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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지하엔 예상치 못한 게 있었다

2023.12.11 조회 61 추천 0


 #프롤로그
 
 
 
 
 
 - 2020년 3월 25일
 이번 모의고사 결과도 나름 만족스럽지만, 아빠는 겨우 ‘세 손가락’ 안에 들었냐며 놀렸다. 엄마는 늘 그렇듯 내 편이다.
 
 - 2020년 5월 3일
 진로 상담이 끝났다. 여전히 확신이 서질 않는다. 학생회장 등 생기부 관리도 잘 됐고, 내신, 모의고사 성적 등 뭐하나 빠지는 게 없다. 심지어 체육 쌤은 체대까지 밀고 있으니······. 아무튼 행복한 고민이다.
 
 - 2020년 5월 7일
 작은 취미가 생겼다. 집에 뒹굴던 구형 노트북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게임인데 ‘위그드라실’이라고 적혀있다.
 
 그래픽은 최악이다. 도트에 텍스트만 가득한데도, 대사나 세계관 등이 이상하리만큼 현실감 넘친다. 꼭 진짜 존재하는 세계를 누군가가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다.
 
 잠깐이나마 이런 세상이 현실이라면, 혹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어떨지 생각을 해봤다.
 
 음······. 마법 비스름한 요소도 있고 나름의 재미는 있겠으나 역시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 2020년 6월 10일
 위그드라실을 플레이하다 보니 모의고사 등수가 좀 떨어졌다. 전교 5등이면 나쁜 순위는 아니거늘, 아빠는 또 신나서 놀린다.
 
 - 2020년 7월 12일
 다양한 클래스로 여러 차례 플레이했음에도 여전히 재미있다.
 
 개발자가 어떻게 만든 건지, 새로 플레이할 때마다 큰 줄기 외에는 선택지에 따라 모든 양상이 변한다. 분기가 수천, 수만 개라도 되는 건가?
 
 미친 고난도에 불친절한 설명이 걸림돌이긴 하지만, 또 그런 맛이 있다.
 
 - 2020년 9월 3일
 게임이고 공부고 모두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다. 금융 위기 때도 저런 적은 없었는데······.
 
 - 2020년 9월 8일
 두 분의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별일은 없어야 할 텐데······.
 
 - 2020년 10월 4일
 사람들이 들이닥쳐 흔히 말하는 ‘빨간 딱지’를 곳곳에 붙였다.
 
 - 2020년 10월 15일
 9시 뉴스에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나왔다. 자주 있던 일이다. 명망 있는 CEO이자 개발자인 아빠와 일류 디자이너인 엄마는 뉴스 1면에도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단, 이번엔 사기꾼이라는 명목이다. 부모님과 친했던 재벌, 언론인, 심지어 얼마 전 직접 우리 집으로 와, 내 생일을 축하해줬던 대통령까지 나서서 두 분을 규탄하고 있다.
 
 - 2020년 11월 7일
 잊을 수 없는 아침이다. 고급 맨션에서 싸구려 모텔방으로 이동했다.
 
 그날 밤. 엄마와 아빠는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두 분이 사라져도 절대 찾지 말라고 하시더니,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가려 했으나 가위눌린 듯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한차례 나더니, 두 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2020년 11월 10일
 행방불명으로 경찰에 신고도 해보고, 모든 사람에게 연락도 돌리며 사정사정했으나,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사기꾼이 야반도주했다는 식이었다.
 
 - 2020년 11월 16일
 ‘삼촌’이 용케 나를 찾아왔다. 친삼촌은 아니지만, 아빠와 매우 친한 분으로 얼굴은 종종 봤었다. 당분간은 삼촌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 2020년 12월 25일
 내가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부모님이 어딘가에 살아계실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덕분이다.
 
 아니, 믿음을 너머 이유 모를 확신이 가득했다. 어떤 미지의 존재가 이런 확신을 불어 넣는다는 망상까지 생길 정도다.
 .
 .
 .
 - 2023년 9월 7일
 벌써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그나마 삼촌 덕에 생존은 해왔으나, 순탄하진 않다.
 
 대학은 물론이고 단순한 알바 역시 면접조차 보지 못한 채 떨어졌다.
 
 사기꾼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때문인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 2023년 10월 12일
 이상한 일이다. 옛날에 압류당한 낡은 노트북이 삼촌의 집으로 배송됐다.
 
