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천재 미드필더의 패스는 특별하다

1화

2023.12.18 조회 82,285 추천 819


  1화
 
 
  남자 동창 둘이 모이면 할 얘기는 크게 3가지다.
 
  군대 얘기, 여자 얘기, 축구 얘기.
 
  그런데 그 동창과 축구부였다?
 
  하물며 그 동창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라면?
 
  할 얘기는 당연히 하나로 좁혀진다.
 
  축구 얘기다.
 
  “송유준. 너 다음 시즌 우리 팀에 누가 들어오는지 알아?”
  “···누구.”
  “매디··· 아, 아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안 돼 안 돼. 아직 말하면 안 되는 거라서.”
  “그래라 그럼.”
  “자식이. 이러니까 더 말하고 싶어지네. 진짜 관심 없어? 너 이거 오천만 축구 팬들은 돈 줘서라도 듣고 싶어 하는 정보야!”
  “궁금해하는 사람이 오천만 밖에 안 되냐?”
  “당연히 더 되겠지! 아오.”
 
  손형민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앞에 놓인 잔을 들이키며 캬를 외쳤다.
 
  쟤는 제로 콜라 마시면서 왜 저렇게 기분을 내는 건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저 녀석처럼 제로 음료 따위가 아닌, 알콜이 들어 있는 진짜 술이었다.
 
  캬.
 
  “야, 유준아. 넌 소주잔에 맥주 따라 마시면서 왜 인상을 찌푸리는 거야?”
  “제로 콜라나 마시는 애송이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진 않아.”
  “난 축구선수니까 관리차 안 마시는 거고, 너는 마셔도 되는데 그냥 못 마시는 거고.”
  “나도 축구 했었어. 잊었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보다 날 더 좋아하셨다는 거?”
 
  손형민은 피식 웃으며 내 옆에 있던 맥주를 뺐어 본인 소주잔에 따랐다.
 
  “기억난다. 너 그놈의 색맹인지 색약인지 때문에 축구만 안 그만뒀어도 내 발끝 정도는 따라올 놈이었는데.”
  “턱주가리까진 가지 않았을까?”
  “친구 프리미엄 붙여도 그건 안 돼.”
  “그럼 낭심 정도로 하자.”
  “미친놈.”
 
  우린 낄낄거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알싸한 맥주 향이 올라오자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했던 축구.
 
  중학생 땐 천재 소리를 들었고, 고등학교로 진학해선 진짜 천재인 손형민을 만났다.
 
  그렇게 만난 가짜와 진짜는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일이 잘 안 풀려서 1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각막에 이상이 생겨 전색약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고, 그렇게 내 축구 인생은 끝.
 
  극복해보려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부단히 노력했었다.
 
  한데, 전색약은 색감 구별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력까지 손상시킨다.
 
  더군다나 당시엔 크로마젠 렌즈(색약 렌즈)도 해외에서 사와야 했던 시기였기에, 온통 흑백뿐인 데다가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해진 세상 속에서 축구를 계속할 순 없었다.
 
  ‘지금은 다 추억이지.’
 
  한 명의 흔해 빠진 좌절 스토리다.
 
  물론 그 후로 일이 잘 풀려 지금은 잘 먹고 잘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놈을 친구로 두기도 했고.
 
  ‘이 정도면 성공한 삶이야.’
 
  그래도 못내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은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두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미련을 풀어줄 녀석이 앞에 있기도 했고.
 
  하여 물어봤다.
 
  내 미련의 끝이 어디였을지.
 
  “그런데 형민아.”
  “어?”
  “만약 내가 축구 계속했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 거 같아?”
  “갑자기?”
  “응. 갑자기 궁금하네.”
  “친구 프리미엄 붙여서 말해줘?”
  “아니, 진지하게.”
  “음···.”
 
  손형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넌 확실히 좋은 미드필더였어. 활동량도 어마어마했고, 투지도 좋았지. 무엇보다 너한테는 팀을 하나로 묶는 기운이 있었어. 같이 뛰고 싶어지는 선수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냐고.”
  “···K리그 주전 자리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손형민은 곁눈질로 내 눈치를 봤지만, 난 꽤 기분이 좋았다.
 
  K리그 주전.
 
  아무나 못 가는 곳이다.
 
  나같은 가짜들이 거르고 걸러져서 모인 대한민국 최고의 무대 아닌가.
 
