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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온 강호

2023.10.26 조회 214 추천 1


 #001화. 다시 나온 강호
 
 
 
 
 
 드넓은 대전에 조명이라곤 몇몇 횃불뿐이었다.
 어둠 속에 흔들리는 미약한 빛들.
 그 빛이 비추는 곳마다 시체들이 누워 있었다.
 보이는 것만 족히 수십 구니, 어둠 속에 얼마나 더 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을까?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빛이 닿지 않는 곳도, 내 눈에는 대낮처럼 환하게 보이니까.
 주변은 말 그대로 시산혈해.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전부, 내 손에 죽은 자들이다.
 화륵-
 무감한 눈으로 사방을 훑던 중 멀리서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보였다.
 환한 빛 속에서, 쓰러진 시체들 사이에 당당히 서 있는 여인.
 아름답고 우아하며 동시에 산처럼 거대한 그녀는 스스로가 타고난 지배자임을 확신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말했다.
 이리로.
 마주친 시선의 부름에 응하여 나는 걸었다.
 어둠 속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불빛을 따라 한 걸음, 고인 핏물 위에 자국을 남기며 다시 한 걸음.
 마침내 멈춰 섰을 때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휘.」
 「······.」
 「해냈구나.」
 「해내셨군요.」
 「휘.」
 그녀가 다시 부르며 한 손을 내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기대듯 반대편 어깨에 이마를 얹었다.
 지근거리에서 토해내는 숨결을 느끼며, 나는 속삭였다.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
 「이제 전하께서 약속을 지켜주실 차례입니다.」
 「그래.」
 그녀가 대답했다.
 「넌 이제······.」
 
