앞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고, 그 문 위에 달린 커다란 현판에 멋들어진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의검방(醫劍幇).
 “뭐해? 안 들어가고.”
 뒤에서 들린 곽우진의 말에 문대량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섰다.
 “대체 여긴 왜 온 겁니까?”
 “왜긴? 의검방 몰라? 제법 유명한 데 아닌가?”
 “의검방은 압니다. 제 말은 왜 여길 왔느냐는 겁니다.”
 의검방은 최근 가장 유명한 상단 중 하나였다. 수많은 명의가 의검방 소속이었기에 의검방에는 항상 환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의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의검방이 의방이라기보다는 상단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들의 활동이 의원보다는 약을 유통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의검방에서 가장 유명한 약은 단연 활신단(活身丹)이었다.
 활신단은 의검방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약이었다.
 활신단은 이름대로 몸을 살리는 약인데, 그 몸이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몸이 아니라 남자의 상징을 나타내는 몸이었다.
 즉, 아주 뛰어난 정력제였다.
 문대량은 이해할 수도,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력제로 유명한 상단에 자신을 왜 데려왔단 말인가.
 “전 활신단이 필요치 않습니다.”
 문대량의 말에 곽우진과 막철이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파안대소를 했다.
 “우헤헤헤헤헷! 자존심 세우느라 목에 핏대까지 섰네! 우헤헤헷!”
 막철의 자지러지는 웃음에 문대량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부끄럽기도 하고 또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곽우진은 그런 문대량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어차피 그런 거 줄 생각도 없었으니까 걱정 말고 따라와.”
 곽우진은 피식 웃고는 돌아서서 의검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헤헤헤헷! 전 활신단이 필요치 않습니다! 쿠하하하!”
 막철은 문대량의 말투까지 흉내 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누가 봐도 일부러 과장되게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문대량은 그 모습을 보고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한 번 막철을 상대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무시하자, 무시…….’
 그는 억지로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곽우진을 따라갔다. 어쨌든 여기 남아서 창피를 당하느니 그게 수백 배는 더 나을 것 같았으니까.
 
 * * *
 
 “여기가 어딥니까?”
 문대량은 긴장감과 신기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설마 의검방 안에 이런 곳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이곳은 대나무숲이었다. 한데 어찌나 크고 넓은지 한참이나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사방에 보이는 거라고는 대나무뿐이었다.
 게다가 대나무도 보통 대나무가 아닌 듯했다.
 문대량은 근처에 있는 대나무를 쓰다듬어봤다. 빛깔과 감촉이 아주 특별했다.
 이곳에 있는 대나무는 검붉은 빛을 띠었다. 그동안 봐 왔던 그 어떤 대나무와도 다른 종류임이 분명했다.
 “혈죽(血竹)이라는 거야. 아주 구하기 어려운 놈이지. 키우는 건 더 어렵고.”
 “혈죽……!”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거 전설에나 나오는 그런 대나무 아닌가?’
 피와 시체를 먹고 자란다는 대나무였다. 중요한 건 그렇게 자란 대나무에 열매 비슷한 게 맺힌다는 점이었다.
 핏방울이 무수히 뭉친 것 같은 열매였는데, 그 열매의 효용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한다.
 물론 다 전설이나 옛이야기에나 등장하는 얘기였다.
 한데 진짜 그런 혈죽이 존재한다니.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문대량은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별 거 아냐. 자생하는 혈죽을 발견해서 그걸 재배하는 데 성공했거든.”
 문대량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별 게 아니면 대체 뭐가 별거란 말인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잘 따라와. 괜히 길 잃으면 다시 꺼내주지도 못한다.”
 “예?”
 문대량은 이해할 수 없는 곽우진의 말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그 순간 앞서 나가던 곽우진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문대량은 대경해서 황급히 곽우진에게 바짝 붙었다.
 ‘진법이 깔려 있는 게 분명해.’
 혈죽을 키우는 이런 중요한 곳에 진법 한두 개쯤 안 깔려 있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곽우진의 등만 보고 반각쯤 더 걸어가자 이내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공터 끝에 혈죽으로 지어진 모옥 한 채가 보였다.
 곽우진은 성큼성큼 그 모옥으로 다가가며 한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어이! 할아범! 나 왔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옥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장비가 늙으면 딱 그렇게 생겼을 것 같은 노인이 퉁방울만 한 눈을 부라리며 뛰쳐나왔다.
 “너 이노옴!”
 노인은 곽우진에게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문대량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노인의 기세가 어찌나 흉험하고 무시무시한지 거기에 눌려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죽을 거야.’
 아마 곽우진은 노인에게 지독하게 얻어맞고 이승을 하직할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문대량이 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문대량의 기대와 예측과는 달리 노인은 곽우진 앞에서 거짓말처럼 돌진을 멈췄다.
 그 속도로 달리다가 그렇게 급격히 멈출 수 있는 것도 굉장한 능력이었다.
 노인은 그대로 곽우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게 대체 얼마만이냐! 이 무심한 놈아!”
 “하이고, 누가 보면 죽다 살아온 줄 알겠어요. 그리고 뭐가 얼마 만이에요? 그래봐야 일 년쯤 됐나?”
 “이놈아! 일 년 동안 소식 한 번 없었잖느냐!”
 “하하하.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지도 몰라요. 근처로 옮겼거든요.”
 그 말에 노인이 눈을 빛냈다.
 “근처? 어디?”
 “항주요.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저기 있는 저놈 좀 봐 주세요.”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문대량을 쳐다봤다. 그리고 뚱한 표정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내가 왜?”
 곽우진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안 해주실 겁니까?”
 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 네가 해달라면야 해주겠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뚱한 얼굴로 문대량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리 오라는 듯이.
 문대량은 머쓱한 표정으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뭔가 강아지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은 안 좋았지만 왠지 노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인은 문대량이 다가오자, 그의 팔다리를 비롯해 몸 곳곳을 주물렀다.
 그의 손길은 우악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온몸이 시원하게 풀려 나가는 느낌에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그저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오. 이거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노인은 문대량의 몸에서 손을 떼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곽우진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맡으마.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이놈은 꼭 내가 맡을 거야! 다시 달라고 해도 절대 안 줘!”
 곽우진은 그 말에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문대량을 쳐다봤다.
 문대량은 왠지 모를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의검방에서
 
 문대량은 불안한 눈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의 온몸에는 침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막철과 곽우진이 앉아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역시 여기 오면 이걸 안 마실 수 없지.”
 곽우진은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캬아! 좋다! 오랜만에 마시니까 더 좋네요. 헤헤헤.”
 막철은 그렇게 말하며 곽우진의 것보다 열 배 정도 커다란 잔을 탁 내려놨다.
 “욕심이 과한 거 아니냐?”
 “헤헤헤. 이럴 때 많이 안 마시면 언제 마십니까? 아니면 공자님이 직접 술 담가주시게요?”
 “내가 왜?”
 “에헤헤헤. 그럼 말씀을 마십시오. 전 오늘 이 술 다 마시기 전까진 안 잘 겁니다. 에헤헤헤.”
 막철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술잔을 가득 채웠다. 대접만 한 술잔에 피처럼 붉은 빛깔의 술이 찰랑거렸다.
 “술도 술이지만 이 안주가 또 기가 막히거든요. 안그렇습니까, 공자님?”
 막철은 젓가락으로 접시 위에 수북이 쌓인 붉은 콩 한 알을 집어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으. 죽인다.”
 막철은 황급히 술을 입에 들이 부었다.
 꿀꺽! 꿀꺽!
 “캬아아아!”
 “역시 혈죽실(血竹實)은 가볍게 구워 먹는 게 최고라니까요. 헤헤헤헤.”
 문대량은 누운 채로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떠드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혈죽실? 그럼 혈죽에서 나는 열매란 말인가?’
 대나무 열매는 그 자체로 귀하다. 열매를 맺기까지 백 년이 넘게 걸리는 건 둘째 치고, 열매를 맺으면 말라 죽는 게 대나무다.
 한데 그냥 대나무 열매도 아니고 혈죽의 열매라니. 대체 얼마나 귀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 귀한 열매를 저렇게 구워서 술안주로 먹어치우다니.
 “한데 공자님. 저놈은 언제 일어나는 겁니까?”
 “왜?”
 “그냥 궁금해서 그러죠. 흐흐흐.”
 막철이 음흉하게 웃으며 문대량을 힐끗 쳐다봤다.
 “이틀만 더 저러고 있으면 될 거다.”
 막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거 참 기대됩니다. 우헤헤헤헤!”
 문대량은 고슴도치가 되어 누운 채 막철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기대된다는 거지?’
 그리고 그 의문은 이틀 뒤에 말끔히 해결 되었다.
 
 * * *
 
 “으아아아아아악!”
 문대량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지금 피처럼 붉은 빛깔의 혈죽으로 만든 통에 들어가 있었다.
 통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안은 지독하게 뜨거웠다. 마치 용암에 들어간 것 같았다.
 실제로 열이 나는 건 아니었다. 그 증거로 피부는 아주 멀쩡했다.
 통 안에는 양기(陽氣)가 가득했다. 그것도 그냥 양기가 아니라 극양의 기운이었다. 혈죽에 특별한 처리를 하면 끊임없이 화기를 내뿜는데 그 기운이 통 안에 가득했다.
 극양의 기운이 피부를 통해 스며들어오면서 어마어마한 뜨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피부에 변화가 없다지만 그래도 막대한 양기가 몸에 스며들어오는 일이다. 이대로는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온몸이 한줌 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때 장비를 닮은 노인이 콩알만 한 얼음 한 알을 문대량의 입에 쏙 넣었다.
 마침 비명을 지르고 있던 중인지라 그걸 거부할 틈도 없었다.
 꿀꺽!
 얼음이 목젖을 건드리는 바람에 문대량은 자신도 모르게 그걸 삼켜 버리고 말았다.
 “으허헉!”
 내장이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 뱃속에 들어간 얼음조각에서부터 어마어마한 한기(寒氣)가 뿜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그냥 평범한 얼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문대량은 막철이 뭘 기대했는지 아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밖에서는 온몸을 태워 버릴 것 같은 열기가 스며들어오고 안에서는 온몸을 얼려 버릴 것 같은 한기가 뿜어져 나오니 둘이 만나 대폭발을 일으켰다.
 뜨거운데 차가운 기묘한 고통이 온몸에 휘몰아쳤다. 문대량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비명을 질러 조금이라도 고통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문대량의 비명에 노인, 장굉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사내놈이 고작 그거 하나 못 참고 뭐 하는 게냐!”
 문대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굉은 생긴 것만 장비 같은 게 아니라 성격도 비슷했다.
 이러다가 수틀리면 팔뚝만 한 대침을 정수리에 푹 꽂는데, 그때의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 슬슬 침을 바꿔볼까?”
 문대량은 고통 속에서도 뜨악해 눈을 크게 뜨고는 장굉을 바라봤다.
 장굉이 품에서 침을 꺼내고 있었는데, 그 침이 지금까지 쓰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굵었다.
 ‘저, 저런 걸 내 머리에 꽂는다고?’
 문대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 온몸을 태우고 얼리는 고통을 잊을 정도였다.
 “자아, 얼른 비명을 질러라.”
 장굉이 침으로 허공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문대량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절대 비명을 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비명을 지르면 저 거대한 침이 정수리를 파고들 것 아닌가. 아마 저기 찔리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저게 무슨 침인가. 살인무기지.
 장굉은 그런 문대량을 보며 씨익 웃었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 말과 함께 대침이 문대량의 정수리를 깊이 파고들었다.
 “끄으으으.”
 문대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너무 아파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음이 꽉 문 이 사이로 흘러나갔다.
 그래도 어쨌든 문대량은 그 극심한 고통을 억지로 참아냈다. 비명을 지르진 않은 것이다.
 장굉은 그런 문대량의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나날이 열흘이나 지속되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대침을 몸에 꽂아야 했다. 처음에는 정수리에만 꽂았는데, 그 다음에는 어깨에 꽂아야 했고, 가슴과 배에도 꽂았다.
 그렇게 몸에 꽂히는 대침의 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대침을 꽂으면 뜨겁고 차가운 고통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 고통에 좀 익숙해진다 싶으면 대침의 수가 늘어나니 무려 열흘 동안 꾸준히 고통이 늘어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열흘 째, 문대량은 더 이상 뜨겁고 차가운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제야 장굉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내성을 만들었구나.”
 문대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자, 그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꾸나.”
 “예? 그럼 지금까지 한 건…….”
 “내성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느냐. 다음 단계가 워낙 고통스러워서 이렇게 내성을 만들지 않으면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혀를 깨물어 자결하거든.”
 문대량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 *
 
 문대량은 차분한 얼굴로 공터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바로 앞에 곽우진과 막철,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고통에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던 장굉이 함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기분이 어떠하냐?”
 장굉이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날아갈 것 같습니다.”
 문대량은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로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어마어마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대체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몸에 특별한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독한 고통이 찾아왔다가 이제 거기에서 해방되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뭐…… 앞으로 그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수 있는 인내력은 제대로 얻었네.’
 지금 이 순간 문대량이 자신을 돌아봤을 때, 이번 일로 얻은 건 딱 그거 하나였다.
 사실 위기가 한 번 있긴 했다. 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한 번 있었다. 뜨겁고 차가운 고통에서 벗어난 다음,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자마자 들었던 생각이었다.
 당시의 고통은 정말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당장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 장굉의 정체를 들었다. 그리고 포기하겠다는 마음을 접고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그가 아무 의미 없는 고통을 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그때 장굉의 정체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문대량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대체 정체가 뭐기에 의검방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이런 장소에 와서 장굉 같은 사람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정말 평범한 한량으로밖에 안 보이는 사람이기에 더 신비로웠다.
 “자, 서론은 그쯤 하고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장굉이 뭔가를 더 말하려 할 때, 곽우진이 나섰다.
 “본론이라 하심은…….”
 문대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그는 곽우진을 대하는 게 한없이 어려워졌다.
 “내가 처음 여기에 데려오기 전에 뭐라고 했지?”
 “그야…….”
 문대량은 곽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검을 버리기 싫으냐고 물었다.
 당연하다.
 재능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에 얼마나 집착했고, 또 얼마나 지독한 수련을 했는지 가장 잘 아는 건 문대량 자신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검을 버릴 수 없었다. 재능은 없지만 검을 좋아하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뭐 필요하겠는가.
 “검, 버리기 싫습니다.”
 문대량이 단호히 말했다. 그의 표정에 떠오른 결연함과 진지함에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그럼 버리지 마.”
 곽우진은 말을 덧붙였다.
 “자, 이제 또 해줄 말은…… 너 생각보다 재능 있어.”
 “예?”
 두 번째 이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문대량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있다니 누가? 내가? 무엇에?’
 “너 검에 제법 재능 있어. 어느 정도냐 하면 북천하가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
 문대량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을 딱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왜? 못 믿겠어?”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겪은 일이 있는데 말이다.
 “못 믿겠으면 한 번 해봐.”
 “뭘 말입니까?”
 “뭐긴 뭐야? 북두십삼검(北斗十三劍)이지.”
 북두십삼검은 북천하가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보급하는 검법이었다. 당연히 지룡검대도 북두십삼검을 익힌다.
 문대량이 끊임없이 집착하고 수련하는 검법도 바로 북두십삼검이었다.
 “후우우.”
 문대량은 호흡을 조절했다. 문득 예전 구천혁이 찾아와 보여준 북두심삼검이 떠올랐다. 그건 정말로 눈부셨다.
 ‘내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문대량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다. 지금은 오로지 북두심삼검만 생각하고 그것을 제대로 펼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스릉.
 허리춤에 매단 검을 가볍게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부드럽게 초식과 초식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느릿했지만 이내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순식간에 북두십삼검이 한 차례 지나갔다. 하지만 문대량은 거기에서 끝내지 않았다. 아니, 끝낼 수 없었다.
 지금까지 휘두르던 검과는 확연히 달랐다. 분명히 뭔가 달라졌다. 한데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쉬쉬쉬쉬쉭!
 수십 번의 검격이 바람을 갈랐다. 사방이 검광으로 뒤덮였다.
 예전 구천혁이 보여주던 모습과 흡사했다.
 하지만 문대량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갔다.
 콰콰콰콰콰콰!
 검식이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폭풍처럼 몰아쳤다.
 북두십삼검의 마지막 초식이 문대량의 검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진짜 폭풍이 휘몰아쳤다. 단전에서 시작한 내력이 팔을 타고 검에 흘러들어가더니 정면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문대량은 멍하니 서서 자신이 방금 펼친 그 말도 안 되는 북두십삼검을 떠올렸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막철이었다.
 “오오! 역시 우리 공자님. 확실히 안목 하나는 끝내주시는군요. 솔직히 말하면 제법이라고 하실 때 안 믿었는데. 헤헤헤헤.”
 곽우진은 막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 주고는 문대량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고 말했다.
 “어때? 이젠 좀 믿을 수 있겠어? 내가 그랬잖아. 너 재능 제법 있다고.”
 문대량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초점이 흐릿해진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대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 와서 따로 검을 수련한 적도 없고, 검에 대해 고민한 적도 없다.
 한데 갑자기 이런 검법을 펼칠 수 있게 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문대량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리고 열망의 빛이 담겼다.
 “대체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곽우진은 문대량의 질문에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문제가 뭐였냐 하면, 절맥이야.”
 “예?”
 첫 마디부터 참으로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절맥이라니.
 거기에 반응한 건 문대량뿐이 아니었다. 막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에 침을 튀며 말했다.
 “불치병이라는 그 절맥을 말하는 겁니까? 오음절맥이니 구음절맥이니 하는 선천적인 병이요? 천재나 타고난다는 그 절맥? 에이, 아무리 우리 공자님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거기 걸린 사람들은 다 병약하잖아요. 맥이 끊어졌는데 저렇게 멀쩡해요?”
 막철의 말에 문대량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어이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말이 되어야 믿을 거 아닌가.
 하지만 이내 그는 표정을 수습했다. 믿기 싫어도 믿는다. 이유가 무엇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쨌든 자신에게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고맙고 소중한 사람 아닌가.
 곽우진은 그런 문대량의 모습을 처음부터 자세히 확인하고 있었다. 표정 변화나 흘리는 분위기나 기운의 변화까지 세심하게 살폈다.
 문대량은 처음 보고 판단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한 마디로 충직했다. 저런 사람은 한 번 누군가를 마음으로 모시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하지 않는다.
 곽우진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절맥이 그런 희한한 것만 있는 게 아니야. 넌 좀 특수한 절맥이었던 것뿐이야.”
 “이었다는 건…… 지금은 아니란 뜻입니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문대량은 답을 벌써 알고 있었다. 이곳 의검방에 와서 장굉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모든 것들이 아마 절맥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아직 완벽한 건 아니야. 그래도 막힌 걸 강제로 뚫어놓긴 했으니 한동안은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곽우진의 설명에 장굉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야. 네놈이 가진 절맥을 완벽하게 치료하려면 아주 특별한 약이 필요하지.”
 문대량이 절박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약입니까?”
 “딱히 이름이 정해진 약이 아니라서 나도 정확히 해줄 말이 없군.”
 “예?”
 문대량은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이름이 정해진 약이 아니라고? 그럼 정확히 무슨 약인지도 모른다는 뜻 아닌가.
 그런 불명확한 약으로 절맥이라는 엄청난 병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이름은 몰라도 효능은 알고 있지. 그 약을 몇 번 겪어봤으니까.”
 장굉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뇌기(雷氣)를 품은 약이야. 그것도 아주 강렬한 뇌기를 말이야.”
 문대량이 아연한 얼굴로 장굉을 바라봤다.
 뇌기를 품은 약이라니. 그런 약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니, 뇌기와 관계된 무공에 대한 얘기는 몇 번 들어봤다. 하나같이 구경조차 어려울 정도로 희귀한 무공이었다.
 현 무림에 그런 무공을 익힌 사람이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말이다.
 한데 뇌기를 쓰는 무공도 아니고 뇌기를 품은 약이라니. 그런 걸 어디서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그런 약이 있긴 있습니까?”
 장굉이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봤다고 하지 않았나.”
 문대량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지웠다.
 절망의 구렁텅이를 향해 무작정 돌격하던 자신을 여기까지 꺼내준 것만으로도 사실 충분했다.
 문대량은 장굉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치료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장굉은 피식 웃으며 손을 휙 내저었다.
 “됐다. 나도 나름대로 얻은 게 있었으니까. 뭐…… 흔히 볼 수 있는 증상도 아니어서 호기심도 좀 컸고. 그보다는…….”
 장굉은 거기까지 말하고 곽우진을 바라봤다.
 “널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게 나아 보이는데 말이다.”
 문대량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몸을 돌려 곽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앞으로 모셔야 할 분입니다.”
 그 말로 충분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마음을 정리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곽우진은 그런 문대량을 보며 씨익 웃었다.
 “너무 성급한 결정 아니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아무나 막 모시고 그러나?”
 문대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굳건한 바위 같았다.
 “제 눈에는 가벼움 뒤에 감춰진 번득임과 진중함, 그리고 사람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보입니다. 그 정도면 누구든 모시고 싶은 분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문대량이 지룡검대를 휘어잡고 그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 따위가 아니라 사람을 읽는 통찰력이었다.
 자신을 읽고 헤아려주면 대부분은 그것만으로 마음을 열곤 한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문대량과 곽우진이 함께 한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어느새 곽우진을 자기 나름대로 파악하고 판단한 것이다.
 “그 판단 확실해? 만일 내가 그런 가면을 이중으로 쓰고 있는 미치광이 살인마라면 어쩌려고?”
 곽우진은 마치 자신을 모실 필요가 없다고 나서서 항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평소라면 그런 곽우진의 말에 끼어들어 한 마디 할 법한 막철도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문대량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나타났다. 그것은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미소였다.
 “만일 그렇다면 저도 사람을 잘못 본 대가를 치르겠지요.”
 그의 말에 담긴 어조는 담담했지만 또한 지극히 단단하기도 했다.
 곽우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
 곽우진이 품에서 푸른 광택이 표면에 흐르는 단약 하나를 꺼내 휙 던졌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휘적휘적 벗어났다.
 문대량이 급히 그 뒤를 따르려 하자 장굉이 앞을 막아섰다.
 “그 약, 복용법은 듣고 가야지.”
 “예?”
 문대량이 의아한 눈으로 손에 든 단약과 장굉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게 바로 아까 내가 말한 이름 모를 약이야. 그냥 준다고 날름 삼키면 바로 골로 가는 약이지.”
 그 말에 문대량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장굉을 지나쳐 가려 했다.
 처음으로 모시고 싶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여기서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이어지는 장굉의 말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작 그 실력으로 저놈을 쫓아가서 뭐 하게? 하인 노릇 하려고? 일 잘하는 놈이 벌써 곁에 있으니 딱히 필요도 없어.”
 문대량은 발을 내디딘 채로 멈춰서 고개를 돌려 장굉을 바라봤다.
 “제가 여기 있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장굉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지지. 아주 크게 달라지지. 최소한 쓸 만한 놈이 될 수는 있을 거야. 일단…… 그 약을 먹어서 병을 완치하면 다음 길을 알려주지.”
 장굉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어차피 돌아가 봐야 할일도 별로 없다면서?”
 문대량은 그렇게 말하는 장굉의 눈빛에 왠지 모를 오한이 들었다.
 
