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곧 드라마다.
내가 드라마 연출을 업으로 삼은 놈이라 괜히 빗대어 하는 말이 아니다. 실로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은 드라마와 닮아있다.
이를테면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과 희로애락, 그로 인해 변화무쌍하게 널뛰는 감정 같은 것들.
어제까지는 희극이었음에도 오늘부터는 비극이 되어버리거나, 혹은 그 반대일 수 있기에 끝까지 가보지 않고는 결말을 알 수 없는 것도.
드라마라는 게 본디 우리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축약한 콘텐츠이니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찰칵-
찰칵-
[드라마 <리:라이프> 제작발표회]
그리고.
“자, 그러면 지금부터 기자 여러분의 질문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취재 열기가 정말 뜨겁네요. 먼저, 하나, 둘···. 다섯 번째 줄. 정중앙에 착석하신 기자님께 마이크 전달 부탁드립니다.”
촤르르르-
찰칵-
“투데이이슈입니다. 주연 배우인 서진호 씨에게 질문드립니다. 스크린이 아닌 TV 드라마는 처음인 것 같은데요.”
“아! 처음은 아닙니다. 옛날에 단역 많이 했거든요. 슬프게도 아무도 모르시는 것 같지만요. 흑.”
와하하하-
“하하. 그렇군요. 그럼, 음, 드라마 복귀가 정말 오랜만이신 것으로 정정하겠습니다. 복귀작으로 <리:라이프>를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한데요.”
뻔하디뻔한 소리지만 우린 모두 자신의 이름을 건 드라마의 주연 배우다. 물론, 우리 모두의 인생이 스포트라이트 아래 선 스타처럼 화려하다는 뜻은 아니다.
“···었습니다.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달까요? 그리고 두 번째는 이상 감독님입니다. 꼭 한 번 함께 작업해 보고 싶었거든요. 다들 아시다시피···.”
시청률로 대박을 터트리거나 뛰어난 작품성으로 끊임없이 오랫동안 대중에게 기억되는 드라마보다는 처참하게 망해서 시청자의 기억에 발끝도 걸쳐보지 못한 이름 모를 드라마가 더 많은 것처럼, 우리의 삶도 비슷하겠지.
그래서 난 어떠냐고?
“저는 이상 감독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평범하지 뭐. 쇼비즈니스 업에 종사할 뿐이지. 일거수일투족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도 아니고. 사람 인생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
“과감하게 드라마 복귀를 결심한 이유가 감독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서진호 배우의 표현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사실 이상 감독님은 업계 관계자들만큼이나 드라마 팬들이 사랑하는 연출자로 유명하죠.”
음. 그래. 솔직해지자.
“실제로 이상 감독님은 시청자들이 붙인 별명도 무척 많습니다. 장르 불문 믿고 보는 연출자, 시청률 제조기, 영원히 내 배우랑만 찍었으면 좋겠는 PD, 배운 변ㅌ···.”
으하하하-
“잠깐! 잠깐만요! 기자님, 저희 지금 라이브 중이라서. 조금 순화된 언어로 부탁드립니다. 실시간으로 기사도 나가고 있습니다. 그, 변ㅌ··· 는 조금, 네. 부탁드립니다.”
만약, 드라마 <이상>이 존재한다면.
그러니까 나라는 놈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세간으로부터 꽤 그럴듯하다는···, 아니, 매 회차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박 행진을 하는 중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크흠! 디테일한 연출의 대가, 라고 정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연출하시는 작품마다 대형 스타가 탄생한다고 해서 스타메이커로도 불리시고요. 알고 계시죠?”
그간 내 손에서 탄생했던 드라마들처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다. 솔직히 나는 잘 나가는 연출자다.
아주 많이.
“아무튼. 제가 드라마 팬들이 부르는 별명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리:라이프>를 통해서 감독님께 새 별명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어, 음. 무슨 말씀인지?”
“사전에 공유받은 드라마 정보를 보면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연출 ‘이상’. 작가는 ‘이상 &’이라고. 둘 다 감독님 맞으시죠? 대본을 직접 집필하신 건가요? 그리고 감독님 성함 옆에 ‘&’이 붙어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름이 하나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빈칸이네요? 공동 집필인가요?”
“비슷합니다. <리:라이프>는 제가 작가님과 함께 기획해서 탄생한 이야기입니다. 작가님께서 부담스러워하셔서 ‘이상 &’으로 표기했습니다.”
“흠···, 기성 작가이신가요? 아니면 신인?”
