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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천재의 트로피 싹쓸이 1화

2024.01.07 조회 48,436 추천 542


 “이규보 선수.”
 “네.”
 “이제는 은퇴하셨으니 혹시 이규보 씨라고 불러드리는 것이 편하신가요?"
 "아니요, 뭐 딱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는 선수라는 호칭이 아직은 더 입에 붙어서 말이죠."
 "솔직히 저도 그렇긴 합니다."
 "넵! 그럼 호칭은 이규보 선수로 하고 사전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올 연말에 케이블 채널에서 런칭하는 축구 예능에 출연하기로 했다.
 오늘은 첫 촬영에 앞서 사전 인터뷰를 진행하는 날.
 내 미팅 담당으로는 앳된 얼굴의 막내 작가가 배정됐는데, 총괄 피디가 귀띔하기로는 이 여자가 내 열성팬이라고 한다.
 내 팬을 하기엔 나이대가 좀 안 맞는 거 같긴 하다만.
 
 “사실 이규보 선수에게 진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축구를 처음 시작하신 게 정말로 고2때였나요?”
 “네. 정확히는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럼 거의 고3이었던 거네요?”
 “뭐, 그런 셈이죠. 아시는 분은 아시는데 사실 사정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제 키가 160이 간당간당했었거든요. 어렸을 땐 운동 선수할 피지컬은 절대 아니었죠.”
 “지금은 180 중반은 되시잖아요. 프로필 상으로는 백 팔십······.”
 “네. 반올림해서 186입니다.”
 
 내 대답에 막내 작가는 양손을 모으며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어쨌든 대단하세요! 보통 축구 선수들은 늦어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운동을 시작하던데, 출발이 많이 늦으셨던 거잖아요.”
 “네. 너무 늦게 시작해서 초창기엔 고생을 좀 했죠. 축구 시작한 지 몇 달 안돼서 잠깐 관두기도 했었고요.”
 “고등학교 축구부가 해체된 일 말씀하시는 거죠?”
 
 별 걸 다 알고 있는 걸 보니 내 팬이 맞긴 한 모양이다.
 이건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인터넷을 찾아봐도 잘 나오지 않는 얘긴데.
 
 “네. 맞아요. 갑자기 축구부에 사건들이 연타로 터지는 바람에 팀이 공중분해 됐었죠."
 "그때 축구부가 있는 다른 학교로 갑자기 옮기는 건 쉽지 않으셨나 봐요?"
 "실력이 특출 났다면 모를까,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선수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특히 저는 경력도 짧아서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거든요.”
 "단 한 군데도요?"
 "네."
 “지금은 그 학교들 다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겠네요. 한국 축구 고트(GOAT)를 배출한 학교라는 타이틀을 얻을 기회였는데.”
 “그런데 제가 한국 축구 고트가 맞긴 한가요?”
 "고트 맞죠. 이규보 선수는 태극 마크만 달면, 애국자 모드 발동이었잖아요."
 
 국대 한정이면 그렇긴 한데. 클럽 기록까지 따지면 내 성적은 고트라 하기엔 살짝 부족하긴 하다.
 유럽 진출을 한 시기가 워낙 늦기도 했고.
 
 “어쨌든 너무 아쉬워요. 안 그래도 늦게 시작한 축군데, 이규보 선수는 그 일 때문에 공백이 더 생겼잖아요.”
 "뭐, 그 때는 어쩔 수 없었죠."
 
 축구부가 해체된 이후 방황을 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뒤늦게 다시 수능을 준비해야 하나, 아니면 체대 입시 쪽을 파야 하나.
 그렇게 어영부영 하다가 시간은 흘러갔고, 내가 다시 축구화를 신은 건 대학에 진학한 이후였다.
 물론 대학교 축구부는 아니었고, K리그 프로팀은 더더욱 아니었다.
 
 “덕분에 남들이 못한 경험도 해봤죠. 우리나라 국대 출신 중에 독립리그에서 뛰어본 사람은 저밖에 없잖아요. 이건 아마 미래에도 없을 걸요?”
 “맞아요. 상무 말고 찐 군데스리가에서 뛴 국대 출신도 아마 이규보 선수밖에 없을 거예요!”
 
 갑자기 PTSD 마려워지는 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중에 촬영 시작하면 군대에서 축구한 썰도 풀면 되는 거죠?”
 "당연하죠. 그런 것들이 깨알 재미잖아요? 미리 썰 방출 좀 해주시면 대본 쓸 때 참고하겠습니다.”
 
 막내 작가는 숨을 죽이고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군대 축구 얘기를 이렇게 재밌게 들어주는 여자는 난생 처음 봤다.
 이건 축구 찐팬인 우리 마누라도 힘들어 하던 건데.
 
 “완전 대박! 이 얘기 방송에서 하면 진짜 빵빵 터지겠어요!”
 “그런가요?”
 “네! 이규보 선수 덕분에 우리 프로그램 진짜 대박날 거 같아요!”
 “어렸을 때 고생한 보람을 오늘에서야 찾네요.”
 “생각보다 입담도 너무 좋으시고요!”
 
 물론 지금 이런 얘기도 내가 성공했으니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거다.
 만약 제대하고 나서도 잘 안 풀렸으면, 나는 이름 없이 축구판에서 사라질 운명이었으니까.
 