 ***
 
 “······씨, 아침이에요.”
 “······.”
 “아저씨, 날이 밝았다고요. 그만 자고 일어나요.”
 “으음.”
 보채며 흔드는 손길에 휘경은 눈을 떴다.
 밝아온 시야가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담았다. 휘경은 마른 목으로 아이를 불렀다.
 “주아구나.”
 “언제까지 늦잠만 자고 있을 건데요? 다들 벌써 밥까지 챙기고 이동 준비에 한창이라고요. 빨리 정신 차려요, 어서.”
 주아라고 불린 아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휘경은 상체를 일으켜 좌우를 둘러봤다.
 야영을 하며 썼던 물품들을 정리해 수레에 싣는 등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그들을 보던 휘경이 중얼거렸다.
 “······꿈이었군.”
 “뭐라도 깔고 자지, 맨바닥에 그냥 잤어요? 이러니 정신을 못 차리죠.”
 주아는 혀를 차며 휘경의 등에 덕지덕지 묻은 잔풀을 털었다.
 그러고는 밀떡 하나를 내밀었다.
 “자요. 빈속에 가다 쓰러지지 말라고 챙겼어요.”
 “고맙다.”
 휘경은 웃으며 밀떡을 받아먹었다.
 모래를 씹는 듯 푸석한 맛이었지만 고향을 떠난 이들에겐 귀한 먹거리였다.
 “맛있구나.”
 내색하지 않고 씹어 넘기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서생 나리! 후딱 일어나쇼! 갈 길이 먼데 언제까지 꾸물대고 있을 거요?”
 큰 칼을 찬 사내였다.
 그가 다가와 휘경의 봇짐을 발끝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얼른 일어나시라고!”
 “알겠습니다.”
 휘경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아가 발끈 화를 냈다.
 “지금 일어나고 있잖아요. 왜 남의 짐을 발로 차는 건데요?”
 “이 계집애가 어딜······!”
 사내가 눈을 부라렸다.
 휘경은 얼른 일어나 주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한 형,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일찍 일찍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어린애가 하는 소리니 너무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쳇, 내 서생 나리 체면을 봐서 넘어가는 거요.”
 사내는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를 향해 주아가 작은 주먹을 쥐었다.
 “흥! 거들먹거리기는!”
 “제발 조심 좀 해라. 강호인은 성미가 불같아서 말을 가려야 한다고 몇 번을 가르쳐 줘야 알겠니?”
 “아저씨한테만 자꾸 못되게 굴잖아요.”
 “누가 시비를 걸든 응하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도 없단다.”
 “또, 또 재미없는 소리.”
 주아는 혀를 내밀고 냉큼 등을 돌렸다.
 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아이를 보는 휘경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후, 우렁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자! 준비 끝냈으면 이동하겠소! 새 정착지가 얼마 안 남았소이다! 다들 힘내서 걸으시오!”
 턱수염이 무성한 장한이 호쾌하게 소리치고 말 위에 올랐다.
 선두로 나선 그의 뒤를 비루한 차림의 남녀노소가 줄지어 따르기 시작했다.
 지주의 폭압에 고향을 등진 소작농들의 행렬이다.
 휘경은 나흘 전부터 그들과 동행하는 중이었다.
 “······.”
 그의 자리는 행렬의 끄트머리다.
 한쪽에 비켜서서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아침에 시비를 걸어온 사내였다.
 “뭘 멍하니 보고만 있소?”
 “저야 곧 헤어질 객식구니까요. 맨 뒤에서 따르려고 합니다.”
 “고상한 나리께서 소작농 틈에 끼어 가자니 비위가 상해서는 아니고?”
 말 위에서 내려다보며 사내가 이죽거렸다.
 휘경은 웃으며 답했다.
 “세상이 험해서 불안하던 차에 기꺼이 저를 받아주신 분들인데 어찌 불경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아, 물론 든든한 것은 다 화양칠협 덕분입니다만.”
 “흥!”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화양칠협이란 강호의 무리로, 선두에 선 턱수염 장한을 맏이로 한 일곱 명의 의형제였다.
 이들은 고향을 떠난 유민과 침식을 같이 하며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사내도 화양칠협 중 하나로 이름은 한융관이라 했다.
 “그럼.”
 휘경은 앞서가는 유민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융관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의 등을 보는데, 화양칠협 중 함께 후미를 지키는 자가 다가왔다.
 “셋째야, 무슨 일이냐? 저자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느냐?”
 “그건 아니고······ 금양에서 살다 온 놈이라더군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괜히 속이 뒤틀려서 말이죠.”
 금양(錦陽)은 제국의 수도다.
 중원의 온갖 문물이 모여들고 거리엔 풍요가 넘치는 도시.
 황제가 사는 그곳이, 일반 백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놈 손 보셨습니까? 아주 곱상한 게 평생 무거운 거라곤 들어보지 못하게 생겼습디다. 손톱에 거뭇하게 먹물도 들었으니 십중팔구 서생 나부랭이겠지요. 그런 놈들 제가 질색하는 거,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암, 알다마다.”
 화양칠협 중 둘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위 책상물림이라는 부류에 대한 반감은 일곱 형제 모두가 공유하는 부분이었다.
 딱히 이유는 없다.
 굳이 찾자면 호방한 협객은 먹물과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강호에 은연중 흐르는 정서 때문이랄까?
 물론 그런 것 치고도 유별난 편이기는 했다.
 “수틀리면 확 벨 겁니다.”
 한융관은 칼집에서 칼을 슬쩍 뽑으며 웃었다.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이들의 절반은 노인과 아이들이었다.
 수레를 끄는 소들도 비쩍 마른 터라, 이동 속도가 빠를 리 없었다.
 그런 행렬의 끝에서 여유롭게 걷는 휘경의 옆에는 주아가 있었다.
 이제 열두 살인 주아는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와 둘이서 지내다 고향을 떠나왔다고 한다.
