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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탄의 인형

2023.10.25 조회 16,265 추천 331


 프롤로그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체면을 잔뜩 구긴 채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러시아 대통령 자리를 창의적으로 돌려먹던 걸로도 모자라 종신 집권의 새 길을 개척하고, 가장 가깝던 친척국가와 전쟁까지 벌이는 푸틴에겐 갖은 욕설과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게 양측이 모두 수십만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는 가운데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았지만, 수십 년 동안 유럽의 석유와 가스 상당부분을 책임져왔던 러시아를 제재하는 건 서방과 러시아 모두에게 힘든 일.
  그리고 사실 수천km 너머에서 죽어나가는 생목숨보다는 자기집 난방비 30%상승에 더 분노하는 게 사람인지라, 그 관심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식어갔다.
 
  더구나 중동에서는 푸틴 이상으로 정신 나간 광신도들이 애초부터 민간인을 노린 대규모 학살을 벌이는 바람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대한 관심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허나 그 여파는 아직도 유럽만이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 반대쪽을 포함한 전 세계적으로 여전했다. 그리고 그 피해자 중에는 지금까지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던 한국인 남강철도 있었다.
 
  “아니, 저 혼자서 그걸 다 어떻게 합니까! 그 놈들은 계속 저 뺑뺑이만 돌리고 있어서, 전무님이 오셔야 놈들이랑 제대로 얘기할 수 있다니까요! 다음 월요일에 약속도 진짜 겨우겨우 잡은 겁니다!”
  [에이,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진데다가 중동 쪽이 더 시끄러워지지 않았나? 애초에 난 러시아 어도 못하는 데 가서 뭐하겠어. 자네 실력이면 충분히 잘 처리할 수 있을 테고 전권을 줄 테니 알아서 잘 해보게, 강 부장. 최 대리는 예정대로 갈 거고, 나도 늦어도 다음다음 주에는 꼭 갈 테니 그 전에 미리 잘 정리해봐.]
  “며칠 전에 골프도 치셨다면서 갑자기 왜... 그리고 제 러시아어도 겨우 기초 회화를 넘는 수준인데, 잠깐만, 부장이라뇨.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얘깁니까?”
  [아, 원래는 몇 달 뒤로 예정했던 건데, 겸사겸사 자네를 미리 부장으로 올려주기로 했네. 발령은 곧 낼 거니까, 부장으로서 최선을 다해주게나.]
  “아니, 지금 부장이나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중요한 건 전무님이-! 아, 진짜!”
 
  2023년 늦가을 모스크바의 번화가 아르바트 거리에서, 남강철은 휴대폰에 대고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부들대며 통화를 끝내야만 했고, 다시 적어도 1주일 동안 러시아 측 바이어를 혼자서 상대하게 된 남강철은 방금 통화한 상사 장 전무에게 각종 욕을 쏟아 부었다.
 
  승진으로 배려해주는 척하지만 말하는 꼴을 보면 똥 덩어리를 떠넘긴 셈이니까. 애초부터 아직 X소기업에서 벗어나지 못한 회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며 푸짐하게 싸질렀던 놈이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해놓고서는 이렇게 쉽게 뒤통수를 때리는 건 예상 밖이었다.
 
  “이 새끼, 다음 주는커녕 내가 두손두발 다 들 때까지 안 올 셈이네. 한국에선 내가 제대로 수습 못했다고 정치질 하면서. 중동 계약은 지 담당이 아닌 거 다 아는데, 러시아어 핑계로 날 먼저 여기로 보내놓고 뒤통수를 쳐? 몇 달 전에 위험하다고 말리던 사람들을 겁쟁이라며 조롱하더니 결국엔 이 지랄을...”
 
  장 전무는 반년 전에 이 러시아 계약 건을 밀어붙였던 두 명 중의 한 명으로, 다른 한 명인 최 부장은 문제가 점점 시끄러워지던 한 달 전에 이미 다른 회사로 튀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장 전무도 이 러시아 계약 건을 포기하기로 하고 자신에게 덤터기를 씌우려는 것 같았다.
 
