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에단은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했다.
여러 사람이 그를 찾았고, 그때마다 군말 없이 나서서 일을 도왔다.
나이는 어렸으나 어른스러운 그에게 많은 사람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꽤 특이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에단은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는 가스펠 영주가 전에 집어삼킨 포도나무 제재소에서 일하던 노예로, 제재소의 일가족이 모두 죽으며 가스펠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그가 특이한 점은, 꾀를 부리거나 내빼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이 걸지도, 말 한마디마다 무지가 드러나지도 않았다.
발음이 조금 서툴긴 했지만, 의사소통은 잘 되었으며, 일을 시켜볼수록 영리함이 드러났다.
사용인들은 바쁠 때마다 가문의 노예인 그에게 곧잘 자기 일을 맡겼다.
실수한 적도 있으나, 대부분 금방 적응하고 불만 없는 결과를 내주었다.
그렇게 가스펠 가문의 주방에서 일하는 멜리다는 오늘도 에단에게 일을 맡겼다.
“도련님께서 가문 기사들과 통돼지 바베큐를 드시고 싶다고 하셨대. 형태를 유지한 채 손질된 돼지를 열 마리나 주문해야 해. 그리고-”
그녀가 품에서 쪽지를 내밀었다.
“이건 향신료 목록. 거의 다 떨어져서 미리 채워두려고.”
“예.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응. 대신 나중에 바베큐 몇 점 떼다 줄게. 맛있을 거야.”
멜리나가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떼어 에단의 손 위에 올렸다.
절그렁 소리가 들리자, 순간 에단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건?”
“향신료값. 주방장님께서 맡기신 거야. 저번에 급하게 외상하려고 하니까 거절한 적이 있어서 준비해 두셨다더라. 자금 흐름이 나쁜지 어음을 받기 싫어해. 어음을 받으면 어음으로 계산하고, 거절하면 현금으로 계산해줘.”
에단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멜리다가 자신의 어깨를 꾹꾹 누르며 투덜댔다.
“이제 난 양동이 가득한 양파를 썰어야 해. 그다음엔 다른 녀석들과 주방을 정리해야겠지. 그다음엔 또 재고를 파악해야 하고. 주방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마음 같아선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지만, 그랬다간 일이 늦어져 나만 혼나겠지···. 일손을 더 붙여주면 좋으련만···.”
이내 손을 흔들고 들어가는 멜리나에겐 의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 지금까지 이런 심부름은 여러 차례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스펠 안주인의 귀금속 상자나 가주가 쓸 약재가 든 비단 주머니 따위를 옮기는 일도 맡아본 적 있었다.
에단은 그때마다 묵묵히 일을 수행했고, 욕심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신뢰를 쌓으며 함께한 지도 이제 4년이 넘었기에, 이제 와 그를 의심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에단이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노예로선 몇 년을 모아야 얻을 수 있을 지폐와 동전들, 그리고 가스펠 가문의 문양이 찍혀있는 쪽지 두 장.
쪽지는 어음으로, 가스펠 가문이 물건을 가져갔으며 훗날 약속한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기록을 남겨두는 데 쓰였다.
가문의 인장이 찍힌 어음은 본래 노예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 원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은 흔했다.
에단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신대륙으로 갈 시간이었다.
***
한국의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는 흐릿한 꿈을 자주 꾸었다.
빈말로도 살고 싶지 않은 낙후된 마을의 모습이 자주 보였고, 마을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으며 배회하다가 꿈이 끊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이 선명해졌다.
좁아진 시야각이 확 넓어졌고, 마을을 둘러싼 나무에 매달린 잎의 새파란 색과 거미줄의 반투명한 색, 그곳에 맺힌 물방울의 투명함까지 너무도 생생해졌다.
시선을 돌리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는 마을 사람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전의 재잘대는 새소리가 들려왔고, 살짝 서늘하지만 추울 정도는 아닌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생생해진 꿈속에서, 잠이 깨지 않았다.
그는 외딴 마을에 흘러든 열너덧 살의 비쩍 마른 소년이 되어, 먹을 만큼 나이를 먹고도 말도 못 하는 바보 취급을 당했다.
