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프롤로그
아서 허트.
허트 집안 셋째의 이름이다. 일견 평범해보이는 이 소년은 말수 적고 조용하면서도 순종적이었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과 종종 보이는 이상한 행동으로 어릴 때부터 마을에서 유명했다.
어미인 안나는 그런 셋째의 행동이 둘째인 제니의 혼사에 지장이 될까봐 우려했지만, 동네 아줌마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허트네 셋째는 손재주가 좋더라.”
“그래. 얼마 전에 제니는 선물로 빗을 받았다면서?”
“얼마 전에는 신부님께 조각한 신상을 선물로 드렸다니까.”
“신부님이 어린데도 신앙심이 깊다며 칭찬하셨지. 조각도 잘 만들었다며?”
“안나는 좋겠어. 듬직한 장남에, 어여쁜 딸에, 똘똘한 셋째까지.”
이상하지만 재주 있고 똘똘하며 가족을 아끼는 녀석. 그것이 마을 아낙네들의 시선으로 본 아서였다.
그런 동네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안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셋째의 괴짜 기질에 관해서 어찌 말을 하겠는가? 엄마를 생각하는 착한 아들이 혼날까봐 남편인 조나단에게는 말하지 않은 셋째의 엉뚱한 짓이 적지 않았다.
벽난로를 개조한답시고 벽난로 바닥을 파고 넓적한 돌을 ㄷ모양으로 쌓거나, 뒷간 주변에 작은 밭을 만들어서는 호박을 심어버렸다.
처음에는 혼내려고 했지만 개조된 벽난로는 이상하게 바람이 잘 들어가서 연기가 잘 나지 않고 화력도 좋았다. 안나는 내심 좋았지만,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아서가 더 이상한 짓을 할까봐 겉으로 내색하진 못했다.
뒷간 주변에 작은 손으로 일군 밭도 마찬가지다. 무럭무럭 자란 호박잎은 서로 마주대고 비벼서 가시를 없애면 지푸라기보다 훌륭한 엉덩이닦개가 되었다. 거기에 변소 주변이랍시고 무럭무럭 잘 자라는 건 덤.
거기에 소소하게 편한 것들을 만들어주니 안나로서는 걱정되는 마음보다 기특한 마음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남다른 점이 여전히 걱정인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해가 질 때가 되자 같이 모여 잡담과 뜨개질을 하던 아낙네들이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안나도 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가서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저녁을 준비해야했다.
그런데 그녀는 집으로 오는 길에 셋째를 만났다.
“아서. 어쩐 일이니?”
안나의 말에 아서는 굳은 표정으로 등짐에서 뭔가를 꺼냈다. 술병이었다.
그 술병을 보는 안나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었다.
남편이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날.
예전엔 손찌검도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편이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마다 아서가 어디선가 술을 구해왔다. 그리고 남편은 술을 더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자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고맙다.”
안나는 술병을 건네받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말했고, 아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술병을 들고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돈은 준 적이 없는데 이 술은 어디서 구했을까? 이렇게 술병을 받을 때마다 드는 의문이었지만 그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아들이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묻지 않아도 아들이 이 술을 쉽게 구하진 않았으리라는 건 그녀도 짐작되었다.
그녀는 아들에 대한 고마움과 오늘 저녁에 대한 걱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편이 술에 불콰해져서 돌아왔다.
“렐. 이리와. 메뚜기 잡으러 가자.”
“해졌는데?”
“메뚜기는 해지면 활동해.”
아서가 렐을 데리고 나가자 집안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와장창!
조나단! 진정해요!
꺄악!
술 가져와! 빌어먹을 세상!
아버지! 좀 그만하세요!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너 이 자식이! 감히 애비한테 훈계질을 해?!
꺄악!
렐은 그 소리를 듣고 불안한지 아서의 손을 꼬옥 잡으며 걸었다. 보름달이라 그런지 달이 참 밝았다.
둘이 밭에 나가 메뚜기를 잡아 바구니에 담아왔을 때 집안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안나와 제니는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로 집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원흉인 조나단은 술에 취한 채 잠들어 있었다.