 단순히 같은 모델인 줄 알았는데, 위그드라실 게임 역시 깔려있다. 흠······.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 2023년 10월 18일
 자기 계발 외에 남는 시간은 위그드라실에 쏟는 중이다.
 
 미친 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으나, 부모님과의 유일한 연결점이라는 느낌이다.
 
 절박해서 돌아버린 걸까?
 
 아니면 아버지가 개발한 게임이고 이 게임 안에 무슨 비밀이 들어있는 건 아닐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게임이 확 변한 느낌이다.
 
 정신 나간 난이도에 변화무쌍한 분기, 불친절한 설명은 그대로였으나, 분위기 자체가 매우 절망적으로 바뀌었다.
 
 어떤 쪽을 선택해도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다. 희망도 꿈도 없는 그런······.
 
 - 2023년 11월 9일
 삼촌의 ‘카타나왈라 영양식’은 최악이다. 고향인 파키스탄 특제 음식이라는데 괴상한 맛은 둘째치고, 이걸 먹을 때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요리를 배우든가 해야지······.
 
 ***
 
 평소와 다름없는 날.
 
 살짝 다른 점이라고는 칠이 벗겨진 낡은 수납장 위에 올린 부모님의 사진.
 
 아버지는 장난기와 근엄함이 섞인 모습으로, 어머니는 따듯하면서도 자애로운 미소로 변함없이 나를 바라본다.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제사의 형식은 절대 아니다.
 
 잠시나마 마음속으로 옛날로 돌아가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에는 운동도 한 세트 돌려주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좀 읽다가 낡은 노트북에 깔린 게임을 켰다.
 
 오늘도 변함없이 커다란 다섯 글자가 모니터에 지직거리며 잔상을 남긴다.
 
 위그드라실.
 
 불친절한 게임 진행만큼이나 무성의한 로고.
 
 “흐음······. 히든 이벤트라······.”
 
 히든 이벤트 자체가 놀랍다기보다는 퀘스트 전개와 논리 과정이 아버지의 논리와 너무나도 닮았다는 점이 놀랍다.
 
 “보상이 나올 시점인데······.”
 
 - 네 아버지를 부수고 어머니를 도려낸 후, 너 자신의 목을 그어라. 그 길만이 네가 살 길이다.
 
 보상 대신 나타난 꺼림칙한 문구.
 
 왜 하필 부모님 실종 3주년 되는 날 이런 메시지가······.
 
 이 게임은 여러 가지로 소름 돋는 구석이 많았다.
 
 지독한 현실성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음성이 가장 거슬린다.
 
 사람이 죽을 때 내지르는 고통에 찬 비명은 피부에 와닿다 못해 내 뇌를 생생하게 때렸다.
 
 “아아아아악!”
 
 그래. 바로 이 소리.
 
 문제가 있다면··· 소리의 근원지가 낡은 스피커가 아니라는 점.
 
 게다가 비명이라 확실친 않으나, 매번 러닝셔츠 걸친 채 쓰레기를 아무 데나 쑤셔 박아 놓는 옆집 아저씨의 음성이 겹쳐 들렸다.
 
 퀴퀴한 내음이 흐르는 허름한 빌라.
 
 평소라면 조용했을 금요일의 오전이었다.
 
 드르르르륵 탁!
 드르르륵 탁!
 
 숨 막히는 정적을 깨며 귀를 괴롭히는 작은 음성.
 
 무언가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는 점점 명료해진다.
 
 저런 작은 소리가 더 선명해진다는 의미는 하나.
 
 소리의 주인이 바로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001화. 지하엔 예상치 못한 게 있었다
 
 
 
 
 
 문밖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정체불명의 ‘드르륵’ 거리는 소리.
 
 점점 짧아지고 선명해진다.
 
 드르르륵 탁!
 드르륵 탁!
 
 질질 끄는 듯한 이 괴음은 복도식의 낡은 빌라 통로를 지나 시끄러운 잡음을 내며 그 위치를 알렸다.
 
 급기야.
 
 딩동.
 
 구식 초인종이 잡음과 함께 본연의 임무를 해냈다.
 
 일 나간 삼촌이 돌아올 시간도 아니었고, 택배를 시킨 것도 없었다.
 
 게다가 방금 그 비명은······.
 
 딩동. 딩동. 딩동.
 
 3초나 지났을까? 저 밖의 누군가는 그사이도 참지 못하며 벨을 울렸고,
 
 쿵! 쿵! 쿵쿵쿵!
 
 급기야는 곳곳이 녹슨 철문을 두드린다.
 