 * * *
 
 “공자님, 저놈 안 데려갑니까? 이게 얼마 만에 생긴 부하인데…….”
 “저놈이 왜 네 부하야? 내 부하지.”
 “에이, 공자님도 참. 우리 사이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공자님 부하가 제 부하죠. 에헤헤헤헤헤!”
 곽우진은 피식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 남은 건 장굉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문대량 같은 천재는 적당한 계기만 있으면 알아서 쑥쑥 큰다.
 아마 다음에 볼 때는 훨씬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지룡검대도 제법 쓸 만한 조직이 되어 있을 테고 말이다.
 “공자님, 무슨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막철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말했다.
 곽우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막철을 쳐다봤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왜?”
 “지금 굉장히 음흉한 표정 지으셨거든요? 꼭 그럴 때마다 제가 무지막지하게 고생했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올라서요.”
 “음흉?”
 막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마차에 앉아 몸을 뒤로 편안하게 기댔다.
 “은월각부터 손볼까…… 아니면 지룡검대부터 손볼까 고민 중이었다.”
 막철은 그 불쌍한 두 단체에게 고개 숙여 애도를 표했다.
 곽우진은 눈까지 지그시 감고서 중얼거렸다.
 “아……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은월각이 말끔히 정리된 채 내 손아귀에 있었으면 좋겠다.”
 막철이 뜨악한 표정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에이, 공자님 너무하셨다. 그게 말이 됩니까? 천하제일가라는 북천하가에서도 손꼽히는 정보조직이 자고 일어나면 손아귀에 들어오게.”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는 막철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다시 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막철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공자님, 그거 말도 안 되는 상상인 거 아시죠? 예? 잘 아시잖아요? 그거 농담 맞죠? 예?”
 “그럼 은월각은 해결 됐고…… 지룡검대부터 손봐야겠군.”
 “공자님? 은월각 아직 해결 안 됐거든요?”
 곽우진은 막철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가만있자…… 그놈들은 좀 빡세게 굴릴 필요가 있으니까…….”
 “공자님? 제 말 안 들리세요? 은월각 어쩌실 거냐니까요? 예?”
 “아무래도 불러야겠다.”
 막철은 순간 불길한 예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설마 하는 표정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누, 누굴요?”
 “이런 일에는 마웅이 제격이지.”
 “마, 마웅이요? 걔 바쁠 텐데…… 바쁜 애 괜히 부르는 건 실례 아니겠습니까? 제가 마웅보다 애들 훨씬 잘 굴리는 놈 하나 아는데 그놈은 어떻습니까?”
 곽우진이 막철을 슬쩍 쳐다봤다.
 “그래? 나도 아는 놈인가?”
 “당연합죠. 이미 애들 굴리기로 검증이 싹 끝난 놈입니다요.”
 막철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곽우진이 계속 해보라는 듯 쳐다보고 있자,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애들 굴리는 건 솔직히 곰보다는 호랑이 아니겠습니까?”
 “호랑이? 대호 말하는 건가?”
 “예. 그놈이 마침 북천하가 근처에 있더라고요. 요즘 한가한 모양이던데 어떻게, 제가 한 번 찔러 볼까요?”
 곽우진은 막철을 가만히 쳐다봤다. 막철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절부절못했다.
 이러다가 곽우진이 싫다고 하면 천상 마웅이 이쪽으로 오게 될 것이다.
 마웅은 곽우진을 신처럼 따르기에 오라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당장 달려올 것이다.
 “너 마웅이 그 정도로 싫은 거냐?”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웅이 싫다니요. 오히려 그 반대죠. 마웅 좋은 놈 아닙니까.”
 “그런데 왜 마웅을 그렇게 피해?”
 “그야…….”
 막철은 곤란한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우!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대호가 그쪽으로는 제법 뛰어나니까 당장 부르겠습니다! 그럼 허락하신 겁니다?”
 곽우진이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막철이 답답한 얼굴로 재촉했다.
 “대호 그놈도 공자님 아니면 안 움직이는 거 아시잖습니까! 얼른 허락해 주세요!”
 곽우진이 그런 막철을 보며 마치 놀리듯 씨익 웃었다.
 “대호 지금 어디 있는 줄 아느냐?”
 “북천하가 근처에 있다니까요?”
 “그럼 그놈이 왜 북천하가 근처에 있을까? 하필이면 이 시기에.”
 “예?”
 잠시 멍하니 있던 막철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럼 공자님이…….”
 곽우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벌써 열심히 일하고 있느니라.”
 
 지룡검대와 은월각
 
 지룡검대의 삼조장인 천중원은 뚱한 얼굴로 눈앞에 선 사내를 노려봤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말해보시겠소?”
 사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귀가 먹었나? 하긴,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지.”
 사내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지룡검대의 부대주로 임명한다는 명령서였다.
 천중원은 사내가 내민 서류를 받지도 않고 옆으로 슥 밀었다.
 “이딴 종이쪼가리, 난 모르겠고.”
 천중원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내가 아는 건 우리 부대주님은 딱 한 분뿐이라는 거지.”
 사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래? 그럼 그 한 명이 나란 뜻이군.”
 천중원은 문득 이자식이 어쩌면 상당한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분할 필요는 없지. 괜히 매를 벌 필요는 없으니까.’
 문득 자신이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룡검대에서 가장 다혈질이 칠조장이다. 그리고 가장 차분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내가 고작 저 사람 말 한마디에 흥분했다고?’
 천중원의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순간, 사내의 눈에 살짝 이채가 떠올랐다.
 “일단 이것부터 확인하고 다시 얘기합시다.”
 천중원은 여전히 사내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서류에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사내는 별다른 행동 없이 그것을 넘겨주었다.
 ‘확실하네.’
 위조 따위가 아니라 진짜였다. 사실 검대의 부대주를 임명하는 건 대주의 권한이 가장 컸다.
 물론 최종 승인은 가주가 하지만, 사실상 가주는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대부분 외총관 선에서 결정이 마무리 되는 것이 관례였다.
 즉, 새로 부임한 대주가 결정한 사안이란 뜻이었다.
 ‘한데 이런 사람이 북천하가에 있었나?’
 천중원의 뇌리에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사내가 서류 끝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첨언하자면, 임시직이지. 당분간만 맡을 생각이야.”
 “당분간?”
 사내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맴돌았다.
 “부대주야 그저 대외적인 신분일 뿐이고, 사실…….”
 천중원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의 미소가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훈련교관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후, 훈련교관? 우린 훈련할 시간이 없는데?”
 사내의 입가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아니, 훈련할 시간은 충분해. 잠잘 시간이 조금 모자라긴 하겠지만.”
 천중원은 웃기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한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뭐지? 왜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야?’
 말도 안 나오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저 앞에 선 사내가 무슨 짓을 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별다른 이견이 없는 걸 보니 너도 기대가 큰가보군. 그래, 충분히 기대해도 좋을 거야. 내가 한 번 손댄 조직은 반쯤은 죽어 나가거든.”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사내의 얼굴을 보는 천중원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꼭 미친 살인마가 사냥감을 앞에 두고 웃는 것처럼 보였다.
 
 * * *
 
 곽우진이 탄 마차가 북천하가에 도착했다. 곽우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유예기간을 아주 알뜰하게 꽉 채워서 돌아왔다.
 이제 내일부터는 지룡검대주의 자리에 앉아 업무를 처리해야만 한다.
 “공자님, 어디로 모실까요?”
 “어디로 모셔야 할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선 지룡검대로 모시고 싶지만…… 헤헤헤헤. 아이고, 그 주먹 좀 내리고 말씀하세요. 심장 떨려서 말을 못하겠잖습니까. 헤헤헤헤.”
 막철은 히죽히죽 웃으며 곽우진을 하예설이 머무는 전각 앞으로 모셨다.
 “그럼 공자님, 화끈한 밤 보내십쇼. 으흐흐흐.”
 막철은 음흉하게 웃으며 마부를 재촉해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면서 가는 내내 마차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음흉한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쯧쯧, 하여간 아예 신경 안 쓰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지.”
 곽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이 전각은 대부분 은월각에서 쓰고 있었다. 총 다섯 층으로 이루어진 전각이었는데, 하예설은 가장 꼭대기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곽우진은 전각에 들어가 천천히 복도를 지나갔다. 복도 끝에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을 올라가면 또 복도가 나오고 그 복도 끝으로 가야 다시 계단이 나오는 구조였다.
 즉, 오층까지 올라가려면 전각 외벽을 타고 올라가거나, 아니면 모든 복도와 계단을 다 거쳐 가야만 했다.
 당연히 그렇게 가는 동안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은월각에 소속된 자들이니만큼 각자의 눈빛에 담긴 날카로움이 상당했다.
 그들은 마치 눈으로 곽우진을 해체해 버리겠다는 듯 그의 모습과 움직임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곽우진은 그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여유롭게 걸을 뿐이었다.
 “아…… 이거 너무 효율이 떨어지는데? 어떤 멍청이가 구조를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거야?”
 곽우진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몇몇이 움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곽우진은 씨익 웃으며 방금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였던 자들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이내 곽우진이 오 층에 올라섰다. 오 층은 다른 층보다 조금 더 좁았고, 방의 수도 적었다.
 오 층에 있는 방은 딱 세 개뿐이었다. 다른 층은 각각 십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 중 하나는 은월각주가 업무를 보는 집무실이었고, 나머지 두 개 중 하나가 하예설에게 주어진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손님을 대비해 만든 방이었는데, 지금은 곽우진이 쓰고 있었다.
 곽우진은 먼저 집무실 문을 열었다.
 기척이야 항상 잔뜩 내고 다니기에 그가 근처에 다가오면 누구든 잘 알게 된다. 심지어 무공을 모르는 하인이나 시비들조차 곽우진의 기척을 손에 그린 듯이 읽어낼 정도였다.
 그렇기에 집무실에 앉아 있던 하예설도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곽우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응? 그렇게 오래됐나? 보름 좀 넘은 것 같은데?”
 “이십 일이 넘었거든요? 그리고 보름도 짧은 시간은 아니죠.”
 곽우진은 그런 하예설을 묘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봤다.
 “왜?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못 견딜 정도로?”
 “누, 누, 누가 그래요? 못 견딘다고. 이렇게 잘 견디고 있거든요?”
 말을 꺼내 놓고 보니 뭔가 더 이상했다. 하예설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 그래서 어디에 다녀오신 거예요?”
 “소흥.”
 “소흥이요? 갑자기 거긴 왜…….”
 하예설은 더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자신이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혼한 사이이긴 하지만…….’
 문제는 본인의 의지로 한 정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 곽우진이 한 말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일이 다 끝나면 깔끔하게 물러나 주겠다고 했지.’
 물론 이루기 불가능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거야 지금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왜 말을 하다 말아? 소흥에 왜 갔느냐고? 거기 의검방이 있잖아.”
 “의검방이요?”
 하예설은 의검방이라는 말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고민을 싹 날려버리고 다시 호기심을 불태웠다.
 대체 의검방에는 왜 갔을까?
 ‘의검방은…… 그러니까…… 화, 활신단?’
 곽우진을 바라보던 하예설의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올랐다.
 “그, 그, 그걸 어디 쓰시게요?”
 “응?”
 곽우진은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하예설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몰라서 묻는 거야?”
 곽우진은 하예설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모, 모, 몰라요! 모르니까 묻죠.”
 하예설은 그렇게 말하고도 아차했다. 그리고 점점 더 자신 앞으로 바짝 다가오는 곽우진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상체는 뒤로 한껏 젖혀져 있었고, 그렇게 젖힌 상태인데도 곽우진의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이젠 더 이상 피할 데도 없었다.
 곽우진은 그런 하예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막철이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아주 많이.”
 “예?”
 어느새 곽우진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하예설은 몸을 뒤로 젖힌 그 자세 그대로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채 멍하니 곽우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놀림 받았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이 훨씬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곽우진은 그런 하예설을 보며 빙긋 웃었다.
 “왜? 아쉬워?”
 “그, 그, 그럴 리가요!”
 “아니면 말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제가 언제요? 아니거든요?”
 곽우진은 말마다 발끈하는 하예설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조금 다가가 머리를 슥 쓰다듬어 주었다.
 하예설은 갑작스러운 곽우진의 행동에 몸이 굳은 채 또 얼굴을 확 붉혔다.
 “밝으니까 좋네.”
 하예설은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살짝 내렸다. 왠지 지금은 더 곽우진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다 이 오라버니께 맡기고 맘 편히 지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하예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기대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들었다. 그 정도로 곽우진의 어조나 분위기가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어 곽우진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무공이라고는 하나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곽우진의 무공에 대해서는 가주가 보증했다.
 사람 보는 눈이 가문에서 가장 뛰어나고, 무공도 가장 강한 북천하가의 가주 하태웅이 보증한 삼류에 간신히 발을 걸친 무인이 바로 곽우진이었다.
 ‘그러니 내가 더 힘을 내야 해.’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이 가혹한 세가의 싸움터에서 반드시 그를 지켜내고 말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했다.
 죽어가던 그녀의 마음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만든 다짐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마음을 다잡을 때마다 그녀의 결심은 점점 더 확고하게 굳어져갔다.
 “또 이런다. 얼굴 좀 풀라니까?”
 곽우진은 장난스럽게 하예설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우! 정말! 계속 이러시기예요?”
 “나도 너 웃는 모습 좀 보자. 왜 그렇게 항상 골이 나 있어?”
 “예?”
 하예설은 예상치 못했던 곽우진의 말에 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따스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곽우진은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슥 쓰다듬고 뒤로 물러났다.
 “가시게요?”
 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밖에 오랫동안 나갔다 왔더니 좀 피곤하네. 오늘은 계속 자야겠어.”
 “그러세요.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나봐요. 참, 내일부터 지룡검대에 가셔야 하는 거 잊지 않으셨죠?”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
 그것 때문에 의검방에 다녀왔는데 말이다.
 하예설은 곽우진의 미소가 왠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곽우진이 무서울 리 있는가. 저렇게 유쾌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인데. 좀 가벼워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괜히 무게 잡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하예설은 그렇게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곽우진의 시선이 주변 몇 군데를 슥 훑으며 섬뜩한 빛을 뿌리는 장면을.
 
 “허억! 허억!”
 입에서 단내가 났다. 침이 바짝 말랐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가 다시 말라 소금기가 가득했다.
 당장에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자로 뻗어 눕고 싶었다. 아마 지금 누우면 그대로 잠들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훈련이 좀 모자랐던 것 같지 않나?”
 “아닙니다!”
 사내, 호장천은 우렁찬 지룡대원들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오늘 임무 수행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 같지 않아? 평소보다 반 시진이나 늦은 것 같은데? 천중원, 안 그래?”
 “그렇지 않습니다!”
 천중원은 죽기 살기로 온 힘을 모아 외쳤다. 당연했다. 아마 여기서 더 훈련을 받으면 오늘은 누구 하나 죽어나갈 게 틀림없었다.
 지금까지 쌓인 피로도 피로였지만, 오늘은 임무도 만만치 않아서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계산 똑바로 못 하나? 내가 반 시진 늦었다고 분명히 말 했지?”
 “평소보다 반 시진 늦게 임무에 들어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똑같습니다!”
 호장천은 턱을 쓰다듬으며 지룡대원들을 슥 둘러봤다.
 “그런가? 뭐, 좋아. 그럼 오늘은 이쯤 할까? 마무리 검식 시작해.”
 그제야 지룡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무리 검식도 그리 쉬운 건 아니지만 그건 훈련이 끝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없던 힘도 솟아났다.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은 동작으로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동작 하나하나가 상당히 어려워 보였고, 검이 지나갈 때마다 땅에서부터 솟아난 지기(地氣)가 주변을 슬며시 휘감았다.
 호장천은 그 광경을 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쓸 만해졌다.
 사실 이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지금 저들이 수련하는 마무리 검식이었다.
 대호수련검(大虎修鍊劍)이라는 이름을 가진 검법이었는데, 호장천이 수련할 때 쓰는 검법이기도 했다.
 이 검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육체의 단련이었다. 검식을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뼈와 근육이 단단하고 유연해진다.
 또한 온몸 구석구석에 땅의 기운이 스며들어 훨씬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게 해준다.
 대호수련검을 제대로 오랫동안 수련하면 설사 내공을 익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공 수련자를 능가하는 힘과 속도를 얻을 수 있었다.
 하물며 내공까지 함께 익히고 있다면 그 상승효과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아직은 지룡대원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아마 몇 달만 더 지나면 스스로 달라진 점을 알아차릴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지룡대원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검식이 막바지로 가면서 힘과 체력이 모자라 악과 독기로 검식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괴성을 지르는데도 검식에 필요한 호흡은 아주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호장천이 눈물 날 정도로 애썼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드디어 마무리 검식이 끝났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아무도 숨을 헐떡이는 사람이 없었다.
 검식에 맞춰 호흡을 하느라 숨이 다 정리된 것이다.
 “자, 이제 훈련도 마무리 했으니 복귀해야지?”
 호장천이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지룡대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이를 박박 갈았다.
 이곳에서 북천하가까지는 백 리 길이 넘는다. 한데 벌써 해가 진 지 오래니 이대로 북천하가까지 달려가면 대체 잠은 언제 잔단 말인가.
 ‘악마 같은 놈.’
 ‘지독한 놈.’
 ‘사갈보다 더 독한 놈.’
 별의 별 욕이 다 튀어나왔다. 물론 그 욕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랬다간 어찌 될지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자, 출발!”
 호장천은 가볍게 경공까지 쓰며 앞으로 쭉쭉 달려갔다.
 그리고 지룡대원들이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이를 악물고 그 뒤를 쫓아갔다.
 그들은 바닥 난 내공을 찌꺼기까지 박박 긁어서 경공에 쏟아야 했다.
 그렇게 매일 매일 반복되는 지룡대원들의 하루가 평소와 다름없이 끝나가고 있었다.
 
 * * *
 
 지룡대원들은 거처에 들어서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공터 한가운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호흡부터 고른 천중원은 일행을 대표해서 그에게 다가갔다.
 호장천은 복귀 후에는 어딜 갔는지 항상 보이지 않는다. 그가 다시 나타나는 건 아침에 기상할 때였다.
 그렇기에 이 시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대부분 천중원이 알아서 처리해야만 했다.
 일단 지금 문대량이 없는 상황이다. 현재 문대량은 무단이탈이나 다름없었다.
 천중원은 이렇게 누군가 지룡검대를 방문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저…… 누구십니까?”
 천중원은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사내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곽우진이다.”
 “곽우진? 가만, 곽우진이라?”
 천중원은 왠지 이름이 낯익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 이름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 새로 온다던 대주!”
 “대주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곽우진이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천중원은 흠칫 놀라 다급히 말을 정정했다. 호장천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온몸에 난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아! 죄, 죄송합니다, 대주님!”
 곽우진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호장천이었다.
 “저…… 한데…… 저희 부대주님은…….”
 “부대주? 어떤 부대주? 호장천?”
 호장천이라는 말에 천중원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 사람을 이 늦은 시각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아닙니다.”
 “그럼? 문대량?”
 문대량이라는 말에 천중원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예. 맞습니다. 문대량 부대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마 돌아오려면 두어 달 더 걸릴 거야.”
 “그렇게나…… 오래 말입니까?”
 “두 달이 뭐가 길어?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면 될 텐데.”
 천중원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두 달이 짧다고? 지금 이 죽을 정도의 고생을 이제 고작 보름 정도 했다. 한데 그 보름이 마치 십 년 같았다. 한데 두 달이면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란 말인가.
 물론 문대량이 돌아온다고 해서 이 지독한 훈련이 끝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왜? 문대량이 돌아오면 훈련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서 그래?”
 “아, 아, 아, 아닙니다!”
 “한밤중에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곽우진은 인상을 팍 쓰고는 천중원 뒤에 서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나머지 아흔아홉 명의 지룡대원들을 쳐다봤다.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정말 호장천에게 어지간히 당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슬슬 자야 하지 않아? 아마 대호, 아니, 호장천 그놈 성질에 나랑 얘기하느라 늦게 잤다고 해서 봐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헉!”
 천중원이 헛숨을 들이켰다. 나머지 지룡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멍하니 서서 이 피 같은 시간을 흘려버리고 있었다니!
 다들 우르르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이렇게 훈련을 시작한 다음 좋은 점은 그냥 머리만 바닥에 대면 잠든다는 것과 아무리 짧은 시간을 자도 숙면을 취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딱 이 각만 더 자면 정말 개운할 것 같은데…….’
 천중원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들었다.
 그리고 모두 잠든 전각 앞에는 곽우진이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여긴 그냥 방치 수준이네.”
 그래도 다섯 개나 있다는 정보조직 중 어디 하나에서라도 눈이나 귀를 박아 넣을 만한데, 여기만큼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북천세가의 쓰레기 처리장이라는 말이 온몸으로 느껴지는데?”
 곽우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정말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진짜 시작은 문대량이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그때까지 여기는 이렇게 그냥 내버려 둬도 될 듯했다.
 
 * * *
 
 은월각에는 두 명의 부각주가 있었다. 그리고 부각주 밑에 각각 세 명의 상급요원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머지 요원들을 관리했다.
 은월각에 총 몇 명의 요원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두 명의 부각주조차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이 가진 것만 관리할 수 있었다. 상대의 요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그렇게 수많은 요원들이 돌아다니며 얻어온 모든 것을 분류하고 정리해서 쓸 만한 정보로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 두 명의 부각주 중에서 모재경은 하예설이 각주 자리에 앉을 때부터 불만에 싸여 있었다.
 모재경은 유력한 차기 각주였다. 부각주로 일한 세월도 오래되었고, 그동안 위에 잘 보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그렇게 인내와 노력을 통해 간신히 각주 자리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난데없이 하예설이 나타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고, 하예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다른 후계자들이 내민 은밀한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어쨌든 하예설이 빨리 떨어져 나가야 자신에게 각주 자리가 돌아올 거라는 계산이 선 것이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힘을 들일 필요도 없이 하예설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었다.
 정말 별 것 아니었다. 그저 하예설에게 가는 정보를 좀 차단하고, 그녀가 각주 일에 적응하기 어렵게 다른 요원들과의 연결을 방해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일을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쯤이야 그가 지금까지 은월각의 부각주로 해온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데 그 당연한 것이 요즘 좀 삐걱거리고 있었다.
 “정말 피곤하군. 요즘 왜 이렇게 피로가 안 풀리지?”
 은월각이 하는 일의 특성 상, 잠을 오래 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숙면을 취하고, 좋은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기에 피로를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모재경은 심지어 술도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즘에는 피로가 잘 풀리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했다.
 모재경이 침상에 앉아 풀리지 않는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모 부각주 계신가?”
 모재경은 목소리만으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부각주 자리에 있는 초구진이었다.
 “초 부각주 아니십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초구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재경 앞에 털썩 앉았다.
 “모 부각주, 요즘 좀 어떤가? 지낼 만한가?”
 “예? 뭐, 저야…… 평소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그럴 리가. 평소보다 더 피곤할 텐데? 식욕도 별로 없을 테고 말이야.”
 그제야 모재경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초구진을 노려봤다.
 “정확히 무슨 말씀인지 듣고 싶군요.”
 탁.
 초구진은 탁자 위에 작은 목갑 하나를 올려놨다.
 모재경은 목갑은 쳐다보지도 않고 초구진의 눈만 똑바로 노려봤다.
 “해약일세.”
 모재경은 그 말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대체 초구진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 부각주. 혹시 언제 어떻게 중독된 건지 아나?”
 “모릅니다.”
 초구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르겠지. 나도 모른다네.”
 “예?”
 그제야 모재경의 표정이 변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후우.”
 초구진은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그것을 확인한 모재경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거기에는 이름이 쭉 쓰여 있었다. 그 중에는 초구진이나 모재경도 마찬가지로 적혀 있었다.
 이름을 모두 확인한 모재경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거, 설마……!”
 “그렇다네. 그 설마가 맞네. 중독된 사람들이야. 그 중 절반은 자네가 해약을 전달해야 할 걸세.”
 모재경은 그제야 목갑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정확히 네 개의 단약이 들어 있었다.
 그와 그가 거느린 세 명의 상급요원, 즉, 서찰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그 서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모재경은 서찰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각 글자의 획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획들을 이리저리 꿰맞춰 규칙을 알아내니 문장이 보였다.
 “각주를…… 따르라.”
 모재경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럼 이 모든 일을 하예설 각주가 벌였단 말인가?
 지금까지 하예설에 대해 가졌던 모든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예설은 갑작스러운 부각주들의 방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모재경과 초구진은 그런 하예설을 보며 더욱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하예설이 물었다.
 “무슨 일로 갑자기 보자고 하셨죠?”
 모재경과 초구진은 하마터면 식은땀을 흘릴 뻔했다. 하예설이 그동안 보여준 모습 때문에 괴리감이 어마어마했다.
 “이제 슬슬 각주 자리에 적응이 되신 것 같아 정기 보고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예? 저, 정기 보고라고요?”
 하예설이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감도 못 잡을 지경이었다.
 “본래 처음 부임하셨을 때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일에 적응하기도 전에 업무 부담을 많이 드리게 될까봐 조금 시일을 두고자 판단했습니다.”
 “저희 판단이 무례했다면 부디 너그러이 봐주시기를.”
 두 사람이 연이어 하는 말에 하예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표정을 수습했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모르니 일단 겪어 나가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두 분의 마음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예설이 허락하자 모재경과 초구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미리 준비한 보고서를 하예설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하예설이 보고서를 받자, 이번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마치 그림자가 솟아나듯 두 사람 옆에서 나타났다.
 그는 나타남과 동시에 하예설에게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앞으로 각주님의 손발이 되어 움직일 녀석입니다. 제법 믿을 만하고 실력이 뛰어나니 쓰시는 데 부족함이 없으실 겁니다.”
 하예설은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혹시 대놓고 감시자를 데려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긴, 감시를 대놓고 하나 몰래 하나 무슨 차이야. 차라리 대놓고 하는 게 마음은 더 편하겠지.’
 누군가 항상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살아가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하예설은 사내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모재경과 초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는 저분만 남는 건가요?”
 모재경과 초구진의 이마에 기어코 식은땀이 흘렀다. 그동안 몰래 감시하던 일을 슬그머니 추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며 고개를 숙여선 안 된다. 최대한 우회해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제길. 이거 종잡을 수가 없군. 이렇게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이었나?’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지 않은가.’
 두 사람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앞으로 필요한 인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즉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정보가 있으실 경우에도 그저 저 녀석에게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하예설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마워요. 이제야 제가 진짜 은월각주가 된 것 같네요.”
 그녀는 정말 아무생각 없이 기뻐서 한 말이었지만, 그 얘기를 듣는 모재경과 초구진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앞으로 더욱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각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하예설은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봤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그냥 묵영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좋아요. 묵영. 그럼 쉬고 있어요.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요.”
 묵영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 하고는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하예설은 잠시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두 장의 보고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이곳에 부임한 다음부터 수집하고 정리한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 * *
 
