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중대장 송재섭 대위에게 경례했다.
“······전역을 명받아 이에 신고합니다!”
경례를 받은 송재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준형이.”
“예, 병장 이준형.”
“나랑 헤어져서 섭섭하지 않냐?”
약간 섭섭한 건 사실이었다.
병사들을 자신의 진급 도구로만 여기던 전 중대장과 달리, 송재섭 중대장은 나 같은 행정병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었다.
덕분에 요 1년은 아주 편하게 보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군대에 말뚝 박을 만큼 편하진 않았지만.
난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물었다.
“예? 왜요?”
“요? 요? 어쭈, 이제 전역했다 이거냐?”
“예비역은 그만 갈구시고 나중에 연락이나 주십쇼.”
“왜? 한 대 치려고?”
“중대장님처럼 훌륭하신 분을 왜 때립니까?”
“그럼?”
“군에서 나오시면 스카우트하려고 그러죠.”
이번엔 진심이었다.
그가 그냥 착하기만 했다면?
내 입에서 절대 훌륭하단 말은 안 나왔을 테지.
그는 착하면서 실력까지 갖춘 진짜 보기 드문 장교였다.
창업하면 진짜 스카우트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송재섭은 어이가 없는 듯 농담으로 받았다.
“난 군대 체질이야, 인마. 근데 전역하면 바로 복학할 생각이냐?”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졸업하면 아버지 회사 물려받겠네.”
이런 말은 살면서 수십, 아니 수백 번도 더 들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에이, 아버지 회사는 아버지 거죠.”
“그럼?”
난 가슴을 쭉 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전 제 사업을 할 겁니다.”
“야, 창업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두고 보십쇼.”
“뭘 두고 봐?”
“전 반드시 세계 최고의 사업가로 우뚝 설 겁니다.”
졌다는 듯 송재섭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 그래, 열심히 해라.”
“나중에 놀라지나 마십쇼.”
송재섭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내 밑에서 행정병으로 구르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잘 아시네요.”
“하여튼 말꼬리 잡는 덴 선수라니까.”
송재섭과 악수하며 전역의 기쁨까지 담아 큰 소리로 외쳤다.
“중대장님, 꼭 별 다십쇼!”
“넌 꼭 세계 최고 부자 돼라! 부하 덕 좀 보게.”
전역식을 마치고 위병 초소로 뛰어갔다.
초소 밖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준형아, 여기다!”
얼른 달려가 아버지를 꼭 끌어안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내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군대도 다녀온 녀석이 애처럼 이게 뭐야?”
“그럼, 이제부터 아버님으로 불러드려요?”
“아버님이란 소린 장차 며느리로 올 아가씨에게 들어야지, 아버지 사업 물려받기 싫다는 불효자에게 듣고 싶진 않다.”
“벌써 며느리를 보시게요?”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긴 하고?”
난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 아들내미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요.”
“네가 모쏠인 거 다 아는데 너스레는.”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아버지가 모쏠이란 말을 어떻게 아세요?”
“준희가 얼마 전에 가르쳐 주던데. 암튼 차에 타라.”
준희, 이 자식!
내 인생 최대 비밀을 함부로 발설하다니.
집에 가면 혼내 줘야겠네.
우린 곧 차에 올라 서울 방면으로 달렸다.
난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물었다.
“엄마랑 준희는 안 왔어요?”
“엄마는 봉사 활동 기간이랑 겹쳐서 못 왔어.”
“매달 가시는 그 보육원 봉사 활동이요?”
“그래. 섭섭해?”
“어쩔 수 없죠. 좋은 일 하시는 건데.”
어머니는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부터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내서 보육원 봉사 활동에 참여하셨다.
어릴 땐 가족보다 봉사 활동이 우선인 거 같아 약간 싫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어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컸다.
아버지가 앞차와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말했다.
“아, 그리고 준희는 아침에 친구 만나러 간다며 일찍 나갔다.”
“오빠가 오늘 전역하는 건 알아요?”
“알지. 내가 말해 줘서.”
“그런데 친구 만나러 갔어요?”
“오빤 말년 휴가 때 지겹게 봤다면서 친구 만나러 간다던데.”
뭐 내가 말년 휴가를 많이 나오긴 했지.
그래도 오빠가 전역하는 날엔 집에 붙어 있을 것이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가 준희를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래요.”
“뭐?”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가 전역하는 날인데 당연히 와 봐야죠.”
아버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뭐를요?”
“너한테는 준희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잖냐.”
“그거야 그렇죠······.”
“알다시피 우리나, 네 외가나 자손이 귀하지 않냐?”
윽, 아버지 레퍼토리 또 나왔네.
우리 부자는 다른 집과 달리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근데 그중 한 30퍼센트는 항상 이 루트로 빠진다.
난 진저리를 치며 물었다.