 비록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빌라지만, 장점 아닌 장점 하나가 있다.
 
 저 두터운 문은 장정은커녕 불곰이 달려든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으리라.
 
 굳게 닫힌 철문을 위안 삼으며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곤 운동화를 대충 꺾어 신은 채, 숨을 죽이고는 외시경으로 밖을 바라봤다.
 
 “······뭐야?”
 
 문밖에 서 있는 중년의 남성은 정상이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큰 키로 인해 복도 천장 끝에 머리가 닿았고, 헤진 트렌치코트 중간중간으로는 깡마른 갈비뼈와 함께 얼룩진 피가 드러났다.
 
 발목은 이상한 각도로 꺾여있었으며, 무엇보다 압권인 건 저 눈이다.
 
 과장을 보태 달걀만 한 눈에는 오로지 흰자밖에 없었다.
 
 “헙.”
 
 젠장. 뭐지?
 
 입을 막은 채로 괴인을 바라보는데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차······찾았다.”
 
 입이 귀에 걸릴 기세로 웃었다.
 
 반대편에서 안이 보일 리 없을 텐데······?
 
 괴인의 초점 없는 허연 눈은 어째서인지 나를 꿰뚫어 본다는 느낌이었다.
 
 헐? 미친······.
 
 그의 입이 괴이한 각도로 쩍 벌어지는가 싶더니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쿵쿵! 쿵! 꽝꽝!
 
 놈이 미친 듯이 문을 두들겼고, 낡은 걸쇠는 요동치며 당장이라도 끊어질 기세다.
 
 무슨 힘이 이따위로······.
 
 “귀찮게 귀찮게 귀찮게. 포자도 거의 없는데. 포자도 거의 없는데.”
 
 그는 어눌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포자라면 분명 노트북에 깔린 게임 ‘위그드라실’에서 나온 내용인데······.
 
 X발. 저건 또 뭐지?
 
 한가하게 그런 거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괴인의 손이 돌연 반죽처럼 흐물거리는가 싶더니 이상한 모양으로 변이하기 시작했다.
 
 흐물흐물한 손은 점차 얄팍해지는가 싶더니 열쇠 모양으로 변했고,
 
 철컥. 철컥. 철컥.
 
 괴인은 현관문을 열고자 시도했다.
 
 “젠장. 젠장. 젠장.”
 
 나는 걸쇠를 잠그며 핸드폰을 붙잡았다.
 
 띡!
 
 급하게 1을 눌렀을 때,
 
 찰칵.
 
 걸쇠가 걸린 상태로 현관문이 열렸고,
 
 띡!
 
 다시 한번 1을 눌렀을 때,
 
 끼익!
 
 현관문의 좁은 틈으로 괴인이 고개를 쑥 들이밀었으며,
 
 띡!
 
 마지막으로 2를 눌렀을 때,
 
 찌이이이익!
 
 괴인의 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며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툭 들어왔다.
 
 현관문에는 알 수 없는 붉은 점액질 같은 게 묻어있었다.
 
 띠리링!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순간,
 
 빡!
 
 강력한 충격이 뒤통수를 타고 쭉 흘러내렸다.
 
 “긴급신고 112입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주인 없는 핸드폰만 외로이 땅바닥을 굴렀다.
 
 ***
 
 “음······.”
 
 눈을 뜬 곳은 의자 위.
 
 젠장. 사람을 이따위로 묶어 놓다니······.
 
 미처 정신을 온전히 차리기도 전, 지독한 두통과 함께 압박감이 쏟아졌다.
 
 붉은 노끈은 커다란 짐승이라도 옭아매듯 나를 무식하게 감고 있었다.
 
 힘으로는 절대 풀 수 없을 것 같고, 일단 놈은 없는 듯하니 주위를 살펴보면······.
 
 반지하 공간은 오랜 시간 환기를 하지 않은 듯 퀴퀴한 냄새가 흘렀고 먼지가 가득했다.
 
 전체적으로 좁고 길쭉한 복도의 형태였는데, 맨 위로는 작은 창문이 있어 틈으로 들어오는 약간의 달빛이 시야를 트이게끔 했다.
 
 내가 위치한 곳은 기다란 복도의 끝.
 
 저건 뭐지?
 
 내 옆으로는 어지간한 장정 셋을 합친 것보다 큰 철문이 입을 다문 채 있었다.
 
 흠. 주변에 쓸만한 건 없나?
 
 우선 눈에 들어오는 물체는 건축 자재로 보이는 나무 파편.
 
