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타워와 던전이 생겨났다.
지구 곳곳에 거대한 검은 탑이 솟아났고 동시에 던전이 생성되었다.
각성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타워와 던전의 존재 이유를.
타워를 공략해서 강해지고, 던전을 클리어해서 돈을 벌 수 있었다.
타워의 상층부로 올라가지 못하면 새로운 던전이 나타나지 않는다.
던전에서 돈을 벌지 못하면 상층부로 올라가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정부와 기업이 나섰다.
관리국과 KHA, 헌터협회가 설립되었다.
헌터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졌고 많은 부를 쌓았다.
다만 공권력을 거스르진 못했다.
타워와 던전에서 나오면 힘을 잃으니.
또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선 정부와 기업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2025년 현재.
타워와 던전은 지구 곳곳에 건재했다.
사회가 바뀌었다.
헌터의, 헌터에 의한, 헌터를 위한 사회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르진 못했다.
타워와 던전에서 나오는 자원은 사회의 원동력이 되었다.
저명한 학자가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제 5차 산업혁명이 머지않았다고.
헌터들은 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
.
.
“···”
유지하는 오래된 폰을 다시 들여다봤다.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집주인입니다. 사정은 알겠는데 나도 낙찰 받은 입장입니다. 보증금은 뭐 알아서 받아내시고 한 달 뒤까지 집 비워주세요. 무슨 일 있으면 문자 주고요」
전세사기를 당했다.
집값이 떨어지자 전 집주인이 파산했다.
집이 경매에 붙여졌고 낙찰금 대부분은 세금과 대출금 반환에 들어갔다.
졸지에 보증금을 떼먹힐 위기였다.
전 집주인은 수소문을 해봐도 오리무중.
경찰에 신고했지만 기다리라고만 할 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인생 진짜 왜 이러냐.”
그는 짐꾼이었다.
일 자체는 간단했다.
헌터 대신 짐을 실어 나르고 허드렛일을 도맡는다.
다만 위험하고 보상이 짰다.
대체제가 넘치니 어쩔 수 없는 일.
지하는 그렇게 일해서 먹고 살았다.
이른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비극이라니.
‘이제 어쩌지?’
좌절감이 닥쳐왔다.
보증금은 5년 동안 일한 결실이었다.
그것이 깡그리 날아가게 생겼다.
‘빌라라서 보험도 없고···1순위도 아니고···’
한 달 뒤에는 나가야 한다.
어디로?
서울에 그의 집은 없었다.
15년 전 타워 사태 때 가족이 사망했다.
짐꾼으로나마 밥벌이는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다니.
‘···’
문득 창밖을 내려다봤다.
4층이라서 떨어져도 죽을 것 같진 않았다.
치료비도 못 내고 끙끙 앓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리 쉽게 죽는 게 아니기에.
지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일어서자, 다시 시작하자.’
고시원에 들어가면 연명은 가능했다.
밥과 김치, 라면만 먹어도 일은 할 수 있었다.
대신 부족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를 대신할 짐꾼들은 차고 넘쳤기에.
창가에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저 멀리 타워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그의 육체도 빛났다.
각성의 순간이었다.
“드디어, 헌터···!”
헌터와 짐꾼의 대우는 천지차이다.
소속부터 달랐고 각종 지원과 식사까지 모든 게 차별화되었다.
보수는 말할 것도 없겠지.
이해는 한다.
헌터는 고급인력이고 짐꾼은 아니니까.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니까.
그럼에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늘 헌터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이제야 현실로 다가왔다.
‘일단 진정하자.’
헌터계엔 특성이 다라는 소리가 있다.
특성이 수저를 결정짓는다는 뜻.
노력으로 수저를 바꿀 순 있지만 한계는 엄연했다.
S클래스 헌터 대부분은 특성수저였다.
“시스템.”
「코드 : 1113975」
「레벨 : 0」
「감응력 : 108」
「포인트 : 0」
「등급 : ―」
「특성 : 아공간」
「스킬 : ―」
「효과 : ―」
헌터가 110만 명이라니 많기도 하지.
세계적으로 따진 거라서 한국 소속은 얼마 되지 않는다.
1-2만 정도?
감응력은···이게 맞나?
보통 헌터들 감응력이 20~30 정도인 걸로 알아는데.
표기가 잘못 됐나 싶을 정도로 높았다.
특성도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공간이란 게 있었나···?”
설마 전세사기를 당했다고 이런 특성이?
효과는 어떨까.
특성에 시야를 집중하자 설명이 떴다.
「아공간 특성 : 아스테라에 아공간을 확보합니다. 포인트를 투자해 게이트 크기와 면적 등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가능한 명령어 : 게이트 개방, 게이트 폐쇄, 아공간 확장」
아스테라는 타워와 던전의 배경이다.
흔히 말하는 이계.
거기에 아공간을 가질 수 있다니 일단 기쁘긴 한데.
“게이트 개방.”
