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차라리 빌런으로 살겠다

내 것을 다 빼앗길 순 없어

2024.03.02 조회 70,484 추천 1,151


 “그럼 그 결혼, 나랑 해 보는 건 어때?”
 
 내 두 귀를 의심했다.
 국내 제일의 대기업 대영 그룹.
 그 대영의 유일 적통 강문정 상무.
 
 내가 모시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네?”
 
 내가 보인 반응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나도 안다.
 다 들어 놓고 못 들은 척 되묻는 이 대화법을 상무님이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그룹 비서실 소속으로 그녀의 수행 비서 일을 하고 있는 내가, 그 정도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게 최선이었다.
 언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상무님이 물으셨다.
 마치 막대 사탕 하나를 흔들며 어린아이를 구슬리는 듯한 모습.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제는 결혼이 꼭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고, 그런데도 안 하고 평생을 혼자 살자니 이상하게 불안한. 그 결혼 나랑 한번 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세간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강문정 상무님은 상당히 내성적인 사람이다.
 비즈니스를 할 때와 일 외적인 공간에서의 모습은 극과 극이다.
 
 비즈니스 자리에서는 화려하고 강력하며, 품위보다는 에너지를, 교양보다는 공격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연출하는 분이지만, 비즈니스가 끝나는 순간 상무님은 언제나 혼자이길 원한다.
 대학 동문회, 재벌가 자제들의 친목회 자리를 제외하고 따로 친구를 만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 상무님이 지금 내 앞에서 얼굴에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다.
 날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고 계신 중이란 말이다.
 
 “농담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여쭤보는 겁니다. 지금 진지하신 겁니까?”
 
 내 말에 상무님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 모습은 내게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아까 백억이라고 했었나? 딱 백억 정도만 있으면 평생 돈 걱정 안 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거 같다고. 그 돈 내가 줄게.”
 “사, 상무님······.”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냥 한번 던져 본 말은 절대 아닐 거다.
 최소한 비즈니스 앞에선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즉흥적인 척하는 거, 그거 다 연출이다.
 얼마나 계산이 많은 사람인데.
 그렇다고 장난은 더더욱 아닐 테고.
 애초에 의미 없는 장난을 극혐하시는 분.
 특히 상대가 누구든, 자신이 밟아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면 이런 장난으로 갑질을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배다른 오빠인 강영진 부사장과 달리 강문정 상무는 강자의 교양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겁이 났던 거다.
 
 그냥 한번 던져 본 말도 아닐 거고, 농담도 아닐 것이기에 내가 어떤 대답을 내어놓더라도 상무님과의 관계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뜻하고 있었다.
 
 물산으로 입사를 해 대리를 달고, 그룹 비서실로 발령을 받으며 상무님의 수행 비서 일을 하기 위해 과장을 건너뛰고 바로 차장을 달아 오늘까지.
 지난 8년간 대영이라는 큰 지붕 아래에서 지내 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내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우선 먼저 50억. 나머지 50억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날 주는 걸로 할게. 물론 중간중간 특별 보너스도 섭섭하지 않게 챙겨 줄 거고, 내 옆자리에 어울리는 품위 유지비는 원하는 만큼 지원을 해 주겠어. 단.”
 
 솔직히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고 있었다.
 
 “윤 차장이 내 옆자리에서 내 품위를 깎아 먹는 구설수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그 상대가 저입니까?”
 “왜냐고?”
 “네.”
 “세상의 입장에선 내 결혼 상대자로 윤 차장이 가장 쇼킹할 테니까.”
 
 쇼킹 정도이겠나.
 
 “그리고 스토리를 조금만 잘 만들어 붙이면 가장 설득력이 있는 상대일 테고.”
 “설득력이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상무님이 말씀하셨다.
 
 “윤 차장도 그룹 돌아가는 분위기 알잖아? 지금의 난 이렇게라도 세상의 어그로를 끌지 못하면······ 뭐라도 시도를 해 보지 않으면 눈 뜨고 내 것을 다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거.”
 
 왠지 마지막 발악의 수단으로 날 사용해 보겠다는 솔직한 고백처럼 들렸다.
 
 “이슈가 필요해. 내가 대영의 적통이라는 사실을 주주들, 세상 사람들에게 계속 인지시켜 줄 이슈. 그 이슈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어그로 못지않게 그 이슈를 뒷받침해 줄 만한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어그로가 힘을 받고 오래가지. 그 어그로가 막상 뚜껑을 열어 봤더니 괜찮은 알맹이가 있고,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만 시켜 줄 수 있으면, 긍정적인 이미지라는 게 만들어지는 거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문정 상무.
 대단한 사람이고, 밖에서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야심가에 그 야심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자라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무섭다는 생각과 동시에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욕망.
 
 물론 감수해야 하는 게 많겠지.
 하지만 100억.
 평생을 죽어라 일을 해도, 절대 만질 수 없는 100억을 약속받지 않았나.
 어떤 무시와 조롱, 또 험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참고, 인내하고, 속으로 삭여 낼 용기만 만들어 내면 곧바로 50억이 생긴다.
 그리고 그녀에게 필요한 시간까지 견뎌 내기만 하면 50억이 추가로 생기고.
 
 해 볼 만한 딜 아닐까?
 
 그리고 추가로 누릴 수 있는 혜택.
 비록 계약 관계이기는 하나, 강문정 상무라는 대영의 적통을 등에 업으면 회사 내에서 나에게 어떤 힘이 생길지를 생각해 봤다.
 그 힘으로 밟아 버리고 싶은 딱 두 인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인간들을 밟는 상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강문정 상무가 말했다.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이대로, 강영진 부사장한테 내 것을 다 빼앗길 순 없어.”
 