 “후우. 정말이지…… 진땀나는군.”
 모재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초구진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그동안 잘 숨기다가 이렇게 난데없이 발톱을 세운 이유가 뭘까?”
 “슬슬…… 때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두 사람의 눈이 야망으로 불타올랐다. 이제부터 진짜 본격적인 후계자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두 사람이 앞으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결정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누구와도 제대로 손을 잡지 않았다. 그저 의례적인 요구에만 응해주며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아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만 한다.
 ‘감을 더 날카롭게 다듬어야겠어. 각주가 저 정도인줄 미리 알았다면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모재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초구진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일단 우리가 각주와 제대로 손잡았다는 사실은 당분간 감춰야겠소.”
 “당연하지요.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감추겠습니다. 발톱은 숨기면 숨길수록 위험한 법이니까요.”
 초구진은 모재경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역사를 한 번 만들어 봅시다.”
 “바라던 바입니다.”
 모재경 역시 마주 포권을 취했다.
 두 사람의 입가에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곽우진은 하예설의 집무실에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는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오늘부터 지룡검대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예설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거기야 나 없어도 잘 돌아가잖아.”
 “그래도 대주가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는 다르다고요. 위에서 보는 눈도 있고…….”
 곽우진이 하예설에게 다가가며 씨익 웃었다.
 “내가 전에 얘기 안 했던가?”
 “예? 뭘요?”
 “난 눈치 같은 거 안 본다고.”
 그런 얘기 한 적 없다. 하지만 하예설은 굳이 그걸 꼬집어 말해 괜히 분위기 흐리고 싶지는 않았다. 크게 중요한 얘기도 아니고 말이다.
 그녀는 그저 웃어 주었다.
 “지룡검대는 오늘도 임무에 나가느라 바쁘거든. 그리고 난 바쁜 거 싫어하고.”
 “대원들이 뭐라고 안 해요?”
 “뭐라고 할 것 같아?”
 곽우진이 그렇게 물으며 씨익 웃자, 하예설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룡검대에 대해서는 그녀도 좀 알고 있다. 부대주인 문대량이 모든 대원을 한손에 휘어잡고 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마 지룡검대의 모든 대원들이 새 대주로 부임한 곽우진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아예 관심을 꺼주는 걸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모른다.
 보통은 이러다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거나,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든 다른 조직으로 부임해 가곤 했다.
 “왜 벌레 씹은 표정이야? 걱정 돼서?”
 하예설은 서둘러 씁쓸한 표정을 없애고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 리가요. 누구보다 잘 해내실 거 알아요.”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뭘 좀 아는구나. 그래. 내가 좀 하지.”
 “그래도 힘들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제게 말해주세요. 아셨죠?”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 곽우진이 빙긋 웃었다.
 “그래. 꼭 그러도록 하지. 대신 너도 그렇게 해.”
 하예설은 잠시 멈칫 했다가 이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요즘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특히 곽우진과 함께 세가로 돌아온 이후부터 그런 것 같아 그를 볼 때마다 더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당신 덕분이 일이 다 잘되는 것 같아요.”
 “그래? 잘 아네. 그거 다 내 덕분이야.”
 하예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니 알아서 모시도록.”
 곽우진이 그렇게 말하며 웃자, 하예설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네! 알아서 잘 모시겠습니다!”
 하예설은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포권을 취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곽우진이 지금 한 말이 혹시 농담이 아니라 진짜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곽우진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슬며시 허리춤에 있는 암야의 검에 손을 올렸다.
 이런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 검,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아, 네.”
 하예설은 화들짝 놀라 그렇게 대답하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수련 시간을 더 늘리고 싶을 정도로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검을 수련하는데, 그때마다 아쉬웠다.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온종일 검만 휘두를 수 있다면 며칠 내로 벽을 부수고 다음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데 좀 흥이 날 만하면 그만 해야 하니 매번 아쉽고 답답했다.
 하예설은 곽우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이런 검은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솔직히 아무데서나 파는 건 아니잖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암야의 검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나타난 적 없던 열한 번째 검.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세상이 한바탕 시끌벅적해질지도 모른다.
 “그거? 내가 만든 건데?”
 “예에?”
 하예설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뭘 그렇게 놀라?”
 하예설은 입술을 삐죽였다. 왠지 방금 그 순간만큼은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 바람에 검의 출처에 대해서는 더 묻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보다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데?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 오늘 우리 은월각의 부각주들이 절 찾아왔거든요.”
 “그래? 원래는 잘 안 찾아오나보지?”
 “네. 그랬죠. 한데 오늘 찾아와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듯이 말하더라고요.”
 하예설은 신나서 말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곽우진의 표정을 살폈다.
 하필이면 곽우진이 돌아오자마자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게 참으로 공교롭지 않은가.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거…… 공자님께서 하신 건가요?”
 “응? 뭘?”
 “부각주님들이요.”
 “난 그 사람들 얼굴도 모르는데?”
 하예설은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그렇죠?”
 “뭐…… 그래도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네. 사실 은월각에 올 때마다 너랑 다른 사람들이랑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거든.”
 하예설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누가 봐도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젠 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좀 걱정되긴 해요.”
 “걱정이 된다고? 왜? 너무 일이 잘 풀려서?”
 하예설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부각주들이 오늘 찾아와 자신에게 한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그리고 묵영이 정말로 자신의 조력자가 될지 아니면 감시자가 될지 몰라서 불안하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곽우진은 하예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왜, 왜 이러세요? 또…….”
 하예설은 곽우진의 행동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처음 이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럴 때마다 왠지 부끄러웠다.
 “네 장점이 뭔지 알아?”
 “예? 그, 글쎄요? 미, 미모?”
 하예설은 그렇게 말하고 어색하게 배시시 웃었다.
 “뭐…… 미모는 때론 장점이지만 단점이 될 수도 있어.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많겠지만.”
 하예설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곽우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했다.
 “네 장점은 단순하다는 거야.”
 “예? 그거 칭찬 아니죠?”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칭찬 맞아. 생각이 많고 복잡했다면 날 찾아왔겠어? 단순하니까 일단 저지르고 본 거지.”
 하예설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 말 그대로니까.
 “결과적으로 일이 이렇게 잘 풀렸잖아? 내가 여기 왔으니. 그러니까 현재를 즐겨. 복잡하게 고민하지 말고.”
 하예설은 곽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하예설이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자, 곽우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은월각 다음에 손아귀에 넣고 싶은 건 또 뭐가 있지?”
 곽우진의 말투가 가벼워졌다. 농담으로 받아들일 법도 하건만 하예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차분히 말했다.
 “북천하가 안에서 당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요. 이제부터 그걸 기를 거예요.”
 하예설은 빙긋 웃었다.
 “그러니 당신도 하고 싶은 걸 하세요.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 테니까요.”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하고 싶은 거라…… 그럼 그래볼까?”
 곽우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마 기대해도 좋을 거야.”
 
 북두십삼검
 
 “하! 하! 하!”
 연이은 기합과 함께 일백의 검이 일제히 허공을 찌르고 갈랐다.
 그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캬. 역시 대호 부르길 잘 한 거 같지 않습니까? 저 동작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 좀 보십쇼. 저것들이 한 달 전 그놈들이라고 누가 여기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공자님?”
 막철은 너스레를 떨며 슬그머니 옆에 선 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한데 곽우진의 표정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막철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자님? 저 정도면 진짜 대단한 거라니까요? 고작 한 달 아닙니까? 조금만 더 두고 보면…….”
 곽우진은 피식 웃었다. 막철이 뭘 염려하고 있는지 알기에 그런 것이다.
 순간 한 번 놀려줄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저놈들이 최소한의 힘을 갖춰야만 한다.
 “그나저나 북두십삼검을 누가 만든 거지?”
 “북천하가를 처음 세운 하지웅의 독문검법이었습죠.”
 “호오. 잘 아는구나.”
 막철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아예 인연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북두십삼검은 왜 그러십니까? 요결이라도 알고 싶으십니까?”
 그 말에 곽우진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막철이 어색하게 웃었다.
 “에헤헤. 그럴 리 없다는 거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그러니까 왜 빨리 말씀을 안 해주셔서 제가 쓸데없는 소리 하게 만드십니까? 헤헤헤헤.”
 “그 하지웅이라는 사람 언제 죽었지?”
 “예?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가만있자…… 북천하가가 문을 연 지…… 한 이백 년쯤 됐고…… 하지웅이 북천하가를 천하에 우뚝 세운 다음 그걸 이십 년쯤 누리다가 죽었으니까…….”
 막철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을 하다가 곽우진을 바라보며 마무리했다.
 “한 백오십 년쯤 된 것 같은데요?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사실 북두십삼검은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검법이잖아.”
 “물론입죠. 하지웅이 그걸로 북천하가를 일으켰다고 할 정도인데.”
 “한데 지금은 북천하가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저놈들이나 익히는 한물 간 검법이란 말이지.”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죠. 뭐…… 보시면 아시겠지만 딱히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검법은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북천하가를 대표하는 검법임은 분명했다.
 게다가 북천하가 내에서나 별 볼일 없는 무공이지 사실 세가 밖으로 나가면 상당히 훌륭한 검법이긴 했다.
 “그래도 무려 이백 년 전에나 이름을 날리던 검법 아닙니까.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무공도 제법 발전했고…….”
 “누가 그래? 발전했다고.”
 “에이, 우리 공자님 또 고집 세우신다. 그건 다들 인정하는 정설이라고요.”
 “그 기준이 되는 게 저 북두십삼검이고?”
 “그게 북두십삼검만 있습니까? 연뢰검(聯雷劍)도 그렇고 벽사십일섬(劈邪十一閃)도 그렇고, 굉뢰장(轟雷掌)도 그렇지 않습니까.”
 막철이 언급한 무공들은 다 이백 년에서 백 년 전쯤에는 천하를 들었다 놓을 정도로 대단한 무공이었다.
 하나같이 천하제일을 다투던 무공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저 그런 무공으로 전락해 있었다.
 물론 약하다는 게 아니라 일류 무공은 될지언정 그걸 넘어설 무언가가 없었다.
 “그 무공들 다 직접 보긴 했어?”
 “그럼 보지도 않고 제가 말할 거 같습니까? 당연히 봤습죠.”
 “그걸 봤다고? 북두십삼검이랑 벽사십일섬 빼고는 익힌 사람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
 북두십삼검은 북천하가의 독문검법이고, 벽사십일섬은 혈응방의 독문검법이었다.
 그렇기에 익힌 사람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북천하가야 말할 것도 없고, 혈응방은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는 방파였기에 천하 곳곳에서 그들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연뢰검이나 굉뢰장은 그렇지 않았다. 문파를 통해 전승된 무공이 아닌지라 익힌 사람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제가 누굽니까! 한때 알아주는 마당발이었잖습니까. 저어기 산적 놈들이 익히고 있더라고요.”
 “산적 놈들이?”
 “뭐…… 대단치 않더라고요. 딱 저기 보이는 북두십삼검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곽우진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요? 그럼 뭐 다른 거라도 있을 것 같습니까? 아아, 혹시 무공이 중간에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 때문에 그렇습니까? 에헤헤헤헤. 설마 정말 그거 때문에 그 말씀 하시는 거 아니죠? 우헤헤헤헤!”
 “글쎄. 가능성이야 충분하지.”
 “공자님. 고작 백오십 년이라고요. 게다가 다들 비급까지 존재하는 무공인데 그게 잘못 전해진다고요? 전수할 때 무공으로 부흥한 당사자가 죽은 것도 아닌데요?”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허얼. 아무리 공자님이라도 이건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렇게 자신만만하다 이거지?”
 막철이 가슴을 쫙 펴고 곽우진을 바라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죠.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럼 나랑 내기를 해도 되겠네?”
 “예? 내기요?”
 내기라는 말이 나오자 막철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머리를 팽팽 굴려봤다.
 막철이 보기에 곽우진은 참으로 대단한 주인이었다. 한데 그가 가장 대단해 보일 때는 바로 내기를 할 때였다.
 다른 때는 설렁설렁 하다가도 내기라는 단어가 딱 붙는 순간 사람이 달라져 버린다.
 ‘저 괴물이 아마 지금까지 내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지?’
 막철은 슬슬 그 불패의 사슬을 끊어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기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저렇게 내기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더더욱 그 가능성이 높아진다.
 “좋습니다. 내기 하죠. 노름을 끊으려면 손목을 잘라야 한다는데, 공자님이 내기를 끊으려면 고작 손목만으로는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우헤헤헤!”
 “그래? 그럼 내가 뭘 걸면 좋겠느냐?”
 곽우진이 담담한 표정으로 묻자, 막철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하나를 올리며 대답했다.
 “연옥환(煉獄環)이요.”
 “연옥환이라…… 아주 작정을 했구나?”
 “에헤헤헤! 쫄리면 그만두시고요.”
 “좋다. 내가 지면 연옥환을 주마. 그럼 넌 뭘 걸겠느냐?”
 “글쎄요? 저야 뭐 더 걸 게 있습니까? 어차피 평생 하인 노릇이나 하기로 했는데.”
 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분명히 걸 게 남아있다. 그동안 내가 네게 해주던 배려를 없애면 되거든.”
 막철이 황당한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예에? 배려요? 무슨 배려요? 심심하면 뒤통수 후리는 배려요? 아니면 지나가듯 말 몇 마디 툭툭 던져서 사람 부려먹는 배려 말입니까?”
 “마웅.”
 막철의 입이 지남철처럼 철썩 달라붙었다. 그야말로 술법 같은 이름이었다.
 “내가 이기면 마웅 불러도 되지?”
 “그, 그건…….”
 막철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아무리 이길 게 뻔한 내기라 해도 막상 마웅이 걸려 있으니 순식간에 간이 쪼그라들었다.
 “왜? 쫄려? 방금 네가 한 말 고대로 돌려줄까?”
 그 단순한 도발에 막철이 넘어갔다.
 “좋습니다. 맘대로 하십쇼. 대신 진짜 연옥환 주시는 겁니다. 나중에 후회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너나 후회하지 마라.”
 막철의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가 맴돌았다.
 이건 해보나 마나였다. 애초에 백여 년에 걸쳐 검증된 무공들이다.
 좋은 무공인 건 맞지만, 일정 경지 이상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수많은 무림 명숙들이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하나마나한 내기인데 그냥 연옥환 미리 주시면 안 됩니까? 헤헤헤헤!”
 “아직 내기 안 끝났다.”
 곽우진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막철은 어이없는 눈으로 곽우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쫓아갔다.
 “공자님! 어디 가십니까? 이러시기 있습니까? 제가 보기엔 이러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엔 다 끝났지 말입니다. 예? 공자님! 같이 가자니까요!”
 
 * * *
 
 천중원은 공터에 새로 나타난 사람을 슬쩍 쳐다봤다.
 ‘분명…… 새로 부임한 대주 맞지?’
 진짜 지룡검대에 필요한 문대량은 대체 어디에 가고 저런 쓸데도 없는 대주가 계속 나타나는지 의문이고 불만이었다.
 물론 천중원은 그 감정을 얼굴에 드러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아니, 이건 어리석음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였다.
 지룡대원들은 곽우진에게 불만 어린 눈초리를 잠깐 보냈다가 정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돌아온 경험이 다들 한두 번씩은 있었다.
 곽우진은 항상 지금처럼 느닷없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호장천은 그런 여유를 줄 정도로 설렁설렁 굴리지 않았다. 언제나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훈련시켰다.
 한데 오늘은 좀 달랐다. 곽우진이 나타남과 동시에 훈련이 끝난 것이다.
 ‘대체 뭘 하려고…….’
 곽우진은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지룡검대원들 앞으로 갔다. 그러자 호장천이 자리를 비켜줬다. 그 자리가 바로 훈련을 시키는 교관의 자리였다.
 “오늘부터 새로운 훈련 하나를 추가한다.”
 그 말에 다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도 죽을 것처럼 힘든데 여기서 또 뭘 추가한단 말인가.
 쿵.
 곽우진 옆에 거대한 철구 하나가 놓였다. 곽우진은 씨익 웃으며 지룡검대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곽우진의 미소가 마치 호장천이 자신들을 제대로 굴리기 직전에나 보여주던 미소와 닮아 있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어진 곽우진의 말에 그나마 얼굴에 남아 있던 핏기가 싹 사라져 버렸다.
 “지금부터 이 철구를 들고 보법을 펼친다. 시간은…… 일단 처음이니까 한 시진만 할까?”
 다들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 불신 가득한 눈으로 곽우진과 호장천, 그리고 바닥에 놓인 철구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건…… 우릴 진짜 죽이려는 술책이야. 분명해.’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입도 뻥끗 못 한다는 점이었다.
 ‘아아아. 울고 싶다.’
 다들 똑같은 생각을 했다.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척 보기에도 삼백 근은 나갈 것 같은 철구였다. 그걸 들고 보법 훈련을 하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저걸 들 수 있긴 할까?’
 그런 의문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었다. 아니, 의문이고 뭐고 이건 절대 불가능한 훈련이었다.
 “별로 무겁진 않을 거야. 좀 특별한 철구라서.”
 곽우진은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남은 건 호장천의 사나운 눈초리와 표정뿐이었다.
 지룡검대원은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 같은 얼굴로 각자에게 배정된 철구를 집었다.
 “헉!”
 처음 철구를 집어 들었을 때, 예외 없이 같은 소리를 냈다.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이게 별로 무겁지 않을 거라고? 이런 미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힘을 주고 나서야 간신히 철구를 배까지 끌어당길 수 있었다.
 당장 내던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거운 철구가 주는 고통보다 뇌리에 각인된 호장천의 공포가 훨씬 더 컸으니까.
 “북두십삼보, 시작!”
 호장천의 외침이 공터에 쩌렁쩌렁 울렸다.
 “끄으으응!”
 지룡대원들이 일제히 앓는 소리를 냈다. 철구를 들고 보법을 펼치려니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흘렸다.
 북두십삼보는 북두십삼검에 포함된 보법이었다. 즉, 북두십삼검을 제대로 펼치려면 북두십삼보가 반드시 필요했다.
 보법이 검법과 연계되어 있기에 그저 발만 움직여서는 제대로 된 보법을 펼칠 수 없었다.
 가끔 몸을 한껏 비틀기도 해야 하고, 또 상체를 앞뒤로 크게 움직여야 할 때도 있었다.
 한데 그 모든 동작을 이 무거운 철구를 들고 해야 하니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장난하나! 똑바로 못해!”
 호장천의 나직한 호통이 대원들의 귀에 파고들었다. 다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쿵! 쿵!
 몇몇은 철구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다들 사색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장천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요즘 훈련이 너무 편했던 모양이군. 그렇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룡대원들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마치 한 사람이 소리치는 듯했다.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훈련이다.”
 호장천은 더 호통 치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그저 담담히 말할 뿐인데, 평소에 워낙 무서운 목소리로 말해서 그런지 지금은 따스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원망스럽고 고통스럽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이걸 고마워할 날이 올 것이다.”
 물론 다들 속으로 개뿔이라고 투덜거렸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물론 속으로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이 싸지른 똥이나 치우고 다니는 거, 지겹지도 않나?”
 다들 울컥했다.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하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북천하가를 나가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리고 이제 북천하가에서 나가려면 여기서 받은 걸 고스란히 돌려주고 가야 한다.
 지룡검대가 북천하가에 두고 가야 할 것은 북두십삼검이었다. 그리고 그건 불가능했다. 팔을 잘라버리지 않는 한.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 그러니 오늘부터 잠을 반 시진 더 줄인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절로 팔다리에 힘이 쫙 들어갔다. 그들의 눈에 분노의 불똥이 튀었다.
 ‘으아아아악! 저 악마! 문 부대주님, 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다들 마음속으로 애타게 문대량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찾는 문대량도 사실 그들과 별다를 것 없는 처지였다.
 
 초대
 
 “공자님, 이런 게 왔는뎁쇼?”
 막철이 곽우진의 방에 들어가며 말했다.
 곽우진은 한창 서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뭔데?”
 시큰둥한 목소리를 들은 막철은 곽우진에게 다가가며 서탁 위를 힐끗 쳐다봤다.
 글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요상한 낙서를 끼적이는 중이었다.
 “뭐 하십니까? 다 큰 어른이.”
 곽우진은 대꾸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쓰던 건 옆에 있던 커다란 목갑에 차곡차곡 넣은 다음 뚜껑을 닫고 밀봉했다.
 막철은 곽우진의 손에 서찰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냐?”
 “초청장 같던뎁쇼?”
 “초청장?”
 “내용은 안 봐서 모릅니다. 그냥 짐작이지.”
 곽우진은 서찰을 펼쳤다. 그리고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호오. 이거 정말 초대장이네.”
 막철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어디서요? 왜요?”
 “북천하가를 이끌어갈 차기 주역들의 모임이란다.”
 “차기 주역? 그러니까 나이 좀 덜 된 놈들끼리 모여서 놀아보자, 이겁니까?”
 “뭐, 말하자면 그렇겠지.”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 과연 그럴까?”
 곽우진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초청은 아주 재미난 잔치가 될 것 같았다.
 