푸른 게이트가 열렸다.
지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
‘내가 게이트를 소환한 건가?’
게이트는 던전의 입구다.
난이도와 규모에 따라 크기가 약간씩 다르며 정부 혹은 기업이 통제한다.
따라서 개인 소유의 게이트란 건 있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는 소리.
‘이게 내 게이트란 말이지.’
안에 들어가면 아공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게이트로 걸음을 내딛었다.
.
.
.
게이트 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울창한 숲 안의 공터.
저택과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저 앞에 자리했다.
나무와 식물은 생소한 것들이었다.
‘설마 여기 전부가 내 땅이란 소린가?’
이렇게 기쁠 수가 있나.
건물로 걸어가는데 텅 소리가 났다.
투명한 벽.
‘그러면 그렇지.’
걸어서 넓이를 확인하니 10평 정도였다.
밖은 그냥 구경만 가능했다.
‘포인트로 땅을 넓힐 수 있다 이거지.’
한 번만 넓히면 저택까지 닿을 것 같지만.
당장은 가진 포인트가 없었다.
‘던전에 들어가서 구해야 하나···’
포인트는 주로 타워와 던전의 보상으로 나온다.
주 용도는 상점에서의 아이템 구입.
유용한 아이템이 많아서 헌터들은 악착같이 긁어모으려 애썼다.
정부나 기업에서도 가능한 비축하려 했고.
덕분에 포인트의 가치는 나날이 높아지기만 했다.
‘수요는 계속 오르는데 공급이 제한되어 있으니···’
짐꾼은 꿈도 꿀 수 없는 귀중한 재화.
그러나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 게이트를 던전 안에서 열 수 있다면?
‘안전하게 짐을 보관할 수 있어.’
헌터들이 짐꾼을 대동하는 이유.
타워나 던전에 반입할 수 있는 짐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복과 무기 1,2개, 배낭 하나.
이래서는 아이템이며 물자를 전부 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짐꾼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든 보상을 포기한 채 짐을 나른다.
들어가서도 각종 고된 일을 도맡는다.
짐꾼으로 남자가 선호되는 이유.
힘이 세고 체력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던전 안에서 이 게이트를 열 수 있다면? 이곳을 창고로 쓸 수 있다면?’
아공간 특성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10평은 땅 자체만 보면 그리 넓진 않다.
그러나 창고로 쓴다면 상당한 넓이였다.
던전 안에서 쏟아지는 아이템이며 물자를 싹 쓸어서 가지고 나올 수 있다면.
짐꾼이라도 헌터들에게 할 말이 생긴다.
‘오히려 내가 갑이 될 수도···’
침착하자.
겁 없이 나대다간 두들겨 맞는 수가 있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
정부는 헌터들의 범죄에 눈을 감는다.
살인 같은 중범죄가 아니라면.
지하는 집으로 돌아왔다.
‘기한은 한 달.’
그 안에 집을 구할 돈과 포인트를 마련해야 한다.
헌터넷에 접속해 일거리를 찾았다.
헌터들은 글도 쓸 수 있고 개인 페이지도 있다.
잘나가는 헌터는 접속하면 무수한 인사에 환영을 받는다.
거의 셀럽 수준.
그에 반해 짐꾼은 구인 게시판에 댓글만 달 수 있다.
유형도 몇 개뿐이라 불만 같은 건 쏟아낼 수가 없는 구조.
스크롤을 굴릴 때마다 글 몇 개가 완료된 채 넘어갔다.
던전의 숫자는 제한적이고 짐꾼은 많다.
필사의 경쟁이 펼쳐질 수밖에.
마침 글 하나가 새로 떴다.
―강남 던전. 규모 C등급 난이도 C등급. 80kg이상. 시간엄수. 적극적인 자세. 보수 당일지급. 수당지급.
ㄴ지원합니다.
ㄴ지원합니다.
ㄴ열심히 하겠습니다!
운 좋게도 지하의 댓글이 선택되었다.
잠시 후 통보가 왔다.
내용은 매우 고압적.
분 단위로 시간을 체크하며 등짐 80kg은 최소이고 그 이상도 짊어져야 했다.
적극적인 자세란 전투 이외의 모든 허드렛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식사도, 잠자리도 헌터들과는 구분된다.
거의 양반과 노비 수준.
허나 이 업계가 원래 그렇다.
억울하면 헌터가 되라는 게 기본 스탠스.
‘그래서 헌터가 되긴 했는데···’
선택의 시간.
1. 헌터 드래프트에 참여해서 모든 것을 까고 검사받는다.
2. 짐꾼으로 일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아공간은 전투 특성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깠다간 휘둘릴 우려가 있었다.
‘호구 취급 받기 딱이지.’
레벨이 낮으면, 힘이 없으면 휘둘린다.
지금은 내실을 챙길 때.
‘내가 알아서 하는 편이 낫겠어.’
고생이야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자.
다음날, 지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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