  그 정도면 충분했다.
 
  “괜찮네. 너무 후하게 준 거 아니야?”
  “아니? 난 냉정하게 얘기했는데? 네가 만약 드리블이나 패스 둘 중 하나만이라도 재능 있는 놈이었으면 훨씬 높게 올라갔을 거야. 넌 그거 두 개 빼곤 다 잘했으니까!”
 
  손형민은 입에서 침을 튀며 열변을 토했다.
 
  저게 나를 변호하기 위한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패스, 드리블 빼고 다 잘하는 미드필더였다니.
 
  그럼 패스, 드리블은 못 하는 미드필더였다는 거잖아?
 
  ‘그냥 병신이었네.’
 
  그런 반쪽짜리가 어떻게 K리그를 갈 수 있다는 거지?
 
  거기가 만만한 곳은 아닌데.
 
  그렇다고 저놈이 내 기분 맞춰주자고 거짓말할 놈은 아니고.
 
  ‘물어볼까.’
 
  난 여전히 눈치 없는 내 친구에게 다시 물었다.
 
  “형민아.”
  “어?”
  “나한테 패스랑 드리블의 재능이 있었다 쳐.”
  “어.”
  “그럼 얼마나 더 올라갈 수 있을 거 같냐?”
  “글쎄? 그 재능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겠지?”
  “저 정도면?”
 
  난 옆에 놓인 브라운관을 가리켰다.
 
  색약 때문에 흐릿한 흑백으로밖에 안 보이는 디스플레이.
 
  그곳엔 앳된 얼굴로 드리블을 펼치는 현 대한민국 최고의 재능, 이강민이 있었다.
 
  “음, 강민이 정도만 돼도, 아마 못 가는 클럽은 없지 않았을까?”
  “레알이든 바르셀로나든 뮌헨이든?”
  “그렇지.”
  “너 친구 프리미엄을 너무 팍팍 써주는 거 아니냐?”
  “내가 너랑 1년을 함께 뛰었다. 넌 정말 좋은 미드필더였다니까? 그 어마어마한 활동량이랑 투지는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게 아니야. 그거야말로 재능이지 자식아.”
 
  손형민은 또다시 잔을 들이켰다.
 
  이번에도 맥주였다.
 
  쟤가 웬일이지?
 
  평생 술 한잔 입에 안 대던 놈이.
 
  탁-.
 
  손형민은 거칠게 소주잔을 내려놓은 뒤 말했다.
 
  “생각해보니 아쉽네. 너한테 그 둘 중 하나만 주어졌어도, 대한민국 축구의 역사가 뒤바뀌었을 텐데.”
  “뭔 소리야. 내가 잘난 건 맞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야.”
  “맞아 인마. 넌 모르겠지만, 같이 뛰어봤던 나는 알아. 분명 그랬을 거야. 너한테 그 둘 중 하나만 주어졌어도···.”
  “아니, 그렇다 쳐도 난 색약 때문에 어차피 안 됐어.”
  “아! 몰라 자식아! 너 그냥 다시 축구해! 내가 감독님한테 말할 테니까 우리 구단으로 들어와서 다시······.”
 
  풀썩-.
 
  “······.”
 
  난 술상에 코 박은 손형민을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콜라나 먹지. 애송이 자식이.”
 
  머리가 아파온다.
 
  명색이 손형민인데 대리기사를 부를 수는 없다.
 
  저런 꼴로 보냈다간 어떤 구설에 오를지 모른다.
 
  그렇다고 술 마신 내가 운전대를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윽고 울리는 통화음.
 
  “네, 아버님. 저 유준입니다. 하하. 잘 지내셨죠? 다름이 아니고 형민이가 많이 취해서요······.”
 
  .
  .
  .
 
  “아버님 죄송합니다. 저라도 안 마셨어야 했는데.”
  “아니다. 너도 이 녀석이 술을 마실 줄은 몰랐겠지. 몸에 안 좋은 건 평생 입에도 대지도 않던 놈이었으니.”
  “네. 강력하신 아버님과는 다르게 형민이는 조금 많이 약하더라고요. 하하하!”
 