 * * *
 
 “과연 그놈이 오겠소?”
 참마단의 부단주 구천혁은 그렇게 말하며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묵룡검대의 부대주가 빙긋 웃으며 나섰다.
 “아마 올 거요. 차기 주역들의 모임에 오지 않을 리가 있겠소?”
 그 말을 황룡검대의 부대주가 받았다.
 “다섯 용검대의 대주가 다 모이는 자리라고 하면 오지 않을 수도 없을 거요.”
 “대주님들은 이번에도 안 부르는 거요?”
 “알리지도 않는 게 나을 거요. 우리와는 격이 다르다고 여기시는 분들이니까.”
 북천하가에는 용(龍)자가 들어가는 다섯 개의 조직이 있었다.
 각각 천룡검대, 비룡검대, 묵룡검대, 황룡검대 그리고 지룡검대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다섯 조직을 같은 반열에 두지 않는다.
 가장 위에 천룡검대가 있고 가장 아래에 지룡검대가 있었다.
 당연히 무공도 천룡검대가 가장 높았고, 지룡검대가 가장 낮았다. 각각의 조직에서 익히는 무공 또한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다섯 조직의 서열은 같았다.
 비공식적으로는 지룡검대의 대주가 다른 검대의 부대주보다 훨씬 못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다들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가끔 그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지룡대주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들은 이렇게 차기 주역들의 모임을 열곤 했다.
 딱히 그 모임에서 지룡검대주를 핍박하거나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게 된다.
 바로 무공이다.
 “그나저나 그 얼음 같은 하 각주에게 정혼자가 있었다니. 난 정말 깜짝 놀랐소.”
 묵룡부대주가 말하자,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마 다들 놀랐을 거요.”
 “그리고 엿 먹은 사람도 여럿 있고 말이오.”
 “하긴,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노리던 여인이었는데.”
 “하하하. 솔직히 말해보시오. 이 중에도 하 각주를 노리던 분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강 부대주는 어떻소?”
 “나도 사내요. 마음이 없을 리 있겠소?”
 천룡검대의 부대주인 강대휘의 말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하예설을 한 번도 마음에 둔 적 없다고 하는 사내가 있다면 남장여자인지 먼저 확인부터 해야 할 것이다.
 하예설의 미모와 매력은 그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그리고 이들 중 참마단의 부단주인 구천혁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하예설을 원했다. 그동안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는데, 딱 하나 생각대로 안 된 사람이 바로 하예설이었다.
 “구 부단주는 어떻소?”
 구천혁은 그 질문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사내요. 그리고 이젠 마음을 다 정리해서 별로 남은 감정이 없소.”
 “허어. 이거 우리보다 조금 더 진심이었던 모양이오.”
 구천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 웃었다.
 “저야 뭐, 워낙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이야기가 딴 데로 흐르는 것 같자, 이 모임을 주도하는 구천혁이 손뼉을 쳤다.
 짝! 짝!
 “자, 이제 논의를 마무리합시다. 그날 모이는 사람은 네 용검대의 부대주와 저까지로 하고, 지룡검대만 대주가 오는 걸로 결정하겠소.”
 “장소를 좀 특별한 곳으로 잡으면 어떻소?”
 “특별한 곳?”
 “새 지룡검대주이자 북천하가 제일 미녀의 정혼자가 과연 얼마나 재력이 뛰어난지도 한 번 알아보고 말이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이미 곽우진의 뒷조사를 마쳤다. 사실 그 조사는 북천하가의 정보력을 집중해서 이뤄졌다.
 하예설이 비록 후계자가 될 확률이 한없이 낮긴 했지만 그래도 후계자 후보의 정혼자이니 한 치의 불안감도 남겨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 결론이 약간의 재산을 물려받은 한량이었다.
 재산 정도는 그리 크지 않은 장원 하나와 약간의 전답이 전부였다.
 이곳에 오기 전 그걸 전부 처분했으니 아마 돈 몇 푼 외에 가진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천선루(天仙樓)가 어떻소?”
 구천혁이 미리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천선루라…… 과연 그자가 거길 감당할 수 있겠소?”
 “그걸 왜 우리가 걱정해야 하오? 그자와 그자의 정혼녀인 하 각주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아하!”
 그제야 다들 구천혁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직 미련을 못 버렸군.’
 어쨌든 논의는 그걸로 끝났다. 아마 이 논의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하예설의 정혼자인 곽우진은 정말 곤란해질 것이다.
 ‘어쩌면…… 파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 * *
 
 “공자님, 이쪽입니다. 이쪽. 아, 얼른 안 오시고 뭐 하십니까?”
 “오늘 모임에 초대된 건 난데 왜 네놈이 더 난리야?”
 “아, 천선루 아닙니까! 천선루!”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섭니까! 천선루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천하제일의 기루 아닙니까. 당연히 신나지요. 우헤헤헤헤!”
 “왜 신나는데?”
 “그야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술을 마시니까요.”
 “누가?”
 “아, 누구긴 누굽니…… 물론 공자님이시지요. 전 그냥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겠습니다. 예.”
 곽우진은 그런 막철을 보며 피식 웃었다.
 “됐다. 넌 거기 같이 있으면 사고 칠 거 같으니까 따로 마시자.”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럽니까? 하늘같은 공자님을 모셔얍죠.”
 “얼굴에서 웃음기나 지우고 말해라. 조금만 더 웃으면 입 찢어지겠다.”
 “우헤헤헤! 제가 원래 너무 순진하고 순수해서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지 뭡니까. 우헤헤헤헤!”
 곽우진은 더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게 티격태격 하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천선루 앞에 도착했다.
 “공자님, 저 정말 들어갑니다?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습니다? 예?”
 “한 번만 더 물어봐라.”
 막철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곽우진은 혀를 차며 막철을 지나쳐 먼저 천선루 안으로 들어갔다.
 “쯧. 아깝네. 한 마디만 더 하면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막철은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곽우진을 뒤따랐다.
 곱게 차려입은 기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두 사람에게 공손히, 하지만 색기 어린 표정과 몸짓을 섞어 인사했다.
 “됐고, 저 덜떨어진 놈은 혼자 마실 거니까 알아서 잘 챙겨줘라.”
 곽우진은 막철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은 몇 층으로 모실까요?”
 “흐음, 글쎄다…….”
 곽우진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을 늘이고는 막철을 슬쩍 쳐다봤다.
 막철이 한 손으로는 입을 막은 채 나머지 손으로 손가락 다섯 개를 쫙쫙 폈다. 몇 번이고 다시 해서 다섯이라는 숫자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 간절한 눈빛에 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봤지? 원하는 데로 데려가라.”
 그러자 기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막철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곽우진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먼저 온 일행이 있을 테니 안내해라.”
 그의 말에 기녀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들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못 알아뵈어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날 언제 봤다고. 모르는 게 당연하니 죄송할 거 없다.”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기녀들이 특별히 안내한 것도 아닌데 능숙하게 찾아가는 것이 마치 이곳에서 상주하며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천선루는 내부 구조가 제법 복잡했다. 그런데도 전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겨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 맞지?”
 “예. 마, 맞습니다.”
 기녀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곽우진은 그녀들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문을 활짝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일제히 시선이 모였다.
 “일찍들 오셨군. 뭔가…… 나만 빼고 놀 건 다 논 느낌인데?”
 “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대충 자리 잡고 앉으시오. 일단.”
 황룡부대주가 웃으며 말하자, 곽우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벌써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다들 얼굴이 불콰했고, 옆에 앉은 기녀들도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설마 사내대장부가 술 먹다 도망가진 않겠지. 여기 술상 좀 다시 차려봐라.”
 곽우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밖에서 하인과 시비들이 우르르 들어와 상을 말끔히 치우고 순식간에 술과 요리를 착착 상에 얹었다.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다.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잠깐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표정은 고소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천선루에서는 한 번 상을 차리고 계속 술만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시 상을 차리는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러려면 기녀들을 몇 명 더 불러서 질펀하게 노는 것이 훨씬 나았다.
 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상을 다시 차렸으니 돈이 얼마나 더 들어가겠는가.
 ‘이거…… 잘하면 간단히 쳐낼 수도 있겠는데?’
 이곳에 모인 자들은 곽우진의 재정 상황을 이미 꿰고 있었다. 그들이 파악한 바로는 절대 이걸 해결할 수 없었다.
 아니, 여기서 상을 한 번 더 차린다면 하예설이 개입해도 해결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천선루는 그 정도로 비싼 기루였다.
 ‘게다가 여기는 오 층이란 말이지.’
 천선루에서는 층을 하나 올라갈 때마다 가격이 곱으로 뛴다.
 이 층에서는 일 층과 똑같이 먹고 마셔도 두 배의 돈을 내야 했고, 삼 층은 세 배의 돈을 내야 한다.
 대신 각 층에서 부를 수 있는 기녀가 달랐다. 당연히 위로 올라갈수록 아름다운 기녀와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
 곽우진은 거기서 한 술 더 떴다.
 “술이 마음에 안 드는구나. 다른 걸로 가져와라.”
 “어떤 술을 원하시는지요.”
 옆의 기녀가 공손히 묻자, 곽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천선루에 왔으면 화선주(花仙酒)를 마셔야지.”
 화선주라는 말에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왜? 우리가 누군지 잊었어? 한 병으로는 모자랄 것 같으니 서너 병 가져오너라.”
 곽우진의 말에 기녀가 더 당황했다.
 화선주는 천선루에서만 파는 특별한 술이었다. 당연히 보유량도 많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손님에게만 보통 사람이 들으면 기절할 정도로 비싼 값을 받고 한두 병씩 파는 술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건 기녀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위에 물어봐야 할 일이었다.
 놀라서 후다닥 사라졌던 기녀는 잠시 후, 화선주 다섯 병과 함께 나타났다.
 상 위에 다섯 병의 술이 놓였다. 술병도 다른 것과 달랐다. 여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자태가 술병의 곡선과 어우러져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 그럼 마셔 봅시다.”
 곽우진이 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일이 너무 커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화선주는 명성을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했다.
 천선루가 이름을 날린 것은 아름다운 기녀 때문이 아니라 화선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화선주를 마신 모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소문이 돌 만했다. 그 정도로 훌륭했다.
 “아무튼 우리 북천하가에 오신 걸 환영하오.”
 모임을 이끄는 위치에 선 참마단의 부단주 구천혁이 곽우진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반가움만 있었다. 예전 하예설과 함께 있을 때 보여줬던 감정들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머지 네 사내도 저마다 잔을 들어 올리며 곽우진을 바라봤다.
 “반갑소.”
 곽우진은 그들을 슥 둘러보고는 잔을 살짝 들어 보인 다음 단숨에 술을 비웠다.
 그렇게 몇 순배 술이 더 돌았다.
 보통 때라면 다들 내공을 이용해 술기운을 좀 날려버렸겠지만 오늘은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선주의 즐거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특별한 술이었다.
 어느새 다섯 병이나 되던 화선주를 모두 마셨다.
 화선주는 맛과 향이 아주 특별하지만 그 못지않게 독한 술이기도 했다.
 각각 한 병씩 마신 셈이니 제법 취기가 얼큰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이런 기분 좋은 취기를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다른 술과 달리 화선주는 취하면 취할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선계에서 선녀와 함께 술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곽우진은 상황을 보며 빙긋 웃고는 기녀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기녀가 최대한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는 얼른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 또 다섯 병의 화선주가 상 위에 놓였다.
 “허어. 화선주가 별로 없어서 함부로 팔지 않는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
 묵룡부대주가 감탄을 하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의문이었는지라 옆에 있던 기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늘 평소보다 훨씬 많은 화선주가 들어와서 가능한 일이랍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운이 좋으신 거지요.”
 “허어. 그랬군. 화선주를 천선루에서 직접 담그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예. 사실 어디서 들여오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른답니다. 오직 루주님만 아실 뿐이지요.”
 천선루주는 아직 아무도 직접 대면한 적 없는 신비한 사람이었다.
 그 천선루주가 직접 나서서 들여오는 술인데다가 마실 수 있는 곳이 오직 이곳 천선루뿐이니 사실상 천선루에서 담근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우리가 오늘 운이 좋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
 묵룡부대주는 기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기녀가 공손히 잔에 화선주를 채워 주었다.
 다들 기쁜 얼굴로 술을 비워 나갔다. 마시면 마실수록, 또 취하면 취할수록 더욱 맛과 향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것이 화선주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쯤 되면 자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진짜 취했는데 취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뒤로도 무려 열 병의 화선주를 더 마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취기를 이기지 못해 곯아 떨어졌다.
 그리고 곽우진은 홀로 앉아 그 모습을 아주 멀쩡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너무 싱거운데?”
 최소한의 경각심을 갖고 있었다면 취기를 조절했을 것이다. 한데 이들은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방심할거면 칼밥 먹으면 안 되지.”
 곽우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며 말했다.
 “막철아! 아직 멀었냐! 이만 가자!”
 멀찍이 떨어진 방에서 다급한 막철의 외침이 튀어나왔다.
 “아우! 공자님! 진짜 이러시깁니까!”
 “하하하하! 그럼 평소에 잘 하든가.”
 “잘 하잖아요! 아니, 잘 할 게요! 예? 공자님! 저 진짜 지금은 안 돼요! 이제 막……!”
 곽우진은 빙긋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괴롭힐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곽우진은 홀로 천선루를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쏟아질 것 같은 별이 까만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좋구나.”
 한데 내용과 달리 말투는 왠지 좀 쓸쓸해 보였다.
 
 * * *
 
 “음?”
 거처인 은월각으로 돌아온 곽우진은 전각을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전각 곳곳에서 불빛이 새 나오고 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조직답게 할 일이 많은 거야 당연했다. 밤을 새는 일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건 상급요원까지의 일이었다. 그 위로 올라서면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훨씬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시간에 저렇게 각주의 방에서 불빛이 흘러나올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아직 안 자고 있었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곽우진은 은월각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곽우진의 침실은 각주의 침실과 딱 붙어 있었다. 사실 아무리 정혼한 사이라지만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전각을 따로 배정하는 것이 맞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하예설의 강력한 요구로 이뤄졌다.
 그녀는 그렇게 서로 가까이 있어야 곽우진이 북천하가에서 자리 잡기 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계속 도와줄 수 있으니 말이다.
 곽우진은 하예설의 방 앞에 섰다. 침실이 아니라 집무실이었다.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흠, 흠!”
 곽우진은 헛기침을 하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기척을 낸 것이다.
 열린 문을 통해 하예설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곽우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 뭐 해?”
 “기다렸죠.”
 “기다려? 누굴? 날?”
 하예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귀가 있어요. 오늘 무슨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원망이 살짝 뒤섞여 있었다.
 곽우진은 그런 하예설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가슴 아래 깔려 있던 텁텁한 감정들이 말끔히 씻겨 나갔다.
 “어이쿠, 그럼 어디에 갔는지도 알겠네?”
 순간 하예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천선루에 가셨다면서요?”
 “잘 아네. 다들 몰래 움직인 것 같던데.”
 “대주들은 안 나왔죠?”
 “그런 것 같더라고.”
 하예설은 다시 곽우진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으신 거죠?”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안 괜찮은 거 같아?”
 하예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괜찮아 보여요. 그런데 그래서 더 걱정돼요. 괜찮으실 리가 없는데 괜찮아 보여서요.”
 그녀는 곽우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힘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도움이 필요해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혼자서 알아낼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
 어느새 곽우진이 하예설 앞에 서 있었다. 하예설은 그 바람에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곽우진을 바라봤다.
 “괜찮아.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잊은 것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
 곽우진은 하예설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건 널 가주로 만들기 위해서야. 그걸 잊지 말라고. 내가 말했지? 네가 먼저 손을 놓지 않으면 내가 널 놓을 일은 없다고.”
 “알았어요.”
 곽우진은 고분고분 대답하는 하예설을 내려다보며 짓궂게 웃었다.
 “오늘은 가만히 있네?”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손이 더 거칠게 움직였다.
 “아이, 정말. 이제 그만 해요!”
 곽우진은 빙긋 웃으며 마지막으로 머리를 확 헝클어트린 다음 손을 떼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이게 뭐예요?”
 하예설은 머리를 매만지며 곽우진을 향해 가볍게 눈을 흘겼다.
 머리를 정돈한 하예설은 마치 관심 없이 지나가듯 슬쩍 물었다.
 “그런데…… 예뻐요?”
 “응? 그건 왜 묻는데? 뭐…… 예쁘지.”
 곽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하예설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렇게 예쁘던가요? 아주 술맛 좋았겠네요?”
 곽우진은 그제야 하예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처음에는 자기가 예쁘냐고 묻는 줄 알았다.
 곽우진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더욱 짓궂고 장난스럽게 변했다.
 “흐음. 천선루의 술맛이 정말 끝내주긴 하지. 기녀들도 특별하고.”
 “그래요? 아주 좋으셨겠네요? 남자들은 왜 그런 걸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봐야 자기 연인도 아닌데.”
 하예설이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삐죽이자,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곽우진은 그걸 보며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대신!”
 곽우진은 검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예설은 순간 입을 다물고 곽우진에게 집중했다.
 “무지무지 비싸.”
 “그, 그렇겠죠. 비싸기로 유명하잖아요.”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그, 글쎄요.”
 “궁금하지도 않고?”
 궁금했다. 과연 천선루 같은 기루에서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면서 사내들이 돈을 얼마나 쏟아 붓는지.
 하지만 궁금하다고 말하기가 왠지 싫었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곽우진은 씨익 웃으며 말해주었다.
 “일단…… 천선루 오 층에서 상을 한 번 차려 자리를 만들려면 황금 스무 냥이 필요해.”
 “화, 황금 스무 냥이요? 그렇게 많이요?”
 “벌써 놀라면 안 되지. 그건 그냥 상만 차리는 데 들어가는 돈이니까.”
 “그, 그럼…….”
 “기녀 한 명 부르는 데 같은 금액이 들어가.”
 하예설의 머릿속으로 계산이 착착 이뤄졌다. 어제 모인 사람이 곽우진까지 총 여섯 명이었으니 그것만으로 무려 황금 백사십 냥이 들었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곽우진이 상을 새로 차렸으니 황금 스무 냥을 추가해야 하고,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마신 술값까지 하면 거기에 또 황금은 몇 냥 더 추가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선루에서 진짜 비싼 건 화선주였으니까.
 화선주는 한 병에 무려 황금 오십 냥을 줘야 마실 수 있는 귀한 술이었다.
 그런 화선주를 무려 스무 병이나 마셨다. 화선주 값만으로 황금 천 냥이 나간 것이다.
 그야말로 눈이 휙 돌아갈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물론 하예설이 그걸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처음 들은 그 막대한 액수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정말…… 비싼 곳이군요.”
 금을 물 쓰듯 써도 아무렇지 않은 갑부들이나 가는 기루가 바로 천선루였다.
 하예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제 모인 자들의 속셈이 슬슬 드러난 셈이었으니까. 아마 저 막대한 술값을 곽우진에게 떠넘겼으리라.
 “그래서…… 얼마나 나왔나요?”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왜? 대신 내주기라도 하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죠.”
 “이야, 이거 마음씨 좋은 정혼녀네. 남편 될 사람 기루에 간 돈까지 챙겨주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요.”
 하예설은 곽우진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 넘겼다. 그래서 곽우진도 더 농담을 하지 않았다.
 “황금 천이백 냥.”
 “예?”
 하예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지금 얼마라고? 그녀는 분명히 잘못 들었을 거라 여겼다. 황금 백이십 냥이나 이백 냥을 잘못 말했으리라.
 “아까 말했잖아, 비싸다고. 황금 천이백 냥으로 퉁쳤어.”
 “그, 그걸 다…… 내신다는 건가요?”
 “누가? 내가?”
 하예설이 긴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곽우진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손을 휙 내저었다.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해. 내가 그걸 왜 전부 내? 딱 내 몫으로 이백 냥만 냈지.”
 “이, 이백 냥이요?”
 그것도 적은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천이백 냥에 비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럼 나머지는……?”
 “나머지를 왜 걱정해. 다들 알아서 내겠지.”
 곽우진의 얼굴에 떠오른 진득한 미소를 보며 하예설은 이번 일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끄으응.”
 간신히 눈을 떴다. 숙취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술을 마셨는데 숙취가 남아있겠는가.
 화선주를 마시면 숙취가 없는 건 물론이고 다음날 종일 활력이 샘솟는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술을 마셨을 뿐이다. 푹 자고 지금 일어난 것이다.
 구천혁은 눈을 껌뻑이며 천장을 바라봤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내가 술을 마시다가 잠들다니.’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취기가 깊어지면 내공으로 그걸 조금씩 날려 버리면서 조절할 수 있었다.
 한데 어제는 그러지 않았다. 마신 술이 화선주였기 때문이다.
 어제의 기억에 구천혁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화선주의 여운은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엉망이군.”
 화선주 때문에 계획했던 대로 진행된 게 하나도 없었다. 은근슬쩍 무공을 드러내 곽우진을 압박하는 것이 사실 가장 중요했는데, 그걸 못했다.
 “다들 일어나게. 슬슬 나가야할 것 같네.”
 해가 뜬 지 제법 되었다. 사실 지금 나가도 늦을 것이다. 하지만 이 꼴로 나갈 수 없으니 최소한 씻고 옷차림이라도 정돈하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으음, 설마 내가 잠든 건가?”
 “허어.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다들 신선한 경험을 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화선주의 진한 여운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 일부를 선계에서 뛰놀게 했으니까.
 “그놈은 간 건가?”
 “그런가보군.”
 “설마 그냥 가진 않았겠지?”
 “그럴 리가.”
 묵룡부대주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꾸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그때 시중을 들던 기녀들이 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너무 곤히 주무시는 것 같아 따로 안내하지 않고 이불을 덮어 드렸습니다.”
 “잘했다. 오랜만에 아주 편안히 잤으니까. 뭐…… 그냥 자서 좀 아쉽긴 하다만.”
 “세숫물을 대령해드릴까요? 아니면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목욕이라는 말에 다섯 사내는 음심이 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숫물을 다오. 대충 씻고 나가야겠구나.”
 기녀들이 직접 움직여 세숫물을 준비했다. 그녀들은 옆에서 세수 시중을 충실히 들었다.
 다들 크게 만족하며 방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나이가 좀 든 기녀가 다가와 공손히 봉투에 담긴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 어제 마신 비용이 적혀 있으리라.
 구천혁은 그걸 받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자는 그냥 갔느냐?”
 기녀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분께서 정확히 육 등분 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 말인즉슨 육분지일을 지불하고 갔다는 뜻이었다.
 “흥. 건방진 놈.”
 구천혁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지금은 나머지 돈을 지불하고 나중에 차근차근 해결하는 것이 순서였다.
 봉투에서 서찰을 꺼낸 구천혁은 그것을 펼쳤다. 그리고 그대로 얼굴이 굳어 버렸다.
 “왜 그러나? 얼마나 나왔기에 그래?”
 옆에 있던 묵룡부대주가 다가가며 물었다. 그리고 옆에서 금액을 확인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쳤다.
 “황금 천이백 냥?”
 천이백 냥이라는 말에 근처에 서 있던 나머지 부대주들도 화들짝 놀라 저마다 서찰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정확히 황금 천이백 냥이라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액수라고 생각하나?”
 구천혁이 나직이 끓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기녀도 이곳에 있으며 산전수전 다 겪어왔다. 고작 이 정도 일로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먼저 가신 분께서 이백 냥을 지불하고 가셨습니다. 나머지 천 냥만 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내역은 서찰에 함께 쓰여 있습니다.”
 기녀의 태도는 공손하면서도 단호했다.
 구천혁은 목록을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화선주가 비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한 병에 황금 오십 냥이나 하는 화선주를 스무 병이나 마셨으니…….”
 화선주가 오십 냥이라는 말에 다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마침 화선주가 잔뜩 들어와 많이 마실 수 있었던 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당장 수중에 이 정도 돈은 없다. 나중에 가져다 줘도 되겠느냐?”
 기녀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신원이 워낙 확실하신 분들이니 당연히 가능합니다.”
 그 말에 다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북천하가의 이름은 어디에서나 잘 먹힌다.
 “다만…… 정해진 기한 내에 지불하지 못하시면 북천하가에 직접 연통을 넣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세요.”
 “뭐, 그럴 일이야 있겠느냐? 걱정 말거라.”
 구천혁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주들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천선루에서 나온 구천혁은 분을 참지 못해 한동안 씩씩거렸다.
 “정말 괘씸한 놈 아니오? 그놈이 아니었다면 화선주를 그렇게 물처럼 마시지도 않았을 터인데!”
 생각해보니 정말 화가 났다. 상을 새로 차린 것도 그렇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 아닌가.
 “어쨌든 잘 된 것 아니오? 어차피 그놈에게 떠넘기려 했는데 액수가 클수록 일이 잘 풀리지 않겠소?”
 천룡부대주의 말에 구천혁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 문제는 그놈에게 어떻게 떠넘기느냐 하는 거였다.
 “그럼…… 서둘러 자리를 마련해야겠군.”
 “이번엔 좀 조용하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 모입시다.”
 “나도 그게 일처리하기 편할 것 같은데…….”
 “한데 그놈이 과연 나오겠소? 솔직히 이번에도 그놈이 우리 의도를 알고 일을 키운 것 같은데 말이오.”
 그 말에 다들 침묵에 잠겼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곽우진은 한 번도 당황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시종일관 분위기를 주도했고, 결국 다들 나가떨어지게 만든 다음 혼자 유유히 사라졌다.
 만일 작정하고 일을 벌인 거라면 정말 완벽하게 당한 셈이었다.
 “일단…… 시도해보고 그놈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식적인 자리를 만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공식적인 자리?”
 “아직 딱히 떠오르는 건 없소. 웬만하면 그 전에 잘 해결하는 편이 좋을 거요.”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나저나…… 화선주…… 좋긴 좋군.’
 다들 돌아가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어제 마신 화선주 뿐이었다. 그건 정말 대단한 술이었다.
 