  하긴 이번 계약 총액은 백억 대에 가깝지만 대러시아 금융 규제로 은행 간 송금이 늦어지는 바람에 아직 집행한 건 겨우 십 억도 되지 않아서, 회사에겐 적지 않은 금액이긴 해도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허나 회사 입장에서는 그럭저럭 해결하더라도 문제는 중간에 땜빵 하러 나선 자신이었다. 금방 따라갈 거라던 장 전무의 언행이나 전적을 보면, 계약이 파탄난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게 분명한 상황.
  장 전무는 지금까지 회사 내에선 그나마 친했던 세 명중의 하나인데, 며칠 먼저 가서 상황파악만 좀 해보라던 게 떠넘기기 위한 밑그림이었을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내가 지금까지 네 놈이 싼 똥을 뒤처리 해준 게 몇 번인데, 진짜로 멍청한 놈이었네. 애초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차라리 잘 됐어. 어찌되든 장가 네 놈은... 박살내고 간다.’
 
  그러나 남강철은 짜증과 화는 내더라도 정작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장 전무 밑에서 뒤처리를 해주면서 상대의 약점은 충분히 확보해두었으니까.
  법인카드의 소소한 횡령부터 사장도 모르는 리베이트 같은 제법 큰 건까지, 심지어 풋풋한 사내 연애가 아닌 질척한 불륜까지도. 그가 취미와 습관으로 모은 대화 녹음에 사진 자료들로 증거도 충분했다.
 
  또한 최악의 경우 양쪽이 둘 다 회사에서 나가게 된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이직할 자신도 있었다. 승진이 임박해 보여서 일단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이직 제안을 철회하지 않은 곳도 두 곳이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분노하는 건 큰 건도 아니고 겨우 이런 작은 건으로 자신을 손절치려는 장 전무의 태도, 다시 말해 자신이 얕잡아 보였다는 것 때문이었다. 만약 이보다 훨씬 큰 건에서 자신을 내던졌거나, 다른 문제로 사내에서 충돌했었다면 조금은 이해라도 할 수 있었을 터.
 
  그는 잠시 장 전무에게 어떻게 갚아줄지를 고민하며 화를 삭였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바꿨다. 장 전무와 자신과의 대화나 통화는 전부 녹음되어 있기에, 그런 건 나중에 귀국 비행기나 한국에 도착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러시아에 있는 이상, 여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바로 그가 러시아에 온 진짜 목적, 러시아 상황을 살펴보고 최대한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
 
  “그래, 일하는 척은 해준다. 그 새끼가 여기서도 뭔가 구린 걸 처먹었는지는 나도 궁금하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애초에 남강철이 러시아어를 배운 것은 원래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국제연애를 위해서였다.
  군대 전역 후 20대 중반 유럽 여행에서 잠시 스쳐갔던 러시아 미녀에게 반했던 그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미녀와 사귀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후 회사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어학원까지 다니며 러시아어를 배운 끝에 그는 3년 만에 어느 정도 일상회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괴하게만 보이던 키릴 문자나 러시아어 문법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허나 정작 준비를 마치자마자 저주받을 코로나 사태가 닥치면서 그는 러시아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좀 잦아들며 여행 계획을 세울 쯤에는 곧 바로 러-우 전쟁이 터져버리면서, 결국엔 이번 출장이 첫 러시아 방문이었다.
 
  물론 그는 수많은 국뽕 유튜브에서 떠드는 것처럼 한국남자가 외국여성들, 그 중에서도 유럽 여성들에게 인기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는 예전에 한국 남자의 기본호감도가 심해저 잠수함 급이었던 수준을 벗어나 적어도 수면 위의 배 정도까지는 올라온 것 같으니,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애초에 그는 나중에 장기 휴가를 내고 러시아에서 어학원 수업을 듣거나 적어도 석 달에서 반년 정도 여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스쳐지나갈 뜨내기 여행객과 짧은 시간 만에 깊은 관계를 맺을 여성은 찾는 건, 동화나 하이틴 소설의 연인들처럼 극히 어려운 일이거나 특이한 여성일 테니까.
  그는 진짜로 결혼까지 고려하는 장기적인 관계를 원했기에, 이번은 그러기 위한 정보 수집이나 현장 답사 정도였다.
 
