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시작된 이래 권력자들은 항상 X대가리를 잘못 놀려서 인생을 망쳐왔다.
역사책만 펴봐도 여자 잘못 건드려서 인생을 망친 인간들은 수두룩하지 않은가.
양아들과의 삼각관계 끝에 양초로 환골탈태한 삼국지의 모 승상이라던가, 하필 적국 왕비를 불륜 상대로 납치해 왔다가 나라 전체를 말아 먹은 모 양치기라던가.
국가 하나를 통째로 작살 내놓은 머저리부터 제 목숨을 날려 먹은 멍청이까지 참 한심할 정도로 다양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인간들의 얘기를 읽으면서 항상 비웃었다. 야만, 아니 낭만의 시대에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던 인간들이 겨우 자기 정욕 하나 조절 못해서 그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나?
근데 이제 와서 보니 그 양반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했나 보다.
내가 임신시킨 건 자그마치 동로마 제국의 황녀였으니까.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요.”
서기 1005년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플, 부콜레온 궁의 한 구석.
전서구를 통해 나를 호출한 황녀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제국 최고의 미녀라고 불리며 구혼자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던 황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를 악 물고 있어도 눈망울이 터지기 직전인 게 너무 잘 보였다. 나는 접었던 손수건을 펼쳐 황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머릿속에서는 이거 아주 제대로 좆됐다는 생각에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지만, 그냥 울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달거리가 조금 늦어지는 일 정도야 흔하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알려준 이집트에서 임신을 판별할 때 썼다는 방법이요. 양쪽 다 싹이 나왔어요.”
눈물을 닦아주는 틈을 타 천천히 내게 기대오는 이 여성의 이름은 바로 조이 포르피로게니타.
동로마 제국 공동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의 둘째 딸이자 제국의 모든 실무를 총괄하는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조카딸이었다.
그리고 남자 황자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 시기, 자줏빛 태생(포르피로게니타)인 그녀는 제위로 가는 티켓과 마찬가지로 취급 받는 존재였다.
‘그런 여자를 내가 임신시켰다는 거지.’
그것도 혼전 성교를 죄악으로 취급하는 이 중세에.
일개 바이킹 용병 출신 장군에 불과한 내가.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차하면 곧바로 눈깔이 도려내질 신세였으니 참으로 적절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애송이 주제에 왜 감당 못 할 짓을 저질렀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
겨우 한 번의 관계로 임신할 줄은 몰랐고···그냥 반했다고 설명할 수 밖에.
굳이 변명을 하자면 눈 맞기가 참 좋은 조건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나, 전생 한국인 박유성은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중세 라이프에 지긋지긋한 상태였다.
이 시대 인생의 최종 컨텐츠, 결혼으로 좀 삶을 바꿔보려고 해도···. 현대인의 위생 관념을 가진 나에게 웬만한 중세 여자는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다. 일단 체취부터가 답이 없었으니.
한편 황녀 조이는 일찍이 약혼자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가 급사하는 바람에 신랑 얼굴을 보기도 전에 소박을 맞았다.
그 뒤로 27살이 된 지금까지 혼담도 없이 규방 한 구석에서 외롭게 하루하루 나이만 먹어가는 상태.
처음 얼굴을 봤을 때부터 서로 호감을 느꼈다지만, 우리 둘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스파크가 튀지는 않았을 거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그녀의 불행한 미래를 알다 보니 더더욱 유혹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무려 50살까지 처녀로 늙어가다가 간신히 결혼한 남편한테는 합방조자 거부당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아이를 가지고 싶어 늘그막에 온갖 부적과 주술에 의존하지만 당연히 실패.
뭇 아름다운 미모로 콘스탄티노플 전체의 추앙을 받던 황녀는, 그렇게 시들어 외로운 죽음을 맞고 만다.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인생 아닌가.
물론 그건 원 역사 이야기고 지금의 그녀는 스물 일곱의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지만···
‘자칫하면 난 거세당하고 조이는 수도원에 평생 유폐당하겠지.’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나는 황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먼저 여쭤보겠습니다. 황녀님은 아이를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낳아서 제대로 기르고 싶어요. 이 아이가 나중에 합당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1초의 고민도 없는 즉답. 눈물 때문에 부어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조이의 눈에는 어느새 처음 만났을 때의 자신감과 야망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 이래야 내가 반한 여자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방법을 알려 주세요.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하겠어요.”
원래 이런 일은 기세가 중요하다. 나는 조이와 짧게 이야기를 마치고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블라헤르네 궁, 바실리오스 2세가 머물고 있는 동로마 제국의 정궁을 향해.
···느닷없이 중세 유럽에 떨어진 지 스무 해 남짓.
눈 뽑히고 고자 되기 VS 동로마 제국 황제 되기의 이지선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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