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프롤로그
“일어나라!”
마력이 가득한 고함에 한 시체가 두 눈을 번뜩 떴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피부는 시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다.
절그럭.
상체를 일으키자 판금 갑옷이 마찰하며, 조용한 장내에 소리가 은은히 퍼졌다.
마력으로 검게 물든 흉갑의 중앙에는 금색의 팔각성(八角星)만이 빛을 잃지 않고 반짝였다.
그가 생전에 광명교의 성기사였음을 증명하는 문장이었다.
은백색의 장발 사이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 그 위로 은은히 빛나는 푸른 안광이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말라비틀어진 성기사와 사제의 시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부서진 교회용 벤치와 제단 등을 보니, 성당 안이 확실했다.
기둥과 바닥, 벽면에 가득한 붉은 핏자국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주인 앞에 와 무릎을 꿇어라, 데스 나이트.”
찌이잉-
자신을 깨웠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며, 이명처럼 그의 귓속을 어지럽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데스 나이트는 검은 로브의 사내 앞에 섰다.
긴 흑발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창백한 피부.
데스 나이트는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흑마법사··· 겔로헨.”
그의 입에서 메마른 사막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겔로헨은 데스 나이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지금껏 많은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과연 위대한 성기사 데론 일레니안의 시체라는 건가.
자신의 마력을 전부 쏟아내고, 많은 제물을 바쳐 일으킨 보람이 있었다.
“그래, 난 위대한 흑마법사 겔로헨. 그리고 너의 주인이기도 하다. 어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해라.”
데스 나이트에게 있어서 술자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감히 거스를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겔로헨은 지금까지 그렇다고 믿어 왔었다.
하지만 눈앞의 데스 나이트, 데론은 그 상식을 부정했다.
“싫다.”
그의 두 눈에서 푸른 안광이 활활 타오르듯이 번쩍였다.
“···뭐, 뭐라······?”
겔로헨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째서 데스 나이트가 주인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껏 수많은 언데드를 만들어냈던 그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모든 마법의 정점에 있다는 드래곤조차도 언데드가 되면 술자의 명에 절대복종하거늘.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겔로헨은 오히려 입꼬리를 기괴할 정도로 찢어 올렸다.
“아아, 이 얼마나 위대한 언데드인가. 이 정도는 되어야 교황국을 무너뜨릴 수 있겠지. 마왕도 해내지 못한 일을 내가 해낼 것이다!”
양팔을 하늘 높이 번쩍 들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그때였다.
“마··· 왕······!”
데론의 두 눈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던 푸른 안광이 일순 위협적으로 크게 타올랐다.
‘마왕’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깊고 깊은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기억이 순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왕에게 죽임당한 최근의 기억부터 이 게임에 막 빙의했던 오래전 기억까지 전부.
데스 나이트와 의식이 연결된 겔로헨에게도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시골 소년이 어느 순간부터 신성력을 각성하고, 대륙의 곳곳에 숨겨진 기연을 얻어 승승장구하던 기억.
겔로헨은 데론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기이한 사실이 있었다.
“어떻게 언데드가 자아와 기억을 되찾을 수가 있지? 설마 생전의 강력한 신성력 때문인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욱 기이하면서도 대단한 결과물이었다.
“네놈이 날 언데드로 만들었나.”
데론은 이제 시체의 입으로 말하는 게 익숙해진 참이었다.
어째서 자아와 기억을 되찾게 된 건진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원래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빙의자의 영혼이기 때문일까?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뭐가 됐든 그는 되살아났고, 해야 할 일은 많았으니까.
손에 쥔 서슬 시퍼런 대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주인에게 ‘네놈’이라니. 교육이 필요··· 잠깐, 너 설마···"
그 모습을 본 겔로헨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이미 데론을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데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상황.
통제권을 되찾는 건 물 건너갔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주인인 날 죽이려고? 그러면 내 종복인 너 역시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기껏 얻은 새로운 삶을 날려버릴 셈이냐?”
“과연 그럴까?”
데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겔로헨이 황급히 팔을 앞으로 뻗으며, 자신의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대악마 브라크시여, 제게 힘을···”
그러나 마법을 영창하기도 전.
서걱-
눈 깜짝할 사이에 대검이 놈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푸슈우우-
머리 잃은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몸체가 뒤로 넘어졌고.
철퍽.
잘려 나간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얼마 전, 번성했던 왕국의 절반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던 흑마법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초라한 최후였다.
상대를 잘못 고른 탓이었다.
생전 교황보다 강한 신성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데론이었으니까.
사실상 겔로헨은 본인의 오만함으로 인해 스스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쿵.
흑마법사가 쓰러짐과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은 데론.
스스스슷···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마력이 빠르게 소멸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시체였던 그가 흙으로 돌아갈 터.
그때였다.
“쿠웨엑! 이런 빌어먹을 시체 새끼가! 감히 주인의 목을 날려?”
머리만 남은 겔로헨이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악을 내질렀다.
힘을 절반 이상 잃었지만, 데론은 다시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그저 가슴속에 자리한 티끌만 한 신성력이 조금 더 잘 느껴질 뿐이었다.
절그럭. 절그럭.
겔로헨의 머리 앞에 당도한 데론.
검은색 철제 부츠가 눈앞에 나타나자, 악을 쓰던 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내가 아는 것과 다르지 않군.”
데론이 마기 짙은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힘을 잃은 상태였음에도 위압감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내가 죽지 않을 걸 알았다고······?”
겔로헨이 의아하다는 듯이 데론을 올려다보았다.
“네놈을 완전히 죽이면 당연히 나도 소멸하겠지. 안 죽인다면 날 배신할 테고. 그러니 여기서 확실히 하겠다.”
살아생전 마왕 토벌대의 대장이었으며, 최강의 성기사였던 자.
지금은 데스 나이트로 부활한 데론이 겔로헨의 머리통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턴 내가 네 주인이다.”
댓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