 * * *
 
 “공자님, 뭐하십니까?”
 막철은 얼굴이 환해져서 나타났다. 그리고 곽우진 옆에 바짝 붙어서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면 즉시 해결해 주겠다는 듯 의욕이 하늘을 찌르는 얼굴로 서 있었다.
 “쟤들 구경.”
 막철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룡검대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구슬땀이라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폭포수처럼 땀과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아으, 힘들겠다.”
 그들은 여전히 철구를 들고 북두십삼보를 펼치고 있었다. 처음과 달리 제법 모양새가 잡혀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힘든 건 똑같았다. 아니, 이젠 훨씬 더 힘들었다. 호장천이 정확한 자세까지 요구했기 때문이다.
 자세가 맞으면 그 다음부터는 호흡까지 맞추라고 할 것이다.
 “어이구, 저게 과연 효과가 있겠습니까? 자고로 무공은 내공이죠, 내공. 저놈들이 익힌 내공심법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안 된다니까요?”
 “그래, 그래. 알았으니 그만 해라. 나중에 마웅 만날 생각이나 하면서 기다려.”
 막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우, 왜 갑자기 마웅 얘기를 하십니까.”
 “어젠 좋았냐?”
 “에헤헤헤. 그럼 안 좋았겠습니까? 헤헤헤헤.”
 “그나저나……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곽우진이 그렇게 중얼거리기 무섭게 지룡검대원들이 수련하는 공터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의 복장을 보니 참마단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지룡검대원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잠깐 보더니 혀를 차고는 얼른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나한테 오겠군.”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곽우진의 집무실에 그가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어쨌든 상대는 대주이니 예의를 갖춰야 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아직은 무릎 꿇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저희 부단주님께서 찾으십니다.”
 곽우진은 그의 말에 고개를 삐딱하게 하며 쳐다봤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오라고?”
 “예. 지금 즉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곽우진이 피식 웃었다.
 “됐다고 전해라.”
 “예?”
 “귓구멍에 말뚝이라도 박았나?”
 “예?”
 사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서 일 없다고 전하라고. 이 말을 그렇게 이해 못 하겠나?”
 “그, 그건 아닙니다만…….”
 보통은 이런 일을 겪으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사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룡검대에 와서 이런 꼴을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날뛸 수도 없었다. 아직 신임 지룡검대주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그리고 나도 저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
 그래도 명색이 하예설의 정혼자다. 숨겨둔 한 수나 든든한 배후가 있을 수도 있다.
 괜히 건드렸다가 잘못되면 자신만 손해였다.
 “우와, 잘하면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네.”
 막철이 슬그머니 끼어들며 말했다. 사내는 대번에 시선을 돌려 막철을 노려봤다.
 “공자님, 저한테 달려들 기세인뎁쇼?”
 막철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시선은 사내에게 고정한 채였다.
 사내는 그런 막철의 모습이 너무나 얄미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차하면 달려들어 곤죽을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곽우진이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게. 눈빛이 마음에 안 드네. 왜? 지룡검대주 따위가 이러니까 불만인가?”
 “그, 그런 건…… 아닙니다.”
 곽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니긴. 표정이랑 눈빛으로 다 말해놓고 입으로만 아니면 다야?”
 사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서 저 얼굴만 매끈한 놈을 구천혁 앞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저놈이 그 앞에서 쩔쩔 매는 꼴을 반드시 보고 싶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곽우진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기 아래에서 구르고 있는 놈들 보여?”
 “예. 보입니다.”
 전각 아래 공터에서는 지룡검대원들이 철구를 들고 비틀비틀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북두십삼보라는 사실은 한참을 보고 있어야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움직임이 어설펐다. 철구를 들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너 참마단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거기서 몇 번째쯤 하나?”
 “예?”
 “몇 번째로 강하냐고.”
 사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런 노골적인 질문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봤다.
 참마단에는 단주와 부단주 아래에 다섯 명의 조장이 있다. 그리고 조장들이 각각 열다섯 명의 대원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평대원이었고, 자신의 조에서 중간쯤 하는 실력이었다. 그러니 참마단 전체에서도 중간쯤 할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을 때, 곽우진이 말했다.
 “한 중간쯤 하나보지? 금방 대답이 안 나오는 걸 보면.”
 너무 정확해서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사내의 얼굴이 그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곽우진은 그의 기분 따위 고려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다시 묻지, 너 혼자 저기 있는 우리 대원들,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예?”
 “한…… 세 명 정도 동시에 달려들어도 이길 수 있나?”
 사내의 얼굴에 불쾌감이 가득 드러났다.
 지룡검대원 세 명이라니. 지금 장난 하자는 건가. 지룡검대원들 따위야 열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이길 수 있었다.
 아니 몽땅 덤벼도 체력과 내공만 허락하면 다 이길 수 있었다.
 “표정 읽기 참 쉬운 놈일세. 그럼 대답은 들은 걸로 치고…….”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사내를 보고 눈을 번득였다.
 “그럼 이렇게 하지. 저기 아래에 있는 우리 애들 셋이랑 붙어봐. 네가 이기면 참마단에 방문하는 걸 고려해보지.”
 “예?”
 사내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북두십삼검의 위력
 
 한창 수련에 열중하던 지룡검대는 잠시 휴식이 주어지자 얼굴에 화색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더 꿀맛 같았다.
 그렇게 쉬고 있는데, 곽우진과 막철이 나타났다. 낯익은 사내 한 명을 대동하고서 말이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곽우진이 그들 앞에 다가와 섰다.
 “음…… 누가 좋을까…….”
 곽우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룡대원들을 슥 둘러봤다. 다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일단 네가 좋겠군. 너, 나와.”
 곽우진이 가리킨 사람은 천중원이었다. 그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곽우진은 지룡검대주이니 그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호장천이 무서워서는 절대 아니지. 암.’
 천중원은 속으로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곽우진 앞으로 걸어가서 섰다.
 가까이 다가가니 곽우진 뒤에 서 있는 참마단원이 더 확실히 보였다. 그의 몸에서 투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거…… 뭔가 불길한데? 설마…… 저놈이랑 싸우라거나 하는 어처구니없고 얼토당토않은 짓을 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불행하게도 그 설마가 맞았다.
 곽우진은 그 뒤로 두 명을 더 골라냈는데, 다들 지룡검대에서 중간쯤 하는 실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물론 이 안에서 상중하를 나눠봐야 아무의미 없었지만.
 “내가 저들 셋을 상대하면 됩니까?”
 참마단원은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보는 순간 견적이 나왔다. 목숨을 빼앗아도 된다면 다섯 초식 안에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제압만 하는 거니 스무 초식 정도 필요할 듯했다.
 물론 실전에는 변수가 많기에 좀 달라질 순 있다. 하지만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저…… 대주님, 지금 상황을 저희들에게 좀…… 설명을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천중원이 나서서 물었다. 난데없이 불러내더니 참마단이랑 싸우라니, 이게 무슨 억지인가.
 “팔다리 잘라내면 안 되고……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를 칼로 찌르는 건 괜찮은 걸로 하지. 대련으로 목숨 걸 일은 없으니까.”
 곽우진은 천중원의 질문은 무시하고 참마단원에게 말했다. 참마단원은 당연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 편히 구경하고 계십시오.”
 그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풍겨 나왔다. 벌써 싸울 준비가 된 것이다. 과연 북천하가에서 손꼽히는 무력조직인 참마단다웠다.
 곽우진은 그 모습을 슬쩍 보고는 몸을 돌려 천중원을 비롯한 세 지룡대원을 쳐다봤다.
 “참마단이 용검대들보다 강한가?”
 “조금……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지?”
 “미미합니다. 단주의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받는 평가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평대원은 크게 실력 차이가 없다는 뜻이네?”
 “뭐…… 그렇긴 합니다.”
 천중원은 즉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룡대는 좀 다릅니다.”
 곽우진은 거기에 대해서는 묻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너희 셋이 저놈 하나를 못 이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네?”
 “아니…….”
 “내가 왜 셋을 붙였는지 알아?”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천중원은 하려던 말을 잊고 곽우진을 바라봤다.
 “죽여선 안 되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셋이서 하나를 상대하면 압도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럼 가벼운 부상, 그러니까 걷거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부상으로 끝낼 수 있잖아. 안 그래?”
 천중원은 속으로 그 부상을 입는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일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왠지 그 말을 한 순간 더 큰 시련이 닥쳐 올 것 같다는 육감이 등줄기를 계속 자극했기 때문이다.
 “자, 너희가 가진 무기는 뭐다?”
 천중원은 멍하니 있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패, 패기?”
 “그 무슨 멍청한 말이야? 너희한테는 북두십삼검이 있잖아.”
 “예? 북두십삼검이요? 지금 그걸로 저 사람을 상대하란 말입니까?”
 “아니면? 그거 말고 다른 무공 아는 거 있어?”
 “그야…… 대호…….”
 “대호수련검? 그건 실전용이 아니라 수련용이야. 그걸로 싸우면 단숨에 목이 달아날걸?”
 천중원을 비롯한 세 지룡대원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정말로 저 말대로 될 것 같아서 절로 목이 움츠려들었다.
 “저…… 대주님, 대주님께서 아무래도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 같은데…….”
 “몰라? 내가 뭘 모르는데?”
 “참마단에서 익히는 무공은 십참마도(十斬魔刀)라는 건데…… 북두십삼검으로 그걸 상대하는 건 어린애가 어른한테 덤비는 거랑 비슷합니다.”
 “그걸 제대로 알고 말고는 내가 판단해. 너희는 그저 내 명령에 따라서 저놈이랑 싸우면 돼.”
 “아…… 그, 그렇군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천중원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참마단원 앞에 섰다. 그런 천중원 양 옆으로 나머지 두 명의 지룡대원이 각각 섰다.
 “아까 말했지? 죽여도 안 되고 팔다리 잘라도 안 된다고. 명심해. 그리고 딴 생각하지 말고 꼭 북두십삼검 쓰고.”
 누구 명이라고 어기겠는가. 만일 이 자리에 호장천이 없었다면 몰라도 그가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감히 곽우진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대호수련검을 쓰는 게 승산이 높을 것 같은데…….’
 무공에 그리 박식한 것도 아니고 무공에 대한 깊이도 얕았지만 그동안 겪은 대호수련검은 절대 평범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걸 익히면서 달라지는 자신을 보며 점점 호장천에 대한 두려움에 고마움이 조금씩 덧입혀지고 있었다.
 ‘오늘로 그것도 끝날 것 같군. 저놈 눈빛을 보니까 팔 한 짝은 내줘야 할 것 같아.’
 천중원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리고 깊숙한 곳에서 독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었다. 게다가 상대도 지금 독기 품고 자신을 해치려 하지 않는가.
 ‘좋아. 어디 해보자고. 팔 하나 내준다고 생각하지 뭐.’
 천중원뿐 아니라 두 명의 지룡대원의 눈빛에도 독기가 스며들었다.
 “자, 준비 됐지?”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참마단원을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냅다 외쳤다.
 “시작!”
 먼저 반응한 건 천중원이었다.
 참마단원은 저들이 먼저 공격하면 그걸 받아치는 걸로 이미 계획을 세워둔 뒤였다.
 천중원의 몸이 눈부신 속도로 참마단원을 향해 짓쳐들었다. 달려든 자신이 놀랄 정도였다.
 이것은 북두십삼검의 세 번째 초식이었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듯하지만 사실은 비스듬히 옆으로 이동해 측면을 공격하는 수법이었다.
 천중원이 참마단원의 오른쪽을 공략하자 나머지 두 지룡대원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참마단원의 왼쪽을 공격했다. 천중원과 같은 초식이었다.
 다만 한 명은 더 깊이 들어가 실제로는 참마단원의 뒤를 공격하는 셈이 되었다.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딱딱 맞아 떨어지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참마단원은 고작 그 정도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채채채채채챙!
 그들의 검격은 아주 간단히 무위로 돌아갔다. 참마단원의 도가 공격을 모조리 쳐낸 것이다.
 참마단원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고작 이 정도라면 더 시간을 끌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의 도가 빠르고 무겁게 움직였다.
 후아앙!
 천중원은 바람을 가르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도를 보며 반사적으로 북두십삼검의 일곱 번째 초식을 펼쳤다.
 그것은 회피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초식이었다.
 몸을 비틀며 검을 올려쳤다.
 쩡!
 도격이 위로 살짝 비틀렸다. 천중원은 몸을 바짝 낮추며 위로 궤적이 변한 도격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몸을 회전시키며 참마단원의 허리를 베어갔다.
 아주 시기적절한 초식이었지만 그걸로 참마단원을 어쩌기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머지 두 지룡대원이 각각 북두십삼검의 다섯 번째와 아홉 번째 초식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순간 참마단원은 무수한 검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헉!”
 깜짝 놀라 급히 몸을 회전시키며 온 힘과 내력을 폭발시키듯 사방으로 도격을 날렸다.
 슁슁슁슁슁!
 쩌저정!
 수십 번의 도격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고작 세 번의 소리가 울렸다.
 처음 도격으로 가른 것은 모조리 착각으로 빚어진 환상이었던 것이다.
 참마단원이 당황한 순간, 싸움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도격에 의해 막힌 지룡검대원들의 검은 그 힘을 이용해 아주 자연스럽게 새로운 초식을 뿜어냈다.
 이번에는 첫 번째, 네 번째 그리고 열두 번째 초식이었다.
 콰콰콰콰콰!
 참마단원은 파도치듯 밀려드는 검기 다발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피슉! 피슉! 피슉!
 참마단원의 옆구리와 허벅지, 어깨에 그리 얕지 않은 검상이 생겨나며 피가 튀었다.
 그리고 천중원과 두 지룡대원은 뒤로 후다닥 물러나 처음 자리에 섰다.
 그들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긴장과 흥분을 이기지 못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세 사람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피 흘리는 참마단원을 바라봤다.
 ‘우리가…… 이겼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내 몸이 평소와 다른 것 같아…….’
 세 명은 각각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곽우진을 바라봤다.
 “뭐, 좀 아슬아슬했지만 성공했으니 봐주지. 너, 하마터면 팔 자를 뻔한 거 알지?”
 “예? 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면 됐어.”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고 세 사람에게 턱짓을 했다. 그들은 후다닥 나머지 대원들이 앉아 구경하는 틈으로 들어갔다. 원래 쉬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쉬지 못했다. 방금 전 싸움이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곽우진은 참마단원에게 다가갔다.
 “자신감에 비해 실력이 형편없는데? 슬슬 돌아가서 내 말을 전하는 게 어때?”
 참마단원은 심각한 얼굴로 곽우진을 노려봤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룡대가…… 달라졌어.’
 제대로 된 조사가 필요했다. 저들이 쓴 건 분명히 북두십삼검이었다. 한데 그걸 과연 북두십삼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지. 내가 고작 북두십삼검에 당할 리 없어.’
 참마단원은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어라? 그냥 그러고 가게? 인사도 안 하고?”
 곽우진의 얄미운 말에 참마단원이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를 한 다음 다시 돌아섰다.
 쩔뚝이며 멀어져가는 참마단원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곽우진이 저 멀리 서 있는 막철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막철은 곽우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슬그머니 시선을 이동해 곽우진을 바라봤다.
 곽우진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여 ‘마웅’이란 두 글자를 만들었다.
 막철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곽우진은 막철에게 신경을 끄고 지룡대원들을 슥 둘러봤다.
 그들의 눈빛이 전에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때? 이제 보람이 좀 느껴져?”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눈빛으로 대답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이제부터는 그냥 힘들게 몸만 축내지 말고 생각이란 걸 해.”
 곽우진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여길 쓰라고. 이 수련을 통해 뭐가 달라졌는지, 또 왜 달라졌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고.”
 곽우진이 씨익 웃으며 마무리했다.
 “그럼 진짜 달라질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서 공터를 나서는 곽우진의 뒷모습을 모든 지룡대원들이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막철이 후다닥 곽우진의 뒤를 따랐다. 왠지 온몸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산적소탕전
 
 참마단의 부단주 구천혁은 심각한 얼굴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릴 때마다 탁자가 움푹움푹 들어갔다.
 콰득!
 그러다가 결국 귀퉁이를 움켜쥐고는 그걸 거칠게 뜯어냈다. 부서진 탁자가 조각조각 가루가 되어 우수수 흩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툭툭 털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하인들이 들어와 부서진 탁자를 내가고 새 탁자를 들여왔다. 그리고 방을 깨끗이 청소했다.
 
 * * *
 
 “막철아.”
 곽우진은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댄 채, 발을 탁자 위에 올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부름에 막철이 후다닥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배려로 똘똘 뭉치신 배려의 공자님. 헤헤헤헤.”
 “오오, 이제야 내 배려심과 자비심에 대해 네가 조금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가 공자님을 모신 지 벌써 몇 년인데요. 헤헤헤헤. 처음부터 공자님께서 얼마나 지고한 인격을 갖추신 분인지 딱 보고 알았습죠. 예.”
 “그래, 좋다. 오늘 그 말로 하루 벌었다고 생각해라.”
 “예? 달랑 하루요?”
 곽우진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막철을 쳐다봤다.
 “왜? 너무 길어서 그러느냐?”
 “어이쿠, 그럴 리가요. 아주 딱 적당하십니다, 공자님. 에헤헤헤헤헤.”
 막철이 헤픈 웃음을 흘리며 손바닥을 비비자, 곽우진이 다시 표정을 원래대로 하고는 물었다.
 “천선루는 어떻게 되었느냐?”
 “제대로 돈을 받은 모양이던데요?”
 “호오. 일단 돈을 냈구나?”
 “시간이 없었잖습니까. 공자님을 만나야 뭐라도 해볼 텐데 그러질 못하니 그놈들이 뭐 별 수 있었겠습니까?”
 “돈은 어디서 마련했는지 알고?”
 “두 놈은 원래 돈이 좀 있는 모양이고, 세 놈은…… 으흐흐흐. 피 묻은 돈 귀신한테 손을 벌렸던데요?”
 “피 묻은 돈 귀신? 혈금귀(血金鬼)?”
 혈금귀는 고리대금업자 중에서도 악질로 유명한 놈이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수많은 대리인을 통해 움직였다.
 그렇기에 혈금귀한테 당한 놈들 중에 진짜 그에게 당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그놈한테 엮인 거야?”
 “에이, 선수끼리 왜 이러십니까, 공자님.”
 “선수는 무슨 선수. 어쨌든 돈까지 빌렸으니 슬슬 애가 타서라도 날 찾아오겠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혈금귀라도 북천하가와 정면으로 싸울 생각은 없을 테니 이번엔 시간이 좀 걸리겠군.”
 곽우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그놈들이 일부러 시간을 끌 수도 있고요.”
 “일부러? 아하, 날 좀 더 크게 엿 먹이려고?”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차용증만 떠넘기면 될 테니까요.”
 “그놈들 어떤 조건으로 돈 빌렸는지 알아봐. 얼마나 막나가려는지 보게.”
 “에헤헤헤. 공자님께서 그러실 줄 알고 제가 이렇게 미리 정보를 싹 빼왔습니다요.”
 막철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잘 접은 종이 한 장을 샥 꺼냈다.
 그리고 열망이 가득한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곽우진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막철은 정성껏 그 종이를 곽우진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종이를 펼쳐 내용을 확인한 곽우진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율이 아주 바닥이네? 혈금귀가 이런 계약을 했다고?”
 “에이, 공자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혈금귀가 어떤 놈인데요? 제일 아래에 있는 문구를 확인하십쇼.”
 곽우진이 확인한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삼십 일의 기한을 넘길 때마다 이자를 두 배로 한다.
 삼십 일마다 이자가 두 배로 뛰는 말도 안 되는 계약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만 갚으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은 이자로 해결할 수 있었다.
 “아예 바보들은 아니로군.”
 “그래도 명색이 북천하가가 자랑하는 용검대의 부대주인데 그 자리를 땅따먹기 해서 땄겠습니까?”
 “그래도 그뿐이네. 이놈들은 변수라는 걸 아예 생각지도 않는 건가?”
 “그동안 변수를 경험할 일이 거의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삼십 일의 기한을 둔 것은 차용증을 곽우진에게 넘길 때 압박을 주기 위함이었다. 또, 안전장치 하나를 만드는 의미도 있었다.
 곽우진에게 차용증을 떠넘기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그때가 되어 다른 방법으로 돈을 만들면 된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도 그때까지 뭔가 대비를 해둘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곽우진이었다. 곽우진이 차용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딱 분위기 보니까 이놈들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뎁쇼? 공자님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곽우진이 그 말에 씨익 웃으며 탁자 옆에 쌓인 보고서 중 한 장을 꺼내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것 때문이겠지.”
 “그게 뭡니까?”
 “명령서.”
 “명령서야 매일 내려오지 않습니까요.”
 지룡검대는 임무가 많다. 물론 다들 자잘한 임무였다. 심할 때는 하루에 두세 장의 명령서가 동시에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과 연결하면 아주 특별한 임무로 바뀌거든.”
 막철이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곽우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산적소탕.”
 