  ‘선 굵은 미녀는 꽤 보이는 데 내 타입은 안 보이네. 해외 여행객이 줄어든 게 조금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분위기도 개판이고. 그래도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우크라이나보다는 훨씬 낫겠다만. 빌어먹을 놈의 푸틴!’
 
  허나 고생 끝에 처음으로 방문한 러시아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겨우 며칠 둘러보기만 했지만, 관광객들에겐 특히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서방의 경제 제재 때문에 지금 러시아에서는 해외 신용카드는 거의 다 막혀서 쓸 수 없고, 환전도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 외에는 꽤나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사실상 해외 여행객들은 오지 말라는 의미.
 
  그나마 전쟁이 막 시작된 작년 초중반에는 푸틴 반대 시위도 꽤 많이 벌어지면서 시끄러웠다는데, 이제 그가 도착한지는 사흘째지만 그런 건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중국처럼 대대적인 감시추적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과연 국내 통제와 감시 분야에선 둘째라면 서러울 소련의 후예인 만큼 반정부인사를 얼마나 철저하게 추적하는지 사람들은 제 갈 길 가기에 바빴다.
 
  일반 거리는 물론이고 모스크바에선 여행객과 젊은이들이 제일 많이 몰린다던 아르바트 거리마저도 꽤나 한산했다. 서양인들이 좋아할 미녀는 그래도 좀 보였지만, 그의 눈에 띄는 미녀는 더욱 없었고.
  때문에 남강철은 아쉬움을 삭이며 근처의 바에서 가볍게 칵테일과 보드카를 몇 잔 하고, 적당히 취한 채로 호텔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나마 반가운 한글 메뉴판에다가 한국어까지 할 줄 아는 직원 덕분에 소소한 국뽕까지 채운 건 즐거운 오산이었다.
 
  하지만 남강철에게 운수 좋은 날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호텔로 돌아가던 도중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거리 한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남녀 가리지 않고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면서.
 
  “이거 뭐, 뭐야?”
  “꺄아악!”
  [비, 비켜!]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호루라기 소리와 비명이 요란한 가운데 러시아 남녀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순간 남강철은 잠깐 고민했지만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곧 사람들에 섞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습이든 뭐든, 일단 피하는 게 최선일 터.
  허나 그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는 잘 모르는 길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행렬의 뒤로 밀렸고, 곧 러시아인들을 도망치게 만들었던 근원에 붙잡혔으니까. 몽둥이를 들고 잔뜩 기세가 오른 러시아 경찰들에게. 그제야 그는 도망치던 이들이 앞다퉈 내던진 것이 시위 피켓 같은 거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당연히 남강철은 자신을 붙잡은 경찰 두 명에게 급히 외쳤다. 러시아어로, 최대한 공손하게.
 
  [난 한국인입니다! 사업 때문에 방문한 한국인입니다! 난 그저 호텔로 가다가 사람들과 섞인 것 뿐이에요!]
  [한국인이 이렇게 러시아 말을 잘한다고? 거짓말도 적당히 해!]
  [이 놈이 우리가 바본 줄 아나?]
 
  그제야 남강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후회는 늦었다. 고생고생하며 익혔던 러시아어가 이렇게나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허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급히 포켓을 전부 뒤졌지만 대체 어디에서 사라진 건지, 환전한 루블화로 꽤 두툼했던 지갑은 어느새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더구나 아직 할부가 한참 남은 최신 휴대폰까지.
 
  [잠깐, 여기 내 여권을 보면... 아니, 내 지갑? 어, 핸드폰도?]
  [그래, 한국인이라면 여권을 내놔! 없다면 널 친구들이 가득한 감옥에 넣어주지.]
  [아니야, 만약 여권이 없다면 넌 전쟁에 동원될 거다!]
  [하긴 그게 더 낫겠군. 그렇게 애써 찾는 척 할 필요 없어, 세르게이!]
  [세르게이라, 아니면 빅토르는 어때?]
 
