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기적을 빚는 도예가

1화. 향로(香爐), 향로(向路)

2024.03.11 조회 23,404 추천 359


 내 인생은 하드코어 난이도였다. 이건 게임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마주한 진짜 현실을 말하는 거다.
 
 때때로 인생이 이지모드로 바뀐다면······. 로또 당첨이든, 재벌과의 인맥이든, 뭐에 의해서든, 인생역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보지만 역시 상상은 상상일 뿐. 내게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수백 명이 책상을 따닥따닥 붙여 앉은 좁아터진 교실에 있었다.
 
 살짝 징그러울 정도였다.
 
 뭐가 징그럽냐고?
 
 초중고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갔고, 군대를 만기제대했고, 마침내 학부까지 졸업했음에도 또다시 반복되는 현실.
 
 사회에 나갈 나이가 충분히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불편한 공부용 책상과 의자에 몸을 욱여넣고 있다는 바로 이 현실이 징그럽단 말이다.
 
 지금 내 손에는 구겨진 자국이 남아있는 시험지가 들려있었다(시험을 개같이 망쳤다는 생각에 시험지를 우그러뜨렸었지만 채점은 해야겠기에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다).
 
 시험지의 정체는 바로 공무원 시험 국사 과목 문제지.
 
 “때리치아라~.”
 
 “······.”
 
 “이 문제 틀린 머리 빈 새끼들. 고마 때리치아~. 내가 수업에서 얼마나 강조했나 이거?”
 
 문제풀이를 해주는 강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를 다그쳤다.
 
 그렇다.
 
 나는 공무원 시험 도전 5년차의 장수생이었고, 31살에도 중고딩과 다를 바 없이 불편한 책상에 앉아 혼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교실은 노량진의 한 고시학원, 공무원 시험 대비반인 공시C반.
 
 이백여 명의 학생들이 공식 점수가 나오기 전 가채점을 하기 위해 학원에 직접 나와 있었다.
 
 강단 앞에서 목에 핏대를 올린 채 소리치는 강사. 막말을 해대지만, 공시생들에게는 오직 그만이 이 지옥에서 자신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구세주였다.
 
 공무원 시험은 한두 문제 차이로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된다. 강사가 풀어준 답과 자신이 적은 답이 일치할 때마다 안도의 한숨이, 다를 때마다 안타까움의 한숨이 수강생들의 주둥이에서 쏟아져나온다.
 
 “25번 문제! 이건 거저 먹으라고 던져주는 문제 아이야? 이거 틀린 새끼들 공시 공부 당장 때리치아~! 어디 14급 15급 공무원이나 해야 될 새끼들 이거.”
 
 알겠지만 공무원 시험은 9급부터다.
 
 그리고 나는 25번 문제를 틀렸다. 가채점하는 동안 틀린 문제 수를 보면 이번 시험도 위태위태하다.
 
 14급 15급 공무원이 있다면 그거라도 시켜줘······,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니면, 이제 정말 때려치울 때인가.’
 
 아무래도 공무원의 길은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러면 지난 5년의 세월은······. 학원비는······. 월세는······. 교재구매비는······.’
 
 가족들의 실망한 얼굴을 떠올리면 벌써부터 아찔하다.
 
 애초에 공부와 그리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 것부터가 패착이었던 게 아닐까.
 
 공부를 안 좋아하는데 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냐고?
 
 이 불안하고 내일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일단 합격만 하면 정년까지 잘리지 않으며, 퇴직 후 연금까지도 보장이 되는데.
 
 이걸 안 한다고? 머저리인가?
 
 공무원이 가진 그 두 가지 장점은 지금 같은 시대에 내 전공이고 꿈이고 나발이고 무시해버릴만큼 큰 유혹이었다.
 
 게다가, 첫해 시험에서 하필이면 아슬아슬 단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었다. 사실 그 영향이 컸다.
 
 그때 나는 일 년만 더 하면 합격하겠다는 희망을 봤고, 거기 매달렸으니까.
 
 차라리 첫해 시험을 크게 망쳤다면 아마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을 때려치우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는 그 희망.
 
 그 빌어먹고 얼어뒤질 희망 하나 때문에······!
 
 공무원 시험 준비에 일년이 가고 이년이 가고 삼년이 가고 하다가 어느새 오년이 순식간에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다. 해가 갈수록 합격선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기적······, 아니 비극만을 남기고서.
 
 찌직.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내 문제지의 25번 숫자 위에 길게 X표를 그었다. 방금 전 강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웅웅거리는 그 소리가 귓속에 인이 박힌 것처럼 맴돌고 있었다.
 
 -마! 때리치아라! 때리치아! 머리 빈 놈은 고마! 때리치아라고! 때리치아!
 
 제발 그만, 그만해! 알겠다고!
 