아서는 조용히 렐을 침대로 데려갔다. 하지만 렐은 불안한지 아서의 침대로 들어왔다. 아서는 렐을 토닥이며 함께 잠이 들었다.
아침해가 뜨자 아서는 안나가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밭에 나가서 일하려면 준비할 게 있었기 때문에 아서 역시 눈을 뜨고 일어나 어머니와 누나의 일에 손을 보탰다. 렐은 좀 더 자게 놔두었다.
“고마워, 아서.”
누나 제니의 미소에 아서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통을 들고 움직였다.
창고에선 형인 한스가 밭에서 쓸 농기구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 뺨이 퉁퉁 부어있었다.
아서는 물통을 마저 옮기고 창고로 움직였다. 자신이 쓸 도구도 챙겨야 했다.
“왔냐?”
“응.”
한스는 농기구를 챙기다가 아서의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
“형은 가끔 보면 좀 답답해.”
“뭐가?”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한테 제정신이 되어 달라고 말해봤자 그 말이 먹히겠어?”
한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부친과 자신의 실랑이를 말하는 거였다.
“그래서 넌 엄마가 맞는 걸 두고 보자는 거야?”
“그래서 아버지 술 더 마시고 뻗으라고 술을 준비했잖아? 아버지가 손찌검하기 전에 술에 취해서 잠들라고.”
아서의 말이 비아냥으로 들린 한스 역시 비아냥거렸다.
“아, 그래. 너 참 잘났다.”
그 말에 아서는 더는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도구를 챙겨서 창고를 나가버렸다.
한스는 굳은 표정으로 동생의 등을 보더니 마저 남은 일에 집중했다. 그는 세 살 어린 동생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귀염성도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내를 알 수도 없었다. 엄마나 누나는 의젓하고 사려깊다고 아서를 아끼지만 한스에게는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 = = = =
술이 대단한 것은 모든 것을 술 때문으로 잘못을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술에 취해 난리를 피웠던 조나단 허트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프란 마을에서 몇 안 되는 자영농이었다. 비록 소작까지 주진 못할 넓이지만 자기 땅이 있는 농부였다.
하지만 그 땅이 충분하지 않았다. 겨우 가족을 건사할 정도?
조나단은 자식들을 떠올렸다. 첫째인 한스에게 땅을 물려주고 나면 셋째인 아서와 막내인 렐은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소작농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든지.
공평하게 땅을 나눠줄 순 없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친족들이 보여주었으니까. 그건 바로 땅을 팔고 소작농이 되어 자식들 결혼시킬 때 혼수 하나 제대로 못 해주는 것.
그나마 조나단 자신은 젊었을 적 마을에 돌았던 병에 형제들이 죽어서 혼자서 땅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의 미래, 딸의 혼수 비용을 생각하면 막막했다. 저절로 술을 찾을 정도로.
그래서 조나단은 셋째와 막내에게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은 맨손으로 이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니까.
그런데 여기서 조나단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아직 어린 막내야 어려서 어떨지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셋째인 아서가 걱정이었다. 말수 없고 조용한 셋째는 그 싹수가 노란건지 파란건지 아비인 조나단조차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밭일을 마치고 먼저 집으로 돌아온 조나단은 막내와 함께 뒷정리를 하고 돌아온 아서를 보았다. 녀석의 옆구리에는 굵은 들풀을 엮어 만든 작은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그게 뭐냐?”
“메뚜기요.”
“메뚜기 가루 맛있어!”
아서의 대답에 막내인 렐이 신나게 소리쳤고, 그런 막내를 보는 조나단의 심정은 복잡했다.
아서는 제법 손재주가 있는 녀석이었다. 딱히 뭘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제 어미가 바구니 짜는 걸 보고는 저 메뚜기 담는 바구니를 만들었다. 길가에 흔한 들풀로 말이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았다. 벌어먹고 살 재주가 보인다는 소리니까. 그런데 메뚜기를 잡아먹는다니.. 도대체 왜?
처음 아서가 메뚜기를 잡아왔을 때 조나단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일단 이유를 물어봤었다. 그때 아서의 대답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생각보다 맛있어요.’
생각보다 맛있다니? 언제 먹어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조나단은 창고로 들어가는 아서를 따라 쪼르르 들어가는 막내의 모습을 보여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고에 메뚜기를 가둬놓은 바구니를 두고 나오려는 것이다.
