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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2023.12.12 조회 25,000 추천 326


 끼기기긱-
 타이어 마찰음이 불길하게 들려온다.
 새벽 안개가 낀 국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주변 산악 지대에 안개가 자욱하다.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두렵다. 내 발로 저승의 입구를 찾아가는 것만 같다.
 
 “후···”
 
 코가 시큰하고 눈물이 자꾸 차오른다.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은데 다 변명이고 핑계다. 결국은 내 욕심 때문이었다.
 
 강제로 작전세력에 포섭됐다. 놈들의 정체를 알았을 때 빠져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유혹이 너무 강했다. 나도 인간이라 욕심은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30억이 300억이 되었다.
 이걸 어떻게 못 본 척할 수가 있냐고.
 
 납치당했고 감시당했고. 주식 원래 그런 거 아니냐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을 무렵.
 날 차트의 ‘화가’로 추천한 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놈은 작전세력의 쩐주였고. 내게 자신의 신분을 노출한 실수를 했다. 그런데 이 개 같은 새끼가.
 그 입막음을 하려고 날 죽이라고 했다.
 
 그래서 주식을 팔고 먼저 빠져 나왔다. 불어난 내 돈이 300억이다 보니 표시가 날 수밖에 없었다. 계획이 틀어지니 놈들이 빡친 것은 당연했고.
 
 주식을 팔면 출금까지 3일 걸린다.
 놈들이 날 찾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틀 내내 도망 다녔다. 인천공항 쪽은 엄두도 못 내고.
 결국 용인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머니를 모신 봉안당 근처에 숨어 있다가 돈을 찾은 뒤 외딴 섬에라도 들어가려고. 그런데. 하아···
 
 빵빵-
 뒤에서 울리는 경적.
 승합차 하나가 따라붙었다.
 
 놈들이 헤드라이트를 깜빡거린다. 여기서 날 죽이겠다는 조롱이다. 내가 이곳으로 올 걸 어떻게 알았는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다.
 
 빵빵-
 
 “야! 차 세워! 대화 좀 하자니까!”
 
 뒤에서 어떤 놈이 고함을 질러댔다.
 나도 가담한 상황이라 신고 못 한다고 수없이 말했다. 한 개인의 주장을 누가 들어주겠냐고.
 
 그런데도 재벌 3세인 놈은 날 죽여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다. 자기 집안일 때문에 돈이 필요했는데 그게 무너지자 나한테 화풀이를 한 거였다.
 
 끼이익-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급격히 휘어지는 도로를 돌았다. 도로 밖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잡혀서 죽느니 그냥 저편으로 떨어져 버릴까.
 
 가슴 속에 용암이 들끓는 것 같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내가 왜!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
 
 시나리오나 계속 쓸걸.
 시골에 살면서 주식이나 하고 있을걸. 사부를 만난 건 원망 안 한다. 내가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맞은편에 수상한 트럭이 달려온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내 인생이 이렇게···
 
 빠아아앙-
 
 하이빔이 시야를 때렸다.
 트럭이 내게 들이닥친다!
 아···!
 
 쿠콰쾅-
 
 ....
 ....
 ....
 
 영혼의 심연이라는 게 있나.
 아주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 자궁 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까부터 텔레비전 광고 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광고가 들린다.
 어디선가 여자의 향내도 나고.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건가.
 눈이 떠지지 않는다. 여긴 어디지?
 소파? 내가 왜 소파에···
 
 “안녕하십니까. MBS 정오 뉴스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결국 사임했습니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오늘 특별 성명을 통해서···”
 
 덜컹.
 저벅저벅. 저벅저벅.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와 멈추었다.
 
 “···이에 인도네시아군은 하비비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지지와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오늘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권력 이양 과정을···”
 
 딸깍. 텔레비전이 꺼졌다.
 이어 비닐봉지 소리가 나더니 치익- 하고 무언가를 땄다. 그걸 컵에 따르는 소리도 들렸다.
 
 “도련님. 일어나시죠.”
 
 도련님?
 소파 아래에서 누군가 뒤척인다.
 여자다.
 
 “으응. 몇 신데요?”
 “너희는 빨리 옷 챙겨 입고 나가.”
 “조금만 더 잘래.”
 “일어나라. 끌어내기 전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도 눈을 조금 떴다.
 눈앞에 웬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여기··· 어디죠?”
 “예?”
 
 의아한 남자의 눈.
 아버지가 붙여준 내 비서이자 감시자.
 그를 보고 있으니 낯선 기억이 떠올랐다.
 
 근데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분간이 안 된다.
 