 왠지 울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마음은 아니었던 듯, 채점이 끝난 교실에는 몇몇 수험생들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
 
 옆자리에 있던 놈이 갑작스레 내 뒤통수를 건드리길래 돌아보았다.
 
 “아 씨······.”
 
 모든 문제 위에 동그라미가 그려진 자신의 시험지를 자랑하듯 내쪽으로 펼쳐 든 임병조.
 
 녀석은 씨익 웃고 있었다. 마치 대단한 승자라도 된 것처럼.
 
 “난 다 맞은 거 같은데, 넌 어때?”
 
 “······.”
 
 재수 없는 새끼.
 
 작년 고시반에서 같은 반, 옆자리가 되어 말을 트게 된 놈이었다. 마침 나이가 같아서 몇 번 밥도 같이 먹고 했었다.
 
 그런데 놈은 밥을 얻어먹기만 하고 사지는 않으려는 스타일이었다.
 
 내게 몇 번이나 얻어먹은 후에도 꿋꿋이 더치페이를 고집하는 그런 멋진 성격이었는데, 이번 시험을 잘 본 모양이었다.
 
 놈은 3년차, 나는 5년차였는데.
 
 머릿속에 주민센터에서 민원을 처리하는 공무원 임병조와, 백수인 내 모습이
 교차했다.
 
 “아, 안 돼.”
 
 “뭐가?”
 
 인생이 왜 이럴까.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지친 몸을 이끌고 숙식하는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고시학원 근처에 널린 평범하고 작은 고시원이었다.
 
 “하아······, 인생.”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언제 보더라도,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은 좁은 방이었다.
 
 자려면 의자를 책상에 거꾸로 얹어놓고 발을 그 아래에 밀어넣어야 될 정도로 좁은 방.
 
 방이라기보다 우리였다. 공시생 사육용 우리.
 
 들어갈 때마다 ‘이딴 방이 월세가 40만원에 관리비가 5만원이라고······?’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그런 안락(?)한 나만의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무릎을 꿇었다.
 
 미래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진짜 죽어버릴까.
 
 -♪♬
 
 진지하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벨소리가 울렸다.
 
 “또 보험 가입하라는 전화겠지. 아니면 보이스피싱이거나. 안 받아!”
 
 -♪♬
 
 하지만 끊이지 않는 벨소리에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꺼내어 보니 스팸이 아니고, 아는 이름이었다.
 
 지인이 전화한 게 얼마만이더라.
 
 하지만 지금은 누구의 연락도 받고 싶지 않았다.
 
 원래 장수생들은 수험 기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사람과의 연락을 점점 더 회피하게 된다.
 
 나 역시도 중고등 동창이나 대학 동창들과 연락이 대부분 끊겼다. 합격을 못한 공시생이란, 원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연이 끊기는 존재였다.
 
 ‘그래도 이 녀석과는······. 왠지 통화하고 싶긴 하다.’
 
 내가 연락을 회피하고 혼자만의 땅굴로 파고들 때면 ‘야, 공부하다 답답할 때 문자라도 해.’라고 이해해주던 녀석.
 
 그 이름은 이정식, 같은 미대 같은 도예과를 졸업한 대학 동기였다. 비록 졸업 후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
 
 벨은 계속 울렸고, 나는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정식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결과는?”
 “아직 안 나왔어.”
 “가채점은 했고?”
 “했지, 했는데······. 올해도 어려울 거 같다.”
 “그러냐.”
 “그래.”
 
 이정식은 내게 딱히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야, 시험은 됐고. 일본여행 안 갈래?”
 “일본여행? 뜬금없이?”
 “어때? 노량진에 쳐박혀서 공부만 쳐하느라 답답할 텐데 기분전환도 하고.”
 “좋지, 좋은데······.”
 “좋은데?”
 “돈이 없다. 너나 가라.”
 
 누군 일본 여행을 안 가고 싶어서 안 갔나. 돈이 없어서 못 갔지.
 
 “짜식. 내가 니 주머니 사정 모르겠냐? 이 형님이 널 위해서 비행기표랑 숙박권까지 준비했다. 넌 몸만 오면 돼.”
 “몸만 오면 된다고?”
 “그래.”
 “너 혹시······.”
 “혹시?”
 “장기 밀매임?”
 “등신, 장기 밀매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도 잘 알겠지만 공시준비에 속이 다 곯아서 쓸만한 장기가 별로 없을 거다.”
 “아, 뭔 개소리야. 노잼이거든?”
 “그럼 로또라도 된 거냐? 일본행 공짜 비행기표랑 숙박권이 어디서 난 거야?”
 “그런 거 아니고, 전태양 교수님 기억하지? 우리 학부 때 지도교수님.”
 “당연히 기억하지.”
 “일본 도자기 축제 초청권을 받으셨는데 스케줄이 안되신다고 나한테 주셨거든. 근데 초청권에 비행기 티켓이랑 무료 숙박권까지 포함이네? 내가 이래 봬도 교수님 애제자인듯.”
 “그랬던가?”
 