저렇게 하루쯤 놔두어 배설물을 싸게 하면 쓴맛이 덜하다나? 그렇게 한 뒤엔 모닥불 위에 구워서 메뚜기를 죽인 후에 바싹 볶은 후 사발과 막대기를 가지고 곱게 빻아서는 안나가 마련해준 작은 단지에 담겠지.
조나단을 한층 기막히게 한 것은 아서가 그 가루를 고깃가루라고 부른 것이다.
조나단은 고깃가루가 아니라 벌레가루라고 정정해주었으나 셋째의 대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어차피 비슷해요.’
도대체 뭐가 비슷하단 말인가? 고기와 벌레가?
아무튼, 그렇게 만든 가루를 식사할 때마다 스프에 타거나 빵 위에 뿌려먹었다.
보다 못해서 혼을 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메뚜기를 버려도, 손찌검을 해도, 아서는 제 고집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고, 끝내 집안사람 모두가 말리는 것에 지쳐버리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형이 먹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맛인지 궁금해진 막내도 끝내 벌레가루에 입을 대고 말았고, 저 지경이 되었다.
자기 말로는 고소하단다.
하지만 아직도 집안에서 저 둘을 제외하고는 벌레가루를 먹는 이는 없었다.
“형. 그런데 이거 우리만 먹어도 돼?”
벌레가루가 든 단지를 안고 나오는 렐이 배려심이 돋보이는 질문을 던졌지만, 아서는 이렇게 대꾸했다.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맛들이면 우리가 먹기 힘들어.”
“아!”
아는 무슨!
감탄하는 막내의 모습에 조나단은 못 본 척 몸을 돌렸다. 셋째 아들의 고집은 익히 아는 바, 더 보고 있으면 속이 끓을 뿐이다.
= = = = =
주말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서 미사를 지냈다.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나면 신부님이 설교를 하시고, 좋은 말씀에 헌금을 드린 후, 다시 찬송가를 부르고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집에서 해온 음식을 나눠먹은 후 해가 정오를 넘어가면 집으로 돌아갔다.
허트네도 다른 마을 사람들과 비슷한 일정을 보냈지만 아서는 조금 달랐다. 신부인 마크롱 에멘을 따로 만나는 일이 잦았다.
“전에는 감사했습니다, 신부님.”
“그 술이 좀 도움이 됐느냐?”
“네, 신부님.”
감사를 표하는 아서를 보며 마크롱 신부는 혀를 찼다. 조나단은 평소엔 괜찮은 사람이지만 술만 들어가면 개가 되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디 허트네 하나뿐이랴? 솔직히 너무나 당연해서 문제라고도 인식하지 않는 것이 이 마을 사람들의 수준이었다.
마크롱 신부는 인자한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옆나라 이야기요.”
“자트라 왕국?”
“네.”
마크롱 신부는 이웃나라와 이 나라 스카라와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풀었다.
자트라 왕국와 스카라 왕국은 오랫동안 갈등 관계에 있었다. 때론 결혼으로 우호를 다지기도 했지만, 각자 기원이 달랐다. 자트라 왕국은 북동쪽에서 이동해온 자타 족이 기원이었고, 스카라 왕국은 남쪽에서 발원한 스칼 족이 기원이었다.
비록 왕족들은 서로 결혼도 해서 피가 섞였지만, 그 때문에 계승권이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그로 인해 몇 번 전쟁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
“또 전쟁이 날 수도 있나요?”
“그렇지는 않다. 지금은 계승권이 있는 이들이 죄다 스카라 왕국의 왕족이나 귀족이거든.”
그들이 모두 죽지 않는 한 계승권 때문에 전쟁이 날 일은 없었다.
“그렇군요.”
아서를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모습을 마크롱 신부는 따뜻한 눈으로 보았다.
아서는 참 영특한 아이였다. 학습력과 집중력이 좋고 신학에 대한 이해도 높아서 성직자의 길을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 교회의 작태를 생각하면 그러는 것이 과연 저 영특한 아이에게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교회도 인맥과 뇌물로 돌아갈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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