 * * *
 
 “뭐야? 오늘은 또 무슨 일인데 이렇게 훈련도 안 하고 모이는 거야?”
 아직 해가 채 지지 않았다. 오늘 수행한 임무는 그리 힘들지 않아서 시간이 제법 많이 남았다.
 그러니 당연히 지독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게 없으니 오히려 불안했다.
 지룡검대원들은 공터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에 호장천이 서 있었는데, 그는 정말 미동도 않고 똑바로 서서 곽우진을 기다렸다.
 뒤에서 그 광경을 본 천중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정도면 이건 병에 더 가까운 거 아닌가?’
 자신도 문대량을 대단히 존경하고 따르지만 저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후, 곽우진이 공터에 들어섰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막철이 그 뒤를 졸졸 따르고 있었다.
 “다들 너무 굳어 있는 거 아냐? 편히 쉬어, 편히.”
 곽우진은 지룡대원들 앞에 서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진하게 그걸 믿기에는 최근 호장천으로부터 받은 고통의 경험이 너무 깊었다.
 “새 임무가 내려왔다.”
 새 임무라는 말에도 다들 심드렁했다. 임무야 항상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오늘만 해도 임무에 나갔다가 방금 복귀하지 않았던가.
 “이번 임무는 산적소탕이다.”
 그 역시 별다를 게 없었다. 흑도에서 구르는 놈들을 잡아 족치는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상황이니까.
 “여기까지는 그동안 받은 임무들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지?”
 다들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곽우진의 말에 일제히 얼굴이 굳었다.
 “이번에는 좀 다를 거다. 묵룡검대랑 같이 가야 하거든.”
 다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긴장한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묵룡검대랑 같이 가다니, 그 말인즉슨 그놈들 뒤나 닦으며 쫓아다니란 뜻 아닌가.
 “공동작전이다. 같이 가지만, 따로 움직인다. 우리가 먼저 산적들과 싸우고 있으면 묵룡검대가 뒤를 친다는 계획이다.”
 얘기만 들으면 그럴듯했다. 한데 뭔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지룡대원들의 감을 자극했다.
 천중원은 묻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심정을 억지로 누르며 곽우진과 호장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모습을 곽우진이 발견하지 못할 리 없었다.
 “거기, 질문 있나?”
 천중원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키며 묻는 곽우진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얼른 입을 열었다.
 “산적토벌에 묵룡검대까지 나간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냥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적호채(赤虎寨)를 칠 거거든.”
 “저, 적호채?”
 적호채라는 말에 다들 기겁했다.
 “그, 그럼 적호채와 정면에서 싸워야 한단 말입니까?”
 “나중에 묵룡검대가 뒤를 칠 거니까 오래 싸울 필요는 없어.”
 천중원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마, 만일 묵룡검대의 지원이 늦으면…….”
 “그럴 리가 있겠어? 아무리 부대주가 나한테 유감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예? 유감이요?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천중원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별 거 아니니까 걱정 마. 너희는 적호채 놈들을 어떻게 요리할지나 고민해.”
 “그……. 후우.”
 천중원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한숨과 함께 그것을 다시 삼켰다.
 솔직히 지금 누가 누굴 요리한단 말인가. 적호채 놈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고 피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슬슬 이번 임무의 목표를 알려줘야겠군.”
 “목표가 따로 있습니까? 그냥 적호채를 상대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군요?”
 천중원은 일말의 기대를 갖고 곽우진을 바라봤다. 그럼 그렇지, 그 대단한 적호채를 자신들이 상대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곽우진은 씨익 웃으며 검지를 착 들어올렸다.
 “최대한 빨리 그놈들을 쓸어버리고, 그동안 항상 너희가 해왔던 일들을 묵룡검대한테 떠넘기는 거야.”
 “예에에?”
 천중원이 기겁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화등잔만 해진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 그러니까 그 목표라는 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세운 목표고, 너희는 대주의 명령에 따라서 당연히 그걸 해내야 하는 거지.”
 ‘그게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었지만 결국 소리를 입힐 수 없었다.
 천중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민에 빠졌다.
 ‘이 심각한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지?’
 적호채는 기본적인 전투 인원만 백오십 명이 넘는다. 뿐 아니라 두 명의 부채주는 무공이 상당해서 묵룡검대라 할지라도 세 명은 붙어야 상대가 가능했다.
 부채주가 그럴진대 채주는 어떻겠는가.
 적호채의 채주인 적호쌍부(赤虎雙斧) 척광후는 두 자루 도끼를 귀신 같이 쓰는 자로, 최소 묵룡검대의 부대주는 나서야 상대가 가능할 정도의 고수였다.
 그리고 채주나 부채주 정도는 아니지만 묵룡검대원 정도의 실력을 가진 고수가 열 명 정도 있었다.
 그런 자들을 지룡검대가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곽우진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지룡검대원들을 둘러봤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서 마치 상갓집을 보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자신감들이 없어서야 원.”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중원을 향해 물었다.
 “얼마 전에 참마단에서 온 놈 상대해 봤지? 어땠어?”
 “예? 그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야 좀 긴장하고 당황해서 헤맸지만 다시 싸운다면 다섯 초식 안에 목숨을 끊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적호채의 산적들이랑 참마단이랑 비교하면 어때?”
 천중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비교도 할 수 없다. 참마단은 다른 용검대에 비해 반수 정도 강했다.
 곽우진은 씨익 웃었다.
 “아직 멀었지만, 너희 생각보다 그리 약하지 않아. 이번에 그걸 한번 증명해 보자고.”
 “하지만…….”
 천중원은 그래도 걱정이 많았다. 다른 놈들이야 그렇다치고 채주와 부채주는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가 그리 걱정이 많아?”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턱짓을 했다. 천중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호장천이 여전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아……!”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굉장한 전력을 가진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점차 분위기가 살아나는 걸 보며, 곽우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번 산적토벌,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지룡검대가 북천하가의 정문을 나섰다.
 그들은 오와 열을 맞춰 걸었고, 그들이 세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곽우진이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곽우진 옆에는 하예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 세상 근심 다 가진 표정이야?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아, 아뇨.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전 그저…….”
 하예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걱정이 되어서요. 적호채는 그냥 산적이 아니에요. 그들은 녹림맹의 일원이에요. 어쩌면 그들뿐 아니라 다른 산채도 끼어있을 수 있어요.”
 곽우진은 걱정 어린 하예설의 표정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슥 하고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다 생각해 두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나저나 넌 어때? 잘 되고 있는 거야?”
 “저야, 뭐…….”
 그냥 잘 되고 있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은월각이 그녀의 손발이 되어 착착 움직이고 있었다.
 필요한 정보는 말만 하면 즉시 손에 들어왔고, 매일 부각주들이 해주는 정기보고를 통해 북천하가는 물론이고 무림 전체의 움직임을 크게 조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모자란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이제야 간신히 숨통이 트인 정도였다.
 그러니 더 발버둥치고 애써야만 한다. 그래야 다른 후보들과 비슷한 위치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그 묵영이라는 녀석, 믿을 만한가?”
 곽우진은 난데없이 묵영에 대해 물었다.
 묵영은 두 부각주가 갑자기 찾아와 정기보고를 시작한 날에 그녀에게 붙여준 호위이자 연락책이었다.
 “예? 갑자기 묵영은 왜요? 제가 보기엔…… 괜찮아요. 다만…….”
 “또 다만이야?”
 곽우진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자, 하예설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뛰어난 거 같아요.”
 “너무 뛰어나다?”
 하예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 안목이 아직 많이 모자라서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그래도 묵영이 우리 부각주들보다 뛰어나다는 건 알 수 있어요.”
 “호오. 부각주보다 뛰어나다고?”
 “예. 은월각의 부각주 자리는 저랑은 달라요. 바닥에서부터 공적을 쌓고 또 쌓아서 얻은 자리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실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경험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부각주라는 자리는 좀 더 높은 곳에서 크게 상황을 볼 수 있는 눈까지 키워준다.
 그런 경험과 실력 위에 부각주라는 자리까지 얹었으니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한데 그런 부각주들보다 묵영이 더 뛰어나다니 웬만해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곽우진은 그 말을 들으며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곽우진은 다시 하예설을 보며 씨익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이, 참! 뭐 하시는 거예요!”
 “대견해서. 이제 사람도 제법 볼 줄 알고 말이야.”
 “예?”
 곽우진의 말에 그녀는 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잊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은 묵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명심하고. 지금까지처럼 딱 그 정도면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하예설은 굳은 표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처럼 하라는 말은 쉬우면서도 어려웠다. 모르고 있다면 별 것 아니지만, 이미 의심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해낼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라도 묵영이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거처에 남아 있으라고 지시하고 오긴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아마 특별히 지시를 어기는 일은 없을 거야. 그 정도는 되는 놈이니까.”
 곽우진은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그럼 다녀올게. 예상보다 좀 더 걸릴 수 있으니까 너무 애타게 기다리진 말고.”
 하예설은 애타긴 누가 애타냐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곽우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잘…… 다녀오세요.”
 들릴 듯 말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곽우진이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내 지룡검대와 곽우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예설은 그 뒤로도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않고 곽우진이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 * *
 
 “헉헉헉!”
 지룡검대는 쉬지 않고 달렸다. 처음 북천하가를 나올 때만 해도 그저 질서정연하게 걷기만 하면 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호장천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호장천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오랫동안 달리는데도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면 지룡검대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잠시 휴식!”
 호장천의 외침에 다들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그냥 달린 것도 아니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끝까지 달려가기만 하면 나중에 싸울 힘이나 남을까?’
 게다가 정작 대주인 곽우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이거 계속 우리끼리 달려야 하는 건가?”
 “그러게. 결국 적호채랑 목숨 걸고 싸울 때도 대주는 못 보는 건가?”
 대원들 사이에서 살짝 불만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불만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천중원은 불안한 눈으로 호장천을 바라봤다.
 지금 상황을 잘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은 호장천뿐이었다. 또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사람도 그였다.
 만일 호장천이 평소처럼 아주 강하게 나온다면 대원들의 불만이 훨씬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임무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대주님은 먼저 목표인 적송산에 가셨다. 아마…… 우리보다 사흘은 먼저 도착할 것이다.”
 다들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호장천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동에만 닷새나 걸리는 거리였다. 그것도 오늘 같은 강행군을 변함없이 유지한다면 그렇다.
 아마 실제로는 며칠 더 걸려야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그렇게 먼 곳을 고작 이틀 만에 간다는 얘기 아닌가. 하루에 천 리를 간다는 적토마라도 타고 달린다면 모를까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그리고 너희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내일은 오늘처럼 쉬엄쉬엄 달리지 않는다. 내일은 오늘의 두 배를 가야 하고, 모레는 세 배를 가야 한다.”
 다들 입이 쩍 벌어졌다.
 오늘도 몸이 부서질 것 같이 힘들었는데, 내일은 두 배로 빨리 달린다고? 게다가 모레는 세 배?
 아마 그렇게 하면 아무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부대주님, 그렇게 하시면 아무도 싸움에 참여하지 못할 겁니다.”
 천중원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아무리 두려워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차라리 지금 터트리는 게 나중에 적호채와 싸우다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싸울 수 있다.”
 천중원이 아연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호장천은 오히려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넌 날 바보로 아는 건가?”
 그 말 한 마디에 천중원은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호장천이 불가능한 일을 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대로 더 하면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수십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진짜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오히려 그가 요구한 그 무리한 훈련을 모두 완벽하게 해냈다.
 ‘그동안은 생각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거 정말 굉장한 거 아닌가?’
 천중원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호장천을 바라봤다. 그리고 사죄의 뜻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지금은 최대한 쉬어야 한다. 이어질 강행군에서 조금이라도 더 버티려면 말이다.
 
 * * *
 
 호장천이 말한 대로 곽우진은 벌써 목표인 적송산 아래에 도착해 있었다.
 정확히는 적송산이 아닌 그 아래에 형성된 제법 커다란 마을에 도착했다.
 거대한 산적 패거리가 있는 산 아래에 이렇게 커다란 마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적호채는 이 마을을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도 먹고 살려면 칼든 놈만 필요하지 않다. 먹을 것도 필요하고, 때로는 여자도 필요했다. 그리고 적호채 정도 규모의 산채를 운영하려면 싸울 놈만 있어선 안 된다.
 적호채는 이 마을을 이용해 그걸 해결했다.
 당연히 마을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을에는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상단도 여럿 있었다. 적호채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빼앗고 긁어모은 재물들을 여기서 처분하기 때문이다.
 “히야, 공자님! 저기 좀 보십쇼. 여기 기루까지 있는뎁쇼?”
 “그래? 호오, 규모가 제법이구나.”
 “하긴 산적 놈들이 백오십이나 있는데 그놈들이 한꺼번에 오진 않아도 수십 명씩 몰려올 텐데 그걸 다 상대하려면 규모가 저 정도는 되어얍죠. 암요. 으흐흐흐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그렇게 웃지 마라.”
 “허어. 공자님. 자고로 기루를 보고 그냥 지나치면 사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밤이 오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그래야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럴 거 아닙니까. 예? 에헤헤헤.”
 “하긴…… 한 번 가보긴 해야지.”
 “예? 정말입니까? 아니, 오늘 뭐 잘못 드셨습니까? 뭐 이리 쉽게…… 아닙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에헤헤헤.”
 “오늘은 날이 아니니 다음에 가자꾸나.”
 “예? 아니 무슨 남자가 이랬다저랬다 하십니까? 칼을 뽑았으면 무우라도 베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예?”
 “거긴 제일 끝이다. 일단 저기부터 가야지.”
 곽우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허름한 객잔 하나가 있었다. 척 보기에도 이 마을에서 제일 허름하고 볼품없는 객잔 같았다.
 “공자님, 설마…… 저 거지 소굴 같은 객잔에서 주무시려는 건 아니시죠? 에이, 깔끔함과 부유함의 상징 같으신 우리 공자님이 설마 그러실 리가. 그렇죠? 아니죠?”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라.”
 곽우진은 그렇게 막철의 입을 막아 버리고 성큼성큼 객잔을 향해 걸어갔다.
 간판도 없는 객잔이었다. 당연히 손님도 없었다.
 객잔에 들어간 곽우진은 중간쯤 위치한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진짜. 공자님, 정말 여기서 주무시게요?”
 막철이 따라와 곽우진 앞자리에 앉으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불만이 많아 보이네?”
 “아, 그럼 없…….”
 막철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뭔가가 퍼뜩 떠올랐다. 즉시 그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누가 봐도 연기라는 게 티가 확 나는 얼굴이었다.
 “……는 게 당연합죠. 제가 언제 공자님께 불만 가지는 거 보셨습니까? 이야, 이 객잔 특별한 운치가 느껴지는 게 뭔가 있어 보입니다. 헤헤헤헤. 역시 우리 공자님, 안목이 아주 그냥 탁월하십니다. 예.”
 “그렇게 좋으면 넌 여기서 자라.”
 “예?”
 곽우진은 어이없는 표정의 막철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주방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커다란 식칼을 든 숙수가 주방에서 불쑥 나타났다.
 덩치가 산만 했는데, 그는 망설임 없이 곽우진을 향해 걸어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막철이 슬그머니 일어나 곽우진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스산한 눈빛을 흘렸다.
 숙수는 곽우진 앞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식칼을 탁자에 냅다 꽂았다.
 쾅!
 호랑이 같은 눈으로 곽우진과 막철을 번갈아 노려보던 숙수가 나직이, 하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날 보자던 사람이 너 같은 애송이일 줄은 몰랐는데?”
 “왜? 녹림맹의 부맹주는 사람을 가려 만나나?”
 숙수차림을 한 녹림맹의 부맹주 도혈귀(屠血鬼) 상광군이 그 말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맞춰봐.”
 도혈귀 상광군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곽우진이 즉시 대답했다.
 “앞에 앉은 공자님이 정말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상광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틀리지 않았다. 곽우진의 모습은 말 그대로 미공자였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보자마자 그 생각부터 할 것이다.
 “그런 당연한 걸 물은 건 아닐 테고…… 뭐 허튼소리를 하면 목을 분질러 주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어? 그게 맞는 모양인데? 뭐야, 정말 그런 생각을 했어?”
 “에이, 공자님, 별호를 보십쇼, 도혈귀랍니다. 피에 미친 살인마라는 뜻인데 그런 놈이랑 무슨 대화를 시도하십니까?”
 상광군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별호와 어울릴 정도로 수많은 싸움에서 미친 듯이 적을 도살했지만 그것이 이성을 잃고 날뛴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냉정하고 계산적이었다.
 ‘이놈들…… 이 상황에서 저런 여유가 말이 돼?’
 즉, 뭔가 숨겨둔 한 수가 있다는 뜻이다. 상광군은 곽우진과 막철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아니, 찾긴 찾았다.
 ‘삼류에 간신히 발을 걸친 정도…… 하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
 너무 노골적이라서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상광군은 자신이 데려온 부하들의 면면을 떠올려봤다.
 지금 주방에서 그가 직접 키운 칼잡이 열다섯이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이 객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직속 부하 삼십 명이 포위망을 구축한 채 대기 중이었다.
 ‘저놈들이 가진 패가 뭔지 확인하기 전에 섣불리 판을 뒤엎을 필요는 없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상광군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지? 내가 이 근처까지 온 걸 알 정도면 그쪽도 정보력이 보통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상광군은 녹림맹의 부맹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녹림맹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하남의 천중산(天中山)에 머물렀다.
 그런 그가 이곳 적송산까지 왔다는 건 뭔가 특별한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움직임 자체가 비밀리에 이뤄졌고, 그걸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맹의 수뇌부 몇 명과 직접 움직이는 상광군의 수하들밖에 없었다.
 ‘이동은 오직 산을 통해서만 했고, 잠도 노숙으로 때웠는데 내 위치를 이렇게 정확히 알아냈다고?’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다.
 ‘배신자!’
 누군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겼다. 함께 움직인 수하들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맹의 수뇌부 중 하나일 것이다.
 상광군은 자신이 여기 온 사실을 아는 자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하지만 누구하나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 또한 맹을 배신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혼란에 휩싸여갔다.
 “생각보다 머리 굴리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네?”
 곽우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상광군은 생각을 접고 그를 노려봤다.
 지금 중요한 건 닥친 일이다. 배신자 색출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아니, 직접 물어봐도 된다.
 “누구지?”
 “뭐가?”
 “내 위치를 발설한 놈.”
 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놈이라고 말하면 안 될 거 같은데…….”
 상광군이 코웃음을 쳤다.
 “흥! 맹의 기밀을 적에게 넘기는 배신자 따위한테는 놈이라는 호칭도 과하다!”
 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지. 그런데 내가 적이었나?”
 “그거야 이제부터 알아보면 되지.”
 상광군이 씨익 웃으며 탁자에 박힌 식칼을 꽉 움켜쥐었다. 당장에라도 휘둘러 피를 보고 싶은, 도혈귀라는 별호에 정말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여기에 적호채 놈들 처리하러 온 거 아니었어?”
 “그런 사실까지 말해줬더냐? 이거 정말 안 되겠군.”
 “적호채가 선혈도(仙血島)놈들 아래로 들어갔다면서?”
 콰아아!
 상광군이 식칼을 뽑았다. 거친 기파가 객잔 안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곽우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선혈도에 대한 정보를 그쪽에 넘겨준 게 누구일 거 같아?”
 “뭐?”
 기파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상광군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설마 그게 네놈이란 말이냐?”
 “물론 아니지.”
 “…… 지금 나랑 장난 하자는 건가?”
 상광군의 스산한 목소리가 객잔을 다시 흔들었다. 하지만 처음의 그 무지막지한 기세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미 기세가 한 풀 꺾인 것이다.
 “그걸 알려준 건 군자림(君子林)이지.”
 “군자림? 그 도둑놈들?”
 “양상군자라고 해줘. 듣는 도둑놈들 기분 나쁠지도 모르니까.”
 “흥! 그깟 도둑놈들 기분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탈탈 털린 다음 울지 말고 미리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상광군이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곽우진을 노려봤다.
 “난 그따위 허접한 놈들한테 당하지 않아. 털리기 전에 피를 쫙 뽑아 버릴 테니까.”
 “그러든가 말든가 알아서 하시고. 내가 원하는 건 한 가지야.”
 상광군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네놈의 요구를 내가 들어줄 거 같아?”
 곽우진은 그의 반응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북천하가에서 적호채를 치려고 움직이고 있거든? 묵룡검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뭐?”
 상광군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북천하가가 왜 적호채를 친단 말인가.
 그가 놀라든 말든 곽우진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마무리했다.
 “그 묵룡검대를 막아줘. 시간만 좀 끌어주면 돼. 대강…… 두 시진 정도?”
 “허!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모르겠군. 내가 네놈 말을 들어줄 이유도 없거니와, 과연 나랑 내가 데리고 온 놈들만으로 북천하가의 묵룡검대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우리가 몰살당하는데 두 시진 정도 걸리겠군.”
 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주 쉬울 거야. 그리고 넌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테고.”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상광군은 그것을 보며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복잡미묘하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네놈이……!”
 곽우진이 탁자에 내려놓은 것은 녹림맹주의 명령서가 담긴 통이었다.
 녹림맹주는 푸른 수풀을 노니는 용이 양각된 원통에 명령서를 넣어 임무를 내렸는데, 탁자에 딱 그렇게 생긴 통이 놓여 있었다.
 상광군은 떨리는 손으로 통을 집어 뚜껑을 비틀었다. 밀랍되어 있기에 명령서를 받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밀랍에는 녹림맹주의 직인이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진짜 맹주의 명령서라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상광군은 통을 열고 안에 든 서찰까지 확인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서찰이었다. 그것도 수풀을 노니는 용이 수놓아진 비단 서찰이었다. 통에 양각된 모양과 똑같았다.
 그리고 맹주의 직인이 한가운데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녹림맹주는 밀랍에 찍는 직인과 명령서에 찍는 직인을 따로 썼는데, 그것까지 똑같았다.
 만일 위조한 거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아무리 봐도 진짜였으니 말이다.
 “대체 왜 맹주님께서 내게 이런 명령을…….”
 명령은 곽우진이 말한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묵룡검대를 막으라는 명령이었다.
 상광군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곽우진을 바라봤다.
 이제 더 이상 그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대체…… 대체 정체가 뭐요?”
 곽우진이 씨익 웃었다. 물론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여, 여길 넘어간다고요?”
 천중원은 아연한 눈으로 높다랗게 솟은 절벽을 올려다봤다. 까마득했다. 물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절벽 위에 구름이 걸쳐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틀이 넘는 강행군을 했다. 체력이고 내력이고 바닥난 상태였다.
 한데 여길 기어 올라가겠다니.
 물론 인정은 한다. 여길 올라갈 수 있다면 일정을 최소 반나절 정도 단축시킬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대가가 목숨이라면 굳이 거기에 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거기까지가 천중원을 비롯한 지룡검대의 생각이었다.
 “내가 제일 나중에 올라가겠다.”
 그 말은 감시하겠다는 뜻일까? 혹시 도망가는 사람이 없나? 천중원이 그런 생각을 하며 호장천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전혀 예상과 달랐다.
 “떨어지는 사람을 받아주겠다. 단, 연달아 떨어지면 두 번째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 명심해라.”
 다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호장천을 바라봤다.
 말이 받아주는 거지 저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받다간 자신도 다칠 수 있다. 더구나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그 위험성은 더 커진다.
 바짝 쫓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너무 바짝 따라가면 멀리서 떨어지는 사람을 받으러 가기도 힘들 테니까 말이다.
 “자, 출발!”
 호장천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지룡검대는 굳은 표정으로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까지만 이 짓을 하면 끝이다.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지.’
 천중원은 절벽을 기어오르며 생각했다.
 이렇게 힘과 기력이 바닥 난 상황에서 절벽까지 기어 올라간다. 한데 정말로 적호채 그 무시무시한 놈들과 싸울 수 있을까?
 그래도 개죽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대한 호장천의 태도를 보면 그거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호장천은 대단한 고수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항상 진지한 자세로 자신들을 대했다.
 그리고 저런 사람이 한결같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인 신임 대주도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 그리고 그 정체가 정말로 궁금했다.
 신임 대주는 잘 나타나진 않지만 일단 한 번 모습을 보이면 지룡검대 입장에서는 천지가 뒤바뀌는 것 같은 충격은 선사해 주었다.
 이번 임무도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은근한 기대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신임 대주의 그 자신만만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이번에 묵룡검대든 뭐든 엿 한 번 먹어 보라지.’
 지룡검대가 이를 악물고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그들도 시간을 끌수록 점점 힘들어진다는 걸 알기에 되도록 서둘렀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고, 손가락과 발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그래도 참아냈다.
 지금까지 받은 훈련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절벽 끝까지 올라갔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
 “으아아아!”
 절벽 위에 올라선 자들은 모두 절벽 아래를 향해 괴성을 내질렀다. 들끓는 성취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느새 마지막 대원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호장천도 올라왔다.
 “쉴 시간 없다. 서둘러라.”
 “마을에도 안 들릅니까?”
 “우리가 적호채를 치러 왔다고 동네방네 떠들 일 있나? 우린 기습에 가까운 공격을 할 것이다.”
 호장천은 그 말을 끝으로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대단히 빨랐다. 마치 이제부터는 더 힘들 거라고 예고라도 하듯이.
 지룡대원들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빠르게 호장천의 뒤를 따랐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났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앞에 적호채의 거대한 산채가 나타났다.
 “허억! 허억! 허억!”
 지금 속도로 이 각만 더 달려가면 산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이제 남은 건 달려가 저놈들과 싸우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오래 끈다는 건 적호채 놈들에게 발견해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모두의 시선이 호장천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빛은 어서 이 힘든 여정을 끝내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호장천은 담담한 눈으로 지룡검대를 슥 둘러봤다. 그리고 품에서 제법 커다란 목갑 하나를 꺼냈다.
 그는 목갑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콩알만 한 검은 단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림잡아 백 개는 되는 듯했다.
 “지금부터 이걸 한 알씩 먹는다.”
 “그게 뭡니까?”
 천중원의 물음에 호장천이 슬쩍 웃었다. 그의 그런 표정을 다들 처음 보는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호장천의 입이 열렸다.
 
