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내 헌터물에 아포칼립스는 필요없다

프롤로그 - 판데믹 (1)

2024.02.02 조회 24,357 추천 500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도, 저 먼 유럽에서의 전쟁도 잊혀지고 일상으로 받아들여져 가는 시점.
 
 2023년 8월 2일
 대한민국 서울, 송파구.
 
 “사, 사장님!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
 
 웹소설에나 나올 법한, 상투적인 대사.
 
 “억울? 억울? 너 이 개자식아, 내 손에 증거가 다 있어! 내가 너를 얼마나 아껴줬는데 배은망덕하게 이렇게 뒤통수를 쳐?”
 
 “즈, 증거라뇨! 제가 사장님께 얼마나 충성을...!”
 
 충성은 개뿔, 회사에서 일한 기간이 4년, 뒷주머니 챙기며 회삿돈 빼먹은 게 2년인데.
 
 절반짜리 충성이라니, 아주 눈물이 나게 감동적이네.
 
 “이충무 씨, 자세한 건 서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겨, 경찰? 사, 사장님! 전 결백합니다! 정말로 결백합니다아!”
 
 -후우우, 넌 왜 이렇게 꼴통 같냐. 내가 너같이 덜떨어진 놈이나 가르쳐야겠어?
 
 내 앞에서 온갖 잘난 척과 아니꼬운 짓은 다 하던 과장이 눈물콧물을 쥐어짜내며 경찰에게 잡혀가는 모습은 참...
 
 보기 상쾌하구만.
 
 이게 바로 웹소식 사이다지.
 
 “어휴, 내가 저딴 놈을 믿고 지금까지 사업을 했다니...”
 
 퉁퉁한 사장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더니, 이내 내 쪽을 돌아보며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어, 한성이! 정말 수고했어!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저 배은망덕한 놈의 웃는 얼굴에 계속 속고 있을 뻔했지, 뭐야!”
 
 그럼요, 사장님. 알아주셔야죠.
 
 저놈 작업한다고 몰래 과장 pc에 손대고 사진까지 찍어대느라 더럽게 고생했다고.
 
 사이다 이후엔 보상이 있어야 마땅하죠.
 
 내 마음이 전달됐는지, 사장은 세상 푸근한 얼굴로 나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수고 많았네. 내 특별히! 큰 공을 세운 자네를 위해 무려 20만원이나 담았어! 앞으로도 수고해 주게나!”
 
 ...몇억 해먹었는지도 모를 놈 잡아줬더니 고작 20만원.
 심지어 내가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거라는 투로.
 
 “사장님...”
 
 “그래, 한성이!”
 
 고작 이거야?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 망할.
 
 군대 전역하자마자 취직한 회사에서 망할 과장놈에게 쥐어짜이다가 몇 달을 작업해서 구현한 사이다는, 현실은 웹소가 아니라는 씁쓸한 교훈만 주고 김빠진 채 끝나버렸다.
 
 
 
 -
 
 
 
 
 신이 난 사장에게 끌려가 원하지 않던 술자리까지 어울려주고, 퇴근길.
 
 나는 자리가 텅텅 빈 지하철에 올라, 구석자리로 가 의자에 눕듯이 앉았다.
 
 혼자 자리 3칸 정도 차지하는 민폐짓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시간.
 
 출퇴근 러쉬아워면 구석자리가 뭐야, 앉을 자리 하나 찾기도 힘들었겠지.
 
 취기도 알딸딸하니, 하아아, 좋구만.
 
 ...좋긴 개뿔이.
 
 꼰대 술 상대해주다 밤 10시 넘어서 퇴근하고 있는데.
 
 내일은 숙취고 나발이고 또 정시출근, 또 쳇바퀴같은 일상이겠지.
 
 생각해 보니 망할, 내일은 하남으로 출장이네?
 
 나는 가슴팍에 손을 넣어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재수없는 과장새끼 보내버린다고 며칠을 가슴 졸이며 작업해서 간신히 받은 건 단돈 20만원.
 
 이런 식으로 열심히 일하면, 뭐가 달라질까? 달라질 수는 있을까?
 
 개같이 노력해도 근근하게 먹고살 돈이나 벌 수 있는 거지같은 세상 같으니.
 