  손웅인은 부리부리한 눈매로 잠시 날 쳐다보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유준이 넌 여전하구나.”
  “아버님도 똑같으십니다. 여전히 정정하세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다. 속에 담긴 뻔뻔함이 여전하다고.”
  “뻔뻔함이요?”
  “그래. 넌 누굴 만나든 기죽지 않고 다 똑같이 대했지. 밖에서든 그라운드에서든. 그래서 형민이가 널 좋아했을 거다.”
  “형민이보단 아버님이 저를 더 좋아하신 거 아니었어요?”
  “허허허. 뻔뻔한 자식.”
 
  손웅인은 손형민이 실린 뒷좌석 문을 닫고는 다시 날 쳐다봤다.
 
  “난 아직도 안타까워. 네가 축구를 계속 했었다면 참 좋았으련만.”
  “형민이도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그럴 만하지. 넌 충분히 대성할 놈이었으니까.”
  “형민이는 제가 K리그딱이라고 하던데요?”
  “K리그딱?”
  “네. 저는 패스와 드리블이 부족해서 K리그 위로는 어려웠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웃기는 소리.”
 
  손웅인은 딱 잘라 말했다.
 
  “넌 분명 더 높이 올라갈 녀석이었다. 형민이 말대로 부족한 부분은 있었을지언정, 해외에서 널 원할 구단은 널리고 널렸었을 거야.”
  “그래요? 형민이 챙겨준 게 고마워서 좋은 말씀 해주시는 게 아니고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아뇨.”
 
  난 곧장 고개를 저었다.
 
  손웅인은 축구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안타까운 거야. 분명 대성했을 놈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축구를 접었으니 말이야.”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말은···. 쯧.”
 
  손웅인은 혀를 차며 차문을 열었다.
 
  “이만 가야겠다. 형민이 통해서 연락해라. 밥 한번 먹자꾸나.”
  “네, 아버님.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냐.”
 
  부웅-.
 
  손웅인과 손형민이 떠난 뒤, 바로 스마트폰을 만졌다.
 
  대리기사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삐빅-.
 
  “바로 잡히네.”
 
  역시 강남이다.
 
  빠르네.
 
  잠깐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멀쩡한 총각이 걸어왔다.
 
  아니지, 다른 색인가?
 
  모르겠다. 오늘은 크로마젠 렌즈(색약 렌즈)를 안 껴서.
 
  “대리 부르셨죠?”
  “네, 키 여기 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예.”
 
  부웅-.
 
  달리는 차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자니, 여러 생각이 몰려왔다.
 
  -넌 확실히 좋은 미드필더였어. 활동량도 어마어마했고, 투지도 좋았지.
  -···K리그 주전 자리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손형민은 내가 K리그 주전까지는 올라갔을 거라고 했다.
 
  -웃기는 소리.
  -넌 분명 더 높이 올라갈 녀석이었다. 형민이 말대로 부족한 부분은 있었을지언정, 해외에서 널 원할 구단은 널리고 널렸었을 거야.
 
  아버님은 내가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 거라고 하셨다.
 
  과연 그랬을까?
 
  2009년.
 
  내 나이 17살의 여름.
 
  독일에서 돌아왔던 그때.
 
  내가 전색약이라는 병을 앓지 않았다면.
 
  내가 보는 세상이 흑백이 아닌, 본래의 알록달록한 세상이었다면.
 
  흐릿하게 안개 낀 세상이 아닌, 또렷한 세상이었다면.
 
  선수들의 유니폼 색을 구별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었을까?
 
  마음이 복잡해진다.
 
  “후우···.”
 
  팔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
 
  외투도 벗고, 값비싼 신발도 구겨 신었다.
 
  그래도 복잡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답답하신가요?”
 
  불현듯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대리기사였다.
 
  “네. 조금 답답하네요.”
  “창문 열어드릴게요.”
 
  스으윽-.
 
  이윽고 몰려드는 시원한 바람.
 
  그래도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
 
  구겨신던 신발을 벗었다.
 
  “휴···.”
 
  한숨 돌린 뒤, 다시 생각해봤다.
 
  미련이다.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다.
 
  불과 두어 달 달 뒤 열렸을 U-17 월드컵.
 
  손형민은 그 월드컵을 기회 삼아 해외로 진출했지만, 나는 U-17 대표팀에도 합류하지 못했다.
 
  그래. 난 실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만뒀던 거다.
 
  전색약이라는 병이 아니더라도, 끝내 경쟁에서 밀렸을 거다.
 
  미련 갖지 말자. 송유준.
 
  “휴우···.”
 