 “활신단이다.”
 “예?”
 “활신단? 그…… 정력제 말입니까?”
 다들 어이없는 눈으로 호장천을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활신단이라니.
 설마 저 사람 눈에는 저 산채가 기루로 보이는 건 아닐까?
 다들 미심쩍은 눈으로 호장천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오는 여정이 너무 힘들어서 잠깐 정신이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호장천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활신단은 사실 정력제가 아니라 회복제다. 그걸 정력제로 써먹고 있을 뿐이지.”
 다들 여전히 못 믿겠다는 눈으로 호장천과 활신단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손을 내밀었다. 독약을 먹이는 게 아니라면 뭐든 상관 없었다.
 최소한 신임 대주나 호장천이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번에도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모든 대원들에게 한 알씩 활신단이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알은 호장천이 단숨에 꿀꺽 삼켰다.
 “후우우우.”
 호장천은 숨을 길게 내뱉은 다음 지룡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뭣들 하나? 얼른 안 먹고!”
 지룡대원들이 일제히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활신단을 입에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들 눈을 부릅떴다.
 목구멍으로 넘어간 활신단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어갔다.
 활신단의 기운은 마치 부드러운 여인의 손길처럼 온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져 주었다.
 뭉쳤던 근육이 풀리고, 쌓였던 피로가 녹아내렸다.
 바닥난 체력이 차올랐고, 온몸을 쿡쿡 찌르던 통증이 사라졌다.
 그렇게 하고도 남은 기운이 단전 주위를 맴돌았다.
 “후우우우우.”
 지룡대원들이 일제히 숨을 뱉어냈다. 그들은 그제야 호장천이 왜 숨을 뱉었는지 알 수 있었다.
 활신단이 몸을 회복시키며 빨아들인 탁기를 그렇게 배출한 것이다.
 “힘이…… 넘치는군요.”
 마치 며칠 푹 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쉰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몸을 혹사시켰다. 그 다음 그 피로만 싹 날려 버린 것이다.
 그냥 쉬었다면 당장 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싸울 수 있는 몸으로 만들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간이 필요 없었다. 당장에라도 야수처럼 싸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두의 눈빛이 번득번득 빛났다. 그러자 호장천이 두 번째 목갑을 꺼냈다.
 그 안에도 검은 단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양은 아까와 똑같았다. 분명히 한 사람당 한 알씩 돌아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룡대원들은 새로운 단약을 하나씩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호장천이 따로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단숨에 삼켰다.
 그걸 본 호장천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몫으로 남은 단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으으으으.”
 이번에도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식도로 들어가자마자 녹은 단약이 뜨거운 기운을 내뿜으며 온몸을 휘돌았다.
 그리고 그 기운은 고스란히 단전으로 스며들었다.
 단전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꽉 채워졌다.
 “후우우우우.”
 다들 일제히 숨을 토해냈다. 이번에는 탁기를 배출한 게 아니었다. 단전을 채운 충만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뱉은 것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체력과 내력이 온몸을 꽉 채웠다. 싸우기 전에 이 정도 상태라면 그 어느 때보다 잘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놀람과 자신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번 싸움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길 수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호장천이 살짝 웃었다.
 저들은 아마 끝까지 모를 것이다. 방금 먹은 활신단은 의검방에서 파는 활신단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특별한 처치를 통해 정력이 아니라 체력에 작용하게 만든 약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감에 넘치는 것도 좋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절대 무리하지 마라. 그리고 출발 전에 내가 얘기해준 작전은 기억하겠지?”
 “예!”
 다들 나직이 대답했다.
 북천하가에서 출발하기 전에 호장천이 작전을 말해줬다. 사실 작전이라기보다는 싸우는 법에 대한 것이었다.
 -반드시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싸워라.
 지룡검대의 수는 총 백 명이다. 그러니 서른세 개 조를 만들면 한 명이 남게 된다.
 그 한 명은 혹시라도 부상을 입는 조가 생기면 바로 교체 투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실 세 명이 모여 싸우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모른다. 그들이 거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예전 참마단에서 온 놈을 셋이 힘을 모아 쓰러뜨렸다는 것 말이다.
 어쨌든 작전까지 다시 상기한 지룡검대의 눈에 투기가 일렁였다.
 호장천은 그런 그들의 투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나직이,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돌격!”
 정확히 일백 명의 무사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지금까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적호채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 * *
 
 도혈귀 상광군은 떨떠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이 바로 곽우진이 말한 그 장소였다.
 “이쪽으로 묵룡검대가 지나간다는 거지?”
 그의 주변에 수십 명의 수하가 서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기세가 번득이는 자들이었다.
 상광군의 눈가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정말 믿을 만한 부하들이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절반만 오면 어찌어찌 막을 수 있겠지만…… 전부 온다면? 글쎄……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북천하가의 용검대는 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기에 대주와 부대주가 따로 있다.
 부대주는 한 명일 수도 있고 두 명일 수도 있는데, 묵룡검대는 한 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광군이 데리고 온 부하는 정확히 마흔다섯 명이었다. 묵룡검대의 절반도 안 된다는 뜻이다.
 만일 수가 같다고 해도 두 시진을 막으려면 목숨을 걸어도 모자란다. 한데 그 두 배를 막아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암담했다.
 만일 묵룡검대가 절반만 이곳에 남기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그건 아예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상광군이 받은 임무는 묵룡검대를 단 한 명도 뒤로 보내지 말라는 것이었으니까.
 “아, 젠장! 대체 어쩌라는 거야!”
 결국 분통을 터트렸다. 뭐라도 방법이 있어야 막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묵룡검대가 나타난 것이다.
 “젠장. 맹주가 시킨 일이니 안 할 수도 없고. 다들 준비해라! 우리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묵룡검대는 경공을 써서 달려오고 있었는데, 빠르고 은밀했다.
 상광군은 그 모습을 보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과연 묵룡검대였다.
 “저걸 무슨 수로 막나…….”
 한데 보다 보니 좀 이상했다. 분명히 저들도 상광군 무리를 발견했을 텐데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마치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확신이 짙어졌다.
 “뭐지? 우리가 안 보이나?”
 상광군은 황당했다. 그리고 그제야 아까 곽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 그것도 아주 간단히…….”
 어쩌면 그 말이 정말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진법이라도 깔아뒀나?’
 하지만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그저 허허벌판이었다. 아무 것도 설치된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쨌든 되도록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얘들아, 가자! 죽이지 않게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저들이 우리를 볼 수 없다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이쪽도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실력이니 말이다.
 상광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묵룡검대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양측이 소리 없이 격돌했다.
 묵룡검대의 진형이 크게 헝클어졌다.
 그렇게 기묘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곽우진은 느긋하게 산을 올랐다. 적송산은 그리 험하지 않은 산이었기에 별로 힘들 것도 없었다.
 “공자님, 꼭 가봐야 하는 겁니까? 이제 할 만큼 하신 거 아닙니까?”
 막철이 곽우진을 따라가며 투덜거렸다.
 “묵룡검대가 오는 것도 막고, 그놈들 잘 싸우라고 활신단에 축기단(蓄氣丹)까지 전해주셨잖습니까.”
 곽우진이 아무 말 하지 않자 막철은 신이라도 난 듯 더 얘기했다.
 “이 정도면 그냥 마을에 앉아서 결과 보고만 받아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죠. 예?”
 “막철아.”
 “왜 부르십니까? 돌아가시게요?”
 “내가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할까, 싫어할까?”
 “우헤헤헤. 뭐 그런 질문을 다 하십니까? 공자님 산 타는 거 아주 싫어하시잖습니까. 아우,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자니까요?”
 “싫어하는 산을 탄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게 정상 아니냐?”
 막철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곽우진은 의미없는 행동을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끔 저게 무슨 짓일까 하는 행동을 하면 나중에 반드시 그 이유가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산에 오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라? 그럼 설마 군자림까지 이용하신 것도…….”
 “그러니까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라. 그놈들 아직 어설퍼서 지켜볼 필요가 있으니까.”
 “에이, 그래도 대호가 훈련시킨 시간이 있는데 고작 적호채한테 당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다보니 문득 서글프고 불안해진다.
 “아오. 내가 잠깐 미쳤었지. 어쩌자고 저 괴물이랑 내기를 해가지고 맘고생을 이렇게 해야 하는 건지…… 에휴.”
 막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북두십삼검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말이다.
 “공자님, 적호채까지 가려면 제법 남았는데 그거나 말씀해 주십쇼. 헤헤헤헤.”
 “그거? 그거가 뭐지? 아, 북두십삼검?”
 “히야, 우리 공자님 눈치도 빠르셔라. 헤헤헤헤.”
 “그건 왠지 아부나 칭찬 같지 않고 욕 같다?”
 “어유, 그 무슨 섬뜩한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십니까?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예. 암요. 에헤헤헤.”
 “그럼 이제 내기에서 졌다는 걸 인정한다는 말이네?”
 막철은 입을 다물었다. 그걸 다시 상기하니 마음이 쓰렸다.
 그런 막철을 보며 곽우진은 피식 웃었다. 나름 이런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만일 북두십삼검이 그렇게 별볼일없는 검법이었다면 하지웅이 북천하가를 세우고 그렇게 천하에 위명을 떨칠 수 있었을까?”
 막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북두십삼검은 원래부터 훌륭한 검법이었어. 다만 불완전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예? 불완전하단 말입니까? 하지만…….”
 “완전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 북두십삼검은 일부가 유실된 검법이야.”
 막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럼 과연 그 유실된 부분이 뭐였을까?”
 막철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리고 답을 찾아낸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적호채
 
 “대호수련검!”
 “그래, 맞다.”
 막철은 질린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호수련검에 북두십삼검의 유실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겠지.”
 무슨 소린지 더 알 수 없어졌다. 아니, 뭔가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좀 제가 알아먹게 설명해 주십쇼. 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뎁쇼?”
 “북두십삼검의 초식은 완벽하게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도 그게 제대로 된 위력을 내지 못한다면 원인이 뭐겠느냐?”
 막철은 대답하지 않고 곽우진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내공이랑 호흡이다. 특히 북두십삼검은 하체로 흐르는 내력의 길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막철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공자님은 그런 걸 어떻게 아십니까?”
 “대호수련검을 처음 만들 때 내가 참고한 무공 중 하나가 북두십삼검이었거든.”
 “예에? 대호수련검을 공자님이 만드셨다고요?”
 “뭐, 어릴 때 잠깐의 치기로 만든 무공이지.”
 “공자님, 방금 그 말씀 엄청 재수 없는 거 아시죠?”
 곽우진은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이야 수도 없이 들어서 이젠 아예 감정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막철은 그걸 보고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우, 이래서 정 많은 남자는 손해가 막심하다니까.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그럼 그때부터 북두십삼검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아셨다는 겁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거기까지 대화한 막철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 공자님. 설마…….”
 “설마, 뭐?”
 “그때 말씀하셨던…… 오래전 무림을 풍미했지만 지금은 약해진 무공들…….”
 곽우진은 막철의 말에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시간 없다. 얼른 가자.”
 “공자님! 왜 말씀하시다 말고 그냥 가십니까! 예? 저 엄청 궁금하거든요? 제 심장 터지는 거 보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겁니까? 예? 공자님! 좀 멈춰 보시라니까요!”
 
 * * *
 
 적호채는 평소에도 그다지 경계를 하지 않는다. 산적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적송산 아래에 있는 마을 자체가 적호채의 앞마당 같은 거라서 혹시라도 이상한 일이 생기면 재깍 알 수 있었다.
 만일 누군가 적호채를 토벌하겠다고 나서면 마을에 들어서는 즉시 전서구는 물론이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순찰조가 적호채로 달려가 소식을 알리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비상연락망을 만들어 놨기에 상대적으로 산채의 경계는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통하지 않고 산채를 치려면 적송산 주변에 늘어선 험준한 다른 산을 타고 와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험준한 산을 타고 적호채까지 달려오면 체력이 바닥 날 수밖에 없는데, 적호채는 그렇게 바닥난 체력으로 싸워서 토벌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 복합적인 요인 덕분에 지룡검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적호채의 울타리를 넘을 수 있었다.
 아무리 경계가 허술해도 백 명이나 되는 무사가 울타리를 넘어오는데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사방에서 적습을 알리는 신호가 삑삑대고 울렸다.
 그리고 큰 칼을 든 산적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지룡검대에서 선봉에 선 사람은 당연히 무공이 가장 뛰어난 칠 조장이었다.
 칠 조장과 조원 두 명이 포함된 세 명이 산적들 틈으로 파고들며 난폭하게 검을 휘둘렀다.
 촤촤촤촤촥!
 별 볼일 없는 놈들이었는지 손쉽게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 뒤로 그들은 마치 양떼 속에 들어간 늑대처럼 날뛰었다. 그리고 나머지 지룡대원들이 일제히 산적들을 덮쳤다.
 기습한 효과가 아주 컸다.
 산적들은 채 대응할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전력의 삼 할을 잃어야 했다.
 지룡대원들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 특히 천중원이 그랬다.
 천중원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산적들을 상대하며 참으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훈련한 게 있긴 하지만 사실 실전에서 북두십삼검이 이렇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셋이 한 조가 되어 싸우는 방식은 마치 북두십삼검을 위해 만들어진 검진(劍陣)처럼 느껴질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사실 처음 적호채를 상대로 달려들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적호채가 얼마나 강한지 알기에 과연 자신들이 그들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한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 모든 것이 기우였음이 증명되었다.
 그의 얼굴에 치열함과 신기함, 그리고 뿌듯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적호채를 상대로 싸우는 내내 그 표정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쓰는 북두십삼검은 실전을 거치면서 점점 더 강력하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적호채를 압도하며 싸움을 이어갔다. 분위기가 바뀐 건 채주와 부채주들이 나서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다른 산적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이 멍청한 놈들! 뭣들 하는 게냐!”
 바지춤을 올리며 뒤늦게 나와 내지른 소리 치고는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적호채주는 자신과 비슷한 상태로 허겁지겁 달려 나온 두 명의 부채주에게 명령했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저놈들을 작살 내지 않고!”
 두 명의 부채주가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들은 움직임 자체가 다른 산적들과 확연히 달랐다.
 호장천은 천천히 채주 쪽으로 움직이며 지룡대원들이 어쩌나 지켜봤다.
 두 명의 부채주에게 각각 세 개 조가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간신히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네놈들 대체 뭐냐? 우리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지?”
 채주는 이를 갈며 호장천에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호장천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산적이 토벌당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채주는 호장천에게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그동안 쌓아온 감이 절대 함부로 덤벼들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맹렬히 경고했다.
 호장천은 채주에게서 눈을 돌려 산채 안쪽을 쳐다봤다. 거기에서 제법 위험한 느낌이 풀풀 풍겨 나왔다.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안쪽에서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채주, 어려운 일이 생긴 모양인데 내가 손을 좀 거들어도 되겠소?”
 중년인은 느릿하게 걷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채주 옆에 서서 묻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호장천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너희…… 복장을 보니 북천하가에서 나왔구나? 명불허전이군. 역시 북천하가야. 벌써 이 정보를 물었을 줄이야.”
 중년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슥 둘러봤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쓸 만한 손발을 하나 얻나 했더니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군.”
 적호채는 아무래도 오늘로 끝인 듯했다. 아직 두 발로 서 있는 산적은 총인원의 삼 할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이제 얼마 못 버틸 것 같았다.
 “이 정도 전력이면…… 최소한 묵룡검대 정도는 보낸 모양이로군.”
 중년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려 호장천을 노려봤다.
 “그렇지 않나?”
 호장천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꽉 쥐었다. 대충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온몸에 긴장감이 짜르르 흘렀다.
 “음?”
 중년인이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본 곳은 산채 입구였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어찌어찌 늦지 않게 온 모양이네.”
 “저기 대호도 보이네요. 어라? 저기 저 놈은 뭐죠? 산적 같지는 않은데?”
 “뭐겠어? 선혈도에서 나온 쓰레기지.”
 “어쩐지…… 기분 더럽게 생겼다 했습니다. 헤헤헤.”
 중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그의 몸에서 난폭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곽우진과 막철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호장천이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쩡!
 검과 검이 격돌했다. 격렬한 기파가 사방으로 날뛰며 퍼져 나갔다.
 그렇게 둘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호장천과 중년인의 실력은 얼핏 보기에 호각이었다.
 곽우진과 막철은 잠시 그 싸움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쪽도 대충 예상대로 됐고…… 이제 남은 건 저놈 하난가?”
 곽우진의 시선 끝에 적호채주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 호장천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호장천이 선혈도의 중년인과 싸우기 시작하자 다시 기를 펼 수 있었다.
 “후우. 하마터면 뒈지는 줄 알았네.”
 적호채주는 몸을 부르르 떨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에서 피가 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일단 움직여야 한다.
 호장천과 중년인의 싸움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괜히 끼어들었다다는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적호채주는 오랫동안 산채에 굴러먹던 산적다운 생각을 했다. 얼른 적을 쓸어버리고 남은 부하들이랑 자리를 피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모든 부하를 데려갈 수는 없다. 가장 필요한 핵심 인원만 챙겨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게 누구인지는 명약관화했다. 고수부터 확보해야 한다.
  나머지 부하들은 얼마든지 다시 조달할 수 있었다. 다른 산채를 털어도 되고, 또 새로 모집해도 된다.
 적호채주는 두 명의 부채주를 먼저 확인했다. 둘 다 상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판을 내기에는 좀 모자랐다.
 이러다가 자칫하면 차륜전에 힘이 빠져서 당할 수도 있었다.
 적호채주는 둘 중 좀 더 힘이 많이 빠져 보이는 쪽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적호채주가 다가가자 부채주를 상대하던 지룡대원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갑자기 적호채 최고수가 다가오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침착해라! 당황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일단 싸움에 집중해! 어떻게든 버티기만 해라! 결국 이기는 건 우리다!”
 누가 외쳤는지 모르지만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지룡대원들은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자 이번엔 부채주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이제 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딱 그게 정답일 거다.”
 적호채주는 그렇게 말하며 냅다 달려들었다.
 그의 거대한 도가 가장 가까이 있는 지룡대원을 둘로 쪼개겠다는 기세를 담고 벼락 같이 내리 꽂혔다.
 쩡!
 적호채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이 일격이 막힐 줄은 몰랐다.
 그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자신의 도격을 막아낸 자를 노려봤다. 그는 이 자리에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니, 어딘가에서 미친 듯이 달려와 자신의 도격을 막아냈다.
 “네놈은 뭐냐?”
 적호채주는 검으로 자신의 도격을 막아낸 믿을 수 없는 신위를 보여준 사내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도에 힘을 꾹 주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사내는 자신의 힘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후우.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적호채주의 도격을 막아낸 사내, 문대량이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의 등장에 지룡대원 전체가 한바탕 술렁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대단한 힘과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마치 남은 모든 힘을 쏟아내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싸움의 분위기와 흐름이 완벽하게 넘어갔다는 걸 깨달은 적호채주가 이를 갈았다.
 “네놈은 대체 뭐냔 말이다!”
 그는 무지막지한 기세를 담아 도를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저정!
 문대량은 아주 침착하게 그 모든 공격을 빗겨냈다.
 쉬이잉!
 그리고 섬광 같은 검격이 적호채주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쩌어어엉!
 푹!
 적호채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문대량의 검이 설마 자신의 도를 박살내고 목까지 꿰뚫어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푸슉!
 문대량이 검을 뽑자, 그의 목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문대량은 검을 한 차례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는 납검했다. 그리고 곽우진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곽우진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복귀했습니다. 대주님.”
 
 문대량이 도착한 뒤로 일방적인 싸움이 이어졌다.
 적호채는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생각보다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무공을 휘두르며 산적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호야! 빨리 끝내고 밥 먹으러 가자!”
 곽우진이 여전히 중년인과 싸우고 있는 호장천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호장천의 기세가 대번에 변했다.
 콰아아아!
 호장천의 몸에서 거친 기파가 쏟아져 나갔다. 그러자 그와 대치하고 있던 중년인이 흠칫 놀랐다.
 “설마……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나를 상대로?”
 그의 어조에는 불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선혈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한데 그런 자신을 상대로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호장천의 모습은 고작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자신을 압도할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의문에 답해준 건 멀찍이 떨어져서 싸움을 구경하던 막철이었다.
 “야 이놈아! 그거 쓰면 이따가 내가 업고 가야 하잖아!”
 그제야 중년인은 호장천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잠력을 폭발시킨 것이다.
 ‘저러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텐데?’
 잠력을 폭발시키다가 잘못하면 진원진기가 손상되어 치유 불가능한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안은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상황이니 저런 짓을 벌일 법도 하지.’
 아군이 한 명도 없는 상황이니 자신만 제압하면 싸움 자체가 끝난다. 하지만 중년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직 자신에게는 남은 한 수가 있었다.
 중년인이 몸의 중심을 슬그머니 뒤로 뺐다. 첫 격돌에서 그 힘을 이용해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사실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딱 한 번 기회가 있는 건가?’
 중년인은 사실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데려온 수하가 한 명 있었다. 그 수하는 꼭 이럴 때 써먹으려고 그동안 키워왔다.
 그는 목숨을 걸고 호장천을 막아설 것이다. 자신은 그 틈을 타서 도망치면 된다.
 ‘그리고 이 원수는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갚아주마.’
 중년인의 눈에 독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호장천이 움직였다.
 꽈득!
 바닥이 움푹 파이며 흙이 팍 하고 터져 나갔다. 호장천은 어느새 중년인 앞에서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중년인은 눈을 크게 떴다. 호장천의 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이다. 그래도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준비했던 한 수를 펼쳤다.
 그는 검을 횡으로 들어 호장천의 검을 정면에서 막아냈다.
 꽈앙!
 폭음이 울린 순간, 그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호장천이 내리친 검격의 힘을 이용해 뒤로 몸을 날리려 했는데, 검격에 실린 힘이 아주 특별했다.
 “끄으윽!”
 중년인의 무릎이 푹 꺾였다. 그리고 발목까지 땅을 파고들어갔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중년인이 입에서 피를 왈칵 토해냈다. 만일 제대로 막으려 했다면 이정도로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데 몸을 뒤로 빼려다가 당하는 바람에 충격이 고스란히 내장을 뒤흔들었다.
 회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분명히 내리치는 힘을 정확히 예상해서 그 힘을 이용하려 했는데, 검격의 흐름과 검격에 실린 내공의 흐름이 달랐다.
 그래서 검에 담긴 내공의 힘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에 반사적으로 대응을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즉사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쿠웨에엑!”
 내장조각이 섞인 검붉은 피가 중년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갔다.
 호장천은 창백하게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로 다시 검을 내리쳤다.
 중년인이 반사적으로 다시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물론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쩌엉!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쿨럭!”
 그리고 그 힘에 내장이 다시 진탕된 중년인이 피를 토했다.
 털썩.
 정신을 잃은 중년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다신 무공을 펼칠 수 없을 것이다.
 “후우우우.”
 호장천이 숨을 골랐다. 창백하게 질렸던 그의 안색이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라? 뭐야? 너 왜 멀쩡해?”
 막철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호장천은 그런 막철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지룡검대원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헐! 공자님, 저놈이 지금 저 보고 웃는 거 보셨습니까?”
 “봤다.”
 “우와! 저거 비웃은 거 맞죠? 우와! 난 저놈 쓰러지면 업고 갈 생각까지 했는데, 우와! 공자님, 저놈 어쩌다 저렇게 된 겁니까? 예?”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든가.”
 곽우진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지금 그의 시선은 호장천이 아니라 문대량에게 꽂혀 있었다.
 문대량은 자신을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지룡대원들을 뒤로 하고 곽우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곽우진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적호채, 정리 끝났습니다.”
 “뭐, 괜찮아 보이더구나.”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대주님 덕분입니다. 이 은혜 평생에 걸쳐 갚겠습니다.”
 곽우진이 손을 휙 내저었다.
 “됐다. 은혜는 무슨. 그냥 하던 일이나 잘 해.”
 문대량은 그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곽우진은 별 것 아닌 듯 말하지만 당사자인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은혜를 입은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 다 끝났으면, 밥이나 먹자! 누가 불 좀 지펴라!”
 곽우진이 문대량을 지나치며 소리쳤다.
 이내 산채 한가운데가 깨끗이 치워졌다.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산적들은 안쪽으로 다 옮겼다.
 커다란 공터에 모닥불 여러 개가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그 위에 커다란 솥이 놓였다. 순식간에 맛있는 냄새가 산채를 장악했다.
 곽우진은 그들이 음식 장만하는 걸 지켜보다가 산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곽우진 뒤로 언제나 따라다니는 막철이 냉큼 따라붙었다. 그리고 문대량이 막철과 나란히 걸었다.
 “넌 뭐냐?”
 “대주님을 모시는 중이오.”
 문대량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막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호보다 더 재미없는 놈이 됐네.”
 그렇게 말한 막철이 문대량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불쌍하다는 듯 처량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다 이해한다. 고맙겠지. 은혜도 갚고 싶고. 그런데 너 여기 발 들이면 못 나간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문대량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막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벌써 늦었네. 이거 무슨 종교나 함정도 아니고 뭐 이렇게 빠져드는 놈이 많아?”
 그렇게 막철이 투덜거리는 사이 일행은 산채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그곳은 채주의 거처였다.
 “가만있자…….”
 곽우진은 그 안을 슥 둘러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벽에 걸린 족자로 향했다.
 “오! 제법 돈 좀 나가 보이는데요?”
 막철의 말에 곽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은자 백 냥쯤 하겠네.”
 “에헤헤헤. 이 족자 저 가지면 안 됩니까? 에헤헤헤.”
 곽우진은 고개를 돌려 막철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막철은 그 웃음을 허락인 줄 알고 더 크게 웃었다.
 “에헤헤헤! 우헤헤헤헤! 고맙습니다, 공자님!”
 “미안.”
 곽우진은 그 말과 함께 족자를 잡고 옆으로 쭉 찢었다.
 “으악! 공자님! 그게 무슨 만행이십니까!”
 막철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족자가 걸려 있던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벽 전체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아니, 이놈들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간을 만들었답니까?”
 막철이 어이없는 눈으로 드러난 공간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간의 크기가 너무 작았다. 그렇기에 웬만하면 거기에 다른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할 듯했다.
 위로 올라간 벽과 거의 비슷한 폭의 공간이 있었으니까.
 “이건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거야. 아마 적호채 놈들 중에서도 여길 아는 놈이 거의 없을 걸?”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드러난 공간을 슥 훑었다. 그리고 중간쯤을 손바닥으로 슥 밀었다.
 덜컹!
 곽우진이 밀어낸 부분이 안으로 쑥 들어가며 그 아랫부분이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이것 역시 공간을 극도로 효율적으로 고려해 만들어진 장치였다.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길쭉한 상자모양이었는데, 곽우진은 그걸 잡더니 쑥 뽑았다.
 안에 반쯤 들어가 있던 상자가 모두 밖으로 튀어나왔다.
 길쭉한 물건을 보관하는 상자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무슨 보검이라도 보관했답니까? 저런 기관을 만들 돈으로 차라리 검을 하나 더 사겠네. 쳇.”
 막철은 여전히 투덜거렸다. 곽우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휙 돌아섰다.
 “가자, 배고프다.”
 “쳇, 그럴 거면 밥을 먹고 움직이면 좋잖아. 아우, 배고파 죽겠네. 에잉, 예술을 무시하는 사람이 식탐은 많다니까. 쳇.”
 곽우진은 막철의 말을 싹 무시하고 밖으로 나와 바닥에 떨어진 족자를 주웠다.
 “내가 이걸 찢은 줄 알았냐?”
 곽우진의 손에서 그림 한 장이 팔랑거렸다. 찢어지지 않은 멀쩡한 그림이었다.
 “어라?”
 막철은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그림은 여전히 멀쩡했다.
 “내가 찢은 건 그림이 아니라 족자였거든. 여기 놈들이 바보 멍청이냐? 백 냥짜리 그림을 매번 찢으면서 문을 열게?”
 막철의 얼굴에 금세 비굴한 미소가 맴돌았다.
 “에헤헤헤. 공자님, 사랑합니다.”
 “예술을 무시하는 식탐 많은 사람이라서 사랑도 잘 모른다.”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림을 둘둘 말아 쥐었다.
 “에이, 우리 공자님이 왜 이러실까, 아니, 언놈이 우리 공자님한테 예술을 무시하고 식탐이 많다고 그랬습니까? 예? 제 앞에 딱 데려오세요! 다리몽둥이를 딱! 분질러 버릴라니까.”
 곽우진은 입을 다문 채 옆에 놓인 상자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수많은 족자들이 둘둘 말린 채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족자 하나를 꺼낸 곽우진은 그것을 문대량에게 휙 던졌다. 그리고 막철을 지나쳐 휑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막철은 그런 곽우진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에헤헤헤. 공자님. 저 그림 좋아하는데. 에헤헤헤.”
 뒤에 잠시 남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문대량의 눈에 잠깐 미소가 맺혔다.
 왠지 보기 좋아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끼어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문대량은 표정을 지우고 곽우진이 준 족자를 펼쳤다. 그림도 없는 그냥 맨 족자였다. 그는 위를 올려다보고 몸을 휙 띄웠다.
 그리고 족자를 원래 걸려있던 자리에 걸었다.
 그그그긍!
 벽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쿵!
 문대량은 벽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서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눈빛으로.
 문득 그의 뇌리에 방금 곽우진이 꺼낸 상자가 떠올랐다.
 ‘검 같은데…… 대체 왜 저렇게까지 신중하게 감춰둔 걸까?’
 