 이러니 혁명 마려운 인간들이 생기지.
 
 -네까짓 것이 나 없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궁상을 떨고 있자, 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거슬리는 목소리가 떠올라 버렸다.
 
 “하아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기는 남아있는 것 같은데, 뭐라도 해내서 보여주고야 말겠다던 패기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아, 기분 꿀꿀해지네.
 
 이게 다 취해서 그래, 취해서.
 
 망할 술고래 사장 같으니.
 
 술은 혼자 처먹던가 왜 날 끌어들여서.
 
 나는 핸드폰을 열어 앱을 켰다.
 
 피곤한 직장인에겐 역시 대리만족이 최고지.
 
 요새 재밌게 보는 헌터물이 있거든.
 
 마침 오늘이 클라이맥스라구.
 
 어디, 주인공이 어떻게 활약하나 보자-
 
 우우웅-
 
 막 소설을 보려던 참에, 갑자기 울린 핸드폰의 진동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보려던 웹소설 앱 페이지 대신, 전화 알림과 ‘이주일’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주일. 같이 군 생활한 동기였다.
 
 군대 안에 있을 때는 둘다 가정환경이 개판이라는 공통점 덕분에 나름 친하게 지냈지만, 나는 전역하고 녀석은 전문하사로 남으면서 정말 잊을만할 때나 가끔 연락하곤 했었는데.
 
 군바리 주제에 오밤중에 전화라니, 나 때면 한참 전에 핸드폰 다 회수해간 시간인데.
 
 그때야 사병이었다지만, 요즘 군대는 군대가 아니구만.
 
 나는 미약한 짜증을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어, 주일아. 오랜만이다?”
 
 -한성아...
 
 “그래, 한동안 연락 없더니 밤에 무슨 일이야?”
 
 -미안해...
 
 얘 목소리가 왜 이래? 원래 이렇게 음침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선임들 비위도 적당히 잘 맞춰주고 싹싹하게 군생활해서 전문하사 권유도 받은 놈인데..
 
 안 그래도 꿀꿀해서 유일한 낙인 웹소라도 보려던 걸 방해받은 참인데, 왜 뜬금없이 전화해서 청승을 떠는지.
 
 짜증나네, 진짜.
 
 그러지 않아도 술기운이 가시질 않는 게 척 봐도 내일은 숙취에 시달리며 출장까지 따라갈 판이구만.
 
 “너 뭔 일 있었는지 몰라도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나도 지금 술에 쩔은 데다 기분이 별로다. 오해 생길 수 있으니 웬만하면 나중에 전화해라.”
 
 -한성아, 잠깐만. 잠깐이면 돼. 너무 답답해서 그래.
 
 “하아... 무슨 일인데?”
 
 -채치석 대위님이 불명예 전역 당하셨어.
 
 “뭐?”
 
 채치석 대위면, 내가 군복무한 부대의 중대장이었던 사람이다.
 
 보통 우리의 주적은 간부- 같은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게 말단 병들인데, 그 사람은 병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었다.
 
 당연히 우리도 좋아했고, 나는...
 
 개인적으로 은사라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뭐? 채치석 대위가 불명예 전역? 참군인이라서 일반 병사들도 존경하던 사람이?
 
 “대체 무슨 일로?”
 
 -부조리에 항의하셨다가. 바른말 했을 뿐인데 말도 안 되는 누명까지 덮어쓰셔서...
 
 “하아아... 그래, 안타까운 일이네.”
 
 듣기만 해도 감이 왔다. 군대나 사회나 정치질이 문제지, 항상.
 
 ...바로 오늘 정치질로 과장놈을 묻어버리고 온 내가 할 생각인가.
 
 분명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국 군대 내부의 일. 나랑은 완전히 상관없는 일이다.
 
 -류기훈 그 개자식, 아니 더 윗선일지도.
 
 “야, 너희 부대 내부사정이잖아. 그렇게 말해도 난 전혀 몰라, 그리고 그러다 너까지 경친다?”
 
 -난 채치석 대위님 라인이었잖아. 그대로 말뚝 박을 생각이었는데 틀렸어. 벌써 압박 들어온다고. 경을 치더라도 난 당하고만은 못 살겠다.
 