  톡-.
 
  목에 잠긴 셔츠 단추를 풀었다.
 
  툭-.
 
  팔목에 있던 단추도 풀었다.
 
  그래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
 
  이젠 목 뒤에서 땀이 흐른다.
 
  이상하다.
 
  이건··· 미련 따위가 아닌데?
 
  쿵-.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몰려오는 격통.
 
  누군가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어쩐지, 며칠 전부터 고추가 잘 서질 않더라니.’
 
  혈액순환이 안 돼서 였구나.
 
  성기능에 문제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더 큰 문제를 알아버렸다.
 
  심장마비.
 
  난 몰려오는 격통을 참아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끄윽, 기, 기사님.”
  “네? 어, 저기요. 왜 그러세요? 아니,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119 부를게요. 잠깐만 참아보세요! 저기요! 정신 좀 차려봐요! 저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이 이번 생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툭-.
 
  누군가가 날 건드렸다.
 
  뭐지.
 
  툭 툭-.
 
  건드리는 게 점점 심해진다.
 
  누구야 대체?
 
  툭 툭 툭-.
 
  날 건드리는 강도가 점점 심해진다.
 
  게다가 이번엔 이름까지 부른다.
 
  “야, 송유준. 일어나. 이 미친놈아.”
 
  소년의 목소리였다.
 
  아직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앳된 음성.
 
  어떤 건방진 어린이일까 궁금해하던 찰나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꽈악-.
 
  “아욱! 뭐야 씨발!”
 
  옆구리에서 살이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꼬집혔다.
 
  아니, 어떤 새끼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솜털도 안 난 어린놈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입술 끝에 검지를 올려놓은 채 말이다.
 
  “쉿! 조용히 해! 이 또라이 자식아. 경기 중에 자면 어떻게 해!”
 
  눈을 비비며 날 꼬집은 놈을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내 축구 인생 마지막으로 몸 담았던 곳, 동일고 축구부.
 
  그곳에서 나와 같은 미드필더를 맡던 선배, 양주찬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조금 전의 폭력 따위는 흔적도 없이 날아갈 만큼 압도적인 혼란이었다.
 
  ‘꿈인가?’
 
  잠시 생각해봤다.
 
  내 기억 속 양주찬은 딱 저 모습이 맞다.
 
  문제는 내가 보는 양주찬과 기억 속 양주찬의 모습이 똑같다는 거였다.
 
  왜?
 
  지금은 2023년이잖아.
 
  저 인간은 나이를 안 먹나?
 
  뱀파이어? 흡혈귀? 귀신?
 
  아니지.
 
  그런 유치한 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그러면···.
 
  지금 난 어떤 모습이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야! 송유준! 너 어디가 이 새끼야!”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그런 것보다 지금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게 훨씬 급했으니.
 
  벌컥-.
 
  화장실 문을 열고 확인한 내 모습은, 빡빡머리였다.
 
  운동에만 신경 쓰자고 밀어버렸던 그때 그 시절의 머리.
 
  화장실 거울을 짚은 내 손은 너무나도 곱고 가느다랬다.
 
  세월의 풍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니 탄탄한 근육이 자리잡힌 구릿빛 다리가 보인다.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체도 보인다.
 
  이건 내 몸이 아니다.
 
  사회에 찌든 30대의 몸이 아니었다.
 
  “···씨발.”
 
  몸 이곳저곳을 만져봤다.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17살 때의 몸.
 
  가장 힘 있고, 가장 가능성 넘치던, 그때 그 시절의 몸이었다.
 
  게다가 놀라움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색이··· 알록달록해.”
 
  언제나 흑백이던 세상이 색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매번 흐릿하게 보이던 것들이 또렷했다.
 
  완전한 시야다.
 
  혹시 몰라 눈을 한 바퀴 굴려봤지만, 크로마젠 렌즈 따위를 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축구 인생을 끝장냈던 전색약이라는 병은 이곳에 없었다.
 
  “하.”
 
  작게 몸을 떨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기뻤다.
 
  17살, 가장 가능성 넘치던 때 아닌가.
 
  못 이뤘던 꿈을 다시 한번 펼칠 기회였다.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때, 거울 속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양주찬이었다.
 
  “야! 송유준! 너 인마, 훈련 중에 말도 없이 튀어 나가면 어떻게 해!”
 