 목재는 누군가가 힘으로 뜯어낸 듯, 결을 따라 찢어져 있었다.
 
 옆으로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연필과 플라스틱 물병.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우당탕!
 
 중심을 앞뒤로 흔들자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때······.
 
 드륵 탁!
 드르르륵 탁!
 
 젠장. 놈인가?
 
 긴 복도 끝에서 복도만큼이나 길쭉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엉망인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허연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한 발을 절름댔다.
 
 ‘드르륵’은 놈이 잘려나간 듯한 한쪽 다리를 끄는 소리였고, ‘탁’은 끌던 다리를 내려놓는 소리였다.
 
 “정신······들었군?”
 “······누구냐? 정체가 뭐냐?”
 
 괴기한 몰골부터 아까 보여준 신체 변형까지.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저건 인간이 아니다.
 
 “······그놈들이······그놈들이 내 정체를 알아차렸어. 그놈들이 와. 빨리 열어야 해.”
 
 정체?
 
 중년의 괴인은 대답 대신 횡설수설하며 내 양팔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크윽.”
 
 젠장. 무슨 힘이 이렇게······.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게 분명함에도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힘이었다.
 
 악력 때문에 당장이라도 팔이 찢어질 것 같다.
 
 일단 침착하자.
 
 어디선가 배운 4-7-8 호흡법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일단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놈들이 올 거야. 그분들께는 어떻게 말씀을······. 올 거야. 오고 있어. 빨리 열어. 열라고!”
 “어이. 너.”
 
 갑작스러운 일갈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괴인의 양팔이 움직임을 멈췄다.
 
 “더듬거리지 말고 말 똑바로 해. 뭘 알아야 열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저 철문 말하는 거야?”
 
 내가 강하게 나가는 이유는 어지간해선 주눅 들지 않는 성격 탓도 있었으나, 저놈이 나를 살려둔 이유는 내가 필요해서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풀어.”
 
 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봤다.
 
 “풀어야 뭐 열어보기라도 할 거 아냐.”
 
 우직. 후두두둑.
 
 ······이게 자르지 않고 그냥 힘만으로 끊을 수 있는 건가?
 
 괴인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나를 칭칭 감고 있던 노끈 다발을 강제로 끊었다.
 
 한쪽 다리가 정상이 아니니 주위를 돌리고 도망을 쳐야 하나?
 
 “허튼······허튼 생각 하면 죽인다.”
 
 말투가 어눌할 뿐 호락호락하지는 않는군.
 
 놈은 좁은 복도를 몸으로 막으며 길을 내주지 않았다.
 
 “빨리. 놈들이 온다. 서둘러.”
 
 거대한 철문을 자세히 바라보니 손잡이 부분에는 이미 누군가의 손이 닿았던 흔적이 있었고, 밑으로는 망치였던 것 같은 쇳덩이가 떨어져 있었다.
 
 저놈이 시도했던 게 분명하다.
 
 “힘으로는 당연히 안 열릴 거고?”
 
 놈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이 올 거야. 그들이 올 거라고! 네가 살던 곳이다. 빨리 열어!”
 
 마구잡이로 또 난동질을 시작했다.
 
 “좀 닥쳐봐.”
 
 잠깐. 내가 살던 곳이라고?
 
 그러고 보니······.
 
 반지하와 같은 형태의 창문으로 슬며시 드러나는 바깥 정원의 형태.
 
 그래.
 
 사기꾼으로 몰려 쫓겨나기 전까지 부모님과 살았던 집과 유사한 모양새다.
 
 음······.
 
 자세히 보니 의심을 넘어 확신이 든다.
 
 왜 지하에 이런 공간이······.
 
 그렇게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이익! 철컥!
 
 차 여러 대가 정차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그들이 왔다. 빨리 열어. 빨리 열라고. 온단 말이다.”
 
 쿠웅! 쿵! 꽝!
 
 괴인은 다급한지, 내 허리춤을 낚아채듯 움켜쥐고는 남은 한 손으로 문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문과 놈의 주먹이 충돌할 때마다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듯한 굉음이 울렸고, 깨진 주먹에서 뼈가 드러나고 피가 철철 흘렀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어! 열려! 열리라고!”
 
 무식하게 힘을 쏟아부었음에도 문은 여전히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다다다다다.
 
 귀를 때리는 발걸음 소리.
 
 분명히 이 숨은 지하 공간으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다.
 
 한둘이 아니었다.
 
 최소한 열 명 이상.
 