 “아니, 대위도 모가지 당하는데 전문하사 따위가 뭘 하겠다고. 차라리 그냥 얌전히 복무기간 채우고 나와라.”
 
 -야, 넌 화나지도 않냐? 다른 놈은 몰라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슬슬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니?”
 
 -아니, 그게 아니라. 채치석 대위님이 너한테 얼마나...
 
 “그래, 잘해주셨지. 나도 알아.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정말 크게 감사한 분이고, 절대 불명예 전역 같은 걸 당할 분이 아니라는 거 나도 안다.
 
 하지만 나도 내 코가 석자라고, 빌어먹을.
 
 난 꼴리는 대로 사이다 터트리며 살 수 있는 주인공 같은게 아니란 말이다. 당장 중소기업에서 인맥 쌓으려고 구르고 있는 놈이 무슨 군대 내부의 일에 관여하겠나.
 
 나도 취한 상태고, 쟤도 화난 상태니 더 말 섞어봐야 감정싸움만 되기 쉽겠지.
 
 “너 지금은 니가 조뺑이 치는 거 같아도 사회 나와보면 군대는 튜토리얼이야 인마, 내가 지금 많이 취해서 느긋하게 상담해 줄 그게 아니다. 정 급하면 내일 전화하던가. 끊는다.”
 
 -야! 강한성!
 
 뚝-
 
 나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뒤늦게 그래도 나름 같이 동고동락한 동기였는데 너무 가차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니, 하지만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당장 내가 힘든데 어떻게 뭘 해줄 수도 없는 곳의 문제를 들어봐야 뭐가 나오겠어.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놈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았던 것 같은데...
 
 나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켜진 앱을 들여다보았지만, 찝찝해진 기분으로는 이미 뒷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아아... 젠장.”
 
 나는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은 다음 의자에 등을 기댔다.
 
 도착할 때까지 한숨 잠이나 자자...
 
 정 켕기면 내일이라도 내가 전화해보지, 뭐...
 
 채치석 대위님도 나중에 한번 알아보던지 하고.
 
 
 
 
 -
 
 
 
 
 아침.
 
 우우웅-
 
 우우웅-
 
 “으어어, 뭐야, 젠장. 이른 아침부터.”
 
 나는 숙취에 찌들어서 무거운 몸을 움직여, 핸드폰을 잡았다.
 
 시간은 아침 7시.
 
 핸드폰에 표기된 건 모르는 번호다.
 
 생각 같아선 그냥 확 거절 눌러버리고 싶은데, 혹시나 거래처나 회사 쪽 사람일 수도 있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받았다.
 
 “여보세요.”
 
 -필승! 7사단 108중대 행정반 한재경 병장입니다. 강한성 씨 맞습니까?
 
 “어... 맞는데요.”
 
 -아침 일찍 실례합니다. 전역하시기 전에 같은 중대였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한재경? 한재경...
 
 “...막내?”
 
 생각났다. 분대장을 했으니 얘기도 해봤고 몇 번, 매점도 데려가서 괜찮게 대해준 기억인데.
 
 -이젠 행 하납니다.(행정반 최고참)
 
 “허, 나 전역할 때만 해도 막내였는데 시간 빠르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어제 이주일 하사님 전화받으셨죠?
 
 “어? 어...”
 
 여기서 이주일이 왜 나와?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놀라지 마세요. 이주일 하사님이... 사망하셨습니다.
 
 “...”
 
 -자살로 추정되는데, 그... 이주일 하사님 핸드폰에 마지막 통화내역이 강한성 씨라서요.
 
 “하...”
 
 -개인적으로도 잘해주신 분인데, 미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목소리가 안 좋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살? 그럴 것 같지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야! 강한성!
 
 매정하게 끊어버리기 직전, 절박하게 들려왔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다음부터는 무슨 말을 듣는지도 잘 모른 채 멍하니 있었다.
 
 같은 부대에 있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신 것 잘 안다, 내 책임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부대에서 사정 청취를 위해 연락이 갈 테니, 그때는 협조를 부탁한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씻고, 어떻게 준비했는지도 모른 채.
 
 정신을 차리자 나는 사장을 따라 하남까지 출장 나와 있었다.
 