  아, 훈련 중이었구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꿈이든 현실이든 구색은 맞춰야 했으니.
 
  “죄송합니다.”
  “하여튼 누가 동일고 또라이 아니랄까 봐. 빨리 뛰어 자식아. 감독님이 찾으시니까.”
  “네.”
 
  난 화장실을 나서며 빠르게 주머니를 뒤졌다.
 
  스마트폰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있네.’
 
  겉옷으로 입었던 바람막이 주머니에 이름 모를 폴더폰이 있었다.
 
  빠르게 열었다.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2009년 8월.
 
  내가 손형민과 독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두어 달 뒤에 열리는 U-17 월드컵에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이기도 하고.
 
  ‘얼마 후엔 색약으로 꿈을 포기했을 때이기도 하지.’
 
  대표팀 승선이 불발됐다는 걸 알고 나서 축구를 그만뒀을 거다.
 
  더는 버텨봐야 의미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
 
  하지만 이젠 다르다.
 
  날 괴롭히던 색약 따위는 없다.
 
  내 끝이 어디일지 제대로 확인할 기회였다.
 
  ‘좋아. 가자.’
 
  다시 운동장에 도착하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날 쳐다봤다.
 
  반가운 얼굴들.
 
  하나, 인사는 미뤘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난 모자를 쓴 채 가만히 앉아 있는 동일고 축구부 감독, 용광철에게 다가갔다.
 
  “부르셨어요, 감독님.”
  “어디 갔다 왔냐?”
  “급똥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지.”
 
  용광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날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해? 안 앉고.”
  “네? 네···.”
 
  대답은 했지만, 조금 아쉬웠다.
 
  감독이 찾는다기에 경기에 투입되나 싶었는데.
 
  ‘어찌 보면 다행이지. 지금 나도 제정신이 아닌데.’
 
  죽다 살아난 놈이 들어가봐야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것들은 뭐지?’
 
  내 눈에 비치는 형형색색의 색감들.
 
  분명 초록빛 잔디만이 가득해야 했을 그라운드엔.
 
  마법과도 같은 색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작가의 말

메날두의 전성기.



낭만의 시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79)

대설    
색약이면 축구를 못하나요? 신호등 색깔을 구분못해 문제가 되는 운전은 이해가 가지만 흑백만 보인다고 축구를 못한다니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옛날 흑백티비 시절에는 어떻게 축구경기 중계를 보나요? 제가 잚못 아는 건가요?
2023.12.27 04:06
역작s    
주인공이 앓는 병은 색감 구별 뿐만 아니라, 시력에도 이상이 가는 병인데 해당 부분의 서술이 부족했습니다. 흐릿한 세상이라는 모호한 표현 외에 초반부에 설명문까지 추가로 작성했습니다. 좋은 피드백 감사합니다.
2023.12.30 23:51
고산(古山)    
색약하고 축구가 상관있나? 손흥민이랑 친구여야 하나? 방지턱이 좀 있네ㅋㅋㅋㅋㅋ
2023.12.28 16:47
Skadi    
색약이랑 축구랑 무슨 상관이지 중고딩 축구할 때 유니폼 없어도 같은팀 구분 잘만 했는데
2023.12.30 19:59
몰과내    
아쉽다.. 재능있던 사람이 되돌아온걸로 충분한데, 굳이 시스템 같은걸 얹을 필요가 있었는지... 시스템 가지고 아둥바둥하는 범재들에 대한 모욕이다 ㅋㅋ
2024.01.03 10:30
정치검    
제가 적록색약에 시력에 이상이가는 병이죠. 시력이상으로 군대 면제 사유인데 제대하고 면제인걸 알아서 현역 다녀온게 인생 망...ㅜㅜ
2024.01.08 13:30
아라리아    
굳이 현재 있는선수를 끼워넣은거 재미가 없지~~
2024.01.08 23:23
척결자    
언제 뒤지나? 빨리 뒤져야 회귀하지?
2024.01.09 01:35
k1033    
손흥민이랑 친구면 안되나. 소재가 특이해서 거부감 갖는건 알겠는데 1화면 댓글창 창내지말고 일단 봐라
2024.01.10 19:04
분리배    
작가님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전색약이라는 병이 갑자기 발병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주인공은 과거로 왔으니 전색약이라는 병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거죠? 조금 있으면 바로 병 또 걸리는 거일텐데?
2024.01.1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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