 주변엔 가운을 입은 여자들이 흐느적거리며 일어나고 있다. 바닥엔 술병이 널브러져 있고.
 내가 왜 호텔 룸에 있는 거지?
 
 “마셔요.”
 “응? 아, 네.”
 
 남자가 건네는 콜라를 마셨다.
 콜라가 숙취 음료라도 되나.
 
 “도련님.”
 “예?”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 눈빛.
 뭔가 물어보려다 참는 모습.
 
 “오늘 사장님과 점심 함께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지금 씻고 내려가시면 시간이 맞습니다.”
 “사장님?”
 “아버님이 곧 도착하십니다. 귀국하시고 인사도 제대로 못 하셨지 않습니까.”
 “아.”
 
 남자의 눈에 의문이 들어찼다.
 그런데 묻지는 않는다. 원래 그런 성격인지.
 이 남자에게 반말했던 것 같은데.
 
 머릿속이 어지럽다.
 지금 이게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내가 다른 사람으로 살았다가 사고로 죽는 꿈을 꾼 건지.
 
 일어나니 속옷만 입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거 내 몸이 아닌데.
 휘적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이거 뭐지?”
 
 눈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다.
 아니 익숙한 내 몸이라는 느낌도 있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앳된 얼굴. 늘씬한 몸. 큰 키.
 
 얼굴을 만져 보았다.
 내 얼굴이 맞다. 이제 갓 스무 살쯤 됐을까.
 의욕 없는 눈빛. 헝클어진 머리. 잘생긴 얼굴.
 
 거울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야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내가 다른 사람의 몸에 깃들었다는 것.
 빙의? 그럼 원래의 나는 죽었나. 이 몸에 있던 영혼은 어디로 갔지? 정말 긴 꿈을 꾼 건가.
 
 “이게 대체 무슨···”
 
 얼굴을 다시 만져 보았다.
 작가이자 전업투자자로 살았던 인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니 더 강하다.
 
 빙의가 맞는 것 같다.
 그것도 재벌 3세의 몸에 깃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쏴아아-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해서 샤워부터 했다.
 미국에서 어제 귀국했다. 오자마자 클럽에 가서 술을 진탕 마셨고. 이 룸에서 뻗었었다.
 
 물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기억이 뇌리를 후려쳤다.
 
 CS그룹?
 이 몸이 CS그룹의 일원이라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사장님.
 현 CS그룹 회장의 동생이다. 난 그 사장님의 막내아들이고.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날 죽이라고 지시한 최재진.
 그 개새끼가 CS그룹 회장의 차남이다.
 이건 절대 우연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이 몸은 최재성. 20세.
 뉴욕주립대 중위권 칼리지 1학년. 집안의 사고뭉치라 유배당하듯 고1 때부터 유학했다.
 
 이제 이 몸으로 사는 건가.
 일단은 받아들인다.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난 거고.
 
 근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또 있다.
 씻으면서 정신이 맑아진 것 같은데. 시야에 희미한 실루엣 같은 무언가가 겹쳐져 보인다.
 
 수건으로 대충 닦고 룸으로 나갔다.
 비서인 강인호가 룸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모두 나가고 없었다.
 
 “오늘 며칠이야?”
 
 내 반말에 그제야 강인호의 표정이 풀렸다.
 그의 얼굴에도 뭔가 겹쳐 보인다.
 그를 닮은 여러 얼굴이.
 
 “5월 21일입니다.”
 
 방학해서 귀국한 것은 맞는데.
 다음 달 21일이 어머니 기일이다. 참 공교로운 일이다. 내 어머니 기일도 94년 6월 21일인데.
 
 4년 전 재성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부친은 후계 싸움에서 패배하여 그룹에서 밀려났고. 형은 야망을 숨겼으며. 재성은 대충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 아버지에 대한 원망. 어머니 죽음에 얽힌 의혹과 큰아버지를 향한 분노. 그러한 것들이 재성을 막살게 한 원인이었다.
 
 이것도 그냥 우연일 뿐인 건지.
 재성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했다. 아버진 극구 반대했고. 그래서 의도적인 반항을 하고 있었다.
 
 옷을 입고 스위트룸 밖을 보았다.
 역삼동 풍경이 보인다. 역시 뭔가가 겹쳐져 있긴 한데 오가는 차량은 옛날 그 차종들이다.
 
 “강인호··· 형. 올해 98년 맞지?”
 “맞습니다. 무슨 안 좋은 꿈을 꾼 겁니까?”
 “응. 길고 긴 꿈을 꾸었어.”
 