 
 
 
 -
 
 
 
 
 2023년 8월 3일
 대한민국 경기도, 하남시.
 
 “으하하하, 수고했어, 한성이! 나는 아직도 숙취가 안 가셨는데 멀쩡한 걸 보니 역시 젊은 친구가 좋긴 좋아?”
 
 협력사와 미팅을 마치고 나온 뒤, 사장은 신이 나서 떠들고 있다.
 
 “이번엔 느낌이 아주 좋아! 잘 되면 내가 한성이 보너스 좀 두둑하게 챙겨줄게!”
 
 느낌이 좋기는 개뿔이, 저쪽 사장님 표정이 안 보였나? 딱 봐도 예의상 웃고 있더만.
 
 아니, 애초에 대체 얼마나 해먹었는지도 모를 놈 잡아준 보답이 겨우 20만원이었는데, 무슨 놈의 보너스를 기대하라는 건지.
 
 “배고프지? 이 근처에 해장국 아주 잘~ 하는 집이 있어. 가서 해장이라도 하자고.”
 
 “어, 저, 해장...”
 
 “요새 어린 친구들은 선지는 안 먹네 어쩌네 하더니, 한성이는 안 그러겠지?”
 
 “...”
 
 “그렇지! 역시 한성이는 아닐 줄 알았어. 나때는 말이야, 어? 어른이 먹자고 하면 다들 옙! 하고 따르는 거였는데 요즘 어린 것들은 철이 없어서, 에잉 쯧쯧...”
 
 하...
 
 그래, 기껏 사장한테 잘 보여놨는데 쓸데없는 걸로 심기 긁어놓을 필요 없겠지.
 
 수다스러운 사장의 별 의미없는 말에 적당히 추임새 넣어주며 따라가,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를 비린내 나는 해장국을 먹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어제의 일만 생각난다.
 
 -한성아, 잠깐만. 잠깐이면 돼. 너무 답답해서 그래.
 
 아무리 술 취했다고,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절박한 느낌을 왜 몰랐지?
 
 -너 지금은 니가 조뺑이 치는 거 같아도 사회 나와보면 군대는 튜토리얼이야 인마, 내가 지금 많이 취해서 느긋하게 상담해 줄 그게 아니다. 정 급하면 내일 전화하던가. 끊는다.
 
 -야! 강한성!
 
 나 전역하고 연락도 잘 안 하던 놈이 오죽 힘들면 하다하다 나한테까지 연락했을까.
 
 그걸 왜 그때는 생각을 못해서...
 
 아니, 아니지.
 
 그게 왜 내 책임이야?
 
 난 진작에 전역한 민간인이야!
 
 나도 힘든 와중에 일이 이렇게 될 줄 내가 어떻게 알아?
 
 심지어 나는 그래도 아침에 따로 연락해볼까 생각도 했었어.
 
 하지만 그 하루, 그 하루 사이에...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기분이 계속 저조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짜증난다.
 
 “후우우... 역시 식후엔 담탐이지, 그치?”
 
 눈앞에서 담배연기나 뿜어대고 있는 망할 사장도.
 
 “한성이가 담배를 안 태우는게 좀 아쉽구만. 이, 마음 맞는 사람끼리 식후땡이야말로 친해지는 지름길이거든!”
 
 “그렇군요. 어쩐지 직원분들이 끈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개소리에 적당히 받아주며 비위나 맞춰주고 있는 나도.
 
 “으하하, 이 친구 눈치가 있어? 그렇지, 그렇지! 아, 물론 한성이도 이 담배를 같이 태워주진 않지만, 그 투철한 충성심은 내가 높이 산다고! 앞으로 잘 키워줄테니 열심히 하라고? 으응?”
 
 “물론입니다, 사장님.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사장이 몸으로 직접 뛰어야하는 중소기업에서 뭘 얼마나 잘 키워준다는건지 모르겠지만, 이 업계는 좁고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이 퇴물이어도 인맥 하난 확실하니까.
 
 그러니까...
 
 필요한 일이다.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군대 입대 동기야 어찌되었든, 나는 내 삶을 살아야 하니까.
 
 “스읍, 후우우... 그래서 말이야, 한성이.”
 