  러시아 경찰들은 조롱삼아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남강철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국에서도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외딴 섬이나 깡촌에선 자국민이 사실상 노예가 되는 일이 적잖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권도 없고 신분증명 하나도 할 게 없는 만리타향 외국에서 저게 과연 100% 농담으로만 끝날까?
 
  [우리도 꼭 널 전장으로 보내려는 게 아니야. 그렇게 군대 가기 싫으면 공장가도 된다니까!]
  [세르게이, 일단 조용히 경찰서로 따라와. 가서 제대로 얘기해보자고.]
  [젠장, 호텔에 전화 한 번만 해줘요! 제발!]
  [알았으니까 그만 따라와!]
  [호오, 힘은 제법 좋은데. 일은 잘하겠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들은 양쪽에서 예비 신병 또는 지원자의 팔을 잡고 거칠게 이끌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남강철은 지금까지 삼십여 년의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사실 아무리 러시아 경찰들이 개판이라고 해도, 신원 조회와 조사 도중에 한국 대사관에 전화 한 통도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외 파견 외교관들이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나중에 더 큰 문제가 터지는 걸 방치할 정도로 바보는 아닐 터.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오늘이 금요일이고, 내일 한국 대사관과 제대로 연락이 될 지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황금 같은 주말 동안 추운 러시아 경찰서 유치장 구석에 박혀서 염전노예 춘식이, 아니 예비 신병 세르게이 취급을 받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더 최악은 다음 주 월요일에 대사관과 겨우 연락이 된다고 해도, 월요일에 잡혀 있는 바이어와의 미팅 약속이 박살날 수밖에 없다는 것!
  당연히 한국의 장 전무가 잘 됐다며 만세 삼창을 하는 건 확실했고, 러시아 계약 건을 망친 책임을 자신이 전부 뒤집어쓰게 될 가능성도 58000%는 상승하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화끈한 복수가 물거품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
 
  ‘빌어먹을, 설마 시위대가 도망간다고 등에 총을 쏘지는 않겠지? 아무리 러시아라도, 제발...’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거리에 경찰에 붙잡혀오는 러시아인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가운데,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척하면서!
 
  왼쪽으로 경찰과 함께 쓰러지자마자 그는 오른손으로 다른 쪽 경찰을 힘껏 끌어당겨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리고 조금 전 지나쳤던 어두운 계단, 폐쇄된 지하철역인지 아니면 지하도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어딘가로 이어질 어두운 계단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어, 이 자식이!]
  [야, 세르게이, 거기 서!]
  [씨바, 난 세르게이 아니라고!]
 
  하지만 채 몇 계단도 내려가기 전에, 남강철은 진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흐릿한 등불 아래의 계단은 빗물인지 뭔지로 꽤나 축축했고 그 이상으로 미끄러웠기에.
 
  “조금만, 허억! 컥!”
  퍽! 빠각!
  순간 앞으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에 급히 몸을 뒤로 젖히던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진짜로 뒤로 쓰러진 채 어두운 계단을 온몸으로 쓸며 내려가야 했다. 돌계단에 뒤통수가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나는 가운데, 그 주인공은 고통 속에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수십 계단 밑으로 떨어져 내리다가 한쪽 벽에 처박혔다.
 
  [이봐, 이놈 뭐야?]
  [젠장, 대가리가 깨진 것 같은데... 이봐, 전화 하지 마! 혹시나 이놈이 살아남기라도 하면 몇 배는 더 귀찮아질 거라고!]
  [그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겠다는 거야?]
  [아니, 이 새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이렇게 피가 철철 흐르는데, 이놈이 살아나겠어? 어차피 전화해봤자 구급차가 오려면 십 분은 걸려! 아까 지갑도 뭣도 잃어버린 것 같던데, 그냥 모른 체 하고 가자고.]
  [그건 좀... CCTV도 있었으니, 이렇게 하자.]
 