 “얘기를 들을수록, 이규보 선수가 축구를 너무 늦게 시작한 게 아쉽기만 해요. 이쯤 되면 완전 신이 내린 재능러잖아요!"
 "뭐,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에요. 이규보 선수는 충분히 발롱도르급 재능이라 생각합니다!”
 “발롱도르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비록 분데스리가에서 5시즌 동안 100골 가까이 터뜨렸고,
 월드컵에는 세 번을 출전하며 총 6골을 넣기도 했으며,
 아시아 올해의 선수상도 네 번이나 수상했지만,
 발롱도르는 나와는 꽤 거리가 먼 얘기였다.
 사실 나 이규보가 월드클래스가 맞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도 있었고 말이다.
 
 “월드클래스 확실합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그리고 발롱도르도 가능했을 거예요! 만약에······.”
 “제가 축구를 일찍 시작했다면요?”
 “네.”
 
 사실 나도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일.
 늦은 시작이 아쉬웠기에 최대한 축구 선수로 롱런하려 노력했고 실제로도 마흔까지 프로 생활을 했으니, 나로선 할 만큼은 다 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은퇴 경기에서 넣으신 골 말이에요, 진짜 멋있었어요! 슈팅 각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칩샷을 날리시다니. 진짜 축구 도사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나이 먹어서 스피드도 떨어지고 활동량도 줄어들었는데, 그런 거라도 해야죠.”
 
 선수들이 은퇴할 때쯤 되면 흔히들 하는 얘기가 있다.
 이제야 축구에 눈을 뜨게 됐다고.
 나 역시 마흔이 다 돼서야 그 경지가 찾아 왔으니, 세월이 야속할 뿐이었다.
 이제 축구를 좀 알 거 같은데, 몸은 점점 더 따라주지 않으니 말이다.
 마지막 시즌에 K리그 8골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냥 박수 칠 때 떠나기로 했다.
 구단에서도 나의 결정을 존중해 줬고.
 
 "다음 시즌에는 이규보 선수가 없어서 많이 그리워질 거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에 나오게 됐잖아요. 오늘 인터뷰 즐거웠습니다."
 "저야 말로요!"
 
 내 팬이라길래 끝날 때 싸인 요청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미팅은 아주 쿨하게 마무리 되었다.
 처음 나가는 예능 프로라 그런지, 아직도 내가 출연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뭐, 그래도 다들 최소한 중박 이상은 칠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쪽 방면으로는 제일 잘 나가는 일타 피디가 연출을 맡았고, 섭외된 패널들도 빵빵하고, 무엇보다 내가 출연하니까.
 
 내가 방송 체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밌을 거 같긴 하다.
 사실 은퇴한 선배들 중에는 방송에 완전히 맛 들린 경우가 종종 있다.
 오죽하면 현역 때 축구하던 것보다 방송을 더 열심히 한다고 할까.
 어쨌든 나도 열심히는 해볼 생각이다.
 무엇보다 막내아들이 내 방송 출연을 기대하고 있다.
 마침 막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아들! 인터뷰 끝나고 지금 막 택시 탔어.”
 - 아빠! 집에 올 때 치킨 사오는 거 잊지 않았지?
 “당연하지! 누구 부탁인데.”
 
 목소리만 들어도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나를 아들 바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실제로 아들 바보가 맞기도 하고.
 
 - 아빠! 빨리 와야 돼~
 “그래 알았어.”
 
 나를 기다리는 건지, 치킨을 기다리는 건지.
 
 전화를 끊고 눈을 감았다.
 잠이 스르르 밀려드는 느낌.
 은퇴하고 나서도 소화해야 할 일정이 워낙 많았기에 요 며칠 강행군이긴 했다.
 그나저나 택시 기사는 나를 아는 건지, 모르는 척 해주는 건지, 행선지만 묻고 더 이상 말이 없었기에 편하게 눈을 붙일 수 있었다.
 
 ······.
 
 그렇게 얼마나 잠에 들어 있었는지는 모른다.
 
 “손님.”
 
 나를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 음성이 뭔가 몽환적이어서 아직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손님.”
 
 그리고 한 번 더 이어진 음성.
 나는 눈을 비비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벌써 도착했나요?”
 
 하지만 택시 기사의 대답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손님. 회귀하시겠습니까?”

댓글(49)

CENTER    
갑자기????ㅋㅋㅋ
2024.01.09 08:16
멍몽    
여기서 회귀하면 인간 쓰레기 아니냐?
2024.01.10 22:47
굵고단단    
가족은? 아들은? 치킨은?
2024.01.11 05:11
아라지리아    
치킨 기다리는 아들은 ㅠ
2024.01.12 09:00
흑돌이    
잘 보고 갑니다.
2024.01.17 17:05
fo********    
아들을 버린다고?
2024.01.22 07:32
금연하자    
....
2024.01.30 21:53
브라이언    
독립리그? 야구말고 축구에 독립리그가 있어요? 조기축구리그도 제도내에서 운영되는데...
2024.01.31 07:16
트래픽가이    
분데스리가에서 5시즌에 100골 가까이 넣었으면 두말할거 없이 월클 아닌가? 그게 논란거리가 되나 ;;
2024.01.31 14:17
넌아니야    
아니 막내아들은 치킨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여기서 회귀는 진짜 선넘었다.. ㅠㅠ 치킨!!!! 회귀전에 맛있는거 잔뜩먹고 가자 ㅋ
2024.01.3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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