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김지우씨께서도 아시다시피 E급 헌터는 부산물의 10%가 지급됩니다. 자, 여기 싸인 해주세요"
언뜻 정중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를 건네는 남자. 하지만 계약서의 내용은 전혀 정중하지 않다.
부산물이라니.
그걸 왜 니들이 마음대로 정하는건데?
이 자식들 지금 누구를 호구로 보나..
"모집 공고에서는 분명 부산물이 아닌 마정석의 10%를 약속했을텐데요? 각.성.자. 등.급.에 상.관.없.이 마.정.석. 10프.로."
절로 날카로운 억양이 새어 나온다.
그는 오히려 자세를 고쳐 잡으며 답답하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누가 E급에게 마정석을 10%나 줍니까? 당신이 공고를 잘못 봤겠죠. 설사 공고가 그렇게 났다고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오타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공고를 보고 의아하긴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제가 따로 연락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쪽에서는 분명 마정석 10%를 약속했고요"
"그건 김지우씨 입장일 뿐입니다. 저희 길드 규정 상 공고는 즉시 삭제 처리가 되기 때문에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습니다"
증거인멸이라..
이 자식들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하다.
그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지 예상이라도 한다는 듯
무료한 표정으로 볼펜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의도대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후~ 알겠습니다. 대신, 던전을 공략한 후에 저는 따로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허위 매물에 걸려든 느낌이라 기분은 더럽지만,
내가 이번 던전 공략을 참석하게 된 것은 마정석 때문이 아니니 일단 참는다.
'던전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게이트가 생긴 이후 헌터 협회는 몇몇 위험한 던전을 진입하기 위해서 최소 인원을 규정했다.
[염화 이글투스 파편]도 그 중에 하나.
나는 평소 혼자 던전을 공략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오늘은 화염속성 룬을 얻기 위해 던전 입구에 와 있다.
"누구 마음대로 따로 행동한다는 거야? 오늘 짐꾼은 네가 맡아야하니 던전이 공략되면 뒷정리하고 우리를 따라서 부산물을 챙겨나오도록 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털보가 나서며 나에게 말했다.
F급이라면 또 모를까, 짐꾼이라니..
조건을 군말없이 받아들였더니 우습게 보였나보다.
"저는 짐꾼에 대한 언급은 듣지 못했습니다. 정 이렇게 나오신다면 오늘 공략에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오늘만 날은 아니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들과 굳이 던전을 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미련없이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유나가 돌아오는 날까지는 아직 일주일이 남았으니 그 전까지만 룬을 얻으면 문제없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다른 던전이나 돌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턱
누군가 내 어깨를 잡는 느낌에 고개를 돌려보니 털보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서는 노려보고 있다.
"지금 게이트 들어가겠다고 저기 준비하는 사람들 안 보여? 인원 수는 채워야 할 거 아냐!?"
그는 위협이라도 하려는 듯 과장되게 눈을 부라렸다. 강압적인 태도를 보니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불러낸 것 같다.
소란에 주변 헌터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대부분 한강길드에 소속된 자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나를 에워싸고 노려보고 있다.
"먼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그쪽입니다. 그리고 자꾸 이렇게 반말하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건데?"
털보는 내 어깨에 올려놓은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다.
어깨가 뻐근해진다.
근력을 보아하니 C급 정도 되려나?
나는 그를 향해 가소로운 듯한 시선을 보내고서는 어깨에 올려진 손을 잡아 그대로 우그러뜨렸다.
"엇? 으아아악"
"그쪽이 먼저 시작한겁니다"
민간인들 간의 법령에서 정당방위는 폭이 상당히 좁지만 헌터들의 경우 국회를 거쳐 정당방위의 폭이 넓어졌다.
이대로 손가락뼈를 부러뜨릴까 고민하고 있는 찰나
옆에서 손날이 날라오는게 보인다.
고개를 살짝 돌려 간단히 피한 나는 실프의 발걸음을 밟아 그의 좌우 옆구리를 번갈아 주먹으로 가격했다.
- 쩌엉
- 빠직
첫번째 소리는 방어 아티팩트가 있었는지 허공 위에 방어막이 깨지는 소리고, 두번째는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
"크아악! 자..잠시만"
한 손은 배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은 손바닥을 펼쳐 나에게 보인 그는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찌푸렸다.
"말도 안돼. 아리마의 빙결실드가 단 한방에 깨지다니"
[아리마의 빙결실드]는 일정시간 동안 총량 일만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아티팩트. 하지만 공격 단 한번에 깨져버렸다.
털보는 제일 뒤에 있는 황금빛 갑옷을 입은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보아하니 황금빛 갑옷을 입은자가 가장 직위가 높은 모양.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위에서 아래로 끄덕였다.