“아, 또 그 얘기에요?”
“그래서 친척도 없는데 남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래야 나나, 네 엄마가 나중에 안심하고 저세상에 갈 거 아니냐?”
“어휴, 두 분 다 아직 한창이신 연센데 뭘 벌써 그런 걱정을 하고 그러세요. 더구나 요즘은 다들 백세시대라고 하잖아요.”
아버지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그나마 다행은 아버지가 원하는 정답이 존재한다는 점이겠지.
난 착실한 학생처럼 준비해 둔 대답을 꺼냈다.
“아버지, 동생 준희는 제가 끝까지 책임질게요. 그 대신에 앞으로 그런 현기증 날 거 같은 말씀 좀 제발 하지 마세요!”
“아, 알았다. 안 하마.”
도로가 조금 한산해졌을 무렵.
아버지가 다시 앞차와의 거리를 벌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뭔데요?”
“엄마가 동생 갖고 나서 아팠던 거 기억나?”
내가 여섯 살, 아니면 일곱 살 무렵인 거 같은데.
아무튼 엄마는 준희를 가지고 나서 중병에 걸리셨다.
그래서 아버지 동창 중에 미국 유명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에게 진료받으려고 부모님 두 분 다 미국으로 건너가셨다.
하지만 난 아직 어려서 같이 갈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아픈 엄마와 어린 날 같이 돌보긴 쉽지 않았으니까.
그런 이유로 난 거의 1년 넘게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척 좋으신 분이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와 1년 넘게 떨어져 있어야 했던 탓에 내 기억에서 그 시절이 썩 유쾌한 경험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난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죠.”
“근데 네 엄마가 다행히 다 나아서 준희를 안고 귀국했을 때 말이다. 동생을 대하는 네 태도가 그때부터 좀 이상했어.”
난 약간 찔리는 점이 있었지만 얼른 모르는 척했다.
“그랬어요? 이상하네. 난 기억에 없는데.”
아버지는 다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너도 그땐 아직 어린 나이여서 부모의 관심이 많이 필요했을 테지. 근데 준희 문제로 근 1년 가까이 엄마, 아빠랑 떨어져 있었잖아······. 아마 동생이 곱게만은 안 보였을 거야.”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나오면 방법이 없었다.
“약간 그랬던 거 같긴 하지만······, 동생이 자라면서 그런 생각은 진작에 없어졌어요. 준희는 어렸을 때도 귀여웠잖아요.”
“그거 다행이다.”
아버지는 그제야 진심으로 안심하는 눈치였다.
물론, 좀 전에 한 말은 진심이었다.
이젠 나도 동생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한다.
그래, 아버지 말대로 동생은 내가 돌봐야지.
그게 오빠니까!
잠시 후.
차가 분기점에서 갑자기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난 고속도로 이정표를 보며 물었다.
“어, 이 길은 집 가는 방향이 아닌데?”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집에 가기 전에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 그래.”
“어딜 가시는데요?”
“가 보면 안다.”
대체 어딜 가시려는 거지?
전역 축하 기념으로 한 턱 쏘시려는 건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났을까.
차가 강원도의 어느 등산로로 들어섰다.
난 창밖으로 험준한 산을 올려다보며 어이가 없었다.
“등산하시게요?”
“뭐 비슷하지.”
“막 전역한 아들을 등산하는 데 데려가셔야겠어요?”
“중요한 일이라 그래.”
아버지의 표정이 진지해서 난 나오려던 농담을 얼른 다시 삼켰다.
우린 차를 주차하고 산을 올랐다.
아버지가 주변 지형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이 맞는 거 같긴 한데······.”
“어, 길을 모르세요?”
“오랜만이라 그래.”
점점 더 알쏭달쏭하네.
대체 어딜 가려고 이러시는 거지?
잠시 후.
“저기인 거 같구나.”
그러면서 아버지가 등산로 옆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난 아버지를 쫓아가며 물었다.
“여긴 등산로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가려는 데는 산 정상이 아니야.”
“그럼요?”
“아무튼 그런 데가 있다. 넌 따라오기나 해.”
경사가 가파른 산속을 헤매며 30분을 걸었을 때.
오아시스처럼 눈앞에 작은 우물이 나타났다.
우물 옆 바위에 앉은 아버지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휴, 오랜만이라 그런지 힘드네.”
난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에 띄는 풍경은 없었다.
그나마 하나 꼽으라면······, 이 초라한 우물 정도겠지.
“설마 이 우물을 보기 위해 오신 건 아니죠?”
“설마가 사람 잡는단 말은 이런 때 쓰는 거겠지.”
“여기가 어딘데요?”
“우선 앉아라. 다 얘기해 줄게.”
난 아버지 옆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간추려 말하자면······, 이 우물은 도술을 배우던 우리 집안의 먼 조상님이 우화등선하신 아주 유서 깊은 곳이란다.”