 아, 씨. 담배연기 제발 좀.
 
 망할 꼰대가 비흡연자 면상에다 연기를 뿜네.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집에나 기어들어가면...
 
 아, 생각을 말자.
 
 “예, 사장님.”
 
 퇴근하는 길엔 어제 못본 헌터물이나 봐야겠다.
 
 헌터물 좋지.
 
 판타지 마냥 중세시대로 퇴보해버리는 것도 아니고, 누리던 현대 사회 다 누리면서 몬스터 잡고, 초인적인 힘으로 활약하고.
 
 금수저들, 꼰대들 다 쌩까고 능력있고 의지 있으면 활약하며 인생역전할 수 있는, 그런 세계.
 
 좋잖아.
 
 이 개같은 현실보다는 훨씬...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이 시선을 돌려 옥상 옆으로 보이는 남한산을 보며 말했다.
 
 “주말에 일 있나?”
 
 “예?”
 
 아니, 이제 이 망할 좆소 사장이 주말까지 넘봐?
 
 “안 바쁘면 나랑 남한산 등산이라도 해볼래?”
 
 하...
 
 “등산이 진짜 좋거든. 이, 등산 한번 같이 하고 나면 어? 없던 소속감도 확 생기고 말이야,”
 
 있던 소속감도 댁이 다 날려먹고 있잖아.
 
 “몸도 건강해지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알지?”
 
 하, 제기랄.
 
 그냥 확 다 망해버렸으면.
 
 이 망할 일상 따위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나도 헌터물 세계에나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한산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어어, 시원하다. 시원하지? 산바람이 이래요. 이, 꽉꽉 막힌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데 바람 사이로, 무언가 생소한 느낌이 섞여들어 온다.
 
 이건 뭐지?
 
 완전히 처음 느껴보는 감각.
 
 마치 바람이 가슴, 아니 머릿속에 직접 파고드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어라? 안개가 끼었던가?”
 
 그 기묘한 감각에 눈을 찌푸리다 사장의 말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안개가 자욱하다.
 
 뭐야? 저쪽은 남한산이었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히 잘 보였는데, 어떻게 한 순간에 이렇게-
 
 “웁-”
 
 그 순간 나는 토기를 느끼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젠장. 왜 갑자기 올라오고 지랄이야!
 
 숙취도 견딜만 했는데 그 비린 선짓국이 문제였나, 망할 사장 새끼!
 
 “우웨엑!”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내가 토해낸 것을 보고 멍하니 굳어버렸다.
 
 뭐야, 이게.
 
 핏덩이...?
 
 “허, 헉, 강한성이! 왜 그래! 피, 피가...”
 
 피가, 내 피가...
 
 너무 많이 나왔-
 
 머리가 핑 돌고.
 
 세계가 반전했다.
 
 아니, 내가 바닥에 쓰러진 거라고 자각한 순간 몸에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냥 확 다 망해버렸으면 했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작가의 말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평일 연재고, 당분간은 가급적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 연재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읽어주신 독자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댓글(35)

ageha19    
어... 현판? 의외네요. 아무튼 기다렸습니다.
2024.02.02 23:21
찹쌀선과    
대역인줄 알았는데 현판? 작가님 글은 재미있으니까 기대하겠습니다 !!
2024.02.03 17:09
알파카는파카파카    
대역의신이 현판을 ㄷㄷㄷㄷ
2024.02.03 20:09
7wonders    
기다렸어요!!
2024.02.04 13:16
다이겨쓰    
헉!! 드디어 카르카손님의 글이....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건필!
2024.02.04 13:36
Saule    
T가 사람 여럿 죽이네
2024.02.07 17:57
DarkㅡLady    
내 야동떳다!
2024.02.10 08:08
제르미스    
와 카르카손!
2024.02.10 21:09
남자는핑크    
아니 무슨 부사관님이 중대장이 누명써서 짤렸다고 자살합니까? 그 대위님이 죽었기라도 했대요? 이건 공감의 문제가 아닌것같은데? 이런일이 현실에서 가능해요?
2024.02.11 00:45
카르카손    
나중에 나오겠지만.. 당연히 자살이 아닙니다. 이건 뭐 스포랄 것도 없으니
2024.02.11 06:22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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