“노코멘트하겠습니다. 만약, 작가님의 요청으로 추후 공개하게 되면 확인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리:라이프>는 어떤 드라마인지, 시청자가 이 드라마를 꼭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관전포인트를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방송국 입사 후 입봉까지는 여느 방송국 놈들처럼 뭐 빠지게 고생을 한 편이지만, 첫 작품부터 대박을 터트렸다.
몰랐는데 연출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고, 결과가 좋으니 더 열심히 했다. 여러모로 운도 따랐다.
“으음. 일단 제가 만들고요.”
와하하하-
그렇게 나는 스타 PD가 되었다.
촤르르르-
찰칵-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후회합니다. 크든, 작든. 후회 없는 선택만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없죠.”
하지만 그게 내 인생이 완전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요. 물론 우리 현실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가능합니다. <리:라이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남들에게는 더없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드라마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내 인생은 지금 답이 보이지 않는 결말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해보는 상상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기에 대중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신다는 말씀이 인상적인데요. 배우분들과 감독님께 공통 질문드립니다.”
찰칵-
“<리:라이프>의 주인공처럼 인생을 다시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이상 감독님부터 답변 부탁드립니다.”
촤르르륵-
찰칵-
드라마의 메인 소재를 두고 출연진과 제작진의 경험에 빗댄 질문은 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홍보팀에서 미리 뽑아준 예상 질문 리스트에도 있었다. 질문을 봤을 때도 큰 고민 없이 넘겼다.
“······.”
말문이 막힐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기자의 질문을 듣자마자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 때문이다.
- 여기까지만 하자.
정언의 목소리가 귓가에 왱왱 맴돌았다. 그녀답지 않게 높낮이 없이 무심했던 목소리만큼 얼굴에도 표정이 없었다.
그것이, 나는 무척 슬펐다.
-당신 요즘 바쁜 것 같아서 서류는 내가 준비했어. 읽어보고···. 아니다. 읽어볼 것도 없지. 사인해 줘.
어젯밤. 오랜 친구이자, 첫사랑이었고, 여자친구였으며, 평생을 약속했던 정언에게 끝을 통보받았다.
식탁 위에 내려놓은 서류를 보란 듯이 먼저 사인하는 걸 나는 가만히 보기만 했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 아침까지 부탁해.
잘못한 게 많은 만큼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서류에 사인은 하지 못한 채 집을 나왔다.
지금쯤 라이브로 송출되는 영상을 보며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불현듯 왼쪽 종아리 근처가 시큰해졌다.
“윽.”
본능적으로 터진 신음을 누르며 고개를 돌리자, 포디움에서 선 MC의 당황한 얼굴과 시큰거리는 종아리의 원흉이 분명한 드라마의 배우 서진호가 기자들을 향해 싱글대며 날 대신해 마이크를 잡는 게 겹쳐 보였다.
“어휴. 기자님. 방금 그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 이상 PD님은 아마 회귀 같은 거 고민 안 해보셨을 거예요. 딱 봐도 부족한 게 없으시지 않습니까?”
“아, 역시! 그런 거군요? 어쩐지 너무 오래 고민하시더라고요.”
“완전 그겁니다. 심지어 얼굴도 잘생겼잖아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정말 너무하다니까. 솔직히 이렇게 배우랑 감독이랑 나란히 앉으면 제가 빛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근데 이분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에이, 그건 서진호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잘생기셨고, 연기도 잘하시고···.”
“저는 아니죠. 전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거든요.”
“오? 정말요? 언제일까요?”
“음. 중학교 3학년 때. 2월 14일.”
“디테일하시네요. 날짜까지 기억하시다니.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날 초콜릿을 정말 많이 받았거든요. 인기를 처음 실감한 날이랄까···. 아, 그때로 돌아가면 더 재밌게 살 텐데!”
“어휴. 여기서 어떻게 더 재밌게요?”
너스레를 떠는 서진호와 맞장구치는 MC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던 거 같다.
빌어먹을.
이상. 이 멍청한 새끼.
겉만 번지르르한 내가 너무 한심해서.
그리고 내 입으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어린아이처럼 기도했다.
- 물론, 우리 현실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내 인생이 한 편의 드라마이기를.
-만약.
제발 다시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만에 하나 신에게 이 기도가 닿는다 해도 세계 평화도 아닌 이까짓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드라마에서나 이뤄질 법한 기도일 것을 알면서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빌었다.
부디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언제든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있는 순간으로.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되돌아가고 싶다고.
─S#0. 인생은 드라마
그런데 정말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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