 천무검
 
 묵룡검대는 처음 세웠던 계획대로 움직였다. 이동경로도 변경하지 않았고,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묵룡검대주는 나이가 쉰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오직 무공만을 최우선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단단함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그는 어떤 임무를 맡건 항상 가장 앞에서 싸웠다. 그렇게 죽음에 가장 맞닿은 상태로 실전을 연이어 겪어나가며 성장한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이번 임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코 뒤에서 손가락과 입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직접 나서서 적호채 놈들을 박살 낼 계획이었다.
 어쩌면 적호채뿐 아니라 다른 방파의 조력자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묵룡검대주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믿었다. 또한 자신이 이끄는 묵룡검대를 믿었다.
 묵룡검대는 북천하가의 다섯 용검대 중 가장 실전 경험이 많았다. 당연히 의외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아주 유연하게 대처할 능력이 있었다.
 묵룡검대는 빠르게 이동했다. 적송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빙 둘러서 가야 하기에 조금 서둘러야 했다.
 “대주님, 조금 쉬었다가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대주가 다가와 말했다. 묵룡검대주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 물론 달리는 걸 멈추지 않은 채였다.
 “우리가 늦으면 지룡검대가 몰살당할 수도 있다.”
 부대주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대원들이 피곤해서 제대로 싸우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묵룡검대주의 서늘한 시선이 부대주의 얼굴에 꽂혔다. 부대주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우리 대원들은 고작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고집불통 늙은이 같으니.’
 부대주는 이번 임무에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지룡검대주와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이었다.
 그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룡검대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 좋았다.
 어차피 지룡검대는 언제든 인원을 보충할 수 있다. 부대주는 그들을 같은 북천하가의 용검대라고 생각한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 생각을 묵룡검대주가 고스란히 꿰뚫고 있었다.
 “지룡검대주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다. 고작 그런 문제 때문에 소중한 세가의 무사를 잃을 수는 없다. 알겠느냐?”
 그의 서슬 퍼런 말에 부대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적송산에 거의 도착해갈 무렵 부대주가 그렇게도 원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와아아! 쳐라!”
 “기습이다! 투검진(鬪劍陣)을 준비해!”
 기습과 동시에 묵룡검대주가 외쳤고, 그들은 순식간에 싸울 준비를 마쳤다.
 “개진(開陣)!”
 투검진은 기습에 가장 효과적인 방비가 가능한 검진이었다. 원리는 단순했지만 그렇기에 빠르게 대열을 갖춰 대응할 수 있는 검진이기도 했다.
 채채채채챙!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적을 향해 그들은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한데 적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묵룡검대주는 번득이는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소리쳤다.
 “적이 시간을 끌고 있다! 압검진(壓劍陣)으로 바꾼다! 개진!”
 순식간에 검진이 바뀌었다. 압검진은 오직 공격만을 위한 검진이었다.
 방어가 좀 약하지만 저렇게 적이 시간을 끌겠다는 목적으로 움직일 때는 가장 효과적으로 분쇄가 가능한 검진이었다.
 물론 경험이 많은 묵룡검대는 그 뒤에 이어질 검진까지 염두에 두었다.
 적이 대처를 바꾸면 이쪽도 즉시 바꿔 대응할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춰져 있었다.
 강력한 검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압검진의 위력까지 업어 달려들던 적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검을 휘둘러 적을 베던 묵룡검대주의 안색이 변했다.
 “방검진(防劍陣)을 준비해라!”
 손쉬운 승리가 눈앞에 있는데 갑자기 방검진을 준비하라는 말에 다들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몸은 훈련과 경험이 새겨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방검진이 완성되었다. 방검진은 말 그대로 방어에 특화된 검진이다. 의외의 상황이나 다수의 강력한 적을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검진이었다.
 적은 여전히 매섭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방검진의 단단함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묵룡검대주는 홀로 적들 사이에 뛰어들어 양떼 속을 휘젓는 사자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방검진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언제나 앞에서 싸웠다. 이렇게 방검진 안에 숨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부대주가 얼른 다가왔다.
 “대주님, 혹시 부상당하셨습니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묵룡검대주는 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어도 숨는 법이 없었다.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나? 적을 똑바로 봐라!”
 묵룡검대주의 말에 부대주가 고개를 돌려 적을 살피며 인상을 썼다. 오늘따라 대주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거슬렸다.
 ‘누굴 애 취급 하는 거야?’
 평소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나름 다급한 상황이었는지라 평소보다 훨씬 흥분해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적의 수가 많다는 것 외에는…….”
 “적의 수가 많다고? 그렇지 않다. 저놈들 전력은 우리의 반에도 못 미친다.”
 “예? 그럴 리가요. 그냥 보는 것만 해도…….”
 “똑같은 얼굴을 가진 놈이 너무 많아. 그리고 적을 벨 때의 손맛도 다르다. 피 색깔도 달라. 무엇보다 혈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부대주는 그 말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시 전황을 살폈다. 확실히 그 말 대로였다.
 “대체…….”
 “아무래도 진법에 걸려든 것 같다.”
 상황이 정말로 심각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두 시진쯤 지나고 나자, 거짓말처럼 적이 물러가 버렸다.
 그 동안 묵룡검대가 받은 피해는 그저 시간을 날려 버린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의아한 상황이었지만 계속 의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묵룡검대는 다시 움직였다. 대신, 이번엔 원래보다 훨씬 빠르게 내달렸다.
 뒤의 싸움은 일단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가 꺼림칙했다. 묵룡검대주는 자신의 감과 판단을 믿었다.
 그렇게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달려 적호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부대주가 호흡을 고르며 묵룡검대주에게 다가가 물었다.
 묵룡검대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구수한 음식 냄새가 코와 위장을 자극했다.
 이곳 산채 한가운데 공터에서는 다들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정체였다. 그들은 산적이 아니라 지룡검대였다.
 묵룡검대주는 일단 고개를 휘휘 돌려 지룡검대주를 찾았다. 그리고 부대주 역시 그 옆을 따라다니며 곽우진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좀 늦으셨군요.”
 묵룡검대주는 뒤에서 들려온 말에 몸을 돌렸다.
 “문대량 부대주로군. 지금 이 상황을 좀 설명해 주겠나?”
 묵룡검대주가 주위를 슥 둘러보며 물었다. 그러자 부대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먹고 마셔도 되는 거요?”
 그리고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니 토룡검대라 불리지.”
 문대량은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저희끼리 적호채 토벌을 끝냈습니다. 산적들은 산채 안쪽에 가뒀고, 지금은 전투 후 잠깐 쉬는 중입니다.”
 “잠깐 쉬는 거라고?”
 묵룡부대주는 인상을 쓰며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슥 둘러봤다. 눈이 있으면 좀 보고 말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문대량은 여전히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놈이 감히 날 무시해?’
 묵룡부대주는 더욱 배알이 뒤틀렸다.
 ‘적호채 한 번 토벌했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지?’
 “대주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문대량은 그렇게 말하고 앞장섰다. 곽우진은 지룡대원들 사이에서 열심히 고기를 뜯고 있었다.
 “이거 제법 잘 구워졌는데? 이놈들 생각보다 요리에 재능 있네.”
 “에이, 그래도 공자님만 하겠습니까? 헤헤헤.”
 곽우진과 막철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은 정말 기가 찼다. 묵룡검대주와 부대주도 딱 그런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지룡대원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곽우진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아무도 여기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걸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대주님, 묵룡대가 도착했습니다.”
 문대량은 곽우진 앞에 가서 정중히 보고했다. 곽우진은 살짝 삐딱하게 고개를 들며 묵룡검대주와 부대주를 쳐다봤다.
 “좀 늦으신 것 같은데?”
 “중간에 습격을 받아서 그랬네.”
 곽우진은 멀뚱히 묵룡검대주를 쳐다봤다. 마치 더 할 말이 있을 테니 해보라는 듯했다.
 묵룡검대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부대주가 나섰다.
 “지금 뭐 하는 거냐! 감히 우리 대주님이 오셨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똑바로 서서 말해라!”
 곽우진은 부대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같이 나서기에는 격이 안 맞는다는 듯이 말이다.
 문대량이 부대주 앞을 막아서며 그를 노려봤다.
 “대주님들 말씀하시는데 감히 부대주가 끼어들다니, 그쪽은 좀 빠지는 게 어떻겠소?”
 “뭐라? 지금 그 말…… 나한테 하는 개소리냐?”
 묵룡부대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감히 지룡검대의 부대주 따위가 자신과 맞먹으려 하다니, 이걸 어떻게 그냥 봐 넘긴단 말인가.
 “묵룡검대에는 위계질서도 없는 거요?”
 문대량의 어조는 나직했지만 강했다.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부대주가 검을 쥐자, 묵룡검대주가 손을 들어 막으며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게냐! 어서 물러나지 못할까!”
 “하지만 대주님!”
 “물러나래도!”
 묵룡부대주는 불만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물러났다. 아무리 그래도 대주의 명령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곽우진은 그들이 하는 양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쪽도 어쩔 수 없었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곽우진은 묵룡검대주를 마주보며 말했다.
 “어쨌든 적호채 토벌은 끝났으니 우린 가보겠소. 뒷정리는 해 주겠지?”
 “뭐? 뒷정리?”
 이번에도 나선 것은 묵룡검대주가 아니라 부대주였다.
 이런 임무의 뒷정리는 그동안 지룡검대가 도맡아 해오던 일이었다. 한데 그걸 묵룡검대가 하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곽우진은 여전히 부대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는 오직 묵룡검대주만 쳐다봤다.
 “설마 싸움도 우리가 하고 뒷정리도 우리가 하라는 거요?”
 묵룡검대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 알겠네. 그렇게 하지.”
 “대주님!”
 부대주가 외쳤지만 묵룡검대주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어쨌든 상황이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는 지룡검대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라졌다는 걸 은연 중 느끼고 있었다.
 ‘대체…… 지룡검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곽우진은 의문이 가득한 묵룡검대주의 표정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지룡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가자!”
 지룡검대는 한창 먹고 마시는 중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표하거나 입을 뻥긋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신속하게 일어나 곽우진 앞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했다.
 곽우진은 그걸 보고는 고개를 돌려 묵룡검대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그럼 수고들 하라고.”
 곽우진은 그 말을 남기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리고 지룡검대 전원이 곽우진의 뒤를 따라 산채를 벗어났다.
 “대주님, 정말 저놈들을 그냥 두실 겁니까?”
 부대주가 묵룡검대주에게 다가가 이를 갈며 물었다. 묵룡검대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잔말 말고 정리나 시작해. 산적들 끌고 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묵룡검대주는 그 말을 남기고 산채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받은 임무는 적호채 토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건 부수적인 임무고 훨씬 중요한 임무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걸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이 산채를 가루로 만들어서라도 말이다.
 
 지룡검대는 빠르게 적송산을 벗어났다. 다들 약간 취한 상태였지만, 그것이 이동을 방해하진 못했다. 아니, 오히려 취했기 때문에 좀 더 빨리 산에서 내려갈 수 있었다.
 적송산 어귀에는 적호채와 상부상조하던 마을이 있다. 지룡검대는 일단 그 마을로 들어가 객잔을 잡기로 했다.
 마을에 막 들어섰을 때, 묵룡부대주가 지룡검대 앞을 막아섰다. 산채의 일을 다른 자들에게 맡기고 부리나케 쫓아온 것이다.
 문대량이 차가운 얼굴로 나섰다.
 “너희 대주와 할 말이 있으니 비켜라.”
 묵룡부대주는 여전히 문대량을 무시하고 있었다.
 사실 지룡검대에 대한 소문이 잠깐 돌긴 했다. 예전과 좀 달라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소문은 금세 사라졌다.
 지룡검대에 당한 참마단원이 창피함 때문에 정확한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몇몇 정보조직이 나서서 소문을 은폐한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설사 소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묵룡부대주가 문대량을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지룡검대 자체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문대량은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비키라고 했다.”
 묵룡부대주는 이를 갈며 검을 꽉 쥐었다. 여차하면 뽑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문대량은 그것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이었다. 한데 막상 힘이 생기고 나니 대체 어떻게 이런 부당함을 견뎌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묵룡부대주는 문대량의 표정을 보고는 그가 겁을 먹었다고 판단했다. 하긴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그게 당연했다.
 그의 시선이 문대량 뒤에 있는 곽우진에게로 향했다.
 “둘이서만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묵룡부대주의 오만한 시선에 곽우진이 피식 웃었다.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먼저 격을 갖추고 와야지.”
 “뭐?”
 “네 앞에 있는 사람부터 넘어보란 말이다.”
 묵룡부대주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그 말, 후회하게 해주마.”
 스릉.
 묵룡부대주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그러자 지룡검대 전원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곽우진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음…… 그래도 명색이 같은 편인데 죽이거나 팔다리를 자르는 건 안 될 것 같고…… 그냥 피똥 한 번 찍 싸게 만드는 걸로 하지.”
 곽우진의 말에 문대량이 검을 뽑으며 대답했다.
 스릉.
 “명을 받듭니다.”
 묵룡부대주는 기가 찼다. 대체 이놈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 말대로지. 죽이거나 팔다리를 자르는 건 너무 가혹하니 피똥만 싸게 해주지.”
 그 말과 동시에 묵룡부대주가 몸을 날렸다. 그의 보법은 간결하면서도 빨랐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문대량은 더 이상 예전의 어설픈 무사가 아니었다.
 채채채챙!
 두 사람의 검이 몇 번 부딪혔다. 아니, 묵룡부대주의 공격을 문대량이 흘려낸 것이다.
 묵룡부대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검과 검이 부딪혔는데 손맛이 전혀 없었다. 마치 헛손질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문대량의 검이 그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뻐버버벅!
 온몸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사각을 파고든 검을 단 하나도 막지 못하고 모조리 허용한 것이다.
 묵룡부대주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단 말인가. 그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크아악!”
 슁슁슁슁!
 마구 검을 휘둘렀다. 물론 아무리 마구잡이라 해도 명색이 묵룡검대의 부대주인데 아무렇게나 휘두른 건 아니었다.
 만일 상대가 문대량이 아니라 묵룡부대주와 비슷한 수준의 무인이었다면 이 공격을 통해 잠시 숨을 돌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상대는 문대량이었다.
 뻐버버버버벅!
 묵룡부대주의 온몸에 검격이 쏟아졌다. 문대량은 믿을 수 없게도 검면으로 묵룡부대주의 몸을 마구 두드려 팼다.
 뻐억!
 “크억!”
 마지막 강렬한 일격이 묵룡부대주의 아랫배에 깊숙하게 들어갔다. 문대량이 안쪽으로 파고들어 검 손잡이를 내지른 것이다.
 털썩!
 묵룡부대주가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엉덩이 부근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문대량은 뒤로 훌쩍 물러난 다음 곽우진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보고했다.
 “대주의 명을 완수했습니다.”
 곽우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선 막철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보다 실력이 더 늘어난 것 같지 않아?”
 “예. 뭐……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막철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러자 막철 뒤에 서 있던 호장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같은 게 아니라 확실합니다. 아까보다 훨씬 실력이 늘어났습니다.”
 “이게 재능이라는 거거든. 적호채주가 제법 강한 놈이었는데, 그놈이랑 검을 맞대면서 갈 길을 스스로 또 찾아낸 거지.”
 곽우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다시 문대량에게 돌렸다. 문대량은 묵묵히 곽우진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때? 이제 예전에 내가 한 말이 좀 이해가 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문대량은 겸손을 떤 게 아니었다. 분명히 예전과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지긴 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묵룡부대주를 가볍게 제압하긴 했지만, 북천하가에 얼마나 괴물 같은 강자가 많은지 알기에 고작 이 정도로 그들과 비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곽우진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피식 웃었다.
 지룡검대원들 전원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곽우진이 예전에 문대량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을 대변해 막철이 나섰다.
 “공자님, 그때 무슨 말씀 하셨었죠? 나이를 먹으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헤헤헤헤.”
 곽우진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검의 재능만 따지면 북천하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했지.”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곽우진이 그렇게 말했을 줄은 몰랐다. 모두가 뿌듯한 표정으로 문대량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자신들을 이끌어주던 부대주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막철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저 위에 두 명이 더 있다는 뜻 아닙니까?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군데요?”
 이것 역시 궁금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모두의 눈이 또 초롱초롱해졌다.
 사실 곽우진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게 진실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그걸 진짜로 믿고 싶었다.
 “일단 북천하가를 세운 하지웅이 있지.”
 “예에?”
 다들 입을 쩍 벌렸다.
 설마 북천하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말이 지금 이 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북천하가의 역사를 통틀어서 말한단 말인가!
 “에이, 공자님 과장이 너무 심하시다. 그냥 현 시점으로 하자고요. 무슨 역사를 통틀어요? 북천하가 역사도 잘 모르시면서. 에헤헤헤.”
 곽우진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막철을 쳐다봤다. 그러자 막철이 아뜨거 하며 얼른 말을 바꿨다.
 “암요! 그러믄요! 당연합죠. 우리 공자님이 하시는 말씀인데 틀릴 리가 있습니까? 언놈이 아니라는 거야! 다리몽둥이를 그냥 확!”
 막철이 허공에 주먹질까지 하며 흥분하자 곽우진은 피식 웃었다. 그러자 막철이 넉살 좋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에헤헤헤. 그럼 두 번째는 누굽니까? 하지웅에 비견될 만한 검재를 타고나려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누가 비견된다고 그래? 두 번째 말하는 사람이 북천하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는데.”
 “예? 정말요? 하지웅보다 더요?”
 막철이 화들짝 놀랐다. 막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들 놀랐다. 그리고 잘 알려진 북천하가의 유명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북천하가의 역사는 이백 년에 달한다. 당연히 그동안 배출한 무수한 강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북천하가의 초대 가주인 하지웅을 넘어서는 자는 없었다.
 “그게 누굽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오르는뎁쇼?”
 막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리고는 퍼뜩 뭔가가 떠올랐는지 경악어린 표정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에엑! 서, 설마……!”
 곽우진이 빙긋 웃었다.
 “그 설마가 맞느니라.”
 막철이 배를 잡고 웃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꾸하하하하! 크헤헤헤헤헤! 설마 그 역사상 최고의 검재가 공자님이셨습니까? 쿠헤헤헤헤헤!”
 다들 황당한 눈으로 곽우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곽우진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더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신빙성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문대량만은 결코 웃지 않았다. 그는 곽우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대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곽우진이 빙긋 웃으며 문대량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 믿어. 내가 언제 허튼 소리 한 적 있나?”
 “없습니다. 대주께서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막철이 데굴데굴 굴렀다.
 “쿠헤헤헤! 대단한 신도 나셨네. 꾸하하하!”
 곽우진이 빙긋 웃으며 데굴데굴 굴러온 막철을 발로 뻑 차 버렸다.
 “꾸에에엑! 아이고, 교주가 사람 찬다!”
 곽우진은 바닥에 널브러져 피똥을 흘리며 기절한 묵룡부대주를 힐끗 쳐다보고는 휑하니 가 버렸다.
 “저놈 대충 치워 버려라. 적호채에 데려다 주든가.”
 다들 멀어져가는 곽우진의 뒷모습과 묵묵히 서 있는 문대량을 번갈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일까? 저분이 북천하가의 초대 가주와 비슷한 재능을 가졌다는 게?’
 곽우진을 끼워 넣는 바람에 잠깐 신빙성이 떨어졌지만 다시 문대량을 보고 있으니 왠지 그럴 것도 같았다.
 최소한 지금까지 문대량이 해온 피나는 노력을 떠올리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적호채에는 내가 다녀오겠다.”
 문대량의 말에 몇몇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일은 저희가 해야지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멀지도 않잖습니까.”
 문대량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 싶다.”
 문대량은 곽우진이 내린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모습을 되도록 자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다보면 저들 모두가 마음으로 곽우진을 섬기지 않겠는가.
 ‘다들…… 대주님의 진면목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문대량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묵룡부대주를 들쳐 멨다.
 그리고 묵묵히 적송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들 멀어져가는 문대량의 뒷모습을 참으로 복잡한 눈으로 지켜봤다.
 
 * * *
 
 묵룡검대원들이 경악한 눈으로 문대량을 바라봤다. 아니, 경악이라기보다는 분노에 더 가까웠다.
 그들의 시선은 온통 문대량의 어깨에 축 늘어져 있는 부대주에게로 향해 있었다.
 사실 부대주는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해온 사이가 아니었다.
 북천하가에서는 무력조직의 부대주나 부단주를 후기지수 중 쓸 만한 사람으로 채워 넣는 것이 보통이었다.
 정책적으로 차기 대주를 키워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함께 해온 대주와는 바라보는 시선이나 대하는 태도가 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동료였다. 특히 묵룡검대는 동료애가 끈끈하기로 유명했다.
 한데 자신들의 동료가 피떡이 되어 돌아왔으니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게 당연했다.
 묵룡검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지룡검대가 처리한 일의 뒤처리를 해야 하기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 습격까지 받아 상당히 피곤한 와중에 이런 일까지 하려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한데 지금 이건 뭔가.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는 꼴 아닌가.
 흉흉한 기운이 사방으로 촥 깔렸다. 그리고 허리춤에 찬 검을 꽉 쥔 묵룡검대원들이 천천히 움직여 문대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신비공자』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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