 혹시 경찰일까? 조폭?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
 
 “빨리! 빨리 열어!”
 
 자신의 방법이 통하질 않자 괴인은 나를 위협했다.
 
 단, 아까와는 달리 겁에 질린 모양새다.
 
 “아, 젠장. 나보고 어쩌라고?”
 
 빌어먹을. 지금 못 열면 당장이라도 나를 죽이려 들 기세인데······.
 
 괴인의 위협 섞인 보챔에 절박함 반, 될 대로 되라는 심정 반으로 문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음? 이게 왜······?
 
 내 품속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분명 이 진동의 근원은 목걸이.
 
 엄마가 남긴 목걸이로 어딜 가나 항상 몸에 간직하고 있었다.
 
 진동과 함께 문 오른쪽 아래로 하얀빛을 발하는 글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목표한 분기가 없거나, 분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다면 시간은 임의로 구성될 수 있습니다.
 
 -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특정 인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 한 번에 한······.
 
 “열어! 열라고!”
 
 내가 천천히 떠오르는 글자를 바라보고 있자, 괴인은 다시 나를 겁박하기 시작했다.
 
 이거 되게 중요한 것 같은데 이놈 눈에는 이게 안 보이는 건가······?
 
 의아함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지잉. 지이이이잉.
 
 목걸이의 진동이 점차 심해지는가 싶더니, 문에서 강렬한 검붉은 빛이 쏟아졌다.
 
 “혹시······?”
 
 내가 손을 다시금 문에 가져가자,
 
 끼이이익.
 
 낡은 철문이 작은 비명을 토하며 조금씩 속을 드러냈다.
 
 “빨리! 빨리!”
 
 괴인은 오랜 시간 굶주렸던 개가 먹이를 기다리는 모양새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은 천천히, 지나치게 천천히 열리는 모양새였고,
 
 우다다다다다.
 
 추격하는 발걸음 소리는 어느새 복도 끝자락까지 닿았다.
 
 내 시선의 끝에는······
 
 “잘도 도망쳤군요?”
 
 우비를 걸친 작은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뒤로는 다수의 괴인이 뒤따랐다.
 
 창백한 피부는 실제 얼굴인지 가면인지 구분하기 힘들었고, 과도하게 툭 불거진 눈알 옆으로는 피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붉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지나치게 긴 몸통에, 반대로 지나치게 짧은 팔다리.
 
 여러모로 불쾌감과 괴이함을 자아냈는데, 인간이 아님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잡았다.”
 
 소녀는 씩 웃더니 식칼을 든 채 다가왔다.
 
 목표는 나를 납치한 괴인인지, 혹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뒤에 있는 커다란 괴생명체 여럿보다 작은 소녀가 더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착하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상황을 살폈다.
 
 문에 새긴 글자는 어느새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분기와 같은 이야기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마지막 메시지는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 한 번에 한 사람만 입장 가능합니다.
 
 저 문의 정체가 뭔진 모르겠으나, 한 번에 한 사람만 입장 가능하다는 이야기.
 
 젠장.
 
 나는 주변을 다시 살폈다.
 
 소녀와의 거리는 어느새 오십 보 남짓.
 
 성인이 마음먹고 달리면,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끼이이익.
 
 비명을 토하는 철문.
 
 아직도 열린 틈은 턱없이 좁지만, 자세만 잘 잡는다면······.
 
 “빨리······. 빨리!”
 
 괴인은 감히 뒤조차 돌아보지 못한 채 다시금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며 문틈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나는 소녀와 괴인, 철문을 번갈아 가며 살폈다.
 
 마지막으로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문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검붉은 빛은 나를 유혹하는 듯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불길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두다다다다다.
 
 그때 소녀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맨발이었는데, 지나치게 창백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 역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현명한 선택인진 모르겠지만, 될 대로 되라지.
 
 푸욱!
 
 나는 연체동물처럼 변한 괴인의 목에 연필을 꽂았다.
 
 괴인이 나타나기 전 의자에 묶인 채로 넘어지며 몰래 챙겨둔 놈이었는데,
 
 “끼에에에엑!”
 
 흐물흐물해진 상태라 그런지 나름대로 타격을 준듯했다.
 
 괴인은 손을 들어 나를 낚아채려 했으나, 나는 한 끗 차이로 놈의 손을 피하고는 몸을 내던지듯 좁은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으윽.”
 
 강렬한 검붉은 빛이 내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이내 알 수 없는 힘이 전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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