 갑자기 궁금해졌다.
 지금 자신의 입으로 한 그 말.
 자신의 오빠에게 자신의 것을 다 빼앗길 순 없다는 그 말.
 과연 나 말고도 상무님의 입을 통해 직접 그녀의 진심을 들어 본 사람이 있을까?
 
 “내가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잖아?”
 
 외로운 사람이다.
 제삼자인 내가 봐도 대영 그룹 안에 적통인 강문정 상무의 편이 너무 없다.
 
 “상무님.”
 “편하게 말해.”
 “제가 지금 좀······ 경황이 없어서 그런데요.”
 “그렇겠지. 이해해.”
 “생각해 볼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에 강문정 상무는 당연하다는 듯, 어쩌면 너라면 이 제안을 기회로 잡을 수밖에 없을 거라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아무리 내가 비즈니스적으로 접근을 한다고 해도,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천천히 생각해 봐. 생각 정리되기 전까지 내가 먼저 이 일에 대한 말을 꺼내지는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아참, 그리고.”
 “네, 상무님.”
 “윤 차장은 나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야.”
 
 나도 모르게 상무님을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대영 안에서 몇 안 되는 내 편 중, 유일하게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마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나한테 와 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
 
 사실이다.
 
 “그런 사람을 놓치고 싶지는 않아.”
 “······.”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못하더라도, 윤 차장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계속 내 옆에 있어 줘.”
 
 과연 그게 될까?
 
 난 고개를 한 번 깊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런 내게 강문정 상무는 나가 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녀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땐 대중목욕탕을 간다.
 뜨거운 탕 속으로 몸을 담가 놓고 멍을 때리다 보면, 어느새 반드시 고민을 해 봐야 하는 내용, 고민이 필요 없는 내용, 고민을 한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들이 자연스럽게 분류가 된다.
 
 퇴근과 동시에 집 근처 대중목욕탕으로 향했다.
 
 온탕에 몸을 담가 놓고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100억.
 
 지금 내게 필요한 고민은 이 100억이라는 큰돈이 내게 필요하냐, 그렇지 않냐, 과연 내 결혼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등의 어리석은 고민이 아니었다.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을 만한 금액이다.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기회도 아니고.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피눈물 같은 돈을 사기 쳐 만드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 무슨 고민이 필요하겠나.
 
 이혼이라는 목표를 정해 놓고 들어가는 결혼?
 
 그런 건 문제없다.
 
 요즘 세상에 한 번 갔다 온 게 무슨 흠이 된다고.
 
 그렇다고 내가 결혼에 큰 환상이나 강박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오히려 지금 내가 어설프게 갖춰 놓고 있는 조건보다, 몇 년 뒤 100억이라는 든든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내가 만날 수 있는 여자들의 선택지가 더 넓지 않을까?
 
 만약 그때에도 지금처럼 결혼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내 인생에 결혼이라는 게 꼭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럼에도 한 번도 안 해 보고 평생을 혼자 살자니 이상하게 불안한 존재라고 여긴다면 말이다.
 
 게다가 어차피 지금처럼 강문정 상무의 수행 비서 일을 계속하려면, 여자를 만날 시간 같은 건 절대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실제로 경험해 보지 못한 100억이란 금액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이 결혼에 대한 설득력이라는 게 필요했다.
 
 지금의 내 인생을 바꿔 줄 수 있는 그 100억은 어쩔 수 없이 강문정이라는 대영의 적통과 세기의 결혼을 하는 순간 나의 미래까지 바꿔 놓을 게 분명하다.
 
 이혼을 한 뒤에도, 평생을 내가 달고 살아야 할 대영, 그리고 강문정이라는 이름의 꼬리표.
 
 이 100억이라는 돈은 결국 이혼을 한 뒤 내가 대영과 강문정이라는 꼬리표로부터 감당해 내야 하는 미래 감정 노동의 보상금과도 같은 것인데, 과연 미래의 내가 이런 선택을 한 지금의 날 원망하지는 않을까?
 
 원망······ 원망이라.
 
 그렇게 따지면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날 원망했던 적이 있었나?
 
 항상 고마워하지 않았나?
 항상 안쓰러웠고,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바득바득 여기까지 기어 올라와 준 나 스스로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대견해하지 않았나?
 
 그래.
 
 다시 또 그렇게 만들면 되는 거다.
 
 할 수 있다.
 
 얼마든지.
 
 미래의 나 역시 지금 이런 결정을 내린 나에게 고마워하게끔, 그렇게 내가 만들면 되는 거다.
 

작가의 말

복귀했습니다.

다시 또 신나게 달려보겠습니다!

댓글(80)

어비윤    
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2024.03.02 13:08
글빚기    
시작부터 뢐끈하게 100억에 재벌집 사위라니...
2024.03.02 14:16
Sunch    
드디어
2024.03.03 00:46
의설    
100억...요즘 같은 고물가시대에 금액이 살짝 아쉽긴하네요.
2024.03.03 09:26
몽환현재    
달려봅시닷!^^
2024.03.04 00:02
가네스    
이제 슬슬 연재 하실때 되지 않았나 싶어서 검색 했더니 올라온 작품이 있네요 재밌을거 같아 기대됩니다!
2024.03.04 01:12
헬헤븐    
언제 오시나 했습니다
2024.03.05 14:48
유기장    
아침에 문득 서인하를 검색해보니 이렇게 몰래 연재 시작했네요. 역시 믿고 보는 참신한 소재! 기대됩니다, 건필하셔요
2024.03.06 09:39
동복바    
아니 몰래 신작을 쓰시고 계셨네요 ㅋ
2024.03.07 07:18
유나파파    
재밌게 보고 갑니다
2024.03.0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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