 잘 웃고 붙임성이 좋아서 휘경이 합류한 날부터 먼저 다가와 말을 걸 정도였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모양이 마치 작은 새 같다. 먼 길 잠깐의 동행이지만 휘경도 부쩍 정이 든 터였다.
 “······그래서요, 정말 금양은 길마다 비단이 깔려 있어요? 여염집 기왓장도 죄다 금박을 입혔다면서요?”
 “그럴 리 있겠니? 금양도 다 사람 사는 곳이란다. 평범하게 구운 기와를 쓰고 흙을 다져서 길을 내지. 아, 그러고 보니 성문에서 황궁을 잇는 대로는 천자가 다니는 길이라서 특별히 돌을 깔아놓긴 했구나.”
 “황궁이요? 아저씨, 황궁도 가봤어요?”
 주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이의 고향은 금양에서 말을 달려 이틀이면 닿는 거리다.
 하지만 수도 근처건 제국의 변방이건, 소작농의 자식이란 평생 한곳에서 살다 죽는 팔자가 보통이다.
 수도에서 오래 살다 나온 사람을 만나기도 희귀한 일이니 황궁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먼발치에서 보기는 했지. 경비가 삼엄해서 보통 사람은 가까이 가지도 못한단다.”
 “피, 시시해라.”
 “녀석.”
 휘경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주아가 문득 말했다.
 “아저씨, 슬퍼요?”
 “응?”
 “내가 엄마아빠 보고 싶다고 하면 할아버지도 아저씨랑 비슷한 표정을 짓거든요. 우는 것처럼 웃으세요.”
 꼬질꼬질한 얼굴 가운데 두 눈만은 맑게 빛난다.
 어른의 속을 꿰뚫는 천진한 눈을 감히 피하지 못하고, 휘경이 말했다.
 “아저씨도 너만 한 동생이 있었거든. 보고 싶어서 그래.”
 “오래 못 봤어요? 얼마나요?”
 “······오래됐지.”
 그때, 예고도 없이 행렬이 멈췄다.
 유민들의 기성과 말 우는 소리가 겹쳐 전방이 시끄러웠다.
 “으음!”
 휘경은 침음을 흘렸다.
 행렬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수많은 시체였다.
 단 한 구도 사지가 온전치 못했고, 몇몇은 길가에 선 나무에 꿰여 있으니 백주에 보기 힘든 참상이었다.
 “아저씨, 무슨 일이······?”
 “아서라.”
 휘경은 뒤늦게 쫓아온 주아를 붙잡고 눈을 가렸다.
 “아이고,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어떤 천벌 받을 놈이 이래놨대요? 세상에······!”
 어른들도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불안이 커지며 웅성거리는 유민들 앞으로 화양칠협 일곱이 모두 모였다.
 그중 맏이인 턱수염 장한, 두군위가 말했다.
 “모두 잘 들으시오! 내 보아하니 죽은 지 며칠 안 된 터라, 멀지 않은 곳에 도적 떼가 있는 듯하오.”
 두군위는 말머리를 돌려 길 양편에 매달린 시체들을 가리켰다.
 “이들은 통행세를 거부했거나, 몰래 지나려다 걸린 듯하오. 이것은 녹림의 무리가 즐겨 쓰는 경고의 표식이오.”
 “녹림이라니, 그럼 가까운 곳에 산채라도 있단 말입니까?”
 한 중년인이 나섰다.
 피폐한 소작농을 규합해 고향을 떠나기까지 나름 지도자 역할을 해온 자였다.
 두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만한 일을 저질렀으니 이 일대에서는 아마 과하채(菓夏寨) 정도가 유력하겠군.”
 “새 정착지까지 며칠 안 남았는데, 가까운 곳에 그런 놈들이 있다니요. 출발할 때랑 말이 다르잖습니까?”
 “과하채의 영역이 예까지 미칠 줄은 몰랐소. 근자에 새 황제가 즉위하는 통에 나라 안팎이 어지러우니 그 탓인 듯하오.”
 두군위는 안타깝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해서 말인데, 이는 예정에 없던 일이니 아무래도 보호비를 추가로 받아야 쓰겠소.”
 “말도 안 돼!”
 “여기서 무슨 돈을 더 내란 말이오?”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중년인을 비롯한 유민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각자 재산의 대부분을 새로운 정착지 알선과 이동 간 보호 명목으로 화양칠협에게 지불한 터였다.
 나머지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 기반을 닦을 때까지 버티게 해줄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이마저 내놓으라는 두군위의 말이 실로 가혹했다.
 한 노인이 분개하여 나섰다.
 주아의 하나뿐인 육친이었다.
 “그럴 순 없소! 두 대협의 말씀은 우리더러 굶어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되오?”
 “우리 형제가 용맹하다 한들 일곱이요, 도적 떼는 수십 수백일 것이오. 목숨을 내놓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쩔 수 없소.”
 “어찌······ 그러고도 강호의 협객이란 말이오? 그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소?”
 노인이 주먹을 부들거렸다.
 화양칠협이 일제히 발끈하고, 마침 바닥에 누운 시체를 살피느라 말에서 내렸던 한융관이 대뜸 달려들었다.
 “이 늙은이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감히 우리 형제를 욕해?”
 “할아버지!”
 한발 앞서 주아가 노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것들이?’
 손을 치켜든 한융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애와 깡마른 노인을 합쳐 봐야 건장한 사내 하나에 못 미친다.
 ‘괜히 송장이라도 치우게 되면 대형에게 된통 혼이 나겠군.’
 덜컥 두려운 마음이 일어, 한융관은 내려치는 손에서 힘을 덜어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휙 하고 손목을 낚아채는 게 아닌가.
 휘경이었다.
 “한 형, 손속이 과하십니다.”
 “······!”
 한융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두군위가 소리쳤다.
 “얘들아!”
 한융관을 제외한 화양칠협 여섯 명이 칼을 뽑아 들었다.
 좌중에 살기가 급히 차오르니 유민들은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두군위를 비롯한 화양칠협의 얼굴에도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 선 자.
 오직 휘경만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여섯 자루 칼날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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