 노량진에 온 뒤로 학부 때의 일들은 다 잊어버린 셈이다. 미술이고, 도예고 나발이고 기억도 잘 안난다. 찬란한 20대의 자그마치 4년이란 시간이 실종된 기분.
 
 공시 공부가 이렇게 위험하다.
 
 “여자랑 같이 갈까 하다가, 이 형님이 특별히 너 기운나게 해주려고 같이 가자고 연락한 거야 임마.”
 “구라는. 그냥 같이 갈 여자가 없는 거잖아.”
 “자식, 예리하네······.”
 “······.”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암튼, 어때? 같이 갈래? 우리가 또 언제 공짜로 여행 다녀올 수 있겠냐. 온천도 한번 빡 하고. 그 맛나다는 일본 편의점 음식도 빡 먹고. 으이?”
 
 사실, 딱히 여행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절대 남자끼리 단둘이서 가야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시를 그만두고 죽어야 되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땅바닥에 쳐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고맙지만······. 시험도 망친 주제에 뭔 여행을 가.”
 “그럴수록 더더욱 가야지. 기분 전환도 하고, 미래 계획도 짤 겸.”
 “미래 계획?”
 “공시 공부 계속할 거야? 5년이나 했으면 이제 슬슬 다른 일을 생각해봐야 할 때 아니냐.”
 “······.”
 
 ‘남이 5년이나 준비한 일을 니가 뭔데 계속 하라 마라냐’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라왔으나, 그래도 나를 생각해서 일본 공짜여행을 제안한 친구에게 그렇게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침묵으로 항의를 대신했다.
 
 “도예를 다시 해볼 생각은 없냐?”
 
 녀석은 결국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했다.
 
 “도예는 무슨 도예야? 물레 안 찬 지가 5년째인데. 그리고 도예가 해서 제대로 먹고 살 수나 있냐? 난 생각 없어. 차라리 배달을 하면 했지.”
 “뭘 그렇게 말해. 다른 도예가가 들으면 화내겠다 임마.”
 “다른 도예가 누구.”
 “나.”
 “······.”
 
 도예가는 돈을 못 번다. 게다가 다른 미술 분야와 달리 흙덩어리를 만지는 일이라 육체적인 힘도 많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자면, 가난하고 힘들다.
 
 도.예.가.
 
 그 세 글자만은 뭔가 있어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분위기뿐, 대다수 도예가의 실상은 괴롭고 궁핍하다는 말이다.
 
 물론 평론가의 찬사를 받으며,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성공한 도예가들. 작품 하나가 억대에 팔리는, 명예와 부를 다 거머쥔 도예가들이 간혹, 아주 간혹,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건 천상계의 이야기일 뿐. 서울대나 홍대 미대 출신도 아닌 잡대 출신 도예과 졸업생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 그런 길을 다시 가라고? 아무리 장수생이지만 도예가는 아니다. 차라리 6수를 하고 만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이정식은 말했다.
 
 “뭐, 심각한 얘기는 나중에 술이나 한잔 기울이면서 하자. 암튼 갈 거지, 일본?”
 “······그래, 나도 한 번 가보자, 일본.”
 
 바닥에 쳐져서 죽네마네 하는 것보다는 일본에 가는 게 낫겠지. 도예가가 되라는 말은 거부할 수 있어도, 공짜 해외여행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정식이 대어라도 낚은 낚시꾼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간다 했다! 나 썰렁하게 비행기 혼자 타기 싫으니까 나중에 말 바꾸지 말고! 일정은 톡으로 보내줄게.”
 “오냐.”

작가의 말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댓글(32)

chvksj    
재밌네요 전설이 되시길
2024.03.11 09:59
데스에더    
도자기라...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는 몰라도 기대가 됩니다.
2024.03.11 10:03
dlkgjlshle    
기대중 건필하세요!
2024.03.11 11:43
yeom    
잘 보고 갑니다.
2024.03.19 18:42
keaton    
각자 삶의 무게가 있다지만 아무리 봐도 하드코어는 아닌데 말입니다…가족 있어 대학나와 친구 있어 여행도 가고…고시원 오래 살아봤지만 저렇게 느낀다는 것도 그렇고…이상이 높으면 자기 삶이 초라해 보이는 법이라 그런 걸까요…
2024.03.25 08:42
풍뢰전사    
건투를
2024.03.28 10:04
서비스    
5년이나 놀고먹고도 사는데 지징없을 정도면...
2024.03.29 09:58
지정천    
아니 5년이나 뒷바리지를 받는 환경이 하드코오냐. 철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2024.03.30 18:39
귀욤둥이    
친구 잘뒀네
2024.04.02 09:24
당케    
쪽지보고 왔는데 첫편 느낌이 좋네요
2024.04.03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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