  뒤늦게 쫓아온 러시아 경찰 두 명은 시끄럽게 떠들다가 갑자기 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그걸 어렴풋이 들으면서도 이미 남강철은 입도 벙끗 할 수 없었다. 너무 큰 고통에 모든 감각이 마비된 건지, 오직 뇌와 머리만이 수조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손발은커녕 목도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뇌리 속엔 주마등처럼 기억 속의 가족과 친구, 적들에 대한 걱정과 원망, 진한 아쉬움까지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개새끼들아, 전화라도 해! 씨바,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확...!’
 
  그 사이에도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끈적끈적한 피는 바닥을 적셔갔고, 그는 얼마 남지 남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조금씩 초점을 잃어가던 남강철의 시야 속에, 문득 벽에 걸린 포스터 속에서 낫과 망치를 배경으로 올백 머리를 하고 있는 콧수염이 들어왔다.
  러시아나 소련에 대해 그가 아는 건 여자 외엔 거의 없지만 그곳에 그려진 콧수염,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 캐릭터와도 비슷한 인물은 그도 분명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재자이자 학살자였으니까.
 
  ‘이게 다 네 놈 때문이잖아. 너만 없었다면...’
 
  당연히 남강철은 소련에 이어 지금의 러시아를 만드는 데도 큰 기여를 한 콧수염을 향해서도 온갖 원망을 퍼부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러시아 경찰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만을 배경으로 남강철의 몸이 차갑게 식어가던 때, 흐릿하던 전등이 몇 번 깜빡였다.
 
  그 명멸하는 전등 빛 아래 찰나의 순간 동안, 마치 환상처럼 포스터 속의 콧수염 아래 입술이 미소 짓는 듯 살짝 움직였다. 허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가던 남강철은 물론 옆의 경찰들까지 그 작은 이변은 누구도 눈치 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시공간적으로는 멀고먼, 비슷하지만 다른 어떤 세계에서는 결코 작지 않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작가의 말


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썼던 작품들은 사명이나 의무에 얽매이다보니 최대한 원래 역사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꽤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아마 중반을 넘어가면 원래 역사는 아마 흔적도 찾기 힘들 것 같네요. 

어렸을 때부터의 생존에 집중하다보니, 인물쪽도 훨씬 집중하게 되겠지요. 



역사를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새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겁니다. 

워낙 유명하고 호불호도 엄청나다보니.

하지만 원래 인물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테니까, 양해바랍니다.  



그럼 내일 다음화로 뵙겠습니다.

오랜만에 올리다보니 실수해서 애매한 시간에 올려졌는데, 일단 오후 8시에 예정입니다.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댓글(32)

못난이둥이    
신작 기대하겠습니다
2023.10.26 08:50
나썬사람    
오 신작 나왔군요
2023.10.26 14:43
대역    
전쟁 끌려가는 줄 ㅋㅋ
2023.10.26 21:35
강철검    
염왕님 신작 기대가 됩니다!
2023.10.27 11:57
이런써글    
제발 나는 저게 얼마나 가치있는지 아니 니들이 뭐라해도 니들이 이해 못하는 이 가격을 꼭 지불하겠어 시전만 말아주기를 그저 이 정도는 투자해도 무리는 아니니까 라든지 사람은 쓸만해 보이니 나중에 다른걸 맡겨보기 전에 경험삼아 지원해 보자를 시전해서 나중에 쥔공 주변인들이 가치를 인정할 때 쯤 추가보상을 해주는 그림을 그려주길 매번 글마다 같은 설정을 하니 답답함 좀 시세를 보고 시세에 맞춰 인수구매투자 하고 때론 이딴걸 나 아니면 누가 사주겠냐 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인성 드러운 놈들의 사업은 앞선 기술로 망하게 만드는 권성징악적인 에피도 넣어주길
2023.10.28 10:42
방랑독자    
신작 예쓰!
2023.11.07 22:59
페퍼맙    
러시아어를 못해야 살아남는 세계관 ㅋㅋㅋㅋㅋ
2023.11.10 12:24
제국의황제    
남'강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3.11.18 20:27
김영한    
벽돌극혐
2023.11.19 11:47
김영한    
엔터 좀 쳐주세요 문단이 읽히나 이게..
2023.11.19 11:48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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