털보는 주변의 인원을 한번씩 둘러보고서는 손짓으로 공격을 명했다.
하.. 분위기를 보아하니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다.
조용히 던전이나 돌려고 했더니 귀찮게 됐다.
6대1의 상황.
검을 꺼내든 두 명이 앞서 돌진했다. 하지만 그들을 먼저 상대하는 건 하수.
나는 사뿐히 발걸음을 옮겨 유유히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고는 뒤에서 캐스팅을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의 주문을 막기 위해 빠르게 다가갔다.
엄호 하나 없이 뒤에서 홀로 주문을 외고 있는 마법사라니. 이거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창공의 영혼이여. 하늘의 푸른 기운을 이어담아 날카로운 바람이 되어 내 앞은 모든 적을...크아악"
순식간에 마법사에게 접근한 나는 그대로 그의 명치를 세게 가격했다. 주문를 외치던 마법사는 영창을 하던 도중 그대로 몸이 반으로 접혀 무너져 내렸다.
- 슈우욱
왼쪽 편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나는 얼굴로 날아드는 화살을 손으로 낚아채 왼쪽을 쳐다봤다.
"궁수라는 놈이 도대체 기본도 되어있지 않잖아?"
나무나 수풀에 은폐도 하지 않은 채, 평지 한가운데에서 나를 겨냥하고 있는 궁수. 아마 내 등급이 E급인데다 쪽수가 많아서 방심했겠지.
검을 든 자들이 방향을 틀어 다시 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농락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빨갛다.
나는 다시 그들을 피해 궁수에게 접근했고, 당황한 궁수는 나를 향해 연사를 날렸다.
지그재그로 움직여 화살을 피한 나는 자세를 낮춰 그의 허벅지에 화살을 내려 찍었다.
"으아악"
순식간에 두 명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 나는 남은 넷의 위치를 확인했다.
털보는 아직 엄살 중인 것 같고. 전투를 빨리 끝내려면 정령만한게 없지.
- 샐러맨더(Salamander)
화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화염 도마뱀이 공기 중에 나타났다. 도마뱀이라고 하기에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녀석은 내 주변을 휘적거리며 열기를 내뿜었다.
아직 화염 룬을 얻기 전이라 풍산개만하지만 승급을 하게 된다면 사자만큼 덩치를 불릴 터.
나는 샐러맨더에게 머릿속으로 공격을 명했다.
샐러맨더는 눈 앞에 검을 든 남자 두 명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고, 녀석이 지나간 자리는 아지렁이처럼 일렁였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볼까?"
나는 황금빛 갑옷을 입은 자를 향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갑옷을 입은 자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털보에게 물었다.
"말도 안돼.. 저자식 등급 정확히 확인한게 맞아? 무슨 E급 각성자가 중급 정령을 소환해?"
"전산상으로도 확인했고 현장에서도 분명히 손등을 확인했습니다"
"말이 안되잖아! 이런 개자식들..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거야?"
E급이면 헐값에 짐꾼노릇까지 해도 된다는건가.
내가 실력이 없었다면 노동력을 저들에게 쪽쪽 빨렸겠군.
뒤를 쓰윽 돌아보니 이미 샐러맨더는 두 명을 처리하고 내 옆으로 돌아왔다.
"계속할겁니까? 그러게 별 것도 아닌일을 왜 이렇게까지 키웁니까"
"크윽.. 여태껏 한강 길드를 건드리고 무사한 자는 없었다. 이 일을 조용히 덮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나?"
한강길드는 B급 3명과 C급 20명을 포함한 100여명의 헌터를 보유한 중대형 길드로 게이트가 형성된 직후 개설된 전통있는 길드다.
한강길드라.. 성가시긴 하겠지만 두려울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에는 찝찝하다.
'죽여야 하나..'
살인멸구를 생각하자 잠시 내 두 눈에 살기가 비쳤다.
그들은 몸을 흠짓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긴 성장의 탑이 아니다. 지구로 돌아온 이상 무분별하게 살인을 할 수는 없었다.
[염화 이글투스의 파편]에 지원한 것 또한 전산에 기록되었을 터.
머리가 차갑게 식은 나는 황금빛 갑옷을 입은 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선 그의 목을 잡으려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내 손을 막으려 양팔을 허우적대지만 아수라의 여덟 팔도 나의 금나수를 벗어나지는 못했었다.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아 목덜미를 잡힌 그는 고통스러운지 꺽꺽 소리를 냈다.
"한강길드라.. 자신있으면 건드려 봐. 하지만 이건 알아둬야 할거야"
- 꽈악
나는 쥐고 있던 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나직히 읊었다.