그래도 성인 남성으로서 두 손 놓고 굶을 수는 없는 일.
손짓·발짓과 그림으로 마을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착한 꼬마애 하나와 친해져서 간단한 말을 배우고, 그 집 나무꾼 노인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노인에게 에단이란 이름을 얻었다.
나무꾼 일이 얼추 익숙해지고 할 줄 아는 말이 좀 늘어났다.
노인 혼자 하던 양보다 두 배를 더 베어낼 수 있게 되니, 집안 사정도 좀 풍족해졌다.
꼬마는 어느새 에단과 결혼하겠다는 귀엽기만 한 포부를 밝혀오기도 했다.
그렇게 이곳에 온 지 1년쯤 되었을 때, 산적들이 들이닥쳐 마을을 모조리 불태웠다.
습격에서 살아남은 노인과 아이는 없었다.
그때 에단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몸이 좀 더 자라 성인의 기준에 가까스로 닿았기 때문이었다.
도적들의 목적은 노동력이었다.
그들은 사로잡은 마을 청년들을 산으로 끌고 가더니, 자신들의 거점지 공사에 투입해 마구 부려 먹었다.
나무를 썰고 묶어 장벽을 만들고, 산을 파서 평탄화하고, 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널찍하거나 작은 목재 건물을 여럿 지었다.
여러 마을에서 납치당해 온 목수 셋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다.
무리한 노동으로 많이들 골병이 들거나 다쳤으나, 에단은 나무꾼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
나무와 좀 더 친해진 상태에서 일했고, 서툰 건축보단 익숙한 나무꾼의 일을 자처했기에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몸이 상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 얼추 공사가 완료되자, 노예상 앞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팔리지 않은 자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다행히도 상대적으로 멀쩡했던 에단은 상품성을 인정받아, 도적놈들의 손에서 노예상의 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나마 덜 더러운 철창에 갇힌 채 자신을 사갈 사람을 기다렸다.
생존하기에 최소한의 음식과 최소한의 청결. 가까스로 입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의 온도.
노예상은 베테랑이었다.
그곳에서 한 달쯤 지냈을까, 한 거한이 노예상을 방문했다.
노예상은 각 노예가 가진 장점에 대해 숙지하고 있었기에, 적절한 주인이 찾아왔다.
“네가 나무꾼이고, 목공 경험이 있다고?”
“예.”
“이 녀석으로 하지.”
에단을 사 간 자는 포도나무 제재소의 둘째 아들 두두였다.
두두는 거대한 제재소에 데려가 수많은 노예들 틈에 에단을 떨궈놓았다.
노예들은 에단에게 일을 가르쳤다.
주된 일은 톱질이었다.
거대한 나무를 자르고 옮기고 톱질하는 곳.
다행히도 밥은 넉넉하게 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노동하며 보낸 것이 6개월쯤 되었을까, 포도나무 제재소와 가스펠 영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곳의 목재를 말도 안 되는 값에 가져가려고 한다는데, 제재소의 가족들은 매일같이 큰 소리로 이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권력자에게 반기를 들다간 다 죽을 수도 있다고! 규모를 늘리자는 네 말에 반대했던 이유가 이거다! 결국 욕심을 부리다가 저들의 눈에 띄지 않았느냐! 우리끼리 일하던 이전에도 충분히 배부르게 먹을 만큼 풍족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서 뭐 합니까? 그리고 지금 벌어들이는 돈은 과거의 여덟 배가 넘습니다. 그때가 풍족했다면 지금은 얼마나 더 풍족하다는 겁니까?”
두두가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몇 년만 더 이렇게 일할 수 있다면 우린 저택도 살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귀족도 될 수 있어요. 아버지 손의 굳은살, 이미 다 떨어져 나갔죠. 제 손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저 대신 노예들이 톱질하고 있으니까요. 우린 지금 귀족처럼 되어가고 있어요. 삶이 나아지고 있다고요!”
“난 아무래도 주제넘은 짓이 아닌지 걱정되는구나.”