 1998년 5월 21일.
 어쨌든 내 인생이 다시 시작된 날이다.
 후암동에는 중2인 내가 살고 있을 것 같고.
 
 아버지와 주변인에겐 망나니 행세를 했다.
 실제로 개차반 소릴 들을 정도로 막살긴 했는데 비서인 강인호만 진심을 알고 있다.
 아버지가 막내아들을 포기하게 만든 다음, 하고 싶었던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 누구를 만나든 거침없이 행동했으니 망나니였던 건 맞다.
 
 창밖에 펼쳐진 역삼동을 다시 바라보았다.
 1998년의 거리를 보고 있으니 머릿속에 가득 찬 주식의 역사와 정보가 봇물 터지듯 터졌다.
 
 “인호 형.”
 “말씀하십시오.”
 “나 당분간 계속 망나니로 살 거야.”
 “그렇게 하시죠.”
 
 30살 때 만난 사부에게서 주식의 모든 것을 배웠다. 그가 97년부터 작성한 매매일지를 달달 외웠다. 당시엔 불필요한 공부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뭘 해야 할지 뻔하지 않은가.
 복수를 위해서라면 몰라도. 기업 경영은 관심 없다. 능력 밖이다. 일도 재밌어야 하는 거지.
 
 전생에선 영화 시나리오 수십 편을 썼어도 잘 된 거 하나도 없다. 이번 생에서도 시나리오를 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한 편은 써나갈 생각이다.
 
 새로 사는 인생의 시나리오.
 전반의 내용이야 어떻든.
 후반은 복수극이 될 거다.
 
 도시를 보고 있으니 점점 머리가 맑아졌다.
 뒤죽박죽 엉켜있던 기억들이 차츰 정리되어 가는 듯. 게다가 확실히 뭔가 다른 게 있다.
 
 멀리 빌딩들. 간판들과 차량.
 저기에도 이상한 실루엣 같은 것이 겹쳐져 보인다. 지금은 없어야 할 저편 잠실의 최고층 빌딩도.
 
 “인호 형. 저기 높은 빌딩 보여?”
 “뭐 말입니까?”
 
 강인호가 창밖 저편을 보았다.
 내 눈에는 우뚝 솟은 실루엣이 보이는데 강인호에겐 안 보인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인 건지.
 
 “이제 내려가시죠.”
 “응.”
 
 더 놀랍게도.
 앞서 걷는 강인호의 미래가 겹쳐져 보인다.
 흰머리와 수염이 있으니 이건 확실히 미래다.
 
 아까 그의 얼굴에 겹쳐진 얼굴들.
 그건 강인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이 겹쳐져 있었던 거였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이 현상은 대체 뭘까.
 빙의는 선물이고 이건 덤인가.
 혹시나 해서 그를 더 분명히 떠올렸더니.
 
 강인호에 대한 정보가 시야에 보였다.
 나 최재성이 아는 정보와 기억을 토대로. 강인호를 스캔하듯 세세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무언가와 연결된 것 같은 느낌.
 오감을 뛰어넘는 내 안의 어떤 감각들이 강인호의 사소한 특징과 원인까지 포착하고 있다.
 
 분석한 정보들이 머리로 전해진다.
 초감각? 안 쓰는 뇌의 각성?
 아니면 어떤 영적인 교감?
 
 저게 무엇인지 몰라도.
 내게 능력이 생겼다.

작가의 말

새글로 인사올립니다.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댓글(9)

물복    
건필하세요!
2023.12.12 13:21
글드림    
고맙습니다. 물복님. ^^
2023.12.12 16:10
나본좌    
매도 후 출금 3일 걸리던 건 20년 전입니다 요즘은 당일인출 가능합니다 물론 HTS에서 매도대금담보대출 받아야 하지만 이자 연 5%미만이고......
2024.01.03 13:17
ni**********    
아직도 매도 후 3일 걸리는데 무슨 개소리지?
2024.01.09 16:10
kai6388    
대출을 뭔 인출처럼 말하고있어 ㅋㅋ
2024.01.17 17:39
pa******    
뭔가 새로운 능력입니다 기대기대.
2024.02.01 17:12
돌법사    
니본좌님이 하고싶은말은 바로 출금할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걸 말하고싶었나봐오
2024.02.06 22:50
OLDBOY    
잘 봤어요.
2024.02.07 11:45
방울고양이    
죽느냐 사느냐 문제인데 3일기다리는거가 설정에서 아쉽다는거 같음 연5프로 1년 다내봐야 1억5천이고 아마 3일에 해당하는 이자만 내면 120만원이니까 먹튀 할만햇을지도...ㅎㅎ
2024.02.09 22:04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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