"창공의 주인이자 날카로운 바람의 지배자여, 내 부름에 답하라. 실드라드"
순간, 화악 - 하는 소리와 함께 펼쳐진 드넓은 날개. 은색 눈동자와 깃털을 가진 거대한 새 모양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를 본 한강길드의 길드원들은 얼굴이 새파라지며 몸을 한차례 떨었다.
그리고 나는 왼손을 흩뿌리며 실드라드에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쿠콰과과광
이윽고 굉음과 함께 깊게 파인 수십개의 구멍.
바지 가운데가 살짝 젖은 그를 향해 나는 눈을 매섭게 뜨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조용히 덮는게 좋을거야. 만약 나를 다시 보게 된다면 절대 좋은 꼴은 못볼테니"
나는 이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피곤하군'
사람들은 항상 급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명문대, 지방대, 전문대.
부자, 중산층, 서민.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민간인들도 자기보다 약하다 싶으면 이빨을 드러내는데, 약육강식인 각성자들은 얼마나 심할까.
E급과 F급 각성자의 다른 이름은 이스케이퍼(Escaper). 즉, 도망자라는 뜻이다.
각성자라 하면 C급만 해도 대우받는 세상이지만 E급 이하는 어디가서 각성자라 하기도 부끄럽다.
능력은 SSS급이지만 나에게 붙은 딱지는 E급.
마치 머리는 서울대를 갈 정도로 좋지만 모종의 이유로 전문대를 졸업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천재랄까.
'빌어먹을 튜토리얼..'
<튜토리얼로 소환되다>
- 쨍그랑
소주잔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치워야 하나?'
평소였으면 깨진 소주잔을 얼른 주워 들었겠지만,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어차피 술 한병 비울 시간이면 이 자리에 누가 앉아있었는지 기억도 못할 작은 소란.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자 소소한 술자리이겠지만 오늘은 나에게 모든 희망이 사라진 아주 특별한 날이다.
내 나이 28세. 고시생이다.
올해 1월 나는 결심했다. 이번 시험을 마지막으로 지난 8년간의 고시공부를 마치기로.
무슨 자신감이였을까.
2년이면 합격할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공부.
2년차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일년을 더 준비했다.
3년차에는 2점차이로 떨어져 일년을 더 준비했다.
4년차부터는 그냥 집착이었던 것 같다.
5년차가 넘어가니 지금 이 길 말고는 갈 곳이 없는 것 같아 공부를 계속했다.
그렇게 내 인생의 8년이 허름한 고시원에서 흘렀다.
합격 한번이면 이 모든 것이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불합격.. 이변은 없었다.
술집에서 나온 나는 아무 벤치나 잡고 누웠다.
'이대로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 기억도 고통도 없이'
졸린건지 취한건지, 감기기 시작한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파지지직
그때 갑자기 공간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내 주변으로 검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튜토리얼에 입장하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
'여긴 어디지. 꿈인가?'
빌딩 높이의 커다란 나무와 괴상한 동식물들. 하늘에는 대낮임에도 커다란 달이 세 개나 떠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지대가 높은 곳인지 공기가 무겁고 내 발 밑은 낭떠러지였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한데..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프다.
꿈이 아니라면 내가 미친건가.
- 띠링
머리 속을 파고드는 음성. 뇌를 통해 직관적으로 전해지는 내용은 질문은 필요없다는 듯 일방적으로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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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아 이 곳 튜토리얼로 초대되었습니다.
앞으로 3년 뒤, 지구에서는 게이트가 열릴 것이며 몬스터들과 맞서 싸울 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여러분을 소환했습니다.
당신은 고유능력을 각성할 수 있는 씨앗을 가진 자.
튜토리얼에서 어떤 싸움을 겪는가에 따라 그 능력이 발아될 것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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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몬스터가 소환됩니다]
"게이트라니 무슨 소리지. 몬스터라면 영화에 나오는 괴물을 말하는 건가?"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 술먹다 이게 무슨일이람.
몸 상태는 멀쩡하지만 정신은 아직도 술기운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다.
운도 지지리도 없다. 그냥 눈감고 편안하게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아, 혹시 여기가 지옥인건가.
곧 몬스터가 소환된다고 하니 나는 일단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다급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주변에 그 흔한 돌맹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 저기 끝으로 가서 돌 부스러기라도 줍자. 분명 날카로운게 있을거야"
저 멀리 절벽 끝쪽에 주먹만한 돌부리가 보인다.
근데 저쪽으로 가기에는 길이 너무 좁은데..
"에라 모르겠다. 늦기전에 빨리 다녀오자!"
서둘러 절벽 끝으로 올라간 나는 돌부리를 캐기위해 끙끙대며 힘을 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단단하게 박혀있는지 잘 뽑히지 않는다.
[몬스터가 소환되었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아니,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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