“덤빌 테면 덤비라고 하죠! 우리 제재소에 있는 노예들. 칼 쥐여주면 그게 다 병력입니다!”
“그들로 싸우겠다고?”
“이득보다 손해가 많게 만들면 됩니다. 적이 많으면 싸우기 싫겠죠. 그리고 싸움은 명분 아닙니까!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들이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 낱낱이 얘기하고 따지는 겁니다!”
“난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봐라.”
의견이 맞지 않아 대응이 늦어지는 듯했으나, 머잖아 가스펠 영지에서 병력을 보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뒤, 제재소의 입구를 보고 선 에단의 손에 낡은 검이 들렸다.
주변의 다른 노예들에게도 조잡한 무기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에단이 영 낯선 그 감촉에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옆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시선을 돌리자, 두두가 불러 모은 마을 사람들이 제재소 울타리 너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잖아 정면에서 말을 타고 중갑을 입은 기사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는 잘 갖춰진 갑옷을 입은 채 날카로운 창을 든 병사들이 늘어섰다.
순간 서늘한 감각이 일었다.
에단은 이대로 싸우면 예외 없이 죽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 그가 싸울 일은 없었으니까.
기사 한 명이 말에서 내려서더니, 천천히 걸어오며 대검을 뽑았다.
덩치 큰 두두가 커다란 쇠망치를 들고 상체를 낮추며 딴에는 대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입을 움찔거리는 것이 전투를 준비한다기보단 앞으로 할 말을 고르는 기색이었다.
그는 충분히 다가온 상대가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을 열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우두머리와 우두머리가 간단한 대화를 한 뒤, 합의가 어긋나면 전투를 시작하고, 패배해도 노예만 죽을 뿐 자신은 포로로 잡히는 그런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긋하게 걸어온 기사는 대검을 가볍게 던졌다가 받으며 철 장갑을 낀 양손으로 검날을 쥐더니, 두두의 머리를 사선으로 올려 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두는 대검의 가드에 머리가 터져 쓰러졌다.
이후 기사가 뒤를 보며 손짓했다.
뒤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와 병사들이 제재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제재소의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자는 모조리 죽였다.
그 시체를 끌고 나와 한데 모아 불태우자, 일대에 고기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노예들을 둘러보던 기사가 병사에게 명령했다.
“전리품이다. 다 데려가지.”
병사들은 노예를 일렬로 세워두곤, 기다란 줄로 엮어 끌고 갔다.
기사들은 도적들과 다를 바 없이 굴었다.
일은 하루에 한 번만 정해진 시간에 볼 수 있었고, 그때 못 보면 다음 날까지 참아야 했다.
밥은 기사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대충 뭉쳐 줬으며, 기절하거나 쓰러지면 내버리고 갔다.
말 그대로 물건 취급이었다.
끔찍한 행군은 사흘 만에 끝났다.
에단은 끌려온 가스펠 영지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편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노예 생활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구속하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건, 현대인의 관점에서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보를 모으고자 했다.
영지에서 나갈 방법, 추적을 피할 방법, 숨어 지낼 곳 등 얻어야 할 정보는 많았다.
그러나 노예인 그가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는 없었다.
노예들이 머무는 지하의 공용 숙소와 지상 1층의 사용인용 통로만이 그가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개 쓸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정보를 익히려면 이동 반경을 넓혀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야 했고, 그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했다.
평판을 높여두고 다양한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그가 여러 장소를 돌아다녀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다.
정해진 구역 바깥으로 나간 그에게 누군가가 ‘왜 여기 있는가?’를 물을 때, 대답할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일거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는 영지 내 여러 일꾼에게 어떻게든 쓸모를 증명해내며, 일거리를 늘려나갔다.
그래서 악착같이 맡은 일을 마치고, 서둘러 나가서 새로운 일을 찾아서 했다.
시간이 흘러 그가 밖에 있는 모습을 보아도 이유를 묻지 않는 사람이 늘어갈 때쯤, 한 사냥꾼을 만날 수 있었다.
에단은 그로 인해 신대륙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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