현실감이 없네.
도술, 조상님, 우화등선 같은 말이 아버지 입에서 나올 줄이야!
난 믿을 수 없어 입을 쩍 벌렸다.
“농, 농담하시는 거죠······?”
“잠자코 들어. 안 그러면 당분간 용돈 없다.”
요즘 군대는 아버지가 현역 복무하던 시절처럼 한 달에 몇천 원 주고 입 닦는 곳이 아니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용돈 공격을 비장의 무기쯤으로 여기시는데 그런 소소한 즐거움을 아들인 내가 먼저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다.
풀 죽은 척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은 아버지가 말했다.
“나도 너처럼 전역하고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왔었지.”
“아, 아버지도요?”
“그래.”
“그럼 이게 우리 집안 전통인 거예요?”
“그런 셈이지.”
난 급히 물었다.
“아버진 조상님이 여기서 우화등선했단 말을 믿으세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우물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단 점이 중요하지.”
난 말조차 나오지 않아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한국 최고 대학인 한국대 약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할 줄 이야!
아버지가 담담히 물었다.
“너도 우리 준형제약의 효자 상품이 뭔지 알지?”
“숙취 해소제인 알쓰프리잖아요.”
“알쓰프리도 처음에는 반응이 영 시원찮았어. 거기다 생산 설비를 급히 늘리느라 주거래 은행과 2금융권에 빚까지 많이 졌지.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런 상황에서 알쓰프리마저 끝끝내 실패했다면? 회사는 부도를 피하기가 힘들었을 거다.”
난 어느새 아버지 말에 빨려 들어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할아버지와 이 우물을 찾은 기억이 나더구나. 그래서 실패한들 본전이란 생각에 당장 여길 찾아 소원을 빌었단다.”
“그래서요? 그다음에는요?”
“우물에 소원을 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소문이 난 알쓰프리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네가 아는 준형제약이 만들어졌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 우연이겠죠.”
“조상 대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예가 더 많단다.”
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예요?”
“네가 믿든, 안 믿든······, 이 우물이 우리 가문과 연관이 있는 곳임엔 틀림없으니까 여기를 잘 기억해 두란 뜻이다. 살면서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기 힘든 고난이 닥쳤을 때······, 나처럼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찾아와 소원을 빌어 봐.”
그러면서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쩌면 조상님이 보우하셔서 소원을 들어주실지도 모르잖니.”
“알겠습니다······.”
난 대답하고 나서 우물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영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뭐 아버지 말처럼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깟 발품 좀 파는 게 어때서.
조금 귀찮은 게 단데.
그나저나 무슨 소원을 빌지?
로또 번호?
아니, 그냥 돈으로 1조를 달라고 해 봐?
잠시 후.
난 피식 웃었다.
하, 이 무슨 바보 같은 상상이냐.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내가 이런 사이비에 속아서야 쓰겠어?
하하, 21세기에 웬 도술!
갑자기 현타가 세게 와 환상에서 깨어났다.
에이, 아버지 기분이나 대충 맞춰드리다가 돌아가자.
내려가기 전에 길이나 외워 두잔 생각에 우물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연꽃을 닮은 금빛이 우물 위에서 번쩍였다.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하지만 연꽃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흠,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그때, 저 밑에서 아버지가 손짓했다.
“준형아, 어서 가자. 어두워지면 내려가다 다쳐!”
“예, 가요!”
난 벌써 많이 내려가신 아버지의 뒤를 얼른 쫓아갔다.
아버지가 비탈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며 물었다.
“참, 홍현도 아저씨 기억하지?”
“아, 그 군인 아저씨요? 기억하죠. 집에 몇 번 오셨었잖아요.”
홍현도 아저씨는 아버지와 동창이며 절친인데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꼭 내려와 우리 집에서 하루 묵고 서울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도가 다음 달부터 임원으로 일하기로 했다. 아마 다음 주에 인사하러 올 거야.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
“알았어요. 근데 회사에서 무슨 직책을 맡으신 거예요?”
“리바이딘 알지?”
“요즘 개발 중인 간 질환 치료제요?”
“현도는 그 리바이딘 업무를 도와주러 오는 거야. 나랑 신미진 이사 두 명이 전부 처리하기에는 신약 사이즈가 크니까.”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인 아저씨가 리바이딘 개발을 어떻게 돕는단 거지?
뭐 아버지가 알아서 잘하시겠지.
“근데 신 이사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신약 개발한다고 정신없이 바쁘지.”
“주영이 많이 컸죠?”
“네 살이 넘었지 아마.”
우물 투어를 마친 우리 부자는 정답게 얘기하며 차로 향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콰콰콰쾅!
천둥 벼락이 내려치던 어느 지랄 같은 밤.
난 혼자 그 우물 앞에 다시 서 있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